10화
마음에 안 드는 놈.
마운드의 투수를 보며 도노반은 그렇게 생각했다.
못해서는 아니다.
지금까지 정말 못했고, 뭔가 보는 맛조차 없었기에 참 싫었지만, 그와 달리 오늘은 지난번에 봤던 것처럼 대단히 잘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어째서 마음에 안 드느냐고 묻는다면···
“잘만하는구만!”
“휘이이이익! 최고다!”
“삼진 하나 더 가자! 싹 쓸어버려!”
저 투수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옆에 앉은 친구가 문제였다.
‘평소에 심장 안 좋다면서 골골대던 놈이···’
경기 초반에 자신이 투수에게 했던 혹평 비꼬는 걸까?
평소에는 야구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놈이 아주 난리를, 아니 난동을 부리고 있다.
휘파람을 분다거나, 박수를 친다거나. 환호성을 지르거나, 그야말로 각양각색의 방법으로 말이다.
마치 도노반 자신에게 보란 듯이.
“도노반 네가 그래서 안 되는 거야.”
“아니, 어떻게 그 나이 먹고도 사람보는 눈이 없어?”
“그러니까 앞으로 사람한테 편견 가지지 말고···”
이제는 아주 설교까지 늘어놓는데. 친구의 얼굴 가득 피어난 미소가 참 엿같이 느껴졌다.
가장 엿 같은 건 그런 친구에게 도노반 자신은 변변찮은 반박조차 못 한다는 것이고.
‘제기랄, 오늘은 왜 이렇게 잘하는 거야?’
무슨 반박을 하겠어.
그렇게 열심히 깠던 투수가 경기를 지배하고 있는데. 그냥 조용히 있어야지.
경기 시작할 때 자신에게 윙크하는 거 보고, 실력도 안 좋은 놈이 정신머리도 이상해졌구나 싶었는데. 막상 경기 들어가니까, 다른 의미로 미친놈처럼 굴었다.
“···오늘은 운이 좋네. 그리고 네가 몰라서 그렇지 미션스는 원래 잘 못 해. 리그 꼴찌라고. 그것도 감안해야지.”
“뭐라고? 투수 보는 눈 없는 놈 말은 잘 안 들려서 말이야. 보청기 낄 테니까, 어디 다시 한번 말해봐.”
간신히 비명을 토해내듯 반발해봤지만, 돌아온 건 자기가 무슨 헐크 호건이라도 되는 듯이, 때가 잔뜩 낀 귀를 들이미는 친구의 비아냥이었다.
부글부글 끓는 속을 진정시키려, 간호사인 며느리가 그토록 자제하라 말했던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지만, 그럼에도 울화는 꺼지지 않았다.
“스트라이크 아웃!”
“와아아아아!”
이 모든 상황의 원흉인 투수놈은 대체 지금까지 자신이 봐왔던 건 다 뭐였는지, 더럽게 잘하고 있다.
6회 초가 시작하자 또다시 올라가는 삼진. 그걸 보니 더 억울했다.
‘진작 좀 그렇게 할 것이지! 내가 니 경기를 몇 번을 봤는데! 왜 갑자기 잘하고 염병이야!’
나는 저놈 경기를 쭉 봐왔고, 처음에는 기대도 했었다.
내 도시를 연고지로 한 팀에 새로운 투수가 등장한 건 항상 설레는 일이니까.
허나 그런 기대와는 다르게 아주 처참하게 털렸고. 그로 인해 락하운즈가 패배하는 모습을 숱하게 봤다.
그 꼴을 보며 홀로 삭였던 분노가 얼마인가?
그런데 정작 야구장이 오늘 두 번째인 친구 놈은 쭉 행복야구만 즐기고 있다.
저 이름처럼 Suck같은 놈은 갑자기 훨훨 날아다니고 있고.
그에 대한 박탈감 때문에라도 저 투수놈이 더욱 밉게만 느껴졌다.
“오··· 오오! 그렇-”
‘지··· 삼진을 쉽게 잡기는 하네. 브레이킹볼이 대단해.’
허나 우습게도 도노반의 입꼬리는 그런 주인의 마음과 상관없이 열심히 씰룩였다.
또다시 삼진.
두 타자 연속 삼진에 흥을 참지 못한 입술은 저절로 벌어졌고. 삼진을 올리는 서클 체인지업에 토해내진 환호성을 간신히 씹어 삼켰다.
“응? 도노반 너 지금 소리친 거야? 그래, 도노반 너도 이만 아집 좀 꺾고 평소처럼 응원하라니까. 솔직히 좋잖아? 네가 딱 좋아하는 타입인데.”
“으음···”
“스트라이크!”
“오, 또 삼진 가겠는데? 하하하, 젊은 친구가 아주 야구를 제대로 할 줄 아네. 그래, 구속이 무슨 상관이야? 타자만 잘 잡으면 되지!”
그래, 인정한다.
솔직히 좋기는 하다.
엄청나게 좋다.
타자들을 농락하듯 손쉽게 삼진을 쭉쭉 올려대는데.
타자의 홈런보다 투수의 삼진을 좋아하는 도노반에겐 더할나위 없이 완벽한 플레이고, 완벽한 경기다.
그래서인지 입꼬리가 사정없이 요동쳤지만··· 그럼에도 그는 다시 꾹꾹 내리찍으며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저 투수는 못하는 놈이다.
이건 일시적인 폼이다.
그래야만 했다.
혹시라도 저 녀석이 계속 잘한다면, 그래서 메이저리거도 된다면···
“그렇지! 스트라이크 하나 더 캬~ 역시 누구랑 다르게 사람 보는 눈이 좋은 내가 찍은 투수다워! KKK 가자!”
우리 둘 중 누구 하나 먼저 죽든지, 아니면 저 투수가 은퇴하든지 하기 전에는.
옆의 이 망종 놈의 놀림을 계속해서 들어야 할 테니까.
‘염병할··· 우리가 이기고 있는데도 기분이 X같구만.’
혹시 모르는 미래를 가정하는 것만으로 눈앞이 컴컴해졌다.
이걸, 이 지랄을 앞으로 평생 봐야 한다고?
평생? 그건 절대로 안 될 일인데···
일어나서는 안 되는 악몽인데.
“그렇지! X부랄거, 타자는 그렇게 잡아야지! 이제야 좀 마음에 드네!”
이닝 마지막 타자마저 시원하게 삼구삼진으로 돌려세운 투수에 결국 이번에는 환호성을 참지 못했다.
세 타자 연속 삼진.
화끈한 피칭에 도노반은 새로 따려던 맥주캔을 왼손에 쥔 채로 팔을 붕붕 휘저었고.
그의 갑작스런 급발진에 도노반의 친우는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 어차피 이렇게 좋아할 거면서, 지금까진 왜 참았던 거야?
마누라보다도 훨씬 더 긴 시간을 함께했던 친구지만, 저 쇠고집은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 이게 MotherF- Baseball이지! Hell Yeah!”
아주 극찬까지 내뱉는 도노반의 모습에 흐뭇한 표정으로 코밑을 훔친 친구 역시 함께 양팔을 들어 올렸고. 그것이 주변으로 전염된 건지, 그들 주변에 있던 관중들이 비슷한 모습으로 소리쳤다.
“최고다! X나게 쩔어줬어!”
“넌 무조건 메이저야! 나중에 레인저스로 와라! 그 X같은 거지구단 버리고, 영원히 텍사스의 히어로가 되라고!”
“경기 끝나고 펜 하나 준비해놔! 내가 가보로 남겨놓을 테니까!”
결국 그 열기가 그라운드로 전해진 건지, 이닝을 마치고 터덜터덜 덕아웃에 돌아가던 고유석이 슬쩍 엄지를 추켜세웠고.
“저 자식 저거 이제보니 쇼맨십도 아주 훌륭하네! 그래! 투수가 그런 맛이 있어야지! 크핳하핳핳! 아주 마음에 들어!”
그에 도노반은 다시금 괴성을 지르는 것으로 대답했다.
그렇게 서서히 고유석의 팬들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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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받은 기분이네.’
날 지독히도 싫어하던 영감님이 저 멀리서 소리치고 있다.
아주 잘하고 있다면서.
욕 비스무리한 것도 내뱉은 것 같은데,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서 소리치는 걸 보니, 괜히 내 기분 더 좋아졌다.
원래, 처음부터 나를 좋아했던 사람보다, 싫어하던 사람한테 인정받는 게 조금 더 크게 와닿는 법.
기분이 좋아져서 따봉을 날렸더니, 데시벨이 더 높아졌고. 그런 광기어린 감정을 진득하게 느끼며 다시 벤치로 돌아왔다.
“···”
다들 왜 이래?
평소라면 조금 시끄러운 덕아웃 안이 고요했다. 뒤따라 들어오던 야수들도 조용하고.
‘뭐, 잘하는 거 처음 봐?’
사실 놀랄만 하기는 하지.
미친 듯이 삼진을 잡아대는데 안 놀라면 오히려 비정상이긴 하겠다.
허나 그런 반응과는 별개로 나는 여전히 만족스럽지가 않았기에, 곧바로 다음 이닝을 생각했다.
7회부터는 다시 2번타자부터 시작된다. 서클 체인지업을 많이 보여줬으니. 슬슬 슬라이더 비중을 좀 높여야겠네.
‘미션스 애들은 선구안이 안 좋으니까, 우타자들 상대로도 제구만 잘하면 슬라이더로 충분히 카운트 잡을만 할 거야. 그러면-’
홀로 다음 이닝을 계획하며 멍하니 벤치에 앉아 있는데. 누군가 앞으로 다가온 건지, 눈앞에 그림자가 졌다.
“아, 코치. 왜요? 마침 잘 오셨네. 다음 이닝부터는 슬라이더를 조금 더-”
존 와스딘.
이제는 존경해 마지않는 우리의 투수코치님.
마침 잘 됐다 싶어서 내 생각을 말했는데. 코치는 고개를 저었다.
“Go, 오늘 경기는 이번 이닝까지만 하자.”
“예? 저 아직 쌩쌩한데. 투구수도 이제 한 80개 정도지 않아요? 그러지 말고 한 이닝만 더 줘요.”
이 양반은 또 왜 이래?
아직 쌩쌩하구만.
투구수를 계산하면 아직 1이닝은 넉넉하게 더 막을 수 있다.
그렇기에 씨익 웃으며 거뜬하다는 듯이 어깨를 돌렸는데. 어라?
“이제 좀 알겠어?”
“어··· 왜 이렇게 무겁지. 아직 맥시멈까지 한참 남았는데.”
“Go, 너 지금까지 전력투구한 개수가 몇 개야? 전체 투구수 중에서.”
전력투구? 그야···
‘4회부터 쭉··· 했지.’
이제야 깨달았다.
지금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어쩐지 타자들이 쉽게 잡히더라. 내내 전력으로 던졌으니···’
다시 찾은 마이 프레셔스, 선발 자리를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욕망으로 재무장한 이후.
4회 초부터 방금 전의 6회 초까지 3이닝, 한 타순이 도는 동안 아홉 타자를 상대로 잡은 삼진만 여섯 개를 잡았다.
제아무리 미션스의 타선이 약하다고 해도, 정상적인 페이스는 아니지.
‘말 그대로 정신 놓고 던졌네.’
뒤늦게나마 자각하니, 이제야 느껴졌다, 어깨가 물먹은 솜처럼 무겁다는 것을.
보통 완투 정도는 해야 이런데. 벌써부터 이렇다는 건, 심하게 과부하를 줬다는 거겠지.
“교체, 불만 없지?”
“네. 없습니다.”
“오늘도 잘했어. 지난번에도 잘했고. 그러니까 너무 무리하지 마. 네 자리 누가 안 뺏어가니까. 조급하게 굴지 말자, 알았지?”
귀신이네.
이래서 코치를 하는 건가?
정확하게 심리를 꿰뚫어 봤다.
뭔가 나쁜 짓 하다가 걸린 기분이라 멋쩍게 웃자, 다 이해한다는 듯 존 와스딘 역시 피식 웃었고. 그것으로 오늘 경기의 피칭이 막을 내렸다.
여전히 조금 아쉬웠지만. 코치의 말처럼 조급하게 굴지 않았다.
이만하면 무력시위는 확실히 됐을 테니. 그걸로 만족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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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겠다. 왜 이렇게 힘드냐.’
하루가 지나니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어제 내가 심하게 무리했다는 걸.
어깨는 신경이 잘려나간 것처럼 둔했고, 뻐근했다.
‘내가 미쳤지··· 선발 욕심에 눈깔이 돌아가지고, 그런 개짓거리를...’
불펜이나 마무리면 몰라도.
선발투수는 그러면 안 된다.
팀을 위해 긴 이닝을 책임지는 게 선발투수인데, 갑자기 지혼자 흥분해서 체력분배 생각 안하고 마구잡이로 던져대면, 그것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직무유기니까.
그에 대한 죄악을 몸으로서 징벌받은 나는 어제의 폭주를 진심으로 반성하며, 간신히 옷만 챙겨 입고서 클럽하우스로 향했다.
선발등판한 다음날은 늘어지게 쉬는 투수들도 있기는 한데.
나는 주로 스트레칭을 한다.
그냥 막 퍼질러져 있는 것보다 오히려 나은 것 같아서.
어디까지나 내 방식이지만, 나한테 잘 맞으니. 계속 유지하는 거지.
‘그나저나, 왈터는 언제 복귀하는 거지? 막상 또 얼굴 볼 생각하니 좀 찝찝하긴 하네.’
산보하듯 클럽하우스로 향하다가, 문득 코리 왈터의 얼굴이 떠올랐다.
남의 자리 깔고 앉은 건 참 미안한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다시 비켜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원래도 서로 개소닭보듯이 했지만, 아마 사이가 더 나빠지면 나빠졌지, 좋아질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그래도 요 몇 경기 제대로 보여줬으니까. 그나마 다행이긴 하네. 어차피 나빠질 사이, 내가 조금이라도 더 앞서나가는 게 좋은 거지.’
누군가 내 속마음을 안 다면 후안무치한 놈이라고 욕할 수도 있겠만, 그럼 뭐 어떡해?
난 불펜하기 싫고, 걔도 불펜하기 싫으니, 어차피 자리 놓고 싸울 거. 기왕이면 확실하게 마음가짐을 가지는 게 낫지.
찝찝함을 털어내며 뻔뻔하게 클럽하우스로 입장했는데. 음··· 이건 예상치 못했다.
“Suck, 왔어? 좀 더 쉬지 그랬어, 어제 많이 힘들어 보이더만.”
“그래도 어제는 네가 그 망할 알람 꺼놓은 덕분에 푹 잤어. 그런데···”
들어가니, 다니엘 고셋이 반겨주는데, 내가 어딘가를 보며 말을 흐리자, 피식 웃는다.
“오~ 벌써 신경전 하는 거야? 예전에는 왈터만 보면 지레 기가 죽더니. 확실히 성적이 중요하긴 하네, 아주 사람이 달라졌어.”
“누가 기죽었다고··· 근데, 생각보다 일찍 합류했네?”
“빨리 털고 일어나야지.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그러더니 킬킬 웃는 고셋.
그 웃음소리에 저쪽도 나를 알아차린 건지, 서로 눈을 마주쳤다.
‘어우, 마음의 준비도 안 했는데 갑자기 눈 마주치니까, 뭔가 좀 그렇네.’
코리 왈터, 내 앞날을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하게 목을 따야하는 녀석.
하필이면 딱 마주쳤네.
“아, Suck. 말은 많이 들었어. 나 없는 동안 엄청 잘했다며? 대단하네.”
잠깐의 적막. 그것을 먼저 깬 것은 코리 왈터였다. 피식 웃은 녀석은 짐짓 아량넓은 척하며 날 칭찬했지만···
‘착한 척 하고 싶으면, 먼저 그 눈까리부터 갈아 끼우고 연기해라. 눈동자에 X같다고 대놓고 쓰여 있구만.’
두 눈에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가득했다.
아마 속이 부글부글 끓겠지.
지 딴에는 제일 안전한 놈이 대신 맡아줬다는 생각에 편하게 쉬다가 왔을 텐데.
막상 까놓고 보니까, 그 안전한 보험같은 놈이 자기 모가지에 칼을 들이민 거니까.
“나 없는 동안 빈 자리 채우느라 수고했어.”
이 봐라, 이 봐.
우위에 서겠다는 듯이, 마치 자기가 윗사람인 것처럼 구네.
이래서 공 빠른 놈들이랑은 상종하면 안 되는 거야.
지보다 구속이 10마일, 아니 5마일만 낮아도 아주 봉으로 보거든.
그래, 편견이다.
구속에 비례해서 싸가지가 사라진다니. 그럴 리가 없잖아.
그냥 내 뒤틀린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편견인데. 이번에는 그 편견이 얼추 운 좋게 맞아떨어진 것 같다.
“어, 그래 고맙다. 앞으로도 계속 수고할게.”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정말 인간적으로 축하해줬다거나, 선의의 경쟁을 하자며 다가왔다면 기분이 찝찝했을 텐데. 먼저 쪼잔하게 굴어주니, 오히려 양심의 가책이 덜어졌으니까.
‘진짜 무서운 건 이런 게 아니라, 빠르게 상황 파악하고. 파악한 걸 인정하고. 그리고 차근차근 준비하는 놈이지. 이런 타입이 아니라.’
한편으론 조금 새롭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말 높게 보였었는데 말이야.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구속을 가진 녀석이니까.
그런데 이제 보니, 어제의 노력이 너무 과한 거였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처럼 과하게 집착하고, 그로 인해 억지로 무리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제낄만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