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7화 (7/316)

7화

“아웃!”

1번타자는 손쉽게 잡았다.

서클의 충격 때문인지, 곧이어 던진 2구에 허둥지둥 배트를 내밀다가 그대로 3루수 땅볼로 아웃. 2구만에 리드오프를 잡았으니, 가성비 있는 피칭인데···

‘무슨 놈의 최종보스가 이렇게 빨리 나와.’

문제는 그다음 놈이다.

그토록 고대했던 녀석이 벌써 타석에 올라왔으니까.

‘알렉스 브레그먼.’

경기 전부터 계속 걱정하고, 고민했던 요주의 상대.

겉모습은 참 작다.

프로필 상으로 딱 6피트. 183cm인데, 사실 그보다도 더 작아 보인다.

당장 똑같은 6피트인 앤디랑 비교해도 약간 모자라니까.

‘저 키 때문에 존도 좀 짧아지지. 그나마 지금은 제구력이 좋으니까. 괜찮겠지만···’

거를까? 솔깃한 목소리가 귓구멍에 들려왔다.

마음 같아선 거르고 싶다.

쟤만 거르면 이번 경기 참 편하게 할 수 있을 테니까.

허나···

‘그래서 타선 배치를 이렇게 했구만.’

뒤에 놈이 문제다.

3번타자 데릭 피셔.

내가 브레그먼에 너무 집중해서 그렇지, 저 자식도 충분히 미친놈이다.

쟤도 OPS가 9할이 넘거든.

‘미친놈들 천지네. 이러니 우리가 시리즈 내내 발렸지.’

애스트로스 농사 잘 지었네.

팜에 괴물 같은 놈들이 줄줄이 있는 걸 보면.

‘그래도 얘네 둘만 넘어가면, 나머진 그나마 좀 순탄하니까.’

잡념을 떨치려 길게 숨을 뱉으며 앤디를 봤고, 준비했던 무기를 쓸 거냐고 묻는데.

얘는 진짜 돌대가린가? 그걸 지금 왜 써. 바로 홈런 맞을 텐데.

‘최대한 참았다가 써야지. 저 대단한 놈의 눈에, 내 피칭이 콱 박힌 다음에.’

고개를 저으니 다시 정상적인 볼배합을 요구하는데, 앤디 녀석의 것은 아니고, 벤치의 오더겠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나는 흥미로운 듯 바라보는 준비 자세를 잡고서 브레그먼과 시선을 맞췄다.

아까 걔도 그렇고, 얘도 그렇고. 훅스 새끼들은 왜 이렇게 사람을 야리나 모르겠네.

그러면 쫄 거라고 생각하나?

코웃음 치며 던진 초구.

“스트라이크!”

바깥쪽 살짝 높은 포심으로. 구속은 89mp/h가 찍혔다.

내 최고구속이다.

다른 투수들은 힘 빼고 던진 수준이겠지만. 나한테는 전력투구지.

초장부터 힘을 빡 넣는 것도 좀 그렇지만, 어쩌겠어. 저 자식 상대로 여유 가졌다가는, 바로 얻어맞을 텐데.

‘바깥쪽 라인은 대충 이 정도. 생각보다 넓게 잡네? 타자들 죽어나겠구만.’

살짝 뺐는데도 심판이 카운트를 잡아줬다. 생각보다 넓은데, 소소하게 이득이네.

뭐, 존이 넓을수록 우리 팀 타자들도 죽어나겠지만, 뭔 상관이야? 일단 나부터 살고 봐야지.

‘낮게 하나 깔아볼까?’

손안에서 공을 굴렸다.

첫 타석은 일단 잡고 가야한다. 단, 최대한 머릿속에 내 공이 남도록 만들어야 하고.

조금씩 밑밥을 깔아놓는 거지. 나중에 탁- 낚일 수밖에 없도록.

“볼.”

이번에도 포심.

몸쪽으로 낮게 깔아봤는데, 손도 대지 않는다. 애초에 워낙 확실하게 볼인 코스기도 하고.

어차피 나도 이걸로 스트라이크 잡을 생각은 없었다.

‘원 앤 원. 살포시 하나 더.’

목표는 이번에도 바깥쪽.

굳이 잘 잡아주는데, 다른 곳으로 던질 이유는 없다.

길게 와인드업하며 공을 뿌렸고, 채찍처럼 휘둘러진 팔끝으로 끝까지 감췄던 공이 튀어 나갔다.

틱-

맥없는 소리가 흐른다.

타자는 곧바로 스윙했지만, 타구는 포수 뒤로 날아갔다.

파울.

설마 빗맞을 거라곤 예상 못했던 건지, 브레그먼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는데.

‘X발, 미친 새끼.’

내 쪽이 더 놀랐다.

저 새끼 뭐야?

내가 선택한 건 슬라이더.

오늘 마침 긁히기도 하겠다, 꽉꽉 힘을 눌러 담아서, 백도어성으로 던졌는데. 저걸 커트하네.

‘노린 건 아닌데, 미친놈이네 진짜.’

뭐 저런 새끼가 다 있어?

막판에 꺾이는 걸 스윙이 미처 못 따라가서 빗맞았는데···

오늘 슬라이더가 긁혀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자신만만하게 준비해놓고 X될 뻔했네.

‘그래도 일단은 투 스트라이크. 이제, 이걸로 눈에 씌운다.’

아무튼 나쁘지는 않다.

패스트볼도 충분히 보여줬고, 슬라이더도 하나 보여줬으니.

남은 건 서클 체인지업.

사실 쟤도 예상하고 있을 거다. 우타자를 잡을 만한 결정구로는 그거 말곤 없으니까.

타자가 예상하는 걸 그대로 던지는 건 바보 같은 짓이겠지만.

‘막상 처음 마주했을 때는, 예상하고 있어도 못 쳐. 절대로. 저 자식이 노련한 베테랑인 것도 아니니까.’

확신한다, 쟤도 이런 서클을 상대하는 건 이번이 처음일 거라고.

아무리 재능이 대단해도, 처음 보는 구종을 정확하게 컨택하는 건 어렵지.

특히나 그 구종의 완성도가-

“스트라이크 아웃!”

더럽게 높다면 말이다.

뻔하디뻔한 낮은 서클 체인지업. 타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배트를 휘둘렀지만. 결과는 헛스윙 삼진.

‘배트는 아니지만, 눈은 끝까지 따라갔어. 타이밍을 가늠했겠지.’

역시나 초구에는 홀랑 속았다.

끝까지 지켜본 건 좀 무섭기는 한데. 그것도 일단은 계획대로고.

그렇게 경기 시작부터 만난 거대한 산의 첫 봉우리를 넘자, 긴장감이 좀 풀렸는데···

“씹-”

그 안일함을 징벌하듯.

따악-하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아웃!”

다행히 3루수 직선타.

채프먼이 다이빙하며 타구를 잡아줬다. 뚫렸으면 2루도 넉넉했겠네.

“땡큐! 맷 사랑한다!”

고마움을 가득 담아 소리치니, 채프먼은 자기만 믿으라는 듯 나한테 1따봉을 적립했다. 짜식, 잘하네. 경기 전에 신신당부(?)한 보람이 있어.

넌 꼭 빅리그 갈 거다.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놈이야.

####

어제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2회 초 상대의 선취점이 올라갔는데도, 변변찮은 저항조차 못 하고 있었으니까.

그것도.

“스트라이크!”

우습게 여겼던 투수에게 타선 전체가 압도당한 탓에.

3회 말. 2사 주자 1루.

대기타석에 오른 알렉스 브레그먼은 초조한 눈빛으로 승부를 지켜봤다.

‘제발, 제발 살아서 나가.’

그는 자신 있었다.

포심은 여전히 쓰레기고.

구속도 X같이 느리다.

슬라이더는 꽤 좋아졌지만, 그는 우타자이고, 저 녀석은 좌투수다 보니, 안쪽으로 꺾이는 지라, 작정하고 노리면 쳐낼 수 있다.

하지만 ‘그것’, 아까 전의 그 서클은···

‘대체 뭐지? 그런 걸 던질 수 있으면서, 왜 성적은···’

그저 놀랍다.

그것 만큼은 인정한다.

앞선 타석은 자신의 완패.

워낙 직전 타석에서 봤던 모습이 놀라워서, 무조건 결정구로 사용되리라 예상하며 단단히 노리고 있었는데도 맞추지 못했다.

하지만 딱 한 번만 더, 딱 한 번만 더 눈에 담는 다면, 자신 있었다.

‘그러니까, 테오, 제발 살아서만-’

축복받은 그의 눈은 어렴풋이 체인지업의 타이밍을 읽어냈으니, 조금 더 적응되고, 또한 상대의 다른 구종도 익숙해지면, 충분히 골라낼 수 있다.

그렇기에 간절히 바랐으나.

“스트라이크 아웃!”

또다시 삼진이 올라갔다.

벌써 다섯 개째.

좌타자들은 한순간 급격하게 꺾이는 슬라이더에 속수무책이었고. 반대로 우타자들은 당연히 서클을 쳐내지 못했다.

그나마 빗맞은 럭키 안타가 하나 나왔기에 망정이지, 까딱 잘못했으면 지금까지 퍼펙트였겠지.

“쟤 진짜 뭐냐? 갑자기 왜 이렇게 잘해진 거야? 원래 저런 놈 아니잖아?”

“구속은 X같이 느린데, 구위도 날림이라 딱 맞추기 좋은 놈이었지. 저번에 만났을 때는.”

“아니, 근데 성적인 왜 이런 건데? ERA가 6? 다른 팀 새끼들이 저걸 쳤다고?”

분위기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하강했다.

속 시원한 난타로 3연승을 거두며, 시리즈 스윕까지 단 1승까지 남겨둔 탓에 한없이 올라갔던 사기가 한순간 요동쳤다.

알렉스 브레그먼 역시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 자식이 저렇게 잘한다고?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딱 한 달 전에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빌빌거리다가 강판됐던 놈이?

“아··· 진짜 개같네.”

“왔어? 어때? 다음 타석에는 칠만 할 것 같아?”

“서클은 포기야. 저건 안 돼. 차라리 다른 걸 노리면 노렸지···.”

삼진 당하고 돌아온 1번타자, 테오스카 에르난데스의 말에 덕아웃에 감돌던 우울함이 더욱 짙어졌지만. 브레그먼은 그런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았다.

그저 마운드에서 내려가는 투수를 노려봤을 뿐.

“알렉스, 넌 감 좀 잡히냐?”

“어느 정도는. 한번만 더 보면 돼.”

“휘유~ 전체 2픽이 다르긴 다르네. 난 손도 못 대겠던데. 그럼 한 방 시원하게 날려.”

4회 초가 평탄하게 지나가고. 동료의 질문에 대충 대답한 브레그먼은 이닝의 선두타자로서 곧장 타석으로 향했다.

걸어가는 동안 머릿속은 온통 직전타석으로 가득 찼다.

마치 자석의 같은 극처럼 배트를 피해서 달아나는 공의 궤적이 뇌리에 똑똑히 박혔으니까.

‘생각보다 더 떨어져. 역회전도 강하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낙폭이 더 X같아.’

커브처럼 배트 밑을 야속하게 지나쳐버리는 그 움직임을 다시금 되새기며 타석에 오른 그를 투수는 웃음기 띤 얼굴로 맞이했다.

‘저 새끼가···’

웃어? 나를 상대로? 내가 타석에 있는데? 이름에 Suck이 들어가더니, 진짜 Suck인 놈이라고 브레그먼은 생각했다.

어이도 없었고.

내가 왜 저런 놈한테 무시를 당해야 하지?

빅리그에 올라가고 나면, 아마 다시는 못 만날 놈한테.

아무것도 아닌 놈에게 비웃음을 샀다는 생각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고, 감정은 격해졌다.

그에 이를 조금 더 강하게 깨물면서도 브레그먼은 자세를 유지했다.

‘쳐맞고 나서도 그런 표정인지 한번 보자고.’

잠깐의 기다림.

그리고 다시 경기 속행.

배트를 휘휘 흔들다가 자세를 잡은 그는 투수의 손끝에서 조금도 시선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초구.

‘포심? 조금 먼데, 건질까?’

바깥쪽으로 포심.

지난 타석과 똑같은 레퍼토리다. 잠깐 망설였지만, 생각보다 깊었기에 빠져나갈 것이라는 생각에 참았다.

“스트라이크!”

하지만 판정은 정반대.

분명 나간 것 같았는데 심판은 스트라이크를 선언했고, 어이가 없어 쳐다보자 적반하장으로 노려본다.

‘저런 걸 잡아주면 타자는 대체 뭘 치라는 거야?’

속으로 투덜투덜 거리면서도 꾹 참았다.

괜히 심판과 언쟁이나 하는 놈이라는 평가가 붙고 싶진 않았으니까.

애써 화를 눌러 삼키며 다시 자세를 잡자 투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두 번째 공을 던진다.

“볼!”

역시나 바깥쪽.

똑같은 포심.

하지만 이번에는 볼이 선언됐고, 그제야 조금 만족스러웠다.

그래, 그렇게 판정을 해야지.

그에 반해 투수는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눈치.

‘저 자식은 양심도 없나, 설마 이것까지 스트라이크로 잡아줄 거라고 생각한 거야?’

정말로 그렇다면 둘 중 하나다. 양심이란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대단한 철면피거나, 미친놈이거나.

“파울!”

확실한 건 정상은 아니다.

“허···”

몸쪽으로 집어넣은 체인지업.

되지도 않는 구속의 패스트볼보다는 역시나 꽤 대단하다

간신히 커트했지만, 말 그대로 간신히 배트 끝에 걸친 거고, 조금이라도 옆으로 갔다면, 아까 전처럼 꼴사납게 헛스윙 했겠지.

이런 서클 체인지업을 갑자기 던지는 걸 보면. 절대로 정상적인 놈은 아니지.

‘약이라도 빨았나?’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으나. 그랬다면 구속이 여전히 저 꼬라지일리는 없으니, 그건 아니다. 어쨌든 이제 투 스트라이크.

“볼!”

긴장했지만, 차분하게 가려는 건지, 4구는 한 번 뺐다.

상당히 낮은 코스의 슬라이더. 쳐볼까, 싶었지만 빗맞을 가능성이 높았기에 걸렀다.

이제 투 스트라이크 투 볼.

승부처다.

‘뭐지? 한번 더 슬라이더? 아니면 체인지업? 설마 패스트볼?’

어떤 게 날아올까?

선택지는 세 개.

그리고 그 중 두 개는 때릴 수 있는 것들이다.

지난 타석과 합쳐서 총 8구를 보며 어느 정도 타이밍은 읽었다. 남은 건 스스로 혼신을 다하는 것뿐이고.

‘왠지··· 알 것 같아.’

마지막 선택까지 내린 뒤.

알렉스 브레그먼은 다시 자세를 가다듬으며 투수를 봤고, 아직 포수와 사인조율 중인지 몇 차례 고개를 흔든다.

그리고 마침내 5구.

느릿느릿한 구속과 어울리지 않게 길쭉한 팔다리로 역동적으로 회전한다.

평범한 투구폼인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디셉션이 심한 터라 마지막까지도 공을 끝까지 숨겼다.

허나···

‘체인지업.’

감이 잡혔다. 뭐가 날아올지.

머릿속으로 공의 궤적을 그리며 살포시 배트를 내밀었다.

그 안에 담긴 힘은 가공할 정도였지만.

딱- 손맛이 돈다.

정타? 아니-

“아웃!”

바깥쪽으로 멀리 날아간 서클 체인지업을 배트 끝이 건드렸지만, 정확도가 부족한 탓에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았고, 가볍게 튕긴 타구는 포수가 곰처럼 낚아챘다.

파울팁 삼진.

이번에도 삼진인 건가?

실실 웃는 투수를 보며 브레그먼은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다른 놈한테 얻어터지지 말고, 쭉 던져.’

다음 타석은 넘길 수 있다.

이젠 완전히 익숙해졌으니까.

X신같은 포심이든. 쓸만한 슬라이더든. 그 대단한 서클이든.

타이밍은 확실하게 잡았다.

####

내 마지막 기회는 현재까지 순항 중이다. 5회까지 무실점으로 막아냈으니까.

5이닝 동안 삼진만 여덟 개를 잡았고.

오늘 경기 가장 톡톡한 활약을 보인 건 당연히 서클 체인지업이지만, 슬라이더 역시 제몫을 했다.

‘아오, 그거만 안 맞았어도 퍼펙트인데. 아니지, 바레토 저 자식이 잡기만 했어도- 아니 더 쎈 놈 잘 잡아놓고 그런 걸 쳐 맞아서···’

이런 얼토당토 않은 아쉬움이 생길 만큼 훌륭한 피칭에도 감독 표정은 점점 더 안 좋아졌다. 표정 관리하는 시늉이라도 좀 해라 이 양반아.

그에 반해 우리의 존 와스딘께서는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는데, 딱 보면 안다.

역시 내 눈이 옳았구나! 난 천재코치야! 이런 반응이네.

자기애가 풍부한 모습, 아주 보기 좋습니다, 코치님.

‘일단 승리투수는 확실해 보이고. 아니지, 다른 놈들이 방화할 수도 있으니까, 마지막까지 확신은 못하겠네. 아무튼 성적은 나쁘지 않아. 이 정도면 단장도 왼쪽 눈썹 정도는 씰룩거리겠지?’

6회 말이 시작되는 현재, 경기는 우리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내가 잘 막고 있어서 그런지, 타자들도 지난 경기들보다 훨씬 더 열심히 하고 있다.

2회 초 1득점에 이어, 5회 초, 무려 4득점을 올려내며 5점의 득점지원을 해줬으니까.

다 내 덕분이다.

투수가 든든하니 타자들도 힘을 내는 게 아니겠는가.

‘승리투수 요건은 채웠고. 이제부터는 얼마나 더 던지느냐는 건데. 지금까지 투구수가 76개. 좀 많네.’

그래도 아껴쓰면 2이닝은 더 막을 수 있다.

경기가 생각대로 척척 진행되어, 완봉도 조금 욕심났지만, 아마 그것까진 허락 안 하겠지.

팜으로 먹고사는 구단이라서 그런지, 마이너 투수들은 제 아무리 잘하더라도 완투를 안 시키거든. 노히터나 퍼펙트 중이라면 또 모를까.

‘괜히 이닝 욕심 내지 말고, 딱 삼진 두 개만 더 잡자.’

오늘 내가 정한 목표였다.

7이닝 무실점 탈삼진 10개.

원래 목표는 사실 6이닝 1실점이었지만, 잘되고 있으니, 더 큰 목표를 가져야겠지.

‘그러려면 이번 이닝을 어떻게 잘 넘기는 게 가장 중요하겠고.’

6회 말, 상대 타순은 8-9-1로 이어지니 타순도 나쁘지 않다. 만약 한방 맞아서, 주자가 있는 상태로 2번까지 이어진다면 엿 같아 지겠지만.

안 그러도록 해야지.

“Suck! 이쪽으로 굴려! 다 잡아줄 테니까!”

마지막 여력을 끌어올리며 마운드에 오르자, 뒤에서 야수들이 소리친다.

특히 1회에 다이빙 캐치까지 했던 우리 예쁜 채프먼은 글러브를 팡팡 치며 자기만 믿으라고 소리치고 있고.

경기 시작하기 전만 하더라도 연패 때문에 표정이 썩어 있던 녀석들이, 이제 좀 볼만하네.

‘다른 놈들은 몰라도, 채프먼은 믿을만 하지. 그래, 여차하면 3루로 굴린다는 생각으로 하자.’

그것을 보니 왠지 조금 안심됐다. 그렇게 자세를 잡자 타자가 올라왔고, 올라온 타자는 뉴페이스였다.

‘문천중. 맞나?’

문천중.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한국인이다. 알기는 안다.

비록 상대로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같은 나라 사람이라서, 오다가다 소식을 들을 수밖에 없지.

‘스위치 히터였지? 성적은 솔직히 좋다고는 말 못하고. 그런데 좌타자로 들어왔네?’

우투양타. 스위치히터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좌투수인 날 상대로 좌타자로 나왔다.

그만큼 내 서클 체인지업이 까다롭다는 뜻이겠지. 그나마 슬라이더가 해볼만 하다는 거고.

‘글쎄, 직접 보면 다를 텐데.’

지금 내 슬라이더 무시하는 거야? 어이없어 정말.

사실 어제의 나였으면 저 결정을 충분히 이해했겠지만. 오늘은 아니지.

“스트라이크!”

먼저 높은 포심.

89mp/h, 전력으로 던졌다.

이제 후반부에 접어들었는데도 최고구속이 찍히긴 하네. 제구는 슬슬 떨어지려고 하는데.

타자는 그게 끝이냐는 듯이 쳐다보는 데, 그럴 리가 있나.

‘높게 했으니, 이제 낮게 하나.’

뚝 떨어지는 서클 체인지업. 타자는 참았지만, 애초에 존안으로 넣었다.

그렇게 투 스트라이크.

몰아넣었으니 거리낄 건 없다. 철저하게 잡는 것뿐.

같은 한국인으로서 안타깝긴 한데, 어쩌겠어?

존 한가운데로 들어가다가, 급격하게 바깥으로 꺾여 나가는 공.

슬라이더에 타자는 그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헛스윙 삼진이다.

그걸로 탈삼진 하나 더 적립.

이제 9K네. 언젠가는 18K도 달성해보자. 24K도 해보고.

“아웃!”

그 다음으로 9번타자, 알레한드로 가르시아는 5구째 떨어지는 서클 체인지업을 억지로 퍼올리다가 파울 플라이로 물러났다.

여기까진 완벽하다.

이제부터가 문제인데···

‘테오스카 가르시아. 얘만 잘 넘기면 되는데 말이야. 제발 아까 전처럼 쉽게 꺼져라.’

얘도 지금까지는 허무하게 잡히기는 했지만, 슬슬 타이밍이 익었을 것 같단 말이야.

기본적으로 타격은 괜찮은 녀석이니까. 이번이 세 번째 타석이니, 방심할 수가 없다.

‘일단 패스트볼? 아니 슬라이더 바깥쪽으로 낮게, 코너로 하나 넣어보자.’

길게 숨을 뱉으며 손에 힘을 불어넣는다. 오래간만에 많이 던졌다.

평소보다 3이닝을 더 하는 셈이고, 투구수도 평소의 두 배를 찍었다.

그로 인해 손가락에 힘이 슬슬 떨어지는 건지, 세밀한 컨트롤은 조금 버겁다.

그래서일까?

“아, 씹-”

한 방 맞았다.

슬라이더를 노리고 있었나?

바깥쪽으로 제구되기는 했지만, 원래대로라면 좀 더 낮은 코스로, 외각코너를 찔렀어야 할 슬라이더가 그보다 위로 제구됐고, 타자는 그걸 그대로 받아쳤다.

“세이프!”

오래간만에 나온 안타.

좌익수를 넘긴 타구에 테오스카 에르난데스는 그대로 2루까지 찍었다.

6회 말 2사 주자 2루. 이번 경기 처음으로 맞이한 위기.

‘X됐네.’

실점한 건 아니니 아직은 괜찮지만. 진짜 문제는 주자가 있는 상태에서 2번까지 연결됐다는 것.

한 걸음, 한 걸음, 타석으로 향하는 후속타자의 발걸음에는 강력한 힘이 실려 있었다. 울분을 토해내는 것 같기도 하고.

앞선 삼진들을 모조리 되갚아 주겠다는 듯이 걸어오는데, 살 떨려서 살겠나.

‘거르긴 뭘 걸러? 잡아야지. 쟤 거른다고 쳐도 다음 타자는 어쩌려고?’

앤디가 거를 거냐고 묻는데, 얘는 진짜로 바본가? 기껏 떡밥 다 던져놓고, 왜 걸러? 낚아채야지.

‘일단 판은 깔아놨는데. 통할까? 안 통하면 진짜 X되는 건데··· 그래도 해야지 어째.’

결연한 표정을 지으니, 뜻이 전해진 듯, 앤디 녀석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인마, 쫄보처럼 굴지 마.

‘넣으면 쳐맞는다. 10구, 아니 20구를 주더라도 끄는 게 상책이야. 그나마 다행인 건 열 좀 받았어.’

타자가 차분했다면 더 X같았을 거다. 다행히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제대로 난 브레그먼은 조금 흥분했고.

그걸 최대한 이용했다.

“파울!”

“볼!”

“볼!”

“볼!”

“파울!”

“파울!”

포심과 슬라이더를 중심으로 승부를 천천히 풀어나갔다.

철저하게 존 밖으로, 딱 봐도 볼이 될 코스로만 던졌는데. 예상대로 타자는 커트했다.

마치 호락호락하게 보낼 생각이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이미 풀카운트. 볼넷 준다는 심정으로 한 번 더 빼봤지만, 이번에도 커트했다.

‘후우···’

계속 커트당하니 투수코치가 올라오려고 하는데, 가볍게 손을 들어 제지한 나는 손안의 공을 열심히 굴렸다.

‘제대로만 가라, 제대로만. 딱 채프먼한테 던졌던 대로만 들어가.’

앤디를 보니, 척하면 척인지, 먼저 사인을 요구한다.

아니지, 코치가 지시한 거겠네.

그토록 말했던 딱 한 번의 완벽한 찬스니까.

‘가자.’

고개를 끄덕이니, 녀석도 꽤나 비장한 표정으로 글러브를 벌렸고. 그것을 본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몸을 움직였다.

아마 보고 있는 사람은 좀 웃길 거다. 얼굴이 새빨개졌을 테니.

하지만 알아줬으면 좋겠다. 지금 내가 젖 먹던 힘까지 끌어냈다는 걸.

“흐읍-”

이번 타석에서 처음으로 존 안쪽에 과감히 집어넣은 공이 유유히 날아간다.

둥실둥실. 비행선처럼.

타자는 똑바로 지켜봤다.

‘기다리고 있었네.’

타자가 구종을 파악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손끝을 보고 그립을 확인하는 경우도 많은데, 감각의 좋으면 투수의 타이밍을 읽는 놈들도 많다.

구종마다 묘하게 다르거든.

같은 투구폼이라도.

알렉스 브레그먼, 천재타자다.

이건 이견의 여지가 없지.

그러니 금방 적응했겠지.

내 타이밍에. 그리고 서클 체인지업에. 선구안이 좋은 녀석이니 구속도 어느 정도 가늠할 테고.

‘서클 체인지업을.’

저것 봐라.

정확하게 서클의 각도를 그리잖아. 아주 정확하게 꿰뚫어 본 거지.

사실 지금 타이밍에서 체인지업 말고는 결정구가 없기도 하고.

구속까지 이미 익숙한 것과 똑같으니 아마 의심의 여지조차 없었을 거다.

‘그냥 체인지업인데 말이야.’

쟤 생각으로는.

느릿느릿하게 날아가던 공은 배트의 위를 유유히 지나갔다.

얼추 정답에 근접했다.

체인지업은 체인지업이고, 구속도 던지던 서클과 거의 동일하니까.

다만···

‘그냥 오프 스피드라고 해야겠지. 저걸 체인지업이라고 하기엔 질이 너무 떨어지잖아. 막말로 그냥 힘빼고 던진 직구인데. 구종으로 분류하는 것도 우습지.’

쓰리핑거 그립의 스트레이트 체인지업. 그래, 저번에 코치한테 배웠던 그 그립.

패스트블과 비교하면, 스트레이트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낙폭은 아주 살짝만 있고, 구속만 많이 느리다. 구위도 훨씬 못하네.

쉽게 말해서 그냥 똥볼이다.

그 똥볼이 스트라이크존 한복판을 지나갔다. 배트는 그보다 훨씬 아래를 꿰뚫었고.

10번째 삼진이 올라갔다.

‘무시무시하긴 하네. 몇 번이나 봤다고 서클 체인지업 정확하게 걸러 내는 거 보면.’

그렇기에 통하지 않을까, 예상했었는데, 딱 통하네.

참고로 채프먼도 서클 아홉 개 먼저 보여주고 저거 던지니까 배트 헛돌더라.

어찌나 쪽팔려 하던지. 쟤도 똑같은 반응이네.

비슷한 놈들이라서 그런가?

‘수고했고, 다음에는 내가 좀 더 강해진 다음에 보자.’

울분을 이기지 못해 헬멧을 집어던지는 녀석의 등 뒤로 그렇게 인사하며, 6회 말을 마무리 지었다.

야구 쉽네.

진작 이렇게 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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