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6화 (6/316)

6화

‘배는 채웠고. 이제 뭐하지? 자기에는 시간이 좀 이른데.’

3차전이 끝난 뒤 곧장 숙소로 돌아왔다. 식사는 대충 룸서비스로 때웠고.

허름해서 곧 망할 것 같은 호텔인데, 신기하게 룸서비스는 되네.

해는 이미 한참 전에 저물었고, 무드등이 은은하게 방안을 비췄지만, 역시나 조금은 어둡다.

그대로 멍하니 어두컴컴한 창밖을 내려 보다, 아무렇게나 놓인 휴대폰을 집었다.

‘오래간만이네. 집에 먼저 전화하는 것도.’

예전에는 그래도 자주 통화했었다.

지금보다 상황이 더 좋고, 미래도 더 밝았을 때.

조금씩 시간이 지나고, 희망이 점점 더 흐릿해지면서, 사정을 들으면 돌아오라고 할 것 같아, 최근에는 전화를 안 드렸는데.

그래도 항상 선발등판이 예정되면, 그 전날에는 잠깐이라도 통화를 한다.

왠지 마음이 안정되거든.

언제라도 돌아가면, 기쁘게 맞아줄 곳이 있다는 것에.

-어, 아들. 무슨 일이야? 먼저 전화를 다 주고. 거기는 밤 아니야?

“그냥, 자기전에 한번 걸어봤어. 아빠는?”

-가게에 있지. 엄마도 곧 가봐야 하고.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니, 어··· 있어. 선발출장해, 오래간만에. 저번 경기 때 좀 잘했거든.”

기뻐하는 눈치다. 딱 봐도 연락이 뜸하니, 뭔가 잘 안되는 거야 이미 아셨을 테고, 그래서 걱정도 많았을 텐데. 간만에 좋은 소식을 들려주니, 자기 일처럼 기뻐하신다.

‘나도 나지만, 엄마나 아빠도 소식이 없으니, 걱정되셨겠지.’

아, 참고로 우리 집은 고깃집을 한다. 숯불갈비를 파는데, 장사는 그럭저럭?

그 덕에 형편이 넉넉한 편이라서, 지금까지 미국에서 개긴 것도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손 벌릴 곳이 있으니까.

다른 녀석들보단 낫네.

중남미 출신들은 마이너 봉급마저도 쪼개고 쪼개서, 심지어 밀머니까지 쪼개서 가족들한테 보내는 녀석들도 있는데. 그거 생각하면 난 부르주아나 다름없지.

당장 지금도 집에서 부쳐줄 반찬 손가락 빨면서 기다리고 있고.

-힘들진 않아? 미국에서 혼자 야구하는 거.

“힘들긴··· 몇 년 뒤에는 메이저리거 될 텐데. 꾹 참고 버텨야지.”

애써 밝게 말했지만, 척하면 척인건지, 아니면 내 목소리에서 불안함을 읽으신 건지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새어 나왔다.

-엄마가 알아보니까, 미국 갔더라도 2년 쉬면 다시 한국에서 프로선수 할 수 있다고 하던데··· 말도 안 통하는 미국에서 고생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국에서 노력해보는 게···

그런 건 또 언제 알아보셨대.

어쩌면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걱정하고 계셨던 걸지도 모르겠다.

저 말을 한 일주일쯤 전에 들었다면, 설득됐을지도 모르고.

“이젠 말 잘 통해. 엄마 아들이 머리는 썩 괜찮잖아. 그리고··· 조금만 더 해보려고. 이번엔 진짜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

-유석이 너 저번에도 그렇게 말했-

“알아, 이 말, 벌써 열 번도 더 넘게 한 거. 그래도 이번에는 진짜니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엄마 아들 딱 한번만 더 믿어봐.”

걱정스러우시겠지.

만약 이대로 계속 마이너에서 버티다, 몇 년이 뒤 방출되면.

그땐 정말 암울할 테니까.

나이는 20대 후반에 학력은 고졸.

야구 외엔 아무런 커리어가 없고, 군대는 미필.

‘아찔하네.’

만약 야구가 실패했을 때, 아들이 맞이할지도 모르는 저 처참한 상황들이, 부모님 입장에선 마음에 걸릴 수밖에 없다.

나도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엄마랑 똑같은 생각을 했었고.

지금이라도 한국으로 돌아가서, 차라리 군대라도 빨리 가는 게 낫지 않을까?

그 다음에 다시 몸 좀 만들다가, 프로야구 신고 선수라도 도전하는 거지.

독립리그 쪽을 알아보던지.

프로야구 2군만 되도, 수익적인 면에서는 지금보다는 나을 테니까.

그러다가 만약에 한국에서 잘 되면, 메이저는 포스팅으로도 갈 수 있는 거고.

사실 뒷부분은 자기합리화다.

나는 야구를 놓으려는 게 아니라, 먼 미래를 본다는 식의 자기합리화.

애초에 실현 가능성이 없으니까.

부상 전력도 없으니, 무조건 현역일 텐데, 2년 동안 야구를 못한다?

신고선수는 커녕 그대로 끝나는 거지.

2년을 쉬는데 기량이 유지될 리가 없으니까.

‘뭐, 이제는 저런 생각은 할 가치도 없지만.’

그런 망상을 나도 일주일 전까지만 하더라도 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함에 떨지도 않고.

희망이 생겼으니까.

“이번에는 진짜야.”

-그래, 그 말도 몇 번째네. 믿을 테니까, 몸만 조심해. 다치지 말고.

단호하게 말하니, 그제야 조금 안심된 건지, 목소리가 다시 처음처럼 밝아졌다.

나도 마음이 안정됐고.

그대로 조금 더 대화를 나눈 뒤, 통화를 마치려다가, 생각해보니 가장 중요한 걸 빼먹은 것 같아, 다급하게 말했다.

-그럼 엄마도 가게 가봐야 해서 이만 끊을···

“엄마엄마. 잠깐만”

-왜?

“나 딱 30만원만 붙여줘. 지금 밥 사먹을 돈이 없어. 구단에서 식빵 주기는 하는데, 점심때만 줘서···”

-···문자로 계좌번호 넣어. 송금해줄 테니까.

“다음에 성공하면, 거기에 공 다섯 개 더 붙여서 갚을 게.”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하지.

야구고 뭐고, 일단 먹어야 할 거 아니야?

부모님한테 효도하는 것도 지금 내 몸이 건강해야, 다음에 해드릴 수 있는 거고.

아무튼 그렇다.

‘이렇게까지 호언장담을 했는데, 쳐발릴 수야 없지. 쪽팔리잖아.’

그것으로 통화는 끝났고.

훅스를 조져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생겨났다.

####

잠을 잘 잤다.

엄마랑 간만에 통화해서 그런가, 그 뒤로 푹 늘어져서, 원래 계획보다 조금 더 오래잤다.

‘잠도 잘 잤고, 몸도 딱 좋고. 이만하면 완벽하네.’

그대로 눈꼽만 좀 떼고 곧바로 출근하니, 먼저 도착한 놈들이 슬쩍 손만 흔든다.

혹시라도 부정탈까, 다가오는 기색도 없고. 쟤들도 알긴 아네, 오늘 경기가 나한테 중요하다는 사실을.

“Go, 이제 왔어? 어떻게 잠은 잘 잤고? 몸은 좀 어때?”

“여기 왔을 때부터 그랬잖아요. 공 던지기 딱 좋다고. 오늘은 더 좋습니다.”

“말이나 못하면··· 워밍업 적당히 하고, 불펜에서 오늘 폼 확인하자.”

“넵.”

눈 비비고 돌아다니니 투수코치가 반겨주는데, 나한테 마지막 기회까지 줬으니, 그 말에 귀찮아 하지 않고, 열심히 귀담아들었다.

“잘할 자신 있지?”

“잘해야죠. 더블A 마지막 경기일지도 모르는데.”

코치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떻게 안 거냐는 눈치네.

척하면 척이지.

돌아가는 상황도 눈치 못 챌 만큼 둔하지는 않거든.

‘오늘 드래프트잖아..’

2016년도 신인 드래프트.

구단의 한해 농사를 결정짓는 시간이자, 미래의 스타들이 본격적으로 프로 무대를 밟는 순간이다.

메이저리그 단장들은 이 시기에 간혹 미신에 의존하기도 한다. 제발 내가 뽑은 놈이 무탈하기를 기원하면서.

뭐, 오클랜드 팜이 잘 되건 말건, 그딴 건 사실 나랑 관계없고, 중요한 건 그 다음이지.

‘잘하는 놈 올라가고, 못 하는 놈 내려가고. 집중 단속기간이지. 마이너 성적 집중 단속기간.’

무슨 뜻이냐고?

간단하다. 드래프트로 선수를 뽑으면, 그 선수를 산하에 있는 각 마이너 구단에 보내는데, 그때 겸사겸사 쭉 훑는 거다. 마이너 선수들 성적을.

그 성적에 맞춰서 로스터 정리하고.

못하는 놈 내리고, 잘하는 놈 올리고.

나는 전자겠지. 거의 100%라고 봐도 무방하겠네.

“···너무 부담 가지지 마. 그게 더 안 좋은 거 알지?”

“딱 실력대로만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존 와스딘의 표정에 씁쓸한 미소가 감돈다. 왠지 모를 착잡함도 느껴지고.

사실 내가 강등? 콜다운? 아무튼 내려가리라는 걸 예감한 건, 지난 경기에서 밝지 않았던 감독의 표정을 봤을 때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놓고 그러는 게 어딨어? 감독이라는 양반이 말이야.’

내 팀 투수가 잘 던지는데 왜 표정이 일그러져 있겠어?

이미 쳐낼 명단에 올린 놈이 잘하니까, 괜히 껄끄러운 거지.

아마 며칠 내로 통보가 올 거다. 하이A로 내려가라는 통보가.

이번 경기에서 내가 결정을 뒤바꿀 만큼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가정하에.

‘재밌네. 누구는 오늘 수백만 달러를 거머쥐는가, 아닌가의 기로에 서 있을 텐데. 누구는 아래로 안 떨어지려고 발버둥 치고.’

아예 딱 박히는 건 한 경기론 힘들고, 유예기간이라도 만들어야 하는데. 대충 얼마의 성적을 내야 할까?

‘퀄스로는 어림없고. 최소 6이닝 2실점. 아니, 1실점 정도는 해야, 눈썹이라도 깜짝하겠지.’

최악은 아니다.

마지막 최후의 찬스가 있으니까.

단장이 마이너 선수들 성적에 관심가지는 시기는 많지 않은데. 딱 그때 기회가 온 거고.

잘해서 좋은 성적을 낸다면, 다른 때보다 더 큰 반응을 받을 수도 있겠지.

사실 뭘 어떻게 하든지, 그냥 무시할 가능성이 높겠지만.

‘쇼케이스라고 생각하자고. 결국 내려가더라도, 새로웠던 모습을 프런트의 뇌리에 박아 넣을 수 있는 쇼케이스.’

그러기 위해선 몇 가지가 필요했다.

“채프먼.”

“Suck, 너 오늘 선발이지? 득점지원 톡톡하게 해줄 테니까. 어떻게든 3점 안쪽으로만 막아 봐. 승리 챙겨줄게.”

“득점지원이야, 타자께서 알아서 하시고, 나는 지금 당장 니가 필요해.”

“나? 뭔데? 시킬거라도 있어? 뭐, 코치가 수비 시프트라도 할 거래? 호흡 좀 맞출까?”

“그것도 감독이 알아서 하겠지. 별건 아니고, 너 몸 풀고 나서, 나중에 불펜에 와라.”

“불펜은 왜?”

“테스트할 게 있거든. 딱 10구만 받아줘. 연습게임 삼아서.”

“뭐··· 나야 나쁠 건 없는데, 괜찮겠어?”

이 오만한 자식. 자기 실력 좋은 거 은근히 뽐내는 거 보소.

저 말은 ‘내가 너 두들겨 팰 텐데, 선발등판 전에 험한 꼴 봐도 괜찮겠어?’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피해망상일 수도 있겠지만. 저거 봐, 저 뻐기는 표정.

“배트플립해도 상관없으니까, 공이나 봐줘.”

“오케이, 그럼 나중에 보자.”

그래도 하는 수 없다.

좀 X같기는 한데. 쟤 말고 마땅한 시험대상이 없으니까.

‘얘한테 통하면, 브레그먼한테도 통할 가능성이 높지. 성적은 브레그먼이 더 높지만, 쟤는 경험이 더 쌓였으니까. 딱 한 번, 가장 중요한 순간에 한 구만 제대로 먹히면 돼.’

시작 전 준비는 마쳤으니, 이제 남은 건 그저 성실하게 몸을 푸는 것뿐.

먼저 가벼운 스트레칭부터 시작했는데, 왠지 평소보다 느낌이 더 좋았다.

마치 지난 경기 때처럼.

####

“쓰읍···”

“수고했어, 나중에 수비 좀 잘 해줘. 혹시라도 실책하면 바로 날라차기 꽂을 거니까 유의하고. 알지? Tae-kwon-Do? 바로 가는 거야.”

“그래그래. 열심히 잡아줄 테니까, 협박 좀 하지 마라. 에휴, 괜히 왔네, 괜히 왔어.”

채프먼이 나간 뒤, 불펜은 다시 조용해졌다.

안에 있는 사람이고는 코치랑 나. 그리고 어제에 이어 오늘도 선발출장하게 된 포수 앤디 파즈. 이 세 명이 전부였으니까.

“생각보다 잘 먹히죠?”

“실전에서는 또 모르겠지만. 그래도 채프먼은 제대로 속긴 했어.”

“Suck, 난 좀 반대야. 솔직히 걸리면 그냥 넘어가잖아?”

“그러니까, 안 걸리게 타이밍 잘 재서 찔러 넣어야지.”

“그게 말처럼 쉽나···.”

“내는 타이밍은 나랑 코치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그냥 평소처럼 뇌 빼고 공이나 받아.”

“누가 뇌 빼고 공을 받아?”

툴툴거리는 녀석을 무시하고 투수코치를 보니, 그 역시 조금은 긴가민가한 표정이다.

‘정말 통할까?’ 하는 표정인데, 사실 어쩔 수 없다. 워낙 도박성이 짙으니,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겠지.

애초에 직접 고안해낸 나조차도 확신이 없는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하겠어?

‘그래도 채프먼한테는 통했으니, 가능성은 있지. 정말 극도로 집중했을 때, 그래서 감각이 확실하게 올라왔을 때. 그때 딱 한 구. 그 정도는 가능해.’

“괜찮겠어?”

“저도 주구장창 던질 생각은 없어요. 중요할 때 비장의 무기로 한번 써먹는 거죠.”

“그래도 지난 경기처럼 오늘도 컨트롤이 좋아 보이니···”

“뭐, 정 안 되면 홈런 하나 맞고 마는거죠.”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이니, 코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헛웃음을 흘렸다.

“투수가 선발등판 직전에 자기가 홈런 맞는다는 소릴 쉽게 내뱉는 건, 아마 Go 너밖에 없을 거야. 어쨌든 위험성이 높긴 하니, 웬만하면 자제하고, 정말로 통할 것 같다 싶으면, 한번 해봐.”

“Yes Sir.”

장난스럽게 경례하니 진저리가 난다는 듯 한숨까지 내쉰다. 내가 뭘 어쨌다고?

투수코치까지 설득했으니, 이제 거리낄 건 없고, 채프먼이 나가고 남은 불펜에서 차근차근 마저 공을 던지며, 오늘 내 몸 상태를 샅샅이 확인했다.

다행히 지난 경기랑 같다.

서클도 죽여주고, 제구도 마음대로 되고, 패스트볼은 여전히 X같고. 넌 양심이 있으면 구위라도 좀 올라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슬라이더를 던졌는데···

“음··· 한번 더 던져봐.”

“옙.”

쓰읍- 뭔가 좀 이상한데?

나쁘다는 건 아니고, 사알짝 다르다. 변화각은 평소랑 같고, 제구도 잘 되지만, 뭔가 좀 미묘하게···

“무브먼트?”

불현 듯 소리치는 존 와스딘.

무브먼트? 무브먼트가 왜? 혹시 더 안 좋아졌나?

어쩐지 꺾이는 게 평소보다 좀 둔하다 싶었-

“Go, 한번만 더 던져봐. 슬라이더 꺾이는 무브먼트가 좋아진 것 같은데?”

기는 개뿔.

아주 예쁘게 꺾이는 걸 보니, 얘는 포심이랑 다르게 아빠를 사랑할 줄 아는 자랑스러운 자식임이 틀림없다.

이 사랑스러운 녀석!

아빠는 널 항상 믿었단다!

못난 네 형, 포심이랑은 다르게, 너랑 서클은 항상 기쁨을 주는구나!

존 와스딘의 말에 환희에 차, 그의 지시대로 한 번 더 던지니, 이제는 나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이거, 확실히 다르다.

표현하자면 훨씬···

“파즈, 네가 볼 땐 어때?”

“제가 봐도 그래요. 휘는 각이 좀 더 날카롭다고 해야 하나? 변화폭은 평소랑 같지만.”

날카롭다.

다른 사람들도 같은 감상인 것 같았고.

앤디 녀석은 컷 패스트볼, 그러니까 커터 같다는 감상평을 냈네.

‘커터랑 슬라이더··· 사실 엄청난 차이는 없지. 얼만큼 변화하는가, 구속은 얼마인가의 차이니까. 커터 그립 잡고 슬라이더라면서 던지는 사람들도 있고.’

지금 케이스는 내 슬라이더가 커터처럼 됐다는 게 아니라, 그런 느낌이라는 거다.

평소보다 좀 더 빠르고, 날카롭다는 거지. 변화각은 슬라이더 그대로면서.

참 좋은 말이기는 한데··· 내 슬라이더가?

“음··· Go.”

“네, 코치.”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짓는 존 와스딘, 뭔가 잘못된 건가 싶어서 쳐다보니, 오른쪽 어깨에 팔을 턱 올렸다.

왜이래 이 양반이.

“네 실링, 드디어 터진 거 같은데?”

“예?”

“서클 체인지업, 컨트롤, 그리고 슬라이더까지. 터져도 제대로 터졌네.”

폐급투수인 나, 알고 보니 천재투수? 뿌슝빠슝?

####

‘개꿀잼 몰카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루아침 만에 이렇게 달라지는 게 이상하잖아. 사실은 마이너리그가 다 같이 합심해서 나 놀리려고 하는 거지.

개소리라는 거 아는데, 솔직히 이쪽이 좀 더 가능성 높아보인다.

‘그보다도 나한테 터질 실링이 있었나?’

그게 가장 놀랍다.

이 개똥같은 실력에 뭐가 남아 있었던 건가? 마른 수건 짜듯이,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뽑아낸 줄 알았는데. 더 짜낼 게 남아 있었나보다.

‘저번 경기 때, 슬라이더까지 긁혔으면 소원이 없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진짜 이뤄질 줄은 몰랐지.

이럴 줄 알았으면 ‘산타할부지 저 구속 100마일 만들어주세요 ㅎㅎ’라고 했을 텐데. 제기랄, 소원 하나 날렸네.

아니지, 혹시 몰라.

‘저 다음에는 구속 늘려주세요! 좌완 파이어볼러 되고 싶어요! 꼭이요! 제발요! 100마일, 아니 99마일, 95마일까지만 어떻게-’

열심히 외쳤다. 마음속으로.

이걸 어떻게 입밖으로 뱉어. 바로 정신 병원에 쳐 넣을 텐데.

아주 광기에 차서 열심히 빌고 빌었는데.

“Suck, Suck!”

“어? 어어, 왜?”

“대체 뭘 상상하길래 불러도 반응을 안 해? 그냥 잘 해보자고. 드릴러스 때처럼만 하자. 내가 테일러보다 낫잖아?”

“그건 아니야. 알았으니까, 내려가.”

고맙게도 앤디가 망상을 깨줬다. 어우, 경기 앞두고 뭔 짓거리야. 집중해야지.

녀석을 내려보내고, 슬슬 연습투구를 하면서 상대팀 타자들을 훑었다.

X새끼들이 좁밥보듯이 보네.

사실 저번에 좀 좁밥처럼 쳐맞았기는 한데, 어쨌든 지금은 아니야!

‘너 이 X새끼들 오늘 아주 죽었다.’

울분을 가득 담은 연습투구가 끝나고, 곧이어 올라온 첫 타자. 테오스카 에르난데즈(Teoscar Hernández)

내가 브레그먼만 부각해서 그렇지, 얘도 참 잘하는 놈이긴 하다. 뻥파워도 죽여주고.

‘네가 첫빠따구나.’

유들유들하고 여유가 넘치는 표정으로 타석에 올라왔는데, 어처구니가 없어서 뚫어져라 쳐다보니 어깨를 으쓱거린다. 왜 그렇게 보냐고 묻는 것처럼.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곧이어 던진 초구로 대신했을 뿐.

“흐읍-”

구종은 서클 체인지업.

구속은 79mp/h. 코스는 바깥쪽으로 낮게 들어갔다.

스트라이크존 한가운데로 날아가다가 갑자기 확 역방향으로 꺾이면서 떨어지는 공, 타자는 스윙 했고.

‘이야, 고놈 참 스윙 한번 남자답네. 아주 시원시원해.’

당연히 못 맞췄다.

말했잖아, 원래 목표는 바깥쪽 낮은 코스라고.

이게 웬 떡이냐며 스윙했지만. 공은 유유히 배트에게서 멀어졌다.

보는 이의 속이 후련해지는 헛스윙.

무너진 자세를 간신히 바로 잡은 테오스카 에르난데스의 표정은 지난 경기에서 익히 봤던 것과 똑같았다.

시퍼렇게 뜬 두 눈. 살짝 벌려진 입. 믿을 수 없다는 듯 젓는 고개. 그리고 경악이 가득한 눈동자.

타자 뿐만이 아니라, 벤치나, 대기타석에 있던 다른 놈들도 싸늘하게 얼어붙었고.

간신히 충격에서 빠져나온 타자는 방금 전과는 반대로 이번엔 본인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뭘 한 거냐고 묻듯이.

‘뭘 야려 새끼야. 이제 시작이구만.’

멍청한 표정을 보니.

기분이 몹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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