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4화 (4/316)

4화

등판한 다음에는 항상 방안에서 홀로 그날 피칭을 복기한다.

오늘 경기로 내가 뭘 얻거나 잃었고. 타자들한테 뭐가 잘 먹혔고, 뭐는 나빴고. 그러면 그 이유는 무엇이고. 뭐, 대충 그런 것들.

사실 복기라고 하면 좀 거창하고, 침대에서 이불 뻥뻥 차면서 후회하는 거지.

오늘은 좀 다르겠지만.

‘오늘 경기 덕분에 ERA는 좀 내려갔어. 이제 6.03정도인가? 다음 등판 때도 잘하면, 5점대로 내려가겠네.’

일단 오늘 거둔 수확이 많다.

높이 치솟던 ERA를 간신히 진정시켰고, 탈삼진도 충분하게 올렸으니까.

‘대충 떨어뜨려야 하는 건 다 떨어뜨렸고, 올릴 건 다 올렸다고 보면 되겠네. 그래도 아직 성적이 처참하지만, 몇 개 정도는 내세울 수 있겠어.’

37.1이닝 ERA 6.03, 25자책점. 탈삼진 24개. 볼넷 6개. 사사구는 없고.

오늘 경기를 포함한 내 대략적인 성적이다.

심각한 부분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그나마 가장 눈에 띄는 게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적은 볼넷.

이번 경기는 아예 하나도 허용 안 했기에, 볼넷은 기존과 똑같다. 사사구 없이 딱 6개. 꼴에 자존심이 쎄서 그런가, 가진 것에 비해 피칭 스타일이 공격적이라서. 원래 볼넷 자체를 잘 안 주는 편이라, 원래도 적다.

적은 볼넷 때문에 피홈런은 8개인데, 볼넷은 6개인, 볼넷보다 피홈런이 더 많은 웃긴 상황이 되긴 했지만 어쨌든 가장 좋은 부분이다.

두 번째는 제법 많은 탈삼진.

앞서 말했듯 스타일 자체가 공격적이라 성적과 비교했을 때, 삼진도 좀 괜찮게 잡긴 했다. 맞은 게 훨씬 더 많지만, 그래도 제법 잡았다.

오늘은 거기에 다섯 개를 더 추가하면서, 24개가 되었고.

세 번째는 앞서 언급한 두 가지로 완성된 볼삼비인데.

볼넷 한 개 당 삼진 몇 개를 잡았는지 보는 거다.

그게 오늘로 딱 4가 됐고.

투수의 경우 볼삼비가 2면 준수하고, 3이상이면 수준급으로 평가한다던데, 이거 하나만 놓고보면 거의 에이스급이네.

‘이 세 개 정도가 그나마 구단에 어필 가능한 성적이야. 나머지는 오늘 경기로 좋아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많이 부족하고. 특히 ERA는 여전히 리그 평균보다 2 정도 높네. 딱 세 경기만 오늘처럼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시간이 지날수록 힘들겠지.’

거둔 수확이 많은 만큼, 완벽했던 경기라고 자찬할 수 있겠지만, 마냥 그러지는 못하는 건 오늘의 성적이 순수하게 실력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거다.

‘운도 많이 따라줬으니까. 갑자기 상승한 제구나 서클은 제쳐두더라도, 전혀 예상치 못한 변화구에 드릴러스 타자들이 심하게 흔들린 게 커.’

뜬금없는 서클 체인지업에 화들짝 놀란 건가?

오늘 드릴러스는 전체적으로 그것에 과하게 집착했다.

그걸 제구력을 이용해서 손쉽게 잡은 거고.

뭐, 그렇다고 해도 내가 X나게 잘한 건 변함없지만, 마냥 기뻐하긴 좀 그렇지.

거기에다가 상위타선과 하위타선의 격차가 심각한지라, 6번부터는 사실상 공짜였으니, 그것도 감안해야 하고.

거기에 만약 상대가 오늘 나한테 뛰어난 서클 체인지업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제구가 좋다는 것도 미리 파악했으면 결과는 달랐을 거다.

‘정보가 퍼지기 전까지는 성적 좀 올리겠지만. 그 이후에도 괜찮은 성적을 내려면, 지금 이 정도론 어림없어. 뭐가 됐든지 최소한 무기가 하나는 더 필요해.’

오늘의 비약적인 상승이 단순히 일시적인 폼으로 그치지 않고 쭉 유지된다는 가정을 세워도, 나는 조금 기이한 유형의 투수가 된다.

우타자에게 더 강할 테니까. 같은손인 좌타자가 아니라.

‘서클 체인지업 잘 던지는 투수들이 그런 경향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 양반들은 좌타자도 잘 잡으면서 우타자를 잘 잡는 거니. 내 케이스랑은 좀 다르지.’

좌타자보다 우타자를 잘 잡는 투수. 하지만 우타자에게도 서클 말고는 허접한 투수.

그러니 체인지업 읽히는 순간 그냥 끝인 투수.

‘그나마 제구력이 좋으니, 폐품까지는 아니겠지만. 여전히 가치가 낮긴 하지. 그러면 결국 시간 들여서 또 다른 무기도 하나를 키워야 하는데··· 그게 쉽게 되면 내 성적이 더 좋았겠지.’

최소한 내 기량이 지금보다 더 올라갈 때까지, 이번 시즌만큼은 어떻게든 버티게 해줄 만한 버팀목 하나. 그걸 만들거나 찾는 게 우선이었다.

그러지 못한다면, 앞으로 한 몇 경기쯤 신내다가, 그 뒤로는 다시 탈탈 털릴 테니까.

물론 이 모든 건 최악의 가정이니, 실제 미래는 훨씬 밝을 수도 있을 거다.

다행스럽게도, 쓸만한 방법도 금방 떠올랐고.

‘당장에 단점을 채우기가 힘들다면, 장점을 최대한 활용해야겠지. 내 생각처럼 된다면, 위험성이 높아도 급하게 쓸만한 땜빵 정도는 될 거야.’

그것으로 생각을 마쳤고, 그대로 닥쳐오는 경기의 피로감에 쩔어 쭉 뻗어버리려다가, 문득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렇게 열심히 생각하는 것도 오랜만이네. 저번에는 계속 자책만 하다가 끝났는데.’

사실 말이 경기 복기지. 그동안은 그저 자아비판이었다.

천천히 복기하다 보면, 결국에는 모든 문제점이 ‘실력부족’으로 귀결됐었거든.

그건 방법을 강구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그냥 실력이 부족한 건데, 하긴 뭘 해?

다음에도 얌전히 쳐 맞아야지.

물론 답이 없다는 이유로 지레 포기한 것도 있는데. 그래도 이제는 아니다.

적어도 오늘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가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졌으니까.

물론 다음에도 오늘처럼 서클 체인지업이 잘 긁히고, 제구도 오늘처럼 돼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필요하겠지만. 그럴 거라고 믿었다.

‘믿어야지. 자고 일어나도, 똑같기를.’

부디 오늘이 그저 한 여름 날의 꿈 같은 해프닝이 아닌, 드디어 한 걸음 내디딘 진화의 시작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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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치, 혹시 체인지업 그립 어떻게 잡으세요?”

“어? 체인지업? 뭐, 스플릿 체인지업? 미안하지만 난 평범한 쓰리핑거 밖에 못 잡아.”

“저도 그거 물어본 겁니다.”

“그렇다면야··· 근데, 저번에 가르쳐주지 않았던가? Go, 너 처음 합류했을 때도 물어봤었잖아?”

“까먹었어요. 주의 깊게 안 들었거든요.”

“그런데 이제와서 다시 가르쳐 달라?”

“예.”

존 와스딘은 어이가 없었다.

전날의 영웅이라고 할 만한 녀석이 대뜸 아침 일찍 불펜으로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자신에게 체인지업 그립을 묻는 게 아닌가?

뻔뻔한 얼굴로, 저번에 가르쳐 줬던 건 이미 다 까먹었다면서.

그것도 충분히 어처구니가 없기는 한데, 더욱더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어제의 서클은··· 대단했지. 메이저에서도 그 정도는 많지 않아. 그런데 그런 서클 체인지업이 있으면서 굳이 나한테?’

전날 그가 수준급의 체인지업을 능수능란하게 던졌다는 것이다.

물론 그도 체인지업을 던질 줄은 알았다.

애초에 투수라면 대부분 체인지업 던질 줄 아니까.

그립이 특별하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팔을 심하게 비트는 종류의 변화구도 아니니, 못 던질 것도 없지. 그 역시 현역시절에는 제법 많이 던져봤고.

하지만 어제의 고유석처럼 수준 높은 체인지업을 던질 줄 아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그냥 딱 평범한, 솔직히 그 이하의 수준이었다. 누군가에게 가르치기 미안할 정도로.

“어려울 건 없지. 이번엔 잘 봐둬. 다음에 또 갑자기 까먹었다고 하지 말고.”

그래도 직전 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던 유망주가 직접 찾아와 무언가를 배우려고 하는 건, 그 개인적으로도 꽤나 기뻐할 만한 일이기에 존 와스딘은 오래간만에 그립을 잡았다.

‘체인지업, 오랜만에 잡아보네. 얘만 좀 괜찮았어도 커리어가 훨씬 나았을 텐데. 지금처럼 마이너 코치가 아니라, 메이저 코치가 됐을지도 모르고.’

오래간만에 느끼는 손맛이 괜히 반갑기도 했고, 아쉬움가 미련도 솔솔 피어올랐지만. 옆에서 뚫어져라 쳐다보는 고유석의 시선이 너무 강했던지라, 추억 속에 깊이 잠기지 못했다.

“딱 정석적인 쓰피링거네요?”

“말했잖아, 평범한 쓰리핑거라고. 솔직히 이건 Go 너도 던질 줄 알잖아?”

“그립이 쉬우니까 던질 줄은 알죠. 아무튼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대뜸 다시 사라진다.

어제 등판한 녀석이 불펜피칭을 하지는 않을까, 주의깊게 봤는데.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휙 불펜을 나가버렸다.

무리하지 않는 건 다행스러우나, 그럼에도 존 와스딘은 왠지 조금 걱정됐다.

‘어제처럼만 하면, 성적 올리기에는 무난할 텐데, 괜한 욕심 부리는 거 아니야?’

잘 풀릴수록 욕심은 더 크고 강해진다.

존 와스딘 그가 오랫동안 야구계 종사하며 보고 배운 것들이다.

성적이 떨어지는 놈이 아니라, 오히려 좋은 놈이 무언가를 더 갈구했고, 한 번의 발전이 있으면, 그 다음을 단계를 욕심낸다.

나쁜 건 아니지, 그런 욕심이 발전을 만드는 법이니까.

허나 그러다가 과욕에 무너지는 어린 선수들도 많다는 게 조금 마음에 걸렸다.

‘그간 기량이 부족해서 그렇지, 머리는 좋은 녀석이니까, 위험한 짓은 안 하겠지만··· 아, 어제처럼만 한다면, 이제는 기량이 부족하다고도 못 하겠군.’

고유석이 불펜을 나간 뒤, 다시 오늘 등판할 선발투수에게 시선을 둔 존 와스딘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머릿속엔 이미 나간 이의 모습이 가득했다.

정확하게는 어제 마운드에서의 모습이.

‘피칭 방식이야 평소랑 똑같았지만, 위력이 달랐지. 서클 체인지업도 영향을 끼쳤지만, 역시 제구력의 몫이 가장 크고.’

당연히 가장 충격적인 건 타자들을 돌려세운 서클 체인지업이다.

적어도 어제, 딱 한 경기 내에서는 마구처럼 군림했으니까.

허나,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해서 생각나는 건 제구력이었다.

‘로케이션, 컨트롤, 커맨드. 모두 뛰어났지. 원래도 좋은 편이지만, 어제는 거의 자유자재였으니까. 영점은 평소보다 빨리 잡혔지, 변화구의 각도까지 딱딱 계산이 맞았고. 그리고 내려갈 때까지도 기복없이 일정했어.’

어쩌면 화려한 서클 체인지업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발전이다.

구속이 느린 투수는 가치가 낮지만, 제구력이 좋다면 말이 다르니까.

‘어제의 모습만 놓고 보면, 그저그런 마이너리거가 아니라, 구단에서 키워볼만한 유망주지.’

지치지 않는 체력. 훌륭한 제구력. 좋은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쉬이 흔들리지 않는 멘털리티. 내구성이 뛰어나, 큰부상은 물론, 잔부상조차 없다.

‘느린 구속만 빼면 좋은 선발투수 감이야. 그렇기는 한데··· 올해는 주어진 시간이 부족하겠어.’

존 와스딘은 괜히 아쉬웠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저런 모습을 보였다면, 충분한 기회가 주어졌을 테니까.

애석하게도 지금은 조금 늦었다. 곧 마이너 전체를 뒤흔들 거대한 이벤트가 있을 테니까.

‘그래도··· 잘하면 딱 한 경기는 더 기회가 남긴 했지. 그것의 결과에 따라, 어쩌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고. 운이 좋다고 봐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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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하운즈의 홈, 시큐리티 뱅크 볼파크에서는 이번 시리즈의 마지막 경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2회와 4회 초, 드릴러스가 전날 보여주지 못했던 시원한 한방을 선보이며 먼저 5득점을 챙겨갔지만.

‘또 어찌어찌 따라왔네. 우리팀도 진짜 빠따가 좋단 말이야. 특히, 채프먼 쟤는 진짜 메이저가도 통할 것 같은데.’

락하운즈 역시 타격이 좋은 팀인지라.

4회부터 8회까지 5득점을 내며 동률이 이뤄졌다.

그리고 대망의 9회 초.

화끈한 난타전에 경기장이 한창 뜨거울 때쯤, 얌전히 벤치에 앉아, 관중처럼 그라운드를 보고 있던 내 귓가에 흥미로운 말소리가 들려왔다.

“왈터?”

“어, 들어보니까, 어제 경기 끝나자마자 병원 다녀왔다던데?”

“어쩐지 어제 좀 이상하더라.”

옆에 앉아있던 놈들이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인데. 그 내용이 제법 솔깃하다.

‘병원?’

락하운즈에 왈터라면, 어제 선발투수인 코리 왈터밖에 없는데. 그와 관련된 일인 것 같았다.

‘뭔가 했더니, 역시 부상인가? 그런데 병원까지 갔으면··· 생각보다 문제가 크겠는데? 기껏해야 손톱 좀 깨졌나 했더니···’

미국놈들에게 병원은 머나먼 이야기다.

마이너리거들에겐 에베레스트 꼭대기나 다름없고.

더럽게 비싸잖아, 그럴 돈이 어딨어.

제 자신의 회복력을 믿고, 진통제나 좀 씹으면서 버티는 건데.

병원까지 갔다는 건, 사소한 생채기 정도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대충 들리는 말 봐서는, 어제 경기 초반에 공 던지면서 착지를 잘못했던 게 문제라나 봐. 발목이 삐끗했다던가? 염좌래.”

발목을 삐었다면, 공이 지멋대로 가던 게 이해가 간다. 기둥이 흔들리는데, 건물이 무너지지 않고 배겨? 참고 4이닝 던진게 용하네.

‘아픈 거 꾹 참는다고, 공이 제대로 가나. 한 경기 거른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바보짓 했네, 바보짓 했어. 가만, 염좌?

왈터의 과욕에 쯧쯧, 혀를 차다가, 번뜩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쳤다.

그냥 손톱 좀 들렸나보다, 하고 넘겼고, 또 그 다음에는 내 피칭에 스스로 취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알고보니 발이 삐었단다. 발목 염좌라고 하고.

‘만약에 염좌면 못해도 일주일은 아웃이야. 길면 이주도 넘고.’

만약 저 말이 사실이라면, 락하운즈 선발라인업이 최소 일주일에서 최대 이주까지 한 자리가 비게 되는 거다. 그건 당연히 나한테는 기회고.

이동일까지 포함해도 다음 시리즈에는 못나온다고 봐야 하는데.

‘그자리 채울 만한 게 일단 나랑, 그리고 브라이스웰 정도인가?’

벤 브라이스웰.

전문 중간계투에 가까운 사람이기는 한데, 선발 욕심도 좀 있다. 구단에서도 테스트 중이고. 그나마 선발 경쟁자들 중에선 가장 해볼 만한 사람이다.

저~기 마운드에서 열심히 공 던지고 있는 양반인데.

7회부터 등판해서 9회 초, 동점상황까지 던지고 있다.

내내 잘 던지더니, 이번 이닝은 간신히 원아웃 잡은 이후 연이어 볼넷을 내줬다.

좀 아슬아슬한 것 같은데···

“아아아아···”

“어이구, 그걸 쳐 맞아?”

“내가 던져도 너보단 낫겠다!”

“니가 그러고도 미들랜드의 투수냐! 차라리 어제 나왔던 그 공 느린 동양인이 훨씬 낫겠다!”

역시나 한방 맞네. 좀 불안하더니.

깔끔한 1타점 적시 안타. 드릴러스의 역전. 곧바로 강판되서 내려오는데, 좀 불쌍하다. 실점 좀 했다고 관중석 여기저기서 욕 들리는 것 좀 봐.

‘거 살다보면 실점할 수도 있지. 저게 투수 잘못이야? 물론 투수 잘못이지. 상대가 잘 치기도 했고. 아주 속이 다 후련한 안타네.’

아무리 마이너라고 해도 일단은 홈이라는 건지, 응원 열기가 뜨겁다.

사실 관중들 중에서 태반은 가족 나들이 삼아서 왔는데, 몇몇 야구에 진심인 것 같은 사람들이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욕을 퍼부었다.

그러면서 나랑 비교도 하는데, 자꾸 그러면 정말 내 기분이 좋다.

내 공 느리다고 까는 것만 빼면.

‘다른 때라면 모를까, 어제 좀 잘한 것도 있으니까, 한번 비벼볼만 한데?’

겨우 실점 하나 했다고 그런 게 아니다. 저 양반은 애초에 불펜투수에 가까운 사람이고. 나는 그래도 저번 달까지는 선발로 뛴 몸인 게 중요했다.

어차피 땜빵으로 때우는 건 마찬가진데. 기왕이면 선발투수로 오래 뛰어 본 놈이 더 나은거지. 그것까지 감안한다면, 왈터의 공백으로 생긴 빈자리는 브라이스웰보다 오히려 나한테 더 가까울 수도 있었다.

‘좋은 일은 겹쳐서 온다더니.’

그렇게 바라마지 않았던 선발 등판의 기회.

그게 예상치 못한 순간에 불쑥 다가왔다.

‘코치 앞에서 엉덩이라도 흔들어 볼까? 제발 선발로 내보내 달라고?’

보상만 확실하다면야, 썩 나쁜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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