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이게 진짜로 된다고?
리드오프, 앤드류 톨스를 루킹 삼구삼진으로 잡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이닝이 끝날 때까지 계속됐다.
‘막상 진짜 통하니까, 오히려 좀 당황스럽네. 그럼 다음 타자도?’
서클, 내가 봐도 확연히 다르기에 어느 정도 먹힐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솔직히 좀 긴가민가했거든. 근데 실전에서도 통한다는 거잖아?
“아웃!”
2번타자 브랜든 트리퀀(Brandon Trinkwon).
OPS가 7할이 안 되고, 그렇다고 해서 타율도 좋지는 않은, 녀석.
지난 경기들에서 살펴본바에 의하면, 처음에는 무식한 고릴라처럼 휘두르는데, 승부가 길어지면 스윙이 안정되는 신기한 녀석이다.
‘먼저 바깥쪽으로 포심 하나.’
“스트라이크!”
‘비슷한 코스로 낮게 하나 더.’
“스트라이크!”
‘아래로 살짝 빼고.’
“볼!”
‘마지막으로 걸치는 슬라이더.’
그래서 그냥 길게 안 끌고 빨리 잡았다.
타자의 스윙, 허나 구종을 잘못 생각한 듯 멀어지는 공에 배트는 그저 허공을 갈랐지만, 내 두 눈은 타자가 아니라, 포수 글러브에 들어간 야구공에 꽂혔다.
‘저게 딱 들어가네. 왜 이렇게 잘 들어가냐. 내가 핀포인트 제구가 된다고?’
이게 되네?
아주 똑같이는 아니더라도, 원하는 코스에 비슷하게는 들어갔고. 평소와 똑같은 슬라이더인데도, 제구의 차이가 위력을 바꾸었다.
난 솔직히 타자를 헛스윙 삼진으로 잡은 것보다, 그게 더 신기했지만. 몇없는 관중은 그저 연이은 삼진이 좋은 건지 환호성을 내질렀다.
박수소리도 옅게나마 들렸고.
“와!”
“잘하는데? 한놈 더 잡아봐!”
“KKK!”
심지어 몇몇은 하나 더 삼진을 올리라며 소리까지 질렀는데. 애석하게도 KKK는 없다. 3번타자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으니까.
‘이야, 저걸 따라가? 진짜 더블A에는 미친놈들 많다니까. 원래 서클이었으면, 잘하면 넘어갔겠네.’
3번타자 윌리 칼훈은 앞선 동료들처럼 삼진으로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듯.
3구째에 떨어지는 서클 체인지업을 억지로 따라가며 간신히 맞췄지만.
어쨌든 아웃인 건 똑같네.
“와, 이게 된다고? 제구 좀 좋아졌다고?”
비록 세 타자 연속 삼진이라는 볼거리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삼자범퇴였기에 관중들은 그럭저럭 만족한 것 같지만. 그라운드 안은 그것과 비교가 안 되는 충격이 흘렀다.
주로 락하운즈 위주로.
‘신기하겠지. 나도 신기한데, 딴놈들은 오죽하겠어.’
말은 안 해도, 동료들의 얼굴에는 경악이 씌워져 있었다.
내내 멀뚱멀뚱 있었던 야수들은 헛웃음을 흘리기도 했고.
더블A에 올라온 뒤로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데, 뜬금없는 퍼포먼스를 보여주니, 놀라는 것도 당연하겠지.
특히 저~기 벤치에 앉아계시는 오늘 선발투수께선 심기가 불편해 보이고.
‘자기 대신 올라간 놈이 잘 던지니, 괜히 찝찝하긴 하겠네.’
그런 신선한 반응들과 생각하는 대로 딱딱 되는 야구에 흠뻑 젖어, 이닝이 끝났는데도 홀로 마운드에 우두커니 서서 여운을 만끽했지만. 눈치 없이 다가온 보 테일러가 흥을 깨트렸다.
“Suck, 오늘 진짜로 쩌는데? 서클도 장난 아니지만, 컨트롤, 로케이션, 죄다 죽여줘. 설마설마 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그럼 빈말인 줄 알았어? 쯧쯧, 포수가 투수를 믿어야지.”
“너도 투수라서 알겠지만, 원래 투수들이 허세 잘 떨잖아? 오늘은 완봉할 거다, 퍼펙트도 가능하다, 내 공 받다가 손 안 다치게 조심해라, 그런 거 말이야. 그래서 그런 건 줄 알았지.”
“앞으로는 좀 더 신뢰를 가져 보라고.”
“계속 지금처럼만 하면 받들어 모실 테니까, 지금처럼만 해.”
지금을 만끽하려고 했더니 초를 쳐서 짜증났지만, 순수한 감탄사였던지라 기분을 풀었다. 그래, 나도 나지만, 이 양반이 제일 신기하기는 하겠네. 서로 호흡을 맞춘 게 몇 번인데,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됐으니, 어이가 없겠지.
그런 감정을 가득 담은 보 테일러의 말에 피식 웃은 나는 마치 왕의 행차처럼 당당하게 벤치로 걸어갔고. 그 걸음에 맞춰, 다른 녀석들은 슬쩍 자리를 피해줬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데도 굳이 말을 건다거나 하지는 않았고.
투수에 대한 배려인데, 사실 등판하는 날이면 매번 저렇게 배려해주지만, 오늘은 당장의 결과도 좋아서 그런지, 더욱 흡족하게 느껴진다.
“Go, 아주 좋았어. 엄청나던데? 진작 말했으면 선발로 내도 됐겠네. 어떻게, 이대로 2이닝 더 가능하겠어? 지금처럼 말이야.”
“충분하죠, 더 길어도 괜찮습니다.”
“하하,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지.”
투수코치도 마음이 놓인 건지, 립서비스를 해대는데, 이제는 반대로 감독의 표정이 미묘했다. 아니, 잘 던지고 왔더니 왜 저래? 내가 잘 던지는게 싫은 것도 아니고.
그걸 보니 괜히 내 기분도 착 가라앉았지만, 다른 이유가 있겠거니, 하며 애써 무시한 채, 대충 자리에 앉아, 남은 이닝을 차근차근 생각했다.
‘일단 세 명은 잡았고. 어떻게든 5번까지만 순탄하게 조지면, 나머지는 쉬워. 지금도 충분히 쉽긴 한데, 더 쉽겠지.’
투수코치가 립서비스를 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이닝을 더 할당해주지는 않을 거다. 예정대로 딱 3이닝이 끝이겠지. 그러니 앞으로 대충 여섯 타자쯤 남은 건데.
일단 5번타자까지만 잘 넘기면 하위타순인 걸 감안해도 평탄하다.
6번타자부터는 성적이 아주 극명하게 갈리거든.
생각해보면 저쪽 감독도 이해가 되네. 1번부터 5번까지 왜 좌타자만 있겠어?
‘그러고 보니, 왜 좌타우타 나눠져 있나 했더니, 잘하는 놈들 상위타선에 깔고 보니, 죄다 좌타자였던 건가? 거 욕해서 미안합니다, 그려.’
아무튼 오늘 서클이 좋은데, 뒤에는 죄다 우타자고, 그 우타자들은 실력이 안 좋다? 뭐, 말 다 한 거지.
그러니 어떻게든 6번까지만 가면, 그 다음부터는 복병이 될만한 9번타자 드류 매기를 제외하면 죄다 꽁이라는 건데···
‘당장 쟤가 문제란 말이야.’
그러기 위해선 먼저 다음 이닝 첫 타자부터 넘어야 했다.
공수교대로 어수선한 그라운드. 외야 왼쪽 필드로 걸어가는 녀석.
‘벨린저. 또 만났네.’
코디 벨린저.
나는 저 녀석을 잘 안다.
당장 작년까지 같이 하이A, 캘리포니아 리그 뛰었거든.
아주 리그를 폭격하다시피 하며, 마이너 올스타에도 뽑혔었는데, 그 성적이 무시무시하다.
‘30홈런 103타점. OPS는 8할 7푼 정도. 얼굴은 순하게 생겨놓고, 빠따는 흉악하단 말이야. 키는 좀 커도, 체격은 좀 호리한데. 대체 어디서 힘이 나오나 몰라. 배에 두툼한 야구주머니라도 하나 달려 있었으면 이해라도 하지.’
내가 쟤한테 작년에 아마 홈런 세 개에 8타점 줬었지? 시원하게도 털렸네.
재능은 어디서나 통하는 건지, 더블A 올라오고 빌빌대는 나랑은 다르게, 여기서도 더럽게 잘한다.
‘그 다음인 라스 앤더슨은 그래도 잡을 만하니까, 쟤만 어떻게든 넘으면 되는데···.’
이번 이닝은 내 스스로에 취해서 손쉽게 해치웠지만. 아무래도 다음 이닝은 좀 똥꼬쇼를 좀 해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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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회 말, 우리 팀의 공격이 있었지만, 아쉽게도 득점지원은 없었다.
‘흐름 안 끊겨서 좋네. 그래, 어차피 점수 못 낼 거면, 시간 끌지 말고 차라리 빨리빨리 아웃되는 게 낫긴 하지.’
물론 전적으로 투수의 입장이다.
타자들이 들으면 욕하겠지.
팀을 위하는 마음이 없다며 구단에 찍힐 거고.
아무튼 그렇게 순식간에 끝난 공격에 이 더운 날 껴입은 점퍼를 벗어던진 나는 덕아웃을 나가기 전, 멀리 외야에서 자기팀 벤치로 걸어가는 벨린저를 봤다.
‘방법이 떠오르긴 하는데···’
공격이 진행되는 짧은 시간 동안 몇 가지 방법이 떠오르기는 했다.
‘가장 현실적이고 실리적인 방법은 그냥 거르는 거지.’
간단하다.
저 팀에서 제일 까다로운 건 코디 벨린저고, 나머지는 적어도 ‘지금’, 오늘 경기에서는 할만하다.
지금 상황이 일시적인 폼인지, 아니면 진짜 실력 상승인지는 알 수 없으니, 그 다음은 보장 못하고.
그러니 그냥 쟤 거르고, 나머지 잡으면 아주 편하다.
좀 쫄보 같지만 뭐 어때? 위대한 매덕스도 그랬잖아. 자기는 배리 본즈가 제일 쉬웠다고.
그냥 거르면 되니까.
옛 성현의 말씀을 따르는 거지.
‘방법이 없었다면 냉큼 그랬을 텐데··· 오늘은 또 욕심이 난단 말이야. 해볼만 하기도 하고.’
하지만 차마 확정하지 못하는 건, 일말의 가능성이었다.
내 마음대로 공이 박히고, 죽여주는 결정구가 있는 오늘이기에 가능성이 있고.
또 저 정도 타자한테 통하는 쓸만한 방법이 있거든. 찾은 약점도 몇 개 있고.
대충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배트스피드가 빠른 녀석인데, 그 녀석조차 못 따라갈 정도 구속의 패스트볼.
이건 사실 약점이 아니라, 당연한 거니 언급하는 것도 우습고, 또 어차피 나는 그렇게 못 던지니까 패스.
진짜는 그 다음이다.
‘체인지업. 좌투수가 던지는 체인지업에 약해. 낙폭이 깊다면 더 좋고.’
이건 나도 할 수 있다.
일단 지금 당장 내 체인지업은 죽여주니까. 역회전이 가미된 서클 체인지업이라는 게 좀 걸리기는 한데.
낙폭이 무슨 커브수준으로 크니, 얼추 통하기는 하겠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돼. 체인지업으로 삼진 잡는다고 쳐도, 투 스트라이크까지는 어떻게 할 건데? 패스트볼이나 슬라이더는 그대론데.’
잠깐 고민하는 찰나, 상대팀 덕아웃에서, 글러브를 벗으며 배트를 집는 벨린저의 얼굴이 눈동자에 박혔다.
볼 때마다 신기하단 말이야.
아니, X같단 말이야.
‘참 불합리하네. 얼굴 잘생겼는데, 야구도 잘하고. 이거 세상 X같아서 살겠나. 어느 정도 밸런스를 맞춰줘야지.’
한 가지는 확신한다.
쟤는 무조건 스타가 될 거다.
마침 팀도 다저스라는 초인기팀이니, 아주 팬을 몰고 다니겠지.
재능이 대단하니, 빅리그에 못갈 것 같지는 않다.
그러고 보니, 다저스에 우리나라 선배님도 계셔서, 한국에서도 자주 중계하는데, 쟤 콜업하면 좀 난리겠네.
‘오케이, X발 오늘처럼 되는 날에 빼는 것도 쪽팔리지. 저런 미래의 슈퍼스타한테 삼진 하나 안겨 주는 것도 나쁘진 않잖아? 못 먹어도 고다. 혹시 알아? 대단한 유망주 잡았다고 주목 좀 받을지.’
잘난 얼굴과 저 녀석에게 펼쳐질 황금빛 미래를 상상하니 시기심에서 비롯된 용기가 샘솟았다.
‘잘난 놈들한테 잘 먹히는 필살기가 하나 있지. 어디 제대로 붙어보자고.’
부푼 가슴으로 벤치를 나서자, 나를 보는 눈빛이 느껴진다.
관중들은 저번 이닝처럼 화끈하게 하라며 응원했고, 나한테 이미 잡힌 떨거지들은 불쾌한 듯 눈을 부라린다.
아직 못 만난 놈들은 머리가 복잡해보이고. 근데 쟤는 뭐가 저렇게 당당해?
‘아주 자신감 만땅이셔? 한번 털어먹은 놈이다 이거냐?’
마찬가지로 준비를 마친 건지, 벤치에서 나와 배트를 붕붕 휘두르던 벨린저는 특유의 나른한 눈빛으로 나를 봤고. 그 속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내가 지금 무슨 퍼포먼스를 보이던지 간에, 해볼만 하다는 거겠지.
이미 몇 번 털어먹은 경험도 있으니까.
불쾌감이 순간 입술을 꽉 깨물었을 때.
슬쩍 다가온 보 테일러가 물어왔다.
“거를까?”
“아니, 그럴 수는 없지.”
당연히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그저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치 다른 방법이 있냐고 말하는 것처럼.
“자신 있어?”
“딱히? 그래도 하나 괜찮은 방법이 있기는 해.”
“뭔데?”
“저쪽 타자들 중에서 쟤한테만 먹힐 거야. 볼배합 알려줄 테니까, 쟤 상대로만 그렇게 가자. 안 통하면 그때부턴 다시 네가 판단대로 가고.”
“궁금하니까, 뭔지 말이나 해봐.”
대충 간략하게 알려주자, 그게 통하겠느냐는 듯 의심스런 표정을 짓는다.
그래도 이전 이닝에서 보여준 게 있어서 그런지, 떨떠름하게나마 고개를 끄덕이네. 좀 믿어라 새끼야.
그렇게 볼배합을 교환한 뒤, 마운드로 향하며,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판은 깔렸으니, 걸어야지. 뭐, 안 통하면 어때? 기껏해야 피홈런 하난데. 어차피 더 내려갈 성적도 없고.’
텍사스 특유의 습기없이 건조한 공기가 폐 안을 가득 채웠고.
오후에 시작한 경기인데, 시간이 제법 흐른 건지, 뜨거웠던 태양도 옆으로 넘어가고 있다.
‘눈뽕 효과 같은 건 없나? 내가 공 던질 때, 갑자기 햇살이 반짝거린다거나. 되는 날이면, 그 정도는 해줘야지.’
긴장해서 그런가, 불쑥 떠오르는 개소리를 억지로 쑤셔 넣고 마운드에 올랐다.
잘 해야지, 저런 놈이 타석에 있는데 딴 생각 했다가는 그대로 홈런 구경하는 거야.
마운드에 올라간 뒤, 곧이어 벨린저가 타석을 가득 채웠고. 약간의 적막 이후 심판은 경기 진행을 선언했다.
마운드에 오르기 전만 하더라도 잡생각이 많았는데, 그래도 프로선수라서 그런지, 한순간 긴장감이 바짝 조여졌고. 그대로 여전히 나른하게 쳐다보는 벨린저와 눈을 맞췄다.
‘얼굴이 순하게 생겨서 그렇지, 머리가 좋은 녀석이야. 언뜻 봐서는 그냥 무식하게 띄우는 것 같아도 상당히 계산적이고. 그러니 더 잘 먹히겠지.’
계획은 이미 세워졌다.
상대가 단순무식하면 역효과가 나기도 하는데, 최소한 내가 봤을 때 저 녀석은 재능충만하고 똑똑한 놈이니, 어떻게든 되겠지.
‘어차피 배트 스피드가 빨라서 어설픈 포심으로는 못 잡아.’
제구가 잘 되니, 코너위크를 공략하면 괜찮을 수도 있겠지만. 조금이라도 삐긋하면, 그대로 넘어간다.
슬라이더··· 좌타자 상대로 좋은 무기이기는 한데, 쟤한테 맞은 홈런 두 개가 다 슬라이더여서 조금 꺼려지고.
커브도 던질 줄은 아는데, 완성도가 심각하게 낮아, 아마 던지는 순간 바로 넘기겠지.
‘그러니 간부터 보자. 통할지, 안 통할지.’
길게 숨을 뱉은 뒤 허리를 숙이자, 보 테일러가 글러브를 때린다. 뭘 던지든지 다 잡아주겠다는 것처럼.
포구 능력이 좋은 편은 아니라,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그래도 그를 믿고서 나는 바로 초구를 뿌렸고.
“스트라이크!”
벨린저는 그대로 지켜봤다.
몸쪽 낮은 코스의 서클 체인지업.
한번 건드려볼 만한 코스일텐데, 미동조차 없다.
그래도 설마하니 초구부터 체인지업을 던질 줄은 몰랐던 건지.
표정은 살짝 놀란 것 같긴 한데, 딱 그정도.
‘무섭다, 무서워. 반응이라도 좀 해라. 그래도 일단 스트라이크 하나. 그리고···’
쉴 틈은 없다.
계속해서 몰아쳐야지, 녀석이 자기 직관에 의존하도록.
시간 좀 주면, 바로 파악하고 배트 내밀 테니까.
공 넘겨받자마자 2구를 던졌고. 두 눈동자 가득 역동적으로 꺾이는 타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후웅-
앞서 5회 초에 들었던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소리.
공기를 가르는 게 아니라 찢는 듯한 쨍한 소리가 귓구멍에 박혔고, 등 뒤가 싸늘하게 식었다.
‘식겁했네. 저거 잘못 맞으면 스쳐도 넘어가겠는데?’
헛스윙. 하지만 가깝다. 무척이나. 바깥쪽으로 좀 멀게 던졌는데, 만약 삐끗했으면, 그대로 배트 끝에 걸렸겠지.
쟤 힘을 감안하면 외야까진 넉넉하게 갔을 거고.
아직까지 제구가 내 뜻대로 잘 되는 게 정말로 다행이었다.
‘그래도 투 스트라이크. 일단 계획대로 되기는 했다.’
그럼에도 방심할 수는 없는 건, 저 무서운 재능 때문이겠지.
그래도 투수에게 유리한 카운트니, 좋은 제구력을 믿고 아슬아슬하게 승부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그랬다가 혹시라도 승부가 길게 끌리면 그땐 진짜 엿된다.
저 녀석이 나한테 익숙해지거나, 서클 체인지업의 타이밍에 적응하면. 상상하기도 실네.
‘간신히 카운트 잡았는데 어쩌겠어? 가야지.’
살살, 점토를 빗듯이 손안의 공을 굴렸다. 최대한 손에 익숙해지도록, 그래서 더 잘 들어가도록. 손때가 묻으면 공이 잘 가거든. 당연히 미신이지만, 굳이 안할 이유도 없잖아?
그것으로 준비는 마쳤다.
이제 남은 건 실행하는 것뿐.
“흐읍-”
길게 뻗는 와인드업.
땅에 뿌리박힌 하체를 기둥 삼아, 힘껏 상체를 휘두른다.
이번 경기에서 가장 큰 집중을 기울인 공이다. 가장 섬세하게 던진 공이고.
손때가 제대로 묻은 건지, 공은 물 흐르듯 유려하게 왼손을 빠져나갔다.
‘스윙··· 죽이네.’
그런 공을 향해, 앞전에 봤던 역동적인 스윙이 다가간다.
마치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그 전진에는 어떠한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스윙이 아름다운 직선을 그리며 공의 예상궤도로 나아갈 때.
헬멧을 뒤집어쓴 벨린저의 입가에 처음으로 미소가 감돌았다.
‘수고했어.’
이번 경기에서 가장 멋진 스윙이 아니었을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박력, 속도, 동작. 모든 게 완벽했으니까.
그러니까 재밌는 거지.
저 아름다운 스윙이.
‘혼자 수싸움 하느라.’
체인지업 세 개만 냅다 던진 놈한테 진 거니까.
후웅~
다시금 스윙 소리가 들린다.
묵직한 타격음은 아니다.
이번에도 허공을 갈랐으니까.
공은 급격하게 꺾이며, 배트의 밑을 유유히 지나쳤고.
배트는 볼 끝을 스치지도 못했다.
헛스윙 삼진.
벨린저는 반 바퀴를 돌고서야 멈췄고, 반쪽만 보이는 그의 얼굴은 처음으로 포커페이스가 깨져, 허탈한 미소가 감돌았다.
볼배합은 심플하다. 안쪽 체인지업, 바깥쪽 체인지업, 그리고 다시 안쪽 체인지업.
이게 뭔 개똥 볼배합인가 싶겠지만, 의외로 잘 통한다.
잘난 놈일수록 더더욱.
똑똑하니까, 지 혼자 수싸움 하거든.
나는 그냥 무식하게 같은 것만 던진 건데 말이야.
‘편견이지. 공 느린 놈이니까, 당연히 피네스 피처이고. 그러니 수싸움에 능할 것이라는 편견.’
스윙의 궤적을 보아, 패스트볼을 노린 거다.
퀵 앤 슬로우, 뭐 그런 걸 염두에 둔 건가?
느린 체인지업 두 개로 타이밍 흔든 다음, 전력투구의 패스트볼로 파바박!
‘내가 미쳤냐, 너한테 패스트볼 던지게. 바로 공 쪼개버릴 텐데.’
그럴 리가 있나. 전력으로 던져도 89마일 나오는데. 뭔 퀵 앤 슬로우야.
95마일만 나왔어도 그렇게 하기는 했겠네.
‘잘 가라, 다시는 만나지 말자.’
빡이 친 건지, 이딴 허접한 수에 넘어간 자신이 미운 건지,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거칠다.
이미 한번 보여줬기에, 다음에는 같은 수가 안 통할 테니, 다시는 만나지 말자는 뜻을 담아 벨린저의 등에다가 눈인사를 한 뒤, 앞으로 줄줄이 올라올 다른 놈들을 봤다.
‘후련하네. 속이 아주 뻥 뚫렸어.’
거대한 산 하나를 넘고서 내려보는 세상은 무척이나 시원하다.
모든 게 쉬워 보이기도 하고.
‘잘하는 놈들이 보는 세상은 이런 풍경인가?’
타자들도 나를 본다.
긴장하는 놈도 있고, 의지를 불태우는 놈도 있고, 껄끄럽게 여기는 놈도 있고, 한숨 쉬는 놈도 있고. 제각각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데, 요상한 건 내 눈엔 다 똑같이 보인다는 거다.
‘죄다 스탯으로 보이네.’
전리품이다.
강적을 넘었으니, 응당히 챙겨야 할 전리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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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대로 코디 벨린저 이후로 나머지는 그저 일사천리였다.
그나마 마지막 관문이었던 5번타자 라스 앤더슨까지 범타로 물러나자, 그 뒤로 이어진 우타자들의 행렬은 두당 1분을 넘기지 못했으니까.
“스트라이크 아웃!”
그나마 하위타선에서 가장 걱정했던 드류 매기가 좀 시간을 끌었는데. 그 역시 바깥쪽으로 멀어지는 서클 체인지업에 6구째 삼진으로 물러났다.
그것을 끝으로 오늘의 피칭이 끝났다.
“수고했어, Suck. 앞으로 쭉 이러면, 빅리그 금방 가겠는데?”
“계속 이러면 빅리그가 문제겠어? 사이 영도 타겠구만.”
“이럴 때는 좀 겸손하게 구는 거야. 한 경기 잘했다고 아주 기고만장하네.”
3이닝. 5탈삼진 퍼펙트.
볼넷도 없고, 피안타도 없다.
실점은 당연히 없고.
등판 시점에서 이미 팀이 이기고 있었기에, 승수는 못 올렸지만. 사실 이 성적이면 승수는 중요하지 않다.
솔직히 이 정도면 뻐길만 하잖아?
“오늘 같은 날 선발로 나왔어야 하는 건데. 퍼펙트 게임 날렸네, 아쉽다, 아쉬워.”
“Suck 너 잘한 건 인정하는데, 그렇다고 지랄하지는 말고.”
사실 3이닝에다가 퍼펙트를 붙이는 것이나, 그걸로 퍼펙트게임을 아쉬워하는 건 내가 생각해도 개지랄이기는 한데, 뭐가 어쨌든 기분 좋은 기록이니까.
또,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충분히 어필도 되고.
“Go, 아주 훌륭한 피칭이었어. 대체 그 서클은 어디서··· 아니, 그냥 수고 많았다.”
저봐저봐, 투수코치 표정.
이닝을 마치고 내려가자, 존 와스딘은 아주 놀라다 못해, 침 떨어질 기세로 나를 맞이했다. 뒤늦게야 자기 꼴을 알아차린 건지, 애써 덤덤한 척 체통은 지키는데, 너무 늦었어 이 양반아.
컨디션이 좋다고는 해도, 설마 진짜로 이렇게 잘할 줄은 몰랐겠지.
“이번 이닝이 마지막이죠?”
“다른 녀석들도 뛰어야지. 그래도 오늘처럼만 하면 금방 자리 잡겠는데?”
역시 아까 추가이닝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겠다는 말은 립서비스였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해봤지만, 역시 더 이상의 이닝은 없다.
‘지금 이 기분을 더 느끼고 싶은데. 조금 아쉽네.’
뭐, 그래도 심각했던 성적에 꽃 한송이 피우고, 투수코치한테는 깊은 인상을 남겼으니 그걸로 만족해야지.
또 혹시 아나? 오늘의 퍼포먼스가 밑천이 되어서, 선발등판 하나 물어올지.
“Suck, 너 진짜 미쳤는데? 아니, 저번 경기에선 개판이더니, 갑자기 이렇게 달라져? 오늘 체인지업은 또 뭐고? 너 그립 어떻게 잡아?”
“X신이냐? 내가 바보도 아니고, 밑천을 왜 알려줘?”
“에이, 이름값 하지 말고, 아량을 배풀라고, 아량을.”
“오늘은 Suck이 아니라 Cool인데? 아까 벨린저 잡을 때 미친놈인 줄 알았어.”
그렇게 7회를 끝으로, 점퍼를 입는 게 아니라, 아이싱을 하니.
이제는 거리낄 게 없는 건지, 주변이 시끌벅적해졌다.
어떻게 한 거냐는 둥, 실력을 숨긴 거냐는 둥, 너 혹시 뭐 먹었냐는 둥.
차마 등판 중인 투수를 귀찮게 할 수 없어 꾹 참고 있던 질문들이 오만 곳에서 다 터져나왔다.
특히 다니엘 고셋은 혹시나 그립을 알 수 있을까, 탐스럽다는 듯이 내 왼손가락을 뚫어져라 봤고. 얘도 확실히 정상은 아니야. 남의 그립을 막 묻는 거 보면.
아무튼 그렇게 주변이 시끌벅적해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 눈을 사로잡은 건, 옆에서 열심히 떠드는 녀석들이 아니라, 멀찍이 떨어져 앉은 놈들이었다.
‘이제 좀 의식하네.’
다른 투수들.
그들이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의례적인 축하 정도는 해줬지만, 그 외에는 오직 경계 섞인 눈빛뿐.
의외겠지, 안중에도 없었던 놈이 뜬금없이 불쑥 튀어 올랐으니.
그것도 지금까지는 신경쓸 필요없이, 알아서 망하고 있던 놈이.
물론 겨우 한 경기, 그것도 3이닝에 불과하니 진지하게 경계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최소한 시작점에는 선 것 같았다.
‘그래, 그렇게 봐야 맞는 거지. 안 그래? 명색이 서로 밥줄 놓고 싸우는 경쟁잔데 말이야. 이제 좀 사람 같이 보네.’
좁디좁은 빅리그 슬롯을 두고 다투는 치열한 경쟁의 시작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