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오늘 경기 상대는 털사 드릴러스(Tulsa Drillers).
다저스 산하의 더블A 팀이다.
현재 노스 디비전 2위인데, 괜찮은 놈들이 많다.
주로 타자 쪽에서.
‘클린업 트리오가 X같지.’
특히나 윌리 칼훈(Willie Calhoun), 코디 벨린저(Cody Bellinger), 라스 앤더슨(Lars Anderson)으로 이어지는 3-4-5 클린업의 파괴력은 아직 시즌 초반 모두가 알 만큼 상당하다.
‘서클이 아니라, 슬라이더가 긁혔어야 하는 건데··· 그래도, 나머지 놈들은 잡을 수 있으니까.’
셋 다 좌타자인 만큼, 좌완이라서 같은 손 투수인 나로서는 딱히 나쁘지는 않다고 볼 수 있겠지만.
하필이면 오늘 폼이 좋은 게 서클 체인지업인지라, 약간의 아쉬움은 어쩔 수 없었다.
‘타순 참 X같이 냈네.’
만약 슬라이더까지 좋았다면, 좀 더 수월했을 테니까.
‘그래도 낙폭이 길어져서, 같은 손 타자를 상대로 브레이킹볼로 써도 충분히 효과를 보기는 하겠지.’
그들 외에도, 9번에 위치한 드류 매기(Drew Maggi) 역시, 꽤나 까다롭다.
3할 2푼의 타율에, 8할4푼의 OPS. 얘가 왜 9번이지, 싶은 성적을 올리고 있으니까.
아마 유격수라는 포지션 특성상, 체력부담을 덜어주려는 의도겠지만, 그런 배려가 한층 더 X같은 타순을 만들었다.
‘1번부터 5번까지는 좌타자. 6번부터 9번까지는 우타자. 저쪽 감독 대가리는 대체···’
사실 다른 때였다면 우타자 일색인 하위타선이 더 역겨웠겠지만. 오늘은 믿을 만한 손패가 있었기에 나쁘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좀 흔들리는 것 같은데. 제구가 불안해. 불펜에서는 다 씹어 먹을 기세더니.’
그런 기이한 상대 타선을 맞이한 코리 왈터는 경기 시작부터 불안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1회 말, 1득점을 올린데 반해, 상대를 무실점으로 막고 있어, 경기 자체는 우리가 리드중이기는 한데, 피칭 내용이 좋냐고 묻는다면, 글쎄?
‘상대가 배트를 막 내밀어서 그렇지, 꾹 참았으면 볼넷이 좀 나왔겠어.’
불펜에서 보였던 다 씹어 먹을 것 같은 모습과 비교하면 요상한 결과였지만. 뭐, 그게 야구지.
‘아직까지 실점은 없지만, 지금 기세로 보면, 언제 터져도 터질 것 같은데. 뭐가 문제지?’
마이너라고 해도, 중계방송은 있고, 불펜에 티비도 달려 있다. 그걸로 중계방송을 틀어주는데, 그걸 통해서 나는 불펜 바깥 상황을, 정확하게는 코리 왈터의 문제를 추론해냈다.
대략 떠오르는 게 몇 가지쯤 있기는 한데, 그게 맞다면, 내 등판이 예상보다 빠를 수도 있고.
‘어거지로 승리요건 갖추려고 5회까지 끌고 간다고 쳐도, 그게 끝이야. 실제로는 그보다 더 빠르겠지. 못 알아차릴 만큼 무능한 사람이 아니니까. 그러면··· 내 차례다.’
어깨는 충분히 달궈졌다.
천천히 불펜피칭하며, 모닥불로 훈제하듯 성실하게 쌓아올린 감각이 왼팔이 가득하다.
그러니 준비는 이미 마쳤다고 보면 되고, 문제는 타이밍이 언제냐는 건데···
“왈터··· 좀 이상한 거 같지?”
“이상하지. 큰 건 아니고, 자잘한 문제야. 아니, 크다고 봐야 하나?”
“Suck, 뭔가 아는 거야?”
“같은 투수니까. 대충 짐작은 가지.”
파즈, 얘까지 알아차릴 정도면 이제 곧 터지겠네.
“아···”
예상은 적중했다.
4회 초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리 왈터는 연이어 안타를 허용했고. 실점이 올라갔다.
1대1, 이제 점수는 동률.
실점이나 연타석 안타야 언제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진짜 문제는 그 다음이다.
‘폭투. 욕심 좀 참지 그랬냐. 기왕이면 나한테 기회 좀 주지 그랬어. 그럼 이번 경기는 거르더라도, 구단에서 별 신경도 안 썼을 텐데.’
코리 왈터가 던진 공이 포수 머리 위로 휙 지나갔다.
폭투. 영어로 하면 와일드 피치. 결정타였다.
이후 역투를 보이며 어찌어찌 이닝을 마무리 짓기는 했고, 추가실점까지 허용하지는 않았지만, 좋았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은 건 불펜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부상인가? 왈터, 쟤 컨트롤이 나쁜 편은 아니잖아? 폭투를 할 정도로. 고셋이야, 밥 먹듯이 하는 편이지만···”
옆에서 파즈가 중얼거리는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 내 차례였으니까.
마지막까지 확실하게 끌어올린 경기감각을 유지하며, 불펜 한쪽의 전화기에 시선을 뒀다.
곧 울릴 테니까.
‘왔다.’
“전화 왔는데? 설마, 왈터를 벌써 내린다고? 폭투 빼면 괜찮았던 거 같은데··· 겨우 1실점이고.”
“잠깐만, 기다려 봐.”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
앤디 파즈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것 같았다.
맞는 말이다. 좀 흔들리기는 했어도, 방금 전까지 잘만 던졌으니까.
4이닝 1실점이면 준수한 수준이고, 안타를 좀 맞긴 했지만, 그것 역시 어느 정도는 감내할 수 있는 정도다.
그런 투수를 바로 교체한다는 건 그리 흔한 이야기는 아니지. 내막을 알면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곧 전화를 받은 불펜코치의 표정은 조금 미묘해졌고, 곧 통화가 끝난 뒤, 그는 나를 봤다.
“Go. 몸은 충분히 풀었지? 어깨는?”
“좋아요. 몸이야 이미 아까 전에 다 풀었고요.”
“그렇다니 다행이네, 투수교체야, 5회 초에 바로 등판할 거니까, 준비하고 있어.”
짜릿한 감각이 몸에 흘렀다.
소중한 등판 기회가 와서?
맞다. 등판은 언제나 기쁘니까.
하지만 오늘은 그에 한 가지 이유가 더 추가됐다.
‘최소한 나랑 앤디 녀석만 보지는 않겠네.’
서클 체인지업.
우리 둘만의 이야깃거리로 남지는 않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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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부상이구만.’
불펜을 나와, 마운드로 걸어가며 덕아웃을 보니 조금 어수선하다.
예상했던 대로 투수코치는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고, 방금까지 공을 던지던 코리 왈터는 표정이 좋지 않다.
딱 보면 알지. 나도 투순데.
‘발목을 삐었다거나, 손톱이 깨졌다거나, 아니면 살짝 들렸거나. 보통은 그 정도지.’
투수가 겪을 수 있는 자잘한 부상, 사실 부상이라고 말하는 것도 조금 미묘한 것들.
허나 그 미묘함에서 코치와 선수의 입장은 아주 극명하게 갈린다.
특히, 한 경기, 한 이닝, 공 하나가 소중한 마이너로 가면 더더욱.
선수로서는 그 정도는 그냥 감안하고 던져도 상관없지만, 코치 입장에서는 자기 밥줄을 위해서라도 무조건 막아야 하거든.
사소한 문제라고 할지라도, 부상이 있는 투수를 마운드에 올린 게 들키면, 그대로 모가지 댕강이니까.
애슬레틱스처럼 거지라, 팜으로 먹고사는 구단들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나로서는 나쁠 건 없지.’
사소한 이유로 기회를 날린 코리 윌터는 짜증나겠지만. 나는 그저 아주 지극히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신 투수코치를 찬양할 수밖에.
그리고 선발 경쟁자 중 한명이 코치의 신뢰를 잃는 것 역시 나한테는 이득이 될 테고.
“오늘 좀 어때?”
“그냥저냥 평범해. 나도 나지만, 상대 타선은 어떤데? 타격감 좋아 보여?”
“나쁘지는 않아. 아직 제대로 터지지는 않았는데, 너도 알겠지만, 한방이 있는 놈들이 제법 있잖아?”
“조심해야겠네. 나로서는 더더욱.”
마운드에 올라간 뒤, 다가온 포수, 보 테일러와 간략한 이야기를 나눴다.
상대팀 자료야 어차피 이미 구단에서 나눠준 거고, 또 이번 경기가 시리즈 마지막 경기라, 이미 이전 경기에서 기량은 충분히 봤다.
그러니 진짜 알아야 할 건 오늘의 타격감각.
‘4이닝 동안 안타 여섯 개. 그중 절반은 4회에 터진 거고. 그러면 이닝 당 안타 하나 정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 앞서 불펜에서 봤던 것처럼 배트를 쉽게 내는 성향이 있는데. 내 입장에서는 그게 문제겠지.
스치면 넘어가거든.
여기, 텍사스 리그, 더블A에서 경기를 뛰고, 경험하면서 배운 게 바로 그거다. 정타는 거의 무조건 넘어간다는 것.
‘결국 오늘도 어렵게 가야 한다는 건데··· 뭐, 언제는 안 그랬나. 그래도 우타자는 평소보다 더 쉽잖아?’
“보, 오늘은 서클 위주로 가자. 느낌이 괜찮아.”
“어느 정도?”
“최소한··· 우타자가 상대하면 미칠 정도? 파즈는 X같을 거라고 말하던데.”
“그럼 그래야지. 연습투구 때는 최대한 숨겨.”
“1번부터 시작이지?”
“어, 두 타순 돌았으니까.”
“오케이, 그럼 수고해.”
“Suck, 너도.”
가벼운 하이파이브를 끝으로 보 테일러를 내려 보낸 나는 투수코치를 봤다.
착잡한 표정인데, 머리가 복잡하겠지. 경기계획은 이미 좀 망가졌고, 마운드는 이 팀에서 가장 못 믿을 놈에게 맡겨졌으니까.
‘오늘은 한번 믿어보쇼. 기왕이면 위에다가 좋은 말도 팍팍 해주고.’
그에게 안심하라는 듯 살짝 웃어 보이자, 표정이 조금 누그러져 보인다.
나쁜 사람은 아니야. 좋은 놈 편애하는 건 그냥 당연한 일이고.
‘결국 내가 잘하면 다 되는 거지. 성적만 좋으면 그때는 또 내 위주가 될 테니까. 어디, 오늘부터 시작해보자고.’
탄력있게 몸을 꺾이며 투구폼을 잡았다.
심판이 긴 시간을 주지 않았지만, 어차피 어깨는 충분히 풀었으니, 연습피칭에서는 적당히 영점만 잡으면 된다.
‘적당히만 들어가라, 적당히만. 많은 거 안 바란다. 평소처럼만 들어가. 그거면 돼.’
제구는 평소에도 자신 있는 것 중 하나다. 사실 나 같은 스터프에 제구까지 나쁘면 여기 있지도 못하지.
물론 막 스트라이크존 6분할, 9분할 그딴 건 불가능하고, 안쪽 바깥쪽 정도는 구분할 수 있는 정도?
그걸로 여기까지 기어 온 건데, 오늘은 멋진 무기도 하나 쥐었으니, 부디 그걸 잘 사용할 수 있기를 바라며, 마운드에서의 첫 구를 던졌다.
‘나쁘지 않은데? 힘 빼고 던진 걸 감안해도, 생각보다 잘 박혀.’
팍팍 포수 글러브에 박히는 공은 묘한 감흥을 줬다.
보 테일러의 경우 포구능력이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닌데, 지금은 글러브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정확하게 잡았다는 거지.
‘이거··· 잘하면 제구도? 컨디션이 좋더라니. 진짜 무슨 날인가?’
갑자기 생겨난 무기 두 개.
조금은 당혹스럽지만, 대충 그림은 그려졌다. 어떻게 상대를 요리할 지에 대한 그림이.
‘죽여주는 결정구 하나랑 평소보다 좋은 제구력. 그럼 된 거지. 맛있게 받아먹어 보자고.’
상대를 보는 두 눈에 힘이 조금 더 실렸고. 적어도 오늘은 타자들을 당당하게 노려봤다.
‘앤드류 톨스. 리드오프이기는 한데, 얘도 뻥파워가 좋아. 스치면 가겠지.’
가장 먼저 1번타자.
앤드류 톨스(Andrew Tolse). 그가 오늘 경기 첫 희생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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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딴 놈이네?”
“좀 이상하다 싶더니, 바로 교체됐네. 슬슬 적응 되고 있었는데.”
“쓰읍- 한 타석만 더 왔어도 홈런 하나 먹는 건데.”
5회 초가 시작되고, 투수가 마운드로 올라왔을 때, 드릴러스 벤치는 잔잔하게 요동쳤다.
이제 슬슬 상대 선발투수에게 적응되기도 했고, 또 약점도 확실하게 깨달았는데. 그걸 뽑아먹기 직전에 바로 교체가 됐으니까.
타자들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고, 몇몇 자신만만한 선수들은 홈런 하나를 빼앗겼다며 서로 낄낄거리기도 했다.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가볍다.
비록 상대가 4회 말에 득점을 올려, 지고 있는 중이기는 하지만, 언제든지 역전의 가능성은 풍부하고.
또 막상 새로 올라온 투수를 보니, 그다지 위협감이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쟤 아직 있네? 6월 되면 내려갈 줄 알았더니.”
“기회 좀 주는 거겠지. 투수잖아? 투수는 기회 많이 줘.”
“뭐, 선발 내려간 건 좀 아쉽긴 해도, 쟤도 나쁘지는 않지.”
“왜~ 대단한 녀석인데. 여기까지 올라온 것만 해도 얼마나 대단하냐? 막말로 싱글A급도 안 돼 보이는데.”
“고마운 놈이지. 타자들 성적 올려주는데, 얼마나 고마운 놈이야?”
Go You-Suck.
노리고 지은 별명인지 아니면 진짜 본명인지는 몰라도, 참 어메이징한 이름을 가진 저 투수는 텍사스 리그의 타자들 사이에선 유명한 투수다.
만만한 먹잇감으로.
84~5mp/h대의 패스트볼.
최고로 찍어도 겨우 89mp/h.
구위도 안 좋다. 스치면 넘어가는 건데, 아직 시즌 초반인데도 높은 피홈런이 그걸 증명한다.
제구력은 괜찮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단히 뛰어난 변화구도 없다.
가끔씩 당황스러울 만큼 정확한 타이밍으로 취약점을 찌르지만, 그게 전부인 투수.
그런 주제에 공격적이라서 볼넷은 또 기가 막히게 적은 저 동양인 투수는 죄다 까다로운 이 리그에서 그나마 타자들에게 가장 만만한 상대였다.
“톨스! 한방 날려!”
“바로 동점 가야지! 리드오프 홈런 때리고 와!”
타석으로 걸어가는 당당한 1번타자의 걸음걸이는 저 투수가 이곳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단편적으로 보여줬다.
점수가 뒤지고 있는 상황인데도 가득한 열기. 넘치는 자신감. 드릴러스의 머릿속에 패배라는 생각은 없었다.
저 투수를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요리할까. 배트 플립은 할까 말까, 홈으로 들어올 때는 어떻게 걸을까, 하는 상상만 가득했을 뿐.
“어···”
“와··· 미친.”
“저걸 왜 스트라이크를 잡아줘? 주심 문제 있는 거 아니야?”
“들어왔어. 제대로 꺾여서.”
허나 그 생각은 타자가 타석에 들어가고, 딱 1분 동안만 유효했다.
앤드류 톨스가 타석에 올라가, 승부가 시작되고, 이후 루킹 삼진으로 물러나기까지 걸린 시간은 딱 1분이었으니까.
뜨거웠던 벤치는 싸늘하게 식었고. 몇몇은 방금 전의 공을 곱씹거나,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저런 변화구가 있으면서 왜 성적이···.”
“바깥쪽에서 다시 들어온 거 맞지? 내가 잘 못 본 게 아니라.”
“우타자들 다 X된 거 같은데?”
저걸 뭐라고 해야 할까?
백도어 체인지업?
좌타자의 바깥쪽으로, 나갈 것 같았던 공은 유유히 다시 존안으로 들어왔고.
유인구로 착각한, 아니, 지극히 정확한 판단을 내린 앤드류 톨스는 멍하니 들어오는 공을 쳐다만 봤다.
“스트라이크 아웃!”
심판의 우렁찬 외침만이 그라운드에 울린다.
어쩌면, 자신들 만큼이나 상대팀, 저 투수의 동료들 역시 꽤 놀란 듯하다.
투수의 주위로, 야수들 역시 당혹스런 표정이 역력하니까.
“낙폭도 엄청···”
“체인지업 맞아? 스플리터나, 그런 쪽 계통 아니야?”
방금 전에는 가녀린 허수아비처럼 마운드에 볼품없이 우뚝 서 있던 상대 투수였는데.
그렇게 보였는데.
첫 타자를 삼진으로 잡은 뒤, 곧 너네들 차례라는 듯이 드릴러스 벤치를 훑는 투수의 눈빛은 낯설었다.
그들이 생각하던 먹잇감이 아닌, 오히려 자신의 성적을 위한 제물을 고르는 탐욕스러운 맹수처럼 느껴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