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구속은 투수의 간판이다.
스카우트에게 가장 쉽게 어필할 수 있는 것이 구속이고.
구단에서 투수의 미래 가치를 판단하고, 기대할 때 중요하게 보는 것도 구속이며.
팬들의 시선을 빠르게 사로잡는 것 역시 구속이니까.
허나 그렇다고 해서 구속이 투수의 전부는 아니다.
한 가게가 성공하기 위해선, 멋들어진 간판 이외에도 많은 것이 필요하니까.
구위는 좋은 투수가 가져야 할 덕목 중 하나이고.
제구 역시 제아무리 대단한 강속구를 타고나더라도, 결국에는 최소한은 필요하다.
마구에 달한 변화구는 탁월한 개성으로서, 때때로 그 자체만으로 프로의 세계를 헤쳐 갈 수 있게끔 해준다.
그 밖에도 투수를 성공에 도달하게 해주는 것들은 무수히 많다.
적절한 볼배합으로 타자의 타이밍을 잘 흔든다거나, 심리를 꿰뚫는 다거나 하는 것들.
그러니 설사 구속이 느리더라도, 설명한 장점 중 두 개 내지는 세 개 이상을 가지고 있다면, 좋은 투수가 될 수 있다.
만약 모두 다 가지고 있다면.
그때부터는 구속 따윈 아무런 상관이 없어지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구속은 투수의 간판이다.
나는 그런 구속이 느리고.
그걸로 끝인 줄 알았는데.
그 외의 모든 것을 가졌다.
1화
요란하게 울리는 알람 소리에 눈을 뜨면 항상 기분이 X같다.
잠에서 깨는 것도 짜증나고, 이불 밖으로 나가는 것도 짜증나고, X같은 마이너 숙소를 보면 내가 여기서 뭘하나 싶어서 또 짜증나는데. 결정적으로···
“다니엘 X발놈아! 제발 알람 좀 끄라고! 쳐 듣지도 못하면서. 왜 맞춰놓는 건데! 부탁 좀 하자!”
-으어어어
저 알람이 내가 맞춰놓은 게 아니거든.
다시 한번 말하지만.
마이너 숙소는 X같다.
벽이 어찌나 얇은지, 옆방 화장실 변기물 내리는 소리도 생생하게 들릴 만큼 X같다.
그런 얇은 벽 너머에서 들리는 알람이 내 숙면을 깨웠고.
다른 사람 깨워버린 주제에, 자기는 아직 잠에 취해 있는 건지. 요상한 신음만 내는 룸메이트 아닌 룸메이트가 짜증나서, 뚫어버릴 기세로 벽을 한 대 친 뒤 침대에서 일어났다.
‘좀 더 잘까? 지금 시간이- 얼추 일어날 때가 되기는 했네.’
그래도 원래 계획보다 일찍 일어난 것은 아니기에 그나마 좀 덜 짜증나네.
조금 진정된 마음으로 작디작은 화장실에 낑겨 들어간 뒤 거울 앞에서 투구폼을 취했다.
등판하는 날 아침에는 항상 이렇게 투구폼을 확인한다.
일종의 루틴인데, 별거 아닌 것 같아도, 큼직한 문제점은 알아챌 수 있다.
컨디션이 심하게 안 좋다거나 하면, 몸 어디가 심하게 굳었다거나 하면, 딱 봐도 투구폼이 평소랑 다르거든.
‘이번 시즌 끝나면, 진짜 투구폼을 바꿀까? 그래도 키는 크니까, 오버핸드도 잘 맞을 텐데.’
평소처럼 약간 부스스한 몰골의 미남(?)이 거울 가득 자세를 취하고 있는 건 참 만족스러운데. 최근 들어서는 조금 아쉽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쓰리쿼터 스로.
가장 보편적인 투구폼이다.
수많은 투수가 선택한 만큼, 가장 무난하면서 안정적인 투구폼인데.
평생 이렇게 던져온 만큼 나한테 가장 익숙한 자세지만, 성적이 안 좋아서 그런지, 요즘 들어서는 괜히 단점만 보인다.
혹시 오버핸드나, 인버티드-W 같은 투구폼으로 바꾼다면, 조금이라도 구속이 상승하지는 않을까, 하는 망상도 들고.
‘패스트볼 평속은 84~5마일. 최고는 89마일. 서클 체인지업은 그럭저럭. 슬라이더는 약간 부족. 커브랑 투심은 없느니만 못함. 변화가 필요하기는 하지. 이 상태로 메이저는 가망 없고. 너클볼이라도 배워봐?’
물론 항상 상상으로 끝난다.
억지로 변화를 추구하다, 지금 가지고 있는 조금의 장점마저 상실한다면, 그땐 진짜 짐 싸서 방 빼야 할 테니까.
그 정도의 용기는 없다.
‘오늘은 잘하자. 뭐냐 이게. 기껏 더블A 올라왔는데. 맛만 보다가 내려가겠네.’
괜한 망상이 들 정도로 부진했던 내 스스로를 따끔하게 질책한 뒤 간단한 샤워를 마치고 곧장 클럽하우스로 향했다.
남들보다 성실하게 아침 일찍부터 훈련한다!
뭐, 그런 건 아니고, 빵 쪼가리라도 얻어먹으려면, 부지런하게 살아야지.
“벌써 왔어? 아직 준비 전인데··· 빵 줄 테니까, 대충 잼이나 버터, 아무거나 발라 먹어.”
아직 경기까지 시간이 남아서 그런지, 클럽하우스는 조용했다. 선수들에게 나눠줄 음식도 이제 막 준비하는 것 같고.
음식이라고 해봤자, 제대로 된 영양사도 없는 탓에 크기만 두툼한 공장제 식빵과 과일 부스러기 좀 들어간 잼이 전부지만 솔직히 이것만 해도 어디야?
‘밖에서 사먹을 돈도 없는데, 집에서 반찬 보내줄 때까지, 앞으로 일주일은 이걸로 버텨야지, 어쩌겠어.’
졸업하고 미국 넘어오면서 받은 계약금은 비시즌 트레이닝이나, 용품구매 같은 거로 이미 탈탈 털어 쓴지 오래고.
집에서 보내준 반찬이며, 쌀은 엊그제 거덜났다.
그러니 지금 상황에선 이걸로 만족해야지.
‘그래도 여긴 러그너츠랑 다르게, 양이라도 많잖아. 잼도 혼자서 한통 다 먹게 해주고. 그거면 됐네.’
러그너츠, 예전에 있었던 싱글A팀은 빵도 일인당 딱 세 개 주고, 잼은 한 통을 넷이서 나눠먹는다.
하이A는 빵 다섯 개에 잼 반통 정도고. 그때를 돌이켜보면 여긴 천국이지,
그리고 오늘은 일찍 온 보람이 있다. 한 봉지를 그대로 받았으니까.
인심 좋게 주는 걸 감사히 받아, 앉은자리에서 잼 한 통과 함께 싹싹 비우니, 슬슬 다른 놈들도 하나, 둘 얼굴을 보였다.
“뭐야, 먼저 와 있었네? 어쩐지 문 두드려도 말이 없더라.”
“누구 때문에 일찍 깼는데. 다니엘 X새끼야, 너 알람 좀 쳐 끄라고 몇 번을 말하냐.”
“미안미안, 나 잠귀 어두운 거 Suck 너도 알잖아. 이상하게 잘 못 일어나겠단 말이야.”
“그러니까, 어차피 일어나지도 못하는데, 왜 알람을 맞추냐고. 그리고 왜 하필 알람소리는 심벌즈고. 노이로제 걸릴 것 같으니까, 제발 좀 갖다버려.”
“긍정적으로 검토해볼게.”
나 다음으로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다니엘 고셋(Daniel Gossett).
아까 전 내 단잠을 깨운 알람의 주인인데, 선발투수 경쟁자로, 꽤나 비싸신 몸이다.
무려 드래프트 2라운드 출신에 구속도 적당히 준수하고. 변화구도 나쁘지 않고. 체력도 좋다.
흠이랄 게 있다면, 나보다 14cm, 그러니까 여기 기준으로 한 4.5피트쯤 작은 딱 6피트의 신장정도?
작은 투수에겐 늘 따라붙는 내구성에 대한 의문을 제외하면, 포텐이 충만한 유망주다.
그러니 에이스(A’s)에서도 뽀얀 도자기처럼 애지중지 다루는 거고.
‘사실 경쟁자도 아니지, 나 혼자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니까. 어느 정도 평가가 비슷해야 구단에서도 저울질하지···’
정통파 드래프트 2라운드 출신의 보너스 베이비와 싼값에 복권이나 긁으려고 데려온 외국인을 같은 선상에 두는 구단은 없다.
그러니 쟤를 내가 경쟁자라고 지칭하는 걸 단장이나, 그 유명한 콩씨 부사장이 들으면, 아주 코웃음을 치겠지.
‘얘는 지금으로선 택도 없어.’
아무튼 그런 고셋을 시작으로, 다른 놈들도 하나 둘, 클럽하우스로 들어왔다.
안 그래도 좁아터진 공간은 사람으로 꽉꽉 들어찼고.
사람이 바글거리는 사이, 식빵 한 봉지를 깨끗하게 비운 나는 방금 전의 나처럼 빵과 잼 한통을 붙들고 있는 녀석에게 다가갔다.
“앤디.”
“아, Suck, 오늘 등판이라고 했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어, 먹고 몸 좀 푼 다음에 바로 갈 테니까.”
앤디 파즈(Andy Paz)
쿠바 녀석인데, 락하운즈의 세컨드 포수다.
모든 백업이 그렇듯, 주전 포수인 보 테일러에게 밀려서 경기 출장을 잘 못하는 편이고.
하지만 그렇기에 락하운즈 투수들의 사랑을 받는 존재다.
경기 출장이 드문 만큼, 시간도 남아돌아서, 사실상 불펜포수 비스무리한 일도 하고 있거든.
원래 정상적인 프로야구팀이라면, 불펜포수를 따로 둬야 하겠으나.
메이저면 몰라도 마이너는, 특히 락하운즈는 해당사항 없다.
그러니 공 받아주는 백업 포수가 사랑받을 수밖에.
“그래, 부탁 좀 하자.”
“천천히 몸이나 풀어.”
투수에게 포수가 필요하듯이, 포수 역시 포구의 감각을 유지하려면, 꾸준하게 공을 받아야 하니, 일종의 윈윈인 셈이지.
그 노고를 높이 사, 구단에서 일종의 추가수당을 준다고 하는데, 그것 역시 본인은 쏠쏠하게 여기고 있고.
아무튼 선발등판은 아니지만, 그래도 미리 오늘 등판한다는 걸 사전에 통보 받았기에 슬쩍 말하자, 녀석은 이미 안다는 듯 손을 휘젓더니 다시 식빵을 으적거렸고.
그런 앤디 파즈를 뒤로한 채 대충 먹은 걸 소화를 시킨 뒤, 곧장 워밍업을 시작했다.
“후- 후-”
워밍업은 간단하다.
스트레칭 같은 걸 시작으로, 러닝으로 몸 좀 달아 올리고, 다시 스트레칭하고, 어깨도 좀 풀어주고.
개인에 따라서 롱 토스를 하기는 하는데, 나는 딱히?
‘잘나지도 않은 어깨인데, 굳이 소모할 필요는 없지.’
내가 왼팔에 바랄 수 있는 건 딱 내구성 하나다. 그나마 그거 하나는 끝내준다.
그런 유일한 장점을 굳이 롱 토스로 갉아먹을 이유는 없잖은가?
효과가 없기도 하고.
나라고 안 해봤겠나.
혹시나 1마일이라도 더 빨라질까, 열심히 했는데, 그냥 체질적으로 안 맞는 건지 효과가 없어서 작년부터는 집어치웠다.
‘1마일, 아니 1키로만 올랐어도, 하물며 구위라도 좋아졌어도 매일매일 했지, 롱토스 처음 만든 놈 발가락도 빨아줬을 거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효과는 없었고, 아직까지 남의 발가락 빠는 경험은 못 해봤다.
아무튼 그렇게 천천히 긴 시간을 들여서 충분하게 몸을 풀어주면, 대충 시간은 딱 경기 직전쯤 된다.
슬슬 그라운드도 북적거리고.
오늘 선발등판 예정인 코리 왈터는 이미 불펜에 들어간지 오래인데, 적당히 쉬고, 몸 풀고를 반복한 나 역시 그를 뒤따라 불펜에 입장했다.
부디 오늘 공이 긁히기를 바라면서.
####
팡- 팡-
참 죽여주는 소리다.
기껏 불펜에 들어온 나 자신이 초라해지는 순간이고.
아마 조금 있으면 더 초라해지겠지. 상당히 비교될 테니까.
“오, 오늘 폼 좋은데? 코리, 푹 쉬었나봐?”
“뭐, 그냥 평범하죠.”
코리 왈터(Corey Walter)
오늘 경기의 선발투수.
불펜에 들어가자, 그의 대포알 같은 피칭 소리가 맞이해줬다. 진작 들어갔던 것 같은데, 아직도 불펜피칭 하고 있네. 정작 경기 들어가면 체력 후달려서, 긴 이닝 소화 못 하는 녀석이 말이야.
‘원래도 길게 하는 편이기는 한데, 오늘은 유독 더 기네.’
고셋과 마찬가지로 일단은 선발경쟁자고, 구단에서는 쟤보다 고셋을 더 아끼는데. 나는 오히려 재가 더 껄끄럽다.
괜히 주눅이 들거든.
‘쟤랑 나랑 한 10마일쯤 차이나나? 평속이든, 최고구속이든.’
평속 95~6mp/h에 최고구속 98mp/h의 압도적인 구속이 날 그렇게 만든다.
사실 그 엄청난 격차에는 쟤가 빠른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내가 많이 느린 게 더 크다. 뭐, 그런 똥볼로 더블A까지 기어 올라온 내가 저런 강속구랑 나란히 같은 팀에 있으니, 어떻게 보면 내쪽이 더 대단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아무튼 그런 거다.
자랑스럽다, 고유석!
‘타이밍 잘못 잡았네. 좀 더 있다가 들어올 것을.’
가죽 터지는 소리를 들으니 괜히 기가 죽어서, 돌아서 나갈까, 했는데 그럴 수 없었다.
“Go, 왔어? 몸은 충분히 풀었지?”
“네, 코치님. 충분합니다.”
“그래, 어제 미리 말하기는 했지만, 오늘은 길게 등판할 테니까, 부상 안 당하게 조심하고, 어깨 충분하게 풀어 둬.”
“넵.”
뒤늦게야 나를 발견한 투수코치 존 와스딘이 아는 체했으니까.
오늘 경기 등판을 다시금 주지시켜줬지만, 딱히 귀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오늘은 유독 힘이 남아도는 것 같은데··· 몸 괜히 푼 거 아니야? 아주 완봉할 기센데?’
X나게 부러운 피칭을 멀뚱멀뚱 바라보니, 괜한 불안감이 생겼다.
오늘 경기 내 역할은 롱 릴리프다. 4~5회쯤 올라가겠지.
경기 내용에 따라 등판하는 롱릴리프를 미리 준비하는 게 좀 우스운 일이지만. 일종의 배려였다. 그래도 얼마 전까지는 선발투수였던 나한테 기회를 좀 주겠다는 배려이자, 소중한 선발 유망주를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한 배려.
아마 무게는 후자 쪽에 좀 더 실려 있을 거고.
그래도 한 3이닝 정도는 던지기로 예정되어 있는데. 예상보다 더 쌩쌩한 코리 왈터의 피칭이 위협감을 줬다.
일단 선발투수인 쟤가 내려가야, 그 다음으로 내가 올라갈 거 아니야?
근데 저 자식 불펜피칭만 봐서는, 몸은 몸대로 풀고, 등판은 또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Suck, 뭐 보고 있어? 워밍업은 다 한 거야?”
“적당히 풀었어. 빨리 왔네? 좀 더 먹다가 천천히 올 줄 알았더니만.”
“잼이 다 떨어져서, 금방 몸 풀었지. 아무리 배고파도 맨빵만 먹기는 싫거든. 그렇게 맛있는 빵도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
부러움과 걱정 속에서 멍하니 옆을 쳐다 보고 있을 때, 언제 온 건지, 앤디 파즈가 잼을 입가에 묻히고서 불펜에 들어왔다.
쟤는 저 꼴을 하고 워밍업한 거야? 가만 보면 얘도 좀 맹한 구석이 있다.
“자자, 오늘도 잘 던져 보라고. 혹시 알아? 구속이 좀 늘었을지. 뭐, 오늘도 Suck이겠지만.”
아닌가?
내 시선을 끝을 확인한 녀석은 대충 알만하다는 듯이 낄낄 웃으며 굳~이 다른놈들처럼 내 독특한(미국기준) 이름을 엮어서 놀려대는 걸 보면 아주 멍청한 놈은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그런 앤디 파즈에게 가볍게 중지를 올려 준 나였지만, 우스운 건 내심 조금 기대했다는 거다.
‘X같은 알람이 망쳐서 그렇지, 간만에 진짜 푹 자기는 했는데. 컨디션도 썩 괜찮고. 혹시 오늘인가? 최고구속 갱신하는 날이.’
자고 일어났더니, 나도 지옥에서 데려온 좌완 파이어볼러?!
그런 건 바라지도 않고.
그냥 그런 거 있잖아?
잠도 좀 잘 자고, 꿈도 잘 꾸고. 밥도 맛있게 잘 먹고.
그래서인지 평소보다 컨디션도 좀 좋고.
그 덕분에 딱 1마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구속이 평소보다 딱 1마일 더 높게 찍히는 거. 그거면 충분했다.
느낌이 다를 테니까.
‘89마일이랑 90마일은 다르니까, 완전히.
내 포심 최고구속은 89mp/h다. Km/h로 바꾸면 143쯤 되겠네.
여기가 미국이라서 그렇지, 정상적으로 한국 프로야구로 갔으면, 여전히 파이어볼로 대접은 못 받겠지만, 그래도 평균은 되는 구속이지.
아니, 평속은 그보다 훨씬 느리니까, 그래, 솔직히 양심적으로 한국을 기준으로 해도 평균보단 쪼오끔 느리긴 하네.
아무튼 그런 구속이 앞자리 수가 바뀌어서, 90마일이 된다면, 그때부터는 구단이 나한테 거는 기대치가 달라진다.
발전 가능성이 생긴 거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바로 옆에 있는 파이어볼러나, 고셋 같은 대우는 여전히 힘들겠지만.
‘달라지지. 모든 게. 돈이든, 경력이든. 기대치든.’
그렇기에 간절한 마음을 담아 투구폼을 잡았고, 곧 앤디 파즈와 시선을 맞췄다.
“오늘도 체인지업 먼저?”
“물론이지. 글러브 딱 대.”
서클 체인지업.
루틴 중 하나다.
다른 사람들은 보통 패스트볼을 먼저 던지는데, 난 항상 체인지업을 먼저 던진다.
내가 가진 손패들 중에서 가장 자신 있는 결정구라는 게 표면적인 이유고.
가장 큰 이유는 느리다는 것.
이거 먼저 다음에, 서서히 높여가면, 조금이라도 더 빨라 보이잖아.
그냥 내 기분이 그렇다고.
아무튼 그런 이유로 가장 먼저 던진 체인지업. 평소처럼 그립을 잡고 던졌는데.
그 서클 체인지업이 꽤-
‘느낌이 좋은데?’
“오.”
“어?”
괜찮았다.
“잠 잘 잤나봐? 공이 엄청 좋은데? 뭐야, 이런 거 던질 줄 알면 진작 던지지.”
“네가 봐도 그래?”
“어. 평소보다 훨씬. 내가 타자 입장이면, 진짜 X같을 것 같아. 특히 우타자라면. 이거이거, 와스딘한테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제발 선발로 올려달라고.”
“오버 떨지 말고. 하나만 더 받아줘.”
앤디 파즈도 같은 생각인지, 누가 보면 지가 던진 건줄 알 만큼, 아주 호들갑을 다 떤다. 그 꼴을 보니 도리어 흥분이 식었다.
‘뽀록이네.’
내가 꿈은 크지만, 주제파악도 야무지거든.
저 놈이 저렇게 놀랄 정도의 공이 순수하게 내 실력으로 던진 거라고? 그럴 리가. 난 저 정도 체인지업 못 던져.
무슨 무협지처럼 깨달음을 얻어서, 막힌 벽을 뚫고, 뭐 그런 거라면 모를까.
그러니 남은 건 단 하나.
그냥 운 좋게 긁힌 것.
‘뽀록이 터질 거면 실전에서 쳐 터질 것이지··· 탈삼진 하나 날렸네.’
불펜에서 운이 좋으면 뭘하나. 경기 망하면 끝인 것을.
타자 하나는 날로 먹을 수도 있었기에, 아쉬움에 괜히 입 안이 썼다.
‘그래도 코치가 봤으면- 아, 이미 나갔네. 언제 나갔지?’
하지만 뽀록인 건 어차피 나만 아는 거고.
평소보다 훨씬 괜찮은 체인지업이 들어갔으니, 투수코치가 보면 반응이 괜찮을 거란 생각에 다시 옆을 봤지만, 코리 왈터가 있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코치도 이미 그를 따라서 경기를 위해 불펜을 나간 것 같고.
오늘은 홈이라, 먼저 수비를 하니, 일찍 나간 것 같은데, 집중하느라 못 봤다.
코치에게 어필할 기회를 놓친 것이기에, 이것 역시 조금 아쉬웠다.
‘집중하자. 오늘 운빨 좋은 거 같은데, 경기에서도 몇 개 긁히겠지.’
그렇게 애써 위로하며 다시 자세를 잡아, 천천히 두 번째 공을 던졌을 때.
방금 전 느꼈던 기분 좋은 손맛이 다시금 손끝에 감돌았다.
“뭐야, 진짜 오늘 괜찮은 거 같은데?”
처음만 하더라도 장난기가 감돌던 앤디는 또다시 비슷하게 들어오자, 이번에는 진짜 순수하게 놀랐는데.
물론 나도 그렇다.
뭐야 저거.
진짜 갑자기 왜 이래.
‘뽀록이 두 번 겹친 건···’
둘 중 하나겠지.
운이 더럽게 좋고, 또 더럽게 나쁜 놈이라서 하필이면 불펜피칭에서 연달아 긁혔던지.
아니면 정말로···
‘몇 개 더 던지면 알겠지. 희박한 확률을 통과한 건지. 아니면 진짜로 뭐가 있는 건지.’
확인 방법은 쉽다.
몇 개 더 던져보면 되니까.
보통 불펜피칭을 천천히 하는 편이다. 피칭의 간격을 길게해서, 서서히 어깨를 달아올리는 식으로.
불펜피칭에서 부상당하면 억울하지 않겠냐고, 고교야구 시절 투수코치가 알려준 방식이다.
그러니 아무리 오늘 등판 통보를 받았다고는 해도, 남들보다 훨씬 이르게, 불펜피칭을 하는 이유가 이거고.
사실 선발경쟁에서 밀려나, 불펜투수가 되었으니, 빨리 고쳐야겠지만. 아직은 등판 전에 미리 통보해주기에, 여전히 유지 중인 루틴인데.
오늘 처음으로 루틴을 집어치우고, 냅다 체인지업을 연이어 치웠다.
느긋할 수가 없었다.
더 보고 싶었으니까.
“오-”
“와우.”
“쩌는데?”
“너 혹시 뭐 먹은 거 아니지?”
그렇게 줄줄이 다섯 개를 더 던지고, 앤디 파즈가 내지른 각양각색의 감탄사를 듣고 나서야 순순히 인정했다.
‘진짜로 벽이 뚫렸는데? 오늘 되는 날이다.’
“이야~ 무슨 서클이 이렇게 좋아? 아주 페드로 마르티네즈가 따로 없는데? 그래, 우리 쿠바의 영웅 말이야. 우타자들 다 앓는 소리 하겠네.”
“무슨 페드로가 쿠바의 영웅이야? 도미니칸이구만.”
“쿠바나, 도미니코나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야, 한 가족이라고. 나랑 피도 좀 섞였을걸?”
되지도 않는 농담을 지껄이는 앤디 파즈를 대충 무시한 나였지만, 그가 한 여러 가지 말 중 하나는 동의했다.
‘진짜 따라가서 바짓가랑이라도 한번 잡아봐?’
쾅쾅 공을 쑤셔 박다가 불펜을 나간 코리 왈터와 그를 따라서 나간 투수코치 존 와스딘.
‘진짜··· 오늘 같은 날 선발로 뛰면 딱인데···’
그의 존재가 새삼 아쉬웠다.
야속하네.
‘그래도, 나도 오늘 등판 예정인데 말이야.’
이해는 한다.
마이너리그 코치의 역할은 선수 ‘육성’이 아니라 ‘선별’이라는 걸, 미국 건너오면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으니까.
그러니 더 가능성 있는 놈에게 집중하고, 관심을 기울이는 게 당연하겠지.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역시 입안이 텁텁했다. 좋은 공을 던졌는데도, 봐주는 사람이 없다는 게.
“체인지업 말고, 패스트볼 좀 던져 봐. 아까는 농담이었는데, 지금은 진짜로 구속 좀 올랐을 것 같거든.”
“정확하게 해야지. 체인지업 다섯 개만 더 받아.”
애써 미련을 떨치듯 다시 앤디 파즈를 봤지만, 속은 그렇지 않았다.
‘왈터, 오늘은 조금만 던져, 조금만. 너 어깨가 좀 뻐근하다며. 최소한 마운드에 오르기라도 해야지. 오늘 같은 날이면.’
간절히 바랐다. 부디 선발투수가 조금이라도 덜 던지기를. 이기적일 수도 있겠지만. 솔직한 진심이었다.
“자, 네가 그렇게나 기다렸던 패스트볼 간다. 잘 잡아, 손 안 다치게 조심하고.”
“아, 패스트볼은 여전히 별로네. 구속도 평소랑 똑같고, 스터프나 무브먼트도 그대로야. 그럼 그렇지. Suck, 네 패스트볼은 정말 Suck이라니까. 슬라이더는 그럭저럭 봐줄만 하지만··· 패스트볼은 진짜 Suck이야.”
“X새끼야.”
아, 혹시나 해서 던져본 나머지 것들은 다 그대로였다.
기대했던 구속은 0.1마일도 오르지 않았다.
체인지업보고 기대했기에 괜히 아쉬웠지만, 가슴은 여전히 두근거렸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이유로, 등판이 기다려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