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317화 (316/316)

317화

종종 포스트시즌에서만 사용하는 비밀병기를 가진 투수들이 있다고 한다.

완전히 새로운 무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기존에 살짝 변주 정도는 주는 거지.

가장 대표적인 예는 마리아노 리베라인데. 오직 포스트시즌 때만 던지는 ‘스위퍼’라는 커터 구질이 있다고 스스로 밝혔지.

‘아마 오늘은 더욱더 타이밍이 올라왔겠지. 최근 기세까지 좋으니, 타격감도 좋을 거고.’

마침 나한테도 그런 비밀병기가 있다.

비록 조금은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기세가 좋고, 나한테 충분히 익숙해진 다저스에게 독으로 작용할 무기가 있었지.

“스트라이크 아웃!”

효과도 아주 발군이고.

헛스윙이 막 나오니까.

별건 아니고, 옛날처럼 제대로 힘을 싣는 게 아니라. 오직 손가락 끝으로만, 그 감각으로만 공을 던지는 거다. 그래, 딱 마이너 시절처럼.

이전에 정규 시즌에서도 종종 쓴 적이 있지 않나? 트라웃을 상대했을 때 말이야.

분명 패스트볼인데도, 트라웃은 마치 그걸 슬로 커브처럼 느꼈지. 그 생각이 느릿한 스윙 타이밍에서도 드러났고.

그때 확실하게 깨달았다.

이게 생각보다 쓸만하다는 걸.

구위가 더럽게 약하고, 무브먼트도 형편없는데, 오히려 그렇기에 그 극심한 차이가 효과를 발휘하는 거지.

‘이러면 체인지 오브 페이스라고 봐야 하나?’

구속에는 큰 차이가 없으니, 오프스피드라고 하기에는 조금 그렇고. 체인지 오브 페이스라고 표현하는 게 맞겠지.

그날은 패스트볼 하나만 그렇게 던졌지만, 오늘은 대부분의 공을 섞었다.

“스트라이크!”

그 결과가 이거지.

내 서클 체인지업의 구질이 두 개인 것처럼, 포심, 커터, 투심, 슬라이더, 너클 커브 등등.

다른 구종들도 거의 다 구질이 두 개로 늘어났다.

내 원래 피칭에 이미 익숙해진 다저스 타자들로선 정신이 멍해질 지경이겠지.

‘제구는 생각보다 쉬워. 아니, 오히려 평범하게 던지는 것보다 제구 자체는 훨씬 쉽지.’

자칫 컨트롤하지 못한다면, 그냥 밋밋한 배팅볼을 던지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었지만. 제구 자체는 쉬웠다.

손가락 끝, 그 미세한 감각에 집중해서 던지니, 힘도 덜 소모될뿐더러, 훨씬 세밀한 조절이 가능했지.

기존의 것과 타이밍, 시각적 효과, 궤적이 죄다 다른 공을 정확하게 코너에 넣으니.

“스트라이크 아웃!”

당연하게도 헛스윙이 나올 수밖에. 그도 아니면 멀뚱멀뚱 멍하니 쳐다보거나.

또다시 삼진이 올라갔다.

헛스윙한 타자는 허탈한 듯 헛웃음을 흘리며, 터덜터덜 덕아웃으로 돌아갔지.

지금 이 순간이 믿기지 않는다고 말하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솔직하게 말하면 나도 같은 심정이다. 재밌잖아?

‘칼 위를 걷는 거지.’

지금 나는 어쩌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수류탄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타이밍이 다른 대신, 구위가 약하기에 아무리 섞는다고 하더라도, 딱 한번 간파당하는 순간 바로 담장을 넘길 테니까.

하물며 마이너에서도 언제든지 홈런을 맞을 수 있다는 위험과 함께했는데, 그런 마이너와 비교할 수조차 없을 만큼 수준이 높은 메이저에선 더 말할 것도 없지.

심지어 그것이 모든 선수, 모든 타자들의 집중력이 최고조로 오른 월드시리즈 7차전이라면 말이야.

또한 이전에도 걱정했던, 혹시나 피칭 밸런스가 망가질 수도 있다는 위험 역시 존재하고 말이야. 기껏 잡은 커맨드가 흔들릴 지도 모르지. 다만 오늘 이후로는 오프시즌이니, 혹시나 흔들리더라도 바로잡을 수 있겠지만 말이야.

어쨌든 그런 위험성들로 인해 절벽 위의 외줄을 타듯 아찔한 느낌이 마음속에 감돌았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기에 조금 더 짜릿하기도 했다.

이 개똥볼이.

“스트라이크!”

월드시리즈에서 그토록 대단한 빅리그의 타자들을 때려잡고 있으니까. 참 아이러니한 일이야.

그것이 주는 즐거움에 홀린 듯, 쉬지 않고 공을 잡았고, 휘둘렀고, 손에서 놓았다.

어차피 오늘이 마지막이니, 훗날을 기약하고 자제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저 던지고, 또 던지고의 반복이지. 나중에 경기 끝나고 나서 대니얼에게 한소리 들을지도 모르겠네. 괜찮다고 했지, 무리하라고 말한 건 아니라면서.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아웃!”

그래도 이걸 어떻게 참아?

이렇게 재밌는데 말이야.

서로 다른 궤적과 타이밍.

연이어 날아간 두 개의 슬라이더에 타자의 배트가 또 한 번 헛돌았다.

손끝으로 던져, 변화 각이 조금 더 큰 대신, 예리함이 떨어지는 슬라이더 직후.

제대로 힘을 담아 던진 슬라이더가 날아오니, 타자에겐 그것이 마치 고속의 하드 슬라이더처럼 느껴졌겠지. 아니면 커터처럼 보일 수도 있고.

‘벌써 끝인가?’

그것으로 이닝은 또 한 번 마지막을 맞이했다. 아니, 맞이한 것 같았다.

다저스 덕아웃의 분위기가 다시 한번 우울함이 감돌고, 우리 야수들은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

오직 타자를 잡는 것에만 집중했기에, 난 내가 지금까지 몇 명을 잡았고, 몇 개의 아웃카운트를 올렸는지 몰랐거든.

다들 이러는 걸 보면, 이닝이 끝나긴 한 거겠지.

약간의 휴식이 찾아온 셈이지만, 마운드를 내려가는 내 마음은 괜히 조금 아쉬웠다.

이 즐거운 무대의 흐름이 끊기고, 아주 잠깐 내려가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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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브 로버츠 감독은 허탈한 한숨을 숨기지 않고 표현했다.

원래라면 팀의 사기를 위해서라도, 제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든, 자신의 감정을 철저히 숨기고, 한숨이 나오더라도 억지로 씹어 삼켰겠지만, 오늘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가 참지 않더라도, 어차피 이미 모든 이들이 똑같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으니까.

‘넌센스였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승리를 바란 것 자체가 난해한 넌센스 퀴즈처럼 터무니없는 소리였을 지도 모르겠다고.

명쾌한 해답이 존재하지 않는 투수라는 것이야, 이미 앞선 두 번의 경기, 그리고 두 번의 좌절에서 충분히 느꼈지만.

해답이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논제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문제라는 것이 오늘로서 밝혀졌으니까.

“구위가 약한 구질을 최대한 노려 치라고 타자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래, 잘했군. 그 편이 훨씬 더 가능성이 있기는 하겠지.”

차라리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저 최강, 최고일 뿐인 적이었다면 다저스는 당당하게 맞서 싸웠을 거다.

이를 꽉 깨물고, 허리와 엉덩이에 힘을 주고, 마음을 단단히 무장한 채, 기꺼이 나아갔겠지.

모든 문제의 시작은 그 최고가 또 한 번 ‘변화’했다는 거였다.

이제까지 그를 상대하면서 익힌 모든 것들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그것이 다저스를 무너뜨렸다.

‘분명, 완성도가 높지는 않다.’

새로운 구질들.

지금 다저스의 타이밍을 망치고, 뒤흔들고 있는 그것들은 분명 그 자체만으로는 위력이 좋지는 않았다.

특히나 패스트볼 계열은 거의 배팅볼 수준이지. 스터프라는 게 아예 전무한 수준이니까.

그나마 슬라이더는 신무기 역시 제법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나머진 심각할 정도로 위력이 떨어졌지.

‘하지만 그런 완성도와 위력의 차이가, 전체적인 스터프를 상승시켜줬어.’

문제는 그 존재만으로 기존의 것들의 스터프가 두 배, 어쩌면 그 이상처럼 느껴진다는 거였다.

특히나 포심 패스트볼은 그 극심한 차이로 인해···

“스트라이크 아웃!”

이젠 다저스의 눈엔 90마일이 아닌, 100마일 그 이상으로 느껴지는 수준이었지.

이제까지 적응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압도적인 수준의 무브먼트를 자랑하며, 기존에도 구속 이상의 체감구속을 자랑하던 강력한 포심이었지만.

중간중간 마치 오프스피드처럼 ‘보이면서’ 들어온 같은 구속의 빈약한 포심이 극심한 어둠을 담당해주면서, 그것을 더욱더 찬란하게 빛내줬다.

비록 데이브 로버츠 감독은 직접 타석에 오르지 않았기에, 타자들의 진짜 속마음은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의 표정에서 드러났다.

7차전까지 이어온 혈투가 무색하게도, 다저스의 빛이 서서히 사그라들고 있다는 것을.

“스트라이크 아웃!”

그리고 그런 다저스를 투수는 쉬지 않고 몰아쳤다.

경기의 중반부터 가속했던 이전 경기들과는 달리, 오늘은 시작부터 대단히 빨랐지. 지금도 점점 더 빨라지고 있고.

그 속도감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해 무너진다면, 그나마 다저스에게도 기회가 생기겠지만···

‘설사 체력이 떨어지더라도, 끝까지 버티겠지.’

오늘 경기 그 자체에 몰입한 듯, 환한 투수의 얼굴은 그것이 그저 헛된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야기해줬다.

“스트라이크 아웃!”

또다시 이닝이 끝났다.

3회 초 역시도 종료.

이번에도 세 명의 타자가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고, 그렇게 이닝이 끝났을 때.

투수는 여전히 아쉬운 듯 혀를 내두르며 미련 가득한 표정으로 마운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간신히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이미 진득하게 맛보았을 다저스의 피 맛이, 지금의 즐거움이 더욱더 이어지길 바라는 것처럼.

“허-”

그 모습을 바라보며, 데이브 로버츠 감독은 실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아홉 명의 타자가 올랐고, 그 아홉 명이 모두 삼진으로 물러났지.

그런데 그마저도 부족하게 여기는 듯한 투수, 고유석의 얼굴이 그의 가슴 안쪽을 무겁게 짓눌렀으니까.

####

‘벌써 한 타순이 돌았던가?’

경기가 시작할 때 봤던 얼굴이 다시 타석에 올라왔다. 한 타순이 돌았다는 뜻이지.

시간 참 빠르네. 방금 막 시작한 것 같은데, 벌써 한 타순이나 돌다니.

아니지, 시간은 똑같은데 내 피칭이 빠른 건가?

‘긴장 풀어.’

아무튼 다시 등장한 브라이언 도저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많이 긴장한 것 같네.

그런 그를 달래주기 위해서 살짝 미소를 지어줬지만, 오히려 역효과가 난 건지 더욱더 얼굴이 굳었다.

지금의 내 미소가 그에겐 마치 살인예고처럼 느껴졌나 보네. 그러려는 의도가 아니었는데 말이야.

“스트라이크 아웃!”

내 진심을 알아주지 못하는 타자가 미워서 온 힘을 담아 삼진으로 잡았다.

지난 타석에서 그에게 보여줬던 작대기 직구가 머릿속에 남았던 건지, 역시나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헛스윙했지.

다시금 스트라이크 아웃.

유썩은 없었다. 삼진인데 말이야.

처음 구호가 나왔을 때만 하더라도 내 이름을 대놓고 욕처럼 사용하는 거라, 진짜 싫었는데.

막상 삼진 잡았는데도 유썩 안 해주니까 좀 어색하네. 섭섭하기도 하고.

‘다들 그만큼 집중하고 있는 건가?’

그래도 나쁜 일은 아니겠지.

그만큼 다들 집중하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흥겹게 외치지조차 못할 정도로.

다행히 남들 보기에 쪽팔리지는 않을 만큼 잘하고 있는 것 같네.

그렇게 타순이 돌아 브라이언 도저가 올라왔고, 삼진으로 물러났으니, 그다음은 저스틴 터너다.

‘눈빛 한번 살벌하네.’

대기타석에서 올라온 그는 내 몸을 불태울 듯한 시선을 쏘아 보내면서 타석으로 올라왔다.

뭐랄까, ‘난 절대로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아!’라고 선언하는 것처럼.

그걸 보니 괜히 헛웃음이 나오네. 아니, 언제는 호락호락했어? 매번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걸 내가 강제로 잡은 거지.

“스트라이크!”

이렇게 말이야.

신중해진 건지, 그는 공을 가만히 쳐다만 봤다.

어쩌면 비교적 훨씬 쉬운 내 약한 구질들을 확실하게 지켜보고, 공략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아까도 말했지만, 간파당하는 순간 홈런은 손쉬운 수준이니, 이쪽을 노리는 게 가장 베스티이기는 하지.

“스트라이크!”

그거에만 너무 집착하다 보면, 힘껏 손가락 마디로 던진 것에 대해선 완전히 타이밍을 놓쳐버리지만 말이야.

연이어 스트라이크.

내 시야의 사각에서 몸을 달싹거리는 관중들의 모습이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삼진을 잡으라는 걸까?

“파울!”

하지만 저스틴 터너는 3구를 억지로 때려냈다. 팔을 쭉 빼다시피 하면서, 거의 번트를 대는 것처럼.

이쯤 되면 안타를 치겠다는 게 아니라, 삼진을 안 당하려는 수준이었지.

“스트라이크 아웃!”

그마저도 실패했지만.

우타자에게 서클 체인지업은 언제나 옳다. 특히나 그 타자가 이미 스스로의 리듬마저 잃었다면 더더욱.

결국 허공을 가른 저스틴 터너는 마치 세상이 무너지는 듯 얼굴을 구기며, 씁쓸함을 곱씹은 채 타석에서 물러났다.

아직 그에게 한 타석쯤 더 남았는데도 벌써부터 저러네.

“아웃!”

그리고 곧바로 올라온 데이비드 프리즈는 초구부터 과감하게 배트를 휘두르더니, 투심을 스치듯 때려냈다.

제법 빠른 속도의 땅볼이 3유간으로 흘렀고, 처리하기 까다로운 타구였기에 혹시나 싶었지만.

‘우리도 집중력이 올라오긴 했네.’

확실히 월드시리즈의 마지막 경기라서 그런가, 집중력이 극도로 올라온 듯, 마커스 시미언이 재빠르게 뛰어오며, 땅볼을 건져냈지만.

그는 왜인지 조금은 아쉬움이 진득하게 담긴 표정으로 1루로 송구했다.

자칫 안타가 될 수도 있었던 타구를 잘 잡아놓고 왜 저러나 몰라?

“아웃!”

“아아아···”

“삼진이나 쳐 당할 것이지···”

“그래도 잘했어! 원래도 최고지만··· 오늘은 진짜 불알이 떨릴 정도야!”

결국 아웃카운트가 올라가고, 이닝이 끝나자, 그뿐만이 아니라, 어쩌면 관중들도 조금은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거나, 나를 응원했고 말이야.

나만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것 같아 고개를 갸웃거렸을 때, 문득 전광판에 떠오른 글자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저거 때문이었구만.

‘내가 열한 명이나 잡았던가?’

잘 모르겠다. 괜한 말을 전광판에 띄웠을 리는 없겠지. 삼진을 많이 잡은 것 같기는 한데, 그래서 다들 아쉬워했었네.

연속해서 이어오던 삼진이 마감됐으니, 호수비로 아웃카운트를 올린 마커스 역시 찝찝한 표정이었던 거고.

이유를 깨달은 순간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뭐, 어때?’

아쉬운 마음이야 이해하지만, 난 오늘 그런 걸 노리는 게 아니었으니까. 계속 공을 던지다 보니, 어쩌다가 하나 얻어걸린 거지.

오늘 내 목표는 오직 팀의 승리, 그리고 내 개인적인 탐욕을 채우는 것뿐이다.

비록 그것을 위해 노력하다 보니, 나도 모르던 신기록 하나가 달성됐고, 또 그것이 끊어지기도 했지만, 딱히 아쉽지는 않았다.

‘아직 많이 남았네.’

또 다른 역사를 쓰기에 충분할 만큼의 이닝이 여전히 남아 있었으니까.

####

“스트라이크 아웃!”

연속된 삼진은 끝났지만, 경기마저 끝난 건 아니었다. 고유석의 행진 역시 끝난 게 아니었고.

그저 오늘 밤 그가 해낼 무수히 많은 영광 중 하나가 끝을 맞이한 것일 뿐, 그 이상은 없었다.

그는 여전히 마운드 위에 있었고, 여전히 공을 던졌으며.

“아웃! 포수 팝플라이를 유도하며 손쉽게 아웃카운트를 올려내는 Go!"

여전히 타자를 잡았다.

이닝은 빠르게 흘러갔다.

월드시리즈 7차전이라는 장엄한 무대를 진득하게 느낄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그럼에도 사람들은 점점 더 몰렸다. 내일 아침, 당연히 만나는 이들마다 주된 대화 주제로 떠오를 이 경기를 놓치기 싫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몰려든 이들은 자연스럽게 그대로 자리에 남아 그저 지켜봤다.

“스트~~라이크 아웃 다시 한번 삼자범퇴!!”

이날의 증인으로서, 한 투수가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지를.

“Go가 완전히 다저스를 산산조각내고 있습니다. 이게, 이게 가능한 일일까요?”

“다만 애슬레틱스 역시 워커 뷸러 선수에게 틀어 막히고 있기에, 아직은 섣불리 결과를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애슬레틱스 타자들에게는 다행이면서도 불행이었다.

타석에서의 그들이 완전히 잊혀졌으니까. 그저 고유석의 뒤에 기립하여, 야수로서의 모습만이 사람들의 시선에 들어왔지.

누군가에게 가려진 것은 비극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지난 경기에서 이어진 그들의 기복을 가려주기도 했지.

오히려 더욱더 빠르게 고유석의 피칭을 이어볼 수 있어서 고맙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했고.

비록 불안함을 가진 애슬레틱스 팬들도 있었지만, 그들마저도 확신했다.

오늘 Go는 강제로 경기가 끝나기 전까지는 절대로 내려가지 않을 테니, 아무런 걱정이 없을 거라고.

“스트라이크 아웃!”

분명히 마운드 위에 우뚝 서서 제 손으로 그 끝을 보고야 말 테니까.

계속해서 이어지는 아웃.

조금은 말소리가 잦아들었다.

경기장도, 중계석도.

미신적인 이유로 조심스럽게 구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저 몰입했다고 보는 것이 맞으리라.

1956년.

돈 라슨은 월드시리즈에서 퍼펙트게임을 해냈다. 유일하게.

그런 그의 퍼펙트게임을 바라보며, 여러 언론은 그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 완벽한 경기를 해냈다’라고. 오늘은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이번 이닝 역시 삼자범퇴를 유도하는 Go!"

딱 한 가지의 흠을 제외한다면, 너무나도 완벽한 사람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완벽한 경기를 하고 있었으니까.

그 모든 상황이 그저 완벽하게만 느껴졌기에, 마지막 역시 완벽하리라고 사람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고.

곧 그것을 증명하듯, 완벽을 향한 마지막 퍼즐이 충족됐다.

####

타석에 오르기 전, 크리스티안 옐리치는 그가 애슬레틱스로 트레이드가 되었을 때를 떠올렸다.

애슬레틱스라는 기본적인 거부감에 그가 조금은 떨떠름해했을 때.

스승과도 같은 배리 본즈가 그렇게 표현했었지. 넌 정말 운 좋은 개자식이라고.

‘맞는 말이야.’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이번 시즌을 누구보다도 잘 설명해주는 말이었다.

비록 영광은 더럽혀졌지만, 그럼에도 최고라고 불렸던 레전드다운 현명한 말이었지.

‘최고의 투수.’

최고의 투수와 한 팀에 있다는 건 그런 축복이었다.

천하의 배리 본즈마저 조금은 부럽게 여길 정도로 축복받은 일이지.

물론 올해 자신 역시 대대적인 진일보를 보이면서, 한몫을 하기도 했지만.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

누군가는 그런 그를 더러 불운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트레이드 이야기가 나왔던 밀워키 브루어스로 갔었다면, 그가 NL MVP를 차지했을 거라는 거지.

하지만 AL에는 무키 베츠, 마이크 트라웃, 그리고 같은 팀의 괴물까지 있기에 Top 3조차 아슬아슬하니, 팀 성적과는 별개로 본인은 오히려 불운한 것이라면서.

더군다나 투수에게 유리한 콜리시엄이라는 홈구장을 가지면서, 성적에서도 더욱 손해를 본 것이기도 하고.

‘그럴 리가.’

그런 말들에 크리스티안 옐리치는 그저 코웃음을 흘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책상물림들의 개소리지.

‘MVP 하나와 월드시리즈 반지 하나.’

상당히 괜찮은 교환이다.

거저 주는 수준이지.

불운하다는 말이 어처구니없게 들릴 정도로.

만약 배리 본즈에게 물었다면, 기꺼이 MVP 트로피를 반납하고, 월드시리즈의 우승반지를 끌어안았겠지.

그렇기에 크리스티안 옐리치는, 자신에게 찾아온 이 ‘축복’이자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아···”

그가 타석에 올랐을 때.

얼마 지나지 않아 포수의 탄식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오늘 경기 내내 잘 버텨냈던 다저스의 선발투수, 워커 뷸러 역시 고개를 숙였고.

그들을 잠시 눈에 담은 뒤, 가볍게 배트를 던졌다. 오늘 든든한 에이스가 그런 것처럼, 크리스티안 옐리치 자신 역시 지금의 순간을 즐기기 위해서.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타구가 담장을 넘겼고, 그는 가볍게 베이스를 돌았다.

경기장이 요동치고, 덕아웃에서 동료들이 뛰쳐나오는 동안, 여전히 벤치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며, 씨익 웃는 동료에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이번에도 되게 좋아하겠네.’

지난번에도 그랬지.

홈런 하나를 날려주니, 자신을 볼 때마다 껄껄 웃으며 칭찬을 마다하지 않았으니까.

아마 이번에도 기쁘겠지.

다만 경기가 완전히 끝난 뒤에 기뻐하겠지. 지금 당장은 그보다 훨씬 즐거운 감정이 녀석에게 가득할 테니까.

‘경기 끝나면, 나도 Mr.본즈한테 자랑이나 해야겠네.’

녀석은 종종 퍼펙트를 할 때마다 그렉 매덕스에게 자랑한다고 했었다. 본인은 못했던 걸 난 했다면서.

자신 역시 오늘 경기가 끝나면 그래야겠다고 생각하며, 크리스티안 옐리치는 살포시 홈 플레이트를 밟았다.

6회 말 투런 홈런.

2점이 올라가면서, 2대0의 스코어와 함께 월드시리즈가 그의, 애슬레틱스의 품으로 다가왔다.

####

‘어디서 저런 예쁜 녀석을 데려왔나 몰라?’

우리 단장, 아니, 사장님이 일을 참 잘하기는 잘해.

월드시리즈 우승을 위해서 저런 녀석까지 떡하니 데려온 걸 보면. 그것도 트레이드로.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지만, 한편으로는 좀 아쉽네. 이런 경기가 금방 끝난다는 게.

딱히 각오도 없었다.

그냥 계속 오를 생각이었거든.

하지만 이렇게 됐으니.

“스트라이크 아웃!”

굳이 더 길게 이어질 필요는 없겠지.

마운드에 오른 순간 모든 걸 잊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 슬슬 인터벌을 가속하려고 했는데, 알고 보니 어느 순간 이미 빨라져 있었다.

언제부터 이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경기에 몰입했던 거겠지.

집중력과 감각이 한계까지 올라와, 알아서 스위치를 올려버릴 정도로.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그 뒤로도 마운드에 내려가고, 다시 오르고, 다시 내려갔다.

그렇게 아마도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이닝에 올라섰을 땐,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에 더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니, 그냥 경기장이 적막해진 걸까? 심장소리 밖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코디 벨린저.’

차분하게 숨을 내쉬자, 요동치던 심장이 가라앉았고, 마찬가지로 분위기가 착 가라앉은 다저스 타자 또한 그의 마지막 타석에 올라섰다.

아니, 속단할 수는 없겠지.

마지막이 아닐지도 모르니까.

기분 좋은 감각에 흩어지던 긴장감을 다시 붙잡은 뒤.

비록 적이지만, 오늘을 함께했던 그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면서, 마지막이 될 공을 왼손 가득 쥐었다.

“아웃!”

딱-하는 청명한 소리.

듣기 좋은 타격음이 귓속을 맴돌았다.

약한 구질을 제법 잘 쳤지.

잘 맞은 타구이기에 멀리 날아갈 수도 있겠지만, 굳이 확인하지는 않았다.

오늘은 그런 날이 아니니까.

“아웃!”

예상처럼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서 아웃카운트가 올라갔다.

살짝 눈살을 찌푸리긴 했지만, 그럼에도 스스로 최선을 다했다고 느낀 건지.

코디 벨린저는 그저 이 순간을 덤덤히 인정하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야시엘 푸이그.’

반면 그다음으로 올라온 타자는 지금 이 순간 자체가 악몽이라는 것처럼 허망함이 가득한 눈동자로서 타석에 올랐다.

많이 허탈해 보이네.

기껏 7차전까지 이어갔던 자신들의 노력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지겠지.

앞서 코디 벨린저도, 눈앞의 그도, 서로 다르지만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기에,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러자 그는 그제야 준비가 되었다는 것처럼 배트를 쥐었고.

“스트라이크 아웃!”

힘껏 휘둘렀다.

자신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고 스스로 선언하듯, 야시엘 푸이그 역시 앞선 코디 벨린저와 마찬가지로 당당한 걸음으로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오스틴 반스.

그는 차분한 얼굴로 타석에 올랐다.

실점을 내준 포수이자 안타를 치지 못한 타자로서.

이번 경기에서 가장 큰 아쉬움을 안고 있는 남자겠지만, 그는 묵묵하게 타격폼을 취했다.

그런 그와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나 역시 최후의 준비를 마쳤다.

“파울!”

초구는 포심 패스트볼.

강력하게 찍어 누른 공이 여전한 위력을 보여주며, 타자의 몸쪽으로 들어갔다.

타자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서 그걸 후려쳤지만, 이번에도 밀려난 배트에 공은 그것을 뚫고서 뒤로 날아갔다.

“파울!”

2구도 포심 패스트볼.

하지만 구질은 다르다.

이번 경기 내내 보여줬던 것처럼, 위력적인 포심 이후 날아든 떨어지는 듯한 포심은 아슬아슬하게 배트를 스쳤다.

다만 확실히 힘은 훨씬 떨어지기에 제법 멀리 날아갔지만, 나도 타자도, 그걸 굳이 확인하지는 않았다.

그저 다시금 자세를 취했을 뿐.

‘더럽게 벅차네.’

새로 넘겨받은 공을 손 안에서 굴리며, 다시금 요동치기 시작한 가슴을 진정시켰다.

너 자꾸 나 촌놈으로 만들래?

앞으로 수십 번은 더 해야 하는데, 벌써부터 이러면 어떡해? 촌스럽게 말이야.

도통 말을 들어 처먹지 않는 심장에게 호통쳐보기도 했지만, 생떼를 쓰기 시작한 어린아이처럼, 그저 더욱더 크게 소리쳤다.

결국 그런 심장을 달래주는 걸 포기한 채, 그저 받아들였다. 지금의 감정을.

“후우-”

깊게 숨을 내쉰 채, 심장의 박동을 박자 삼아, 마지막이 될 공을 던졌다.

왼팔을 휘두르자 타자의 눈동자가 잠깐 반짝였다. 직전의 2구와 느낌이 비슷했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최후의 순간, 자신에게 기적이 닥치길 바라듯 어쩌면 비릿한 맛이 날지도 모를 만큼 입술을 꽉 깨물면서 배트를 휘둘렀고.

“스트~~~~~~라이크 아웃!”

배트는 허공을 갈랐다.

월드시리즈 7차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챔피언을 가려낸 위닝샷은 100마일이 훌쩍 넘는 강속구가 아니었다.

기이한 궤적을 뽐내며 타자를 솎아내는 마구도 아니었지.

“62마일이라··· 최저 구속 갱신이네.”

그저 프로에 데뷔한 이후, 최저속을 갱신한 62.1마일, 99.9km/h의 슬로 커브였지.

참 신기한 일일 거야.

앞서 언급했던 100마일이 훌쩍 넘는 공들도 해내지 못한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런 게 결정지었다는 건. 그렇기에 야구가 재밌는 거고.

이제 동료들이 달려들 거다.

환호성도 터져 나올 거고.

날 트로피처럼 들어 올리거나, 시원하게 음료수 혹은 샴페인 같은 걸 뿌릴 수도 있지.

하지만 그전에 먼저 나는 아주 잠깐 동안 나 혼자 만의 시간을 즐겼다.

‘시원하네.’

축하라도 해주는 건지, 홀로 선 마운드 위로 바람이 불어왔다.

10월 31일. 가을이 만연한 계절답게 시원한 가을바람이. 수고했으니, 이제 조금 식히라는 것처럼.

용광로처럼 들끓던 속도 조금은 식었지만, 심장은 여전히 두근거렸다.

“으아아아아아아아!”

결국 날 촌 놈으로 만들었지.

도무지 소리를 지르지 않고는 못 버틸 것 같았거든.

그렇게 한껏 소리를 지르고 나니, 이제야 똑똑히 떠오르네. 오늘 내가 한 일들이.

9이닝 21K 무피안타 무사사구 무출루. 퍼펙트게임.

월드시리즈, 그리고 한 시즌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가장 완벽한 방식이었겠지.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럴 것이라고 스스로 믿으면서, 오늘도 동료들에게 몸을 맡겼다.

‘후련하네.’

밖이 아니라, 내 안에서 부터 불어온 바람 덕분에 조금은 후련하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오프시즌이 시작되고, 내년이 되면 또다시 쳇바퀴처럼 반복해야 하겠지만. 그건 나중으로 미뤄두고서, 지금 당장은 이 후련함에 흠뻑 젖어도 괜찮겠지.

날 적시는 달콤한 샴페인 향기랑 같이.

에필로그(完)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월드시리즈 우승!>

<정규 9이닝 최다 탈삼진 신기록, 월드시리즈의 마지막까지 Go, Go, Go!>

완벽했던 시간이 끝났다.

너무나도 완벽했기에, 짙은 여운을 남겨놓고서.

동료들에게 휩싸여 하늘을 날듯, 높이 떠오른 고유석의 사진이 여러 매체의 일면으로 떠올랐다.

그가 올해 팬들에게 보여줬던 놀라운 순간들과 함께.

10월의 마지막 승자는 애슬레틱스였고, 고유석이었다.

<완벽한 투수의 완벽한 경기! 돈 라슨에 이어, 역대 2번째 월드시리즈 퍼펙트게임을 달성한 Go!>

<고유석, 한 시즌 동안 다섯 번의 완벽한 경기를 해내다!>

<고유석 포스트시즌 6경기 6승 0패 54이닝 0자책점 102K 6완투 6완봉 2퍼펙트, MLB 사상 최고의 포스트시즌 플레이어!>

<단일 포스트시즌 최다 탈삼진, 최다 이닝, 최다 완투, 최다 완봉··· Go, 포스트시즌의 역사를 재정립!>

그 영광스러운 우승까지 무수히 많은 기록이 경신됐다.

하나하나 다 헤아리는 것이 시간낭비처럼 느껴질 정도로.

애초에 그 모든 발걸음이 새로운 기록이고, 역사였으니까.

<고유석, 월드시리즈 MVP 선정!>

<올스타, 챔피언십, 월드시리즈 MVP 트리플 크라운, 남은 건 오직 정규시즌. Go, 사상 초유의 MVP 그랜드슬램을 해내나?>

또다시 쟁취한 MVP라는 단어가 그 마지막을 더욱더 빛내줬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건 그저 시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작년 모든 곳에서 그 이름이 발견됐던 것처럼, 올해도 별반 다르지는 않을 테니까.

[#A's]

[난 작년의 Go를 보면서 확신했어. 이제 내가 어떤 투수의 시즌을 보고 감탄하거나, 경외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근데 그게 단 1년 만에 깨졌네. 그것도 같은 사람 때문에.]

└아마 내년에도 이렇겠지. 그다음에도 이럴 거고. Suck이니까.

└한편으로는 좀 궁금하네. 과연 Suck이 어디까지 갈 건지. 이런 투수의 끝은 어딜지.

[#A's]

[나만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벌써 Suck의 경기가 보고 싶어서 미치겠어. X발 다음 경기까지 아직 네 달이나 남았다고?]

└왜 야구는 1년 내내 안 하는 걸까? 왜 겨울에는 푹 쉬냐고. 그냥 맨날 하면 안 돼?

└선수들 죄다 죽을 일 있냐?

└다른 선수라면 몰라도, Suck은 1년 내내 해도 멀쩡할 걸?

└그건··· 반박 못하겠네.

그렇게 한 시즌, 그리고 한 위대한 순간의 끝이 도래했을 때.

조금은 우습지만, 경기가 끝난 지 아직 24시간조차 지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은 아쉬워했다.

다음 피칭을 볼 때까지, 너무도 긴 시간이 남았다는 것이. 그 시간 동안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오클랜드. 월드시리즈 우승 축제가 열리다! 수십만 명이 응집!>

<고유석, 팬들의 환호에 미소! ‘내년에도 기대해 달라!’ 포부를 밝혀···>

그것이 마치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기꺼이 참고 기다렸다.

내년 역시 기대해 달라던 당당한 말처럼, 다시 마운드에 오르는 시간이 왔을 때, 고유석이 지금처럼 자신들을 즐겁게 하리라는 확신이 들었으니까.

그렇게 수없이 많은 영광과 위업, 그리고 환희와 기쁨 속에서 2018년의 야구가 끝났다.

한 투수가 그 왼팔과 왼손으로 스스로 써 내려간 일대기의 한 페이지와 함께.

####

<2018 아메리칸 리그 사이 영 상 수상자 : Go You-Suck(OAK - 33경기 33승 0패 259이닝 ERA 0.14 461K>

<2018 아메리칸 리그 최우수 선수상 수상자 : Go You-Suck(OAK)>

시즌이 끝나고 작년처럼 한동안은 미국에서 머물렀다.

작년보다도 훨씬 더 피로감에 찌든 몸으로 태평양을 건너기에는 부담감이 있었고.

또 작년처럼 상을 쓸어 담아야 하기에, 바로 떠나기가 조금 애매했지.

그나마 일이라도 없어서 다행이지. 또 마구잡이로 스폰서니, CF니 주워 담았으면, 올해도 영락없이 고생했을 거야.

-몸조리는 잘하고 계십니까?

“너무 쉬어서 오히려 몸이 동나는 기분이에요.”

-항상 노력하는 모습이 좋긴 합니다만, 그래도 쉴 땐 쉬어야 합니다.

“그래야죠, 내년에도 잘하기 위해선.”

우승 직후 브라이언은 잠시 같이 지내다가 다시 보스턴으로 돌아갔다.

올해는 별다른 일도 없으니, 계속 오클랜드에 있을 수가 없었거든.

그렇게 돌아간 뒤에도 그는 수시로 내게 연락을 보내고는 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날 체크했지. 대니얼도 마찬가지고.

‘번아웃이라···’

그들만 그런 건 아니다.

팬들도, 여러 언론도. 그리고 구단에서도 은근히 걱정했거든.

단 2년 만에 모든 걸 이뤄내고, 최고의 자리에 올랐으니, 곧바로 내가 번아웃에 빠질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특히나 올해는 정말 모든 걸 토해내듯 처음부터 끝까지 쭉 쉬지 않고 달렸던 시즌이기에 육체적인 피로감과 더불어 정신적인 피로도 닥쳐올 것이라고.

‘가슴 안쪽이 공허하긴 했지.’

마지막 아웃카운트가 올라가고, 삼진을 잡아냈을 때.

인생에서 느껴본 적 없는 후련함을 경험했었다. 한여름날 얼음장 같은 차가운 물속으로 뛰어든 기분이었지.

그리고 그 뒤에는 솔직하게 말하면 조금은 공허함이 찾아오기도 했다.

아마 모든 욕심이 충족되고, 모든 목표를 이뤄내면서 생긴 공백이겠지.

그러니, 어쩌면 내가 번아웃에 빠질 수도 있다던 사람들의 예측은 어느 정도는 타당할 수도 있지만···

“그럴 리가.”

그냥 시원스럽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래, 공허함이 좀 오래가기는 했지.

10월이 지나고, 11월마저 끝나가는 지금까지도 약간은 남아 있었으니까.

허나 번아웃이나, 피로는 없었다. 또다시 다음 시즌이 점점 더 다가오고, 머릿속에 떠올리기 시작하니.

그토록 모든 것들이 후련하게 해소됐다고 생각한 마음속에선 다시금 욕심이 피어올랐거든. 벌써부터 침을 질질 흘릴 만큼 여전히 탐욕스럽지.

“아마 평생 이렇겠지.”

정말로 모든 것들을 다 가지기 전까지는 말이야. 어쩌면 그 뒤에도 여전할지도 모르고.

“대니얼, 슬슬 내년 일정 준비하죠.”

“벌써요? 조금 더 쉬셔도 되는데요.”

“뭐, 한국 들리고 하다 보면 시간 또 금방 지나갈 테니까요.”

아마 다들 칼을 갈고 있을 거다. 마지막 퍼즐마저 쟁취한 날 노리고, 끌어내리기 위해서.

당연하게도 당해줄 생각 따윈 없다. 다음 시즌도 완벽하게 준비를 갖춰야겠지.

‘스플리터였던가?’

새로운 무기도 갈고닦고.

몇 차례 추천을 받기도 했다.

내 포심은 떠오르는 듯한 시각적 효과를 줄 만큼 무브먼트가 강력하니.

반대로 패스트볼 같으면서도 떨어지는 스플리터와의 상성이 굉장히 좋을 것이라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원래 종으로 떨어지는 건 서클 체인지업 V1이나 너클 커브가 담당했는데.

그 둘은 역회전이든, 정회전이든 약간의 수평적인 이동도 있으니.

강하게 백스핀이 걸려서, 종적인 움직임만 강한 스플리터를 장착하면 제법 괜찮겠어.

‘나쁘지 않겠네.’

칼을 갈고 있는 사람들의 턱을 다시 한번 더 후려쳐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즐거웠다.

역시 번아웃이 오기엔 아직 야구가 너무 재밌단 말이야.

“그래, 영원히 이러겠지.”

내년에도, 3년 뒤에도, 5년 뒤에도, 10년 뒤에도.

####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 흘러갔지.

첫 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이, 그리고 그 직후 느꼈던 감정이나, 생각들이 여전히 생생한데도 말이야.

10년이라는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나는 여전히 마운드 위에 있었다. 그것도 콜리시엄의 마운드 위에.

-우리의 Go가 콜리시엄으로 돌아왔습니다! 모두들 환영의 인사를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Suuuuuuuck!"

뭐, 입고 있는 유니폼은 그때랑 다르지만 말이야.

결국 연장 계약은 없었다.

애슬레틱스에선 어떻게든 날 품고 싶어 했지만, 내 몸값이 워낙 비쌌거든.

연봉조정 1년 차에 2천5백만 달러를 받고, 마지막 FA 시즌에선 4천만 달러를 받았기에, 애슬레틱스로선 그것만으로 이미 허리가 휠 지경이라서 어쩔 수가 없었지.

제 아무리 내 인기와 우승 덕분에 체급이 올라갔다고 해도, 여전히 빅마켓은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18년 이후, 19, 20시즌까지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3년 연속 우승으로 왕조도 세웠으니, 딱히 미련이 남지는 않았다.

그냥 떠난 순간이 아쉬웠지.

홈 디스카운트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금액차가 존재했고, 그걸 알기에 팬들도 조금은 덤덤하게, 그러면서도 눈물 속에서 날 보내줬으니까.

그리고 다시 돌아왔다.

콜리시엄으로.

“Suuuuuuck!"

환호성은 여전했다.

단순히 풋볼 팬들이 유입된 수준을 넘어, 아예 애슬레틱스 자체의 팬 문화로 정착된 레이더스도 여전했고.

그들은 마치 10년 전과 마찬가지로 나를 바라보며 Suck이라고 외쳤다.

‘이러니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기분이네.’

그렇게 10년이 이어지는 동안 여러 일들이 있었다.

17년부터 27년까지.

11번의 시즌 동안 2550이닝을 던졌고, 4270개의 탈삼진을 잡았으며, 301승을 올렸지.

기타 등등은 더 많고.

그러는 동안 참 다사다난했지. 지금 내가 ‘레인저스’ 유니폼을 입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을 거야.

진짜 상상도 못 할 일이지. 내가 다른 팀도 아니고 텍사스 레인저스의 유니폼을 입는다는 것은.

이젠 레인저스도 확신한 거지.

날 어차피 이기지 못하니, 계속 발목이 잡힐 바에는, 차라리 그냥 돈으로 데려오자고.

뭐, 그래 봤자, 단 년 계약이지만, 무려 7천만 달러를 과감하게 배팅했지.

그토록 다사다난했던 순간들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때는 21년이다. 왜냐고?

‘X발 아직도 치가 떨리네. 진짜로 올림픽이 연기될 줄이야.’

야구인생이 아니라, 고유석이라는 인간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거든.

19년의 프리미어 12는 출전해서 우승했는데, 정작 올림픽이 빌어먹을 코로나 때문에 연기되더니. 막상 다시 올림픽이 열리니까, 사무국에선 메이저리거들 차출을 거부했으니까. 절대로 안 된다면서.

내 연봉조정 이후 본격적으로 독립해서 에이전시를 차린 브라이언의 모든 역량을 동원했었다, 나도 인생에서 처음으로 SNS를 시작했고.

정 차출 못해줄 거면, 아예 은퇴하겠다고 발언하니까, 나머지 29개 구단이 기꺼이 동의했지만, 그래도 팬들이 발 뻗고, 롭 맨프레드를 죽이겠다고 나서서 예외 조항이 생겼지.

그 덕분에 간신히 올림픽에 승선할 수 있었다. 당연히 금메달을 따냈고.

그 외에는 뭐, 평범하지.

그렇게 지금, 2028시즌 개막전까지 온 거고.

“오늘 폼 좋으시죠?”

“말해 뭐해. 제임스 넌 다른 거 신경쓰지 말고, 공이나 잘 잡아. 내 말 잘 듣고,”

“예예, 그래야죠. 누가 감히 위대한 Suck의 말을 거스르겠어요.”

마운드에 오르니, 애송이 포수가 뺀질뺀질한 얼굴로 씨익 웃었다. 브루스 녀석, 그렇게 버티라고 했거늘, 결국 은퇴했지.

매번 손목이 부러질 것 같다고 징징거리더니, 정작 무릎 부상이 문제였지.

솔직히 말하면, 얘가 브루스보다 잘해. 훨씬 잘하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얘뿐만이 아니라, 다른 녀석들도 잘하는 편이고. 격세지감이군, 내가 생각하는 레인저스는 여전히 호구 중의 호구인데 말이야.

애초에 다른 곳도 아니고 레인저스에서 날 데려온 것 자체가, 어떻게든 올해 우승하겠다는 의지 표명이었지.

애슬레틱스를 떠난 이후에도, 세 개의 반지를 더 추가한 나니까.

‘아직 열 손가락 다 채우려면 한참은 더 남았네. 발가락까지 끼려면 진짜로 50살까지 해야겠어.’

요기 베라는 아직도 멀구만.

그래도 계속 더 하다 보면 충분히 가능하겠지.

열 손가락에 죄다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를 끼고 있을 내 모습을 상상하니, 좀 우스꽝스러워서 피식 웃었다.

“기분 좋으신가 봐요? 집으로 돌아오셔서.”

“그래, 기분 좋네.”

그런 내 모습에 포수는 알 만하다는 듯 헛다리를 짚었다.

다시 친정팀 홈으로 돌아온 것에 내가 기분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한 거겠지.

집이라는 말은 별거 아니다.

여기가 콜리시엄인데, 예전 콜리시엄은 아니거든. 새로 지었지. 나도 애슬레틱스 마지막 시즌에선 여기서 뛰었고.

조금 낯간지러운 별명이 붙어 있다. Suck의 집, 혹은 Suck이 지은 집이라던가?

진짜 베이브 루스가 돼버렸네. 내가 지은 구장까지 하나 생기고.

‘그래, 기분이 좋긴 하지.’

포수를 보내고, 마운드 위에 홀로 서서, 잠시 상대팀 덕아웃을 봤다.

오늘은 참 묘한 날이다.

새로운 시즌의 개막전이기도 하지만, 과거의 약속이 지켜진 날이기도 하거든.

‘노아. 진짜로 왔네,’

정확하게는 노아 매디슨. 오늘 첫 빅리그 데뷔한 투수다.

시범경기에서부터 엄청난 모습을 보여줬던 녀석이기에, 애슬레틱스 팬들은 기대하고 있지.

녀석이 두 번째 Suck이, 아니면 첫 번째 노아가 되어주기를.

그렇기에 시범경기에서 에이스가 부상으로 이탈하자, 나를 떠올리면서 과감하게 개막전 선발투수로 냈고.

‘빠르면 10년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짜로 딱 10년 걸렸구만.’

걔 맞아.

나한테 사인볼을 받았던 꼬맹이. 오클랜드로 초청했을 때, 자기도 노히터를 할 테니, 그때까지 기다려 달라던 녀석.

최대한 빠르게 계산해서 한 10년쯤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10년 걸렸네.

언론에선 신기한 인연이고, 좋은 스토리라면서 개막전 명단이 발표된 직후부터 아주 난리법석이었지.

새로운 시대의 기대주와 그가 동경했던 리빙 레전드가 맞붙었다면서.

노아는 앞서 내가 칭찬했던 레인저스를 화끈하게 KKK로 잡고 내려갔다.

‘당연히 그래야지.’

솔직하게 말해면 좀 흡족해.

응당 A's의 에이스라면 레인저스를 호구로 잡아야 하니까.

나로부터 시작된 전통이 아직까지 잘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아서 아주 만족스럽군.

그렇게 멋진 피칭을 보여주고서 덕아웃으로 돌아간 녀석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10년 전과 마찬가지로 별빛처럼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꿈이 이뤄진 순간의 얼굴이지.

녀석에겐 나와 같은 마운드 위에 선다는 게 일생 최대의 목표였을 테니까.

그런 눈동자를 잠시 눈에 담아두다가, 자세를 취했다.

다시 돌아온 오클랜드.

내가 지은 새로운 콜리시엄.

상대는 친정팀 애슬레틱스.

예전처럼 환호성을 내질러 주는 수많은 팬들과 날 꿈으로 삼은 어린 꼬맹이가 바라보는 마운드의 위.

그 모든 것들이 조합되어, 왠지 모르게 가슴을 간질간질하게 만들었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역시 아직은 욕심이 더 크다.

여전히 더 크지. 10년 전에 스스로 생각했던 것처럼, 아마 영원히 이럴 거야.

“스트라이크 아웃!”

물론 좋은 이야기다, 스토리고. 날 동경하던 꼬맹이를 상대투수로 만나다니.

아마 은퇴하는 순간, 뭉클하게 기억할 추억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스트라이크 아웃!”

난 오늘도 이길 생각이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스플리터가 빠르게 떨어지며, 타자의 헛스윙을 유도했다. 그대로 삼진아웃.

KKK. 항상 그렇듯 2028년의 첫 번째 경기도 이렇게 시작했다.

“You Suck!"

여전히 우렁찬 유썩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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