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316화 (315/316)

316화

예전에는 어느 순간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었다.

갑자기 너무 어메이징하게 달라졌었잖아? 처음에는 서클 체인지업이 긁히더니, 그다음엔 슬라이더가 긁혔고, 그러다가 원래 좋았던 제구도 완전히 정점에 이르렀지.

내가 몰입하면 할수록, 점점 더 인터벌이 빨라진다는 것도 알게 됐고.

그러다가 오프시즌에선 좋은 트레이너를 만나면서, 내가 미처 모르고 있던 구위까지 깨달으면서 정점을 찍었다.

두 가지의 서클 체인지업.

쓰리핑거 체인지업도 하나.

너클 커브는 중간에 장착. 그렉에겐 커터와 투심을 배웠고.

슬로 커브는··· 뭐 그나마 이게 가장 옛날이랑 변화가 없네. 다만 다른 것들의 전력이 오르면서, 얘도 위력이 올라갔지.

더블A에서 한 시즌, 아니, 반 시즌, 그리고 메이저에서 두 시즌 숨 가쁘게 달렸고, 아무리 봐도 차근차근 스텝업을 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

그렇기에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사상누각이 아닐까, 조금 무섭기도 했었다.

‘서서히 시간이 지나면서 옅어졌지만.’

하지만 그토록 좋은 날이 하루, 이틀, 그리고 삼일, 그 이상 동안 반복되면서 두려움은 가셨다. 걱정도 사라졌고.

한순간 사라질 것들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거든. 그래서인지 자신감도 더욱더 커졌지.

어쩌면 이런 순간들이 앞으로도 계속, 영원토록 이어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리고···

“잘 주무셨습니까?”

“네, 이상하게 잠이 잘 오네요.”

“수면 시간은 피로와 관련이 있죠. 숙면을 취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만큼 피로가 쌓였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경기 끝난 뒤에는 한동안 늘어지게 자야겠네요.”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죠. 모든 일을 끝마치게 취하는 수면은 달콤하니까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연이어 3일밖에 준비를 갖추지 못한 몸은 아직도 괜찮았다.

다만 대니얼의 말처럼 그 안쪽은 이미 피로감에 잔뜩 찌들어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의 말처럼 오히려 쉽게 숙면에 들어가는 것이 그런 몸 상태를 말해주는 걸지도 모르겠고.

그러니 모든 일이 끝난 뒤에는 한동안은 수면으로 시간을 보내더라도 나쁘지는 않겠지.

모든 게 끝난 뒤에는 말이야.

“낭만이라··· 대니얼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낭만이 있다고.”

“낭만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혹사죠. 설마 피지컬 트레이너인 저에게 다른 감상을 듣고 싶으신 건 아니시죠?”

“신랄하시네요.”

그런 한 시즌의 마지막에 드디어 다가선 나를 보며, 언론이나 팬들은 그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포스트시즌, 월드시리즈,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하이라이트에 응당 걸맞은 낭만적인 일이라고 말이야.

뭐, 한 명의 선발투수가 월드시리즈에서 세 번의 승리를 달성하는 것. 그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니까. 커트 실링이나, 범가너조차 2승으로 그쳤고.

아마도 마지막 3승이 랜디 존슨이었던가? 그마저도 선발은 커트 실링이었고, 불펜으로 등판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럼 선발 3승은 누가 마지막이지?

-1968년, 미키 로리치 이후 50년 만의 월드시리즈 선발 3승이 달성될 수도···

신문에서 친절하게 설명해주네. 50년이라니, 이것도 생각보다 엄청 낡은 기록이구만.

최근 가장 근접했던 건 아마 코리 클루버일 거다. 티비로 지켜보면서 세상이 망하는 날이라고 생각했던 재작년, 컵스가 우승했을 때 그가 도전했었지.

하지만 과도하게 무리한 것 때문인지, 결국 버텨내지 못하고 7차전에서 무너졌지만 말이야.

2년 만에 또다시 도전자가 등장한 건데, 심지어 나 같은 경우는 9월부터 이어온 완봉까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니, 더욱더 스토리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겠어.

그렇기에 에이스로서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낭만이라며, 사람들은 기대하고 있었다.

‘사실 그렇게 낭만적인 이유로 마운드에 오른 건 아닌데 말이야.’

정작 난 그런 게 아닌데 말이야. 늘 말했듯 그저 욕심이지.

이 시즌의 끝을, 그리고 포스트시즌과 월드시리즈를 온전히 나 혼자서 즐기고 싶다는 순수한 욕심.

오늘은 그저 그 욕심이 그 끝에 달했을 뿐이다.

‘사실 모두 다 욕심이지, 나도, 다른 동료들도, 다저스도.’

결국은 욕심이다.

다른 선수들도 팬들을 위한 선물, 구단의 영광 같은 게 아니라, 진짜는 우승 반지를 끼고, 트로피를 들어 올리고 싶다는 욕심으로 견디고 있는 거지.

팬들 또한 상대를 꺾고, 30년 혹은 29년 만의 우승을 달성하고 싶다는 욕심을 품고 있고.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승리를 말하고 싶었다.

그런 욕심쟁이들끼리의 마지막 전투이니, 어느 것 하나 놓지 않고 모든 걸 질질 끌고 온 최고의 욕심쟁이가 승리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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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경기에선 체력은 문제없었는데, 오히려 감각이 덜 올라와서 문제였어요. 오늘은 좀 빡세게 올리죠. 그 어느 때보다도 컨트롤이 필요한 경기니까. 그래도 괜찮겠죠?”

포스트시즌 내내 홈에서 경기를 치를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브라이언의 픽업을 받아 콜리시엄으로 향하며, 나는 지난 경기에서 느꼈던 문제점을 대니얼에게 토로했다.

오히려 체력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경기 초반에 살짝 제구가 흔들렸던 게 문제였지.

그때보다 지금이 더 피로가 쌓였고, 더욱더 몸 상태가 위험하니 조심하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긍정적인 말을 해줬지.

“마지막이니, Go가 바라는 대로 해야죠. 부상의 징후가 없으니, 조금 무리하더라도 한동안 푹 쉴 수 있다는 걸 감안하면, 큰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겁니다.”

“대니얼이 그렇게 말해주니, 안심되네요.”

오늘이 끝이라고 해도, 그다음마저 없는 것은 아니기에 솔직히 조금 걱정하기도 했는데. 그의 말에 조금은 안심했다.

어쩌면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려는 걸지도, 다른 걱정은 신경 쓰지 않고, 온전히 피칭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그나저나, 오늘도 만원 관중이겠네요.”

“그렇겠죠. 도로에 깔린 차들만 보더라도, 이 도시 전체가 움직이고 있으니까요.”

도시 전체가 야구로, 내 이름으로 물든 모습은 이제는 조금 식상하지만, 그래도 볼 때마다 기분이 색다르기는 했다.

아마도 곧 도착할 콜리시엄을 가득 채운 사람들도 여전히 나에게 두근거림을 선사하겠지.

“중계 역시, 어쩌면 시청자가 4천만을 훨씬 넘을 수도 있을 거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 정도면 거의 캘리포니아 전체 인구수 수준 아니에요?”

“거의 그 정도 수준이죠. 다만 캘리포니아 만의 일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물론 경기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그보다도 훨씬 더 많을 테고. 브라이언은 4천만을 이야기했다.

컵스 7차전이 4천만 정도를 찍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염소의 저주급 기대를 받고 있다는 거구만.

4천만 명 앞에서 개같이 털리면 진짜 쪽팔려서 고개도 못 들겠어.

미국에서만 4천만 명이 그런 장면을 본다는 건데. 미국 인구가 3억 정도인 걸 감안하면, 길 가다 마주친 사람 열 명 중 못해도 한 명은 내가 털리는 장면을 봤다는 거 아니야?

‘그중에서도 오클랜드는 100%겠지. 열 명이면 열 명, 백 명이면 백 명 전부다.’

특히나 그 4천만 명 중 나로 인해 경기를 시청할 사람이 절반쯤은 되겠지. 괜히 자뻑하는 걸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아무리 월드시리즈라고 해도, 이 정도로 시청자가 몰릴 이유가 없으니까.

이것 참, 사람들 앞에서 쪽팔리기 싫어서라도 오늘 진짜 잘하긴 해야겠네.

그런 다짐 속에서 도착한 라커룸의 분위기는 의외로 좋았다.

‘바짝 긴장하고 있을 줄 알았더니, 오히려 좀 편안해 보이네.’

3승 1패로 상대를 몰아세우다가, 2연패를 당하면서 함께 절벽의 끝자락으로 올라섰으니.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고 있을 줄 알았는데, 선수들도, 그리고 평소처럼 경기를 준비하는 구장 직원들과 클러비도 그다지 긴장하거나,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았다.

“올해 못하면, 내년에 하면 되는 거지.”

“어떻게든 Suck 옆에 붙어 있으면, 언젠가 한 번쯤은 하지 않겠어?”

“얘가 지금까지 한 것만 봐도 그렇겠지.”

“난 최대한 오클랜드에 붙어 있으려고.”

“그치, 단장이나 사장이 갑자기 돌아버리지 않는 이상, FA 전까지는 쟤도 여기 있을 텐데, 나도 같이 묻어가다 보면, 반지 하나쯤은 끼겠지.”

이번이 아니라도 다음에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지.

이번 10월의 내 피칭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봤으니, 설사 오늘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가능할 것이라고 말이야.

그래서인지, 무려 월드시리즈 7차전이라는 최악의 끝장전을 앞두고도 사기 자체는 좋은 편이었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저 피식 웃고 말았다.

다음을 얘기하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으니까.

“오늘 할 거야. 언젠가가 아니라.”

난 오늘 하고 싶거든.

다음이니, 언젠가니 그런 걸 거론하고 싶지도 않았고.

“자신감이 아주 넘치네?”

“넘치지, 사내새끼가 불알 두 쪽이랑 자신감 빼면 뭐가 남겠어?”

그런 내 모습에 좋았던 분위기는 조금 더 늘어졌다. 몇몇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고.

“아주 마초맨 나셨네.”

“Suck이 제대로 말하긴 했네. 그치, 이번에 해야지.”

“우리가 실수했어. 네가 무조건 이길 텐데, 벌써부터 다음을 얘기하다니.”

하지만 대부분은 내 말이 정답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눈빛도 좀 달라졌네.

나와 마찬가지로 오늘 이길 생각이 팽배해진 타자들을 흡족하게 바라보다, 그중 브루스를 지목했다.

“브루스.”

“왜, 뭐 논의할 거라도 있어?”

“워밍업 하고 나서, 오늘 불펜 피칭은 니가 좀 받아줘. 너도 적응해야 할 테니까.”

“뭘? 설마 또 구종 하나 장착했어? 니가 무슨 리베라라도 되냐?”

“있어, 그런 게. 너도 딱 보면 알 거야.”

그토록 자신감 있게 말했던 오늘의 승리를 완성시켜줄 마지막 무기를 점검하기 위해서.

단순히 기운찬 허세가 되지 않기 위해선, 자신감을 표출하면서도 준비 역시 철저하게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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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시즌에선 구종이 많으면 많을수록 유리하다고 한다.

같은 팀을 연달아서 상대하니, 쓰리피치나, 투피치로는 진짜 엄청나게 잘하는 게 아닌 이상, 타자들에게 금방 타이밍이 잡히고, 간파되니까.

피치가 많을수록 당연히 타이밍을 잡기가 힘들어지니, 유리할 수밖에 없는 거고.

“···그렇기에 대단히 강력한 스터프와 더불어, 수많은 구질을 가진 Go가 이번 포스트시즌에서 더욱더 날아오른 것입니다만, 다저스 역시 아직은 기회가 있습니다.”

“예,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세 번이나 맞대결을 벌이게 됐으니, 다저스 타자들도 충분히 적응하고 남죠.”

그런 의미에서 고유석의 올해 포스트시즌 호성적은 어쩌면 어느 정도 타당하기는 했다.

리그 최고, 그것도 아웃라이어 수준의 구위를 가진 투수가, 구질조차 수두룩하고.

심지어 새롭게 장착한 릴리스 포인트로 인해 또다시 타이밍이 흔들리니.

제 아무리 단기전이라고 하더라도, 타자들로선 쉽게 타이밍을 잡을 수가 없었으니까.

물론 그런 것을 감안하더라도, 괴악한 수준의 성적이긴 했지만 말이다.

허나 다저스 역시 이번이 세 번째 맞승부이기에,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여러 전문가들은 추론했다.

앞선 두 경기에서 심각하게 털리기는 했지만, 그러면서도 고유석에게 차근차근 적응하기는 했으니까.

그걸 증명하듯 4차전에선 무려 ‘2개’씩이나 피안타를 맞았고 말이다.

“비록 첫 안타는 실투에 가까운 몰린 공을 매니 마차도 선수가 잘 받아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1차전에 비해 헛스윙 비율이 줄어들었죠.”

그런 적응력과 더불어, 2연승을 쟁취하며, 기세 역시 올라온 만큼, 중계진 또한 다저스가 이전의 두 경기처럼 허무하게 쓰러지지는 않으리라고 추측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이전보다 낫다는 것이지, 경기 자체는 애슬레틱스가 승리하리라고 예상했지만 말이다.

“월드시리즈 7차전. 2018년 메이저 리그의 마지막이, 드디어 시작됩니다.”

그런 여러 예측과 추론, 그리고 기대감 속에서 마지막이자 시작이 다가왔다.

모든 식전 행사가 마치고, 다시 깨끗하게 정비된 그라운드 위로 고유석이 등장했을 때.

중계 캐스터는 어쩌면 오늘 경기가 끝나기 전에, 자신의 고막이 먼저 터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Suuuuuuuuuuuuuck!"

아니, 그 혼자만의 문제는 아니겠지. 이 엄청난 함성이 내내 이어진다면, 그것에 노출된 모든 이들에게 똑같은 문제가 생길 테니까.

어쩌면 오늘 이후, 오클랜드에서 청각이상을 보이는 시민 수가 급증할 수도 있고.

이비인후과 의사라면, 오클랜드로 이주해, 개원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그런 시답잖은 생각이 불쑥 떠오른 캐스터였지만, 곧 오직 하나의 존재감이 닥쳐왔을 땐, 모든 잡념이 사라졌다.

‘대단한 존재감이군.’

지난 1차전과 4차전에서도 그의 경기를 중계하며, 충분히 느꼈던 선수이지만.

지금은 그런 이전 경기들보다 훨씬 더 짙은 영향력을 뿜어냈으니까. 오늘로서 끝이니, 더는 스스로를 감출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물론 정말로 그런 마음으로, 스스로 제 존재감을 자랑하듯 뽐낸 건 아니겠지만.

지금까지 그가 해낸 일들과 업적, 걸어온 길이 그 마지막에 이르러 절정에 다다랐다.

그것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베테랑답게 그는 금방 떨쳐냈지만, 곧 경기가 시작되자, 그보다도 훨씬 더 거대한 무게감이 닥쳐왔다.

“헛스윙! 브라이언 도저가 바깥쪽 낮은 공을 크게 헛치면서 삼구삼진으로 물러납니다.”

“헛스윙! 저스틴 터너의 배트가 헛돕니다! 순식간에 투 스트라이크!”

“스~윙! And Miss! 저스틴 터너가 다시금 헛스윙을 당하면서, 또다시 삼구삼진! 연속적으로 헛스윙 삼구삼진을 잡아내는 Go!"

비교적 다저스가 잘 대처하리라고 했던 예측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더욱더 헛스윙이 늘어났으니까.

세 번이나 마주한 상대 투수에게 적응하기는커녕, 아예 타이밍 자체가 멀어져 버린 것처럼.

“Go가··· 아무래도 새로운 무기를 준비한 것 같습니다.”

“예, 지금 위닝샷이 포심 패스트볼인데··· 회전수가 1800 그리고 수직 무브먼트가 19인치 정도입니다.”

“하지만 구속은 89마일. 이건··· 체인지업일까요?”

존 스몰츠.

당당히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던 레전드이자, 역사상 최고의 투수진으로 꼽히는 브레이브스 삼인방의 일원이었던 그조차 의문스럽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조금은 이해가 되지 않았으니까. 분명 패스트볼이고, 구속도 패스트볼처럼 찍혔지만.

확연하게 차이를 보이는 공은 타자의 배트를 너무나도 손쉽게 홀려냈다.

‘배팅볼이야.’

캐스터는 확정적으로 말했다. 저건 배팅볼이라고.

여전히 느린 89마일의 구속, 그런데 심지어 무브먼트와 회전수마저 떨어지는 작대기 공. 이건 더 할 말 것도 없이 배팅볼이다.

타자들이 프리배팅할 때나 간혹 던져주는 수준이지.

‘그렇기에 체인지업이다.’

허나 그런 배팅볼 수준이기에, 이건 체인지업이었다.

“크게 헛치는 데이비드 프리즈! 또다시 헛스윙을 유도합니다!”

앞선 두 번의 경기.

심지어 모든 집중력이 동원되는 월드시리즈라는 무대이기에, 이미 Go라는 투수에게 한없이 익숙해진 타자들에게 그 어떤 것보다도 더욱더 강력하게 작용할 체인지업 말이다.

“분명 위험성은 높습니다만, 그의 타이밍에 익숙해진 타자들에게 굉장히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무브먼트와 회전수가 다르고, 타이밍마저 다르니. 완전히 마구 수준이죠.”

물론 그런 효과와는 별개로 배팅볼이기에, 어떻게 보면 쓰리핑거 체인지업보다도 더욱더 위험한 공이다.

저 정도면 거의 스치기만 해도 넘어가는 수준이겠지.

저런 공 수십수백수천수만 개를 때려내고, 무수히 많은 꿈을 짓밟고서 여기까지 올라온 것이 메이저리거니까.

“스트라이크! 또다시 헛스윙!”

그렇기에 이런 무대에서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투수가 이상한 녀석이었고.

단 1점이 우승을 결정짓는 경기에서 기꺼이 홈런을 감수한 채, 타자들을 농락하듯 공을 던지는 투수를 보며 캐스터는 혀를 내둘렀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이건- 슬라이더?”

“예, 슬라이더··· 같네요. 평소보다 각이 조금 크지만, 역시 회전수는 떨어집니다.”

“Go가 새로운 무기들을 꺼내어, 또다시 삼진을 잡아내면서··· 1이닝 9구3삼진. 무결점 이닝을 달성합니다.”

데이비드 프리즈를 잡아내며, 모든 걸 완성 지었을 때, 그게 끝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 기이한 오프스피드는 단순히 패스트볼만이 아니라, 다른 구종에도 적용이 됐으니까.

평소보다는 뭉툭하게, 하지만 그래도 제법 완성도가 괜찮은 슬라이더가 마지막 삼진을 끌어냈으니까.

슬라이더가 주력구가 아니더라도, 매번 던질 때마다 수준급의 완성도를 자랑하는 투수인데.

이번의 경우 가파르게 꺾이는 예리함은 그보다 조금 떨어졌지만, 또 다른 궤적과 타이밍을 보이며, 헛스윙을 유도했다.

‘이렇게 되면··· 지금 Go가 가진 구질이 대체 몇 개지?’

그것을 바라보며, 캐스터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수두룩할 정도로 다양한 구종.

그걸 다시 한번 역으로 꼬는 릴리스 포인트.

그리고 오늘, 마지막 순간 등장한 오프스피드‘들’까지. 저 투수, 대체 몇 개를 가지고 있는 걸까?

아니, 다저스 타자들의 눈에, 당당히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저 투수는 뭘로 보일까?

구종이 많으면 많을수록 유리한 것이 포스트시즌이고, 단기전이라면. 지금 저 투수는 대체 얼마나 유리한 걸까?

“진짜 재앙이군··· 코즈믹 호러 수준이야.”

“Joe?”

“예, Go가 마치 여러 전설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듯한 재앙적인 피칭을 뽐내며, 1회 초를 또 한번 완벽하게 지워버렸습니다.”

모든 걸 짓누르는 듯한 무거운 압박감에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캐스터는 존 스몰츠의 나직한 목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수습했지만. 여운은 짙게 남아, 여전히 머릿속을 뒤흔들었고.

‘다저스 역시 마찬가지겠지.’

그렇기에 앞서 다저스로서 수월하리라고 했던 제 말을 단 수 분 만에 부정하고 싶었다.

경기를 중계하는 자신도 이 정도라면, 그를 타석에 올라 직접 상대하는 다저스 타자들은 더 말할 것도 없을 테니까.

머리가 터지다 못해, 그냥 이대로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을 지경이겠지.

그럼에도 지금까지 그가 중계해왔던 월드시리즈는 언제나 돌발 상황이 일어나고, 기적이 만들어지기도 했기에, 마지막까지 확신할 수는 없겠지만.

‘기적은 이미 일어났지.’

저런 투수가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이기에, 두 번의 기적은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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