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311화 (310/316)

311화

두껍게 껴입은 외투 덕분에 콜리시엄에 입성했을 때나, 라커룸에 들어갔을 때는 잘 몰랐는데.

유니폼으로 환복하고 그라운드로 들어서니, 조금은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기온이 아마도 13도였던가?

10월의 말에 다다르면서, 시원했던 가을바람이 싸늘하게 변했네.

아마도 월드시리즈가 끝날 때쯤이면, 이젠 가을보다는 겨울에 더 가까운 날씨가 되겠지.

“평소보다 바람도 조금 더 부네요. 오늘 같은 날은 어깨가 금방 식을 수도 있으니, 대기하실 때는 평보소다 조금 더 두꺼운 점퍼를 입으시는 게 좋겠어요.”

“땀도 평소보다는 조금 덜 흘리는 게 낫겠죠?”

“네, 자칫 땀이 식으면서 체온을 잃을 수도 있으니, 적당히 달아 올리는 수준으로만 하시죠.”

다행히 유능한 대니얼은 그런 날씨에도 임기응변으로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내가 가장 최적의 몸 상태를 갖추도록 성실하게 도와줬지.

‘대니얼이 없이 혼자 준비했다면, 예상보다 조금 더 추운 기온에 컨디션을 망쳤을지도 모르겠네.’

마이너 시절에는 혼자서도 잘했지만, 누군가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생기고, 그것에 익숙해지다 보니, 나 혼자선 이젠 조금 벅찰 것 같네.

그러니 앞으로도 대니얼을 확실하게 붙들어 둬야겠지. 올해가 끝난 뒤에도.

당장 저번 시즌이 종료된 직후에도 대니얼에게 엄청난 제안이 빗발쳤었는데.

올해는 그보다도 더한 짓거릴 해버렸고, 엄청난 내구성 역시 한 번 더 증명해냈으니.

내구성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대니얼 역시 더욱더 많은 주목과 관심을 받겠지.

그를 지키려면 저번보다 조금 더 노력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이번 시즌은 작년보다도 더 무리하면서, 코치와 더불어서 그의 속도 많이 썩였으니. 조심해야겠지.

다만 그 역시도 지금의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하고, 만족한 것 같다는 게 다행이지만.

‘한국 사람들도 많아 보이네.’

내가 워밍업을 가지는 동안, 욕심쟁이들은 관중석을 빠르게 채워 나갔다.

개중에는 아마도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제법 많았지.

사실 정확한 국적은 알 수 없지만, 동양인인 것 같은데, 콜리시엄에 동양인은 대부분은 한국인이거든.

마에다 켄타의 월드시리즈 피칭을 지켜보기 위해서 날아온 일본인일 수도 있고.

그래도 태극기를 동여맨 사람들도 제법 보였으니, 그들은 확실하게 한국인이겠지.

‘라인업 발표됐을 때, 한국에선 좀 아쉬워했겠네. 기대했던 장면이 성사되지 못해서.’

1차전 라인업이 발표되기 직전까지 한국에선 묘한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1차전에서 무조건 등판할 커쇼가, 지난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7차전 9회 말에 등판했었잖아?

그러니 어쩌면 디비전 시리즈 때처럼 류영진 선배가 대신 1차전에 등판해서. 월드시리즈에서 한국인 선발투수가 나란히 마운드에 오르는 초유의 장면이 성사될 가능성도 있었지만.

아쉽게도 라이브 피칭 날이라서 괜찮았다면 핑계가 진짜였던 건지, 아니면 그냥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건지는 몰라도.

발표된 선발라인업에선 클레이튼 커쇼가 월드시리즈 1차전의 선발투수로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다저스 팬들, 커쇼한테 기대가 많죠?”

“네, 올해는 다르다고 믿고 있죠. 디비전과 챔피언십에서 괜찮은 모습을 보여줬으니까요.”

그리고 그런 커쇼에게 다저스 팬들은 한번 더 속아보자는 생각으로, 또다시 기대를 걸었다.

특히나 올해는 디비전 시리즈에서 8이닝 무실점을 기록하며 시작부터 좋은 모습을 보였고.

챔피언십 1차전에선 4이닝 5실점으로 털렸지만, 5차전에선 7이닝 무실점,

그리고 마지막 7차전에선 구원등판하여 1이닝 3K를 잡아내면서 월드시리즈 진출을 확정 지었으니.

그토록 사랑받던 다저스의 10년대 리빙 레전드가 지금까지 이어졌던 포스트시즌 잔혹사를 드디어 끊어낼 것이고 기대했지.

‘커쇼도 그걸 바라는 눈치고. 21일부터 콜리시엄에 나타났으니까.’

커쇼 역시 그런 팬들의 기대를 드디어 충족시켜 주기 위한 건지, 대단히 비장한 각오로서 1차전을 준비했다.

다른 다저스 선수들보다 조금 더 이르게 오클랜드에 도착하여, 미리 적응 시간을 가졌거든.

적지의 한 복판 속에 기꺼이 홀로 뛰어들었다는 것 자체가 그의 의지를 이야기했지.

지금도 저~기 저쪽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나처럼 열심히 워밍업을 하고 있었고.

물론 다저스 타자들 또한 그에 뒤지지 않는 표정으로 최선을 다해서 준비했다.

아니, 이 경기장 안의 모두가 하나의 목적만을 가진 채로 최선을 다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

모든 메이저리거들의 꿈이라고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절대반지. 그것만을 바라고 있었으니까.

“시간 됐어요, 몸은 충분히 달궈졌으니, 바로 불펜으로 가죠.”

나 역시도 마찬가지고.

오늘도 왼손은 모든 준비를 마쳤다. 까딱거리는 검지 손가락은 절대반지를 끼고 싶다고 외치듯 평소보다 조금 더 반짝였다.

모든 준비가 갖춰졌으니, 이제 남은 건 그걸 스스로 쟁취하는 것뿐이겠지.

####

“웬만하면 한 방을 노려. 짧게 스윙해봤자, 흠집도 안 나는 괴물이니까. 하지만 두려워하지는 마. 딱 한 방이라도 우리가 친다면, 우리의 승리니까.”

“Yes Sir!”

데이브 로버츠 감독의 조금은 현실적인, 하지만 희망을 담은 격려에 다저스 선수들은 잘 조련된 졍예한 병사처럼 소리쳤다.

이성과 야성이 공존하는 눈동자로 곧 시작될 경기에 다가선 선수들을 훑어본 감독은 조금 뒤에 불펜의 문을 열고 나타날 선수를 떠올렸다.

2018년의 돈 드라이스데일.

오늘 경기의 상대 선발투수를 언론에서는 그렇게 부르기도 했지.

정규시즌부터 현재까지 다섯 경기 동안 연속적으로 완봉을 기록하면서, 불멸로 남은 6경기 연속 완봉까지 단 한 번 밖에 남겨두지 않았으니까.

물론 그보다는 포스트시즌이라는 특수성에 기대어, 크리스티 매튜슨이라는 칭호가 훨씬 더 자주 불렸지만.

적어도 다저스와 그 팬들 사이에서는 자신들의 레전드인 돈 드라이스데일이라는 이름이 더욱더 와닿았다.

그렇기에 압박감도 존재했고. 신성스러운 레전드와 비견하거나, 혹은 그를 능가할지도 모르는 21세기의 신화에 대적해야 했으니까.

돈 드라이스데일의 피칭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다저스의 Old Man들은 특히나 더욱더 그랬고.

‘그 망할 21세기의 돈 드라이스데일이 다저스가 아니라, 애슬레틱스 소속이니까.’

돈 드라이스데일은 캘리포니아에 다시금 재림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살짝 방향이 틀려서, LA가 아닌, 그보다 북쪽에서 부활했다.

그리고 독 화이트가 보유 중인 아메리칸 리그 연속 완봉 기록의 타이기록을 세워버렸지.

그런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다양한 관점으로, 수많은 상황을 전제로 분석하고, 계획했다.

더럽게 많은 구질처럼 끝없이 펼쳐진 변수로 인해 이렇다 할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의 남은 체력과 폼. 결국 그게 관건인데, 아무도 모르지. 그 몸 안에 얼마나 대단한 것들이 아직도 더 숨겨져 있는지를.’

상식적으로는 이미 지쳐도 한참 전에 지치고, 망가졌어도 이미 산산조각이 났어야 할 투수지만.

지금도 멀쩡히 두 발을 딛고 서 있으니, 그 어떠한 가정도 가능했다.

마치 언젠가 곧 고갈되리라고 예측됐던 석유가 여전히 펑펑 터지고 있는 것처럼, 여전히 월드시리즈를 덮고도 한참은 더 남아있을 수도 있었지.

‘애슬레틱스에선, 앞으로 세 경기는 더 거뜬하다고 주장하지만···’

그리고 애스레틱스는 도박꾼의 허세인지, 정직한 크리스천의 진심인지.

요 며칠 동안 계속해서 선언했다. Go는 세 번 등판하리라고. 진짜 패는 꽁꽁 숨겨둔 채, 그렇게 소리치기만 했지.

만약 그게 블러핑이 아니라 진실이라면, 지난번처럼 또다시 다저스가 그에게 노히터 같은 짓거릴 허용할 수도 있다는 최악의 추측도 있었다.

물론 이미 레드삭스에게 퍼펙트를 쟁취했던 투수이니, 그보다도 더 밑바닥이 존재할 수도 있고.

그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드디어 그 진실이 가려질 순간이 다가왔다.

“Suuuuuck!”

“It’s Suck Time!”

“월드시리즈도 가뿐하게 조져버려!”

“허···”

콜리시엄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 환호성에 벤치의 한쪽에 앉아 있던 리치 힐이 문득 헛웃음을 뱉었다.

오클랜드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는 것이야 이미 정규시즌에서 충분히 느꼈지만.

솔직히 아직도 이 모든 상황이 조금은 어색했으니까. 애슬레틱스가 월드시리즈의 상대팀으로 있는 것이나.

콜리시엄이 만원 관중을 기록하며, 관중석 전체가 빽빽하게 차 있는 것이나.

그리고 그 모든 사람들이 단 한 명의 선수의 등장으로 일제히 기립하여 환호성을 내지르는 것까지, 모두 다.

그가 A’s에 몸 담았을 때와는 너무나도 달랐으니까. 같은 것이라고는 여전히 낡고 구려 터진 콜리시엄의 시설뿐이었지.

“락스타께서 등장하셨네.”

“글쎄, 보이밴드 같은데? 곧 팬티도 벗어서 던지겠네.”

그 압도적인 환호성에 누군가 조금은 비아냥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기도 했다.

그 말처럼 프로야구 선수라기보다는,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는 락스타나 보이밴드(아이돌)에게 보내는 것에 더 가까운 광기였으니까.

메이저리거와 그 팬 간의 관계라기에는 신앙심마저 느껴지는 콜리시엄의 분위기가 무겁게 다저스를 압박했지만.

이미 충분히 각오했던 선수들이기에, 그저 저마다 배트를 매만지거나, 스스로 몸가짐을 가다듬으며 준비를 갖췄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데이브 로버츠 감독은 마운드로 오른 투수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Go의 컨디션은 경기 초반에 쉽게 드러나고는 했다.

폼이 좋지 않을 때는 스스로 그것을 감추기도 하지만, 대부분 1회 초에 안타나 출루를 허용하면 이후 이어지는 이닝에서도 평소와 같은 파괴력은 덜한 편이지.

물론 설사 출루를 허용하더라도, 곧바로 더블 플레이를 유도하거나.

아니면 분위기를 바꾸듯 전력으로 타자들을 몰아 잡으면서 득점까지는 허용하지 않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비집고 들어갈 만한 빈틈을 허용하지.

‘이번에도 그래야 할 텐데.’

부디 앞서 애슬레틱스의 발언들과 자신감이 모두 블러핑에 불과하기를.

그래서 오늘 경기에서도, 그리고 앞으로의 월드시리즈 등판에서도 조금이나마 빈틈을 허용하기를 바라면서 데이브 로버츠 감독은 마운드를 바라봤고.

웅장한 환호성, 그 아래에 짙게 깔린 긴장감 속에서 다저스의 리드오프 브라이언 도저 역시 뒤따라 타석에 올랐다.

그리고 모든 준비를 갖추고, 주심의 경기 시작 선언이 우렁차게 울렸을 때. 상대의 첫 번째 카드가 오픈됐고.

“스트~~~라잌!”

89.7마일의 포심 패스트볼.

그것이 브라이언 도저의 몸쪽에 깊게 박혔을 때, 데이브 로버츠 감독은 선수들이 듣지 못하도록 나직하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Fuck.’

오늘의 딜러라고 볼 수 있는 주심의 우렁찬 콜과 함께 오픈된 첫 번째 카드는 분명 스페이드 Ace였으니까.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아웃!”

10월 23일.

월드시리즈의 1차전에서 다시금 본인의 최고구속을 0.1마일 더 갈아치우더니.

오늘도 마운드 위에 우뚝 서며, 첫 타자 브라이언 도저부터 곧바로 삼구삼진을 잡아내는 것을 시작으로.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차례차례 제 카드를 오픈한 투수는 누가 보더라도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시였다.

최악은 가정은 앞서 그를 상대했던 모든 팀들에게 그랬듯, 오늘의 다저스에게도 역시나 빗나가지 않았다.

월드시리즈의 첫 이닝은 삼자범퇴로서 마감됐다. 그가 날뛰었던 그 모든 경기들처럼.

####

“오늘도 Go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경기 이전까지 그의 체력적인 우려가 많았습니다만, 이번에도 Go는 그 모든 의혹을 떨쳐냈습니다.”

“적어도 작년부터 올해까지, 제일 쓸데없는 것이 Go를 걱정하는 것이죠.”

“다만 아직까지는 1이닝에 불과하기에 조금은 더 지켜봐야 하겠습니다만, 최고구속을 경신하기도 한 만큼, 폼은 좋아 보입니다.”

모든 이들의 걱정, 아니, 바램과 달리 무사히 끝난 첫 이닝에 중계진은 ‘역시나’라는 표정을 지었다.

결국 이번에도 옳았던 건, 그에게 배팅했던 이들이었으니까.

비록 이제 겨우 1회 초가 끝난 것에 불과하지만, 그 한 이닝 동안 보여준 모습으로 충분했지.

그가 여전히, 아직도 멀쩡하다는 것을 증명하기에는.

“1회 말, 애슬레틱스의 공격에 앞서서, 타자들 역시 의지가 대단한 모습입니다.”

“이번 포스트시즌 동안 Go에게 충분하지는 못했던 득점 지원을 선사했던 타자진인데. 오늘은 과연 어떨지 지켜봐야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고유석의 모습에서 걱정을 덜어낸 타자들도 더욱더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었고.

가벼운 분위기로 시시덕거리면서도, 하나 같이 얼굴이나 목이 빨갛게 물든 모습으로 공격을 준비하는 애슬레틱스 타자들에게선 그 의지가 엿보였으니까.

아마도 직전 에이스의 호투에 쓸려나가던 다저스 타자들을 보면서, 그들 역시 몸이 닳은 거겠지.

그렇듯 경기의 시작부터 승리의 기운이 애슬레틱스에 감돌았지만, 다저스에게도 카드는 충분히 있었다.

“1회 말, 클레이튼 커쇼가 월드시리즈의 첫 번째 마운드에 올라섭니다. 이전의 포스트시즌들과는 달리, 올해는 좋은 모습을 보여줬죠?”

“예, 비록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한 차례 무너지기는 했습니다만, 현재까지 20이닝 동안 5실점밖에 허용하지 않았고. 7차전에선 본인의 손으로 월드시리즈를 확정 지었습니다.”

“챔피언십 1차전을 제외하면, 실점이 없는 만큼, 다저스 팬들 역시 호투를 기대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대표적으로는 커쇼겠지.

적어도 이번 포스트시즌에선 어느 정도는 가을 징크스가 떨어져 나간 듯했으니까.

만약 그가 정말로 다저스 팬들의 바램처럼 그가 포스트시즌에서도 슈퍼 에이스로서 굳건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아무리 애슬레틱스의 폼이 좋더라도 손쉽게 무너뜨리기는 힘드리라.

“아웃! 3구째 패스트볼을 빗맞히며, 맷 채프먼 선수가 유격수 땅볼로 물러납니다.”

“커쇼 역시 리드오프에게 3구만을 던져내며, 기분 좋은 스타트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클레이튼 커쇼는 며칠 전의 구원등판이 무색하게도 위압감 넘치는 피칭으로 리드오프인 맷 채프먼을 손쉽게 잡아냈다.

“아무래도 7차전 등판의 여파가 남지 않은 걸까요?”

“그럴지도 모르죠. 어쩌면 다저스와 커쇼 본인의 주장처럼 라이브 피칭을 대신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다만 아직은 단정 짓기는 힘들겠습니다.”

3구만에 선두타자를 위력적인 포심으로 범타 유도하는 등. 7차전 등판의 여운이 남지 않은 듯한 커쇼의 모습에 중계진은 물론 다저스 팬들 역시 더욱더 기대감을 올렸고.

└그렇지!

└Go든 나발이든, 클레이튼도 올해는 다르다고!

└Go가 돈 드라이스데일이라고? 그럼 클레이튼은 샌디 코팩스야!

└커쇼! 너도 이대로 9회까지 가자! 저 애송이가 돈의 기록을 노리던데, 어림도 없다는 걸 알려줘!

21세기의 돈 드라이스데일을, 우리 시대의 코팩스가 보기 좋게 꺾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경기장을 찾은 몇몇 다저스 원정팬들 역시 그의 이름을 외치며. 올해는 정말로 다르다는 믿음을 표출했지만···

“2구, 쳤습니다! 제드 라우리의 잘 맞은 타구! 좌익수를- 넘겼습니다! 안타!”

기대는 빠르게 무너졌다.

곧바로 후속타자 제드 라우리가 잘 맞은 라인드라이브로 좌익수를 넘겨버리면서 순식간에 득점권 주자로 출루했으니까.

큼직한 장타에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커쇼의 이름을 외쳤던 다저스 팬들의 머릿속에 비상벨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과거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았던 커쇼가 끝내 가을의 무대에서 그들을 저버렸던 아픈 트라우마가 다시금 떠오르기도 했고.

그래도 올해만큼은 좋은 모습을 보여줬던 커쇼이기에 아직은 괜찮다면서 소리치기도 했으나.

그들이 그토록 바랐던 21세기의 샌디 코팩스는 올가을에도 응답하지 않았다.

“옐리치, 스윙! 쭉 당긴 타구! 우측 담장! 우측 담장! 우측 담장을-”

곧바로 크리스티안 옐리치 역시 몸쪽으로 날아든 공을 힘껏 당기면서 타구를 쏘아 보냈고. 힘이 제대로 실려서 높이 날아가는 타구에 캐스터는 우측 담장을 목 놓아 부르짖었다.

“강타합니다! 아슬아슬하게 넘어가지 않은 타구! 하지만 2루주자는 제드 라우리가 이미 3루를 돌았고-”

다만 지난번 그린몬스터가 고유석의 피홈런을 막아냈듯, 이번엔 콜리시엄의 펜스가 아슬아슬하게 애슬레틱스의 홈런을 저지했지만. 적어도 2루주자인 제드 라우리를 불러들이기에는 충분했다.

“제드 라우리 홈인! 애슬레틱스가 1회 말 첫 공격부터 1득점을 올립니다!”

그가 홈으로 들어온 순간, 관중들은 물론 덕아웃의 애슬레틱스 선수들도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화면에 잡힌 고유석 역시 활짝 웃는 모습을 보였고.

1회 말, 첫 공격부터 순식간에 올라가버린 첫 득점에 몇몇은 이미 승리가 확정됐다면서 소리쳤다.

[#Dodgers]

[X발 X됐다.]

마찬가지로 다저스의 팬들이나 덕아웃의 선수들 역시 코앞까지 패배가 다가온 것처럼 표정을 일그러뜨렸고 말이다.

고작 1회, 그것도 1점이 올라간 상황에서 내보이기에는 양쪽 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반응이었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1회 말, 애슬레틱스의 공격이 안타 두 개와 볼넷 하나를 포함한 1득점으로 마무리되면서, 1점차 리드 상황에서 Go가 다시 마운드에 올라섭니다!”

이번 시즌, 등판한 모든 경기에서, 단 1점이라도 득점이 올리는 순간, 그것을 낙승으로 탈바꿈시켜주는 선수가 오늘 애슬레틱스의 마운드를 담당하고 있었으니까.

고작 단 한 번의 공방에 불과했지만, 서로 판이하게 다른 양팀의 얼굴처럼.

경기의 희비 역시 조금 이른 시점부터 엇갈리기 시작했다.

####

‘두껍게 껴입어야겠네.’

마운드로 올라가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대니얼의 말처럼 아무래도 점퍼를 평소보다 두껍게 껴입어야 할 것 같다고.

역시 조금 춥냐고?

아니, 그건 아니다.

오히려 좀 후덥지근해.

겉으로 느끼기에는.

오늘따라 그라운드 위가 무슨 전기 스터브라도 되는 것처럼 점점 더 끓어오르고 있지. 워밍업 하면서 대니얼과 같이 걱정했던 땀이 뻘뻘 흐르지 않는 게 용할 정도로.

그러니 더욱더 확실하게 옷을 껴입어야지. 흥분으로 달아오른 몸 때문에 정확하게 판단하기가 힘드니까.

실제 날씨는 추운데, 몸이 더운 탓에 알아채지 못하고 막 굴리다가, 감기에 걸릴 수도 있잖아?

차라리 조금 덥더라도 최대한 안전하게 껴입어야지.

“후우-”

물론 마운드 위에서는 그러지 않아도 괜찮겠지만. 다시금 올라서는 순간 또 부글부글 끓었으니까.

‘저쪽도 마찬가지인가?’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걸어나온 다저스 녀석들 역시 귀가 빨갛게 익은 걸 보면, 속이 끓는 것 같았다.

아마도 이른 시간에 터진 실점에 당황한 한편으로, 더욱더 집중력을 올린 것 같네.

최대한 빨리 실점을 만회하고, 어떻게든 동점이라도 만들어 놓고 싶겠지.

이대로 점점 시간이 흘러, 내가 분위기를 타고, 흐름이 완전히 굳어져버린다면, 그땐 정말 힘겨울 테니까.

‘마차도, 포스트시즌 성적은 평범하던가?’

매니 마차도는 그런 다저스를 대변하듯, 나를 똑바로 노려보면서 배트를 꽉 붙들고 타석에 입장했다.

오리올스에서 트레이드된 이후, 다저스에서도 중심타자로 떠오르면서, 30홈런 100타점을 기록하는 등.

맹활약을 펼치며, 올해 다저스의 지구우승에 크게 기여한 선수이나, 정작 포스트시즌의 활약은 기대이하였다.

물론 당장의 타격감이 나쁘다고 해도, 최고의 성적을 올린 타자인 만큼 충분히 경계해야 하겠지만.

“스트라이크!”

그 경계는 이미 충분히 달아오른 몸과 잘 올라온 폼이면 충분했다.

바깥쪽 포심 패스트볼.

89.6마일로, 오늘 경기 이전까지의 최고구속이 찍혔지.

매치 마차도의 배트가 헛돌면서, 또 한번 스트라이크가 올라갔다.

“파울!”

2구는 투심 패스트볼.

또 한 번 바깥쪽으로 날아든 공이 역회전하면서 조금 더 도망쳤지만, 배트의 끝이 아슬아슬하게 건드렸다.

3루수 맷 채프먼이 파울타구를 끝까지 따라갔지만, 관중석으로 들어갔지.

투 스트라이크까지 몰리자, 매니 마차도는 조금 더 눈을 부릅떴다. 어떻게든 공을 끝끝내 컨택하겠다고 말하듯이.

“스트라이크 아웃!”

허나 그의 배트는 다시 한번 허공을 갈랐다. 마지막 위닝샷은 당연히 서클 체인지업.

포스트시즌에 접어든 이후, 더욱더 괴악하게 꺾이기 시작한 서클 체인지업은 우타자에게 있어선 완벽한 살상무기였다.

제 아무리 타자가 극도로 집중하고, 최선을 다한다고 하더라도.

“You Suck!”

그것으로 또다시 스트라이크 아웃. 앞서 득점으로 벌써부터 승리를 예감한 건지, 더욱더 흥겹게 울리는 유썩이 귀를 즐겁게 만들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아랑곳 않고 후속타자, 크리스 테일러가 배터박스로 들어왔다.

올해 나쁘지 않은 성적을 올렸었고, 특히 포스트시즌 동안 훌륭한 활약상을 보였지. 수비와 공격 양쪽에서.

그래서 그런지, 저번에 봤을 때보다도 자신감이 더욱더 두터워 보였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아주 굳건해 보였다.

크리스 테일러 자신이 해낼 수 있다고 굳게 믿는 것 같은데.

‘나도 그래.’

동질감이 느껴지네.

나도 마찬가지인데 말이야.

나도 내 자신에게 확신하고 있거든. 오늘도 내가 다저스를 죽여버릴 수 있다는 확신을.

“스트~~라이크!”

나르시시즘에 가까운 자신감이 처음 맞부딪친 초구는 스트라이크였다.

초구부터 날아든 슬라이더에 타자는 가만히 지켜봤지만, 스트라이크존 외곽에 걸친 공은 스트라이크로 판정됐지.

크리스 테일러는 조금은 불만스럽게 주심을 흘겨보기도 했지만, 이내 다시 자세를 잡았다.

“볼.”

“파울!”

그래도 타격감이 좋기는 한 건지, 제법 배트를 날쌔게 휘두르고, 공을 지켜보기는 했으나.

“스트라이크 아웃!”

역시 내 자신감이 그보다는 더 컸던 것 같다. 마지막 4구, 한가운데로 날아든 공에 변화구를 예측하고 낮게 휘두른 크리스 테일러와 달리.

나는 그냥 진짜로 한복판에 넣었거든. 맞으면 넘어가는 쓰리핑거 체인지업을. 패기의 승리라고 할 수 있지.

그렇게 투아웃.

다음타자가 올라왔을 때, 그라운드는 한 차례 변화하기도 했다. 타자의 성향에 맞춰서 수비 시프트가 변동된 거겠지.

‘다들 엄청나게 긴장했네.’

저마다 자기 포지션에 자리 잡은 야수들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언제든지 타구가 나오는 즉시 튀어나갈 수 있도록 최대한 집중하는 것 같은데···

‘무려 월드시리즈의 첫 이닝부터 점수를 올린 타자들에게 수비의 부담까지 끼칠 수야 있나.’

내가 알아서 다 처리해야지.

1점이 올라간 시점부터, 동료들은 이미 그 몫을 다했으니까.

“스트라이크!”

원래 그렇잖아?

우리 팀 타자들이 득점을 올리면, 나는 그걸 알아서 잘 지켜서···

“스트라이크!”

승리로 교환해주는 것.

그게 우리의 방식이지.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이 월드시리즈인 건 중요하지 않았다.

“스트~~라이크 아웃!”

그저 우리의 승리 공식이 오늘 경기에서도 대입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중요할 뿐.

6번타자 맷 켐프는 시원스럽게 헛스윙하며 삼진으로 물러났고. 이르게 제 몫을 해낸 타자들에게 내가 선물할 승리라는 이름의 달콤한 보상까지는 이제 7이닝만을 남겨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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