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화
점수는 조금 더 벌어졌다.
타자들이 7회와 8회 초, 각각 1점과 2점을 추가로 더 올려내면서, 경기 스코어를 4대0으로 만들어버렸거든.
9회 초는 무난하게 끝났지만, 뭐, 이미 차고 넘치는 수준의 점수지.
“아웃!”
그렇게 경기가 마지막 9회 말에 다다랐을 때, 레드삭스의 팬들은 포기하는 법을 배웠다.
마지막까지 최후의 희망을 놓지 않았던 이들조차, 이젠 모든 것을 놓아버렸으니까.
“신기한 풍경이네. 레드삭스 팬들이, 저렇게 도망치는 모습은.”
그라운드로 나가기 전, 문득 브루스는 민족 대이동이 시작된 관중석을 보며 피식하고, 짧은 웃음을 뱉었다.
그치, 신기한 풍경이지.
팀을 향한 애정이 가득한 레드삭스의 팬들이, 그것도 직관을 할 정도의 팬들이.
다른 것도 아니고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경기를 끝까지 지켜보지 못한 채.
마지막 이닝을 앞두고 다들 주섬주섬 짐을 챙기거나, 아니면 그보다 훨씬 전에 경기장을 나가는 모습은 흔치는 않은 풍경이니까.
“그러게, 조금 더 즐기는 게 좋을 텐데 말이야.”
“올해의 마지막 펜웨이 파크니까. 조금 더 여운을 감상하는 게 좋긴 하겠지.”
내 말의 뜻을 정확하게 캐치한 브루스가 맞냐는 듯 눈썹을 씰룩거리는 모습에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은 2018시즌의 펜웨이 파크 최후의 경기지. 내가, 우리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그러니 조금 더 경기장에 머물고, 충분히 느끼는 것이 좋았겠지만
‘뭐, 경기를 보는 것 자체가 괴롭다면, 떠나는 것도 옳은 방법이겠지.’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관중들의 특권이었다.
고통스러운 순간의 앞에서, 그것에서 등을 돌리고 회피하는 것 말이다.
레드삭스 선수들은 떠나고 싶어도, 아니,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치지 못한 채, 마지막까지 쭉 감내해야 했으니까.
그와 비교하면, 더는 고통받지 않고 포기할 수 있는 것 자체가 복에 겨운 수준이겠지.
“끝내자.”
마운드로 향하며 흘리듯 가볍게 내뱉은 말에, 브루스는 말없이 앞장섰다.
‘이젠 야유도 없네.’
결국 지쳐버린 듯 야유조차 사라지면서, 적막함이 감도는 경기장.
이번 시즌 챔피언십 시리즈의 마지막 등판이 될 수도 있는 그 경기장의 마운드 위에 다시금 우두커니 섰다.
타순은 1-2-3번으로 이어진다. 상위타선의 연속이네.
중심 타자들의 파괴력이 뛰어난 레드삭스이니,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아선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하게 긴장할 필요도 없겠지.
그들은 이미 우리와 더불어 최강의 팀 레드삭스가 아니라, 내게 있어서 호구 중의 상호구인 레인저스로 둔갑한 지 오래니까.
‘많이 힘겨운 것 같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그런 레드삭스의 현 상황을 너무나도 잘 표현해주는 모습으로 무키 베츠가 마지막 타석에 올랐다.
힘들어 보였지. 아주 많이.
이젠 9회이니 체력적으로도 부담이 생기는 순간인데, 거기에 멘탈까지 흔들렸으니. 지금 저 배터박스 위에 나무방망이 들고 서 있는 것 자체가 굉장히 고통스럽긴 하겠어.
“파울!”
그럼에도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다. 괜히 올해 MVP급 성적을 올린 게 아니라는 거지.
경기의 승패는 이미 거의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는 끝까지 배트를 휘둘렀다.
바깥쪽으로 빠져나간 투심을 힘껏 때려서, 이번 경기 그가 보여준 타구들 중 가장 강력한 코스를 만들 정도로.
최고의 타자인 만큼 스스로의 상태를 파악한 거겠지. 이렇게 박살난 채로 경기가 끝난다면. 그대로 침체에 들어가, 다음 경기의 타격감에도 영향을 끼칠 수가 있으니.
그러니 어떻게든 마지막에 안타라도 하나 날려서, 오늘 있었던 모든 일들, 느꼈던 모든 무기력한 감정들을 털어내려는 것 같은데.
같은 메이저리거, 같은 프로야구 선수로서 그 절박한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스트라이크!”
레드삭스를 도살해서, 완전히 쓰러뜨려야 하는 사냥꾼의 마음으론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포스트시즌에서 기대 이하의 성적으로 팬들에게 실망감을 끼치고 있는 선수라고는 하나.
굉장히 강력한 타자이니, 혹시라도 살아난다면 시리즈가 요상하게 변할 테니까.
높은 하이 패스트볼.
다시금 배트가 헛돌았다. 그는 여전히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파울!”
그렇게 카운트에 몰렸을 때, 연이어 던진 패스트볼 직후.
“스트라이크 아웃!”
순간적으로 타이밍을 늦추면서 던진 쓰리핑거 체인지업은 그를 완전히 주저앉히기에 충분했다.
또 한번 스트라이크 아웃.
떠나는 길, 발목을 붙잡는 승부에 미련이 남았던 건지, 고개 돌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라운드를 바라보던 홈팬들은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대신 그들의 몫까지 레이더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만들면서 부릅떴고.
“You Suck!”
하나 둘, 그리고 모두.
사람들이 떠나가는 펜웨이 파크에선 레이더스의 우렁찬 포효성과.
“아웃!”
마지막까지 본분을 잊지 않은 심판들의 시원스러운 목소리만이 유유히 흘렀다.
“스트라이크!”
“볼.”
“스트라이크!”
“파울!”
“볼.”
그리고 마지막, J.D. 마르티네즈가 썩은 동앗줄이라도 끈질기게 부여잡는 심정으로, 최후의 순간까지 저항했지만.
“아웃!”
그저 조금 유예시켰을 뿐, 그 역시 한 경기의 끝을 완전히 막아내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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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경기 결과]
<(3)오클랜드 애슬레틱스 4:0 (2)보스턴 레드삭스>
<승리투수 - Go You-Suck(9이닝 무실점 3피안타 15K>
난전이 이어졌던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또다시 애슬레틱스가 앞서 나가기 시작하자.
레드삭스의 가능성을 점쳤던 언론은 마치 언제 그랬느냐는 듯 애슬레틱스의 앞날에 찬사를 보냈다.
단 1승 만을 남겨둔 상황에서, 그들이 최후의 승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으니까.
또한 4차전에서 선보였던 불펜을 털어 넣는 방식 또한 효과적이라는 것이 증명됐고.
레드삭스 또한 이젠 완전히 무너진 듯한 모습을 보였기에.
설사 남은 일정 동안 고유석이 나오지 않더라도 충분히 애슬레틱스의 승산이 높았으니까.
└이번 시즌에만 완봉을 열다섯 번이나 했네. 이게 사람이라고?
└사이보그라니까.
└불경하고 우매한 자들아. 어찌 신을 눈앞에서 목도하고도 아직도 믿지 못하느냐?
└레이더스의 흔한 개소리가 점점 그럴듯하게 들리는데···
허나 그런 챔피언십 시리즈의 결과보다는 사실 고유석을 향한 말들이 더 많았다.
기어코 또다시 완봉을 해내며, 역대 가장 충격적인 가을의 전설을 이어갔으니까.
└이런 짓거릴 한 사람이 또 있다는 게 신기해서 찾아봤는데, 더 미친 사람이네.
└1차전에 완봉하고, 이틀 쉬고 완봉하고, 삼일 쉬고 완봉하다니. 데드볼 시대는 대체···
└크리스티 매튜슨한테 그런 짓거릴 당했던 게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던데, 뭔가 묘한 우연이네.
└이쯤되면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지.
또다시 데드볼 시대의 전설을 넘어섰기에, 더욱더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말이다.
<홈에서 2연패, 레드삭스 눈물을 흘리다!>
└크리스 세일에 이어서, 또다시 피해자가 발생했네.
└솔직히 3일 쉬고 6이닝 1실점이면 X발 X나게 잘한 거 아니야? 근데 져야 한다고?
└내가 데이빗이었으면 솔직히 어떻게 했을지 모르겠어.
<시리즈 종료까지 단 1승, 그리고 1패! 레드삭스는 벼랑 끝에서 부활할 수 있을까?>
└잘하면 7차전까지는 가겠지. 6차전에 크리스가 나오니까.
└오히려 우리가 더 유리해. 이젠 Go가 안 나오잖아.
└쟤들도 펜웨이에서 2연승이니까, 우리도 콜리시엄에서 2연승하면 되는 거지!
그렇게 고유석에게 다시 한번 무기력하게 패배하며, 최악으로 이어진 시리즈 상황 속에서도.
몇몇 팬들은 여전히 혹시나 하는 기대를 지울 수가 없었다.
이젠 남은 경기에서 고유석이 나오지 않을 테니, 충분히 레드삭스에게도 기회가 남아 있다고 느껴졌으니까.
└근데··· 설마 7차전에서 Go가 또 나오지는 않겠지?
└그건··· X발 법죄 아니야? 잘 찾아와. 챔피언십 5차전에 이미 등판한 투수는 7차전에 출전 못 한다는 조항이 있을 거라고!
다만 그런 희망 속에서도 최악의 가정을 떠올리며, 비명을 내지르는 이들도 있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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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오클랜드로 돌아와, 하루의 휴식일 동안 마지막 2연전의 준비를 갖췄을 때.
나는 대니얼에게 솔직하게 털어놨다. 내 모든 생각을.
“자, 이제 7차전 등판 준비하죠. 어우, 시간이 너무 촉박하네요.”
“···제정신이십니까?”
대니얼은 내 말에 본인이 무언가를 잘못 들었나, 의심하듯 헛웃음을 흘리며 나를 노려봤지만 말이야.
진지하게 내 정신 상태를 걱정하는 눈치인데, 그의 정신건강을 위해 조금 더 자세히 설명을 해줘야겠어.
“물론 선발로 등판하겠다는 건 아니고, 유사시에 불펜으로 나가겠다는 거죠. 한 1이닝 정도?”
“예, 참 자제력이 뛰어나시네요. 무려 선발등판을 포기하시다니 말입니다. 눈물이 앞을 다 가리네요.”
뭐, 설명해 줘 봤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비아냥거렸지만.
어쩐지 대니얼의 성격을 내가 더럽히고 있는 것 같아서 서글프구만.
아마 코치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겠지. 7차전이든, 그전이든 내가 이런 말을 꺼내면.
아무리 마음껏 던지라고 했다지만, 그건 절대로 불가하니, 지랄하지 말고 발이나 닦고 자라고 하지 않을까?
‘그래도 만약을 준비해야지. 혹시나 모르는 최악의 사태를.’
하지만 어쩔 수는 없잖아?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이제 정말로 단 1승만을 남겨두고 있으니까.
만약 아슬아슬한 경기가 이어지고, 투수가 부족하거나, 필요한 상황이 되면 기꺼이 마운드에 올라야지.
“이번엔 못 도와드립니다. 얌전히 제가 짜드린 재활 프로그램이나 따르세요.”
“잘 생각해봐요, 전 그런 상황이 주어지면 무조건 등판할 건데, 그때 조금이라도 더 준비가 된 상태로 오르는 것이 오히려 더 위험이 적지 않을까요?”
내 성향을 잘 알아서, 내가 정말로 그럴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기에, 대니얼은 내 설득에 맞는 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리가요. 애초에 등판을 안 하는 게 위험이 훨씬 적죠.”
음, 아니네. 안 통하네.
궤변으로 설득해보려고 했지만, 핵심을 찌르는군.
그치, 덜 위험하도록 미리 준비고 나발이고, 애초에 7차전 등판 자체를 안 하면, 그런 위험 자체가 없긴 하지.
“월드시리즈 1차전, 등판 안 하실 겁니까? 아니지, Go의 성향을 고려했을 때, 그땐 또 고작 1이닝 밖에 던지지 않았으니, 괜찮다면서 소리치시겠죠.”
“대니얼은 절 너무 잘 알아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니, 편하게 쉬십시오.”
대니얼과 스콧 에머슨은 서로 많이 닮았으니, 아마 코치 역시 씨알도 안 먹히겠어.
단호한 대니얼의 말에 더는 그를 설득하는 건 깔끔하게 포기했다. 어쩔 수 없지.
“그리고 애초에 Go가 없다고 월드시리즈조차 가지 못하는 팀이라면, 우승할 만한 팀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뒤이어 한 말 역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고. 틀린 말은 아니니까.
‘이번에도 동료들을 믿는 수밖에.’
저번 4차전 등판 계획과 더불어, 7차전 등판 역시 수포로 돌아갔으니.
이번에도 동료들이 잘 이겨줄 것이라면서 얌전히 기다려야 하겠지만. 물론 정말로 가만히 앉아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상대는 지금 이런 상황을 모르지. 모든 가능성을 진지하게 여길 거고. 날 무서워하니까.’
우리 내부적으로 어떤 결론이 났는지, 레드삭스는 알 턱이 없다.
물론 상식적인 판단 하에 대략적인 예측은 할 수 있겠지만. 그런 상식이 발휘되기엔, 포스트시즌은 비상식이 일상인 무대니까.
특히나 이미 벼랑 끝에 몰려, 나를 향한 두려움과 공포에 치를 떨고 있는 레드삭스는 더욱더 모든 상황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
‘공포를 이용해야겠지.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면.’
제 아무리 상대가 나를 무서워하고, 공포심을 느낀다고 해도, 그걸 가만히 내버려 둔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지.
누군가가 나를 무서워하는 걸 즐기는, 저열하고 추잡한 욕망을 품은 게 아니라면 말이야.
‘설사 마운드에는 오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는 있지.’
방법은 이미 생각해뒀다.
절망하는 레드삭스를 보면서, 아이디어가 떠올랐지. 마지막까지도 그들을 흔들 수도 있는 방법을.
“7차전 등판은 안 할 테니까, 워밍업 자체는 빡세게 합시다.”
“···몰래 준비하시려는 건 아니고요?”
“그냥 시늉만 그렇게 하자고요. 겉으로 보이는 시늉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네요. 통하겠습니까? Go를 두렵게 여기는 눈치이긴 했지만···”
“모르죠, 대신 리스크가 없잖아요? 손해 볼 것도 없으니, 한번 찔러나 보는 거죠.”
정말로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정상적인 판단만 내려도 절대로 안 통할 것 같지만.
앞서 말했듯, 지금 레드삭스는 정상적이지 못하니까. 뭐, 혹시 모르지. 생각보다 효과가 뛰어날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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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이크 아웃! 소니 그레이! 삼진을 잡아냅니다!”
6차전은 당연하게도 팽팽하게 이어졌다. 지난 날의 패배로 팀의 사기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고는 하나, 레드삭스는 여전히 강팀이었고. 애슬레틱스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시리즈를 오늘로 끝내고 싶어 했으니까.
소니 그레이와 크리스 세일, 두 선발 투수들 역시 챔피언십 시리즈에서의 첫 1승이자, 결정적인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했고 말이다.
“쳤습니다! 홈! 홈에서- 세이프! 애슬레틱스가 한 점을 더 내면서, 3대2로 다시 앞서 나갑니다!”
그런 난전 속에서 양팀은 엎치락 뒤치락을 반복했다.
크리스 데이비스의 큼직한 2루타를 시작으로, 한 점을 따돌리거나, 따라붙는 것을 이어갔고, 5회 말, 맷 채프먼이 또다시 역전타를 쳐내면서, 크리스 세일에게 5이닝 3실점의 아쉬운 결과를 선사했지만.
“아무래도 경기가 애슬레틱스와 레드삭스, 두 팀의 불펜 싸움으로 이어질 것 같네요.”
“비록 불펜에선 애슬레틱스가 더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만, 레드삭스에게도 아직은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물론이죠. 단 1점 차니까요.”
그럼에도 레드삭스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은 채, 이대로 절벽 끝에서 떨어지고 싶지는 않다는 듯 오히려 더욱더 투지를 불태웠지만.
문득 덕아웃의 빈자리가 중계 카메라에, 그리고 그들의 눈동자에 발견됐을 때.
그토록 흥분이 감돌고 열정적이었던 레드삭스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지금··· 고유석 선수가 불펜으로 향한 건가요?”
고유석이 나오지 않는 경기이기에, 이전 경기보다는 조금 더 평온한 톤으로 중계를 이어가던 캐스터 역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고 말이다.
바로 직전 경기에서 등판한, 심지어 완투를 했던 투수가 불펜으로 들어간다는 믿기지 않는, 아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벌여졌으니까.
“1점 차로 아슬아슬한 상황이고, 월드시리즈까지 단 1승 만을 남겨뒀으니, 애슬레틱스의 생각 역시 충분히 이해는 되지만, 이건 명백히 혹사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위원님 말씀처럼-”
“지금은 80년대가 아닙니다. 고유석 선수의 내구성이야 최고라는 건 잘 알지만, 이건 아니에요. 설사 본인이 요구했더라도, 이건 코치진에서 철저하게 커트해야 합니다.”
캐스터가 당황했다면, 과거의 프로야구를 경험했고, 그렇기에 비슷한 장면을 몇 차례 목도하기도 했던 해설자는 날이 선 비판을 가했다.
비록 그저 레드삭스를 압박하기 위한 시늉일 수도 있겠지만.
우승을 향한 열망이 얼마나 강력하고,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지 잘 알기에, 혹시나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으니까.
무언가 결단을 내린 듯,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밥 멜빈 감독과, 스스로를 자책하듯 침울한 스콧 에머슨 투수코치의 표정 역시 불안하기 그지없었고 말이다.
경기를 지켜보던 관중들, 그리고 시청자들 모두 당혹감을 느끼며, 고개를 절레 젓거나,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갸웃거렸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레드삭스가 묘하게 조급해진 모습입니다. 1점 차에 불과하니, 더욱더 차분하게 타격에 접근할 필요가 있어요.”
당연하게도 레드삭스가 느낀 충격은 그보다 훨씬 거대했다. 물론 그들이 정말로 속아 넘어갔다는 뜻은 아니었다.
아무리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다고 해도, 그래서 이성적인 생각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불 보듯 뻔했으니까.
단지 고유석과 애슬레틱스가, 그런 시늉만으로 자신들을 압박하고, 거슬리게 만들려는 것이라는 게.
그렇기에 코치들과 감독 역시 선수들에게 신경쓰지 말라며 지시를 내리고, 때때로 윽박지르기도 했지만.
“아웃! 미커스 시미언이 가볍게 잡으면서, 6회 말이 끝이 납니다!”
그럼에도 어쩌면, 정말로, 혹시나, 설마 등. 의문과 의심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어쩌면 정말로 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기상천외한 기록을 줄줄이 세운 선수이고, 대단한 체력을 자랑하는 투수이니. 어쩌면 딱 한 이닝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또라이 같은 녀석이니 스스로도 그걸 바라고 있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들이 레드삭스 타자들의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피어올랐고. 열리지 조차 않은 불펜의 문 너머에서 새어나온 그 존재감만으로.
“스트라이크 아웃!”
고유석은 레드삭스를 좀 먹었다.
어떻게든 오늘 이기고야 말겠다는 강력한 집중력이, 어쩔 수 없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으니까.
새로운 투수가 등장하며 불펜의 문이 한 번씩 열릴 때마다, 저도 모르게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조심스럽게 확인할 정도로.
그리고 이미 앞서 4차전에서 증명했듯, 애슬레틱스의 불펜은.
“아웃!”
그토록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타자들을 잡아내지 못할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참을 수 없는 공포가 레드삭스의 발목을 붙들었고.
“9회 말, 마무리 투수로 이번 시즌 오클랜드의 수호신처럼 떠올랐던 션 두리틀이 마지막 이닝을 지우기 위해 오릅니다!”
결국 마지막 순간 문을 열고 나온 투수가 다른 이였기에, 그 공포는 마침표가 찍혔지만.
“아웃!”
곧 치열하면서도 위대했던 챔피언십 시리즈의 마침표 역시 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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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경기 구경하는 것도 운치가 있네.”
“나쁘지 않지, 불펜이 제법 운치가 있거든.”
“뭐, 다른 구장보다는 훨씬 시설이 떨어지긴 하지만.”
“뭐 어때? 월드시리즈 갔으면 다 된 거지.”
꽤나 색다른 경험이었다.
불펜에서 경기를 시청하는 건. 그래, 시청이지. 콜리시엄의 안에 있는데도 관람이 아니라 시청 중이지. 등판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계획한 건 별거 아니다.
그냥 약간의 압박을 주는 거지. 언제든지, 결정적인 순간에 내가 등판할 수도 있다는 여지를 레드삭스에게 주면서.
당연히 그걸 믿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지.
만약 정말로 저 문을 열고 내가 휙 등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을 테니까.
-레드삭스가 완전히 농락당했습니다. 오늘 나오지도 않는 Go에게 완전히 속았어요.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레드삭스로선 Go를 의식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특히나 시리즈 탈락까지 단 1패만을 남겨둔 상황이라면 말입니다.
통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래도 중계방송으로 봐서는, 제대로 통했네.
내가 불펜에 들어온 직후부터 하나 같이 승부에만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끝이 다가오고 있었지. 나더러 편하게 지켜보라고 했던 션 두리틀이 9회 말을 끝마치고 있었으니까.
‘기분이 묘하네.’
마이너에서 한창 구를 때는 사실 불펜에서 대기했던 적이 제법 많다.
선발투수하다가 불펜으로 밀려나고, 그러다가 끈질기게 버텨서 다시 선발로 올라오고. 루키부터 더블A까지, 매 단계를 올라갈 때마다 그게 반복됐었지.
그런데 지금은 직전 경기에서 완봉을 한 뒤, 월드시리즈 진출을 앞둔 채로 불펜에서 있었다.
제발 오늘은 긴 이닝을 맡을 수 있길 바라면서, 불펜에서 내내 대기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세상 참, 빨리 변한다니까.
“슬슬 나갈 준비하자.”
내가 새삼스럽지만, 조금은 격세지감을 느끼고 있었을 때. 함께 불펜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미소를 머금은 채,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준비를 마쳤다.
이제 마지막 하나만을 남겨뒀으니까. 그 마지막이 달성되면, 마운드까지 냅다 뛰면 되는 거지.
“Suck 네가 앞장서.”
“내가?”
그렇게 모두가 주섬주섬 채비를 갖췄을 때, 문득 같이 경기를 시청했던 유스메이로 페팃이 나를 보더니 검지로 불펜의 문을 가리켰다. 슬쩍 옆으로 비켜 주기도 했고.
“월드시리즈가 결정되는 순간, 팬들이 가장 보고 싶은 건 Suck 너일 텐데. 당연히 네가 앞장서야지.”
거참 영광스러운 칭호네.
팬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선수라. 프로스포츠 선수에게 이것보다 더 좋은 칭호가 따로 있겠어.
그래, 그 말처럼 지금 이 순간 팬들은 그 누구보다도 나를 보고 싶겠지.
내 얼굴을 바라보면서, 월드시리즈에 대한 자신감도 얻고 싶을 거고.
또 한편으로는 지금의 기쁨을 나와 함께 공유하고, 나누고 싶을 테니까.
그 마음을 나도 잘 알고 있기에.
-스트라이크 아웃! 9회 말 마지막 아웃카운트가 올라가면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가 2018시즌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을 차지합니다!
기꺼이 제안을 받아들이며, 마지막이 아웃카운트가 올라간 순간, 맨 앞에 서서 당당한 걸음으로 그토록 고대했던 월드시리즈로 향한 문을 활짝 열었다.
“Suuuuuuuuuck!”
유스메이로 페팃의 말처럼, 내가 나오기만을 기대하던 있던 사람들을 향해 환하게 웃어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