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308화 (307/316)

308화

오늘 내 맞상대는 데이비스 프라이스다. 원래는 크리스 세일이지만, 그가 복통을 호소한 탓에 대신 등판했지.

정작 양 팀 에이스로 뽑힌 선수들은 평범하게 선발 로테이션을 유지하고 있는데.

오히려 2선발로 꼽혔던 데이비스 프라이스가 2차전 선발등판 직후 3일의 휴식만을 취하며 마운드에 올랐다.

“스트라이크 아웃!”

그리고 제법 잘 막아냈지.

프라이스라는 이름답게, 돈값을 하는군.

원래는 그다지 가을에 강하지 못해서, 종종 새가슴으로 꼽히기도 했는데, 올해는 다르네.

“데이브! X발 사랑해!”

“니가 진짜 에이스다!”

“오늘도 제발 잘 버텨줘! 어떻게든 이길 수 있게···.”

그런 데이비스 프라이스에게 레드삭스 팬들도 아낌없이 환호를 보냈다.

3회 초를 가뿐하게 막으면서 내려가는 그에게 벌써부터 기립박수를 보내는 등. 혹사받은 만큼의 서비스를 확실하게 되돌려줬지.

하긴, 그럴 수밖에.

이번 경기 내에서 적어도 현재까지는 유일하게 칭찬받을 만한 선수니, 남들 몫까지 죄다 몰아서 받는 게 당연하지.

“가자, 이닝이 금방금방 돌아와서 참 좋네. 아주 좋아.”

“좋은 거 맞지? 묘하게 우리 꼽주는 것 같은데···.”

아니, 양 팀을 다 통틀어도 오늘 칭찬받아 마땅한 사람은 나랑 데이비스 프라이스, 두 선발투수 밖에 없지.

다시 돌아온 이닝에 기분 좋게 웃으며 벤치에서 벌떡 일어서자, 괜히 찔린 건지, 타자들은 민망한 반응을 보였지만, 진짜야.

뭐, 이제 겨우 3회밖에 안 됐는데, 벌써부터 갈구는 건 조금 그렇지.

“스트라이크 아웃!”

나도 역시나 레드삭스를 잘 잡고 있으니, 더욱더 신경 쓸 필요는 없고.

타자들이 기복이 좀 심한 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예 영봉패는 당하지 않으니, 오늘도 한 점은 내겠지. 그 정도면 충분하고.

“우우우우우!”

7번타자 이안 킨슬러를 돌려세우며, 내가 또다시 삼진을 잡아내자, 레드삭스 팬들은 여전히 우렁찬 야유를 토해냈다.

‘그’ 레이더스의 You Suck마저 그 소리에 묻혀서 희미하게 들릴 정도로.

이건 좀 대단한 일이네.

여태까지 그 어떤 팀도 레이더스의 포효를 지우지는 못했는데 말이야.

심지어 머나먼 보스턴 원정인데도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은 레이더스가 출몰했는데 말이야.

역시 확실히 리그에서 손꼽히는 열성팬들다워. 목청부터 남다르군.

“아웃!”

“야 X발놈아!”

“이 X새끼야, 그만 좀 하라고!”

“Suck! 제발 미래를 생각해라! 너 X발 올해만 던지고 은퇴할 거야? 좀 살살하라고, X같은 새끼야!”

특히 누구나 그렇듯 욕설을 뱉을 때는 더욱더 데시벨이 올라가고 말이야.

북적북적한 게 딱 시장 통 같아서 참 좋단 말이야.

부모님이 하시는 고기집도 이런 분위기이지. 손님이 많아서, 여기저기 테이블마다 내는 소음으로 가득하거든.

그런 익숙함 때문일까? 왠지 이유 모를 편안함도 느껴져서, 더욱더 기분 좋게 웃으며.

“스트라이크!”

공을 던졌다.

마지막 9번타자, 재키 브래들리 주니어.

빠른 발과 적당한 갭파워를 자랑하며, 상위타선과 하위타선을 원활하게 연결해주는 타자는 초구부터 시원하게 헛스윙했다.

한 방을 노리는 뻥스윙이었지. 영웅 스윙이나, 아니면 그보다 조금 더 비하해서, 선풍기질이라고도 해도 되고.

내 얼굴까지 시원스러운 바람이 불어왔으니까. 이 정도면 미풍은 되겠어.

“스트라이크!”

“으아아!”

또다시 헛스윙하자, 홈팬들의 억장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도 똑똑히 들렸고. 진짜 목청이 좋다니까.

저번 경기만큼은 아니지만, 오늘도 엄청나게 집중력이 올라와 있는데, 그걸 뚫고서 내 귓구멍에 박히는 걸 보면.

“스트라이크 아웃!”

삼진을 선언하는 주심의 콜이야 당연히 잘 들리고. 이건 제아무리 집중력이 한계까지 올라오더라도 언제나 또박또박 정확하게 들리지.

이번 주심은 발음도 좋으시네. 성우 하셔도 되겠어.

‘그치?’

동의를 구하듯 레드삭스를 훑어봤지만, 딱히 내 말에 동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하긴, 지금 레드삭스가 주심의 목소리나 발음이 신경이나 쓰이겠어.

머릿속엔 그저 날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하겠지.

‘묘하게 편안하단 말이야. 왠지 익숙한 느낌도 들고.’

나를 노려보는 관중들 속에서 덕아웃으로 내려가는 길에 다시금 기시감이 들었다. 데자뷰라고 해야 하나?

내 기억 속 어떤 경험과 지금 이 순간이 묘하게 겹쳐졌지.

정규시즌에 한 차례 들려서, 엄청난 일을 저질렀던 곳이니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땐 목표가 워낙 뚜렷하고, 딱 하나만 봤기에, 펜웨이 파크고 나발이고 기억도 안 난다.

그런데도 묘하게 익숙한 오늘의 경기장은 가슴 안쪽에서부터 기분 좋은 감각이 감돌게끔 해줬다.

“띠겁게 웃고 지랄이야!”

“좋냐? 좋아? X발 우리가 만만해? X신처럼 보이냐고!”

“헤이, 주심! 저 X발놈이 우리 도발하고 있잖아! 안 보여? 퇴장시켜!”

“우릴 얼마나 X밥으로 보면 쳐 웃겠냐고! 좀 하나만 쳐라, 이 X발놈들아!”

그래서 괜히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길에 빙긋 웃으니, 반응 한번 끝내주네.

내가 자기들을 무시한다고 생각한 거겠지. 포커페이스 따윈 집어치우고, 대놓고 웃고 있으니 말이야.

그러려는 의도는 아니었는데 말이야, 아니, 그런 의도가 맞나? 무의식 중에 본심이 발현된 걸지도.

‘그나저나 이것도 참 기시감이 든단 말이야.’

내 행동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분노하고, 욕설을 퍼붓는 것. 이것도 참 많이 본 건데. 잘 모르겠네.

그렇게 미묘한 익숙함과 기시감, 그리고 편안함 속에서 경기의 초반이 이번에도 삭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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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석이 3이닝 퍼펙트, 그리고 6탈삼진을. 데이비드 프라이스가 3이닝 3피안타 3삼진을 기록하면서.

양쪽 다 지지부진한 타격을 선보이며, 마치 1차전처럼 또다시 투수전의 양상으로 이어지는 듯한 경기의 흐름에 레드삭스 팬들은 희박한 희망을 걸기도 했지만.

애석하게도 균형은 그때처럼 길게 이어지지는 못했다. 곧바로 깨졌으니까.

“Krush Damn!”

“바로 득점 가즈아아앗!”

4회 초.

선두타자로 나온 크리스 데이비스가 중견수를 넘기는 큼직한 타구를 날려 보내며, 곧바로 2루를 점령했고.

곧바로 5번타자 맷 올슨이 또다시 큼직한 코스의 장타로서 그를 홈으로 불러들였으니까.

“X발··· 이러면- 안 된단 말이야.”

순식간에 실점을 내준 상황에 한 레드삭스 팬은 깊은 좌절감을 표출하기도 했다.

이제 겨우 4회에 불과한, 고작 한 점차 정도는 얼마든지, 특히나 레드삭스 타선의 강력함을 고려하면, 5점차까지도 충분히 따라갈 만하나.

적어도 오늘은 아니니까.

그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레드삭스 팬들이 그렇게 생각했고 말이다.

“아웃!”

그나마 데이비드 프라이스가 무너지지 않고 잘 막아내며, 4회 초를 끝마쳤지만.

전광판에 떠오른 1이라는 숫자가 홈팬들에게는 마치 결승타처럼 느껴졌다.

또다시 마운드로 올라온 투수의 뻔뻔한 낯짝을 봤을 땐, 더욱더 그런 생각이 짙어졌고.

한 가지 우스운 것은 소수의 원정팬, 레이더스 역시 그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거였다.

“오늘은 이겼네.”

“Suck이 나온 날인데, 당연히 이기지!”

“1점이면 넉넉하네. 심지어 4회 초에 내다니, 간만에 타자들이 분발했어.”

그들 역시 이 한 점으로 승리를 확신했으니까.

“스트라이크 아웃!”

“You Suck!”

그 이상이 뭐가 필요 있겠는가? 어차피 점수는 이대로 고정될 텐데.

또다시 삼진으로 물러나는 무키 베츠에 레이더스는 유썩을 외쳤고, 홈팬들은 그저 실망감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냥 상대가 안 되네. 무키랑 상성이 나쁜 건가?”

“제발 한 방만 딱 쳐주면 진짜 소원이 없을 텐데···”

“그래도 아직 한 타석, 아니··· 잘하면 두 타석까지 남았으니까. 계속 응원해야지.”

너무나도 사랑했던 선수가 한 명에게만 유독 심하게 망가지는 모습이 가슴이 아픈 한편으로, 굉장히 불만스러웠으니까.

그래도 이번 시리즈 내에서 큼직한 홈런도 하나 날렸었기에, 마냥 욕할 수는 없겠지만, 새어 나온 한숨 역시 참지는 못했다.

“세이프!”

그나마 연이어 퍼펙트를 당할 팔자는 아니었던 건지.

2번타자 앤드류 베닌텐디가 이번 경기의 첫 안타를 치면서, 레드삭스를 나락에서 건져 올렸지만.

“아웃!”

“스트~~~라잌 아웃!”

역시나 그 이상은 없었다.

J.D. 마르티네즈와 잰더 보가츠가 나란히 처리되면서 또다시 이닝이 끝났으니까.

“저 X발놈은 왜 저렇게 좋아하면서 콜을 하는 거야?”

“X나 편파적이라니까! 저 새끼 저거 애슬레틱스 팬 아니야?”

괜히 짜증스러운 마음에 우렁차게 콜을 했던 주심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그렇게 분노를 토해낼 여유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발목을 잡아당기는 분위기에 서서히 잠식되어갔으니까.

아니, 어쩌면 분위기가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러 나온 감정일지도 모르고.

그저 증오스럽게만 여겨졌던 고유석의 형상이, 그를 향한 감정이 레드삭스의 눈동자 속에서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살살 껍질을 벗겨낸 삶은 달걀이 뽀얀 속살을 드러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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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회 말을 맞이한 레드삭스 덕아웃의 분위기는 팬들처럼 조금은 변해 있었다. 사실 어제부터 이랬었지.

전날의 패배를 맞이하면서부터 왠지 조금은 불안함이 닥쳤었는데, 그게 정확하게 실현되고 있었다.

“제발 한 점만 내줘! 최소한 동점은 가자고!”

“시리즈 내내 털릴 거냐? 못해도 1점만, 최소한 자존심은 챙겨!”

절규에 가까운 팬들의 목소리 역시, 레드삭스가 꿈꿨던 악몽 속의 한 장면과 똑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있다면, 그런 분위기 속에서 홀로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마운드에 오른 투수의 얼굴이겠지.

대체 뭐가 그리도 좋은 건지, 생글생글 웃는 표정이 그나마 분노를 일으켜서, 적당한 열기를 보존해 줬으니까.

“저 X같은 면상을 박살 낼 사람 없어? 아무도 없냐고!”

“저걸 보고도 참으면 니들은 Pussy야! 108승이고 나발이고, 그냥 Small Dick이라고!”

그것을 이용해 적절하게 타자들을 긁어대는 감독과 타격코치의 목소리 역시 그나마 사기를 유지시켜 줬고.

“당장 가서 홈런 하나 날려! 오클랜드 새끼들은 쟤가 나오면 무조건 3승이라면서 소리치던데. 그게 X까는 소리라는 걸 증명하란 말이야!”

그런 채찍질 속에서 눈동자를 뜨겁게 불태우며 타석에 올랐지만, 배터박스로 들어가는 순간 그 모든 것이 꺼트려졌다.

“스트라이크 아웃!”

공을 던지는 모습을 눈동자에 담으면, 다시 그대로 자유낙하가 시작된다. 목적지는 지하 밑바닥이었고.

5회 말, 또다시 삼진을 잡아내면서, 레드삭스를 여전히 몰아치는 투수를 바라보며.

덕아웃에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는 선수가 조금 더 늘어났다.

그 숨소리가 동료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분위기를 망친다는 것을 알면서도, 참을 수가 없었지.

“아웃!”

“아웃!”

그렇게 5-6-7번 타자들이 나란히 삼진으로 물러나면서, 5회 말 역시 별다른 소득 없이 막을 내렸다.

“그래도 오늘은 저번 경기보다는 느낌이 훨씬 덜해.”

“그래, 그렇지. 저번보단 낫지.”

“그래도 눈에 좀 익어서 그런지, 공이 가끔 맞기는 하더라.”

그렇게 또다시 패배를 향한 급행열차처럼 전진하는 경기에, 그나마 1차전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면서, 레드삭스 타자들은 조금 자조적인 미소를 흘렸다.

그래, 지난 경기보다야 낫겠지. 최소한 퍼펙트는 면했으니까. 삼진도 전보다는 덜 잡혔고.

그걸 감사하게 여기고,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치욕이겠지만 말이다.

크리스 세일과 마찬가지로, 고작 1실점을 내준 것 때문에 패전투수가 되어버릴지도 모르는 데이비드 프라이스 앞에서 할 말도 아니었고.

“아웃!”

그나마 데이비드 프라이스가 6회 초 역시 잘 막아내며, 여전히 호투를 이어갔지만. 그렇기에 점점 더 타자들의 고개가 바닥으로 꽂혔다.

고작 3일 밖에 휴식을 취하지 못했으니, 그는 이번 이닝이 마지막일 거다. 기껏해야 한 이닝 정도 더 던지고 말겠지.

팀을 위해 그런 헌신까지 보인 선수가 고작 1점 때문에, 그 1점을 내지 못하는 것 때문에 패전투수가 될 수 있다는 현실이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었으니까.

‘X발.’

우익수 포지션에 우두커니 서서, 수비를 보고 있던 무키 베츠는 나직하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실망한 듯한 팬들의 얼굴도, 결국 수포로 돌아갈 데이비드 프라이스의 헌신도. 모두 다 X같았으니까.

물론 가장 X같은 것인 상대팀 덕아웃에서 점퍼를 껴입은 채, 여전히 실실 웃는 얼굴로 경기를 지켜보는 녀석이고.

“스트라이크 아웃!”

6회 초가 끝나며, 다시금 공수교대가 이어졌을 때.

무키 베츠는 그 X같은 얼굴을 바라보며, 문득 과거의 기억을 되짚었다. 그에게 득점을 올렸던 순간을.

작년 2017시즌이었지, 5월 즈음 첫 이닝부터 그가 2루타를 치고, 그 직후 더스틴 페드로이아가 안타를 쳐서 점수를 만들었고.

그건 레드삭스가 저 녀석을 상대로 치렀던 경기를 통틀어, 유일하게 득점했던 경기로 남아 있었다.

‘대체 어떻게 했었지? 그때는 어떻게 했던 거야?’

절박한 심정 때문인지, 그는 그때의 기억을 억지로 되살리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땐 어떻게 했을까? 어떻게 해냈던 걸까? 대체 어떻게.

그렇게 몇 번이나 물었지만, 그에게, 그리고 레드삭스에게 길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저 아무런 데이터가 없다는 듯, 백지처럼 새하얗게 물들어버린 머리가 반겨줬을 뿐.

절망스러운 현실에 입술을 깨물면서도 억지로 고개를 뻣뻣하게 세운 무키 베츠는 문득 주변 동료들의 얼굴을 봤다. 혹시나 다른 동료들이라면 해답을 찾아냈을 수도 있다는 헛된 희망을 품은 채.

“하-”

허나 어쩌면 자신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동료들의 표정과 마주했을 때, 그는 비로소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깨달았으니까.

어째서 자신들이 무기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는 건지를.

‘아무도 모르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모두 다.’

감독님도, 타격코치도, 다른 타자들, 동료들도. 그 모든 사람을 통틀어도.

지금 레드삭스에서, Go에게 점수를 낼 수 있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선수 개개인이 아니라 팀 전체가 엄마 손을 놓쳐버린 미아처럼, 길을 잃었으니까.

####

“씁-”

6회 말, 선두타자로 올라온 샌디 레온이 제법 묵직한 타구를 날려 보냈다.

올해 대단히 실망스러운 성적을 기록했던 포수이자, 타자인데, 의외로 제대로 쭉 당겨서 힘을 실었지.

‘이거 넘어가나?’

제법 높았기에 혹시 저대로 담장을 넘어가버리는 건 아닐까, 심장이 철렁거렸지만.

다행히 멋진 궤적으로 날아간 타구는 아슬아슬하게 펜웨이 파크의 명물, ‘그린몬스터’의 상단부에 걸렸다.

“Fuuuuuuuuuck!”

“X발 저거 치워! 저- 저저 X발 놈의 펜스 당장 치우라고!”

“X발 홈런이었는데!”

그에 처음보다 기세가 조금 가셨지만, 홈런인 줄 알고 벌떡 일어섰던 홈팬들은 아쉬운 탄식을 내쉬며, 그들과 오랫동안 함께했던 펜스를 향한 적대감을 표출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나마 한줄기 구원이 내린 줄 알았더니, 그 순간 그린몬스터가 주인을 배신하고 나를 구해냈으니, 원망이 생길 수밖에.

“역시, 큼직한 게 X나 좋군! 우리도 신구장 지을 때 저런 거 하나 만들자!”

“마침 색도 초록색이네! 저거 우리 꺼 같은데?”

“그냥 오늘 경기 이기고, 상품으로 우리가 가져가면 안 되나?”

“봤냐? 레드삭스 X신들아! 니들 홈구장도 Suck 편이다 이거야!”

물론 우리 팬들은 그린몬스터를 향한 애정이 생겨났고 말이다.

레이더스는 당장이라도 커다란 담장을 떼어 내서, 콜리시엄에 딱 붙이고 싶은 눈치네.

가재는 게 편, 초록은 동색이라더니. 초록색 거대한 담장이 날 도와준 걸 운명이라고 느낀 것 같다.

원래도 나를 향한 신앙심(?)이 투철한 양반들이라, 그런 운명 같은 걸 좋아하거든.

‘식겁했네. 멋진 척해놓고 2회 만에 홈런 처맞으면··· 어우, 쪽팔려서 얼굴도 못 들지.’

그런 관중들의 반응을 눈에 담으며, 나는 조심스럽게 숨을 뱉어냈다.

하마터면 대형사고 날 뻔했네. 왠지 모르게 계속 편안하고, 익숙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조금 집중력이 떨어졌던 것 같다.

두려움 어쩌구 하면서 온갖 잘난 척한 주제에 한방 얻어맞을 뻔했어.

‘반성하자, 반성. 아무리 편안한 경기라고 해도 방심하면 쓰나.’

이래서 방심이 무서운 거야. 상대가 약하다고 조금이라도 정신이 해이해지는 순간, 곧바로 그에 합당한 엄벌이 뒤따르거든.

그래도 홈런까진 가지 않았지만, 첫 타자 만에 주자 2루를 허용했으니, 그 대가를 꽤나 무겁게 받은 셈이구만.

‘힘이 빠진 건가?’

그렇게 반성과 참회 속에서 다음 타자를 맞이하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볍게 몸을 가다듬었다.

어쩌면 언론에서 말했던 혹사의 여파가 드디어 들이닥친 걸 수도 있었으니까.

고작 안타 하나 가지고 너무 겁먹은 것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잘 맞은 타구이니, 최대한 경계해야지.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아웃!”

“You Suck!”

하지만 그다음 타자를 보니, 다행히 힘이 떨어진 건 아닌 것 같았다.

9번타자 재키 브래들리 주니어는 탈춤이라도 추는 것처럼 신명나게 휘적거리다가 유썩이나 먹으면서 물러나는 걸 보면.

그냥 샌디 레온이 잘 쳤던 거겠지. 아다리가 맞아떨어졌던가. 어쨌든 다행이네.

스콧 에머슨 역시 같은 생각이었던 건지, 불안한 눈으로 나를 보다가, 다시 진정한 듯 표정이 누그러졌다.

“한 방 날려! 어떻게든 이기는 거야!”

“아웃돼도 좋으니까, 제발 멀리 날리기만 해줘! 1점이라도 올리자, 제발!”

그렇게 졸지에 실험체로 전락한 재키 브래들리 주니어가 물러난 뒤, 레드삭스 팬들은 조금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

비록 홈런은 되지 못했지만, 어쨌든 빠른 시점에 안타를 치면서 1차전부터 이어온 퍼펙트도 깨졌고.

삼진 하나가 추가로 올라갔다고는 하나, 여전히 1사 주자 2루로 결정적인 찬스 상황인데.

오히려 그들이 위기에 몰린 것처럼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 고작 아웃카운트 하나 올라간 건데 말이야.

더욱더 이상한 건 그런 팬들의 염원을 짊어진 채 올라온 그다음 타자, 1번 타자 무키 베츠도 비슷한 모습이었다는 거다.

덕아웃 안에 있는 또 다른 레드삭스 선수들도 그와 비슷한 표정이었고.

대부분 저런 걸로 봐선, 아마도 등 뒤에서 내 넓은 등판에 흠뻑 취해 있을 샌디 레온도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겠지.

‘분명히 동점 찬스인데 오히려 훨씬 더 조급해졌어. 왜지?’

조금은 납득이 가지 않는 레드삭스의 모습에 모르는 척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사실 이유야 뻔하다.

“스트라이크!”

‘지고 들어가는 거지. 천하의 레드삭스가, 이 고유석에게.’

레드삭스가 나한테 쫀 거지.

정규시즌에서만 두 경기에 40K, 한 번의 퍼펙트를 당하고.

포스트시즌에선 1차전에서 16K 퍼펙트를 당하고, 오늘도 또다시 나한테 털리면서, 이젠 정말로 가슴속 깊이 각인되어버린 거다.

안타 하나만으로 크게 기뻐하고, 부담스러워할 정도의 공포가.

간신히 잡은 이 한 번의 찬스가, 행여나 마지막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스스로 잡은 기회를 부담스럽게 느낄 정도의 두려움이.

증오와 분노라는 겉껍질을 깨트리고 이제 앞으로 표출되기 시작한 거겠지.

“스트라이크!”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할 일은 그런 피해망상적인 트라우마를 약간 거드는 정도면 충분하겠지. 지금까지처럼 타자를 잡는 걸로 말이야.

초구는 몸쪽 패스트볼.

초조한 얼굴의 무키 베츠가 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파울!”

곧이어 던진 2구째 커터에는 크게 스윙했고, 공을 맞히기도 했지만, 살짝 빗맞으면서 파울라인을 넘어갔고.

‘조금 멍한 표정 같기도 하네.’

조급함도 조급함이지만, 그는 어쩐지 조금 멍해 보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현자타임에 들어간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아웃!”

그런 마음의 발로인지, 3구째 서클 체인지업 역시 빗맞히면서.

안타조차 바라지 않으니, 깊은 뜬공이라도 날리라며 소리쳤던 레드삭스 팬들의 목소리를 무키 베츠는 다시 한번 배신했다.

높~이 떠오른 뜬공은 맞지만, 깊기는커녕 홈플레이트에서 고작 몇 미터쯤 벗어난 내야뜬공으로 물러났거든.

“제발 하나만 치라고!”

“다른 거 다 필요 없으니까, 최소한 1점이라도 내줘···”

“역전까진 바라지도 않으니까, 동점이라도 제발···.”

그렇게 투아웃이 올라가면서, 이젠 희생플라이도 불가능한 상황이 만들어졌고.

그러자 이번 경기를 앞두고 표출한 나를 향한 증오심이 레인저스와 비빌 만했던 레드삭스 팬들은 이젠 하는 말이나, 행동마저도 그들과 비슷해졌다.

더는 내게서 승리를 바라는 게 아니라. 오직 한 점, 고작 한 점이라도 내달라면서, 타자들에게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로 사정사정하고 있었지.

그래, 정규시즌에서 레인저스를 상대할 때마다 수도 없이 봤던 모습이지.

그 모습을 봤을 때, 이제야 알아챘다. 오늘 경기 내내 함께 했던 이 미묘한 편안함, 그리고 익숙함의 정체를.

‘그냥 레인저스네. 그래서 편안했던 거구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이번 경기에서 레드삭스는 약간 더 체급이 큰 레인저스라는 것을. 딱 그 정도지.

저쪽이 레인저스처럼 구니까, 나도 레인저스를 상대할 때 같은 기분이 들었던 거겠지.

레인저스야 더 말할 것도 없이, 내 최고의 호구 중 하나인데, 오늘 펜웨이 파크도 그런 정취를 물씬 풍기니, 내 집처럼 편하고, 익숙할 수밖에.

바로 방금 전에 큼직한 홈런성 장타를 쳐 맞아놓고 이런 말하면 우스운 거 아는데.

오히려 샌디 레온이 쳤던 그 큼직한 안타와 그로 인해 발생된 위기 상황 덕분에 더욱더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지.

“스트라이크 아웃!”

그렇기에 2번타자 앤드류 베닌텐디를 삼진으로 잡으며, 가볍게 선언했다.

‘이제부터 여긴 어나더 글로브 라이프 파크다.’

올 한 해, 나를 만날 때마다 번번이 좋지 못한 꼴을 당하면서도, 끝끝내 투지를 잃지 않았던 레드삭스이지만. 결국 오늘, 그 모든 의지가 완벽하게 무너졌다.

이제 더는 내 앞에서 자비나, 희망 같은 동화 같은 이야기를 바라지 않게 된 레인저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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