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화
광신적인 콜리시엄, 오클랜드를 떠나 원정지로 날아가는 비행기의 안은 조용했다.
기도하거나, 명상에 잠기거나, 아니면 그냥 수면을 취하거나.
2,700마일 너머의 머나먼 동쪽으로 향하는 원정길을 다들 저마다의 방식대로 보냈다.
그나마 하나 같이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우리가 한 팀이라는 걸 증명해줬지. 나도 평소처럼 영화 관상으로 시간을 보냈지만, 아마도 얼굴은 굳어 있을 테고.
오클랜드에서만 하더라도, 펜웨이 파크에서 몰아치면 된다면서 뻔뻔하게 굴었던 타자들조차 조금은 긴장한 표정이라면 말 다한 거겠지.
그렇게 침묵 속에서 도착한 보스턴은 어쩌면 조금은 익숙한 분위기였다.
“여기도 축제네. 오클랜드랑 분위기가 비슷한데?”
“당연하지, 월드시리즈가 코앞이니까. 축제인 동시에 전쟁터이기도 하고.”
“적어도 우리한테는 전쟁터보다 더하지.”
이곳 역시 오클랜드와 마찬가지로 흥분과 기대로 가득 차 있었지.
1승 1패의 동률로서 자신들의 홈으로 시리즈가 이어졌으니, 어쩌면 더욱더 기대할 수도 있고.
물론 그건 오롯이 레드삭스에게 향했을 뿐, 우린 아니다.
“우우우우우!”
“오클랜드 떨거지 새끼들, 뒈질 준비는 됐냐?”
“X같은 쓰레기들아! 실컷 구경이나 해둬! 너넨 X같이 발리고 꼬랑지를 말 거니까!”
“지금이라도 실컷 하늘 구경해둬! 3일 뒤에는 쪽팔려서 고개를 들지도 못할 테니까!”
적지의 한 복판인데, 쌍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이지.
포스트시즌이라는 특별한 무대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바로 며칠 전에 나한테 퍼펙트를 당해서 그런 건지.
레드삭스 팬들의 우리를 향한 적개심은 상상이상으로 강력했다.
“이 X같은 새끼! 뒈질 준비나 해라!”
“X같은 병신 팀에서 고생이 많네! 그 대가로 이번에 어깨 박살날 거니까, 미리 병원이나 알아둬!”
“X신 같은 콜리시엄에선 아주 신났던데, 여긴 그런 시궁창과 달라!”
특히나 나는 뭐, 더 말할 것도 없고. 대역죄인 수준이지.
이 정도면 거의 레인저스랑 비슷하겠는데? 아니, 단기 임팩트만 따지면 그보다 더할지도 모르겠어.
“좋네, 이런 분위기.”
“또라이냐? 좋긴 뭐가 좋아?”
그렇기에 좋았다.
난 이런 분위기가 좋더라.
막 원정인데 살갑게 대해주고, 잘하면 칭찬도 하고, 그런 훈훈한 분위기는 오히려 좀 버티기가 힘들다고 해야 하나?
흐뭇한 모습으로 보스턴을 훑어보니, 마커스 시미언은 불손한 눈빛으로 나를 봤다.
이해가 안 된다는 것처럼.
포스트시즌 왔다고 점수도 제대로 못 내는 너 같은 쫄보들은 이해가 안 될 수밖에.
“왠지 기분 나쁜 생각을 한 것 같은데···”
“맞아, 네가 X나게 못한다는 생각을 했지. 그래서 어쩔 거야? 날 때리기라도 하게?”
“어쩌긴, 나도 마음속으로 네 욕이나 하고 마는 거지. 빌어먹을 푸른 피 새끼.”
아무튼 조질 때의 죄책감도 덜하기에 난 이런 분위기를 좋아했지만.
곧 16일의 저녁이 지나갔을 땐, 애석하게도 그런 분위기는 옅어졌다.
“Hell Yeah!”
“펜웨이 파크에 온 걸 환영한다! X신 새끼들아!”
“Two More! 이제 2승 남았다아악!”
3차전이 끝났을 때, 레드삭스는 분노 대신, 기쁨을 만끽했으니까. 우리가 또 졌거든.
“하아··· 진짜 미치겠네. 왜 이렇게 안 맞는 거야?”
“진짜 이러다가 Suck 나온 거 빼고 전패라도 하는 건···”
“괜히 불길한 소리 하지 마. 그러다 실현될 수도 있어.”
연이은 패배에 덕아웃에는 패배감이 감돌았다. 기내에서부터 이어졌던 집중력은 압박감이 되었고.
아주 조금이지만, 애슬레틱스를 침범한 패배의 기운에, 자연스럽게 최후의 수단이 떠올랐다.
‘4차전, 내가 등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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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부진한 타선, A’s, 2연패의 늪에 빠지다!>
<멀어져 가는 월드시리즈? ‘애슬레틱스에겐 챔피언의 기세가 없다!’>
<‘Go 99%, 그 외 선수단 1%?’ 애슬레틱스는 Go 원맨팀! 홀로 빛나는 스타는 결코 단합된 팀을 이길 수 없다!>
3차전의 패배는 애슬레틱스에게 큰 부담을 안겨줬다.
시리즈 스코어를 역전당하면서, 2패 째를 올리며 월드시리즈 진출 좌절까지 조금 더 다가섰으니까.
또한 앞선 2차전과 마찬가지로 전체적으로 타자진이 부진했기에, 이대로 침체에 빠지는 것은 아닐지에 대한 불안감도 존재했고 말이다.
[#A’s]
[고작 2패 했다고 다들 난리도 아니네. 누가 보면 탈락이라도 한 줄 알겠네.]
└그래도 좀 걱정스럽긴 하지.
└X같은 타자 놈들, 또 X같이 못했어!
└Go 원맨팀, 솔직히 이젠 반박 못하겠어.
└그 대신 Suck이 다른 사람들 몫까지 X나게 강하잖아. 그러면 된 거지.
└이러다가 진짜로 Go 나온 경기 빼고 죄다 져서 탈락하는 거 아니야?
이전부터 줄곧 함께해왔던 고유석 원맨팀이라는 평가 역시 더욱더 힘이 실렸고.
심지어 애슬레틱스 팬들 역시 더는 강력하게 반박할 수가 없었다.
1차전의 영광스러웠던 퍼펙트게임이 무색하게도, 연속적인 패배를 허용하며 무너졌으니까.
그렇게 애슬레틱스를 향한 날 선 비판 속에 미래가 불투명해졌다면.
<파죽지세의 보스턴 레드삭스! 고유석의 월드시리즈 도전이 좌절되나?>
<데이브 돔브로스키 사장, ‘펜웨이 파크에서 아메리칸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겠다.’ 포부를 밝혀···>
당연히 레드삭스는 그저 환희와 찬사가 가득했다.
고유석이라는 절대적인 에이스로 인해, 매치업 이전만 하더라도 힘겨운 시리즈가 될 것이라는 평이 지배적이었으나.
3차전 직후에는 오히려 레드삭스가 연이어 승리를 따내고, 당당히 월드시리즈로 진출할 것이라는 예측이 줄지어 쏟아졌으니까.
레드삭스 역시 그런 찬사에 대해 강력한 자신감을 드러냈고 말이다.
└’Factos’
└Suck? 그래, 걔 잘하는 건 이젠 나도 인정. 하지만 야구는 팀 게임이야.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더라도, 전쟁에서 이기면 그게 곧 승자지. Go? 마음대로 하라고 해. X발놈의 퍼펙트를 하든, 20K를 하든, 시리즈의 위너는 우리니까.
└이대로 깔끔하게 2승 더 올리고, 챔피언십 시리즈 끝내자!
팬들 또한 지난 트라우마를 떨쳐내며, 팀에 지지를 보내는 동시에 기대감을 드러냈다.
비록 증오스러운 ‘Suck’은 끝내 이겨내지 못할지라도. 팀으로서의 레드삭스가 애슬레틱스를 이겨낼 수 있다는 강렬한 확신이 생겨났으니까.
그렇게 시리즈의 분위기가 조금은 애슬레틱스에게 우울한 방향으로 바뀌는 가운데.
이런 흐름을 떨쳐내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는 이들 역시 제법 많았다.
<3일 휴식 후 등판, A’s는 Go의 수명을 담보 삼아, 월드시리즈를 연성하길 바란다.>
<고유석의 4차전 등판은 과도한 혹사! 오클랜드의 야욕이 최고의 투수를 망가뜨리나?>
└ㅈㄴ막 굴리긴 하네
└근데 솔직히 어쩔 수 없지 않음? 탈락하게 생겼는데, 뭐라도 해야지.
└갓유석은 연봉도 X같이 적은데, 혼자 다 하네ㅠㅠ
└4차전에서도 완봉할 듯ㅋ
└개소린데 고유석이라서 그럴듯하네ㅋㅋ
└Kill 멜빈, Killy 빈 Out!
결국 이번에도 고유석이었지만 말이다.
챔피언십 시리즈의 흐름이 묘하게 이어지고 있으니, 그가 4차전에 등판하여 분위기를 쇄신하리라는 추측이 쏟아졌고.
고작 3일을 휴식하고 오르는 것이기에, 혹사라며 비판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그것이야말로 연패를 끊고, 다시 시리즈의 균형을 맞추기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은 모두가 동의했다.
<밥 멜빈 감독, ‘Go의 4차전 등판? 그저 낭설에 불과!’ 강력하게 입장표명, 하지만 그 속내는?>
물론 모든 것은 애슬레틱스의 선택에 달렸지만 말이다.
그렇게 다음날을 향한 기대감과 여러 가지 추측 속에서 서서히 밤이 깊어갔다. 누군가의 결단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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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럽게들 떠드는군.”
“2연패니까요.”
밥 멜빈 감독은 짧게 혀를 찼다. 고작 2패로 인해 흔들리는 여론이 조금은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3차전의 패배는 장밋빛과 같았던 애슬레틱스의 우승 도전기를 흔들었다. 1차전의 퍼펙트로 애슬레틱스를 찬양하던 기자들도 돌려세웠고.
이젠 하나 같이 이대로 레드삭스가 2연승을 더 차지하며, 펜웨이 파크에서 월드시리즈 진출을 결정지을 것이라며 소리치기 바빴지.
2차전과 3차전, 두 경기 모두 무기력하게 패배했기에,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주장이었다.
포스트시즌이니 만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었고.
“4차전 등판.”
허나 이것은 조금 미묘했다.
“대부분 그렇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위기에 몰렸으니, 히어로가 등장해야 할 차례니까.”
3차전의 패배로, 1승 2패의 시리즈 스코어가 만들어지자, 고유석이 곧바로 4차전에 등판할 것이라는 주장이 강해졌다.
물론 이전에도 그런 추측이야 무성했지만, 이번의 패배로 더욱더 힘을 얻었다.
위기의 상황에서 절대적인 에이스가 등장하여, 연패를 끊고, 챔피언십 시리즈의 균형을 다시 돌려놓아야 한다는 뜻이었지.
‘더 나아가서 만약을 대비해, 7차전 등판도 가능하도록 하자는 것이고.’
또한 애슬레틱스의 경우 4선발부터 힘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느낌이 없잖아 강하기에.
종종 포스트시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3선발 로테이션을 가동해야 한다는 주장도 힘을 얻었고 말이다.
“Go는··· 언제든지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3일씩이나 쉬어서 오히려 몸이 늘어졌다더군요.”
“그래, 그렇겠지.”
그리고 고유석 본인도 의지를 드러냈다. 자신은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 의지를.
조심스러운 투수코치의 말에 밥 멜빈 감독은 피식 웃었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니까.
지금까지 그가 겪어온 고유석, Go라면, 당연히 그렇게 말하겠지.
조금은 미묘한 이미지와 겉모습과는 달리, 의외로 팀을 향한 헌신이 뛰어난 선수이니까.
어쩌면 그의 엄청난 이닝 소화처럼, 과거의 에이스들과 비슷한 종류의 조금은 구시대적인 면모이기도 하고.
“3선발 로테이션이라···”
본인의 의사도 확실하니, 과감한 결단을 내릴 수도 있었지만.
“물론 해야겠지. 월드시리즈에서.”
허나 밥 멜빈 감독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당장의 승리는 기쁘겠지만, 그건 독약이었으니까. 적어도 지금 당장은.
“월드시리즈에선, 그렇게 가실 생각이시군요.”
“그건 어쩔 수 없지, 최고의 검이 손에 들어왔는데, 휘둘러야 하지 않겠는가?”
스콧 에머슨은 조금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이미 예상했던 일이나, 직접 감독의 입으로 들으니, 또 느낌이 달랐으니까. 스스로의 부채감을 지울 수가 없었지.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작년 데뷔 시즌부터 초월적인 성적을 올렸을 때 예상된 일이니까.
그가 월드시리즈에서, 상대가 컵스든, 아니면 다저스든. 만약 시리즈가 7차전까지 이어질 경우 최소한 세 번의 등판을 하는 것 말이다.
이제까지의 수많은 가을의 전설들이 그랬던 것처럼. 실제로 구단과 코칭스태프 내부적으로는 이미 결정된 사실이나 다름없지.
밥 멜빈 감독의 말처럼, 명검을 쥐었으니, 최선을 다해 휘둘러, 영광을 쟁취할 차례니 말이다.
“하지만 그 검을 휘두르는 곳이 챔피언십은 아니야.”
그러나 챔피언십은 아니다.
챔피언십에서부터 3일 휴식 후 등판이라는 과도한 부담감을 안겨줄 수는 없었으니까.
이보다 훨씬 더 혹독할 월드시리즈를 위해서. 최대한 힘을 비축해야겠지.
“하지만 4차전이 중요한 것도 사실이지. 패배한다면, 탈락까지 단 1패만을 남겨두는 거니까.”
물론 4차전 역시 대단히 중요했다. 여기서 만약 한 경기를 더 패배할 경우, 벼랑 끝에 몰리는 셈이니까.
단 1패만으로 탈락이 결정되는 단두대 위에 목이 걸리는 것이나 다름없지.
그렇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고유석과 그의 강력한 피칭이 필요한 순간이었지만.
역시나 밥 멜빈 감독은 그를 출전시킬 생각이 없었다.
“대신 그의 역할을 모두가 분담해서 짊어지는 것은 가능하지.”
고유석이라는 최강의 투수로부터 비롯된 또 다른 비밀병기가 애슬레틱스에 존재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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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회 말, 애슬레틱스가 유스메이로 페팃을 교체하며, 리암 헨드릭스를 마운드에 올립니다.
-벌써 네 번째 투수가 올라오는군요. 애슬레틱스가 이번 경기에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스운 소리.”
“예?”
“우습잖은가? 전력을 다하다니. 진짜 최종병기는 꺼내지도 않았는데. 그게 어떻게 전력이지?”
데이브 돔브로스키 레드삭스 사장은 조금 불편한 표정으로 중계방송을 지켜봤다.
경기 전, 그가 가장 걱정했던 것은 고유석의 등판이었다.
이번 시즌, 너무나도 완벽했던 레드삭스에게 번번이 치욕을 안겼던 그 빌어먹을 괴물이 4차전에 등판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가장 골칫거리였지.
물론 정규시즌부터 네 경기 연속 완투를 이어온 투수이기에, 미친 짓거리이겠지만···
‘기꺼이 했겠지. 내가 애슬레틱스의 사장이었다면, 흔쾌히 명령을 내렸을 거야.’
그가 특별히 혹사를 사랑해서가 아니다. 믿음의 야구를 선호해서도 아니고.
데이브 돔브로스키 자신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이들이 그런 선택을 내리겠지.
고명한 수도사가 아닌 이상, 그 유혹을 참을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확정적인 승리와 영광을 마다하는 사람이 말이다.
그렇기에 애슬레틱스 역시 그 유혹을 떨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고, 그렇기에 걱정했지만, 정작 고유석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무수히 많은 투수들이 그의 역할을 분담하며, 레드삭스를 몰아쳤을 뿐.
‘자랑하는 것 같단 말이야.’
고작 4이닝으로 마감한 선발투수에 이어서, 작년과는 정반대로 대단히 강력하다 평가받은 불펜진이 차례차례 마운드로 올라왔고.
그것이 데이브 돔브로스키에겐 애슬레틱스의 자랑질처럼 느껴졌다.
한 경기에서 이토록 많은 불펜 투수를 쏟아부을 수 있는 이유야 너무나도 간단하잖은가?
‘내일은··· 나올 일이 없을 테니까. 불펜 투수 전체가.’
내일, 5차전에선 고유석이 등판하고, 그가 또다시 완투 혹은 그에 준하는 피칭을 보여줄 테니.
4차전에서 굳이 불펜을 아낄 이유가 없다는 뜻이지. 내일도 휴식하고, 다시 오클랜드로 돌아가며, 하루의 휴식일이 주어질 테니까.
그렇기에 오늘 마구잡이로 소모하더라도, 애슬레틱스에겐 아무런 부담이 없었다.
그것이 데이브 돔브로스키에겐 마치 꼴같잖은 자랑질처럼 느껴졌지만, 한편으로는 순수하게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운 좋게 Korean 하이스쿨 학생을 주워다가 잭팟을 터트렸다는 이유로.
포스트시즌, 그것도 아메리칸 리그의 챔피언을 결정하는 단계에서, 과감하게 불펜진을 털어 넣을 수 있게 된 것이니까.
그 자신감과 확신에 가까운 믿음이 돔브로스키는 부러운 한편으로, 조금은 가슴이 옥죄여오기도 했다.
-스트라이크 아웃! 리암 헨드릭스가 7회 말을 삼자범퇴로 막아내며, 애슬레틱스의 리드를 지켜냅니다!
최고의 투수는 등판 당일 외에도 거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팀을 승리로 이끄는 영향력을.
‘그마저도 직접 등판했을 때와 비교하면 새끼손톱에 낀 때 수준이지.’
허나 펜웨이 파크의 마운드 위에 우뚝 섰을 때의 존재감은 그마저도 아득하게 능가하리라.
-블레이크 트라이넨이 안타 하나를 내줬지만, 잘 막아내면서 8회 말이 종료···
-스트~~라이크 아웃! 션 두리틀! 두 개의 삼진을 유도하며, 경기를 종료시킵니다! 이제 시리즈 스코어는 다시 동률!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 결정전이 2승 2패로 다시금 균형을 되찾습니다!
그날 애슬레틱스의 마운드에는 총 여섯 명의 ‘고유석’이 등판했고, 레드삭스를 막아냈다.
펜웨이 파크에서 월드시리즈로 향하겠다던 레드삭스의 꿈은 깔끔하게 접혔다.
그리고 그다음 날, 당연하게도 진짜 고유석이 등판이 예고됐고 말이다.
“야구 참 X같이 하는군. 불펜을 죄다 끌어 쓰고도 마운드가 단단하다니···”
그러한 현실이 데이브 돔브로스키는 문득 너무나도 불합리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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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전 직후 투수코치와 짤막한 면담을 가졌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오래간만에 그를 설득하기 위해서였지.
내 4차전 선발등판의 당위성과 그것이 가져올 효과, 그리고 승리를 주장하기 위해서.
“조급해하지 마, Go 네가 아니라도, 네 동료들은 충분히 이길 수 있는 녀석들이니까.”
“예, 이젠 저도 잘 알겠네요.”
설득은 당연히 실패로 돌아갔다. 이미 선발투수는 결정됐고, 조금 더 동료를 믿으라고 단호하게 말하셨지.
경기가 시작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 말을 조금은 불안하게 여겼는데, 이젠 아니다.
“어차피 월드시리즈에선 Go 네가 도저히 못 하겠다고 해도 마운드에 올라야 하니까, 지금을 충분히 즐겨.”
“그것 참, 반가운 소식이네요.”
어쩌면 흔들렸던 걸지도 모르겠다. 연이은 패배에 동료들만이 아니라, 나조차도.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짙게 깔렸던 거지. 물론 여전히 그런 마음을 품고 있다.
다만, 그것을 당장에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월드시리즈까지 안고 갈 뿐이지.
-아웃!
5차전의 첫 공격이 끝났다.
아쉽지만 득점은 없었지. 또 기복이 시작되는 건가? 뭐, 그래도 상관없다.
그라운드로 나가기 전, 나를 바라보던 대니얼과 스콧 에머슨에게 미소를 지어준 뒤, 그들을 뒤로하고, 활짝 열린 불펜의 문을 넘었다.
“부우우우우우우우우우!”
기차의 경적처럼, 그도 아니면 고래의 울음소리처럼 크고 묵직하게 소리가 터져 나왔다.
보스턴 공항에 내린 직후부터 늘 함께했던 보스턴 시민들, 레드삭스 팬들의 혐오 가득한 시선은 오늘에 이르러선 더욱더 강해졌다.
3차전이 끝날 때만 하더라도 좀 누그러지는가 싶더니, 이젠 아예 원수처럼 대단히 증오하네.
누가 보면 내가 자기들 가족이라도 해친 줄 알겠어.
“우우우우우!”
“오늘은 X나게 얻어터질 테니까, 엉엉 울지나 마라!”
“X이나 까라! 이 X같은 새끼야!”
“Fuck You Suck! You son of-”
오늘도 펜웨이 파크를 가득 채운 홈팬들은 호텔을 떠나, 펜웨이 파크로 오면서 봤던 것들은 그저 어린아이 장난에 불과했다는 것처럼.
불펜을 나서자, 더욱더 본격적으로 욕설을 퍼붓고, 저주를 토해냈다.
‘그래, 이래야지. 기뻐서 날뛰는 게 아니라, 이래야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저들에겐 내가 레드삭스의 세 번째 패배를 상징하는 투수처럼 느껴질 테니까.
물론 조금은 귀에 거슬리기도 하는데, 근데 이전에도 말했지만 난 그게 좋아.
상대가 차분하고, 좋아하는 것보단, 혐오하고, 증오하고, 욕설을 퍼붓고, 분노하는 게 더 좋지.
적의 혐오를 사고, 욕설을 듣는 것이야 말로, 내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증표잖아?
그걸 다른 단어로 치환하면···
‘두려움이니까.’
공포는 배타적인 감정의 근원이다. 공포가 없이는 혐오도, 증오도, 분노도 없지.
그러니 기꺼이 먹어야지.
투수는 그런 두려움을 먹고사는 동물이거든.
그 두려움의 근원지가 상대팀 선수들이나, 적팀 팬들일 때도 있고. 반대로 아군일 수도 있다.
X같이 못하면, 때때로 아군의 두려움을 사는 존재가 투수니까.
허나 이번엔 적의 공포였기에, 기꺼이 집어삼켰다. 더욱더 빨아들여야지.
너무 많이 먹어서, 밥을 먹지 않더라도 배가 두둑해질 때까지 말이야.
“잘해보자. 어제 투수들 휙휙 바뀌는 와중에도 공 잘 받던데, 오늘도 그렇게만 해.”
“나야 늘 잘하지. Suck 너도 당연히 끝까지 갈 거지?”
“그래야지.”
브루스는 씨익 웃었다.
마치 뻔하다고 말하듯이.
그치, 너무 뻔하지.
오늘은 특히나 더 그렇고.
“다들 노력해줬잖아? 에이스로서 가만히 있을 수야 있나. 나도 한 건 해야 내 체면이 살지.”
“그럴 줄 알았어. 오늘도 내 손목 열심히 박살 내. 손바닥도 깨트리고.”
모두가 합심해서 나를 증오하는 레드삭스처럼, 지난 4차전에서 우리 또한 단합했다.
막 해가 저물며 하늘이 진한 청색으로 물들던 이른 초저녁부터, 짙게 깔린 어둠이 찾아온 밤까지.
서서히 드리웠던 패배감을 떨쳐낸 채, 이어진 경기 동안 모든 동료들이 각자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고. 결국 승리했지.
그렇게 동료들은 저마다의 최선을 다하면서, 4차전 등판을 각오했던 나에게 하루의 휴식을 더 선물해줬다.
그 모든 노력의 끝에서 불펜은 지쳤고, 타자들도 조금은 진이 빠졌지. 그러니···
‘자, 이제 다시 레드삭스를 조져보자고.’
오늘은 내가 동료들에게 휴식을 선물할 차례다. 물론 승리도 곁들여서.
“스트라이크 아웃!”
10월이 도래한 이후 늘 그랬던 것처럼, 오늘 역시 준비는 철저하게 되어 있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나를 향해 레드삭스가 쏟아내는 증오라는 겉껍질을 깨트리고, 그보다 조금 더 근본적인 공포를 끄집어낼 준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