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화
‘예상대로야.’
빠르게 끝난 1회 초.
불펜에서 모든 준비를 마친 채, 조용히 그것을 지켜본 크리스 세일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미 예상한 일이었으니까. 양키스전에서 보여준 퍼포먼스로 이미 거의 확신하고 있었지. 그가 오늘도 잘하리라는 것을.
“무리하지 말고, 차분하게 던져. 월드시리즈를 위해선, 크리스 네가 가장 중요하니까. 여기서 모든 걸 쓴다고 생각하지 마.”
그래서인지, 불펜코치 역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시즌의 막바지에 부상에 시달린 바가 있던 크리스 세일 자신이 그것에 자극받아, 공연히 무리하면서 다시 부상이 재발하지는 않을지, 걱정했을 뿐.
“그래야죠.”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짧게 끝날 경기가 아니라는 걸 확인했으니, 최대한 오랫동안 버텨야겠지.
10월 역시 금방 끝내지 않을 것이기에, 더욱더 버텨야 하고.
“우우우우우!”
“또 지러 왔냐?”
“비실비실한 게 척 봐도 3이닝도 못 버티겠네!”
“크리스! 너도 보여줘!”
“Suck? 90마일도 안 나오는 그딴 놈보다 네가 훨씬 나아!”
“이번엔 네가 20K로 잡아버려!”
그가 그라운드로 들어서니, 야유가 반겨줬다. 소수의 원정팬이 내지른 응원 역시 작게나마 들려왔고.
직전 이닝의 호투가 분위기를 달아 올린 거겠지. 지금 그가 느끼는 감정처럼.
‘이겨야지, 오늘은.’
깊숙이 패인 발자국이 덕지덕지 남은 마운드로 올라서며,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오늘은 이기자고. 인터뷰에서도 종종 드러냈던 생각이지.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좋아하는 언론이나, 레드삭스의 팬들은 그것을 Go를 향한 도전장처럼 여긴 것 같지만.
사실 그보다는 크리스 세일 스스로에게 거는 최면에 가까웠다. 지난번의 승부처럼 아쉽게 끝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크리스 세일은 이를 앙 다문 채, 마운드에 찍힌 발자국 위로 자신의 발을 덧씌웠다.
“스트라이크!”
맷 채프먼의 몸쪽으로 내리 찍힌 포심에 첫 스트라이크가 올라갔다. 96마일의 패스트볼.
부상에서 복귀한 이후, 좀처럼 올라오지 않았던 구속이 어느 정도는 돌아왔다.
비록 100마일이 찍히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마음에 감응하여 몸 역시 힘을 내준 거겠지.
“스트라이크!”
감히 랜디 존슨과 비견되게 만들어줬던 슬라이더는 더욱더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타자가 헛스윙하면서 투 스트라이크. 다시 공을 돌려받았을 때, 야유가 조금 더 커졌다.
그만큼 경계감이 더 올라갔다는 거겠지. 1회 초의 피칭을 바라보며 레드삭스 팬들이 그랬을 것처럼.
“스트라이크 아웃!”
하지만 그 야유 속에서도 공은 유유히 날아갔다. 삼구만에 얻어낸 스트라이크 아웃.
맷 채프먼은 혀를 내두르며 내려갔다. 아쉬운 듯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고.
그다음 2번타자 제드 라우리는 동료에게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건지, 경계심이 가득했다.
“볼.”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그는 연이어 존 안으로 꽂히는 코스에도 쉽사리 스윙을 내지 않으면서, 최대한 관찰하는 위주로 타격에 나섰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마지막 순간 배트가 헛도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KK. 연달아 올라간 삼진에 콜리시엄의 분위기가 조금 식었다.
가을바람처럼 시원하다기보단, 아직 오지도 않은 겨울과 같은 싸늘함이 감돌았지.
“후우···”
그런 공기를 한껏 빨아 당기며, 크리스 세일은 다음 타자를 기다렸다.
크리스티안 옐리치.
이번 시즌 애슬레틱스 타선의 에이스다. 레드삭스의 무키 베츠와 비슷한 존재겠지.
이전에도 최상급 리드오프로서 각광받았던 컨택과 선구안에, 올해는 발군의 홈런 파워까지 장착되면서.
마찬가지로 MVP도 충분히 노려 볼만한 성적을 찍었으니까. 만약 아메리칸 리그였다면 분명 수상했을 것이고.
어떻게 본다면 가장 절정의 순간 같은 팀 동료에게 밀린 셈이니, Go가 낳은 여러 피해자들 중 한 명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 에이스를 위해 최선을 다해 한 점을 낼 생각을 품고 있었다.
“파울!”
초구부터 잘 맞은 타구가 나오자, 홈팬들의 기세가 다시 살아났다. 반대로 원정팬은 불안감이 생겨났고.
레벨 스윙으로 간결하게 쳐낸 쭉 뻗은 라인드라이브는 멀찍하게 날아가, 우측 관중석으로 사라졌다.
파울 홈런까지는 아니었지만, 만약 조금 더 정확도를 갖췄다면 그냥 홈런이 됐을지도 모르리라.
“볼.”
연이어 던진 2구는 가볍게 지켜보고, 볼을 골라내면서, 기세는 점점 더 타자에게로 흘러갔다.
감각이 좋아 보이는 타자의 모습에 팬들은 좋은 결과를 기대했다.
“아웃!”
허나 3구째, 이번에도 잘 맞은 라인드라이브가 나왔으나, 중견수에게 무난하게 잡혔다.
기대와 달리 조금은 실망스럽게 끝난 이닝, 하지만 아직 수많은 이닝이 남아 있었기에, 홈팬들은 실망하지만은 않았다.
이렇게 경기가 이어지다 보면, 결국에는 자신들이, Go가 이길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실제로 애슬레틱스는 그런 경험이 수도 없이 많았으니까.
‘어떻게든 버틴다.’
그렇기에 크리스 세일은 끝까지 버틸 생각이었다.
상대는 저번처럼 강력하다.
그러니 그가 완승을 거두기는 힘들겠지. 타자들에게 운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하지만 괜찮다.
상대가 어쩔 수 없이 내려갈 수밖에 없을 때까지 자신도 버텨 낸다면. 그것이 곧 레드삭스의 승리가 될 테니까.
‘끝까지 버티면, 우리가 이겨.’
앞으로 남은 길고 긴 이닝.
크리스 세일은 기꺼이 견뎌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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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도 진짜 좀 미쳤어. 쟨 부상당한 지 얼마나 됐다고 저러나 몰라. 무섭지도 않나?”
5번타자로서 출전한 맷 올슨은 깔끔하게 삼진 당한 채, 혀를 내두르며 돌아왔고. 벤치에 있던 다른 선수들도 그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운드의 크리스 세일이, 지난 9월에 부상에 시달린 투수라기엔, 시작부터 꽤나 역동적인 피칭을 보여줬거든.
2회에도 마찬가지였지.
“슬라이더가 제대로 긁히는 것 같은데, 어때?”
“어, 직접 보니까, 좀 X같더라. 무슨 랜디 존슨 같은데?”
“그건 너무 갔고.”
“적어도 오늘은 진짜 그 정도 수준이야.”
크리스 세일의 경우 랜디 존슨과 종종 비교되고는 했다.
2미터에 살짝 못 미치는 큰 키와, 최고구속이 100마일이 넘게 찍히는 좌완 선발투수라는 것. 그리고 강력한 슬라이더를 주력구로 삼아, 삼진을 잘 뽑아내기 때문이지.
그 슬라이더가 오늘 좀 긁히고 있었다. 덕아웃에서 봐도 잘 휘는 것이 보일 정도로.
‘구속도 96마일까지 나오네.’
구속 역시 100마일은 찍지 못했지만, 96마일까진 꾸준하게 찍고 말이야.
경기 전 인터뷰들만 보더라도 단단히 준비할 것 같긴 했는데, 역시 저쪽도 나처럼 7일간 푹 쉬면서 폼이 올라오긴 했나 보네.
“아웃!”
“우우우우우!”
“Fuck Yeah!”
2회 말마저 삼자범퇴로 끝나자, 우리 팬들은 당연히 노성을 터트렸지만. 원정 팬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나를 보면서 마음이 흔들던 마음이, 그들의 에이스도 굳건하다는 걸 확인하면서 안심된 거겠지.
“오늘은, 쉽게 이기기는 글렀네.”
“뭐, 사실 크리스 세일이니까, 당연한 거지.”
“그나마 Suck이 등판하는 날이라서 다행이네.”
반대로 우리 타자들은 역시나 경기가 손쉽게 이어지진 않을 것 같다는 것을 그제야 직감한 건지, 한숨을 푹푹 내쉬었고 말이다. 아마 팬들도 마찬가지겠지.
그대로 삼자범퇴로 끝난 이닝. 빠르게 이닝이 돌아왔지만, 상대 폼이 예사롭지 않은 만큼, 오래 쉬기엔 글렀다는 걸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에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하긴 하네. 저번이랑 비슷하겠어.’
크리스 세일의 폼은 잘 봤다.
경기 전에 예상했던 것처럼, 우리 타자들 입에서 곡소리 뽑아내기엔 충분한 것 같네.
하지만 누누이 말하지만 오늘 내 목표는 그와의 승부에서 다시금 승리하는 게 아니다.
그가 얼마나 우리 타자들을 잘 막아내든, 기세가 올라왔든지 간에. 나도 레드삭스 타자들을 조지면 되는 거니까.
‘상호확증파괴였던가?’
문득 고등학교 1학년인가, 2학년 때 사회시간에 배웠던 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대부분의 수업은 수면이었지만, 그때 사회 선생님이 말재주가 좋은 분이라서 유일하게 사회 시간에는 깨어 있었지.
대충 서로 핵무기를 가진 국가들끼리는 서로가 서로를 멸망시킬 수 있으니, 즉 상호확증파괴를 할 수 있으니, 강대국끼리는 전면적인 전쟁을 피한다는 개념으로 기억한다.
어쩌면 나랑 크리스 세일이 오늘 하는 행동이 그거랑 비슷하다고 볼 수 있었다.
서로 왼손에 깃든 핵무기를 가지고서.
“스트라이크 아웃!”
상대 타선을 멸망시키는 거니까.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남지 않을 때까지.
원래는 그런 공포로 인해 전쟁을 방지한다는 개념이지만, 이미 전쟁은 시작됐다.
“아웃!”
그러니 남은 건 그저, 서로 괴멸에 이를 때까지 서로의 본진을 후벼 파는 거지.
그러다 보면, 마지막에 이르러, 조금이라도 더 전쟁수행능력이 남아 있는 쪽이 이기는 거고.
‘크리스티안 바스케스.’
재빠르게 올라간 아웃카운트 두 개.
마지막 타자가 잰걸음으로 올라왔다.
크리스티안 바스케스, 레드삭스의 포수로, 올해 레드삭스 타선에 구멍 중 하나지.
그나마 후반기에 멸망하며,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참담한 성적을 기록한 또다른 포수인 샌디 리온보다는 나아서. 오늘도 선발 라인업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지만. 그 역시 타선의 블랙홀이라고 볼 수 있었다.
“스트라이크!”
그걸 증명하는 건지, 초구, 바깥쪽으로 멀찍하게 나간 서클 체인지업에 그는 엉덩이를 쭉 내밀며 스윙했다.
오늘 주심의 스트라이크존은 조금 들쑥날쑥하다. 대체로 넓은 것 같으면서도, 갑자기 좁아지기도 하지.
포수인 터라, 그걸 가장 잘 느꼈을 만큼, 그래서인지 충분히 나간 코스인데도 주심을 믿지 못하고 스윙했지만, 결과는 아쉬웠다. 배트는 닿지 않으며, 완전히 무너진 헛스윙만 나왔으니까.
“그게 뭐야? 발레 하냐?”
“펜싱 같은데? 이참에 야구 때려치우고 다음 올림픽이나 노려!”
꽤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기에 여기저기서 비아냥 섞인 조롱이 터져 나왔고, 타자는 얼굴은 빨갛게 물들었다.
스스로 쪽팔리기도 할 거고, 또 그걸 굳이 비꼬고 지적하는 우리 팬들이 짜증스러웠던 거겠지.
그 심정이야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걸 타석에서 드러내면 쓰나.
“스트라이크!”
그것도 나처럼 타자의 감정 하나, 행동 하나에 민감한 사람 앞에서 말이야.
흥분한 타자를 놀리듯 이번엔 존 한복판으로 넣자, 아니나 다를까 스윙이 나왔다. 그럴 것 같았지.
그래도 타자는 제법 머리를 굴린 건지, 또다시 서클 체인지업, 정확하게는 V1을 노리고 조금 아래를 스윙했지만.
그대로 곧게 쭉 뻗은 패스트볼이 한복판으로 쑥 들어가면서 배트가 다시금 헛돌았다.
투 스트라이크 노볼.
상대가 시원찮으니, 더 놀리지 말고 승부를 깔끔하게 접어야겠지.
“스트라이크 아웃!”
다시 바깥쪽 코스, 타자는 잠시 갈등하다가, 내가 자신을 가지고 논다는 것을 깨달은 듯, 뒤늦은 인내심을 발휘했지만. 아슬아슬하게 안쪽으로 파고든 커터를 주심이 그대로 잡아줬다.
내가 또 한번 레드삭스 타선에 핵폭격을 떨어뜨렸으니, 이제 다시 상대가 미사일을 꽂아 넣을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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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이크 아웃! 크리스 세일 역시 3회 말에도 기세를 잃지 않으며, 애슬레틱스의 공격을 저지합니다!
-양 팀 선발투수의 장군멍군이네요. 서로 한 타순을 나란히 지워버리면서, 경기의 초반이 순식간에 삭제됐어요.
3회 말, 고유석의 예상처럼 크리스 세일 역시 뒤지지 않고 애슬레틱스 타선을 괴멸시켰고.
또다시 빠르게 끝나버린 이닝에, 고유석의 아메리칸 리그 왕좌를 향한 정복을 꿈꾸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던 해설자와 캐스터는 혀를 내둘렀다.
적어도 경기 초반에 한해서는, 최근 몇 년간의 포스트시즌을 통틀어, 어쩌면 가장 빠른 템포의 경기가 이어지고 있었으니까.
마치 정상급 바둑기사들 간의 속기처럼 순식간에 이어진 공방전은 포스트시즌이라는 무대에 잔뜩 흥분감이 올라온 상황에서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의 속도감을 보였다.
-정상급 투수들에게 7일이라는 휴식이 주어졌을 때, 어떠한 결과가 나오는지가, 여실하게 드러나네요.
-예, 두 투수 모두 다 풀컨디션으로 마운드에 오른 만큼, 막강한 피칭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사실상 2년 연속 사이 영 상과 MVP가 확정된 정점의 에이스.
그리고 부상으로 인한 부족한 누적 이닝과 경기수로 Top3는 힘드나, 그럼에도 5위권은 진입하리라 예측되는 투수.
그런 정점급 투수들에게 주어진 7일이라는 시간은 곧 타자들의 좌절과 직결되었다.
이번 시즌 메이저리그에서 내로라하는 양 팀의 타선이 변변찮은 저항조차 못하면서, 한 타석, 3이닝을 날렸으니까.
-고유석, 4회 초 다시금 마운드에 오릅니다. 이제 한 타순이 진행된 가운데, 여전히 힘을 잃지 않고 있죠?
-예, 지난 3이닝 동안 7개의 탈삼진을 올려내며, 타선을 꽁꽁 틀어막았는데, 과연 두 번째 타순에선 어떻게 될지, 두고 봐야겠습니다.
└갓유석 오늘도 Suck하네.
└3이닝 7탈삼진이니까, 킹갓유석임.
└솔직히 이럴 것 같더라. 고유석 못한 날이 있긴 함? 이젠 당연한 거임.
└고유석 잘하는 거야 당연한 거고, 오늘 세일이 심상치 않은 듯.
사실 엄밀히 따지면, 휴식일수와 상관없이, 고유석의 피칭 자체는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등판한 모든 경기에서 최고 혹은 그에 준하는 활약을 보여줬던 투수이니,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오히려 정말로 그와 대등하게 따라가는 크리스 세일의 호투에 감탄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투 앤 원, 무키 베츠가 집중한 모습인데- 높은 직구에 헛스윙합니다! 삼진아웃!
-고유석 선수, 오늘 처음으로 89.5마일의 최고구속을 찍었어요! 144킬로!
-10월에도 최고구속을 찍다니, 놀랍네요. 체력이 남아나지 않을 시기인데, 위험한 타자이니, 특히나 각별하게 상대하는 것 같습니다.
└ㅅㅅㅅㅅ144키로 입장.
└오늘 안 보여주더니 결국 찍네.
└솔직히 144면 그렇게 똥볼도 아니지 않음?
└메쟈에선 똥볼이지. 근데도 ㅈㄴ 잘 잡아서 대단한 거고.
└구위 진짜 넘사긴 하네. 거의 일직선 아님?
└괜히 90마일 안 나오는 공이 라이징 패스트볼 소리 듣는 게 아님ㅇㅇ
정작 그의 피칭이 시작되면 놀랍도록 빨려 들어갔다. 애초에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4회 초, 타순이 돌면서, 타석에 오른 무키 베츠가 다시금 삼진으로 물러났다.
└무키 베츠. 진짜 ㅈㄴ 잘하는 놈인데, 올해는 고유석한테 약한 듯. 만날 때마다 잘 못 치네.
└안 그런 타자가 없지.
└이쯤 되면 무키 베츠가 아니라, 고유석이 문제임.
이번 시즌, MVP급 성적을 올린 것과 달리, 고유석과 만날 때마다 손쉽게 잡히는 무키 베츠의 모습에.
몇몇 이들은 조금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번 시즌 고유석에게서 변변찮은 성과를 얻어낸 타자조차 거의 없으니, 그렇게 특이하다고 볼 수는 없었으니까.
-아웃! 앤드류 베닌텐디가 4구째 속구를 잘 쳤습니다만, 유격수에게 잡혔습니다.
이어진 타석 역시 마찬가지고. 아니, 오히려 삼진이 아니라는 것이 더 특이한 수준이었지.
-헛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훌리오 대니얼 마르티네즈가 다시금 삼진으로 물러납니다!
곧이어 J.D. 마르티네즈가 또 한 번 삼진을 잡혀주면서, 그마저도 무색해졌지만 말이다.
모두의 예상처럼 두 번째 타순을 맞이했을 때도 고유석은 변함없었다.
아니, 도리어 조금 더 그 기세가 사나워진 모습에 경기를 지켜보던 시청자들은 자신의 응원팀과 상관없이 그저 혀를 내둘렀고.
심지어 레드삭스 팬들마저, 그를 증오스럽게 노려보면서도 찬탄을 금치 못했다.
-스트라이크 아웃!
하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쫓아가는 크리스 세일의 모습에 그나마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말이다.
-아웃! 크리스 세일! 4회 말 역시 손쉽게 잡아냅니다!
곧이어 4회 말 역시 종료되었고, 나란히 이어진 4이닝의 퍼펙트가 유지됐다.
팽팽한 긴장감이 유지되는 상황, 경기를 지켜보던 이들은 문득 가슴이 조여드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줄 위에 서서 널뛰기를 하는 듯한 아찔한 투수전이 마치 서로의 목 위로 겨눈 칼처럼 서늘하게 느껴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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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uuuuuck!”
중계방송을 지켜보던 이들이 서늘함을 느꼈다면, 정작 그라운드에 살얼음판이 드리워진 콜리시엄의 분위기는 오히려 점점 더 달아올랐다.
그 아찔한 상황에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며, 사람들을 흥분으로 몰아넣었으니까.
“아웃!”
경기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시끌벅적했던 분위기는 5회 초, 경기의 중간 지점에 도달하자 절정에 이르렀고.
“스트라이크 아웃!”
“You Suck!”
결국 흥분을 참지 못하고 내지른 환호성 중간중간, 베이스처럼 묵직하게 깔린 주심의 목소리가 분위기를 더욱더 흥겹게 만들었다.
“이대로 20개까지 가자!”
“이제 열 개 남았어!”
“레드삭스 싹 다 죽여버려!”
또 다시 삼진아웃.
스티브 피어스를 잡아내며, 열 번째 삼진이 올라가자, 팬들은 그 두 배를 소리쳤다.
어쩌면 그때처럼 완벽하게 승리를 거두길 바라는 것이기도 했고.
“스트라이크 아웃!”
그 목소리가 마운드에 닿은 건지, 또다시 삼진이 올라가며, 고유석이 그들의 부름에 화답하며 5회 초를 또 한번 삭제시켰지만.
“우우우우!”
곧이어 5회 말, 여전한 야유 속에서 마운드로 오른 크리스 세일 역시 그의 팬들의 염원을 기꺼이 짊어졌다.
“아웃!”
좌익수에게 잡히는 뜬공. 역시나 첫 타자부터 아웃카운트가 올라간 이닝에 홈팬들은 불만과 분노를 토해냈다.
“좀 치라고! 저번 경기처럼 화끈하게 쳐!”
“지난 경기처럼 몰아치지만 말고 이럴 때 한 방을 치란 말이야!”
“Suck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그토록 사랑하는 고유석의 피칭을 상대가 따라오는 것도, 그로 인해 미묘한 균형이 유지되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타자들을 질책하며, 분노를 토해낸 홈팬들이었지만.
“세이프!”
그 채찍질과 같은 호통이 드디어 타자들에게도 닿은 건지, 드디어 그토록 싸늘하게 이어졌던 투수전에 균열이 생겼다.
5번타자 맷 올슨이 좌중간을 가르는 깔끔한 안타로서 출루해내며, 결국 퍼펙트가 깨져버렸으니까.
“Hell Yeah!”
“X발 이제 니가 진짜 맷이다! True 맷이야!”
“X나게 사랑한다!”
“괜찮아! 겨우 안타 하나야!”
“크리스! 제발 끝까지 버텨!”
일순간 흔들린 균형에 애슬레틱스는 기쁨을, 레드삭스의 팬들은 심장이 철렁거리는 듯한 두려움을 느꼈다.
이전의 패배들이 머릿속에서 아른거렸으니까.
끝내 단 한방으로 인해 결국 승부가 마지막까지 이어지지 못한 채 패배했던 것처럼.
어쩌면 이번에도 그렇게 되어버리지는 않을까, 레드삭스는 두려움에 시달렸고.
당연하게도 애슬레틱스 팬들은 이번에도 그렇게 경기가 이어지기를 바랐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마치 순간접착제처럼, 크리스 세일의 피칭이 흔들렸던 균형을 말끔하게 덧붙였다.
크리스 세일이 이번에도 꿋꿋하게 버텨내며, 흔들렸던 경기를 다시 수평으로 맞춰냈으니까.
“Fuuuuuck!”
“야이 쓰레기들아! 마커스! 마크, 이 쓰레기들아!”
“한 점만 내라고 한 점만! 나머진 Suck이 알아서 이겨준다잖아!”
“그렇지! X발 이래야지!”
“크리스! X나게 사랑한다악!”
“이대로 셧아웃 가자! 저 X같은 새끼한테 첫 패배를 안겨주는 거야!”
아슬아슬했던 상황이 끝나는 순간, 열기는 더욱더 올라왔다.
애슬레틱스는 아쉬움에, 레드삭스는 기쁨에 흥분이 올라올 수밖에 없었으니까.
결국 서늘하면서도 뜨거웠던 분위기는 6회까지 이어졌고, 어쩌면 포스트시즌에 걸맞은 소음이 콜리시엄을 가득 채웠지만.
“···”
크리스 세일이 떠난 마운드 위로 다시 원래의 주인이 왔을 때, 그라운드를 가득 채운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다시 마운드 위로 올라온 고유석을 보며, 이미 숱하게 그를 지켜보고, 목도했던 이들이기에 직감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스트라이크!”
이제부터 본격적인 시작이라는 것을.
“스트라이크!”
무위로 돌아간 공격에, 결국 그가 직접 칼을 빼어 들었으니까.
“스트라이크 아웃!”
완전한 절멸을 위해 최후의 스위치를 누른 것처럼. 더욱더 파상적으로 레드삭스를 덮친 혹독한 공세는 절벽을 향해 달려갔던 치킨 게임이 후반부에 도달했음을 알려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