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301화 (300/316)

301화

작년부터 호투를 선보이며, 양키스의 새로운 에이스로 자리매김했던 루이스 세베리노가 와일드카드전에서 등판하면서.

양키스의 디비전 시리즈 1차전 선발투수로 선택된 건 J.A. 햅이었다.

양키스의 10년대를 상징하는 투수인 CC 사바시아는 이미 노쇠한 투수가 되어버렸고.

다나카 마사히로의 경우 작년 급격하게 떨어졌던 폼을 어느 정도 반등하는 것에서는 성공했지만, 여전히 불안점이 존재했으니까.

그렇기에 팬들은 블루제이스에서 트레이드가 된 이후, 11경기 동안 준수한 성적을 올리며, 선발진의 한 축을 담당해줬던 J.A. 햅의 호투를 기대했지만.

대부분의 언론은 1차전에서 양 팀 선발투수의 체급이 심각하게 차이가 난다고 평가했고. 그 지적은 실현됐다.

“세이프!”

1회 말, 애슬레틱스는 첫 공격에서 리드오프인 맷 채프먼이 깔끔한 2루타를 선보이며 출루했다.

그나마 2번타자인 제드 라우리가 아쉬운 외야 플라이로 물러나기는 했지만.

곧이어 빠악-하는 소리, 각각 팀 홈런 1위 그리고 3위를 차지한 두 팀이기에, 팬들에게 더욱더 익숙한 타격음이 터져 나왔다.

“갔다아아아아!”

“크리스티아아아아아아안!”

“젊은 크리스! 역시 네가 최고다!”

젊은 크리스.

크리스 데이비스와의 구분을 위해, 선수들 사이에서 흔히 사용됐던 별명은 이젠 팬들에게도 제법 익숙했다.

그 젊은 크리스가, 저력을 보여주며, 콜리시엄의 담장을 넘기자, 경기장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달아올랐다.

그토록 사랑하는 Go의 호투 직후, 선취 2득점까지 올라가버렸으니까.

팬들의 환호 속에서 유유히 베이스를 도는 옛 동료를 보며, 지안카를로 스탠튼은 살짝 입맛을 다셨다.

‘크리스는 저기 가서 터졌네.’

솔직하게 말하면 조금은 안쓰럽게 생각했었다. 하필이면 마이애미에서 오클랜드라니?

스탠튼 자신이야 뉴욕, 그것도 양키스로 트레이드됐으니, 오히려 더 좋다고 쳐도.

마이애미라는 좋은 도시에서, 오클랜드로, 가장 가난하고, 볼품없는 구장과 내부 시설로 유명한 A‘s로 팔려나간 동료가 안타까웠지.

함께 동고동락하며, 최고의 리드오프, 그 이상의 포텐셜을 가진 녀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더욱더 안타까웠고.

단순히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그 안쓰러운 동료가 오늘의 적으로서 포스트시즌에 올라와버렸다.

32개의 홈런과 3할이 넘는 타율, 1할에 달하는 OPS를 자랑하며, 콜리시엄이라는 타자에게 불리한 구장을 끼고도, MVP급 활약을 펼치면서.

친밀했던 녀석이기에, 기꺼이 박수를 쳐주겠지만, 문제는 저 득점의 값어치였다.

“Fuck···”

누군가 나직하게 내뱉은 말이 초라한 덕아웃에 흘렀다.

그뿐만이 아니라, 덕아웃 안의 모든 타자들이 알고 있었다. 저 2점이 굉장히 크다는 것을.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그나마 크리스 데이비스와 맷 올슨이 아웃당하면서, 그 이상의 추가 실점은 허용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저 2점만으로 경기는 굉장히 기울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지난번의 굴욕적이었던 조우와 비교하더라도, 전혀 손색없는 폼이었으니까. 다시 마운드로 올라온 녀석은.

‘잔뜩 지쳤을 거라더니···’

이번 시즌을 뉴욕 양키스의 기대받는 타자로서, 그리고 조금은 실망스러운 타자로서 보내면서.

뉴욕 특유의 극성맞은 언론에 익숙한 스탠튼은 오늘, 경기 당일까지도 ‘그’ 뉴욕 언론이 주절주절 거렸던 말을 떠올렸다.

뭐? 너덜너덜거려? 어깨가 닳고 닳은 걸레일 거라고? 259이닝을 던졌으니, 의학적인 소견에서 숟가락 들기도 힘들다고?

이제 고작 스물다섯밖에 되지 않은 애송이니, 포스트시즌의 부담감과 양키스의 위엄에 짓눌려 주저앉을 거라더니?

뉴욕의 시민들, 양키스 팬들의 입맛에 맞도록 활자를 끄적였던 기자들을 떠올린 스탠튼은 그들을 강제로 이 자리 위해 올려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놈들도 봐야 했으니까.

“파울.”

주저앉은 놈이 던지는 공을.

기자들의 표현대로면, 너덜너덜한 어깨로 던진 공이 배트에 맞았지만, 부족했던 스윙의 정확도와 공의 묵직한 무게감으로 인해 빗맞은 타구가 나왔다.

3루 쪽, 덕아웃을 강습한 타구에 한 차례 소란이 일어났지만, 그게 그나마 다행이었지.

파워가 부족한 타자였다면 필시 내야플라이였을 테니까. 그나마 스탠튼 자신이라서 파울로 끝난 거고.

“볼.”

“이거 스트라이크 아니에요?”

“볼이야.”

2구는 다시 포심.

이번엔 바깥쪽으로 낮은 코스였지만, 간신히 참았다.

초구 덕분에, 정확성이 떨어지는 스윙으로 공을 맞히면 어림도 없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지.

포수는 살짝 아쉬운 듯 심판에게 투덜거리기도 했지만, 정말로 카운트를 잡으려던 건 아닌지, 곧바로 자세를 잡았다.

“스트라이크!”

곧바로 또다시 몸쪽.

조금 들어오는 코스였기에, 이번에는 배트를 휘둘렀지만, 허공을 갈랐다.

‘어쩔 수 없잖아.’

두 번 연달아서 던진 포심 이후 서클 체인지업. 적어도 우타자에 한해서는 답이 없는 볼배합이다.

눈앞에서 페이드어웨이로 사라지는 공을 쳐내는 건, 타격 기술이 아니라, 마술을 부려야 가능하겠지.

‘들어온다.’

이제 투 앤 원.

보통 투수라면 여기서 한 차례 숨을 고르겠지만, 저 녀석은 절대로 아니다. 무조건 잡으로 들어오지.

가진 무기가 다양하니, 굳이 승부를 피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렇기에 스탠튼 역시 배트를 조금 더 바짝 붙잡았다.

‘가운데···’

역시나 곧바로 들어온 4구.

예상처럼 공격을 감행한 투수였지만, 조금 더 과감했다.

한가운데로 날아왔으니까.

이것 역시 저 투수가 가진 특유의 방식이지. 물론 모든 투수들이 가장 많이 던지는 코스는 스트라이크존 한복판이지만. 그건 컨트롤의 문제이지, 일부러 한가운데를 노리고 던지는 투수는 없다.

그런데 저 녀석은 양쪽 코너를 볼 반 개, 어쩌면 반의 반 개 차이로 조절할 수 있는, 역시나 역대 최고라고 봐도 무방한 기술을 가졌는데도 은근히 자주 사용하지. 그렇기에 머리가 아픈 것이고.

‘포심? 체인지업? 혹시 너클 커브?’

고민이 이어졌지만, 배트는 자연스럽게 쭉 뻗었다. 너무나도 먹음직스러운 코스이기에, 도무지 포기할 수가 없으니까.

‘저 녀석이라면 연이어 체인지업이야.’

그리고 약간은 선택지가 보이기도 했고.

그 누구보다 많은 무기를 가졌음에도, 같은 걸 연이어 던지며 타자를 농락하는 걸 좋아하는 고약한 성격을 가진 투수이기에.

왜인지 이번에도 연달아서 체인지업을 던졌을 것 같았으니까.

다만 직전의 3구와는 달리, 떨어지는 구질일 것이라고 예측하며 스윙한 스탠튼이었지만.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체인지업은 스윙이 지나간 뒤,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서 그 위를 지나쳤다.

‘스트레이트 체인지업.’

저 투수가 가진 서클 체인지업 특유의 역동적인 변화가 없으니, 서클은 아니다.

그 두 가지에 추가로 섞어 쓰며 타자를 더욱더 미치게 만드는 스트레이트 체인지업이겠지. 세 손가락으로만 잡기에 쓰리핑거라고 지칭하기도 하고.

그렇기에 헛웃음이 나왔다.

스치기만 해도 넘어간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텐데, 그걸 과감하게 초구로 던지다니.

막말로 실투나 다름없는 밋밋한 공을 한복판에 꽂은 건데···

‘저게 어딜 봐서 치킨이야?’

일단 새가슴일지도 모른다던 가설은 이거 하나로 논파됐다.

포스트시즌에서 저런 도박수를 던지는 또라이가 새가슴일리는 없으니까.

오히려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소시오패스라면 모를까.

‘타이밍이 꼬였어.’

한 차례 머리를 털은 스탠튼은 억지로 이번 타석을 잊으려고 했지만.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적어도 마운드 위에서는 소시오패스가 분명한 미치광이 살인마의 팀을 향한 난도질 때문인지, 쉽게 잊히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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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 초도 손쉽게 끝났다.

삼진 두 개와 유격수 땅볼로.

팬들 사이에선 종종 내 3이닝 퍼펙트를 상수로 보기도 하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지.

“신경 쓰이는 타자는 없지?”

“없어, 솔직히 타자한테 신경 쓸 여유도 없고. 나 진짜로 손목 부러질 거 같은데, 이거 괜찮나?”

한 타순이 도는 동안, 특별히 떠오른 타자는 없었다.

그나마 애런 저지 정도? 삼진으로 잡히긴 했지만, 그래도 의지가 강렬해 보였지.

그리고 5번타자인 루크 보이트 역시 조금 폼이 좋아 보이긴 했지만, 그렇게 위협적인 수준은 아니지.

브루스도 마찬가지인 듯, 문제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아무래도 얘는 타자를 관찰할 여력이 없는 것 같았다.

손목이 시큰거리는지, 이닝이 끝날 때마다 주물렀다. 슬슬 본인의 손목 상태가 진지하게 걱정되기도 하는 건지, 표정이 안 좋았지만.

“적어도 11월까진 참아, 손목 하나랑 월드시리즈 우승반지를 교환하면 남는 장사잖아?”

“아, 그건 맞는 말이지. 어금니 꽉 깨물고, 어떻게든 버텨볼 게.”

월드시리즈를 거론하니, 순순히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 얼마나 좋아?

고작 손목 하나 날려먹는 대신 우승반지 낄 수 있다고 하면, 기꺼이 제 양 손목을 바칠 포수가 한가득 할 걸?

어쨌든 브루스가 힘겨운 걸 제외하면 별다른 문제는 없었지만, 그래도 방심하긴 이르다.

“양키스도 한방이 좋은 팀이야, 우리처럼. 잘 알지?”

“잘 알죠. 마지막까지 조심해야 한다는 것도.”

홈런 1위답게, 양키스도 한번 터지기 시작하면 대폭발을 일으키기도 하니까.

어떻게 보면 우리랑 비슷하지. 거포 팀들은 죄다 이런가 봐.

그래도 오늘은 우리가 먼저 텨졌고, 양키스는 아직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심판들이 우리의 승리를 선언하고, 경기를 종료시키기 전까지는 긴장감을 늦춰선 안 되겠지.

“아웃!”

이거 봐? 우리도 1회부터 왕창 내더니, 다시 또 가라앉았잖아?

1회 말, 시작부터 2실점을 내주며, 양키스의 기세를 한 꺼풀 더 꺾었던 J.A. 햅은 그 이후에는 어찌어찌 막고 있었다.

2회 말과 3회 말에, 각각 안타 하나씩을 허용했고, 이번 이닝에선 볼넷도 하나 허용했지만, 주자 1,2루에서 이닝을 잘 마무리지으며, 또다시 실점을 허용하지는 않았다.

우리 타자들이 갑자기 또 죽어버린 것처럼, 상대가 확 살아날 수도 있으니, 방심해선 안 되지.

“포스트시즌에서는 더더욱 마지막까지 철저하게 목을 비틀어야지.”

4회 초.

다시 마운드에 오르자, 한층 더 뜨거워진 양키스의 눈동자가 반겨줬다.

아마 중계 카메라 너머, 티비나 인터넷으로 시청하고 있을 양키스 팬들도 저런 눈빛이겠지.

‘날 죽이고 싶을 거야.’

한 달하고 1일 전에는 자기네들한테 400번째 삼진을 올리며, 퍼펙트게임을 했던 놈이.

한 달하고 하루가 지난 지금에 이르러선 포스트시즌에서 자기네들 발목을 잡고 있으니. 증오스럽겠지.

‘오늘이 끝나고 나선, 그런 감정이 더욱더 짙어질 거고.’

한 타순이 돌면서, 다시 돌아온 1번타자 앤드류 맥커친.

이번 시즌에만 자이언츠와 양키스, 두 개의 팀 소속으로 두 번의 퍼펙트를 당하면서. 그는 일종의 트라우마가 생겼다.

1회 초에서도 그런 모습을 떨치지 못했었지.

원래 리더쉽이 뛰어나고, 멘탈이 좋기로 유명한 선수인데, 그만큼 나에 대한 이미지가 충격적으로 남았다는 건데.

웬만하면 그대로 주저앉겠지만, 노련하고 멘탈이 좋은 선수답게, 나에 대한 트라우마를 떨치고, 용기를 내려는 듯.

이번 타석에선 초구부터 아주 과감하게 작정하게 당긴 스윙을 휘둘렀다.

“파울!”

아무래도 코스랑 타이밍만 설정해놓고, 그냥 눈 감고 냅다 게스히팅 한 것 같은데, 놀랍게도 공을 잘 때려냈지만.

몸쪽 포심은 그런 맥커친의 스윙을 씹으며,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갔다.

‘표정이 더 굳었네.’

과감하게 휘두른 스윙마저 막히자, 용기를 냈던 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낸 건지, 맥커친의 표정은 조금 더 절망으로 치달았다.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아웃!”

이후 이어진 승부에선, 왠지 조금 더 둔해진 모습으로, 허우적거리다가 물러났고.

방심해선 안 되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제 맥커친은 확실하게 경계대상에서 제외됐다.

멘탈이 강하고, 노련한 베테랑이기에, 깊게 파인 흔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테니까.

‘이쪽은 확실하게 위험하고.’

그다음 애런 저지는 역시나 위험해 보였다.

최대한 집중력을 끌어올린 건지. 조금 과장해서 표현한다면, 눈동자의 초점이 마운드에서도 또렷하게 보였지. 그 속에는 내가 담겨 있었고.

비록 지난 타석에선 손쉽게 삼진으로 잡아냈지만, 가볍게 봤다간 바로 한방 맞겠어.

“파울!”

“볼.”

“스트라이크!”

“파울!”

내 판단이 정확했음을 증명해주듯, 그는 제법 격하게 스윙했다. 고도의 집중력을 이용해 공을 고르거나, 간신히 커트했지.

“파울!”

‘초조해질 필요는 없지.’

6구째, 바깥쪽 코스까지 배트를 쭉 내밀며 저항하는 타자가 짜증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마음을 차분하게 갖췄다.

“아웃!”

어차피 마지막엔 내가 이길 테니까. 그런 강렬한 확신이 있었기에, 7구까지 이어진 승부에도 흔들리지 않고 잡아냈다.

애런 저지는 낮은 공을 후려쳤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조금 더 안쪽으로 파고든 커터였기에, 임팩트가 확실하게 실리지는 않았다.

좌측 필드 높이 떠오른 타구를 좌익수 크리스티안 옐리치가 기본 포지셔닝에서 네 걸음 정도 더 앞으로 걸어가며 글러브로 잡았고.

“스트라이크 아웃!”

뒤이어 올라온 타자는 그 네 걸음마저도 필요가 없었다.

4구째 하이 패스트볼에 헛스윙하며 애런 힉스가 다시금 삼진으로 물러나면서 4회 초도 종료.

양키스의 목은 순조롭게 비틀리고 있었다.

####

엄밀히 따지면 고유석과 양키스의 상성은 대단히 안 좋은 편에 속했다.

작년과 올해, 정규시즌 동안 두 차례의 맞승부에서, 양키스가 고유석에게 때린 안타는 전무했으니까.

메이저 리그, 아니, 야구라는 종목 전체를 통틀어서 최고의 명문팀으로 손꼽히는 것이 조금은 민망할 정도였지.

“4회 말, 애슬레틱스가 1득점을 더 올리면서, 이닝 종료. 5회 초, Go가 다시금 마운드에 오릅니다.”

“정규시즌의 마지막까지 이어갔던 좋은 기세를 디비전 시리즈에서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어요.”

“예, 오늘 4이닝 9탈삼진을 올리며, 양키스의 타선을 수월하게 저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포스트시즌에서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상황이었기에.

양키스 팬들로서는 절망감을 느꼈지만. 마지막 희망마저 완전히 놓지는 않았다.

[#Yankees]

[이제 5회야. 아직 모른다고!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거야!]

└한번 터지기만 하면 돼. 애런이나 스탠튼, 둘 중 아무나 홈런 하나씩 치면, 바로 1점차라고!

└그래, 커쇼도 원래 포스트시즌에서 경기 초반엔 잘 던지다가 중반부터 트롤링 하잖아? Go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르지!

└Suck 걔 시작부터 너무 신났어, 슬슬 힘 떨어져서 죽을 맛일 걸?

아직 이닝이 더 남아 있었고, 초반에 무리하게 스퍼트를 내다가 한순간 훅 주저앉을 수도 있었으니까.

10월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정규시즌처럼 흐름을 이어가다가, 급격하게 무너지는 투수가 한 둘이 아니었기에.

양키스 팬들은 부디 고유석 역시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4구, 하이 패스트볼에 헛스윙하는 지안카를로 스탠튼! Go, 이번 경기 열 번째 삼진을 잡아냈습니다!”

기대감을 걸었던 스탠튼이 다시금 삼진으로 물러나는 모습을 보이며, 희망은 조금씩 깎여나갔다.

└제발 연봉 값 좀 해라!

└와일드카드전에서 이미 점수 다 냈을 때 8회에 찍 치지 말고, 오늘 같은 날에 쳐야지!

└왜 스탠튼을 데려온 거야! 차라리 저쪽에 있는 옐리치를 데려왔어야지!

가장 값비싼 선수가 번번이 실망감을 안겨주는 상황에 팬들은 분노를 일으켰고.

“3구, 스윙! 우중간으로 날아가는 타구! 하지만- 우익수에게 잡혔습니다!”

“5구, 낮은 공, 디디 그레고리우스가 쳤습니다만, 높이 떠오른 타구를 포수가 직접 처리합니다. 5회 초 역시 삼자범퇴!”

뒤이어 나란히 물러난 타자들로 인해, 순식간에 끝나버린 이닝에 분노로 가득 찬 외침은 점점 한숨으로 변했다.

└글렀네, 그냥 안 되는 거야.

└애초에 우리 전략도 Go 빼고 나머지 경기 다 이기는 거였잖아. 오늘은··· 그냥 넘겨야지.

└X같네, Suck 저 새낀 진짜 이름값 한다니까. 진짜 X나게 Suck이야!

결국 이번에도 최악의 가정이 이루어질 것만 같았으니까. 고유석을 상대했던 모든 경기들이 그랬던 것처럼.

“안타! 미겔 안두하! 양키스의 첫 안타를 드디어 쳐냅니다!”

하지만 6회 초.

미겔 안두하가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렸던 양키스의 첫 번째 안타를 쳐내면서.

포기하려던 팬들의 어깨를 꽈악 붙들었다. 마치 조금만 더 지켜봐 달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렇지! 안두하 네가 있었지! 저지나, 스탠튼이 못 쳐도! 네가 있었어!

└x발 사랑한다! X나게 사랑한다! 마음 같아선 스탠튼 연봉을 너한테 주고 싶을 지경이야!

└난 애초부터 알았어! 니가 데릭 지터에 이어서 새로운 미스터 옥토버가 될 거라는 걸! 넌 X발 무조건 20년 계약이야!

└드디어 힘 떨어졌네! 그래!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작년 애런 저지에 이어, 이번 시즌 가장 사랑받은 유망주의 절절한(?) 구애에 팬들은 다시금 활기를 되찾으며. 한 번만 더 속아보자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한편으로는 이번의 안타를 통해, 부디 빌어먹을 기자놈들, 전문가 놈들이 그토록 이야기했던 것처럼.

Go의 혹사로 인한 체력적인 문제나, 혹시 모를 새가슴 기질이 이제라도 발휘되길 바라기도 했고.

“4구, 헛스윙! 너클 커브로 게리 산체스를 삼진으로 잡아내는 Go!”

“쳤습니다! 하지만- 유격수에게 굴러가면서 2루에서 아웃! 1루에서~~ 아웃! 더플 플레이!”

“Go, 안타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다시금 수월하게 이닝을 마무리 짓습니다!”

하지만 최면은 오래가지 못했다. 유망주의 손짓에 돌아선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건, 앞선 이닝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리드오프 안타가 무색하게도, 삼진과 더블 플레이로서 이닝은 손쉽게 마감됐고.

결국 다시금 짙은 한숨을 뱉은 양키스 팬들은 직감했다.

└이제 끝이네. 더 안 봐도 뻔해. 다음 경기나 준비하자.

양키스의 디비전 시리즈 첫 패배가 코앞으로 다가왔음을.

아니나 다를까, 7회 초, 세 번째 타순이 시작되는 순간, 고유석은 양키스를 향해 체크메이트를 던졌다.

지금을 기다렸다는 듯, 빨라진 투구동작은 그다지 효과적이지도 못했던 앞선 이닝들의 교훈마저 완전히 지워버렸으니까.

####

솔직히 조금은 아쉬웠다.

퍼펙트 가능할 것 같았거든.

양키스도 대단히 집중하면서, 의지를 다지고 있지만, 지금의 폼이라면 충분히 찍어 누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애런 저지랑 루크 보이트를 걱정했더니, 정작 다른 곳에서 터지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불상사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일어났다. 솔직히 미겔 안두하는 별로 폼이 안 좋아 보여서,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는데 말이야.

정작 경계했던 애런 저지는 세 번째 타석에서도 수월하게 잡혀줬고, 루크 보이트도 마찬가지였다.

‘미련을 가지면 안 되겠지.’

양키스를 영혼까지 털어서, 뿌리 채 뽑아버리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지.

이미 맞은 안타를 돌이킬 수는 없는 노릇이니,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뭐, 사실 퍼펙트가 아니라고 해도···

‘이미 충분히 넋은 나갔으니. 이 정도면 충분하지.’

일단 와일드카드의 승리로부터 끌고 온 양키스의 기세는 이제 완전히 박살 났으니까.

7회와 8회 말은 각각 삼진 두 개와 한 개를 얻어내면서, 막을 내렸다. 안타나 출루는 없었고.

설마 하니 자신들이 포스트시즌에서까지 이렇게 털릴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건지, 양키스 선수들의 얼굴에선 당혹감이 흘렀다.

“아웃!”

8회 말이 끝나고, 다시 덕아웃으로 돌아가며, 마지막 공격을 준비할 때도 마찬가지였고.

이제 거기에 화룡점정을 찍을 차례겠지. 다시금 글러브를 끼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동료들은 길을 터줬다.

“···”

스콧 에머슨도 아무 말을 하지 않으면서,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왕의 행차처럼, 그 사이를 지나치자, 한 명씩 내 뒤로 따라붙었다.

덩치가 산만한 사내놈들이 이러고 있으니까, 뭔가 조폭 같은 느낌이네.

‘조폭 맞지, 타자들 협박하고, 삼진 갈취하고, 공으로 폭행하고.’

이 정도면 아주 악질 깡패인데, 기왕이면 그저 그런 양아치보다는, 마지막까지 확실하게 흉악범이 되어보자고.

“스트라이크!”

유일하게 안타를 쳐냈던 미겔 안두하는 9회 초에서도 선두타자로서 등장했다.

지금 양키스 팬들은 그의 이름을 외치고 있겠지. 제발 다시 한번 더 아까 전처럼 쳐달라면서.

그 역시 그런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건지, 어쩌면 안타를 쳤을 때보다도 훨씬 더 집중한 모습을 보였지만.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은 닿지 못했다.

맞히기만 했다면, 전보다 더 크고, 강력한 타구가 나왔을지도 모르지. 힘이 가득 실려 있었으니까.

하지만 낮게 떨어진 서클 체인지업은 두 번의 통타는 허용하지 않았다.

“스트라이크 아웃!”

뒤이어 8번타자 게리 산체스 역시 삼진아웃. 마지막 타자만을 앞두고 심호흡했을 때.

우뚝 선 마운드 위로, 반짝이는 팬들의 눈동자가 별처럼 쏟아졌다.

조명에 가려진 밤하늘의 별빛을 대신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조용히 나를 바라봤지.

그러고 보니 참 조용하네.

퍼펙트는 이미 깨진 지 오래인데도, 다들 왜들 이러시나 몰라. 동료들도 그러더니 말이야.

그런 얼굴들을 잠시 눈에 담다가, 올라온 마지막 타자와 눈을 맞추며, 내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 정도면 마음껏 던진 건가? 내키는 만큼 던지기는 했는데 말이야.’

코치가 허락해줬던 것처럼, 오늘 나는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만큼 마음껏 던졌다고 볼 수 있을까?

‘아니, 아직 한참은 부족하지.’

그럴 리가 있나.

내 욕심이 얼마나 큰데, 겨우 이 정도 던지고 만족하겠어? 간에 기별도 안 왔지.

그렇기에 조금은 아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뻤다.

“스트~~~~라잌 아웃!”

벌써 오늘의 피칭이 끝난다는 것이, 그리고 아직도 남은 피칭이 한참은 더 있다는 것이.

스트라이크 아웃.

9번타자는 내 아쉬움을 달래주듯, 제법 멋스럽게 헛스윙해줬고.

디비전 시리즈의 1차전이 끝났다.

9이닝 17K 1피안타 무사사구 완투완봉.

생애 첫 포스트시즌 경기에 걸맞은, 제법 나쁘진 않은 성적을 기록하면서.

내 체면이 있는데, 아무리 못해도 이 정도는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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