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화
“객관적으로 봤을 때, 푸홀스를 제외하더라도 에인절스 타선은 사실 강한 편은 아닙니다.”
이번 시즌 에인절스의 타선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간신히 4위를 기록한 것이고.
그나마 마이크 트라웃과 오타니 쇼헤이, 그리고 올해 컨택이 좋아진 안드렐톤 시몬스까지.
이 세 타자가 소년가장처럼 침체된 타선을 캐리 해주기는 했지만. 나머지는 그들의 등에 올라타, 사실상 업혀간다고 봐도 무방했다.
“단적으로 4회 말, 이번 이닝의 리드오프이자, 오늘은 1번타자로 나온 콜 칼훈의 경우, 이번 시즌 규정타석을 채운 타자들 중, 최하위권에 불과한 생산력을 자랑하고 있죠.”
그것을 증명하듯, 4회 말, 첫 타자로서 두 번째 타석에 오른 콜 칼훈의 성적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타율 0.205, OPS 0.652로, 과연 이것이 한 팀의 리드오프인지 의심스러운 수준이었으니까.
그나마 파워는 아직 준수해서, 19개의 홈런을 날리기는 했지만. 0.205에 불과한 타율에서 드러나듯.
“스트라이크 아웃! Go! 다시금 삼구삼진을 잡아냅니다! 이번 경기 여섯 번째 삼진!”
“너무 조급하게 휘둘렀어요. 리드오프로서 조금은 침착할 필요가 있을 텐데 말이죠.”
처참한 컨택은 그 준수한 파워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1회에 이어서 다시금 삼구삼진.
이렇게 리드오프의 타격에서 드러나듯, 에인절스의 타선은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었다.
“그리고 Go는 리그에서 최고의 효율을 자랑하는 투수죠.”
“예, 오늘 경기 이전까지 무려 250이닝을 던지며, 엄청난 이닝을 자랑하는 선수입니다만. 총 투구수는 3094구에 불과하니까요.”
“평균적으로 이닝 당 고작 12구 정도밖에 던지지 않는 투수인데, 이 역시 규정이닝을 채운 투수들 중에선 1위입니다. 2위인 코리 클루버 보다도 이닝 당 2구를 더 아끼는 셈이죠.”
그런 에인절스를 상대하는 교유석은 어쩌면 저비용 고효율의 극치라고 할 수 있었다.
엄청난 이닝 수 대비, 저조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투구수만을 던지는 투수였으니까.
“굉장히 놀라운 일입니다만, 사실 Go의 피칭 스타일을 떠올려보면, 당연한 일이죠. 그는 볼넷을 절대로 내주지 않는 투수니까요.”
투구수를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볼넷을 내주지 않는 거니까요.
흔히 맞춰 잡는 피칭이 투구수를 줄인다고 하나,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공 자체를 덜 던지는 것이니까.
특유의 극단적인 공격성과 더불어, 절정에 이른 제구력을 뽐내며, 볼넷을 허용하지 않는 고유석 역시 그런 타입의 투수였고 말이다.
“그리고 그런 피칭이 타자들의 타격 방식도 바꿨죠. 던진 공 대부분이 스트라이크이니, 무조건 휘두르게 된 겁니다.”
그리고 그런 고유석을 대항해, 타자들이 꺼내 든 방식은 마찬가지로 공격적인 타격이었다.
고유석의 공이 스트라이크라는 것은 이젠 메이저리그에선 상식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어차피 가만히 앉아 있어 봤자 루킹 삼진이 될 가능성이 높으니. 설사 헛스윙이 되더라도, 차라리 최대한 힘껏 당기는 어퍼스윙으로 운 좋은 럭키샷이라도 노리는 것이었지.
어찌어찌 뜬공을 치든, 땅볼을 만들든 뭐라도 해야, 최소한이라도 출루의 가능성이 올라가니까.
이번 시즌 성적이 이야기해주듯, 결과적으로 그 방법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어쨌든 객관적인 통계 앞에서 대부분의 팀은 그것을 고수했고, 그건 이번 경기의 에인절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소 부족한 에인절스의 타선, Go의 피칭 스타일, 그리고 어떻게든 공을 맞히려고 노력하는 타격. 이번 경기에서 그 삼박자가 제대로 어우러졌습니다.”
그렇게 에인절스 타선의 참담한 컨택과 고유석이라는 투수의 피칭 스타일, 그리고 그에 대항하는 타자들의 타격법.
그 세 가지가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어, 이번 경기에서 대참사를 일으켰다.
“2구, 쳤습니다! 높이 뜬 공을 유격수 마커스 시미언이 가볍게 잡아냈습니다. 또다시 투아웃! 대단히 효율적인 피칭을 보여주고 있는 Go입니다!”
에인절스로선 절대로 일어나지 않길 기도했던 최악의 참사를 말이다.
또다시 순식간에 잡혀버린 타자, 홈팬들의 눈동자가 조금 더 크게 떨렸다.
마지막 등판까지 이슈를 만드는 고유석을 보며, 중계진은 흥겨운 듯 미소를 지었지만 말이다.
그나마 에인절스에서 그런 절묘한 균형에서 벗어난, 트라웃과 같은 인물도 있었지만.
“4구, 쳤습니다! 쭉쭉 뻗어가는 타구! 죄측담장 앞에서··· 좌익수에게 잡힙니다! 아쉬운 외야플라이! 쓰리아웃 삼자범퇴로서 이닝이 끝마칩니다.”
“10구, 이번 이닝도 대단히 효율적이었습니다.”
그 역시 지금의 흐름이나, 판 자체를 완전히 깨트리고, 고유석을 KO 시키지는 못했다.
워닝트랙 앞에서 잡힌 타구.
작정하게 휘두르며, 큼직한 장타를 날려 보낸 트라웃이었지만, 끝내 크리스티안 옐리치의 글러브에 잡힌 타구를 보며 그저 허탈한 한숨을 내뱉었다.
다시금 순식간에 끝나버린 4회 초. 그나마 10구로, 이번 경기에서 가장 많은 투구수를 이끌어내긴 했지만.
불안감을 완전히 해소시키기에는 여전히 역부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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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회부터는··· 리암과 페팃이 불펜으로 들어갈 거니까. 그렇게 알아둬.”
덕아웃에서 목을 축이고 있으니, 슬그머니 다가온 스콧 에머슨은 그렇게 말하며,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어째 순순히 받아들이는가 싶더니, 이런 걸 준비했던 거냐고 묻는 것 같은 얼굴인데. 괜히 좀 억울하네.
“일부러 의도한 거 아니에요.”
내가 의도한 게 전혀 아닌데 말이야. 나는 진짜로 그냥 딱 80구 던지고 내려갈 생각이었다고.
근데 상대가 냅다 빨리 죽기 대결을 해버리는 걸, 내가 뭘 어떻게 해?
그냥 평소처럼 열심히 던지면서, 어이구 감사합니다, 하고 넙죽넙죽 받아먹는 거지.
하늘이 무너져도 80구라면서 땅땅 못질한 건 코치 본인이잖습니까?
그러게 그냥 평소처럼 이닝으로 끊으시지. 괜히 조금이라도 더 줄여보겠다고 투구수를 걸으시고 그래.
그런 생각을 담아 스콧 에머슨을 쳐다봤지만, 노려보는 눈빛이 워낙 흉흉해서 잽싸게 눈을 내리깔았다.
“아웃!”
“어우, 벌써 등판이네. 시간 참 빠르다 빨라.”
때마침 우리 공격이 끝나면서, 5회 말이 돌아왔기에, 잽싸게 코치를 피해 마운드로 올랐다.
“세이프!”
그리고 얻어맞은 안타 하나.
오타니 쇼헤이가 3구로 던진 서클 체인지업을 가볍게 툭 밀어치면서 출루했다.
오늘 타격감이 좋아 보이더라니, 바로 하나 치는구만.
“업튼! 이번에 하나 더 날려!”
“첫 타석은 안타였으니까, 이번엔 홈런 가자!”
오타니 쇼헤이의 안타에 이어, 오늘 첫 안타의 주인공인 저스틴 업튼이 타석에 오르자, 홈팬들은 기대했다.
마찬가지로 오늘 타격감이 좋아 보이는 타자이니, 이대로 찬스까지 이어가자는 거겠지.
저스틴 업튼 역시 그런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건지, 얼굴이 꽤나 비장했다.
“스트라이크!”
곧바로 찔러 넣은 초구.
바깥쪽 패스트볼에 훅 당긴 스윙이 나왔다. 이건 게스 히팅이네.
몸쪽을 예측한 뒤, 공을 보지도 않고 확실하게 풀히트 했어. 이번 경기에서 내가 투구수를 짧게짧게 쓰기 위해서, 몸쪽 공으로 범타를 잘 유도하고 있으니. 그걸 노리고 큼직한 한방을 날려보려는 것 같군.
초구에 불과했지만, 타자의 노림수가 훤히 보였기에, 아쉽지만 결단을 내렸다.
‘삼진으로 잡아야겠네.’
더욱더 투구수를 아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래도 그거에 집착할 수야 없지.
더욱더 확실한 방법이 눈에 훤히 보이는데, 그쪽을 택하는 수밖에.
“스트라이크!”
2구는 조금 낮게 깔아서 던진 쓰리핑거 체인지업. 초구를 완전히 헛쳤으니, 조금 자중하려던 것 같지만, 일부러 집어넣었다.
유유히 들어간 공이 스트라이크로 판정되면서 투 스트라이크. 타자의 몸이 잔뜩 닳은 것이 느껴졌다.
“볼.”
마음 같아선 바로 삼구삼진으로 잡아서, 투구수를 줄이고 싶었지만,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지.
그래도 오늘 타격감이 좋아 보이는 타자이니, 괜히 안타를 내줄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차라리 한 구를 더 내주더라도, 충분히 한계까지 달아 올려서.
“스트라이크 아웃!”
보다 더 확실하게 잡아내는 것이 오히려 투구수를 아끼는 방법이었다.
이게 중요하지.
괜히 눈앞의 투구수 하나에 좀스럽게 굴다간, 오히려 판이 망가지기 일쑤거든.
존 밖으로 멀찍이 뺀 3구 직후 곧바로 던진 4구.
저스틴 업튼은 그토록 기다리던 몸쪽 코스의 공에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큼직하게 휘둘렀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눈동자가 반짝거리기도 했지만, 유유히 떨어진 서클 체인지업은 배트를 야속하게 지나쳤다.
깔끔하게 삼진아웃.
기대가 깨져버린 상황에 탄식이 흘렀지만, 너무 일렀어. 지금부터 그랬어야지.
‘투구수를 좀 썼으니, 이제 이쪽에서 대신 충당하자고.’
6번타자 안드렐톤 시몬스.
최상급 수비력과 더불어, 작년보다 더욱더 좋아진 타격까지 장착하면서.
지금 1루에 있는 오타니 쇼헤이, 덕아웃의 트라웃과 더불어 에인절스의 빛 중 하나다.
지난 타석에서 병살타를 치면서, 밥상을 엎기는 했지만 말이야. 거기다가 투구수를 줄이기에 딱 제격이지.
컨택을 믿고, 어떻게든 공을 맞추는 것에 집중하는 스타일이거든. 그 덕분에 삼진과 볼넷이 나란히 적은 편인데.
‘파워도 약하지.’
이런 타입이야말로, 내가 천적이다. 나한테 천적이 아니라, 내가 천적이라고. 어떻게든 공을 때린다고 쳐도···
“아웃!”
구위에 찍어 눌리면서, 도무지 타구가 뻗질 않거든.
그래도 계속해서 커트하면서 투구수를 늘렸다면 조금 짜증 났겠지만, 다행히 둥실 떠오르며 홈 플레이트 뒤로 날아간 공을 브루스가 잡아냈다.
초구 만에 아웃.
그래도 투구수는 좀 늘렸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며 안심하던 홈팬들의 눈동자가 더욱더 세차게 흔들렸다.
가장 믿고 있는 선수 중 한 명이 배신해버린 상황에 충격을 받은 것 같기도 하고.
“아웃!”
곧이어, 올해 갓 데뷔한 7번타자 프란시스코 아르시아가 성급한 스윙으로 2구째 커터를 빗맞히면서 아웃.
안타가 무색하게도, 잔루 1루를 남겨둔 채, 이닝은 또다시 10구만에 처리되면서, 그대로 막을 내렸다.
‘어디 보자, 이제 44구인가? 아직도 36구나 남았네.’
이거, 이러다가 다 못 던지고 끝나겠는데?
이제 보니 투구수 제한이 아니라, 투구수 보장이었구만. 내가 잘못 생각했던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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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프!”
“우우우우우우우우우!”
“제발 좀 어떻게 해보라고! 이대로 진짜 질 거야? 117승 내줄 거냐고!”
7회 초, 애슬레틱스가 결국에는 먼저 3득점을 올리며, 경기의 균형을 깨트렸을 때. 타격코치는 여기저기 동분서주했다.
성난 팬들의 아우성처럼, 어떻게든 이 난국을 타파하기 위해서.
“오늘은 변형 패스트볼의 비중이 늘어났어. 최대한 범타를 유도하려는 거니까 어떻게든···”
3회가 끝난 직후부터 그가 타자들에게 요구한 바는 사실 딱 하나였다.
어떻게든 투구수를 늘릴 것. 혹은 최대한 승부를 길게 끌고 갈 것.
그것은 실점이 나고, 리드가 빼앗긴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안타나 홈런, 득점이 아니라, 타격코치는 오직 그것 하나만을 선수들에게 요구했다.
그것만 잘 해내더라도 경기에서 승리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틀린 생각은 아니다.
“쟤만 내려가면 어떻게든 될 것 같기는 한데···”
“진짜로 80구에서 바로 교체할까? 끝까지 던지게 하는 건 아니겠지?”
“포스트시즌이 코앞인데, 설마 그러겠어. 조금 더 초과할 수야 있지만, 그 정도겠지.”
선발투수만 내려간다면, 더욱더 에인절스의 승리 가능성이 올라가는 건 명백한 진실이었으니까.
문제는···
“아웃!”
그게 더럽게 어렵다는 거였다. 6회 말에도 세 타자가 나란히 각각 3구만을 끌어낸 채로 끝났으니까.
“억지로 커트해도, 이상하게 파울이 안 나와. 죄다 안쪽으로 떨어져.”
“휘두르면 아웃이고, 가만히 보고 있으면 루킹 삼진인데, 뭘 어쩌라는 거야?”
“이 새끼들 혹시 공에다가 자석이라도- 아, 여기 우리 홈이지.”
에인절스 타자들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게 귀신이든, 악마든 뭐든 간에,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사악한 기운이 에인절스를 옭아매고 있었지.
‘터놓고 말하면, 그냥 우리가 Go에게 눌린 거야.’
물론 단순히 그렇게 느껴질 뿐, 그냥 에인절스가 털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오늘 경기에서 특별하게 발휘된 것이라곤 그저, 파울이 잘 나오지 않는다는 게 전부였으니까.
나머지 땅볼이나 뜬공은 그저 힘의 차이였다. 공의 묵직한 무게에 배트가 밀리면서, 먹힌 타구가 나온 것일 뿐.
나머진 별다를 건 없었다.
“세이프!”
그나마 그 싸움에서 최대한 이득을 거둘 수 있는 타자들은 그럭저럭 효과를 내기도 했지만. 다른 이들은 그러지 못했고 말이다.
‘일단 하나 날리기는 했는데···’
7회 말, 원아웃에서 올라간 트라웃은 팬들의 염원에 힘입어, 드디어 한방을 쳐냈다.
확실히 체력을 아끼기는 하려는 건지, 오늘은 인터벌을 빠르게 하지 않은 투수 덕분에, 지난 타석들에서 잘 잡은 타이밍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2구째 너클 커브를 정확하게 노려 쳤지.
홈런까지 노렸던 큼직하게 뻗으며 펜스를 때렸고, 아쉽긴 하지만, 그 덕에 2루를 훔쳐내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베이스 위에 선 그는 다시금 환호하는 팬들과 달리 조금은 표정이 미묘했다.
‘투구수를 더 끌어냈어야 했나? 차라리 다행이라는 눈치인데 말이야.’
어쩌면 실점으로 이어질 수 있는 장타를 내줬는데도 투수, Go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싸게 먹혀서 다행이네’라고 말하듯 조금은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지.
그 모습에, 노리고 있던 너클 커브를 그대로 쳐내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투구수를 끌어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이 트라웃을 찝찝하게 만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지. 오늘 오타니의 타격감이 좋으니까. 이쪽이 더 낫지. 간만에 좀 뛰어야겠어.’
승리를 위해선 어찌 됐든 한 점이라도 더 따라붙는 것이 먼저였다.
이전 타석에서 안타를 쳐내기도 했던 오타니인 만큼, 외야 플라이라도 하나 날려주기를 믿으면서, 그는 발목을 풀었지만···
“아웃!”
쭉 당긴 스윙에 커터가 맞으면서 잘 맞은 직선타가 나오기는 했지만.
아슬아슬하게 2루수 제드 라우리에게 걸리면서 내야를 뚫어내지 못했다. 다시금 투아웃.
트라웃은 속 안쪽에서부터 올라온 쓴웃음을 애써 삼켰다. 정말이지 마지막 경기까지 지독한 녀석이었으니까.
80구의 제한이 걸렸다는 말에, 기껏해야 7이닝 정도만 던지고 마운드를 비울 줄 알았더니.
설마 하니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트라웃 그는 물론,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저스틴! 제발! 제발 투구수라도 좀-”
누군가 내지른 간절한 외침이 그라운드에까지 울렸지만, 응답은 없었다.
“아웃!”
그저 심판의 단호한 목소리만이 울렸을 뿐. 또다시 아웃.
트라웃이 쳐낸 2루타가 무색하게도, 역시나 허무하게 끝나버린 이닝에 사람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마치 눈앞에 펼쳐진 그라운드를 더는 보는 것조차 싫다고 말하는 것처럼.
혹시나 했던 악몽이, 이젠 정말로 코앞까지 다가왔으니까.
7회에 소모된 투구수는 아홉.
이제는 스스로 완전히 확신을 가진 건지, 빠른 인터벌로 타자들을 몰아붙인 8회는 그보다 더 적은 7구만에 막을 내리면서.
“X발 미친 새끼.”
“제발 그냥 포스트시즌으로 꺼져어어어어!”
“마지막까지 꼭 이래야 하냐? 이 X같은 놈아!”
70구, 투구수 제한까지 단 10구, 아니, 무려 10구만을 남겨둔 채, 9회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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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기어코 이런 짓을- 수고 많았고, 마지막까지 잘해. 무리하지 말고.”
마지막 마운드로 오를 때, 스콧 에머슨은 조금 흐린 눈동자로 날 배웅했다.
일이 이 지경까지 될 줄은 상상도 못했겠지. 한편으로는 여전히 80구만 채우면 어떻게든 내리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 아니, 오기도 보이고.
이쯤되면 이제 좀 마음을 너그럽게 먹으실 때도 됐는데 말이야. 마지막까지 집착을 놓지 못하시네.
“그치?”
“그치는 뭐가 그치야? 뭔데? 말을 해야 알지, 난 Suck 너처럼 독심술 못해.”
“포수라는 놈이 이렇게 눈치가 없어. 척하면 척하고 알아들어야지, 내가 내기 돈도 따게 해 줬는데.”
“어이구, 그건 언제나 감사합죠. 항상 보답하는 마음으로 살겠습니다요.”
“그리고 나도 독심술은 못해. 그냥 타자를 관찰하는 거지.”
“그럴 리가. 오늘 한 짓거리만 봐도 타자들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는구만. 사람 아닌 거 너무 티나니까, 좀 적딩히 해.”
브루스는 조금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나를 조금 미친놈처럼 봤지만, 그래도 표정이 밝아 보였다.
이번 경기에선 범타를 자주 유도했기에, 평소보다 삼진을 덜 잡았지만, 그래도 일곱 개를 올리면서, 259개를 찍었거든.
가장 근사치를 지목한 사람이 돈을 딴다고 했으니, 260개에 걸었던 브루스와 제드가 이제 확정이지.
그래서 그런지 제드 라우리도 오늘은 아주 발에 땀나도록 뛰어다녀줬다. 그 덕에 잡은 타구가 제법 많지.
아까 전의 오타니가 쳐냈던 라인 드라이브도 펄쩍 뛰어서 잡아줬고 말이야.
그렇다고 해서, 다른 야수들이 탱자탱자 논 건 아니고, 다들 열심히 노력해줬지. 오늘만큼은 나도 인정한다.
고작 3점밖에 내지 못하면서 또다시 기복을 보여주긴 했지만, 그래도 오늘은 뭐라고 못하지.
‘이제 슬슬 끝내볼까?’
그렇게 모두의 노력과 내 알뜰살뜰한 자린고비 끝에, 결국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끝을 봐야겠지.
타순은 때마침 나에게 유리하게끔, 9번타자부터 시작했다.
칼렙 코와트.
스위치히터답게, 이전 타석들에선 좌우를 홈 플레이트 양쪽을 넘나들며 갈팡질팡하더니.
아무래도 너클 커브보단 서클 체인지업이 더 부담스러웠던 건지, 이번엔 좌타석에 들어왔다.
사실 어느 쪽 타석에 서든 간에 별 차이 없는데 말이야.
“스트라이크!”
좌타석에 섰다고 내가 서클을 안 던지는 게 아니고, 우타석이라고 해서 너클 커브를 안 던지는 게 아니니까.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 초구는 서클 체인지업을 던져줬다. 깔끔하게 스트라이크.
“파울!”
2구째 몸쪽으로 바짝 붙인 패스트볼은 제법 잘 맞혔지만, 더욱더 안으로 파고드는 투심의 무브먼트에 공이 배트 손잡이를 치면서 엉뚱한 곳으로 튕기며, 파울이 올라갔다.
이제 투 스트라이크.
그래도 제법 눈에 익기는 한 건지, 배트를 잘 내고 있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You Suck!”
“Hell Yeeeeah!”
바깥쪽으로 낮은 코스.
크로스 파이어처럼 꽂히는 포심 패스트볼에 배트가 헛돌았다. 삼구삼진.
‘딱 260개 채웠네.’
근사치보다는 딱 맞추는 쪽이 더 예쁘긴 하지. 기왕이면 두 개 더 잡아서 이번 경기도 탈삼진 10개를 채우면 더 좋을 거고.
다행히 뒤이어 올라온 1번타자 콜 칼훈은 그에 적합했다. 네 번째 타석인데도 여전히 감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참담한 컨택은 여전히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지.
“아웃!”
하지만 3구째, 바깥쪽으로 걸치듯이 던진 포심을 굳이 건드리면서, 범타로 물러났다. 아쉽지만, 열 개는 못 채우겠네.
그래도 남은 투구수는 넷.
마지막 타자가 올라왔다.
호세 미겔 페르난데스.
대타를 낼 법도 했지만, 어차피 새로운 타자는 나를 상대로 타이밍을 잡지 못한다는 것을 에인절스 역시 알기에.
앞서 콜 칼훈과 마찬가지로 오늘 별로 타격감이 좋지 않았던 호세 미겔 페르난데스가 그대로 올라왔다.
‘별로 좋은 폼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경계는 해야겠지.’
어떻게든 쳐내겠다는 의지로 눈동자가 이글이글거렸고, 네 번째 타석이기도 하기에, 집중력과 경계심을 조금 더 올렸지만.
“스트라이크!”
곧 초구 몸쪽 패스트볼에 배트가 우렁차게 헛돌며 첫 번째 스트라이크가 올라갔고.
“스트라이크!”
2구째 서클 체인지업 V1에 다시금 배트를 휘두르면서 투 스트라이크가 올라갔다.
이쪽도 타이밍은 못 잡았구만. 테이블세터가 쌍으로 고맙단 말이야. 다른 타자들도 마찬가지고.
‘이제 끝내야지.’
그 감사함에 보답하기 위해, 가볍게 숨을 뱉으며, 동시에 왼팔을 휘둘러 마지막 3구를 쏘아 보냈다.
한복판으로 날아든 코스.
스윙을 휘두르는 타자의 얼굴에선 그 어떤 번뇌도 없었다.
그 또한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그저 마지막 염원을 담아 배트를 휘두르며, 어금니를 꽈악 깨물었지만.
배트는 이번에도 헛돌았고, 주심은 정권을 내지르듯 팔을 힘차게 휘두르며 오늘의 마지막 콜을 선언했다.
“스트~~~라잌 아웃! 게임 셋!”
쓰리아웃.
3대0, 메이저리그 단일시즌 팀 최다승 신기록인 117승이 올라가면서, 경기가 종료됐다.
내 2018년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페넌트레이스의 종료이기도 하고.
‘79구 완봉승인가?’
삼진을 많이 잡지 못한 건 아쉽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마지막에 어울리긴 하네.
9라는 숫자가 조금 거슬리기도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80구를 꽉 채우면 너무 정 없잖아?
채우지 못한 한 구는, 33경기 33승 0패. 259이닝 4자책점 461탈삼진과 함께 마운드 위에 남겨뒀다.
‘남은 한 구는 10월에 채워야겠네..’
이제 10월, 포스트시즌으로 떠날 시간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