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화
“스트~~~라잌 아웃!”
오늘 경기의 주심인 빌 웰케는 호쾌한 목소리로 호탕하게 외치면서, 조금 길게 삼진 콜을 토해냈다.
가뜩이나 삼진을 당해서 마음이 심란할 타자로선 아주 신경에 거슬리겠지.
자칫 심판이 중도를 지키지 않고, 괜히 편파적으로 군다면서, 비판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뭐, 지금 당장은 상관없지.
“You Suck!”
여긴 우리 홈이고, 삼진을 잡힌 건 상대팀 트윈스의 타자니까.
적어도 오늘도 콜리시엄을 가득 채운 사람들은 그의 호쾌함에 흥겨워하면 흥겨워했지, 비난하지는 않겠지.
그렇게 1회 초는 KKK로 끝났다. 조 마우어, 호르헤 폴랑코, 제이크 케이브 셋 다 나란히 삼진을 당해줬거든.
트윈스로선 딱히 중요한 경기가 아니고, 이미 포스트시즌은 탈락한 지 오래이기에. 타자들이 별로 의욕적이지는 않았던 것도 있지만, 그보단 그냥 내가 찍어 누른 게 크겠지.
“시작부터 KKK네, 오늘 폼이 좋긴 좋나 봐? 덕분에 푹 잘 쉬었어. 앞으로 쭉 이렇게만 가자.”
“말도 마, 앞으로 글러브를 두 겹은 껴야겠어. 아니면 안쪽에 장갑을 따로 끼거나. 아파서 죽겠네.”
겸사겸사 타자들과 함께 브루스도 같이 때려잡았고.
포지셔닝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고서 편하게 서 있었던 마커스는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듯 씨익 웃었지만.
브루스는 손목이 욱씬거리는 건지, 살짝 주무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 폼이 좋다는 걸 알아차린 순간부터, 오늘은 조금 힘들 날이 될 거라고 이미 예상했겠지만. 그래도 힘든가 보네.
“스트라이크!”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살살 던질 생각은 없지만 말이야. 사실 애초에 살살 던질 수가 없는 날이기도 하고.
몸 안에 힘이 펄떡거리고 있는데, 포수 사정 봐주겠답시고 적당히 던졌다간, 오히려 내 몸에 과부하가 오겠지.
2회 초.
선두타자인 로비 그로스만은 몸쪽으로 날아든 포심 패스트볼에 눈썹을 조금 씰룩거렸다.
묵직하게 날아든 공이 제법 위협적으로 느껴졌던 건지, 살짝 목을 움츠리기도 했고.
‘괜찮아, 안 죽어 이 친구야. 애초에 맞출 일도 없고.’
현재까지 빈볼이 제로인데도 공을 보면 무섭나 봐. 하긴, 내가 봐도 어디 한군데 맞는 순간 뼈는 나무젓가락처럼 부러뜨릴 것 같긴 해.
특별히 폼이 좋은 날의 포심은 지금처럼 그 존재만으로 타자에게 위압감을 주기도 한다.
이젠 89마일짜리 똥볼이라고 폄하하는 사람도 없을 지경이면 말 다한 거지.
“스트라이크!”
저렇게 한번 쫄고 나면, 곧바로 그다음 공에 대한 대처가 늦어진다. 대충 아무거나 골라잡고 던져도 스트라이크지.
다시금 몸쪽으로 날아든 포심을 멀뚱멀뚱 쳐다보면서 투 스트라이크.
“파울”
“아웃!”
곧이어 3구 역시 다시금 몸쪽으로 날아들자, 타자는 그제야 황급히 배트를 냈지만, 포심의 구위에 밀려 파울로 그쳤고.
다시금 몸쪽으로 날아든 공에, 이번에는 확실하게 용기가 생긴 건지, 보다 더 날쌘 스윙이 나왔지만, 살짝 삐끗하면서 빗맞은 타구가 나왔다.
그래도 대단하네, 헛스윙을 유도하려고 했더니, 끄트머리에나마 서클 체인지업을 맞춘 걸 보면.
‘스위치히터였지? 그럼 다음 타석은 좌타로 나오려나?’
나를 상대하는 스위치히터들은 한 가지 특징이 있다.
바로 두 번째 타석에선 첫 타석의 반대편에 오른다는 것이지. 좌타는 우타로, 우타는 좌타로. 반대쪽 타석으로 도망치는 거지.
눈치로 봐선, 로비 그로스만은 꽤나 충격을 받은 것 같으니, 다음 타석은 좌타석으로 입장할 것 같았다.
그리고 깨닫겠지.
“스트라이크 아웃!”
낙원은 없다는 걸.
만약에 그가 두 번째 타석에서 좌타자로 나오면, 그땐 너클 커브로 조져야지.
‘오늘 너클 커브가 좀 잘 붙네.’
지금 삼진을 당한 맥스 케플러처럼 말이야. 짝 달라붙은 너클 커브가 기괴한 궤적을 그리자, 배트가 홀린 듯이 헛돌았다.
처음 배웠을 때부터 손에 착 감겼던 구종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위력이 올라오고 있단 말이지.
내가 가진 것들 중 가장 늦게 터득한 구종이니, 그만큼 발전의 여지가 많기는 했지만.
발전 속도가 워낙 빠르기에, 이러다가 언젠가는 서클을 밀어내고, 이 녀석이 내 트레이드 마크가 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스트라이크 아웃!”
그러자 서클 체인지업은 마치 아직은 멀었다고 이야기하듯, 곧바로 6번타자, 타일러 오스틴을 삼진으로 잡아줬다.
시야의 사각지대로 사라지는 페이드어웨이에 타자는 스윙을 완전히 내지조차 못한 채 그대로 얼어붙었지.
그래, 아직은 니가 베스트 파트너다. 앞으로도 수고하자.
“유우우우우 써어어억!”
“KKK! KKK!”
“이대로 20개까지 가버려!”
“이참에 오늘 4위까지 찍자!”
그것으로 다시금 KK.
연이어 삼진이 올라가며, 이닝이 끝나자, 환호성은 더욱더 커졌다.
400K 경기 이후로 방수포가 계속 걷히면서, 빈틈 하나 없이 꽉꽉 차오른 경기장 전체가 웅장하게 흔들리기도 했고.
그런 관중석의 너머로, 경기의 시작과 함께했던 노을이 이젠 거의 다 저물어 가고 있었지만.
그 반대로 마치 달이 떠오르듯, 내 몸 안의 힘은 점점 더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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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쟨 포스트시즌은 안중에도 없나?”
3회 초, 역시나 선두타자로서 삼진을 당하고 돌아온 7번타자 에이레 아드리안자는 덕아웃으로 들어오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화가 났다거나, 짜증이 솟구쳤다거나, 아니면 두려워서 내뱉은 말은 아니었다. 그저 순수한 의문에서 비롯됐지.
Go는 곧 포스트시즌을 앞둔 투수라기에는, 조금 과할 정도로 강력했으니까.
마치 포스트시즌은 안중에도 없고, 오늘 모든 일을 끝마치겠다는 것처럼.
“스트라이크 아웃!”
사실 아드리안자만 그런 의문을 품은 건 아니었다.
미친놈처럼 광기를 휘날리며, 자신들을 때려잡는 Go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품은 선수들이 많았으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 동료들의 말에 조 마우어는 피식 웃었다. 얼핏 타당하게 들리기도 했으니까.
오직 눈앞의 경기에만 집중하는 선수들은 제법 많지. 뒤탈은 생각 안 하고 일단 머리부터 박고 보는 녀석들.
어쩌면 저토록 위대한 투수도 그럴지도 모른다. 그저 한 경기, 한 경기에만 집중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거지.
보통 그런 선수들은 체력적인 문제를 보이거나, 과도한 신체적 부담을 못 이겨 드러눕지만.
‘저 녀석은 아니겠지.’
하필이면 그런 타입의 녀석이 역대 최고라고 봐도 무방한 실력을 갖췄다는 것이 비극이라면 비극이겠지.
도무지 지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경이로운 체력도 그런 비극 중 하나이고.
“세이프!”
그래도 오늘이 퍼펙트를 당하는 날은 아니었던 건지, 놀랍게도 9번타자, 그레고리오 페팃이 안타를 쳐냈다. 그것도 제법 잘 맞은 라인드라이브를.
그가 08년에 데뷔한 이래로, 오늘까지 메이저리그에서 190경기를 뛴. AAAA급 리거라는 걸 감안하면 조금은 기적적인 일이었다.
“우우우우우우!”
“이 X같은 쓰레기가, 왜 발목을 잡고 지랄이야!”
“10월에 야구도 못하는 새끼들은 얌전히 처 발리기나 하라고!”
선수만큼이나 욕심 만은 팬들은, 설마 하니 홈에서 다시금 퍼펙트게임을 달성하길 바라기라도 한 건지.
성난 목소리로 타자를 타박했지만, 투수는 그저 덤덤하게 그다음 타자를 기다렸다.
“많이 힘든가 봐?”
“···”
“조심해서 받아, 손목으로만 받다간, 나중에 수술 한 번 받아야 할 테니까”
그런 투수를 잠시 바라보며, 홈 플레이트로 입성한 조 마우어는 문득 입을 꾹 다물고서 공을 받고 있는 상대 포수를 쳐다봤다.
비록 퍼펙트는 조금 이르게 깨졌지만, 오늘 폼이 예사롭지 않은 Go이고, 특히나 포심의 무게감이 무쇠처럼 무거웠기에.
그걸 내내 받아내면서, 아직 3회인데도 제법 데미지가 쌓인 것 같았다.
종종 트래쉬 토크로 정신을 헤집으며, 투수에게 기대어 여우처럼 군다는 비난도 받는 녀석인데, 오늘은 내내 조용한 것을 보면.
“스트라이크!”
초구부터 서클 체인지업이 날아들었다. 바깥쪽에서부터 파고드는 코스에 차마 배트를 내지 못했지.
“파울!”
2구는 다시 포심 패스트볼.
몸쪽으로 쭉 날아온 공을 쳤지만, 묵직한 손맛이 찌릿하게 타고 올라오며, 거세게 팔꿈치를 찔렀다.
‘이러니 고작 3회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포수가 힘들 수밖에.’
이런 걸 경기 내내 받다 보면, 몸이 남아나지 않으니까.
어쩌면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포구를 제외한 나머지를 포기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고.
“볼.”
3구는 볼.
살짝 바깥쪽으로 나간 공을 간신히 골라냈지만, 잘하면 스트라이크가 될 수도 있었다.
만약 절묘한 프레이밍이 있었다면, 그대로 루킹 삼진으로 둔갑됐을지도 모르지.
‘종종 프레이밍을 하는 걸로 아는데, 오늘은 그럴 여유도 없나 보군.’
다행히 포수에겐 그럴 만한 여력이 없었던 건지, 그저 정직하게 포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 덕에 삼진을 면했고.
잠시 타석에서 물러나, 힘겨워 보이는 포수를 흘끔 확인한 조 마우어의 머릿속에 문득 멸칭에 가까운 별명이 떠올랐다.
‘트로피 와이프였던가?’
몇몇 선수들, 그리고 언론에서 저 브루스 맥스웰이란 녀석을 그렇게 표현하기도 했지. Go라는 이름의 위대한 억만장자에게 빌붙은 트로피 와이프라면서.
Go는 스스로 볼배합을 가져가고, 타자를 요리하는 것으로도 굉장히 유명하기에. 그저 공을 받을 뿐인 브루스 맥스웰은 그의 영광에 슬그머니 무임승차한 트로피 와이프에 불과하다고 말이야.
‘그럴지도 모르지.’
최고의 포수였던 조 마무어는 그것이 조금은 과한 비하라고 생각하는 한편으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트로피 와이프, 그 비하적인 표현이 어쩌면 아주 정확한 평가일지도 모르지.
단순히 지금 눈앞에 있는 포수만이 아니라, 앞으로 저 녀석과 함께할 모든 포수들에게 적합한 말일 테니까.
포수로서의 능력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당연한 일이지.
“스트라이크 아웃!”
이런 공을 던져대는데, 포수로선 솔직히 그냥 투수에게 기대어, 모든 것을 맡겨버리는 편이 더 쉬울 테니까.
4구째, 몸쪽으로 높이 날아든 공에 하이 패스트볼과 존을 파고드는 너클 커브 중, 고민하다, 결국 너클 커브를 선택한 조 마우어였지만. 공은 횡 무브먼트를 보이면서도 딱히 떨어지지는 않았다.
‘슬라이더였군.’
더럽게 많은 선택지는 이번에도 정답을 허용하지 않았다.
“You Suck!”
익숙한 구호를 외치는 홈관중을 뒤로한 채, 살짝 입술을 씹으며 덕아웃으로 걸어가던 조 마우어는 문득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월드시리즈, 우승하겠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그처럼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투수.
그를 보니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애슬레틱스가, 아니, Go. 저 녀석이 결국 월드시리즈의 왕좌에 오를 것 같다고.
언론에선 여러 가지 이유를 가져다 대며, 어떻게든 폄하했지만, 직접 상대한 입장에선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지.
‘트로피 와이프라···.’
그저 고까운 마음에서 비롯된 멸칭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에 묻어서라도, 그저 공만 받으면서도 그 영광에 함께할 수 있는 포수는 참으로 행복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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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퍼펙트의 날은 아니었던 것 같다. 폼이 예사롭지 않아서, 혹시나 했는데. 생각보다 이르게 안타를 맞았네.
아무리 나 때문에 퍼펙트의 가치가 역사상 유래 없을 정도로 바닥에 떨어졌다고 해도, 역시, 고작 18일 만에 다시 할 리는 없지.
‘쉽게 봤더니, 타이밍이 잘 맞던데, 조심해야겠어.’
그레고리오 페팃.
AAAA급 리거이고, 타격도 그리 인상적이지는 않아서, 조금은 쉽게 보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나랑 박자가 잘 맞는 것 같다. 오늘처럼 폼이 좋은 날에 제대로 정타를 날린 걸 보면.
다음 타석에선 조금 더 주의하면서 상대해야겠어.
‘기왕이면 홈에서 뭐라도 하나 더 하고 싶었는데 말이야.’
느낌이 좋았기에, 정규시즌 마지막 원정을 떠나기 전, 홈팬들에게 뭐라도 쥐어주고 싶었는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퍼펙트는 일찌감치 조기 종료됐고, 당연히 노히터도 날아갔으니까.
그래도 기분 좋은 느낌은 여전하고. 몸의 힘은 여전히 펄떡거리니, 그저 최선을 다할 수밖에.
“스트라이크 아웃!”
경기가 중반에 접어들면서 노을도 이제는 완전히 자취를 감췄지만, 난 여전했다.
4회 초 역시 삼진으로 이닝이 시작됐지. 2번타자 호르헤 폴란코는 다시금 루킹삼진을 당하며, 삼진을 잡혀줬고.
타이밍을 잘 노려 쳤던 그레고리오 페팃과 달리. 트윈스의 다른 타자들에게선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는구만. 다행이야.
뒤이어 올라온 3번타자 제이크 케이브는, 올해 갓 데뷔한 백업 외야수로, 괜찮은 컨택을 갖췄지만, 나머진 평범하다.
다만 전체적으로 무난한 타격과 달리, 얼굴에선 의욕이 가득 차 있었다.
어차피 별로 중요치 않은 경기라서, 부담감도 없으니, 럭키샷 하나만 노리고 시원스럽게 휘두를 작정인 것 같은데.
“아웃!”
시원스럽게 휘두르긴 했다.
그 대신 그나마 괜찮은 컨택마저 힘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완전히 정확성을 잃었지만.
몸쪽으로 가깝게 파고든 커터가 배트와 빗맞으면서 맥없는 타격음을 내며, 높이 떠올랐다.
홈 플레이트 높이 뜬, 플라이볼을 브루스가 가볍게 받아내면서 아웃.
타자 제이크 케이브는 빗맞으면서 고스란히 받은 충격에 의한 통증을 덜어내려는 건지, 손을 쥐락펴락 거리면서, 아쉬운 듯 나를 흘끔 보며 다음 타자와 바통을 터치했다.
‘어디 보자, 역시! 그럼 그렇지.’
이제 다시 마지막 4번타자, 로비 그로스만. 그는 경계심 가득한 눈동자로 비척비척 홈 플레이트로 들어섰다.
지난 타석에선 우타석에 올랐지만, 이번엔 아니나 다를까, 몇 걸음 더 걸어서 좌타석으로 들어갔지.
예상했던 결과가 정확하게 들어맞으니, 괜히 기분이 좋았지만, 여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깔끔하게 잡아내야 완벽하겠지.
“스트라이크!”
몸쪽으로 날아든 포심 패스트볼에 타자는 첫 타석과 다를 바 없이 몸을 움찔거렸다.
어쩌면 조금 더 놀랐을지도 모르고. 포심이 우타석에서보다 더 빠르고, 더 날카롭게 느껴졌을 테니까.
그래서인지 초구를 지켜본 타자의 얼굴에는 낭패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생각한 것과 달라도 너무 달랐겠지.
‘벌써부터 그러면 쓰나.’
지금이라도 다시 우타석으로 돌아가고 싶겠지만, 한번 정한 이상 결말을 보기 전까지는 선택지를 바꿀 수 없다.
“스트라이크!”
2구째. 다시금 날아든 공. 바깥에서 쭉 빨려 드는 궤적에 로비 그로스만의 얼굴에 씌워진 암울한 표정이 더욱더 짙어졌다. 살짝 눈을 껌뻑거리기도 했고.
좌타석에 들어왔으니, 이젠 서클 체인지업에서 해방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그럴 리가 있나.
내가 얼마나 많은 좌타자들을 서클 체인지업으로 잡았는데. 떨어지는 V1이든, 지금처럼 꺾이면서 파고드는 V2든 간에 말이야.
‘투 스트라이크, 충분히 잘 배운 것 같으니, 길게 끌지 말고, 바로 잡아야겠어.’
지금 당장이 힘겹다고 하여, 섣부른 선택을 내렸다간, 재앙이 닥친다는 걸 깨달았을 테니. 이제 끝을 봐야지.
다시금 몸쪽으로 쏘아진 공.
너클 커브에 대한 주의를 단단히 들었던 건지, 타자는 어느 정도 궤적을 그리며 배트를 휘둘렀다.
다만 스스로도 확신은 없었기에, 적당히 커트 정도만 하려는 듯, 가볍게 휘두르며, ‘이 정도면 되겠거니’하고 생각했겠지만···
‘글쎄, 좀 더 크게 휘둘러야 할 텐데 말이야.’
그 정도는 한참 모자라지.
서서히 가파르게 꺾이는 궤적에, 타자는 그제야 본인의 생각보다 너클 커브가 훨씬 더 심각하게 꺾인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그땐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가볍게 휘두른 만큼, 마치 중간에 급브레이크가 걸리며, 배트가 우뚝 멈췄으나, 이미 한참은 허리가 돌았기에, 결과는 하나뿐이었다.
삼진아웃.
타석의 위치와 상관없이, 어디서든 혹독하다는 걸 깨달은 로비 그로스만은 고개를 푹 숙이더니, 이내 전광판을 보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You Suck!”
“와아아아아아아아!”
“Hell Yeah!”
그를 조롱하는 유썩과 함께 당연하게도 환호성이 울렸지만, 뭔가 좀 더 우렁차네. KKK도 아닌데 말이야.
이상한 반응에 뭔가 싶어서 전광판을 돌아본 순간, 그제야 깨달았다.
“뭐야, 나 벌써 열 개나 잡았어?”
“몰랐어? 미친 듯이 삼진 쓸어 담는 거 보고, 일부러 노린 줄 알았는데.”
음, 이러니 팬들이 환호하지.
타자도 좌절할 수밖에 없고.
442K, 단독 5위 등극으로 박제가 되어버렸으니 말이야.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조금은 신기한 듯 전광판을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여기서 4위까지 찍고 갈까?’
4이닝 10K.
4위가 451K니, 단독 4위까지 남은 삼진도 마침 딱 10개네.
3위는 483개라 어차피 불가능하니까, 4위가 마지노선인데, 개수는 더 늘린다 쳐도, 달성하는 것 자체는 홈에서 해야 더 좋긴 하겠지.
오늘은 완투를 허락받았으니, 9회까지 남은 5이닝 동안, 대충 지금까지 잡은 만큼만 더 잡으면 된다는 건데···
‘할만한데?’
생각보다 쉽네. 충분히 할만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