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죽음을 받아들이는 5단계라고 하던가? 사망 선고를 받았을 때, 사람들이 흔하게 보이는 반응 말이야.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도 부정, 분노, 협상, 슬픔, 수긍 혹은 인정. 이 순서일 거다. 맞나?
아무튼 내가 아는 것이 맞다면, 오늘 레이스 팬들도 딱 그 단계를 거쳤다.
“아니야! 아직, 아직 몰라! 아직 1점이잖아! 홈런 하나면 동점이라고!”
아직은 모른다면서 부정하고.
“야이 개X같은 놈아! 30승이나 했으면 좀 살살하라고! 아직도 부족하냐!”
“X발 포스트시즌에서 그랜드슬램이나 처맞아라, 이 개X같은 새끼야!”
그러다가 결국 뚜껑이 열려서 나한테 분노하고. 사실 이쪽이 제일 크다. 제일 길기도 했고.
“X발 너넨 이미 포스트시즌 확정이잖아! 적당히 해! 그냥··· 제발 이기게만 해줘··· 너한테 점수 낼 생각은 안 할 테니까···”
“적당히 던지고 내려가··· 패전은 바라지도 않을 테니까, 제발 빨리 내려가줘.”
어쨌든 그다음엔 나와 협상하듯, 나를 설득하기도 했다.
거의 애원하고 있었지.
“그래··· X발 우린 글렀어. 우리가 포스트시즌은 무슨···”
“저 미친 새끼를 이기겠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바보짓이었어··· 남은 경기나 잘해봐야지···.”
그러다가 결국 수긍했다.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깔끔하게 인정한 뒤, 지금 레이스의 처지를 수긍하고, 받아들였지.
대체 뭘 수긍한 거냐고?
‘뭐겠어, 레이스의 가을야구의 사망 진단이지.’
물론 오늘 경기에서 진다고 하여, 완전히 가능성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내가 알기로 매리너스와 세 경기인가, 그럴 테니. 아직은 모르지. 경기가 한참 남았으니까.
‘그래도 더 가능성이 떨어진 건 사실이지만 말이야.’
왠지 다른 이의 꿈을 꺾어버린 것 같아 좀 미안하구만.
“스트라이크 아웃!”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살살하거나, 봐줄 생각은 없고. 그냥 미안하다고. 아무리 미안하더라도, 할 일은 해야지.
6회 말 투아웃.
이닝 마지막 타자로서 세 번째 타석에 올라온 말렉스 스미스를 다시금 삼진으로 잡았다.
빠른 인터벌과 대비되는 느릿한 쓰리핑거 체인지업에 이번에도 헛스윙을 보여줬지.
현재 레이스에서 가장 핵심적인 타자이고, 모든 공격의 물꼬를 트는 리드오프지만. 오늘은 삼진 세 개로 해트트릭이군.
‘넋이 나갔네, 너무 심하게 했나? 나쁜 녀석은 아닌 것 같은데.’
결국 정신이 붕괴되어버린 건지,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말렉스 스미스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인형처럼 실에 매달리듯 질질 발을 땅바닥에 끌면서 자리로 돌아갔지.
멘탈이 터진 것 같은데, 오늘 타격감이 나빴던 건 아니고, 그냥 내가 작정하고 잡아서 그렇다. 제일 쎈 놈이니까, 제일 강하게 던져야지.
“이제 삼진 몇 개냐? 오늘 몇 개나 잡았어?”
그걸 잠시 눈에 담다가, 나도 다시 덕아웃으로 돌아갔을 때, 브루스는 슬쩍 속삭이듯 물었다.
쯧쯧, 이 미천한 녀석 같으니.
그런 것에 집착하다간 괜히 모든 것을 망치는 법이거늘.
이래서 하찮은 포수는 안 돼.
“그런 거 일일이 세면 안 돼. 괜히 집착하거든.”
“그래서 몇 개야?”
“열 개. 쟤가 딱 열 번째야.”
하지만 내 노력으로 얻어낸 정당한 결과이니, 그런 관점에서 보면 기억할 가치는 있지.
오늘은 최근 다른 경기들과 비교하면 좀 덜 잡았다. 이제 딱 열 개거든.
오리올스전에서 17개, 양키스전에서 19개를 잡은 걸 감안하면 확 줄어든 셈이지.
물론 오늘 내 폼이 나쁜 건 아니고, 반대로 레이스의 기세가 좋고, 필사적인 탓에, 범타가 자주 나왔다.
“집착하면 안 된다면서? 어쨌든 진짜 점점 올라가네. 4위가 451개 맞지? 4위 이상은 힘들겠지만. 그래도 460개는 충분히 찍겠네.”
“모르지, 아직까지는. 이러다가 또 얻어터질 수도 있으니까.”
“그럴 리가. 올해 니가 한 짓을 되돌아보고 생각해 봐. 정말로 그런 일이 정말로 일어날 것 같은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라고.”
은근하게 묻는 브루스의 말에 나는 가볍게 역레발으로 대신했다. 괜히 설레발쳤다가 못하면 쪽팔리잖아.
그런 내 겸손에 브루스는 코웃음만 쳤지만 말이다.
“뭐, 어쨌든 최대한 잡아 봐야지. 몇 개까지 할 수 있을지 궁금하긴 하니까.”
“무조건 460개까진 찍어야 돼. 난 그쪽으로 걸었거든. 우리가 그저그런 사이도 아니고, 영혼의 파트너인데, 기왕이면 내가 따게 해줘.”
“내기했냐?”
그나저나, 왜 갑자기 내 삼진에 이토록 지대한 관심을 가지는가 싶더니.
아무래도 내기했나 보구만.
그러고 보면, 다른 야수 놈들도 은근히 우리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몰랐어? 너 빼고 다 하는 중인데. 네가 삼진 몇 개까지 잡을 지를 놓고. 마커스랑 채프먼, 채드는 455개에 걸었고, 나머진 450이야. 460은 나랑 제드뿐이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포수인 니가 내기에 끼는 건, 거의 사기도박 아니냐? 어뷰징이잖아.”
포수라는 놈이, 하늘 같은 투수님 기록 가지고 내기나 해대고, 팀 참 잘 돌아가네.
그래도 우리 팀에서 가장 늙은 제드와 포수인 브루스가 그나마 날 제일 잘 아는 것 같았다. 둘이서만 460삼진에 걸은 걸 보면.
제드는 늙은 만큼 노련한 거고, 브루스는 인정하긴 싫지만, 그 말처럼 파트너라서 나를 잘 알았던 거겠지.
‘455? 450?’
나머지는 대충 상식적인 한도 내에서 안전빵으로 걸은 것 같은데···
‘고작?’
나랑 같이 그렇게 많은 경기를 뛰어놓고, 날 너무 모르는구만.
“스트라이크 아웃!”
7회 말, 트로피카나 필드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여섯 번째 단계에 도달했다.
5단계라고 했으면서 무슨 여섯 번째냐고? 야구에 한해서 숨겨진 히든 단계가 있다.
“아웃!”
앞서 언급한 다섯 단계를 모두 거쳤을 때 찾아오는 단계지.
“스트라이크 아웃!”
바로 침묵.
죄다 앞에 다섯 단계 거치고, 마지막에는 이렇게 되더라고.
2단계인 분노에서 정점을 찍은 뒤, 서서히 잦아들다가, 결국 완벽한 적막이 완성되거든.
레인저스도 그렇잖아? 처음에는 신나게 날 욕하다가, 결국 글로브 라이프 파크가 조용~해지는 것 말이야.
증오스럽게 노려보는 눈동자는 똑같지만, 입은 꾹 다물지. 오늘도 마찬가지구만.
“교체, 교체됐다!”
“X발 혹시나 9회까지 나오나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이제부터 시작이야! 2점만 내면 된다고!”
그래도 내가 다시 덕아웃으로 돌아가서 아이싱을 하니, 다시금 희망을 품고 미소 지었지만.
“아웃!”
딱히 반전은 없었다.
오히려 우리가 8회 초에 1점을 더 추가했을 뿐, 레이스가 다시 일어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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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클랜드 애슬레틱스 2:0 탬파베이 레이스 – 승리투수 : Go You-Suck(7이닝 무실점 12K 1피안타 무사사구)>
<고유석 69.2이닝 연속 무실점, 정규시즌의 마지막에서 본인이 세운 1위 기록(76.2이닝)을 다시금 넘어서나?>
└또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네.
└고유석 ㅈㄴ웃긴게, 잊을 만하면 무실점 이어가고 있음ㅋㅋㅋㅋ
└이제 두 경기쯤 남았으니까, 둘 다 무실점이면 쌉가능아님?
└당장 다음 등판에서도 오늘처럼 하면 바로 신기록임ㅇㅇ
<애슬레틱스, 통한의 루징 시리즈! 몰락의 징조? 허나 110승 40패로, 역대 메이저리그 공동 5위 등극!>
└이제 오클랜드 12경기 남지 않았나? 절반만 이겨도 공동 1위네.
└승률 1위는 힘들지?
└다 이겨도 불가능하지. 1906년 컵스가 116승 36패라서 0.763인데, 경기수가 적어서···
└진짜 역대급 시즌이긴 한데, 솔직히 Suck 빼면 그렇게 압도적인 느낌은 없네.
└그니까, 그 Suck을 왜 빼냐고. 버젓이 잘 던지고 있는데.
└차라리 당당하게 말해. Pussy들아. 포스트시즌에서 Suck 빼고 붙자고. X신처럼 말 돌리지 말고.
└그래, 당당하게 말할 게. 나 레드삭스 팬인데, 챔피언쉽에서 만나면 Suck 빼고 붙자.
└X신이냐? 우리가 바보도 아니고 Suck을 왜 빼?
<탬파베이 레이스, 2점차 아쉬운 패배에 눈물! 허나 여전히 살아 있는 가을야구의 불씨!>
└A’s X발새끼들··· 지들은 이미 지구우승 확정이면, 좀 대주지. 기어코 1승을 챙기네. Suck 이 X발놈 좀 쉬게 하라고! 니들 포스트시즌 대비 안 하냐?
└Suck 이 X새끼는 진짜··· 아니, 인간적으로 240이닝쯤 던졌으면, 지쳐야 정상 아니야?
└그래도 위닝 시리즈가 어디야··· 아직 경기 남았으니까, 일단은 지켜봐야지.
└솔직히 와일드카드로 올라간다고 쳐도, 난 자신 없어. 쟤랑 다시 만나야 하잖아.
<코리안 더비, 이번 승자도 ‘역시나’ 고유석! 고유석은 한국인에게 유독 강하다?>
└고유석 혐한이네. 아시안게임도 거르고 안 나오더니, 애국심이 없네ㅉㅉ 검머외 다된 거 보면 곧 귀화도 할 듯.
└나 아메리칸이다. 오클랜드 사람, 환영한다. Suck 아메리카 시민권 취득. 언제나 열려있다. 아메리카의 문은. 재능 있는 사람들에게.
└애국심 ㅇㅈㄹㅋㅋ 프로스포츠에서 애국심 타령하네.
└오히려 상대전적으로 치면, 한국인들이 그나마 낫지 않음?
└고유석한테 상대전적 죄다 삼진인 선수도 허다한데, 이 정도면 양반이지.
└작년에 홈에서 마지막 등판했을 때, 진짜 아쉬웠는데, 올해는 포스트시즌이 남아 있어서 든든하네.
└완봉하겠지? 포스트시즌이 있다고 해도, 그래도 페넌트레이스 마지막 홈 등판인데.
└모르지, 올해는 포스트시즌도 진출했으니까, 남은 두 경기 다 적당히 7이닝 던질지도.
└아닐 걸? 내가 Go를 잘 아는데, 포스트시즌이랑 상관없이, 끝까지 미친 듯이 던질 거야. 완봉하겠지, 무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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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ck 너 이제 기사에 댓글도 쓰냐? 넌 제드 욕할 자격 없어. 너도 만만찮게 인터넷 중독이구만.”
훈련장으로 나가기 전.
클럽하우스의 내 자리에 앉아, 댓글 작성을 마치고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휴대폰을 어루만지고 있으니.
마찬가지로 준비를 마친 건지, 옷을 갈아입고서 나가던 브루스는 날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번에 레인저스 팬 커뮤니티에 글 썼을 대도 얘한테 들켰는데, 이번에도 걸렸네.
미국인들은 대체로 개인의 사생활을 잘 지켜주는데, 이 새낀 왜 허구한 날 남의 화면을 훔쳐보네.
“어허, 소셜 네트워크는 얼씬도 안 하는 사람한테, 중독은 무슨.”
그리고 인터넷 중독이라니?
해롭기 그지없는 파랑새와 얼굴책 등등, SNS는 얼 씬도 안하는 청정인한 사람을 제드 라우리와 비교하다니. 말이 심하구만.
가볍게 주의를 주듯 노려보니, 브루스는 한숨을 푹 내쉬다, 이내 내가 작성한 내용을 보고는 다시 헛웃음을 흘렸다.
“그나저나, 뭔 베이브 루스도 아니고, 완봉을 미리 예고하네. 레인저스 때도 그러더니··· 내가 Go를 잘 알아? 그치, 니가 참 잘 알겠지, 본인이니까. 근데 코치한테 허락은 받았냐?”
“받았어. 레이스전에서 고작 84개만 던지고 내려갔잖아? 사정사정하니 특별히 허락해주시더라.”
참고로 코치한테는 레이스전 끝나고, 홈으로 돌아왔을 때 간신히 완투를 약속받았다.
포스트시즌은 생각도 안 하냐면서,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셨지만, 내 설득을 못 이기고 결국 마지못해 허락해주셨지.
그 대신, 아마도 진짜 정규시즌 마지막 등판일 가능성이 높은 에인절스전에선 딱 80구, 간만에 투구수 제한이 걸리기도 했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겠지.’
난 원래 눈앞의 이익에 집착하는 소인배라서 미래는 걱정하지 않는다.
그냥 다시 오클랜드로 돌아오니까, 다들 포스트시즌 앞두고 되게 기뻐 보이더라고.
도시 곳곳에 걸개가 걸리고, 전광판엔 내 얼굴이 가득하고··· 사실 이건 평소에도 이렇긴 한데.
아무튼 아주 싱글벙글 웃으면서, 행복감에 젖어, 몸서리치던데, 거기에 선물 하나 더 안겨주면 얼마나 보기 좋겠어?
‘미리 맛보기로 보여줘야지.’
또한 과연 내가 포스트시즌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얼마나 대단한 경기를 펼칠지도 크게 기대하는 눈치던데. 일종의 예고편인 셈이지.
스콧 에머슨의 말처럼, 괜히 포스트시즌을 앞두고 쓸데없이 힘을 빼는 걸 수도 있겠지만.
‘힘이야 차고 넘치다 못해, 미쳐 날뛰고 있으니까.’
단순히 대니얼에게 농담처럼 말했던 가을체질이라는 말이 진짜였던 건지. 홈에서의 페넌트레이스를 앞둔 몸은 점점 더 시간이 지날수록 부글부글 끓었다.
당장이라도 밖으로 토해내 달라고 애원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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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절스 시리즈는 에이스의 단점이자 장점이 드러난 경기입니다. 기복이 심하고, 과하게 몰아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기질이 제대로 터졌죠.
“맞는 말이네, 아주 타당해. 저 양반 누군지는 몰라도 아주 지식이 풍부하구만.”
티비에서 한 전문가라는 양반이 부들부들 떨어대면서 토로하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공감하는 바였으니까.
레이스전이 끝나고 홈으로 돌아온 뒤, 우린 먼저 에인절스와 3연전을 가졌다.
그리고 대폭발을 일으켰지.
세 경기 동안 31점을 몰아쳤거든. 2승 1패의 위닝 시리즈로, 112승째를 올렸고.
그리고 이어진 트윈스와의 1차전에서도 다시 10점이나 올렸지.
레이스전에선 세 경기 합쳐서 고작 8점을 냈던 걸 감안하면, 기복이 심해도 너무 심하단 말이야.
“쓸데없이 몰아친다니까. 곧 포스트시즌인데, 좀 아껴서 쓸 것이지.”
“최소한 Go가 그런 말을 하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제가 그대로 돌려드리죠. 곧 포스트시즌인데, 괜히 무리하지 않으시는 게-”
“대신 저는 늘 잘하잖아요. 기복 없이 늘 일정하게.”
열심히 애슬레틱스를 까면서, 우리가 우승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 설파하는 패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니.
대니얼은 조금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나를 흘겨보기도 했지만, 그거랑 이거는 다르지.
타자 놈들은 쓸데없이 몰아치면서 힘을 빼는 게 문제인 거고. 난 항상 잘하면서, 간간히 더 잘하는 날이 있는 거니까.
오늘이 그런 날이고.
그렇기에 얼굴에 철면피를 깔면서, 티비에서 흘러나온 소리에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또한 Go 역시 문제가 있죠. 서른한 경기 동안 241이닝을 던진 투수는 절대로 정상일 수가 없습니다. 닳은 헝겊처럼 너덜거릴 수밖에 없죠.
갑자기 개소리를 하시네.
내가 뭐? 너덜? 헝겊?
-물론 그가 우리 시대에서 가장 위대한 투수라는 건 저 역시 동의합니다만. 그는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고서, 포스트시즌에 걸맞지 않은 시즌 운영을 펼쳤습니다.
-결국 그에 대한 리바운드가 돌아와, 포스트시즌에서 혹독한 대가를 치를 수도···
옳은 말을 할 줄 아는 참된 전문가인 줄 알았더니, 결국 방구석 전문가였구만.
“제가 헝겊처럼 너덜거려요?”
“글쎄요, 어느 정도는 저도 동의합니다만, 그 말만큼은 동의하기 어렵네요.”
“그쵸?”
슬쩍 대니얼을 보니, 반절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까딱거리면서도,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무리하는 것에 극구 반대하며, 고용주에게 반기를 드는 대니얼이지만, 그가 듣기에도 저건 개소리였겠지.
열심히 타자들을 까대던 건 참 마음에 들었지만, 이젠 내 입맛에 맞지 않는 소리를 토해내는 티비를 끈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슬슬 갈 시간이구만.
“바로 클럽하우스로-”
“아, 오늘은 제가 운전할 게요. 그러고 싶어서.”
포스트시즌이라는 중요한 순간이 다가온 만큼, 브라이언도 내내 오클랜드에서 머물렀다.
내가 오직 포스트시즌에만 집중하면서, 편안하게 준비할 수 있도록 픽업을 해줬지만, 오늘은 거절했다.
노란색 쉐보레를 간만에 내 손으로 직접 끌고 싶었거든.
“저거 Suck 차 아니야?”
“Suuuck! 오늘도 잘하고, 다음 등판도 잘하고, 포스트시즌에서도 잘해라!”
“우리도 콜리시엄으로 가고 있어! 먼저 가서 기다릴 테니까, 멋지게 던져줘!”
차 디자인이 워낙 튀는 데다, 내가 도시의 가장 유명인사라서, 종종 내 차를 알아보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나 등판일에는 지금처럼 죄다 알아보지. 편안하게 클럽하우스까지 갈 수 있도록, 슬쩍 비켜주는 차도 있고.
좀 과한 사람들은 감히 내 앞을 지나가는 것이 황송하다는 듯, 뒤만 졸졸 따라오기도 한다.
‘이젠 좀 무섭단 말이야.’
극빈도 이런 극빈이 없지.
진짜 왕처럼 떠받들어 주는 건데, 애슬레틱스의 자금력을 감안하면, 결국 언젠가는 이별을 해야 하는데, 그때 반응이 어떨지, 벌써부터 걱정이구만.
인터넷 짤방이나, 영상으로만 보던 유니폼 화형식이 진짜로 일어나려나?
“Suuuuuuck!”
“크헤헤헤, 오늘도 멋지게 던지라고!”
“인터넷에 누가 널 잘 안다면서 완봉할 거라고 하던데, 진짜지?”
“글쎄요, 누군지 몰라도 저를 참 잘 아는 사람이군요. 사인?”
“넘쳐난다니까. 다른 놈들도 죄다.”
“그럼 뭐, 별 수 없고.”
역시나 콜리시엄과 클럽하우스의 주변은 오늘도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레이더스도 총출동한 것 같고.
이런 분위기를 보아 어쩌면 헤어지는 그날, 유니폼이 아니라, 날 콜리시엄 마운드 위에 묶어놓고 화형 시켜 버릴지도···
‘쫓겨난 왕은 목이 잘리는 법이지.’
언젠가 헤어지더라도 최대한 깔끔하게, 그리고 감동적이게 해야겠어. 목이 달아나지 않으려면.
사인을 마다하는 팬들을 뒤로한 채 안으로 들어가니, 오늘은 다들 일찍 온 건지, 제법 사람이 많았다.
“왔어? 오늘도 좋아 보이네.”
“이야~ 오늘은 Suck 네가 꼴찌네? 웬일이야?”
“그래요?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내가 꼴찌라니.”
매번 출근시간 상위권인 내가 처음으로 꼴찌라니. 거참 놀라운 일이구만.
게으름뱅이 놈들이 포스트시즌이 코앞이라고 드디어 각성했어.
“오늘 폼은··· 음흉하게 웃는 걸 보니까, 엄청 좋나 보네.”
슬그머니 나타난 브루스는 내 표정을 읽은 건지, 컨디션을 물으려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이제 많이 늘었구나. 표정만 봐도 아는 걸 보면.”
“너랑 같이 뛴 경기가 얼만데, 이쯤 되면 척하면 척이지. 살살 던져, 또 폴 씨 때려잡지 말고.”
“그건 던져봐야 알지. 너무 좋은 날은 살살 던질 수가 없거든.”
적당히 던지라며 주의까지 주고 가는데, 쟤도 슬슬 경험이 쌓인 티가 나긴 나네.
참고로 폴 씨는 필립 폴이다.
우리 팀 불펜포수지. 내 전담 불펜포수이기도 하고.
작년부터 내 공을 받아주셨는데, 내 컨디션이 좋은 날이면 항상 불펜에 신음소리가 울리지.
“흡-”
그래, 오늘처럼 말이야.
워밍업을 마치고 들어간 불펜에선 평소처럼 신음만 흘렀다. 적당히 40% 정도로 시작해서 좀 살살 던졌는데도 꽤나 고통스러워하셨지.
나도 사람인지라, 힘겨워하는 모습이 안타까워서 가끔 좀 심한 날은 선물이나, 팁을 드리는데. 오늘도 그래야겠네.
“후우··· 어째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진단 말이야. Suck 너 때문에 내 불펜포수 은퇴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어.”
“그러면 안 되죠. 전 필립이 받아주는 게 좋거든요.”
“글쎄, 그런 것치곤 너무 아프게 던지는데? 어쨌든 오늘도 아무 걱정 안 해도 되겠어요, 에머슨 씨.”
마스크를 벗고 혀를 내두르는 필립의 말에 코치는 그저 어깨를 으쓱거렸다.
엄밀히 말하면, 코치는 날 걱정하지 않는다. 그의 걱정은 오직 내가 과하게 무리하는 것이지.
오늘은 이미 목줄도 풀었기에, 더욱더 걱정이 없을 테고.
“시간 됐어. 가자.”
그렇게 기분 좋은 불펜피칭을 끝으로, 정규시즌 마지막 홈경기의 시간이 도래했다. 이제 6시 정각이지.
보통 저녁 경기는 7시쯤 시작하지만, 오늘은 그보다 한 시간이 더 빠르네.
그래서 그런지, 불펜의 문이 열리고 그라운드로 입장하니, 저 멀리 노을이 져 있었다.
“Suuuuuuuuuck!”
“It’s Suck Time!”
“트윈스가 Suck될 시간이다!”
그 노을 아래로는 오늘도 콜리시엄을 꽉꽉 채운 우리 어여쁜 오크들께서 소리를 지르고 계시고.
‘운치 있네, 가을 노을이라···.’
일부러 시간을 앞당긴 건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홈에서의 마지막 경기를 장식하기엔 딱 좋은 날이구만.
“스트라이크!”
물론 진짜 마지막은 아니고, 포스트시즌에서도 몇 번이나 홈에서 경기가 열리겠지. 벌써 끝내기엔 지금 내 몸이 너무 아까우니까.
‘89.5마일, 바로 최고구속 찍었네.’
초구 몸쪽 포심 패스트볼.
1번타자 조 마우어의 우렁찬 헛스윙으로 경기가 시작됐다.
시작부터 89.5마일이라, 느낌이 좋구만. 오늘 폼이 좋긴 하더라니. 바로 최고구속을 찍어버렸어.
‘역시 가을 체질이란 말이야. 세련된 도시남자라서 가을을 타는 거겠지.’
물론 가을에만 특별히 잘한 다기보다는, 여름에는 여름체질이고, 봄에는 봄 체질이지만 말이다.
언젠가 메이저리그에서 겨울까지 시즌이 이어지는 날이 온다면, 그땐 또 겨울 체질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