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됐어.”
찬물을 얼굴에 끼얹자, 조금은 비몽사몽 했던 정신이 완벽하게 깨어났다. 몸이야, 뭐, 일어난 순간부터 말짱했고.
욕실에서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평소처럼 거울 앞에서 투구폼까지 취했을 때, 강렬한 확신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올랐다.
아직 워밍업조차 하지 않았는데도, 동작이 완벽하게 이행되었으니까.
-야구 역사에서 마지막 400탈삼진 투수는 맷 킬로이로···
그렇게 좋은 기분 그대로 미소를 머금고 1층으로 내려왔을 때, 티비 스피커에서 새어 나온 소리가 나직하게 집안에 울렸다.
‘맷 킬로이.’
그를 이야기하고 있었지.
요 며칠 동안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이름이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요 근래에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이전에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거든. 라이브볼 시대를 넘어, 수많은 데드볼 시대의 레전드들과도 자주 비교당했는데 말이야.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작년부터 올해까지 기록이란 기록을 다 갈아치우면서 자주 거론됐던 워렌 스팟, 레프티 그로브, 심지어 월터 존슨보다도 이전 시대의 사람이니까.
티비에서 설명해준 말로는, 월터 존슨이 태어나기도 전에 데뷔해서, 1898년에 은퇴했다고 하니. 월터 존슨과 비교해도 거의 한 세대쯤 차이가 나는 거지.
-68경기를 등판해 583이닝을 던지며 513탈삼진을 기록했는데, 이 이닝 수는 역대 23위에 해당하기도 합니다.
당장 그가 513탈삼진을 기록했던 데뷔시즌에 68경기 583이닝을 던진 것만 보더라도, 아득해질 정도로 과거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옛날엔 선발투수가 거의 매일 같이 등판했다고 하는데, 그런 전설처럼 내려오는 시대의 사람이라는 거지.
“사람은 생각보다 튼튼하네요.”
“일어나셨습니까? 막 올라가려던 참이었는데.”
“생각보다 튼튼하죠, 생각보다 더 약하기도 하고요. 그러니 꿈도 꾸지 마세요.”
“제가 아무리 많이 던지는 걸 좋아해도, 머리에 납탄 박히지 않는 이상 저런 건 엄두도 못 내요.”
새삼 인체의 위대함에 감탄하는 내 모습에, 그제야 내가 내려온 것을 깨달은 브라이언과 대니얼은 날 반겨줬지만, 대니얼은 조금 식겁한 표정으로 당부했다.
아마도 혹시나 내가 혹하는 마음에 그토록 미친 듯이 던질까 봐 걱정한 것 같은데, 당연하게도 나도 그럴 생각은 없었다.
내가 아무리 또라이라도, 생명을 갉아먹으면서까지 미친 짓거리를 하는 사람은 아니야.
애초에 그때와 현재의 야구를 비교하면 다른 종목 수준의 차이가 나기에, 일말의 가능성조차 없이, 그냥 무조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지금 시대에 그 정도로 던지면, 500이닝을 채우기도 전에 과로사로 먼저 죽겠지.’
다만 딱 하나, 백수십 년 간 묻혀 있던 기록 하나를 훔치고자 하는 마음은 있지만.
최후의 400탈삼진 투수. 오늘 이 칭호를 탈취할 생각이지.
최초이자 최후의 500탈삼진 투수이기도 한데, 그건 앞서 언급한 500이닝과 마찬가지로 사실상 불가능하고.
아무리 내가 탐욕스러운 욕심쟁이라고 해도, 그 정도의 욕심까지는 없다.
“무리하지 마세요,”
“1800년대의 야구와 지금은 다릅니다. Go는 이미 역대 최다 탈삼진을 올린 투수죠. 대니얼 시의 말처럼 무리할 이유는 없습니다.”
“무리 안 해요. 그냥 딱 할 수 있는 만큼만 할 겁니다.”
“그게 그 말이죠. Go한테는.”
두 사람은 벌써부터 힘이 넘치는 듯한 내 모습을 보며, 조금은 걱정스럽다는 듯 한숨을 내쉬기도 했지만, 난 정말로 내 몸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만 던질 생각이다.
다만 오늘은 그저 그 한도가 더럽게 높을 뿐이지.
평소처럼 경기 당일에 어울리는 식단에 맞춰서 식사까지 마치자, 태울 만한 영양분까지 공급돼서 그런지. 아직 제대로 시동조차 걸지 않은 몸이 한여름 날 그늘 바깥에 세워둔 검은색 차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어쩌면 내가 너무 흥분했기에, 그렇게 느끼는 걸지도 모르고.
그 이유가 뭐든지 간에 딱 하나 확실한 것이 있다면.
‘딱 좋네.’
적어도 오늘만큼은 그게 딱 좋다는 거다.
경기의 날이 밝았으니, 이젠 억누르거나 제어할 필요 없이, 모조리 불 싸지르기만 하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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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브라이언이 운전해줬다. 사실 오클랜드로 오면 항상 그러는 편이지.
“티켓은 잘 가지고들 계시죠?”
“예, 잘 챙겨뒀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잘 보관해야죠, 잃어버리는 순간 다시 얻기는 글렀으니까.”
“Go 덕분에 이런 경기를 무료로 보는군요.”
브라이언은 새삼 영광이라는 듯 피식 웃었다. 어쩌면 에이전트의 특권이기도 하지.
“듣기로 3루 관중석의 경우 암표 거래가가 만 달러 이상을 유지 중이라고 합니다. 그마저도 구매자 측에서 제시한 거지, 매물이 없다고 하니, 저흰 운이 좋은 거죠.”
브라이언의 말처럼, 티켓을 못 구한 사람들이 이 도시 안에 넘쳐났으니까.
좌완 투수라서, 3루 관중석이 가장 잘 보이고, 주로 레이더스가 점유하고 있는데, 오늘은 암표마저 없다고 한다.
조금은 웃긴 말일 수도 있는데, 암표상들마저도 간신히 얻어낸 티켓을 팔기보단, 차라리 경기를 보는 것을 선택했다고 하더라.
그럼에도 콜리시엄 근처로 사람들이 몰렸다. 도로 가득 자동차가 쫙 깔려 있었거든.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고 싶다는 마음인 걸까?
주변은 죄다 창고라서 술집이나, 경기를 볼만한 공간도 마땅치 않을 텐데 말이야.
“조심하십시오, 자칫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서,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마치 유원지처럼 사람이 몰려든 콜리시엄과 클럽하우스, 그 주변의 분위기에 브라이언은 내게 주의를 주기도 했다.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서, 그에 깔릴 위험도 있으니까.
그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토록 수많은 팬 중, 내게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Suck! 오늘도 잘해라!”
“콜리시엄에서 400K 못해도 괜찮으니까. 그냥 평소처럼 멋지게 던지기만 해줘!”
“오늘은 티켓 못 구했지만, 밖에서라도 열심히 응원할 게!”
평소처럼 날 향해 소리치고, 얼굴이 마주칠 때마다 열광하면서도, 모세가 홍해를 가르듯, 내 주위에서 쭉 물러났지.
전날부터 보여줬던 광기에 가까운 열광과 달리, 못해도 괜찮다는 말을 하기도 했고.
심지어 언제나 나한테 20K를 잡으라며 닦달하는 레이더스마저 오늘은 그런 부탁을 하지 않았다.
‘이러니까, 오히려 어색하네.’
자신들의 기대감이 나한테 부담감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여긴 거겠지. 괜히 내가 압박받지 않도록, 짐짓 덤덤한 척하는 것이고.
“사인받을 사람은 없으세요?”
별로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다. 선수가 팬의 눈치를 봐야지, 팬이 선수의 눈치를 보면 쓰나.
안주머니에 챙겨둔 사인펜을 흔들자, 주변의 팬들이 쭈뼛쭈뼛거렸지만, 이내 몇몇 용자들이 다가오자, 다른 사람들도 다가왔다.
뭐, 다들 내 사인이야 차고 넘치겠지만, 오늘 같은 날에 받는 사인은 더 특별하니까.
욕심을 버릴 수가 없겠지.
‘간만에 손목 좀 놀렸네.’
오랜만에 제법 만족스러운 팬서비스를 행했군. 나한테 사인받으려는 사람이 없어서 좀 섭섭하기도 했는데 말이야.
평소와 다를 바가 없는 내 모습에 걱정을 내려놓은 건지, 다시 평소처럼 순수하게 웃는 팬들을 흐뭇하게 지켜보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마지막 팬서비스까지 확실하게 해야지.’
아직 진짜 팬서비스가 남았으니까. 기대감을 충족시켜주는 좋은 경기,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팬서비스잖아?
적어도 올해는, 언제나 백발백중이었는데, 부디 오늘도 그러길 바라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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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크게 무리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몸을 풀어주는 위주로 가겠습니다.”
“네, 이미 충분히 달아올랐으니까요.”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여유롭게 워밍업을 가졌다. 몸을 달아 올리기보단, 그저 유연하게 가동범위만 잘 나오도록.
폼이 극도로 좋을 때는 항상 이러는 편이다. 굳이 달아 올릴 필요도 없이, 이미 뜨겁게 타오르니까. 괜히 체력을 허비할 필요가 없는 거지.
‘그런다고 내 대가리가 뚫리겠어?’
그런 내 몸짓 하나하나를 수십 쌍의 눈동자가 따라붙었다. 양키 친구들이지. 어제도 경기보단 나에게 더 집중했던 그들이지만, 당일이 되니 훨씬 더했지.
눈빛만으로 성희롱이라면서 고소하는 게 가능할 정도로, 끈적한 눈빛을 쏘아 보내며, 노골적으로 관찰했거든.
“쟤들 좀 너무한 거 아니냐? 신경 쓰여서 훈련을 못 하겠네.”
“저런 게 거슬려서 훈련 못할 정도면, 직업을 잘못 고른 거지.”
“Suck 넌 말을 해도 꼭 그렇게··· 아니다.”
내 옆에 딱 붙어서 같이 위밍업하던 브루스는 그런 양키스의 눈빛에 투덜투덜 거리기도 했지만.
사실은 얘도 평소보다 좀 더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본인은 모르는 것 같지만. 그래서 좀 웃기기도 하고.
아주 비장한 모습인데, 웃긴 놈이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으니, 왠지 개그 하는 것 같단 말이야.
“그나저나 Suck 너 폼은 좀 어때?”
“최상이야. 브루스 너 오늘 손바닥 조심해라.”
“다른 날이면 몰라도, 오늘은 손바닥이 깨지는 한이 있어도 어떻게든 잘 받아야지.”
그래도 호흡을 맞출 포수가 제대로 집중한 모습을 보니, 조금 기특하기도 하네.
‘또 생돈 좀 나가겠네.’
나도 참 호구란 말이야.
소비 습관을 고쳐야 돼. 그나마 잘 벌어서 망정이지, 언젠가 은퇴하고 수입 줄어들 때도 지금처럼 쓰면, 나도 커트 실링처럼 빈털터리가 되겠지.
그나마 노후대비를 철저하게 해 둬서 다행이군.
“손목 잘 비워둬. 또 새거 하나 찰 테니까.”
“···오늘 자신 있나 보네? 쟤들이 저렇게 노려보고 있는데, 그런 말 하는 거 보면.”
내 말에 브루스는 살짝 눈썹을 씰룩거렸다. 상대팀이 흉흉한 얼굴로 노려보는 와중에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 조금 신기하게 느껴지는 거겠지.
자신이라, 사실 언제나 자신감은 넘치는 편이다. 나한테서 자신감을 빼면 뭐가 남겠어?
쥐뿔도 없는 마이너리거 시절에도 항상 어느 정도의 자신감은 품고 살았지.
“15분 됐습니다, 불펜으로 가시죠.”
“그럼 이만 간다, 너도 마지막까지 준비 잘해라.”
메이저리그에 올라오고 나서부터는 더욱더 커졌고 말이야.
그러니 자신감은 항상 충만하다. 그냥 평소보다 조금 더 하늘을 찌를 때가 종종 있는 거지.
“씁-”
바로 오늘이 그런 날이고.
불펜에 들어선 뒤, 묵직하게 글러브를 찌르며, 불펜포수에게서 신음을 뽑아낸 공처럼, 오늘의 자신감도 뾰족한 송곳처럼 하늘을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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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시다, 시간 됐네.”
“실컷 던지고 와. 약속은 지킬 테니까. 홈런을 맞든, 그랜드슬램이 넘어가든. 걱정하지 말고.”
불펜을 나서기 전, 지난번에 했던 약속을 지키려는 듯, 스콧 에머슨은 내 목줄을 풀어줬다.
꽤나 호탕하구만.
만루홈런 맞아도 교체 안 하겠다니, 이쪽도 의지가 대단해. 빈말에 가깝지만 말이야.
내 불펜피칭을 보면서, 걱정과 기대가 혼합됐던 오늘 그의 얼굴은, 이젠 오직 강력한 확신만이 깃들어 있었으니까.
그저 씨익 미소를 보여준 뒤, 그라운드로 걸어 나가자, 평소보다 약 만 명 정도 더 차오른 콜리시엄의 무거운 분위기가 반겨줬다.
진짜로 만원 관중이네.
관중석을 더 확장했는데도 꽉 찼어.
마운틴 데이비스라고 하던가? 보통은 방수포로 덮여 있는 가장 높은 좌석까지 사람이 빽빽하게 들어가 있었다.
그들 한 명 한 명의 눈동자가 조명에 가려진 밤하늘의 별빛처럼, 그라운드로 쏟아지고 있었지.
“후우···”
허나 마운드로 향하며, 그라운드에서의 첫 숨을 내쉬는 순간, 그러한 시선은 빠르게 사라졌다. 내가 떨쳐냈지.
팬들은 여전히, 아마도 경기가 끝날 때까지 나를 바라보겠지만, 이제부터 나는 오직 양키스만을 보고, 느껴야 했으니까.
“오늘은 어떻게 갈 거야?”
마찬가지로 마운드에 올라온 브루스는 슬쩍 상대쪽 덕아웃을 훑으며 평소처럼 오늘 피칭 계획을 물었고, 내가 해줄 말은 하나뿐이었다.
“닥치고 공격.”
닥공이지.
야구에서 수비수라고 할 수 있는 투수가 하기엔 좀 이상한 말이겠지만, 오늘 내가 할 일은 오직 그거밖에 없었다.
“그럴 것 같더라. 좀 위험한 타자 있으면 바로 사인 보낼게. 아까도 말했지만, 손바닥이 깨져도 좋으니까, 마음껏 던져.”
브루스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건지, 씨익 웃으며 별다른 말없이 홈 플레이트로 내려갔다.
사실 양키스에게 무작정 들이대는 것은 별로 좋은 전략이라고 볼 수는 없다.
‘양키스 타선은 좋은 편이니까.’
사실 양키스 타선이 약했던 적이 있긴 한가, 싶지만, 어쨌든 지금도 강력하지. 그러니까 현재 와일드카드 1순위인 거고.
그나마 애런 저지라는 주포가 이탈하면서, 무게감이 확 떨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리그 상위권 수준이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고, 부담스러워하는 지안카를로 스탠튼, 우리 고릴라 친구도 오늘 2번타자로 있고 말이야.
하지만···
‘별로 상관없지, 상대 타선이 강하고 말고는.’
“스트라이크!”
적어도 오늘은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번 경기에선 서로의 역할이 바뀌었거든.
내가 양키스를 공격하고, 양키스 타선이 어떻게든 날 막아내는 것. 그게 이번 경기의 핵심이지.
“스트라이크!”
“볼.”
1번타자, 브렛 가드너.
08년 데뷔부터 현재까지,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양키스의 전위를 담당하는 선수다.
준수한 선구안과 빠른 주력을 바탕으로 딱 테이블세터 같은 타격을 자랑하는 타자인데. 작년에는 20홈런을 쳤었지.
다만 올해는 조금 아쉬운 성적을 이어가고 있지만, 그래도 충분히 양키스의 프랜차이즈 스타급이라고 할 수 있는 선수다.
또한 구단에 대한 충성심과 로열티도 갖춘 선수이기에, 1회 초, 그는 대단히 결연한 얼굴로 타석에 올랐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애석하게도 내 첫 번째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높게 들어간 공.
선구안이 준수한 편이기에, 스트라이크가 될 것이라고 판단한 듯 배트를 휘둘렀지만.
중간 지점을 지나친 순간, 너클 커브는 급격하게 꺾이면서 사선으로 떨어졌다.
“You Suuuuuuuuuck!”
“Hell Yeah!”
헛스윙 삼진아웃.
오늘 경기의 첫 번째 삼진이었고, 첫 번째 유썩이었으며.
“Fifteen!”
0이 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끊이지 않고 쭉 유지될 카운트다운의 시작이기도 했다.
‘자, 다음은 우리 고릴라 차례구만.’
그다음 타자는 지안카를로 스탠튼. 작년, 단 한 번의 만남만으로 나한테 깊은 인상을 남겼던 타자다.
완전히 무너진 자세로 무지막지한 비거리를 자랑하는 타구를 만들어낸 것이 뇌리에 박혔거든.
‘올해도 파워는 무식하지.’
고릴라에게 야구를 가르친 듯한 느낌이 들 만큼 그 압도적인 힘은 올해도 유지되고 있었다.
이번 시즌, 가장 빠른 타구가 죄다 스탠튼의 것이었으니까. 타구 속도 Top 10 중에서, 스탠튼의 것이 여덟 개지.
무려 121.7마일에 달하는 미친 홈런을 쳐내기도 했었고.
‘그래도 홈런은 좀 많이 줄었지.’
다만 리그 적응 기간인지, 작년 59홈런을 때리며, 60홈런에 아깝게 실패했던 것과 달리.
올해는 현재까지 33홈런에 그치며, 훅 줄어든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언제든지 홈런을 칠 수 있는 타자라는 건 변하지 않지만.
“스트라이크!”
그 대신 삼진을 잡기 쉬운 타자라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번 시즌 200삼진을 훌쩍 넘길 페이스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초구는 바깥쪽 낮은 코스의 공, 마운드까지 바람이 불어온다고 느낄 정도로 묵직한 스윙이 나왔으나, 서클 체인지업은 닿지 않았다.
‘먼 코스인데, 저걸 냅다 휘두르네. 살벌하구만.’
간담이 서늘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작년보다 선구안도 다소 줄어들었다는 것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실제로 출루율도 떨어졌고, 볼삼비도 떨어졌는데, 그런 스탠튼의 이번 시즌 공략법은 간단했다.
“스트라이크!”
바로 배짱이지.
현시점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파워풀한 타자. 그런 타자를 상대로 장타가 될 가능성이 큰, 높은 코스의 공을 던지는 것.
그것이 올해 스탠튼이 보여준 빈틈이었고,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
“스트라이크 아웃!”
난 높은 코스, 특히나 하이 패스트볼을 좋아한다.
이 느릿한 공에 타자들이 헛스윙하는 걸 보면 기분이 몹시 좋거든. 물론 효과도 뛰어나고.
냅다 헛스윙 세 번.
중계방송을 시청 중인 양키스 팬들은 아마 복장이 뒤집어졌겠지.
말린스에서 데려오면서, 양키스가 계약 종료까지 감당해야 하는 연봉이 2억 6천5백만 달러라는데.
그런 타자가 초조하기 그지없는 경기에서 조금은 무식한 헛스윙을 보여줬으니까.
대부분 야구팬이 그렇듯 양키스 팬들도 지금쯤 냅다 욕을 박고 있겠지. 하지만 그들은 알아야 했다.
“스트라이크!”
사실 다른 타자들도 별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3번타자 앤드류 맥커친.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이언츠에서 봤던 선수인데, 저번 달에 웨이버 공시 후 양키스로 트레이드됐다.
그는 어쩌면 다른 양키스 선수들과는 표정이 조금 달랐다. 당장 올해 나한테 퍼펙트당했잖아.
‘절대 잊을 수가 없겠지.’
투수에게 퍼펙트가 평생 동안 함께할 추억이듯, 그걸 당한 타자에게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악몽이다.
앤드류 맥커친은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난 건지, 다른 타자들처럼 비장하다기보다는, 두려움에 가까운 표정이었고.
“스트라이크 아웃!”
고개 숙인 타자를 잡는 건 그 무엇보다도 쉬웠다.
약간 멈칫거리는 순간 그 타이밍을 찌르고 들어가면, 스윙을 내지조차 못하면서 멍한 얼굴로 얌전히 당해주거든.
“You Suck! X발 Yankees Fucking Suck이다!”
“Hell Yeah!”
“Thirteen! 열세 개 남았다 X부랄!”
루킹 삼진아웃. 그리고 세 타자 연속 삼진. 그 앞에서 팬들은 황홀한 표정으로 함성을 내질렀고. 반대로 양키스는 조금 더 세게 이를 깨물면서 나를 노려봤다.
‘어디 한번 잘 막아 봐.’
이젠 확실하게 깨달았겠지. 열여섯 개의 삼진을 잡히지 않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
“스트라이크 아웃!”
우렁차게 울리는 목소리.
그것을 뒤따라 터져 나온 함성을 들으며, 브렛 가드너는 조금 눈살을 찌푸렸다.
“···레드삭스 새끼들도 이런 느낌이었던 건가?”
그는 자연스럽게 레드삭스가 떠올랐다.
아무리 위대한 투수라고 할지라도, 한 투수에게 한 달 동안 두 번이나 20탈삼진을, 심지어 그중 한 번은 퍼펙트라는 것에 잔뜩 비웃어 줬지. 그도, 팬들도.
라이벌 팀의 멍청한 모습은 언제나 배꼽을 잡게 만드니까.
헌데 오늘은 어쩐지 그 당시 레드삭스의 감정을 알 것만 같았다. 그들도 이런 기분이었을 테니까.
“젠장···”
“아예 작정했어. 빌어먹을 새끼.”
“89.5마일. 또 최고구속 찍었네. 포심은 죄다 최고구속이야. 오늘 던지고 은퇴하려는 건가?”
양키스의 덕아웃에선 여러 가지 말이 흘렀다. 서로 의견을 주고받기도 했고, 욕설을 뱉는 이도 있었지.
그러면서도 브렛 가드너가 그라운드를 노려보고 있듯, 다른 이들 역시 죄다 두 눈은 한 곳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 피칭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 어렵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전,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양키스는 결의를 다졌다.
어떻게 해서든지 팬들이 그런 개X같은 꼴을 보게 만들지는 말자고 다짐했지.
열여섯 개나 남은 만큼, 대단히 어려운 일은 아니다. 최대한 삼진만 덜 당하기만 해도 충분하니까.
그렇기에 감독은 양키스의 자존심을 지키는 동시에, 품위를 갖추라고 하기도 했었고. 최선을 다하되, 평소처럼 당당하게 나서라고 명령했지.
‘괜히 뒷말이 나올 필요는 없으니까.’
사실 타자가 작정하고 삼진을 피하려고 한다면, 투수가 그걸 뚫어낼 방법은 없다.
출루를 포기하고 최대한 커트하든, 아니면 냅다 후려치든지 간에 말이다.
하지만 괜히 그런 노골적인 모습을 보였다간, 천하의 양키스가 추잡하게 군다는 말이 나올 수도 있고, 모든 메이저리그의 팬과 언론의 이목이 쏠린 경기인만큼, 자칫 더욱더 민감하게 받아들여질 테니 주의하라는 건데.
“아웃!”
경기 시작 직후 지금까지, 일련의 과정을 쭉 지켜보고, 직접 겪기도 했던 브렛 가드너는 생각했다.
이번 경기에서 양키스의 프라이드 같은 건 잠시 집어치워 두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품위까지 지키기엔, 그들에게 주어진 기회는 너무나도 손쉽게 소모됐으니까.
5번타자 미겔 안두하가 낮은 코스의 공이 배트의 머리 부분에 간신히 스치면서, 아슬아슬하게 땅볼을 만들어, 경기 시작부터 이어졌던 삼진 퍼레이드를 막아섰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그 직후 게리 산체스가 다시금 삼진으로 잡히면서, 이번 경기의 다섯 번째 탈삼진을 만들어줬다.
“Eleven!”
400개까지 남은 것은 숫자는 이제 겨우 열하나.
고작 2회가 지나갔을 뿐이었지만, 최악의 악몽은 조금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빠르게 양키스를 덮쳐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