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스트라이크 아웃!”
2회 초에는 아쉽지만, 삼진 하나만을 추가하는 것에 그쳤다.
그마저도 선두타자인 넬슨 크루즈가 백도어성 슬라이더를 멀뚱멀뚱 쳐다보면서 루킹 삼진을 당해준 거였지.
“아웃!”
“아웃!”
그를 뒤이어 올라온 카일 시거와 라이온 힐리는 나란히 내야뜬공으로 물러났고 말이야.
둘 다 컨택이 별로 좋지 않은 타입인데도, 공을 억지로 맞힌 탓에 오히려 빗맞은 뜬공이 나왔다.
‘살짝 아쉽긴 하지만, 이제 2이닝이니까.’
타석 하나, 아웃카운트 하나가 아쉬운 상황에서 삼진을 충분하게 추가하지 못한 것은 조금 아까웠지만. 아직은 이닝이 많이 남아 있었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예상처럼 매리너스가 호락호락하게 삼진을 당해줄 생각은 없어 보인다는 거였지.
‘이젠 그냥 대놓고 하네.’
3회 초.
선두타자로 입성한 7번타자 벤 가멜은 활짝 연 오픈 스탠스를 선보였다. 배트를 짧게 잡는 거야 패시브고.
어떻게든 공을 지켜보면서, 최대한 승부를 길게 끌겠다는 의도가 훤히 드러나는 모습이었지.
원래도 파워는 떨어지지만, 컨택과 선구안이 좋아서, 타율과 출루율이 준수한 선수인데, 저러고 있으니까 좀 위협적이네.
아니, 위협이라기보다는, 짜증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어.
“파울!”
“볼.”
그리고 본격적으로 승부가 시작되자, 타격에서도 예상처럼 철저하게 커트와 선구를 반복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쪽들이 400K 당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거쳐 가는 과정인데, 진짜 너무하시네.’
이렇게까지 내 앞길에 똥물을 끼얹고 싶으셨어? 내가 진짜 죽일 놈이긴 한가 봐. 다들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걸 보면. 한편으로는 또다른 의도 역시 보였고.
‘투구수를 늘려보시겠다?’
매리너스는 나를 상대로 정면돌파를 하는 것을 포기했다.
나한테 수없이 당해본 같은지구 경쟁팀이기에, 어쩌면 객관적으로 인정한 셈이지. 정정당당 전면전은 힘들다는 것을.
차라리 최대한 투구수를 늘려서, 조금이라도 빨리 내리고, 그다음 교체투수를 상대하는 것이 더 승산이 높아 보이니.
아예 드러눕고, 내 체력을 갉아먹겠다는 거겠지. 물론 덤으로 삼진도 덜 당해서 날 엿 먹이기도 하고.
‘하긴, 저쪽은 내가 오늘 완봉을 할지, 아니면 중간에 내려갈지 모를 테니까.’
스콧 에머슨과의 협의로, 완봉이 다음 등판으로 미뤄졌지만, 매리너스 입장에선 알 수가 없다.
언론에다가 대놓고 공표한 것도 아니고, 우리끼리 대화를 나눈 것이니까. 독심술이 없다면야 절대로 알 수가 없지.
거기다 지난 경기에서 삼진은 무지막지하게 잡았다곤 하나, 고작 7이닝밖에 던지지 않았으니.
어쩌면 내가 오늘 자기들을 상대로 완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충분히 가능한 일이고.
실제로 팬들 사이에선 공식처럼 여기기도 했으니까. 7이닝 던지고, 9이닝 던지고의 반복이라면서 말이야.
오죽하면 내 등번호가 79인 이유가 바로 그거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겠어?
“스트라이크!”
“파울!”
“볼.”
이번에도 그 공식이 매리너스에게 대입될 수도 있으니, 어떻게든 투구수를 뽑아내서, 내 체력을 갉아먹겠다는 건데.
‘그나마 다행이네, 투구수가 아니라, 이닝 제한이라서.’
난 콜이다. 한번 그렇게 싸워보자고. 우리 코치님께서 이닝을 막으시는 거지, 투구수 리미트는 이미 사라졌거든.
“볼.”
그러니 평소처럼 숨 가쁘게 달리는 게 아니라, 천천히 느긋하게 삼진을 잡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뜻이지.
벤 가멜은 풀카운트가 완성되자, 조금은 미소를 머금기도 했다. 본인이, 그리고 팀이 원하는 대로 이어진 셈이니까.
그리고 몸쪽으로 공이 날아들자, 지금까지와 달리 조금은 자신감 있게 스윙을 가져가기도 했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공은 오히려 몸쪽으로 더욱더 말려들어가면서, 배트를 피해갔다. 서클 체인지업이었지.
거의 맞힐 뻔했지만, 어차피 헛스윙이니까, 무조건 삼진이지.
“You Suck!”
Yes 탈삼진이니, Yes 유썩이고.
“아웃!”
뒤이어, 8번타자 마이크 주니노도 비슷한 모습을 보이며, 최대한 승부를 질질 끄는 듯한 모습을 보여줬다.
5구째에 빗맞은 타구가 파울라인을 넘지 않고, 3루수 맷 채프먼에게 잡히면서 아웃당하긴 했지만. 그래도 적절하게 투구수를 뽑아내기는 했지.
‘보너스 타임이네.’
투아웃에서 올라온 9번타자, 디 스트레인지-고든. 그 역시도 앞선 타자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타석에 올랐다.
원래도 파워가 부족해서, 가벼운 배트로 짧게짧게 치는 스타일이긴 하지만, 오늘은 더 얄쌍해 보였지.
준수한 컨택을 갖췄‘던’ 타자이니, 자칫 괜히 물고 늘어지려고 한다면 조금 귀찮을 수도 있겠지만.
“파울!”
“파울!”
약점이 워낙 명확한 타자이기에, 솔직히 그리 어려운 타입은 아니었다. 드디어 약빨이 떨어진 건지, 올해는 컨택마저 확연히 떨어졌기에 더욱더 그렇고.
몸쪽 포심 패스트볼.
연이어 던진 공 두 개를 제법 정확하게 때려낸 디고든이었지만, 얇은 팔뚝은 충분하게 공을 밀어내지 못했다.
그나마 기본기라도 탄탄하게 받쳐줬다면, 기술적인 타격이라도 나왔겠지만, 고딩때까지 농구선수였는데, 그런 건 없지.
‘앞에 놈들한테 투구수 좀 썼으니, 얜 후딱 잡자고.’
투 스트라이크.
내가 자신을 무시한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건지, 디고든은 입술을 꽉 깨물며 이글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날 노려보기도 했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그런다고 해서, 부족한 선구안이 갑자기 확 올라가는 건 아니다.
너클 커브.
선구안이 좋지 않아서, 떨어지는 공에 크나큰 약점을 가진 디고든에겐 최악의 상성 중 하나지.
실제로 저 녀석에게 잡아낸 모든 삼진의 위닝샷이 너클 커브, 아니면 서클 체인지업 V1이거든.
이번에도 그에 삼진을 당하자, 그는 조금은 서글픈 표정으로 여전히 입술을 꽉 개문 채 내려갔다.
그래도 좀 든든하긴 하네.
무조건 삼진 잡혀줄 놈이 타선에 있으니까 말이야.
‘쟤가 1번이라서 더욱더 자주 만날 수 있다면 가장 좋았겠지만, 뭐 어쩔 수는 없지.’
그것으로 3회 초 종료.
3이닝 동안 다섯 개의 탈삼진을 잡아내면서 한 타순이 돌아갔다.
3이닝 동안 7개, 7이닝 동안 열일곱 개나 잡아냈던 저번 경기보단 조금은 느린 페이스였지만.
“Twenty Two!”
매직넘버는 착실하게 지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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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 디 스트레인지-고든을 돌려세우면서, 다섯 번째 삼진을 잡아내며, 3회 초를 종료합니다!”
“매리너스 타선이 끈적끈적하게 달라붙고 있는데도, 끄떡없이 잡아내네요.”
400탈삼진을 고대하는 것은 애스레틱스와 고유석의 팬들만은 아니었다.
시청률, 그리고 흥행성이라는 이권과 대단히 직접적으로 연결된 일이니, 방송국이나 미디어는 물론, 사무국 역시 내심 기대하고 있었으니까.
“20세기, 그 어떠한 투수도 해내지 못한 일이, Go의 손으로 21세기에 도래하고 있습니다. 남은 탈삼진은 단 22개!”
그렇기에 삼진 하나마다 흐뭇한 미소를 짓고, 조금은 과장스럽게 환호성을 터트리며. 설레발을 치듯, 400탈삼진을 자주 거론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것만 본다면, 팬들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지만. 사실 콜리시엄에서 그걸 해내길 바라는 팬들과 달리. 미디어에선 장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여겼다.
“최후의 400탈삼진 투수가 맷 킬로이 선수인데, 볼티모어 오리올스 소속이었습니다.”
“최후의 500탈삼진 투수이기도 하죠. Go가 다다음 등판으로 예측되는 오리올스전에서 400탈삼진을 달성하리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는데, 꽤나 독특한 관계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양키스전에서 해낼 가능성도 적지는 않습니다. 워낙 엄청난 삼진율을 자랑하는 Go이니, 홈에서 팬들을 위해 해낼 가능성도 적지는 않죠. 허나 어찌됐든, 그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Go가 역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중립적인 입장에 가까웠지. 물론 홈에서 달성한다면, 그림이 가장 예쁜 것이야 자명한 사실이고.
특히나 그 상대가 악의 제국, 리그 최고의 명문팀이자, 최고의 인기팀인 뉴욕 양키스라면, 더 말할 것도 없이 완벽한 스토리겠지만, 그게 정말로 가능한지는 불분명했으니까.
괜히 크게 띄웠다가, 자칫 실패로 돌아갈 경우, 공연히 400탈삼진의 감동을 망칠 수도 있었기에. 마지막 400탈삼진 투수의 소속팀이었다는 것을 명분으로 오리올스전 역시 적절하게 조명하기도 했지만.
“6구, 스트라이크 아웃, Go! 여섯 번째 탈삼진 잡아냅니다!”
“세이프! 2번타자, 데나드 스판의 안타! 퍼펙트가 깨지네요.”
곧 이닝이 계속해서 이어질수록, 점점 더 분위기는 양키스로 기울었다.
분명 매리너스는 질척하게 고유석의 바짓가랑이를 잡았지만, 마치 무소의 뿔처럼 그 모든 방해를 뚫으면서.
“5구, 몸쪽, 헛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로빈슨 카노를 첫 타석에 이어, 다시금 삼진으로 처리하며! 일곱 번째 탈삼진을 올립니다!”
꾸역꾸역 삼진을 만들었으니까.
분명 지난 경기와는 조금 느낌이 달랐다. 트윈스전에서는 시종일관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줬다면. 이번 경기에선 평소보다 많은 투구수를 소모하고, 질질 승부가 끌리기도 하면서, 찝찝한 상황이 이어졌으 말이다..
“스트라이크 아웃! Go! 넬슨 크루즈를 헛스윙 삼진으로 잡아내며, 삼진 세 개로 4회 초를 마칩니다! 잔루 1루!”
허나 그렇기에 더욱더 지독스럽게 느껴졌다. 그런 모든 방해를 꿋꿋하게 견디며, 결국에는 삼진을 잡았으니까.
그런 모습이 그를 바라보며, 기대했던 팬들에게서 환호성을 끌어내는 동시에.
어쩌면 다음 상대라고 할 수 있는 양키스의 목덜미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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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양키스, 그 위대한 팀의 단장이자, 악의 제국의 섭정이라고 할 수 있는 브라이언 캐시먼은 아랫입술을 강하게 씹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티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와 화려하게 펼쳐진 영상이 그의 기분을 불편하게 만들었으니까.
현재 양키스의 경기도 진행 중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양키스가 아닌, 애슬레틱스와 매리너스의 접전을 눈에 담고 있었다.
와일드카드 경쟁팀인 매리너스를 관찰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와일드카드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할 경우, 상대팀이 될 확률이 높은 애슬레틱스를 보기 위해서도 아니고.
그는 한 명, 단 한 명의 투수만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투수와 그가 선보인 피칭이 그의 신경을 긁었다.
아니, 어쩌면 빌어먹을 스타인브레너, 그의 고용주들과 가졌던 방금 전의 통화 때문일지도 모르고.
‘어떻게든 굴욕을 면해라···’
악의 제국의 황제이자, 양키스의 Big Boss였던 조지 스타인브레너에게서 그의 제국을 물려받은 아들들은 아버지만큼 유능하진 못했다.
하지만 딱 두 가지는 아버지와 닮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자존심이었지.
세계 최고의 야구팀, 그리고 최고의 명문팀인 양키스가, 언제나 최고여야만 한다는 자존심 말이다.
다른 하나는 브라이언 캐시먼, 자신을 못살게 구는 것이고.
그런 스타인브레너가 직접적으로 요구했다. 어떻게든 폭탄을 돌리라고. 양키스가 아닌, 다른 팀에게 터지도록 하게 만들라고.
‘말이야 쉽지.’
참 쉽게 말했지만, 그것만큼 어려운 말이 없었다. 당장 작년 똑같은 투수에게 당했던 노히터도, 결국 피하지 못했으니까.
양키스만이 아니라, 그와 상대한 메이저리그의 모든 팀들이 마찬가지였지. 모두 다 한 번쯤은 굴욕을 당했다.
-아웃!
저 한 명의 투수에게. 현재도 매리너스의 굴욕이 이어지고 있는 중이고.
5회 초, Go는 삼진을 하나 더 추가했다.
조금은 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구는 매리너스인데도, 결국 여덟 개나 잡았지, 400K까지는 19개만 남았고.
그리고 그 말은 곧 정말로 가시권에 들어왔다는 뜻이었다.
아직 19개나 남았는데, 그게 어떻게 가시권이냐고?
‘이번 시즌에 20삼진을 두 번이나 달성해본 투수지. 그것도 레드삭스를 상대로.’
올해의 레드삭스가 강하다는 건, 라이벌인 양키스가 가장 잘 알았다. 그들에게 밀려 지구 2위인 처지니까.
그런 숙적인 레드삭스에게 가해졌던 치욕이, 양키스에게 덮칠지도 모르지.
설사 그때와 달리, 지금은 긴 시즌, 수많은 이닝을 보내면서 체력이 떨어졌다고 해도.
‘이제 9월. 체력이 떨어져도 한참이나 떨어졌을 시기이지만, 그럼에도 가능하지.’
작년 9월 28일, 정규시즌 마지막 등판에서 퍼펙트와 18K를 올렸던 투수기에 안심할 수가 없고.
그렇기에 고용주의 당부가 어렵게 느껴졌다. 언제, 어디서, 어느 때에 무엇을 하든지 간에, 결코 이상하지 않은 투수였으니까.
-스트라이크!
그렇기에 탐스럽기도 했고.
브라이언 캐시먼은 살짝 입맛을 다시며, 공동 구단주 중 한 명인, 할 스타인브레너가 당부와 함께 남겼던 말을 떠올렸다.
‘Go, 그가 FA로 언제쯤 풀리냐, 미리 준비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라···.’
조금은 황당하기도 했다. 매번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준비’라는 단어를 꺼냈으니까. 그에게 자주 시달렸던 브라이언 캐시먼으로선, 귀를 의심케 만드는 수준이지.
그런 믿기지 않는 말을 꺼낸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Go에게 입히자는 거다.
‘핀 스트라이프를.’
브라이언 캐시먼은 어쩌면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과 망할 스타인브레너들의 생각이 일치한 순간일 거라고 생각했다.
-스트라이크!
저 피칭을 볼 때면, 자신도 그런 생각이 들고는 했으니까.
현재 가장 화려한 슈퍼스타이고, 최고의 선수이니. 당연히 핀 스트라이프를 입어야 할 것 같다고.
그 장면을 떠올린 순간,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질 정도였지.
어쩌면 젊을 적부터 조지 스타인브레너에게 ‘멍청한 애송이’라는 폭언과 함께 세뇌를 당하듯 그의 철학을 교육받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스트라이크 아웃!
허나 그건 먼 미래의 일이다.
지금부터 차근차근 페이롤을 줄여가며, 미리 대비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아직은 한참이나 남은 이야기지.
지금 저 투수는 핀 스트라이프가 아닌, 특유의 촌스러운 녹색이 돋보이는 애슬레틱스의 유니폼을 입고 있다.
그렇기에···
-스트라이크 아웃! Go가 다시금 샌디 코팩스와 동률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번 시즌 382번째 탈삼진!
그 피칭을 지켜보면서 입술을 씹을 수밖에 없었다.
5회 초, Go는 평소처럼 빠른 인터벌을 선보이며, 삼진 하나 추가하는 것으로 이닝을 마쳤고.
이어진 6회에선 안타 두 개를 허용했지만, 마찬가지로 삼진 역시 두 개 더 추가했다.
-10번째 탈삼진을 잡아낸 Go! 놀란 라이언과 다시 동률! 그리고 400K까지 남은 삼진은 단 17개입니다!
그렇게 그는 양키스를 향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 자신이 도륙한 383명의 타자들의 피로 흥건하게 젖은 모습으로.
양키스에게, 그토록 위대한 양키스가 창단되기도 전에나 있었던 최악의 굴욕을 선사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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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회 초에 오르는 몸은 평소보단 확실히 무거웠다. 지난 경기와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어거지로 삼진을 잡아낸 경기였으니까.
‘드디어 마지막이구만.’
마지막까지도 지독스럽게 날 잡아 뜯으려던 매리너스와도 이제 안녕이라는 거지.
물론 아직 끝난 건 아니기에, 조금은 지친 몸에 계속해서 힘을 쏟아부어야 하지만 말이야.
‘일단 최소조건은 갖췄네.’
그래도 목표했던 것처럼 열두 개는 아니지만, 열 개나 잡았으니, 이 정도면 최소치는 달성했다. 그렇기에 팬들도 그럭저럭 만족하는 눈치이고.
다만 그들의 히어로인 나와 마찬가지로 하나 같이 욕심이 많은 사람들이라서. 마지막까지 착실하게, 하나라도 더 올리길 바라는 눈빛이었지만 말이야.
‘당연히 그래야지.’
물론 나도 같은 생각이다.
역시 마음이 통한다니까.
어쩌면 그렇기에 이 사람들이 날 너무나도 사랑하는 걸지도 모르지.
‘오늘의 마지막 이닝인데, 약쟁이부터 시작이라니.’
그런 기대감 속에서 시작된 7회 초. 선두타자는 4번타자 넬슨 크루즈였다. 6회에 안타를 두 개나 맞았거든. 그래도 간신히 삼진 하나 잡아냈으니 그거면 된 거지.
‘생각해보니, 오늘 삼진은 약쟁이들이 담당해줬네.’
참고로 오늘 약쟁이 삼인방이 잡혀준 삼진이 현재까지 일곱 개였다. 전타석 삼진이지. 무려 70%의 지분율을 자랑하는 것인데,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그저···
“파울!”
기왕 서비스하는 거, 마지막까지도 확실하게 하라고 강요했을 뿐.
높은 하이 패스트볼.
배트가 나왔다. 큰 걸 노린 건지 작정하고 당겼지. 다행히 살짝 어긋나면서 파울이 됐지만, 그래도 제법 비거리가 큼직했다.
‘하긴, 내가 좀 지친 게 눈에 보일 테니까.’
원래도 스윙이 큰 타자이지만, 더욱더 욕심이 생길 수밖에. 그것이 위협적이게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했다.
“스트라이크!”
기어코 삼진 하나를 더 챙겨주려는 것 같았으니까.
이번에도 높은 코스.
허나 떨어지는 서클 체인지업을 예측한 듯, 살짝 낮게 휘두른 탓에 이번에도 배트가 헛돌았다.
그래도 타이밍은 거의 따라왔네. 확실히 나한테 많이 적응하기는 했어.
하이 패스트볼인 척 서클을 던질까, 생각하긴 했는데, 그랬으면 큰 거 맞았겠네. 다행이구만.
‘질질 끌지 말고, 이걸로 끝냅시다.’
아쉬운 듯 혀를 차며 스윙을 장전하는 타자와 눈을 맞춘 채, 왼팔을 큼직하게 휘둘렀다.
이번에도 높은 코스.
타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힘이 조금 빠진 상황에서, 같은 곳으로 연달아 세 개가 들어왔으니, 머리가 터질 지경이겠지.
특히나 직전에 잘못된 생각으로 헛스윙을 했기에, 더욱더 고민스러울 테고.
결국 결단을 내린 건지, 그는 배트를 휘둘렀고, 본인이 내린 결정에 의심을 가지지 않았다.
꽤나 올곧게 뻗은 스윙. 잘 봤다. 멋지게 휘두르네. 약쟁이 주제에 폼은 살아있구만. 그래도 오늘은 좀 고맙네. 카노에 이어서 삼진 세 개 당해줘서 말이야.
이번엔 서클 체인지업.
내 과감한 공격성에 의미를 두고, 연달아 포심 세 개를 던진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은데. 서순이 틀려먹었구만.
2구째에 보여준 스윙을 다시금 선보였다면, 아마 지금쯤 타구가 담장을 넘어갔겠지만, 공은 포수 글러브에 들어갔으니, 이젠 의미 없지.
“스트라이크 아웃!”
“Youuuuuu Suck!”
“Hell Yeah!”
“Sixteen!”
그것으로 오늘 경기의 11번째 탈삼진이 올라갔다. 마지막임을 직감한 듯, 사자처럼 울부짖는 팬들의 우렁찬 포효와 함께.
“아웃!”
“아웃!”
이후 남은 타자들이 나란히 범타로 물러나면서 이닝 종료. 11개의 탈삼진과 함께 8월의 마지막 경기가 막을 내렸다.
400K까지 남은 탈삼진은 열여섯. 할 수 있는 건 다 했으니, 이제 남은 건 기도하는 것뿐이지.
‘잭팟이 터졌으면 좋겠네.’
양키스전에서 내 컨디션이 좋기를.
다행스럽게도, 지친 몸을 이끌고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길에 빨아들인 밤공기는 꽤나 상쾌했다. 마치 내 기도를 잘 알아들었다고, 응답해준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