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1차전이 끝나고, 2차전마저 승리를 차지한 뒤, 경기가 끝나고 추민수 선배와 만났었다.
내일은 낮 경기고, 경기 마치는 대로 헤어질 텐데, 아무리 그래도 식사 정도는 대접해 드려야지.
물론 추민수 선배가 다른 팀으로 이적하기 전까지는, 난 저쪽 홈에서 물 한잔조차 못 얻어먹겠지만 말이야.
“Fuuuuuuuuuck!”
“Choo! 네가 어떻게-”
“이 배신자아아아아아!”
그렇지만 아무래도 괜한 짓을 했던 것 같다. 소고기 대접했었는데, 신토불이 한우는 아니지만, 미국 소도 약빨이 좋나 보네.
3차전에서 1회 초부터 멋들어진 홈런을 날리시며, 막강한 파워를 뽐내는 걸 보니,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역시 소고기는 언제나 옳아. 전날 먹은 고기 덕분에 힘이 철철 흘러넘치는 건지, 바로 홈런 치시잖아.
뭐랄까, 졸지에 이적행위를 해버린 것 같아서 기분이 좀 찝찝하네.
나로 인해서, 모든 한국인들을 사랑하게 된 오클랜드이기에, 추민수 선배 역시 반쯤 아군으로 취급받았는데.
그래서 그런지, 팬들은 배신이라며 분노에 차 소리치기도 했다. 상대팀인데 뭔 배신이야.
“우우우우우우!”
“좋~다고 웃는 꼴 봐라!”
“꼴찌 새끼들한테 한 경기쯤은 적선해줄 수도 있지.”
그 이후로도 텍사스가 제법 점수를 내고, 반대로 우린 이전 경기와 달리 공격이 꽉 막히면서, 결국 3차전은 패배로 끝났다. 2승 1패의 위닝 시리즈구만.
앞선 2패보다, 마지막에 얻어낸 1승이 더욱더 달콤하게 여겨졌던 건지, 떠나는 레인저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었고.
그런 레인저스를 향해, 팬들은 애써 대담한 척 정신승리를 하기도 했는데.
‘다음에도 한 치의 자비도 없이, 제대로 조져야겠어.’
내가 성격이 좋지는 않은가 봐. 그런 모습을 보니, 왠지 좀 심술이 나네.
어쩌면 레인저스가 기뻐하는 게 싫은 걸 수도 있고.
그렇게 뒷마무리를 조금 찝찝하게 하면서, 레인저스를 돌려보낸 뒤, 우리도 뒤따라 오클랜드를 떠났다.
“간만에 다른 쪽으로 가네.”
“한동안 좀 편했는데, 이제 다시 고생 시작이구만.”
“그래도 여름에 원정 뺑뺑이 안 돌아서 다행이잖아?”
“그렇긴 하지.”
서부지구를 떠나는 건 꽤나 오래간만인 터라, 다들 조금은 아쉽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지막으로 멀리 원정을 떠났던 게, 저번 달, 인디언스전이거든. 전반기 말이야.
그 이후로는 지금까지 죄다 홈이거나, 아니면 가까운 AL&NL 서부지구 원정이거나 둘 중 하나였지.
목적지는 미니애폴리스-세인트폴. 미네소타 트윈스로 4연전을 치르는데, 후반기 들어서는 가장 긴 원정길이었다. 그 덕분에 시간이 넉넉했고.
“젠장··· 내가 X신이었지. 그렇게 털려놓고 또···”
“내- 내 밀머니··· 이 밀머니 약탈 놈! Suck 너 이 새끼 피칭이 아니라, 포커 연습하는 거 아니야?”
“먼저 한 판만 하자고 꼬셔놓고, 말들이 많으시구만. 그럼 이 돈은 제가 잘 쓸 테니, 여러분께선 제가 칼질하는 모습을 구경하면서 손가락이나 빠십시오.”
그래서 간만에 기내 도박장이 열렸다.
한동안은 팔자 좋게 포커칠만큼 비행시간이 길지 않았던 데다가, 또한 매번 나한테 밀머니를 가져다 바치면서, 트라우마가 생긴 건지.
다들 날 ‘밀머니 약탈자’나 ‘점심식사 도륙자’등으로 지칭하고, Bully(일진) 취급하면서 두려움에 덜덜 떨며 트럼프 카드 근처에도 얼씬 안 했었는데.
아무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두려움이 가셨는지, 제드 라우리와 마커스 시미언이 호기롭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확실히 둘 다 머리가 좋지는 않은 것 같아. 결과가 뻔히 정해져 있는데, 또다시 만용을 부리는 걸 보면 말이야.
경험에서 배우질 못하고 있잖아. 설사 배우더라도 까먹고 다시 실수를 되풀이하거나.
그 덕에 식대가 두둑해졌으니 나야 감사하지만.
“나도 이걸로 소고기나 사 먹어야겠네.”
추민수 선배도 내가 사준 소고기 먹고 홈런 치던데, 나도 남의 돈으로 소고기 사 먹고 다음 등판도 잘해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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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히 다가오는 400탈삼진에, 요즘 들어 언론에서는 부쩍 저런 이야기가 많았다.
1800년대, 야구가 막 태동하던 시절 이후, 처음으로 탈삼진의 백의 자릿수가 4에 도달할지도 모르니 어쩌면 당연하겠지.
지금 내 페이스를 감안하면, 이미 기정사실이나 다름없기에, 더욱더 기대하는 것도 있을 거고.
“프런트는 벌써부터 이벤트 준비가 한창이라던데. 아주 성대하게 장식할 거라는데?”
“내가 마케팅 팀 직원이랑 좀 친한데, 들리는 소문에 Suck 네 동상도 이미 만들어 뒀다더라. 콜리시엄 정문에 세워둘 예정이래.”
당연하게도 구단 역시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벌써부터 파티장을 만들고 있었다.
브루스와 마커스 시미언의 말에 의하면, 내 동상까지 준비했다고 하네.
물론 증언자의 진실성의 의심되기에, 아마도 개소리일 가능성이 높겠지만, 오클랜드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본 콜리시엄은 한창 꽃단장 중이기는 했다. 그러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니겠지.
“무슨 위대한 개츠비도 아니고··· 일 년 내내 축제구만.”
“그야, Suck 네가 워낙 미친 시즌 중이니까. 그나저나 Suck 네가 개츠비를 다 아네? 대단하다야. Suck 네가 책을 읽는다니.”
“그래, 잘 알지. 고등학교 시절 필독서였거든. 독후감도 썼었지. 그런데 지금 그 반응은 대체 무슨 의도지? 날 뭐라고 여기는 거냐고.”
“그냥··· 대단하다고.”
브루스 이 새끼, 저번에 프로토스 아니아니, 프로이트 이후로 날 조금 무식한 놈으로 생각하는 것 같단 말이야.
생각이 뻔히 보여서, 조금 사납게 노려보니, 알아서 깨갱하고는 황급히 도망쳤다.
‘요즘 제법 하는 짓이 마음에 들어서 만족하고 있었더니, 점점 이 투수님을 우습게 보는 것 같단 말이야. 조금 더 두고 봐야겠어.’
아무튼 그런 400K를 고대하며, 구단에서도, 언론에서도, 그리고 팬들도 다들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프런트에선 내심 홈에서 400K를 달성하길 바라는 것 같았다.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눈치가 가득했지. 당장 콜리시엄을 꽃단장하던 것만 봐도 그렇잖아?
마커스 시미언의 조금은 정확성이 의심스러운 따르면 동상까지 준비했다고 했으니, 아무래도 원정에서 찍어버리면 조금은 김이 새긴 하겠어.
‘일정을 생각하면, 오늘 경기 포함해서 세 경기 안에 해야 하는 건가?’
로테이션을 감안했을 때, 다음 등판은 홈으로, 다시 매리너스와 만난다. 그다음 경기 역시 양키스와의 홈 등판이고.
그 뒤로는 두 번 연달아 원정 등판일 가능성이 높으니. 내 탈삼진 페이스를 고려하면, 양키스전이 홈에서 400K를 할 수 있는 마지막 커트라인인 셈이지.
‘세 경기 안에 탈삼진 44개라···’
대충 오늘 14개 잡고, 그다음 매리너스와 양키스전에서 15개씩 잡으면 된다는 거구만.
‘뭐, 가능성은 있네. 충분히 도전해볼 만해.’
약간은 난이도가 높긴 하지만, 그 정도야 가뿐하지.
나도 기왕이면 홈에서, 팬들이 꽉 찬 콜리시엄에서 환호를 받으며 달성하고 싶으니. 한번 도전은 해봐야하지 않겠어?
계산을 마친 뒤, 다시 워밍업에 집중했다. 조금이라도 더 가능성을 높이려면, 일단 먼저 오늘 상대인 쌍둥이부터 조져야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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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소타 트윈스는 현재 아메리칸리그 중부지구에서 2위를 기록하고 있다.
1위인 인디언스와는 13승 차고, 3위인 타이거즈와 8승 차니, 사실상 2위 자리가 거의 고정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이렇게 설명하면, 스몰마켓 치고는 제법 잘 나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레인저스랑 비슷하지, 성적 자체는. 트윈스가 약간 앞서기는 하지만. 또이또이해.’
정작 실제 성적은 우리지구에서 꼴찌인 레인저스와 비슷하다. 승률이 5할도 안 되거든.
지구 2위와 지구 꼴찌의 성적이 비슷하다는 것이 좀 의아하게 여겨지겠지만, 그만큼 올해 알중부가 개판이라는 뜻이었다.
과장을 좀 보태서, 거의 멸망 수준이지. 앞서 언급한 3위의 타이거즈와 4위인 화이트삭스, 그리고 5위 로열스가 메이저리그 전체 순위에서 나란히 뒤에서 2,3,4등을 찍고 있으니까.
오죽하면 사이클이 좀 내려간 게 아니냐는 평가를 받는 인디언스가 여전히 독재 중이겠어.
학교 성적으로 비유하자면, 트윈스는 꼴찌 반의 2등인 셈이지. 그래서 정작 전교 석차는 하위권인 거고.
‘마치 고등학생 시절 내 모습을 보는 것 같구만.’
내가 고등학교 2학년으로 올라갔을 대, 학교에서, 학업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이유로 축구부, 야구부를 죄다 한 반에 몰아넣었었다.
일종의 운동 특별반 혹은 꼴찌반을 편성한 건데. 그때 내가 딱 이랬어, 반에서 3등까지 했거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반에서도 꼴찌 하던 애들은 진지하게 한글은 다 뗐는가 싶다.
나도 대부분의 수업을 깊은 숙면으로 처리했던 사람인데, 그런 나보다도 훨씬 못하다니. 이것 역시 엘리트 체육 시스템의 어두운 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런 과거의 추억은 차차하고, 아무튼 그런 꼴찌반의 2등인 트윈스이기에, 그리 어려운 상대는 아니었다.
팀 홈런과 장타율이 아메리칸 리그에서 10위권 수준이거든. 그나마 괜찮은 안타와 볼넷, 출루율도 딱 중간 정도고.
그런 미네소타 트윈스를 상대로 오늘 내 목표는 딱 하나. 최대한 삼진을 잡는 거지.
‘최소한 열세 개, 그 정도는 잡아야 그나마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생길 테니까.’
그런 삼진을 잡기 위해서, 오늘은 약간의 피칭 방식을 바꿔볼 생각이었다.
상대 타선이 파워가 약한 편이잖아? 그걸 한번 이용해보는 거지.
물론 그 전에 일단 간을 좀 봐야겠지만.
그런 마음가짐으로 1회 말, 마운드에 올랐다. 최근 네 경기 동안 홈에서만 등판했어서, 1회 말에 오르는 건 오랜만이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정면을 바라보자, 타자도 성큼성큼 홈 플레이트로 입성했다.
‘조 마우어, 진짜 최고의 포수였는데··· 언제나 부상이 문제라니까.’
1번타자 조 마우어.
오늘 경기의 리드오프다.
내가 한창 한국에서 공을 던지며, 메이저리그를 꿈꿨을 때, 그는 그야말로 최고의 포수로 유명했던 선수지.
오죽하면 신이 완벽하게 설계한 포수라는 평가를 받았겠어.
미국으로 건너와서 마이너에서 구를 때도, 약간의 부침은 있었지만, 그래도 활약을 계속 이어갔었지만.
하지만 타구에 맞으면서 뇌진탕을 겪은 이후로 1루수로 완전히 포지션이 전환됐다.
‘작년엔 준수하게 활약했지만, 올해는 다시 폼이 떨어졌어.’
1루수로 전환한 이후는 솔직히 먹튀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줬고, 특히나 홈런 파워가 그리 좋지는 않기에, 대단히 위협적인 타자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몇 차례나 타격왕을 차지했던 선수이고, 올해도 여전히 2할 후반대의 타율을 기록 중이기에, 컨택은 여전히 위협적이겠지만.
“파울!”
초구, 당연히 몸쪽 포심 패스트볼. 과감하게 배트가 나왔고, 제법 매섭게 때려 맞혔다.
오늘 좀 감각이 좋은 날인가?
한번 정점을 찍어본 타자들의 경우, 그 시절의 감각이 돌아오면 그 경기에 한해서는 대단히 위험해진다.
그렇기에 조금은 조심스럽게 2구를 던졌고, 이번에도 파울이 나왔다.
‘감이 좋은 날이네.’
역시 감이 좋은 날이구만.
단 2구에 불과하지만, 제법 정확하게 따라오는 스윙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지.
과감하게 타격하는 것을 보아, 아무래도 조 마우어 본인도, 오늘 제법 타격감이 좋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네.
“볼.”
3구는 바깥쪽.
헛스윙을 끌어내기 위해 슬라이더를 던졌지만, 아쉽게도 타자는 가만히 지켜봤다.
“파울!”
4구째에 높게 던진 하이 패스트볼도 아슬아슬하게나마 커트했고.
‘오늘 이쪽은 삼진 잡기가 좀 까다롭겠네.’
최대한 삼진을 많이 잡는 것이 목표이기에, 타격감이 좋아 보이는 타자가 조금은 짜증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괜찮다.
“스트라이크 아웃!”
솔직히 그보다 더 까다로운 타자들도 몇 번이나 삼진으로 잡아봤으니까.
다시 기습적으로 몸쪽, 낮은 코스에 이번에도 유인구라고 여겼던 건지.
그는 다시금 스윙을 참았지만, 빠르게 꽂힌 포심 패스트볼이 세 번째 스트라이크를 만들어냈다.
오늘 경기의 첫 번째 삼진이구만. 비록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어쨌든 삼진을 잡았으면 된 거지.
‘오케이, 일단 나쁘지 않네. 제법 먹히겠어. 첫 스타트는 좋게 끊었으니, 최대한 눈덩이를 굴려보자고.’
이제 남은 건 이걸 발판으로 해서, 점점 더 스노우볼을 굴리는 것이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그다음 로건 포사이드는 4구째, 서클 체인지업을 멍하니 지켜보면서, 조금 더 편하게 삼진으로 잡혀줬고.
“스트라이크 아웃!”
마이너에서 도핑한 사례가 있는 약쟁이, 에디 로사리오는 마찬가지로 4구, 높은 하이 패스트볼에 여지없이 배트가 헛돌았다.
“···”
“You Suuuuuck!”
“Hell Yeah!”
“트윈스가 Suck될 시간이다!”
KKK.
그 앞에서 타깃 필드는 대부분의 원정지가 그랬듯, 홈팬들의 침묵과 레이더스의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꽤나 만족스러워 보였지.
나도 제법 만족스러웠고. 비록 이제 겨우 세 타자를 확인한 것에 불과하지만, 일단 이 세 명은 확실히 예상처럼 파워가 별로 좋아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충분히 먹힌다는 것도 알아봤으니, 이대로 쭉쭉 가보자고. 어디보자, 이제 41개 남았나? 음, 생각보다 금방 하겠어.’
그러니, 오늘 경기 안에 매직넘버를 못해도 30개까지 줄여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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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파울!”
연이은 파울이 나오자, 홈팬들은 조금 기대감을 가지기도 했다. 얼핏 보면, 타격감이 좋아 보이기도 했으니까.
조금만 더 타이밍이 잘 맞는다면, 정타가 나와, 안타가 될지도 몰랐지.
그렇기에 들뜬 눈으로 타석을 내려본 트윈스의 팬들이었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You Suck!”
이번에도 역시나 지긋지긋한 삼진콜과 빌어먹을 원정팬들의 환호성이 울릴 뿐이었다.
이번 시즌, 처음으로 만난 상대이고, 작년에도 딱 한 번밖에 겪어보지 못한 투수이기에.
대단하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들기도 했지만, 역시나 현실은 씁쓸했다.
“에휴, 파울만 죽어라 치다가 끝나겠네.”
“야이 X신들아! 안타 좀 치라고! 왜 쳤다 하면 죄다 파울 라인을 넘는 거야!”
“차라리 범타라도 쳐! 파울만 냅다 치다가 헛스윙 삼진 좀 그만 당하고!”
자연스럽게 타자들을 향한 불만이 생기기도 했지만, 트윈스 타자들 입장에선 조금은 억울한 일이기도 했다.
“진짜 더럽게 무거워. 도통 밀릴 생각을 안 한 다니까?”
“정확하게 맞은 것 같았는데, 그냥 힘에서 찍어 눌렸어.”
솔직히 어떠할 방도가 없었으니까. 그들로선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아무리 공을 때려도, 그냥 배트가 밀리는데 뭘 어쩌겠는가?
보통 86~7마일. 그리고 종종 89마일이 찍히는 전광판이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100마일 그 이상의 무게감을 선보이며, 트윈스 타선을 완전히 압사시키고 있었으니까.
“패스트볼, 오늘 좀 자주 던지지?”
“어, 비중이 늘어났어. 분석 자료보다 조금 더. 이 정도면 거의 60%는 되겠는데?”
그리고 투수 역시 그런 트윈스의 사정을 깨달은 건지, 패스트볼의 비중을 평소보다 더욱더 높여버렸다.
워낙 구종이 다양한 터라, 평소 제 아무리 높아도 40%를 넘지 않는 포심 패스트볼의 비율을 오늘 경기에선 거의 60%까지 늘려버리면서.
아주 작정하고 힘 싸움만 하겠다는 뜻이었지. 어차피 상대가 자신을 이겨내지 못한다는 걸 알아챘으니까.
그토록 파괴적인 포심 패스트볼도 문제였지만, 진짜 문제는 나머지 40%였다.
“윌리안, 하나 날려버려!”
“너라도 믿는다! 어떻게든 하나만 제대로 쳐줘! 장타는 어차피 기대도 안 하니까, 안타라도 쳐!”
3회 초, 투아웃.
타석에 오른 윌리안스 아스투디요는 조금 입맛을 다셨다.
‘어떻게든 맞추는 건 자신 있는데, 그게 그렇게 무겁다고?’
그의 재능은 간단했다. 공을 맞히는 것. 타격에서는 아주 발군의 능력을 보여줬지.
비록 그것이 안타가 되고, 장타가 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지만, 어쨌든 들어오는 공에 한해선, 무엇이든 쳐낼 자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스트라이크의 비중이 훨씬 높은 상대 투수와 상성이 좋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이어진 동료들의 증언이 마냥 그렇지도 않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솔직히 파워가 좋은 편은 아니니까.
‘일단 하나 쳐보기만 하자.’
그래도 막상 까보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기에, 그는 배트를 꽉 틀어쥔 채 타석에 올랐고.
그런 그를 환영하듯, 재빠르게 날아온 초구를 제법 정확하게 때려냈다.
찌릿한 손맛이 올라오는 순간, 어떻게든 임팩트를 최대한 담아내기 위해 두툼한 체구를 힘껏 비틀었으나.
“파울!”
공은 앞선 타석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배트를 밀어내며, 파울라인을 넘어갔다.
아슬아슬하게 주심의 머리 위를 지나치며, 파울이 됐지.
‘이런 미친···’
그리고 윌리안스 아스투디요는 그제야 깨달았다. 여러 언론이 했던 말들과 동료들의 증언이 결코 과장되지 않았음을.
나무판자 하나만을 가지고, 대포알에 맞선 듯한 느낌마저 들었으니까. 배트를 쥔 손바닥이 쓰리게 아려오기도 했고.
‘이걸 안타로 만들라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떻게든 정타를 만들고, 안타를 치라며 소리치는 팬들이 조금 원망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으나.
그는 메이저리거이기에, 물러설 수는 없었다.
“파울!”
곧이어 날아온 공.
이번에도 포심 패스트볼.
앞서 이미 그 위력을 맛보았기에, 조금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억지로 이겨내며 배트를 휘두르자, 다시금 공이 파울라인을 넘었다.
그래도 이번엔 제법 날아가긴 했지. 반발력이 줄어든 건지, 통증도 조금 덜했고.
‘그래, 어떻게든 살짝 넘기기만 하자. 조금만 더 정확하게 쳐보자고.’
그래서인지, 조금은 자신감이 고개를 쳐들기도 했고 말이다. 어쨌든 맞히는 건 가능했으니까.
비록 그 떠오르는 듯한 시각적인 효과에 절대로 속지 않고, 최대한 집중을 기울여서 공을 쳐야 하기는 했지만.
“파울!”
다시금 파울.
더욱더 자신감이 차올랐고, 이번에야 말로 정타로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머지 40%가 위력을 발휘했다.
‘왔다.’
몸쪽으로 날아온 공.
이미 세 차례나 봤기에, 금방 눈에 익었다.
‘오프스피드야!’
그렇기에 오프스피드라는 확신이 들었고. 상대는 그런 투수이니까.
그렇기에 조금 더 빠르게 스윙을 가져가며, 특유의 컨택 능력을 발휘하려던 윌리안스 아스투디요였으나.
“스트라이크 아웃!”
공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떨어졌고, 중간지점부터 더욱더 느려졌다. 마치 급브레이크를 밟은 것처럼 보일 정도로.
연달아 파울을 만들어내고, 비중이 확 올라온 포심 패스트볼을 지켜보면서 그에 익숙해진 타자들에게.
그 외의 공, 특히나 오프스피드는 어쩌면 이전에 고유석을 상대했던 다른 타자들보다 훨씬 더 고약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다시금 헛스윙 삼진.
연달아 나온 파울에, 앞선 타석들에도 혹시나 하며 다시금 기대감을 품었던 트윈스 팬들은 이번에도 배신당했다.
그대로 이닝을 종료하며, 3이닝, 경기 초반을 깔끔하게 지워버린 고유석을 보며.
멍한 표정으로 돌아온 윌리안스 아스투디요를 맞이해준 조 마우어는 고개를 저었다.
세 차례의 타격왕을 찍으며, 정상급 타자로서 수많은 투수들을 상대하고, 마찬가지로 최고의 포수로서 수많은 투수들과 호흡을 맞춰봤던 그의 누적된 경험이 이야기해줬으니까.
“오늘은 아예 대놓고 파이어볼러군.”
저 투수가 지금 자신들을 상대로 마치 제자신이 대단한 좌완 파이어볼러라도 되는 것처럼 굴고 있다는 것을.
고작 89마일, 조금 늘어서 89.5마일이 최고구속으로 찍히는 느린 포심 패스트볼로 말이다.
리그에서 가장 느린 구속을 가진 투수에게, 그런 짓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 조금은 황당하고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보다도 더 서글픈 것은.
“3이닝 7삼진···”
그 오만한 자신감이 트윈스를 상대로 무척 잘 먹히고 있다는 것이었다.
파울 플라이로 잡힌 두 개의 아웃을 제외하면, 죄다 삼진으로 잡아먹혔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