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왼손에서 공이 떠나는 순간 약간 삐끗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끝까지 채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 살짝 떴거든.
‘실투네.’
보통 이런 걸 가지고 실투라고 표현하지.
조금 더 저속하게 표현하자면, 삑사리가 났다고 말해도 되고.
종종 팬들, 심지어 전문가들마저 나 보고는 그렇게 표현하고는 한다. ‘실투가 없는 투수’라고. 9이닝 내내 단 한 번도 실수하지 않는다고.
얼마 전에 나를 분석한 칼럼을 보기도 했는데, 거기서도 내가 언제나 100%를 유지하고, 그거야 말로 내 가장 큰 장점이라는 식으로 평가했지.
‘딱히 그렇지도 않은데 말이야.’
솔직히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듣는 입장에선 좀 황당하다. 난 절대로 실수가 없는 사람이 아니거든. 애초에 사람이라면 실수가 없을 수가 없지.
대충 100구를 던진다고 하면, 그중에서 못해도 6~7구, 많으면 10구까지도 실수가 섞인다. 하나하나 언급하지 않는 것뿐이지.
그런데 어째서 사람들은 날 더러 실투가 없다고 평가하는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세이프!”
결과적으로 봤을 때, 실투라는 생각이 들지 않거든.
살짝 삐끗한 공을 주릭슨 프로파가 잘 받아쳤다. 쭉 당겼고, 제법 정확하게 맞기도 했지만, 멋들어진 라인 드라이브나, 힘 있는 장타가 나오지는 않았다.
그저 3루 방향으로 둥실 떠오른 공이 맷 채프먼을 아슬아슬하게 넘겼을 뿐이지.
수준급 수비력을 자랑하는 맷 채프먼이기에, 즉각적으로 대처한 만큼, 타자주자는 아슬아슬하게 간신히 1루 베이스를 탈취했다.
“우우우우우!”
“야이 X새끼야! 삼진이나 처먹으라고!”
야유도 먹었고.
원래도 날 상대로 안타를 치면, 우리 팬들, 특히나 레이더스에게 욕먹는 거야 일상이지만.
쭉 이어지던 퍼펙트를 깨트리는 첫 안타였기에, 더욱더 욕을 먹기도 했다.
‘오늘은 날이 아니었나 보네.’
상대가 다른 팀도 아니고, 레인저스라서 그런지, 팬들도 조금 기대감을 가졌고, 나도 혹시나 하기는 했는데. 아쉽게도 5회에서 종료구만.
어쨌든 내 기준에서 이번 공은 명백하게 실투다. 그렇다면 지금 내 피칭을 보는 사람들도 그렇게 평가할까?
‘절대로 아니지.’
아니, ‘아쉽게 안타가 됐구나’라고 평가하겠지. 실투를 정확하게 받아쳤다기엔. 조금은 애매한 결과였으니까.
내가 등판하는 날이면, 수비 시프트는 앞으로 당겨진다. 내야수들도 더욱더 앞으로 나와 있고.
나오는 타구 태반이 내야땅볼이니, 아주 합리적인 포지셔닝이라고 할 수 있지.
맷 채프먼의 수비력을 감안했을 때, 평범하게 살짝 뒤로 물러나 있는 시프트였다면 오히려 그냥 손쉬운 범타가 됐을 가능성도 적지는 않다.
다르게 말하면, 그나마 실투가 이 정도라는 뜻이기도 하고. 내가 좀 삐끗해야만 아슬아슬한 안타가 된다는 뜻이니까.
‘오히려 좋아, 얘한테 실투 던졌으면, 수월하게 넘어가진 않았을 텐데, 차라리 액땜한 게 낫지.’
내 전체 투구 중 10%의 실투가 지금처럼 아슬아슬한 수준의 안타가 만들어진다면.
나머지 정확하게 던진 90%는 아주 높은 확률로···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가 된다.
대부분은 타자가 제대로 맞히지도 못하지. 바로 지금처럼.
6번타자 조이 갈로.
지난 타석에서 삼진으로 물러났던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면서 배터박스로 들어왔다.
작년, 콜리시엄에서 하나 날렸던 것처럼, 이번에도 어떻게든 한방 날려보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해 보였지.
하지만 바깥쪽으로 살짝 걸친 포심 패스트볼에 배트가 헛돌았다. 이번엔 마지막까지 끈적하게 잘 달라붙었네.
‘이놈의 메이저리그는 공이 미끄러워서 못 살겠단 말이야. 조금이라도 마음 놓으면, 바로 손에서 미끄러지니···.’
만약 조이 갈로에게, 앞선 실투를 던졌다면, 조금 위험했을 수도 있다.
멘도사 라인(타율 0.215) 밑으로 떨어진 타율에서 알 수 있듯, 엄청난 공갈포지만.
그 대신 올해도 40홈런을 찍을 수 있을 만한 막강한 파워를 가진 만큼, 가벼운 좌전안타 정도로 끝나진 않았을 테니까.
“스트라이크!”
물론 그렇기에 아주 심혈을 기울여서 던졌지만 말이야.
다른 타자라면 모를까, 아무리 레인저스가 만만해도 얘 만큼은 온 힘을 다해서 상대해야지.
“볼.”
2구는 다시금 바깥쪽. 하지만 조금은 낮게. 이번엔 조금 신중하게 공을 골랐다.
왠지 그럴 것 같아서, 슬라이더로 존안에 집어넣으려고 했더니, 안 잡아주시네. 너무 낮았나?
왠지 볼 카운트 하나를 손해 본 것 같아서 살짝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지.
“파울!”
기습적으로 던진 몸쪽 공.
기다렸다는 듯이 배트가 나왔지만, 제법 묵직한 소리를 남긴 채, 파울라인을 훌쩍 넘어, 관중석을 때렸다.
정확도가 떨어져서, 코스가 안 좋았지만, 역시 힘은 장사네. 꽉 깨물고 던졌는데, 제법 잘 밀어내는군.
“볼.”
“스트라이크 아웃!”
역시 절대로 안 맞아야겠어.
까딱했다간, 또 콜리시엄에서 타구가 담장을 넘는 꼴을 보게 될지도 모르니까.
또다시 몸쪽으로 던진 포심. 조금 더 몸쪽으로 붙은 코스였기에 조이 갈로는 슬쩍 몸을 피하면서 잘 걸렀지만.
연달아 바깥쪽 낮게 서클 체인지업을 던지자 갈등했다. 내가 대부분은 스트라이크를 던지기에, 결국 결단을 내린 건지, 우렁차게 휘둘렀지만.
‘너한테는 다르지.’
적어도 얘한테는 무작정 스트라이크만 고집할 수는 없지.
뚝 떨어지는 공, 박력이 가득 느껴지는 스윙을 회피하며, 공이 포수 글러브 안으로 들어갔다.
헛스윙 삼진아웃.
반 바퀴 정도 회전한 조이 갈로는 이내 아쉬운 한숨을 내쉬면서 타석에서 물러났다.
‘여덟 번째던가?’
아마도 이번 경기 여덟 번째 삼진일 거다. 아님 말고.
“파울!”
“파울!”
곧이어 타석에 오른 로날드 구즈만은 이번에도 의욕을 보여줬으나.
“아웃!”
역시 어림도 없었다.
최소한 시즌 30홈런쯤 날릴 수 있는 파워를 갖추도록. 그래야 좀 날아가기라도 할 테니까.
그것으로 5회 초 종료.
잔루 1루를 남겨둔 채로 레인저스의 공격은 이번에도 손쉽게 분쇄됐다. 안타 하나가 아쉽네.
“수고했어, 안타는 신경 쓰지 마.”
브루스도 나와 마찬가지로 안타가 아까웠던 건지, 살짝 혀를 내두르며 위로하기도 했다.
“그냥 실투였어. 그걸 딱 받아치네. 주릭슨 프로파, 저 친구 크게 되겠는데?”
“12년에 데뷔했으니, Go 너보다 훨씬 선배인데, 누가 누구한테 그런 소리를···.”
사실 별로 위로는 필요 없는데 말이야. 나랑 호흡을 그렇게나 맞춰놓고도 아직까지도 나를 잘 모르는구만.
조금은 능청스럽게 타자를 칭찬하자, 브루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제 1이닝 남았지?”
“뭐가 1이닝 남아? 다음 이닝에 내려가려고? 너 오늘 완투하는 거 아니었어?”
“아니, 그거 말고, 200이닝 말이야. 경기 전에 194이닝이었으니까, 이제 199이닝 아니야?”
“아마도 그렇겠지? 아직도 좀 어처구니가 없네, 아직 8월인데 200이닝이라니···”
그러고 보니, 2년 연속 200이닝까지도 이제 1이닝만 남겨두고 있다.
숨 가쁘게 쌓은 덕분인지, 작년보다 좀 더 빠르네. 내 기억으론 저번 시즌은 9월 1일에 200이닝 찍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말이야. 28번째 등판이었고.
오늘이 20일이고, 시즌 26번째 등판이니, 올해는 그보다 12일, 2경기 더 빨리 찍네.
“딱 200이닝 찍고 내려가는 건 어때? 깔끔하고 좋잖아?”
“Nope! 어림도 없으니까, 괜히 설득할 생각 마세요.”
새삼 신기하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우리를 보며, 홀연히 다가온 스콧 에머슨이 은근슬쩍 밑밥을 던지기도 했지만, 어림도 없지!
사람이 정 없게 딱 200이닝으로 끊으면 쓰나. 인심을 두둑~하게 담아서 203이닝은 해야, 아~ 이 사람 참 정이 많구나! 하지.
내 말에 스콧 에머슨은 기대조차 안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슬슬 날 포기하고 있는 듯한 눈치인데,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되겠어.
아예 목줄을 놔버리고, 그냥 니 마음대로 하라고 할 때까지 말이야.
다행히 눈치로 봐선,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군. 아주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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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구째, 아웃! Go가 Choo를 내야플라이로 잡아내면서! 6회 초 종료, Go가 2년 연속 200이닝을 달성합니다!
6회 초가 종료되자, 구장 아나운서의 우렁찬 목소리가 낡은 스피커를 타고 울렸지만.
콜리시엄을 채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당연한 일이지. Suck이 고작 6이닝을 못 채울 리가 없잖아?”
“2년 연속 200이닝. 솔직히 다른 기록보단 좀 초라하네.”
“뒤에 300탈삼진도 붙여. 2년 연속 200이닝 300탈삼진. 어때? 훨씬 보기 좋지?”“
“뒤에 하나 더 붙였다고 느낌이 확 다르네. Suck은 진짜 미친놈이 분명해. 물론 좋은 쪽으로.”
“너도 마지막에 좋은 쪽이라는 뒷말 안 붙였으면 나한테 맞았을 거야.”
애초에 경기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이미 예정된 일이었으니까.
데뷔 이후로, 고유석이 6이닝을 채우지 못한 것은 단 한 경기밖에 없었다. 작년 7월, 메츠와의 인터리그 경기였지.
그마저도 강판이나, 체력으로 인한 투수교체라기 보단, 상대의 홈에서, 상대팀을 분노하게 만든 타격과 주루 플레이 때문에, 빈볼을 걱정하여, 내린 것이었고 말이다.
더군다나 상대가 레인저스이기도 했기에, 더욱더 걱정은 없었고 말이다.
“역시, 텍사스 놈들이랑 붙는 날은 항상 배신을 안 한다니까~”
“흥행 보증 수표지, 레인저스와 Suck은.”
“그럼그럼, Suck이 레드넥들은 언제나 기가 막히게 때려잡지. 사실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지만.”
레인저스는 애슬레틱스 팬들에게 일종의 보증 수표나 다름없었다. 절대로 배신하는 법이 없었지.
언제, 어디서든, 그토록 사랑하는 Go와 만나는 경기마다, 아무리 못해도 기본은 해줬으니까.
작년처럼 콜리시엄에서 큰 걸 한 방 맞는 불상사만 일어나지 않는다면야, 언제나 느긋하고, 여유롭게 볼 수 있는 경기였지. 오늘 경기도 그런 예상에서 빗나가지 않았고 말이다.
6이닝을 깔끔하게 처리하고, 200이닝을 찍은 뒤, 모두의 예상처럼 고유석은 여전히 마운드에 올랐다.
“휘이이이이익!”
“200이닝 찍었다고 교체하는 건 아닐까, 좀 걱정했었는데, 역시 Suck은 이래야지!”
“그럼그럼, 다른 것도 아니고, 텍사스 레드넥 새끼들이 상대인데, 못해도 7이닝, 아니, 9이닝 완투는 해야지!”
기대를 배신하지 않고, 다시금 마운드에 오른 고유석을 보며, 팬들은 환호성을 내지르기도 했지만.
몇몇 팬들은 조금 걱정스런 표정을 짓기도 했다.
“올해는 포스트시즌까지 나가는데, 너무 굴리는 거 아니야?”
“솔직히 좀 걱정이긴 하지. 이러다가 포스트시즌에서 갑자기 퍼져버리면···.”
“포스트시즌은 이미 확정이나 다름없는데, Go를 관리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어차피 연장계약이나 FA 못 잡을 선수니까, 잘할 때 굴리는 거지.”
“또 정규시즌에서만 실컷 신 내놓고 월드시리즈 못 갈까 봐 걱정이야.”
올해는 작년처럼 포스트시즌이 아슬아슬한 상황도 아니고, 이미 확정이나 다름없는데.
괜히 에이스를 과도하게 혹사시키다, 그 절대적인 에이스가 포스트시즌 직전에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재앙이 일어날 테니까.
특히나 정규시즌에 잘 나가고, 번번이 월드시리즈의 앞에서 물먹었던 애슬레틱스이기에.
그때의 기억들이 생생한 기존의 팬들, 레이더스를 비롯해 최근 유입된 팬들과 분류하기 위해 올드팬으로 지칭되는 코어 팬들은 더욱더 걱정스러웠고 말이다.
-스트라이크 아웃!
그런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 고유석의 7회 초 피칭은 마치 그런 팬들에게 이렇게 묻는 것만 같았다.
‘대체 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십니까?’라고 말이다.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은 느리게, 하지만 그 대신 조금 더 빠르게 제로백을 끊으며 빨라진 투구동작은.
과도한 혹사, 그리고 관리라는 말은 자신 같은 사람에게 하등 쓸모없는 것이라고 외치는 것만 같았으니까.
물론 그토록 굳건했던 투수들이 한순간 무너지고, 쓰러지는 것이야, 메이저리그에서 숱하게 벌어진 일이었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Go! 연속해서 삼진을 잡아내며, 11번째 삼진을 올립니다!
최소한 그 강력한 피칭은, 한 여름날 얼음장처럼 차가운 냉수로 하는 샤워처럼, 모든 근심과 걱정을 말끔하게 씻어주기 충분했다.
“89.5마일. 최고구속 또 올라갔네. 기계 오류인가 했더니, 또 찍었어. 겨우 0.1마일 오른 거긴 하지만.”
“Go에게 0.1마일은 다른 투수들의 1마일과 같지.”
“진짜 신기하다니까, 7회인데, 대체 어떻게 저러는 거야? 느려서 더 최고구속을 찍기 쉬운 건가?”
한편으론, 그를 꾸준하게 지켜봤던 팬들에게도 조금은 불가사의하게 느끼기도 했고.
7회에도 최고구속을 우습게 찍고, 심지어 그 최고구속이 아주 미세하지만, 살짝 오르기까지 하는 모습은 조금 기괴하게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최고구속 아니라니까. 분명히 95마일 이상 던질 수 있는데, 일부러 자제하는 거야. 잘 봐, 월드시리즈에서 제한 풀고 보여줄 걸?”
“넌 아직도 그거 밀고 있냐?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고.”
“최소한 매 경기마다 몇 번씩 최고구속을 찍고, 7회에도 최고구속을 우습게 기록하고, 8월인데 점점 구속이 오르는 것보단 훨씬 말이 되지 않아?”
“···그렇긴 하네.”
그렇기에 여전히 그가 본인의 ‘진짜 최고구속’을 숨기고 있다는 의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고 말이다.
물론 이를 꽉 깨문 채, 얼굴을 빨갛게 달아 올리며 공을 던지고 있는 고유석이 들었다면, ‘그게 대체 무슨 개소리냐’고 되물었겠지만.
-아웃!
7회 초 역시 종료됐고, 다시 마운드에 돌아간 고유석을 보며, 팬들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제법 더위가 이어지고 있는 한 여름의 밤인데도, 아이싱 하지 않고서 목 끝까지 점퍼를 올려 입고 있었으니까. 그것이 뜻하는 것은 하나였다.
레인저스는 ‘이번에도’ 완봉을 당할 것이다. 저번에도 그랬고, 다음에도 그러겠지.
세금과 죽음, 그리고 매덕스의 15승과 고유석의 승리처럼. 고유석이 레인저스를 완봉으로 잡는 것 역시 이제는 정해진 일이나 다름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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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
8회 초가 끝났다.
삼진 두 개와 범타 하나로.
이제 202이닝이지.
삼진 2개, 202이닝.
가운데에 2가 하나 더 있었다면, 정말 완벽했을 텐데. 그건 좀 아쉽군.
덕아웃 안에선 스콧 에머슨은 얼음팩을 들고 다니면서, 무언의 시위를 했지만, 가뿐하게 무시하고 오히려 점퍼의 지퍼를 더 올렸다.
“아웃!”
8회 말까지 종료.
점수는 8대0.
이미 승리는 확정이다.
내가 한 이닝에 만루홈런을 두 번 맞지 않는 이상에는.
사실 하나만 맞더라도 바로 강판될 테니, 불가능이나 다름없지.
‘완전히 끝내러 가보자고.’
그러니 어차피 승리는 확정됐으니까, 직접 거두고, 수확하러 가야겠지. 아무런 부담감 없이.
“Suuuuuuck!”
“Kill Rangers! Kill!”
그라운드로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박수로 맞아줬다.
퍼펙트도 아니고, 노히터도 아니기에, 아주 시끌시끌했지.
어떻게 보면 퍼펙트나 노히터 보다, 이런 면에서는 더 나을지도 모르겠어.
9회에 마운드에 올랐는데, 조용~하면 좀 서운하기도 하거든. 괜히 외롭기도 하고.
‘다음에 또 퍼펙트할 때는, 확성기 들고 소리 지르라고 외쳐볼까?’
왠지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애석하게도 고이 접었다.
정말로 그랬다간, 진지하게 코치랑 브라이언, 그리고 대니얼이 합심해서 날 정신병원에 집어넣을 거야.
아무래도 너무 기괴한 성적을 찍다 보니,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탓에, 정신이 좀 돌아버린 거라면서.
‘잡생각 나는 거 보니까, 끝날 때가 되기는 했나 보네.’
마운드에 오르는 순간, 가볍게 머리를 털면서, 생각도 함께 털어냈다.
아직 세 타자 더 남았으니, 흥미로운 개소리는 다 끝난 다음에 하자고.
“아웃!”
8번타자 로빈슨 치리노스.
9회 초 선두타자로 올라온 그는 한줄기 희망을 담아서, 힘껏 스윙했지만, 공은 이번에도 바닥을 때렸다.
마운드 앞으로 데굴데굴 굴러오는데, 살짝 느린 탓에 조금 타이밍이 애매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아웃은 됐지.
‘수비도 이제 좀 완숙해졌네.’
이 정도면 골드글러브도 받지 않을까? 기대감이 드는군. 진짜로 싹쓸이할 수도 있겠어.
“스트라이크 아웃!”
그다음 타자, 드류 로빈슨은 순간적으로 릴리스 포인트를 바꾸면서 던진 쓰리핑거 체인지업에 배트가 헛돌았다.
이제 투아웃.
한 명만 남았지.
올라오는 타자, 추민수 선배와 눈을 맞추면서, 가볍게 어깨를 돌렸다.
이제 마지막이니, 그에 걸맞은 전력을 다하기 위해서. 완봉인데, 기왕이면 마지막 힘까지 다 털고 내려가야 후련하잖아?
“스트라이크!”
초구는 후끈하게 스트라이크.
선구안이 좋아서, 잘 지켜보는 타입인데도, 멋지게 스윙하셨네.
“볼.”
“파울!”
2구와 3구는 가볍게 골라보고, 커트했다. 네 번째 타석이니, 저쪽도 감이 오르기는 했어.
“파울!”
4구째, 커터 또한 커트.
땅볼을 유도하려 했지만, 나도 사람인 터라, 조금 힘이 떨어지긴 한 건지, 아슬아슬하게 파울라인을 넘어갔다. 아깝네.
‘길게 끌면 별로 좋은 꼴은 못 보겠지.’
공 하나마다 훅훅 힘이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괜히 질질 끌다간 낭패를 보겠지.
그렇기에 5구를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온몸을 끌어당기듯 왼팔을 휘둘러, 남은 모든 집중을 손끝에 담아 쏘았다.
“씁-”
높은 코스의 공.
던질 줄 예상했던 건지, 배트가 나왔고, 제법 박력 있게 당긴 스윙이 홈 플레이트를 사선으로 갈랐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높은 위치에서 스트라이크존의 한가운데로 떨어지는 공에 배트가 헛돌았다. 서클 체인지업이었지. 역시 V1은 좌우를 가리지 않는단 말이야.
그것으로 쓰리아웃.
9이닝 15K 1피안타가 완성되며, 이번 시즌 아홉 번째 완봉이 달성됐다.
역시 레인저스는 완봉이 제 맛이지.
‘진짜 잘하면 월터 존슨 깨겠는데?’
퍼펙트와 노히터까지 합쳐서, 지금까지 달성한 완봉이 총 16개일 텐데, 엄청난 페이스이긴 하네.
어쩌면 내가 월터 존슨의 통산 최다 완봉을 갱신할 거라며,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아예 가망이 없진 않겠어.
‘월터 존슨이 아마··· 110개였던가?’
타이기록까지 94개, 신기록까지 95개가 남았으니. 대충 20시즌쯤 잡고, 한 시즌 당 다섯 번씩만 완봉하면 된다는 거잖아?
레인저스가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계속 이 정도로 호구 잡혀 준다는 가정 하에, 불가능한 건 아니지.
물론 레인저스는 그런 20심즌 동안 피눈물을 흘리겠지만 말이야.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서라도, 대승적인 차원에서 레인저스가 희생해야지.’
우리 앞으로도 잘해봅시다.
그런 생각을 담아서 덕아웃을 훑어보니, 내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건지, 눈이 마주친 레인저스 타자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