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282화 (282/316)

282화

<시애틀 매리너스 0:2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 승리투수 : Go You-Suck(7이닝 무실점 13탈삼진 3피안타 1볼넷)>

└오늘은 그럭저럭 평범했네

└??? 7이닝 무실점 13K인데 이게 평범하다고?

└Go잖아, 그걸 감안해야지.

└Suck이라고 생각하고 보니까, 무난하긴 하네.

└심지어 볼넷도 하나 내줬어!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조금 걱정이야.

└부상? 저게? 슬슬 다들 미쳐가고 있네.

그럭저럭 평범(?)했던 경기에 팬들은 대부분 만족스러운 반응을 내비쳤다.

적당히(?) 삼진도 잡았고, 역시나 무실점이었으며, 안타와 볼넷을 조금 많이(?) 내주기는 했지만, 어쨌든 25승을 올리며, 계속해서 연승을 달렸으니까.

물론 그걸 평범이라고 이야기하는 애슬레틱스 팬들을 보며, 타팀 팬들은 그저 황당하기 그지없었지만.

└평균적으로 보면, 7이닝 13K가 평범하긴 하네.

└다른 것 보다 25경기에 194이닝이라는 게 웃겨. 무슨 로이 할러데이냐?

통계적으로 봤을 때,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그저 헛웃음만 지을 수밖에 없었다.

<로빈슨 카노, ‘그저 헛스윙!’ 징계로 인한 타격감 저하?>

<‘24Million Dollar Baby’, 80경기만의 출장에서, 최악의 복귀전을 가지다!>

그렇듯 적당히 무난했던 애슬레틱스의 반응과 달리, 매리너스 팬들은 크나큰 근심을 안아야만 했다.

비록 포스트시즌에선 사용이 불가능하지만, 어쨌든 최대한 성적을 올려야 하는 정규시즌에서 새로운 엔진이 되어줘야 했던 로빈슨 카노이건만.

다시 돌아온 그의 모습은 그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으니까.

[#Mariners]

[첫 복귀전 상대가 Suck이잖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솔직히 쟤 상대로 삼진 세 번이야 뭐···

└경기력도 안 올라왔을 텐데, 하필이면 최악의 적을 만나버렸어.

그래도 그 상대가 고유석, 최악의 적이었던 만큼, 어느 정도 정상참작을 해줄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2천4백만 달러의 연봉을 받는 선수가 보여준 모습이라기엔 다소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삼진을 당하더라도, 최소한 조금은 날이 서거나, 그럴듯한 모습을 보여줬다면 모를까. 그저 경기 초반에 조금 노려보던 걸 제외하면, 시종일관 무기력하게 무너졌으니까.

[#Mariners]

[차라리 징계가 떨어질 때가 나았어. 징계 동안에는 최소한 연봉은 안 줘도 됐잖아.]

└차라리 그게 낫긴 하지. 돈이라도 아끼니까.

└어차피 전력에 도움도 안 될 것 같은데, 사무국에 부탁해서 다시 징계 내려달라고 하자.

그렇기에 몇몇 이들은, 어쩌면, 차라리 계속 징계가 이어져, 돈이라도 아끼는 것이 더 낫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렇게 로빈슨 카노, 이번 시즌 최대의 스캔들의 주인공 중 한 명이었던 몰락한 슈퍼스타의 복귀전은 팬들의 근심 속에서 막을 내렸다.

<애슬레틱스, 3차전 패배로 아쉽게 스윕 실패, 허나 90승 31패로 승률 0.744로, 포스트시즌의 9부 능선을 넘었다!>

이후 3차전에서 애슬레틱스가 패배하며, 위닝 시리즈로 3연전이 마무리 지어졌다.

####

매리너스를 돌려보낸 뒤, 애스트로스와 3연전을 가지게 됐는데, 당연히 나는 잉여인간이다.

‘나 안 나온다고 되게 좋아하네.’

내가 이번 시리즈에서 안 나오는 걸 알기 때문인지, 애스트로스 타자들은 아닌 척하면서도, 아주 행복한 얼굴이었는데, 그걸 보니 왠지 배알이 꼴렸다.

‘확 3차전에 등판해?’

하루의 휴식일이 끼여 있었기에, 못할 것도 아니지. 원래 선발투수는 4일 휴식 후 등판이 보통이니까. 당장 지금도 벌써 몸이 쌩쌩하고.

그러니 3차전에 등판해버려서, 애스트로스의 행복을 짓밟아줄까 싶기도 했지만···

“얌전히 구경이나 하고 있어.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저 멀쩡한데, 그냥 3차전에 등판하면 안 돼요? 제가 마운드에 오르는 거 보면 애스트로스가 통곡할 텐데. 그 모습을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런 꼴은 절대로 안 보고 싶으니까, 그냥 로테이션이나 잘 지켜.”

애석하게도 스콧 에머슨의 반대에 얌전히 구경이나 했다.

요즘 따라 날 어떻게든 쉬게 하려고 안달이란 말이야.

‘하긴, 이번 시즌은 진짜 좀 빡세게 달리긴 했지. 이제 194이닝이던가?’

현재까지 194이닝을 던졌는데, 듣기로 내가 경기당 이닝이 7.76이란다. 평균적으로 등판했다 하면, 7이닝 2아웃이 기본이라는 뜻이지.

물론 실제로 7이닝 2아웃을 자주 한 건 아니고, 무려 8봉에 이르는 완투와 적당히 7이닝씩 던지고 종종 8이닝 던졌던 것의 중간점이다.

“나 왜 멀쩡하지?”

생각해보면 코치가 날 꽁꽁 묶는 게 당연하기는 해. 매 경기 7이닝 2아웃이라니. 사실 이 정도면 어깨가 갈려도 진즉에 갈렸어야 정상인데 말이야.

조금 신기한 마음에 왼팔을 쓰다듬고 있으니, 내일 등판하는 터라, 나와 마찬가지로 덕아웃의 잉여인간인 션 마네아가 날 미친놈처럼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더 궁금하다. Suck 너 왜 멀쩡하냐? 진짜 하나도 안 아파? 팔꿈치나 어깨 아프지 않냐고? 너 던지는 거 보면 내가 다 아프던데. 일부러 참는 건 아니지?”

하긴, 나도 내가 신기한데, 다른 사람 눈으로 보면 그보다 더하겠지.

특히나 얜 같은 투수니까, 더욱더 내가 불가사의하게 느껴질 거고.

한편으로, 혹시나 내가 에이스의 책임감 때문에 일부러 참고 던지는 건 아닌지, 조금 걱정하는 눈치이기도 한데.

“안 아파. 애초에 아팠으면 바로 드러눕지. 내가 내 몸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데.”

“니가? 몸을 소중하게 여겨? 25경기 동안 194이닝 던진 놈이? 웃기고 있네.”

그럴 리가. 난 내 몸을 사랑한다고. 몸에서 아주 티끌만큼이라도 통증이 느껴지는 순간 바로 드러누울 자신이 있다 이거야.

선 마네아는 별로 안 믿는 눈치였지만, 진짜다. 이게 가장 큰 자산이잖아?

얼마나 소중해. 이 몸뚱아리 하나로 밥 벌어먹고 사는 건데, 항상 조심스럽게 여겨야지.

그냥 멀쩡한 만큼 던지다 보니, 여기까지 와버린 거지. 언제든지 조금 벅차다고 느꼈다면, 적당히 멈췄을 거다.

“혹시 무슨 요령이라도 있어? 그게 아닌 이상, 어떻게 완투하고 바로 다음 경기에서도 멀쩡하냐고. 특별한 휴식법이라던가, 루틴이라던가. Go 너만의 비법 같은 거 없어?”

덤덤한 내 모습에 그제야 진심이라는 걸 깨달은 건지, 션 마네아는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야말로 무지막지하게 이닝을 먹어대고 있으니,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게 아닐까, 궁금했나 보구만.

특히나 이 불가사의한 수준의 회복력이 가장 의문스러웠을 거고.

우습게도, 그의 질문에, 그뿐만이 아니라, 주변의 다른 투수들도 귀를 쫑긋거렸다.

아닌 척하면서도 은근히 우리 쪽에 집중하고 있었지.

다들 나한테 서클 체인지업 그립을 배워가기도 했었는데, 그게 별 효과가 없어 보이니. 이번엔 이닝으로 가닥을 잡았구만.

‘비법이라···’

사실 비법이랄 게 있나? 있다면 대니얼이겠지. 내 모든 루틴은 대니얼이 관리해주니까.

회복력은 나도 모르겠고, 체력이 넘치는 건 오프시즌 때 빡세게 트레이닝해서 기초 체력을 기른 덕분이지.

그나마 대니얼을 만나기 전부터 내가 자체적으로 예전부터 지켜왔던 비법이란 게 있다면, 딱 세 가지 정도가 전부겠지.

“일단 식사를 정확하게 챙겨 먹지. 등판일에 가까워질수록 천천히 칼로리를 높이는 형식으로. 단, 경기 당일에는 속이 기름지지 않도록 지방은 적게 섭취하고.”

“그래? 난 오히려 등판 전에는 지방을 좀 보충하는 편인데. 그리고?”

“수면 시간도 조절해야 돼. 본인에게 가장 잘 맞는 패턴으로. 난 보통 9시간이야.”

“꽤 오래 자는 편이네? 난 8시간쯤 자는데. 아니지, 그래서 회복력이 빠른 건가? 그리고?”

“이게 은근히 중요한 건데, 경기 전에 충분한 배변 활동을 해야 돼. 숙변을 했느냐, 못했느냐의 차이가 생각보다 크거든.”

“아~ 하긴, 배 안에 뭔가 있으면 몸이 무겁지. 가벼워지도록 비우라는 거구만.”

내 설명에 션 마네아는 무슨 금과옥조를 주워섬기는 것처럼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다른 투수들도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다만 몇몇은 내 말의 뜻을 알아차린 건지, 피식 웃었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간단하게 종합하면···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라는 말이네. 맞아?”

“그렇지, 이해력이 빠르구만. 좋은 학생이야.”

“야이 개자식아! 진지하게 들었잖아! 에휴, 그럼 그렇지, 비법은 무슨··· 빌어먹을 DNA빨이구만.”

션 마네아는 김이 샜다는 듯 뾰루퉁한 표정으로 입을 쭉 내민 채로 다시 경기에 집중했다. 다른 투수들도 실망한 듯 한숨을 내쉬었고.

진짠데 왜들 안 믿는 걸까. 이게 내 비법인데 말이야.

‘집안 대대로 내려온 양생법인데, 이걸 몰라주네.’

아빠는 항상 그렇게 말했다.

앞서 언급한 세 가지만 잘 지켜도, 오랫동안 무병장수 한다고 말이야.

그 말을 주워섬겨, 단 한 번도 배변활동을 참은 적이 없고, 수면을 버틴 적이 없으며, 삼시세끼 꼬박꼬박 챙겨먹었다.

마이너에선 얇은 벽 때문에 발생되는 소음 때문에, 수면 패턴이 좀 망가지기도 했는데. 그걸 제외하면 철저하게 지켰지.

기껏 비법을 전수해줬는데도, 다들 믿는 눈치가 아니구만. 아무래도 내가 몸소 증명해줘야겠어.

‘다음 등판이 레인저스전이니, 딱 좋네.’

레인저스를 상대로 말이야.

딱 알맞은 상대지. 물론 저쪽에선 내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겠지만. 이쯤되면 이젠 레인저스 팬들도 그러려니 받아들일 거야.

나한테 털리는 게 한, 두 번도 아니고, 만날 때마다 털렸는데, 굳이 분노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 잘못이잖아?

‘알링턴에서 이런 말 했다간 그대로 전기톱에 사지가 잘리겠지.’

텍사스에서 이런 소릴 지껄이면, 아마 좋은 꼴은 못 보겠지만. 뭐, 이번엔 콜리시엄에서 맞붙을 거니까.

원래 레인저스는 글로브 라이프 파크에서 털어야 제 맛이지만, 콜리시엄에서 때려잡는 것도 색다른 맛이 있긴 하지.

####

단 하루 차이로 인해 텍사스 두 형제 팀의 희비가 엇갈렸다.

3연전에서 1승 2패의 루징 시리즈를 당해야 했지만, 그래도 비교적 웃는 얼굴로 애스트로스가 오클랜드를 떠난 반면.

새로운 3연전을 맞이해, 막 오클랜드로 도착한 레인저스의 낯빛은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거무죽죽했으니까.

<‘텍사스 살인마’ Go, 오래간만의 레인저스전에 설렌다고 밝혀···>

시리즈 1차전부터 빌어먹을 이름이 상대 선발투수로 떡하니 박혀 있는 것이 문제였지.

그래도 작년과 비교했을 때, 올해는 비교적 운이 좋기는 했다. 다섯 번이나 만나, 다섯 번 모두 다 X같이 털렸던 작년과 달리.

올해는 전반기에 두 번을 상대한 뒤. 그 외에는 번번이 조금씩 일정이 엇나갔으니까.

‘고작’ 두 번 밖에 털리지 않은 것이니, 꽤나 기쁘다고 할 수 있겠지.

그 두 번 다 글로브 라이프 파크였고, 그중 한 번은 완봉이었다는 것이 문제지만.

어쨌든 이번에도 부디, 아슬아슬하게 빗나가기를, 제발 그 망할 놈의 낯짝을 보지 않기를 깊이 바랐던 레인저스지만. 계속된 행운은 없었다.

“드디어 X같은 시간이 돌아왔구만. 그래도 후반기는 좀 편하게 지나가나 했더니···.”

“그 X새끼는 에이스라는 놈이 왜 그렇게 오래 쉬고 지랄이야? 4일 쉬고 애스트로스나 조질 것이지.”

그런 매치업을 맞이한 레인저스 팬들이 부쩍 신경질적이었다면, 타자들은 그보다도 조금 더 예민했다.

물론 팬들도 대단히 불쾌하겠지만, 직접 당하는 입장은 그보다 더 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으니까.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올 확률이 높으니, 무조건 스윙하라고? 몇 개월 동안 분석한 결과가 고작 이거야?”

“한 장 더 넘겨봐. 그게 더 황당하거든. 포심 패스트볼은 리그 최고의 수직 무브먼트와 회전수를 가졌으니, 눈으로 보이는 것보다 조금 더 높게 쳐야 한다고 돼 있네.”

“그것 참 X나게 대단한 분석이네. 우리가 죄다 X신이었나 봐, 그런 쉬운 방법도 모르고. 그치?”

더군다나 이번에도 제대로 된 무기조차 쥐지 못했으니, 더욱더 말할 것도 없고.

지난번의 만남에서 9이닝 16K 무실점의 완봉을 당했었다. 1피안타였고, 고의사구 두 번으로 만루까지 갔었지. 그 작전에 완벽하게 놀아나면서,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었고.

그게 6월이고, 이젠 두 달하고도 14일이나 더 지났는데도, 여전히 분석 자료는 형편없었다. 마치 이것이 최선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사실 다른 팀들도 매한가지였지만, 그걸 알리가 없는 레인저스 타자들이기에, 전력분석팀과 스카우트 팀에 대한 불신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1점이라도 내면, 진짜 그날은 행복하게 잘 것 같은데···.”

“그럼 축제지. 100대1로 지더라도, 팬들이 축하해줄 거다 아마.”

“쟤한테 홈런 하나 날리는 순간, 꼴찌고 나발이고, 전부 다 행복하게 웃을 거야.”

그토록 분노와 짜증 속에 경기를 맞아들인 레인저스의 타자들이었지만, 사실 그도 엄청나게 큰 걸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냥 1점. 딱 1점이라도 내는 것이 목표였으니까.

축구도 아니고, 야구에서 1점을 운운하는 것이 조금 우습게 느껴지겠지만, 최소한 레인저스는 진심이었다.

작년, 마침 콜리시엄에서 그랬던 것처럼, 멋들어진 홈런까지도 필요 없고, 그저 다시 한번 한 점이라도 실점을 안겨줄 수 있기를 바랐지.

선수들은 물론이고, 타자들 역시 그것을 간절히 기도하면서, 마왕의 본거지이자, 마경이라고 할 수 있는 콜리시엄에 들어섰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You Suck!”

“Hell Yeah!”

아무래도 이번 경기 역시 그 바램은 멀고도 요원해 보였다.

이미 몇 번이나 굴욕을 안긴 주제에, 레인저스를 잡는 것이 여전히 그렇게나 즐거운지.

투수는 마치 오늘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평소처럼 대포알을 던져댔으니까.

심지어는 자신과 같은 국적인 선배에게도 가차가 없이 삼진을 잡아내며, 경기의 시작을 장식한 고유석의 모습에 레인저스의 덕아웃은 한 여름인데도 한기가 풀풀 풍겼다.

“Choo, 네가 한 소리 좀 해. 지금 선배한테 뭐하는 짓이냐고, 따끔하게 혼 좀 내줘. Korea는 선후배 간의 예의가 중요하다면서!”

“저도 그렇다고 들었는데. 고향 후배라고 감싸지 말고, Choo가 좀 나서 줘요.”

1번타자, 리드오프로 출장하여 화끈하게 삼진을 당하고 그런 덕아웃으로 돌아온 추민수는 동료들에게 시달려야 했고.

큰 코의 서양인들이 예의를 운운하며 자신의 바짓가랑이를 붙드는 꼴이 조금은 우습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추민수 역시 그들과 함께 고통받는 입장이었기에, 충분히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글쎄, 그런 거 없다니까. 애초에 그럴 수 있었으면 진즉에 그랬지.”

오죽 답답했으면, 오죽 내장이 꼬이면 이런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겠는가?

그렇기에 동료들에게 그들이 바라는 답변을 해주지 못하는 것이 추민수는 그저 조금 아쉬웠다.

‘더 잘해졌네. 이제 시즌 후반인데, 어째 6월 보다 더 좋아졌어.’

절망감에 빠진 동료들을 뿌리치고, 벤치에 앉은 그는 문득 그라운드를 지켜봤다.

저번 경기에선 자신의 폼이 좋기도 했기에, 약간의 희망을 품기도 했었다.

심지어 퍼펙트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어떻게든 뚫어낼 것이라는 집념도 있었지. 실제로 해내기도 했고.

그런데 오늘은 그런 느낌마저 들지 않았다.

시즌의 후반기에 접어들며, 조금은 지친 자신과 달리, 오히려 시즌 초반보다 더욱더 쌩쌩해진 모습에 징그럽다는 생각마저 들었지.

과거 투수시절 존경했던 여러 선배들, 레전드들을 볼 때 느꼈던 감정이 새록새록 피어오르기도 했고.

다만 소싯적과 달리, 단순히 동경하는 것이 아니라···

“스트라이크 아웃!”

타석에 올라, 그런 투수를 상대해야 한다는 것이 비극이라면 비극이었지만 말이다.

####

저번 경기에서 투덜거린 보람이 있는 것 같았다.

“호오오오오오옴~ 러어어언!”

“맷! X발 니가 진짜 맷이다!”

2회 말, 맷 올슨이 쓰리런을 날렸거든. 이제 2회인데, 벌써 저번 경기보다 1점이나 더 냈군.

‘역시 좀 갈궈야 말을 듣는다니까.’

언제나 채찍은 옳다.

이번에도 증명됐구만.

이렇게 말하니까, 뭔가 좀 심각한 사디스트 같네.

“자, 이 정도면 됐지? 오늘은 저번처럼 투덜거리고 그러면 안 돼?”

“그래그래, 참 잘했다.”

그래도 이제 겨우 3대0인데, 벌써부터 뻗대는 꼴이 좀 보기 싫긴 했지만, 그래도 오늘은 그 정도면 충분하긴 하지.

‘뭐, 레인저스 상대로 3점이면 충분히 낙승이니까.’

그리고 오늘은 좀 길게 던질 생각이고 말이야. 그러니 3점이면 충분하기는 하지.

사실 내가 유독 레인저스를 못 살게 구는 것도 있지만, 엄밀히 말해서, 레인저스 자체가 별로 강팀이 아니다.

애초에 그러니까 꼴찌지.

그런 꼴찌 팀답게 글로브 라이프 파크라는 타자 친화적인 홈구장을 끼고 있는데도, 타자진 성적도 별로 안 좋다.

타율, 출루율, 장타율, 안타. 죄다 리그 평균에 못 미치거든.

그나마 홈런과 득점이 평균보다 쪼끔 높기는 한데, 말했다시피 글로브 라이프 파크를 홈으로 쓰고 있는데, 평균보다 조금 높다는 것 자체가 망했다는 뜻이다.

“스트라이크!”

그러니 편할 수밖에.

단순히 텍사스를 잘 조지는 한국인의 피 때문이 아니야. 물론 그것도 어느 정도 한몫을 하겠지만.

3회 초.

첫 타자는 7번타자 로날드 구즈만이었다. 올해 갓 데뷔한 녀석이라서, 나에 대한 트라우마가 그나마 덜한 편이지.

멸망하기 일보 직전인 레인저스의 상황 상, 어떻게든 유망주를 키우려는 건데.

데뷔 시즌인 걸 감안하면, 그렇게까지 나쁜 성적은 아니지.

OPS 7할 3푼에, 타율이 2할 3푼이니까. 솔리드한 활약까지는 아니지만, 구단에서 기대를 가질 만한 수준은 되지. 미래에 터질지도 모르니까.

“스트라이크!”

물론 현재에는 아니고.

로날드 구즈만은 루키답게 조금은 자신감 있는 스윙을 보여줬다. 스카우트들도 저런 걸 중요시 여기지.

빅리그라는 큰 무대에서도 당찬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은근히 중요하거든.

허나 그 당찬 스윙에 충분할 만큼의 실력이 뒷 받쳐주지 않는다면, 그건 다르게 말해서···

“스트라이크 아웃!”

그냥 막무가내 스윙이다.

깔끔하게 삼구삼진.

81.2마일짜리 슬라이더가 배트를 멀찍이 따돌리며, 헛스윙을 유도했다.

척 봐도 몸쪽만 노리고 냅다 휘두르던데, 그냥 바깥쪽으로 하드 슬라이더 하나 던지면 아주 쉽게 잡을 수 있지.

‘이 정도면 하드 슬라이더지.’

겨우 81마일짜리 슬라이더를 하드 슬라이더라고 표현하면 좀 웃기게 들린다는 거 아는데, 진짜야. 아주 준수하다고.

슬라이더의 각은 오히려 마이너 시절보다 살짝 작아졌지만, 꺾이는 속도가 상당히 빨라졌거든.

‘한 4마일쯤 더 오르면, 아예 커터 대신 슬라이더를 던져도 되겠는데?’

물론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그냥 꿈으로 접어뒀다.

슬라이더에 관한 고찰을 하는 사이, 올라온 8번타자 로빈슨 치리노스.

공격력이 뛰어난 포수로 유명한 그였지만, 올해는 전체적으로 침체된 레인저스 타선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작년보다 성적이 훅 떨어졌다.

작년과 비교했을 때 OPS가 1할 정도 뭉텅이로 깎였지. 나이가 제법 있는 선수이니, 어쩌면 에이징 커브가 시작된 걸 수도 있고.

‘그렇다고 해도 브루스랑 비슷하지만 말이야. 아니지, 살짝 더 좋나?’

OPS가 1할이 깎였는데 비슷하다니, 브루스 너도 좀 분발해야겠다. 그치?

내가 자기 욕을 하는 걸, 어떻게 또 기가 막히게 알아챈 건지, 브루스가 조금 매섭게 노려보기도 했지만.

“스트라이크!”

냅다 던진 포심 패스트볼에 다시 눈을 온순하게 떴다.

반대로 로빈슨 치리노스는 조금 한숨을 내쉬었고. 이 양반이야 작년부터 나한테 시달린 일종의 원년멤버 중 한 명이니, 내가 지긋지긋하긴 하겠지.

“아웃!”

여전히 바뀌지 않는 상황에도 진저리가 났을 거고.

둥실 떠오른 타구.

3루수인 맷 채프먼이 내야플라이를 가뿐하게 처리했다.

“스트라이크 아웃!”

마지막 9번타자, 드류 로빈슨마저 삼진으로 잡히면서, 3회 초가 종료됐고. 모두의 예상처럼, 레인저스의 첫 타순은 완벽하게 박살 났다.

“이제 6이닝 남았구만.”

예상처럼 손쉬운 상대라는 걸 다시금 확인했으니, 이제 남은 6이닝 동안 편하게 던지면 되겠어.

“누구 마음대로 6이닝이야?”

덕아웃으로 돌아오면서 중얼거리는 말에, 날 기다리던 웬 아저씨 한 분이 태클을 걸기도 했지만, 이건 무시하도록 하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