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281화 (281/316)

281화

“스트라이크 아웃! Go가 다시금 삼진을 잡아냅니다! 이번 경기 다섯 번째!”

“서클 체인지업 직후 몸쪽 패스트볼, Go의 필승 패턴 중 하나인데, 역시 여지없네요.”

“하하, 사실 Go의 필승법은 워낙 많긴 합니다만, 가장 상징적인 패턴이긴 합니다.”

다시금 삼진이 올라가자, 해설자는 혀를 내둘렀다. 조금은 허탈할 정도로 경기가 원사이드 했으니까.

‘이미 예상된 일이었지.’

이번 시즌, 평균 이상의 모습을 보이며, 제법 준수하다 평가받는 매리너스의 타선이지만.

당연하게도 그런 매리너스가 고유석에게 좋은 성적을 거두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없었다.

제법 준수한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으니까. 과거 21세기의 시작과 동시에 전성기를 누렸던 시절처럼, 역대를 논할 정도는 돼야, 평범한 경기가 성립되겠지.

‘더군다나, Go도 굉장히 집중한 모습으로 보이고.’

더군다나 이번 경기에서 고유석은 대놓고 작정한 듯한 보여줬다. 어쩌면 지난 경기의 여운을 이어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비록 2회 초, 카일 시거가 쳐낸 안타 하나 덕분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그것이 매리너스에게 유일한 위안이겠지.

별다른 관계성도 없고, 지난 경기처럼 특별한 이벤트도 없건만, 분노마저 느껴지는 고유석의 모습은 조금 뜻밖이기도 했으나.

사실 업계 내의 사람들은 대부분 그 내막을 알고 있었다.

‘연좌제지, 로빈슨 카노의 연좌제.’

지난 5월, 메이저리그를, 아니, 어쩌면 야구계 전체를 뜨겁게 달아 올렸던 ‘도핑 스캔들’의 근원이 로빈슨 카노로 비롯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가 도핑을 했다는 것이 새어나가면서, 엉겁결에 Go까지 엮여버렸다는 것 역시도.

비록 멋지게 떨쳐내긴 했지만, 자신에게도 추잡한 똥물을 튀긴 이에게 당연히 분노할 수밖에 없겠지. 대단한 인격자가 아니라면 말이다.

최근 선행을 이어가며, 좋은 이미지를 구축한 고유석이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선한 쪽에 가까운 사람이더라도, 절대로 성인이나, 성자에 가까운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용서나 박애보다는 오히려···

“스트라이크!”

철저한 징벌로서 죗값을 받아내는 재판관이나, 처형인에 훨씬 더 가까웠지.

9번타자 디 스트레이트-고든, 속칭 디 고든 또한 그런 처형인의 칼날에, 앞선 다른 동료들처럼 손쉽게 목이 달아났다.

“파울!”

“파울!”

몇 차례 공을 커트해내며, 제법 저항하기는 했지만, 빈말이라도 파워가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선수이기에.

제법 정확하게 맞은 스윙조차, 건물을 굳건하게 받치는 단단한 석재 기둥을 때린 것처럼 심한 충격을 받고 튕겨져 나갔다.

반발력으로 인한 통증 때문인지, 눈살을 찌푸리며 조금은 고통에 찬 표정으로 이를 꽉 깨물기도 했지만, 그를 내려 보는 고유석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오히려 조금 더 서늘하게 빛났지. 약점이 훤히 드러났으니, 이젠 숨통을 끊어줄 차례였으니까.

“4구, 낮은 코스, 스트라이크 아웃! 디 고든이 가만히 지켜보면서, 루킹삼진으로 물러납니다.”

“정말이지 대단한 컨트롤이에요. 정확하게 스트라이크존의 라인에 찍었습니다. 앞선 타격에서 충격이 있었던 만큼, 낮은 코스이기에 타자가 참아본 건데, 딱 집어넣네요.”

“흔히 팬들 사이에서는 Go에게 스트라이크존이 3D로 보일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는데,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루킹 삼진.

절묘하게 제구가 됐으니, 단순히 코스에 속은 걸 수도 있었지만, 해설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멍하니 공을 바라보는 디고든의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겁에 질려 있었으니까.

그냥 자연스럽게 몸이 얼어붙어버린 거겠지. 깊은 생각이나, 판단력 같은 것이 아니라.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군.’

해설자는 조금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초월적인 제구력보다도, 더욱더 절묘한 것이 바로 저거였으니까.

현재 고유석의 9이닝 당 탈삼진은 무려 15.7을 자랑했다.

187이닝을 던지며, 328개의 삼진을 잡아낸 덕분이지.

아마도 경기가 시작된 이후 조금 더 올랐을 거다.

그토록 기괴한 수준의 탈삼진의 근원으로 모든 전문가들이 꼽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타이밍을 포착하는 것 말이다.

‘기계적인 수준이지, 동물적인 정도를 넘어서.’

감각적인 영역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이는 사람에게 흔히 동물적인 감각이 있다고 평가하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고유석의 능력은 그런 동물 수준마저 넘는 것이었다.

정확하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만들어진 기계적인 수준이었으니까.

밀리 초 단위로 시시각각 변화는 타이밍이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잡을 줄 알았지.

그 타고난 재능으로서 타자가 가장 약한 순간 칼을 꽂아버리는 것이고.

‘기본적인 피칭 역시 모든 중심은 타이밍으로 이루어지지.’

그의 탁월한 공격성 역시 결국에는 타이밍과 연관되어 있었다.

“파울!”

모두가 알고 있다.

그가 스트라이크를 던질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

기괴한 탈삼진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도 훨씬 더 기괴하리만치 높은 스트라이크율을 기록 중인 선수니까.

거의 대부분의 공이 존 안쪽에 박힌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그걸 뻔히 알면서도 타자들이 지금처럼 못 치는 이유는 간단했다.

날아든 포심 패스트볼을 때려낸 미치 해니거는 조금 깊게 숨을 몰아쉬며 투수를 쳐다봤다.

지난 타석에서 한 차례 삼진을 당했기에, 더욱더 긴장감이 흐를 수밖에 없었지.

그렇기에 최대한 집중력을 유지한 채, 경계 가득 다음 공을 기다린 그였지만···

“스트라이크!”

2구째 불쑥 날아든 쓰리핑거 체인지업에 그는 앞서 디고든처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바로 타이밍이었다.

느린 구속, 기본적으로 삼진을 잡는 것에 제약을 줄 수밖에 없는 그 핸디캡을 완벽하게 지워버리지.

‘Go의 체인지업은 대략적으로 2마일씩 차이가 난다. 무브먼트 역시 서로 다르고.’

세 가지의 체인지업은 미묘한 밸런스를 갖췄다.

가장 역동적이고 화려하면서, 구속도 가장 빨리 최대 77마일까지 찍히기도 하는 역회전이 강한 서클 체인지업.

그리고 그보다 2마일가량이 느리고, 역회전도 덜하지만, 그 대신 싱킹 무브먼트가 가미된 커브처럼 보일 만큼 낙폭이 깊은 떨어지는 체인지업.

그리고 그보다도 2마일이 더 느리면서, 별다른 무브먼트도 없고, 그저 밋밋한 포심처럼 느껴지는, 문자 그대로 오프스피드라는 표현에 적합한 쓰리핑거 체인지업.

이 세 가지의 체인지업이 어쩌면 고유석이라는 투수의 본질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분명 체인지업이라는 거대한 틀에서는 같지만, 모두 다르지. 심지어 그립이 똑같은 두 가지 서클 체인지업조차 타이밍에서 확연한 차이가 날 정도로.’

똑같은 오프스피드, 체인지업이라고 하여 무언가 하나를 노린다 하더라도, 다른 게 날아오는 순간 깔끔하게 당해야 하는 거다.

그런 오프스피드라는 틀을 벗어난 것들까지 추가된다면, 더 말할 것도 없었고.

각이 크고 가파르며, 쓰리핑거 체인지업과 비슷한 구속을 가진 너클 커브. 가장 빠른 체인지업보다도 조금 더 빨라서, 최대 81마일까지도 찍히는 슬라이더.

가장 느리고, 대단히 밋밋하나, 자주 쓰이지 않는 슬로 커브와 주로 땅볼을 유도하는 변형 패스트볼들까지.

가장 빠른 포심 패스트볼과 그 이하의 모든 구종의 타이밍이 달랐으니까.

‘그런데 구분할 수는 없지. 투구동작과 릴리스 포인트, 스트라이드 폭과 인터벌까지, 모든 구종이 동일하니까.’

타자는 타이밍으로 타격한다. 눈으로 보고 칠 수 있는 타자는 극도로 소수지.

90마일조차 찍지 못하는 구속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런 타이밍의 세상에 떨어진, 타이밍을 잡는 것조차 불가능한, 그런데 정작 본인은 그 누구보다도 타자의 타이밍에 예민한 투수는···

“스트라이크 아웃! Go가 미치 해니거를 다시금 삼진으로 잡아내면서! 3회 초를 KKK로 마칩니다!”

타이밍이라는 거대한 벽 안에서 이루어지는 야구라는 스포츠에서 굉장히 불합리한 존재였다.

5구째, 바깥쪽으로 찍힌 공에 우렁차게 스윙한 미치 해니거였지만, 사선으로 꺾이며 떨어진 너클 커브는 배트를 손쉽게 지나쳤다.

1번타자 미치 해니거마저 삼진아웃. 세 타자 연속 삼진이 완성되며, 3회 초가 끝났다.

이번에도 타자들은 그의 타이밍을 포착하지 못했다.

타자뿐만이 아니라, 포스트시즌에서의 만남을 기다리며, 이 경기를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을 스카우트, 전력분석관들도 마찬가지일 테고.

‘미칠 지경일 거야, 아무리 분석을 해봤자, 정작 현장에서는 별다른 도움이 안 되니까.’

다만, 간혹 몇몇 전문가들은 그런 고유석을 보며,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최고의 선수들이 가지는 ‘특출함’이 감각적인 영역인 ‘타이밍’이니, 점점 더 시간이 지나, 타자들이 그에게 적응하면서, 그것이 읽히는 순간, 오히려 손쉽게 타파될 것이라는 평이었지.

해설자는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분명 최고의 무브먼트와 회전수를 가졌고, 최고의 브레이킹볼과 오프스피드로 무장한 투수이나.

만약 타이밍이라는 특별함이 사라진다면, 지금처럼 절대적인 존재는 아닐 테니까.

‘한 10년쯤 걸리겠군.’

그러니 어쩌면 10년 뒤에 그런 일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고유석이 두들겨 맞고, 강판이 되어버리는 것 말이다.

물론 그동안 아무런 발전도, 변화도 없이, 오직 그대로 멈춰 있거나, 퇴보한다는 가정 하에.

‘작년엔 5년이었는데 말이야.’

참고로 저번 시즌의 전반기를 마쳤을 때는 3년 정도를 예상했었다.

그리고 올스타전에서 처음 선보인 너클 커브가 정식적으로 장착된 뒤에는 5년으로 늘어났지.

대략적으로 5년 정도가 지나, 그가 더욱더 분석되고, 타자들도 적응을 마친다면, 공략될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올해, 새로운 릴리스 포인트라는 무기를 다시금 장착해서 들고서 나타난 순간, 그 시간은 두 배로 늘어났다.

‘내년엔 20년이 될지도 모르겠어.’

그리고 어쩌면 내년에는 또다시 두 배가 될 수도 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 기간이 늘면 늘었지, 줄어들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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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타석뿐이지만, 디고든은 제대로 맛이 간 모습이었다. 애초에 올해 성적 자체가 별로 좋진 않거든.

그런 상황에서 나한테 야구공으로 맞았으니, 더욱더 자신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지. 애초에 파워가 약한 선수라서, 원래도 잡기 편한 타입이고.

‘넬슨 크루즈는 포기한 눈치던데···’

첫 타석에서부터 넬슨 크루즈는 일찌감치 모든 걸 내려놓은 듯한 얼굴 표정을 지었다.

눈치가 빨라서 그런지, 내가 자기네들은 어떻게든 조질 거라는 걸 깨달은 거겠지. 그러니 빠르게 내려놓은 거고.

오늘 경기에선 그렇게 위협적인 선수가 되지 않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이쪽은 디고든과 달리, 파워가 엄청나니까, 안전해 보여도 주의해야 한다.

40홈런을 거뜬히 날릴 수 있을 정도의 타자이니, 갑자기 어느 순간 감을 잡고 휘두르면, 꽤나 골치 아플 테니까. 아무리 나라고 해도 마냥 방심할 순 없지. 이래서 거포들이 싫어.

‘이제 너 하나 남았네.’

그렇게 다른 친구들이 모두 다 저마다의 방식대로 안전장치가 걸린 상황 속에서 로빈슨 카노는 꿋꿋해 보였다.

타석에 올라오는 그의 얼굴에선 두려움도, 모든 걸 놓아버린 후련함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어떻게든 해내고야 말겠다는 집념이 느껴졌지.

그도 그럴 것이, 무려 80경기의 징계 이후 첫 복귀전인데. 실력마저 증명하지 못한다면, 그건 진짜 개똥찌끄레기잖아. 재활용도 안 되는 핵폐기물 말이야.

매리너스에서의 앞날이 어떻게 되던 간에, 미래의 커리어를 위해서라도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고 싶을 수밖에.

‘로빈슨 카노는 더러운 약쟁이지만, 최소한 전력에는 도움이 된다.’라는 평가라도 받기 위해서.

‘까고 있네.’

허나 약쟁이의 미래 따위, 내 알 바 아니다. 마음 같아선 그냥 이참에 그냥 추하게 굴지 말고 은퇴하면 좋겠어.

하지만 그럴 생각이 없잖아?

매리너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놓고 달달하게 챙겨 먹고 있는 2천만 달러가 아쉬울 테니까.

“스트라이크!”

그러니 그냥 꼴 보기 싫은 마음을 가득 담아서 후드려패자.

첫 타석에서 꺾지 못했다면, 이번에, 이번에도 못한 다음 타석에서 물고 늘어져야지.

초구부터 날아든 서클 체인지업. 지난 1회 초에선 전력으로 던진 패스트볼로 조졌기에, 이번에도 그러리라고 생각했던 건지, 빠르게 배트가 나왔지만, 그저 공기만 아프게 때렸다.

“크헤헤헤, 이 약쟁이 새끼! 약 맞고 쉬는 동안 X같이 X신이 됐네!”

“스윙이 그게 뭐야? 한참 빗나갔잖아! 다음에는 눈 좋아지는 약도 같이 맞아라!”

“Suck! 저 새끼 조져버려! 신성한 콜리시엄에 약 냄새 풍기는 새끼를 당장 치워버리라고!”

시원했단 스윙만큼이나 시원한 조롱이 쏟아졌다.

특히나 레이더스의 경우, 저번 경기에선 애들 앞이라서, 욕설을 자제했던 것을 오늘 터트리려던 건지.

평소보다 조금 더 격하게, 더욱더 빡센 코스튬으로 로빈슨 카노를 조롱했고.

원래도 상대 타자에 대한 존중 같은 건 밥 말아먹은 우리 팬들인데, 로빈슨 카노는 욕먹어 마땅한 명분마저 있잖아?

그러니 평소보다 더욱더 거리낌 없이 X신이라고 박아버리는군. 아주 좋아.

거기다 오늘은 노히터나 퍼펙트도 진즉에 깨진 덕분에, 더욱더 시끄러운 것도 아주 마음에 들었고. 역시 야구장은 이래야지.

‘역시 팬들이랑 나랑은 마음이 참 잘 맞는단 말이야.’

내가 이래서 오클랜드를 사랑하지. 정말 아름다운 도시의 아름다운 사람들이라니까.

‘저번엔 아이들의 염원을 이뤄줬으니, 오늘은 어른들의 염원을 이뤄줘야지.’

자, 들었지? 우리 하늘 같은 팬 여러분께서 더러운 약 냄새 풍기지 말라고 하시잖아. 냉큼 콜리시엄에서 사라져라.

“볼.”

그런 마음을 가득 담아서 던진 2구, 높은 하이 패스트볼이었는데, 평소보다 조금 더 떴다.

거의 그 대가리를 맞출 듯이 날아갔기에, 로빈슨 카노는 황급히 뒤로 물러났지.

‘오우, 큰일 날 뻔했네.’

이건 마이 미스테이크다.

아무리 그래도 헤드샷을 날릴 만큼 증오하는 건 아니기에, 잽싸게 고개를 숙여 사과하자, 로빈슨 카노는 불쾌한 듯 노려보다가, 다시 배터박스로 들어갔다.

팬들까지 든든하게 받쳐준다는 생각 때문인지, 감정이 너무 실렸어. 쏘리쏘리.

‘후우, 좀 적당히 누르자.’

약쟁이들을 조지는 것에만 집중하느라, 너무 달아올랐어.

“파울!”

적절하게 감정을 제어하며, 3구를 던졌고, 다시금 몸쪽으로 날아든 공에 로빈슨 카노가 저도 모르게 움찔거리면서, 빗맞은 타구가 나왔다.

이번에도 조금 높았기에, 저도 모르게 조금 쫄았나 보네. 실투였는데, 어쩌다 보니 위협구처럼 됐구만.

이래서 사람이 착하게 살아야 돼. 본인도 찔리는 게 있으니까, 괜히 겁먹고 그러는 거 아니야?

조금 적반하장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그렇다. 난 잘못 없어.

‘그래도 기세가 좀 누그러졌네.’

한번 크게 가슴을 철렁인 것 때문인지, 약쟁이 트리오 중에서 유일하게 꿋꿋했던 기세가 조금은 내려갔다.

위협구 아닌 위협구 때문도 있지만, 날 상대로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있다는 것도 영향을 끼쳤겠지.

3개월, 80경기나 뭉텅이로 날리면서 떨어진 경기감이 더욱더 맛이 가고 있는 게 훤히 눈에 보이는군.

‘그러니 이제 완전히 망가뜨리자고.’

공을 잠깐 손 안에서 굴리다가 그립을 잡았다. 결정을 내렸으니, 더는 두고 볼 것도 없지.

저조해진 타격감. 휘청거리는 밸런스. 망가진 타이밍. 그것의 종지부를 찍어줄 만한 공이 하나 있지.

다들 이거 하나 맛보고 나면, 정신을 못 차리더라고. 좀 여운이 짙게 남나 봐.

조금은 가볍게, 하지만 확실하게 손끝으로 긁으며, 공을 뿌리쳤고, 로빈슨 카노는 조금은 몽롱한 눈빛으로 그것을 쳐다봤다.

아니, 몽롱함이 아니라···

“스트라이크 아웃!”

자괴감인가?

슬로 커브.

거의 이퓨스 수준으로 느릿한 공이 둥실둥실 날아가, 포수 글러브 안으로 박히자 타석의 로빈슨 카노는 딱딱하게 굳었다.

그렇게~ 느리다고 평가받는 80마일 대도, 그보다 더 느린 변화구의 70마일 대도 아닌. 무려 60마일 대의 공을 가만히 지켜봤다는 것이, 그거에 루킹삼진을 당했다는 것이 충격스러운 거겠지.

대충 눈치로 봐선 적어도 오늘 안에 회복하기는 글렀다.

‘이 정도면 잘 조졌네.’

이것으로 약쟁이들은 죄다 조져 놨군. 이제 남은 건 매리너스 팀 자체도 끝까지 조져놓는 것뿐인데···

“아웃!”

“아웃!”

다행히 그것도 순항 중이다.

애초에 약쟁이들을 특별히 잘 조진 거지, 나머지를 안 조지는 건 아니니까.

####

“이야~ 어제는 8점이나 내더니, 오늘은 꼴랑 2점? 이젠 좀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니냐? 이 무능한 타자 놈들아?”

크리스티안 옐리치는 무엄하게도 조금은 귀를 막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스승인 배리 본즈의 조언 아닌 조언과, 직접 마주하면서 느낀 Go의 존재감에 그를 금방 좋아하게 되고, 신뢰감도 생겼지만.

8월, 그것도 중순에 접어든 지금은 조금 그 목소리가 듣기 싫었으니까.

6회 말의 공격이 다시금 허무하게 막히면서, 투덜투덜거리기 시작했지.

“은근히 따돌리지 말고, 대놓고 싫다고 말해. 이 레이시스트들아. 내가 동양인이라고 점수 덜 내주는 거잖아?”

“또 시작이네. Suck 쟨 할 말 없으면 우릴 깐다니까.”

“하아, 하늘은 왜 저런 놈한테 저런 실력을 줘서 찍 소리도 못하게 만든 걸까? 언제나 사랑하는 Jesus지만, 요즘 따라 좀 애정이 식고 있어.”

사실 그 혼자만의 일은 아니지. 에이스의 타박이 일상적이게 되면서부터 다들 이런 반응이니까.

가장 서글픈 건 그에 아무런 반박도 못한다는 현실이겠지.

그래도 오늘은 제법 긍정적인 날이다. 퍼펙트나, 노히터가 이어지지 않았으니까.

그런 게 이어지고 있을 때는 Go가 더욱더 예민해지기도 하지만, 타자로서도 진짜 죽을 맛이니까.

‘미안하지 않은 건 아닌데···’

물론 그들도 사람이기에 분명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솔직히 옐리치 자신처럼 타자의 눈으로 보더라도 좀 심하기는 했으니까.

분명 최고의 에이스이고, 리그 최고의 투수이며, 여전히 전승을 달리고 있는데도, 의외로 득점 지원은 다른 경기랑 비교했을 때, 꽤나 적었지.

그와 함께 선발 라인업의 주축으로 평가받는 소니 그레이나, 션 마네아와 비교하더라도. 차이가 큰 편이니까.

물론 언제나 상대보다 더 많은 점수를 냈기에, 24연승, 아마 조금 시간이 지나면 25연승이 될 승수를 쌓은 것이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Suck 네가 나오는 날은. 이상하게 힘이 안 난다니까?”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거야? 어쩔 수가 없어? 오냐, 연승 끊겨도 그런 말이 나오나 보자.”

“아니, 네가 우리 입장이 돼 봐. 어차피 한 점만 내도 이기는데, 뭐···.”

하지만 조금은 변명거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결국 Go라는 압도적인 투수의 존재감 때문이니까, 이 적은 득점 지원도.

어차피 적게 내줘도 이기지 않는가? 크리스티안 옐리치가 생각하는 근본적인 문제는 결국 이거였다.

1점을 내든 2점을 내든, 가끔씩 흥이 올라 4점 이상의 다득점을 내든 간에, 무조건 경기는 이겼다.

그러다 보니 딱 한 점만 올려도, 다들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지. 자연스럽게 스윙도 가벼워지는 것이고. 어차피 낙승이니까.

당장 크리스티안 옐리치 자신도 이상하게 Go가 마운드에 오르면 평소보다 조금 긴장감이나 집중력이 떨어지는 편이고.

“이 배은망덕한 쓰레기들. 난 약쟁이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데···”

“죄다 때려잡았으면서 사투라는 표현은 조금-”

“셧업. 수비나 잘해라 쓰레기들아.”

그런 변명에 Go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마운드에 올랐고. 옐리치 역시 좌익수로서 외야 좌측 필드로 걸어갔다.

수비나 잘하라는 그의 명령을 듣기 위해서. 사실 그것조차도 딱히 필요가 없지만 말이다.

특히나 외야수인 자신이나, 채드 핀더, 마크 칸하는 더더욱. 그도 그럴 것이···

“스트라이크 아웃!”

7회 초, 마운드에 오른 Go는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타자들을 타박하며 투덜거렸지만. 결국 마운드에 오르면 이렇게 되니까. 언제나 이렇지.

‘거의 전 경기 출장인데, 이상하게 편하단 말이지.’

그 덕분인지, 분명 엄청난 경기수를 소화하고 있는데도, 항상 체력이 남아돌았다.

타격에서도 큰 무리가 없고, 수비에서도 딱히 뛸 일이 없으니까.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오늘도 마찬가지였고.

‘이제 슬슬 일 좀 해야겠네.’

앓는 소리를 하더니, 마지막까지도 삼진 두 개와 내야플라이 하나로 순식간에 이닝을 마치는 고유석을 보며 크리스티안 옐리치는 생각했다.

‘결국 충분하잖아.’

오늘의 득점도 역시나 충분했던 것 같다고.

고유석이 들었다면 뒷목을 잡았을 말이었지만.

조금은 우습게도, 그를 제외한, 그라운드 위의 모든 선수들은 똑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다. 심지어 매리너스마저도.

“아웃!”

결국 그게 현실이었고.

2대0. 그 이상의 추가 득점 없이, 애슬레틱스의 무난한 승리로서 막을 내렸다.

어쩌면 조금은 아슬아슬했던, 간신히 신승을 따낸 것처럼 보였지만.

조금 아이러니하게도, 애슬레틱스에는 위닝 멘털리티로 가득했다.

모든 선수들, 그리고 경기장을 찾은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엔 이미 무조건 이긴다는 확신이 깃들어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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