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클레이튼 커쇼는 흥분하고 싶지 않았다. 감정에 휩싸이고 싶지 않았지.
어쩌면 경기 당일, 모든 것이 완벽하길 바라는 그의 스타일 때문일지도 몰랐다.
등판 시, 철저하게 지켜낸 루틴과 마인드 컨트롤로 대단히 예민하게 벼려낸 멘탈은 감정의 침입에 민감했으니까.
실제로 과하게 감정적이었던 경기들에서는 별로 그다지 좋지 못한 피칭을 해본 경험도 있었고.
“···”
“Suck 쟤는···”
“저번에 만났을 때보다 더···”
“178이닝이나 던졌는데, 어떻게···”
그런 그의 성격과 스타일을 잘 알기에, 동료들도 그를 혼자 있게 해주고는 했지.
장난기가 넘치는 야시엘 푸이그조차, 목소리를 조금 낮추거나, 그의 주변에 얼씬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그토록 예민하게 잘 벼려낸 멘탈이었는데, 조금씩 마음 안쪽에서부터 불길이 타오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날 저격했어.’
갑작스럽게 빨라진 피칭.
별다른 일은 아니다.
Go의 트레이드 마크니까.
경기 중간부터 급격하게 가속되는 투구동작은 타자들의 타이밍을 망치는 가장 좋은 무기 중 하나이지.
몇 타순이 돌아, 같은 타자를 여러 번 상대하더라도, 쉽게 공략당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고.
허나 오늘은 오직 타자를 잡기 위해서 속도를 높인 건 아니었다. 극도로 예민한 상태이기에, 더욱더 민감하게 느껴졌지.
이건 자신을 노린 거다.
클레이튼 커쇼, 자신의 피칭을 망치려고 하는 것이고.
이전에 다른 투수들을 무너뜨리며, 에이스 킬링이라고 표현되기도 했던 것처럼.
Go가 다저스를 퍼펙트로 막고 있듯이, 비록 퍼펙트는 아니지만, 그 역시 애슬레틱스 타선을 잘 봉쇄했으니까.
‘휘말리면 안 돼.’
다시 한번 그렇게 스스로 다짐했다. 감정을 제어해야 한다고. 호승심을 억눌러야 한다고. 승부욕을 참아야 한다고.
그 속도에, 템포에 말려들어 흥분하는 순간, 지난 며칠 동안 내내 갈고닦았던 피칭 메커니즘이 흔들리기 시작할 테니까.
“스트라이크 아웃!”
그렇기에 도발적인 행동에도 그저 묵묵하게 지금의 페이스를 유지했다.
5회 말.
다시금 올라 선 마운드 위.
예상보다 조금 더 빨리 오른 마운드이기에, 조금은 숨이 가쁘기도 했지만, 제법 커리어를 보내면서, 숱한 경험을 쌓았기에, 이 정도는 적절하게 제어할 수 있었다.
여러 언론, 그리고 팬들마저 그의 시대가 끝나간다며 소리치고 있었지만, 아직도 충분한 여력이 남아 있기도 했고.
그것을 증명하듯 2번타자 제드 라우리를 다시금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아아아···”
그러자 아이들의 탄식이 나직하게 흘렀고, 아이를 좋아하는 클레이튼 커쇼이기에, 그것이 조금은 민감하게 들리기도 했다.
그렇겠지, 오늘 경기장을, 콜리시엄을 가득 채운 오클랜드의 아이들에겐 자신이 가장 큰 빌런이겠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이어지고 있는 Go의 피칭에, 유일하게 걸림돌이라고 한다면 여전히 0점인 점수일 테니까.
허나 언제나 그렇듯, 피칭에는 사심을 담지 않았다.
“파울!”
3번타자 크리스티안 옐리치.
올해 애슬레틱스로 이적하여, 대단히 훌륭한 성적을 기록 중인 타자다.
같은 내셔널리그인 마이애미 말린스 출신이기에, 조금 익숙하기도 했지.
트레이드 이후, 몇 단계는 더 진화한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기에, 이전의 분석은 의미가 없어졌지만.
그는 조금은 짜증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커쇼를 보기도 했다. 마치 다저스가 Go를 바라보는 것처럼.
그들에게도 커쇼가 굉장히 짜증스러웠겠지. 특히나 홈경기, 로컬의 어린 팬들이 보는 앞에서, 꿋꿋하게 막고 있으니, 더욱더 화가 날 테고.
“아웃!”
허나 그런 타자의 감정과 상관없이, 커쇼는 그저 이를 꽉 깨문 채, 공을 던졌다.
묵직한 포심 패스트볼.
여러 부상들이 겹쳤던 것의 후유증인지. 아니면 정말로 언론의 말처럼, 이른 에이징 커브가 닥쳐온 것인지.
올해 들어 구속이 많이 떨어지면서, 과거 최고로 꼽혔던 스터프가 많이 내려갔다는 평을 받기도 했지만.
최소한 지금 이 순간, 최고의 타자 중 한 명의 배트를 밀어내기에는 아직 부족함이 없었다.
투아웃.
점점 더 벅차오르는 느낌.
이상하게 뜨거운 가슴 한편.
제 자신의 몸을 완벽하게 파악할 줄 아는 커쇼이기에, 변화 역시 잘 알고 있었고. 짧게 숨을 들이마시며, 진정시키려고 해보기도 했지만.
‘젠장···’
역시나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한번 피어오른 불은, 쉽사리 꺼지지 않는 법이니까.
그렇기에 오히려 인정했고.
여기서 억지로 부정해봤자, 반발만 더 커질 뿐, 원하는 안정을 얻지는 못하겠지.
‘그래, 한번 해보자고.’
스스로의 감정을 인정한 순간부터, 더는 거침이 없었다. 오직 참지만은 않는 사람이기에, 지금의 클레이튼 커쇼가 있었던 것이니까.
“스트라이크!”
4번타자 크리스 데이비스.
대단히 폭발적인 애슬레틱스 타선의 중심이자, 가장 강력한 화약이라고도 할 수 있는 남자.
그는 앞서 5회 초, 야스마니 그랜달이 그랬던 것처럼, 커쇼의 변화를 곧바로 알아챘다.
“스트라이크!”
황급히 폼을 가다듬으며, 맞서 싸우려고 했지만, 역시나 배트는 닿지 않았다.
묵직하게 휘두른 스윙이 허공을 갈랐고, 자세가 무너진 타자는 간신히 쓰러지지 않았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삼자범퇴.
삼진까지 두 개를 곁들이며, 이번 경기 들어서, 처음으로 기분 좋게 마무리한 이닝이었지만, 이닝을 마치고 내려가는 클레이튼 커쇼의 얼굴은 그리 밝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금은 허탈하게 웃었지.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마음속 저편의 열기를 느끼면서, 그는 확신했으니까.
‘그래서 에이스 킬링이었군.’
에이스 킬링이라는 단어의 뜻을. 물론 그것을 처음 언급한 기자가 깊은 뜻을 담고서 부여한 명칭은 아닐 거다.
그저 여러 투수들을 손쉽게 꺾어내고, 그들의 페이스를 망치는 Go를 보며 대충 아무렇게나 갖다 붙인 거겠지.
허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에이스 킬링’이라는 단어가 참으로 정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한 ‘에이스’라면, 먼저 걸어온 싸움에 응하지 않을 수가 없을 테니까. 스스로가 최고라는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어야지만, 진짜 에이스니까.
‘지독하게 걸렸어.’
동시에 더럽게 걸렸다는 생각도 들었다. 상대 투수의 아주 노골적인 얄미운 행동에 결국에는 말려들은 것이니까.
적절하게 유지했던 어깨도, 평정심을 가졌던 마음도, 죄다 새빨갛게 달아올랐지. 본인의 의지와는 다르게.
그것이 조금은 불쾌하기도 했지만, 시작된 이상, 호락호락하게 쓰러져 줄 생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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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쇼의 특징은 언제나 일정하다는 거다. 투구폼도, 디셉션도, 인터벌도. 그리고 성적도.
착하고 선한 평소의 성격에 비해, 경기 당일에는 굉장히 예민하고, 간혹 감독과도 말싸움을 할 정도로 완벽한 것으로 유명한 커쇼인데.
그런 그의 성격적인 특징이 피칭으로도 연결된 거겠지.
‘그런데 불이 붙었구만.’
그런 커쇼가 조금은 불이 붙은 것 같았다. 눈빛부터 달라졌으니까. 사실 이런 걸 원한 건 아닌데 말이야.
내가 바랐던 건 건, 그가 흥분해서 밸런스가 무너지거나. 빠른 템포로 인해, 페이스가 망가지는 거였는데, 오히려 괴물을 깨워 버렸네.
비록 한 이닝에 불과하기는 하나, 척 봐도 더 빡세진 것 같은 커쇼의 모습에 브루스나 다른 타자들은 나를 향해 원망이 담긴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내가 퍼펙트 중이라 감히 입은 못 열고, 그냥 눈알만 데굴데굴 굴려서, 왜 괜히 자극해가지고 일을 더 망친 거냐는 듯이 쳐다보는데, 어허, 눈깔 안 돌려?
‘득점 지원도 못 해주는 타자 놈들이 어디서 감히 하늘 같은 투수님을 노려보고 있어?’
직접 끌어내려 주겠다고 해놓고, 일을 더 꼬아버린 것 같아서 나도 조금 미안하기는 한데, 그래도 어딜 째려봐?
살짝 눈을 부라려주니, 다들 얌전히 이전처럼 고개를 돌렸다. 암, 그래야지.
‘그리고 그렇게까지 나쁜 건 아니야.’
원래 계획과는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마냥 안 좋기만 한 건 아니다. 평정심을 잃었으니까.
비록 무너지거나, 흔들리진 않았지만, 어쨌든 약간의 균열이 생기기는 한 거지.
‘최대한 그 틈새를 벌려 보자고.’
6회 초. 다시 마운드에 오르자, 7번타자 야시엘 푸이그가 반겨줬다.
그리 위협적인 타자는 아니지. 분명 재능은 충만했던 것 같지만, 14년 이후로 저 젊은 나이에 에이징 커브라도 온 것처럼 훅 내려앉았으니까.
그가 팀의 코어이자, 타선의 중핵으로 자라주길 바랐던 다저스로선 계륵처럼 되어버렸고.
플래툰 놀이를 좋아하는 다저스 감독의 성향 상, 좌완에 극도로 약한 모습을 보이는 푸이그도 플래툰으로 기용됐는데, 오늘은 멀쩡하게 나왔네.
“스트라이크!”
다만 결과는 별로 안 좋다.
내 입으로 표현하는 게 좀 민망하지만, 좌상바가 리그 최고의 좌투수를 만났으니, 어쩌겠어.
‘작 피더슨까지 나왔다면, 더 편했겠지.’
오늘은 결장한 작 피더슨도 상당히 좌투수에게 약한데, 만약 오늘 출전했다면 더욱더 만족스러웠겠지.
사실 퍼펙트를 이어가고 있으니, 더 편할 것도 없긴 하지만.
“파울!”
초구부터 우렁찬 헛스윙을 보여줬던 푸이그는 그래도 불꽃같았던 재능이 아직 남아 있기는 한 건지, 2구는 제법 그럴듯하게 컨택하는 것에 성공했다.
바깥쪽으로 낮게 깔아 던진 투심 패스트볼을 맞혀냈으니까. 다만 정확성이 그렇게 높지는 않았기에 빗맞은 타구였지만.
“볼.”
3구째 바깥쪽으로 급격하게 역회전하면서 나간 서클 체인지업은 선구안을 발휘해서 거르기도 했고.
‘오늘 서클 체인지업을 제법 잘 보던데, 다른 걸 던져야겠네.’
지난 타석에서도 제법 서클 체인지업을 잘 지켜봤으니, 이번 위닝샷은 다른 걸 던져야겠지.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었기에, 가볍게 손 안에서 공을 굴린 뒤 그립을 잡았다.
“스트라이크 아웃!”
그대로 피칭.
몸쪽으로 쭉 날아든 코스에 이번에도 과감하게 스윙했지만, 공은 유유히 떨어지며, 배트에게서 달아났다.
헛스윙 삼진아웃.
서클 체인지업이지.
다른 거 던진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다르잖아? 구질이.
오늘 푸이그가 잘 지켜보던 서클 체인지업은 역회전이 강한 V2고, 이건 낙폭이 더 좋은 V1이니까.
명칭이 같다 뿐이지, 완전히 다른 성질이지. 효과도 다르고.
‘다음은 맥스 먼시.’
8번타자로, 원래는 우리 팀 출신이다. 16년까지 애슬레틱스에서 뛰었지.
나도 한솥밥 먹은 적 있고.
내가 싱글A에서 개털렸을 때, 쟤도 드래프트 지명받고 왔었거든. 그게 2012년이니, 벌써 6년 전이구만.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이네.
오클랜드 시절에는 별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선수는 아니었는데, 올해 다저스와 스플릿 계약을 맺더니, 대폭발을 일으켰지.
현재까지 24홈런을 치며, 30홈런은 물론, 잘하면 40홈런도 노려 볼만한 페이스를 보여주고 있는데.
“볼.”
“파울!”
“스트라이크!”
“볼.”
그렇기에 조금 더 섬세하게 잡았다. 오늘 누구라도 이길 수 있을 만한 폼이긴 하지만. 언제나 돌다리는 두들겨 봐야지.
저 정도의 파워를 보여주고 있는 타자라면, 언제든지 한 방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
출루율이 타율과 무려 1할 3푼이나 차이 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선구안도 아주 발군이지.
‘빌리 빈이 통곡하겠어.’
모르긴 몰라도, 아까워서 눈물을 흘릴 거다. 이렇게 터질 줄 알았다면, 어떻게든 팀에 붙들어 놓았어야 했으니까.
물론 지금 타선도 상당히 강력하기에, 빈자리가 없기는 하지만, 어쨌든 배가 아프겠지.
“아웃!”
그런 빌리 빈을 달래주기 위해 가볍게 잡아줬다. 우익수에게 잡힌 타구.
그래도 제대로 당긴 건지, 마크 칸하가 상당히 뒤로 물러난 뒤에야 간신히 잡아냈다.
저 정도로 날아간 건, 이번 경기에서 처음이네. 타자의 파워가 강한 것도 있지만, 슬슬 나도 구위가 좀 떨어졌다는 뜻이기도 하지.
‘1회부터 정신줄 놓고 달렸으니, 쌩쌩하면 그게 더 이상하기는 해.’
애들 보는 앞이라고 힘이 빡 들어갔었잖아? 이제 경기 후반인데, 좀 빠지는 게 정상이지. 물론 그렇다고 해도···
“아웃!”
타자를 조지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9번타자 크리스 테일러가 2구째 커터를 빗맞히며 포수플라이로 물러났다. 그것으로 다시금 쓰리아웃.
6회 초가 다시금 삼자범퇴로서 마무리 지어졌고, 이제 다시 커쇼의 턴이었다.
벤치로 돌아가며, 다시금 확인해본 그는 완전히 불이 붙어 있었다. 아주 활활 타오르고 있었지.
‘킬링은 지랄, 어림도 없겠네.’
아무래도 에이스 킬링은 대차게 말아먹은 것 같구만.
이러면 체력싸움이 되는 건데, 다행스럽게도 내가 가장 자신 있는 게 그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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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이크!”
콜리시엄은 조용했다.
심지어는 한시도 가만히 있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아이들마저도.
좋아하는 만화나, 프로그램을 보는 것처럼 얌전히 자리에 앉아, 멍하니 그라운드를 내려 봤지.
고유석이 퍼펙트를 이어가면서부터 적막이 감돌았지만, 이젠 하나의 이유가 더 추가됐지.
“스트라이크!”
엄밀히 따졌을 때, 오늘 경기는 아이들이 바라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이들이 바라던 모습은 고유석이 멋진 삼진을 잡고, 타자들을 해치우면.
타자들도 그에 화답해서 멋지게 홈런을 날리거나, 안타를 쳐서 그의 승리를 만들어주는 것이었으니까.
어떻게 본다면, 딱 절반만 이뤄진 셈이라고 할 수 있었지.
하지만 그런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비록 점수는 여전히 0대0이었고.
그들의 히어로가 아직까지도 승리를 결정짓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미 경기에 압도되어 버린 지 오래였으니까.
“스트라이크 아웃!”
그러한 적막 속에서, 커쇼는 조금 몸이 가볍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제 6회 말.
6이닝째에 접어들었는데도, 어깨가 뻐근하다거나, 무겁기는커녕 여전히 멀쩡했지.
흐름이 끊기지 않은 덕분일 거다. 순식간에 끝나버렸던 공격 덕분에, 달아오른 어깨가 채 식기도 전에 다시 마운드에 올랐으니까.
그러니 정상도 아니고.
아주 위험한 상태이지.
자칫 부상이 닥쳐올 수도 있고. 하지만 그렇기에 조금은 반갑게 느껴지기도 했다.
‘오랜만이네, 이런 느낌은.’
작년, 그리고 재작년.
잦은 부상이 겹쳤었다.
올해도 겪었고.
그럴수록 당연하게도 투구감각이 리셋되어버렸지. 흐름이 끊겼고, 마운드에서 멀어졌으니, 그럴 수밖에.
어쩌면 구속이 떨어진 것도 그러한 영향일지도 모르고. 물론 나이의 문제도 있겠지만.
하지만 연속적으로 맞이한 피칭, 끊기지 않고 이어진 흐름은 오래간만에 모든 것이 완벽해졌다는 느낌을 줬다.
“아웃!
그렇기에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더욱더 이를 악 물고 던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6회 말 역시 종료.
이번에도 안타가 나오지 않았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제법 자주 안타를 치고, 출루하며, 찬스를 만들어보기는 했었던 애슬레틱스지만.
오히려 경기의 중반부를 넘어선 순간부턴 더욱더 타이트하게 숨통이 막혀왔다.
“스트라이크 아웃!”
그렇게 따진다면, 다저스는 이미 뇌사 상태나 다름없긴 했지만.
“클레이튼 이제 그만-”
“조금만 더 던지겠습니다.”
7회 초.
황당할 만큼 빨라진 동작으로 타자들을 몰아치는 투수를 멍하니 바라봤을 때, 슬쩍 투수코치가 다가오기도 했다.
부상 복귀 이후, 철저하게 관리를 받고 있는 커쇼이니, 오늘도 이 정도로 끊길 바라는 거겠지.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꽤나 단호하게. 지금까지야 구단이 자신을 위하는 마음을 잘 알고, 스스로도 관리의 필요성을 느꼈기에.
약간의 불만을 있을지언정 지시에 따르는 편이었지만. 적어도 오늘은 자신이 정하고 싶었다.
“···그래, 지금 너무 무리하고 있어, 혹시라도 어딘가 당기거나, 아프기 시작하면, 바로 사인을 보내줘. 그리고 그땐 교체야.”
위대한 투수이고, 현재의 다저스를 상징하는 투수이기에, 투수코치 역시 그의 의사를 존중했다.
비록 조금은 걱정스럽기는 하나, 아직 투구수도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았고, 오기가 앞서는 선수가 아니니, 스스로 문제점을 발견하는 즉시 이야기할 테니까.
이미 몇 차례나 부상을 겪었고, 그 아픔을 곱씹었기에, 더욱더 그럴 테고.
“아웃!”
다시금 적막해진 분위기 속에서 울리는 것은 오직 주심의 목소리 뿐이었다.
에이스의 호투에 화답하듯, 타자들 역시 더욱더 힘 있게 스윙하며,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파하려 했지만.
그런 노력을 상대 투수는 우스울 만큼 손쉽게 분쇄했다. 이전의 다른 경기들에서, 다른 팀들을 상대로, 다른 타자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스트라이크 아웃!”
그리고 다시금 삼자범퇴.
이닝이 돌아오는 시간은 조금 더 빨라졌다. 그렇기에 어깨 역시 이전 이닝보다 더 뜨거웠고.
“파울!”
조금은 다급해 보이는 스윙.
타자를 보며 커쇼는 애슬레틱스 역시 점점 압박받고 있음을 느꼈다.
어쩌면 다저스 이상이지.
이제 정말로 퍼펙트가 나올지도 모르건만, 팬들이 내쉰 숨소리 속에 기대감이 가득 담겨 있건만.
정작 타자들이 점수를 내지 못해서, 9회에서 끝난다면, 그래서 퍼펙트가 되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추한 모습이 없을 테니까.
“아웃!”
그런 초조함이 낳은 섣부른 타구가 다시금 수비에 걸렸다. 다시 원아웃.
“스트라이크!”
그다음 타자가 올라오는 즉시 다시금 공을 던졌다. 이미 시작된 이상, 흐름을 이어가야 했으니까.
어금니가 부서지도록 씹으면서, 연이어 던진 공, 다행스럽게도 몸은 정신의 명령을 잘 들어줬다.
“스트라이크 아웃!”
“세이프!”
“아웃!”
그대로 다시금 지워져 버린 이닝. 중간에 안타를 하나 내줬는데도, 조금은 우습게도 이닝은 더욱더 빨리 끝났다.
그렇게 7회도 종료.
다시 벤치에 앉았을 땐, 기분 좋은 느낌마저 들었다. 조금 지쳐서, 숨이 가빠오는 것이 정상인 날인데도.
‘4년 전이랑 비슷하네.’
문득 커쇼의 머릿속에 4년 전 6월, 노히터를 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영원토록 간직할 순간이기에, 금방 돌이켜볼 수 있었지.
그날도 이런 느낌이었다.
어깨가 가벼웠고, 숨이 벅차지도 않았지. 그렇기에 완벽할 수도 있었던 경기를 했던 것이고.
비록 오늘은 이미 안타도 몇 번이나 맞았기에, 비록 노히터는 불가능하지만, 그때처럼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베이스 온 볼!”
“X발!”
“그게 어떻게 볼이야!”
“우우우우우우!”
그리고 이어진 8회 초.
반대로 먼저 싸움을 열었던 투수는 조금은 힘이 떨어진 것 같았다.
첫 아웃카운트를 잡은 뒤.
5번타자 맷 켐프에게 풀카운트 상황에서 볼넷을 내주면서, 퍼펙트가 깨져버렸으니까.
콜리시엄에 엄습했던 적막도 잠시나마 깨져버렸고. 주심을 향해 온갖 종류의 욕설이 날아들었지.
‘저쪽이 먼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니 조금은 뿌듯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결국 상대가 흔들릴 때까지, 꿋꿋하게 버텨낸 것이니까.
“스트라이크!”
허나 퍼펙트를 내줬는데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던 건지, Go는 여전히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거뜬함을 증명하듯, 한층 더 혹독하게 몰아쳤지.
쏟아진 욕설과 야유와 달리, 환호성을 내질렀던 다른 동료 타자들이 다시금 입술을 씹을 정도로.
“아웃!”
“아웃!”
그리고 결국 오히려 더블 플레이를 유도하며, 조금 더 시간을 단축시켰다. 이번엔 거의 2분대에 다다랐으리라.
‘그래, 끝까지 가보자고.’
다시금 당당하게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그를 바라보며, 커쇼 역시 조금은 웃음기를 머금고서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아니, 일어나려 했지만. 곧 다가온 투수코치가 그를 잡았다. 계속 앉아있으라고 말하는 것처럼.
“조금 더-”
“아니, 교체야.”
단호하게 말하며 왼팔을 가리키는 코치의 손짓에 그제야 커쇼는 축 늘어진 왼팔을 발견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어쩌면 다시 덕아웃으로 돌아온 순간부터, 왼팔이 축 늘어져 있었다는 것을.
“수고했어, 오늘도. 정말로 많이 수고했다. 그러니까, 이 정도로 끝내자.”
분명히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멀쩡했건만. 여전히 기분 좋은 상쾌함이 가득하건만.
몸은 그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이미 모든 힘을 써버렸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렇기에 투수코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마운드를 바라보는 눈동자에선 아쉬움을 지우지 못했다.
“···네, 알겠습니다.”
클레이튼 커쇼가 내려갔다.
이번 경기의 악당이자, 다저스를 굳건하게 지켰던 LA의 히어로가 내려갔다.
그리고 다저스는 고개를 떨궜다.
####
“···”
그라운드로 나가기 전, 타자들, 아니 야수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해냈다는 고양감도 느껴졌고. 진작 했어야지, 이 친구들아. 나 진짜 쫄렸단 말이야.
커쇼는 쓰러질 기미가 안 보이지, 살짝 삐끗해서 볼넷 내주면서 퍼펙트는 깨졌지. 진짜 얼마나 떨렸는데.
진지하게 고민했다니까? 10회에도 오르려면, 스콧 에머슨을 대체 어떻게 설득할까, 하고. 다행히 그런 고민은 이제 필요 없었다.
‘최소한 추잡한 꼴은 안 보게 해 줘서 고맙네.’
전광판에는 1이라는 숫자가 우뚝 솟아 있었으니까.
별로 멋지게 점수를 내진 않았어. 단타 치고, 진루타 치고, 그리고 희생플라이로 간신히 한 점 올렸거든.
하지만 그 과정이 어떻든지 간에, 그것이 오늘 경기의 결승타가 될 거라는 것만큼은 그 무엇보다도 확실했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수고 많았습니다.’
슬며시 다저스의 덕아웃을 보자, 커쇼와 눈이 마주쳤다.
3이닝 동안 달아오른 쇠처럼 버닝 타임을 가졌던 몸을 추스르며, 한창 아이싱 중이었는데, 살짝 고개를 끄덕이니 피식 웃더라.
다행이네, 건방진 놈이라고 미워하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비록 이제는 그 정도로까지 우상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이돌 중 한 명에게 미움받는 건 좀 그렇잖아?
‘볼넷 하나가 아쉽네.’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오른 마운드. 전광판에 찍힌 사사구 하나가 참 거슬렸지만, 어쩔 수 없지.
퍼펙트도 가능할 것 같았는데, 오늘이 그냥 이런 날이라는 뜻이니까.
‘이제 끝을 보자고.’
그러니, 이제 이런 날의 마침표를 찍어야겠지.
마운드에 오르자, 간절한 눈빛이 쏟아졌다. 어른도, 아이도, 모두 다 똑같은 얼굴이었지.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카운트가 올라가자, 엉덩이도 들썩거렸고 말이야.
“아웃!
이제 투아웃.
마지막 아웃카운트 하나만을 남겨뒀을 때, 문득 어릴 적 자주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젊다는 것 하나만으로 사랑받기에 충분하다. 청소년의 수호성인인 돈 보스코가 남긴 말이다.
나랑 아빠는 무교지만, 엄마는 천주교 신자이신데, 그 덕분에 자주 들었지.
주로 내가 사고 치고, 엄마한테 등짝을 두들겨 맞을 때 말이야.
한 날은 야구공으로 창문 깬 것 때문에 등짝을 맞다가 서러워서, 왜 말과 행동이 다르냐고 물으니까, 사랑의 매라고 하시더라.
아무튼 지금 돌이켜보면 참으로 맞는 말이다. 아이와 청소년은 아직 미성숙하고, 점점 더 배워나가는 존재이기에, 언제나 사랑으로 보듬어야지.
그토록 엄마가 살신성인 것 내려줬던 가르침을 나는 오늘 직접 실현했다.
“스트라이크 아웃!”
아이들이 원했던 선물을 안겨줬고, 바랬던 꿈을 이뤄주잖아?
“와아아아아!”
“Goooooo!”
“Suuuuuuuck!”
“노히터! 노히터다, X발!”
저거 봐? 얼마나 좋아해?
다시금 삼진이 올라가자, 평소보다 조금 하이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아직 변성기가 지나지 않아, 목소리가 높은 어린아이의 미성이, 우렁찬 사내들의 걸쭉한 욕설이 담긴 함성을 이겨냈지.
노히트 노런.
볼넷 하나가 더럽게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이 경기장에 모인 사람들이 평생 동안 행복하게 추억할 순간 정도는 되겠지.
어린아이들에게 선물을 뿌리는 산타클로스처럼, 난 오늘 최고일 ‘뻔’했던 경기를 선물해줬으니. 그것만으로 난 이미 성인의 가르침을 실현하는 것이 아닐까?
‘개소리가 술술 나오 걸 보면, 내가 좀 지치긴 했나 보네.’
체력을 많이 쓰기는 했어.
잡소리가 무궁무진하게, 아주 프리스타일 래퍼처럼 술술 나오는 걸 보면.
그래도 다음 이닝은 없으니, 좀 지쳐도 상관없겠지. 어차피 며칠 뒤에는 다시 쌩쌩해질 테니까.
그렇기에 지금은 그저 오늘의 탈력감과 만족감을 거부감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