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다저스의 타선은 객관적으로 상당히 강력한 편이다. 여러 스카우트 리포트나, 분석 자료에서도 그렇게 이야기했지.
여러 레전드급 투수들을 배출하고, 클레이튼 커쇼라는 현역 최고의 커리어를 자랑하는 투수의 팀이다 보니. 아무래도 투수 왕국이라는 이미지가 강하고.
특히나 우리나라에선 박찬원 선배님이나, 류영진 선배 같은 한국 최고의 투수들의 팀이었기에. 그런 느낌이 더욱더 강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투타 양쪽으로 다 강하지, 이번 시즌은.’
그중에서도 가장 발군은 파워라고 할 수 있다. 팀 안타는 내셔널리그 중간 정도 수준이나, 팀 홈런과 장타율은 1위거든.
다저 스타디움이 홈런 팩터에서는 중립적인 수준을 자랑하는 구장이라고는 하나, 어쨌든 투수에게 유리한 구장인 걸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지.
그러니 다저스의 타선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최근 경기들을 통틀어 내가 상대했던 팀들 중 가장 강력하다고 할 수 있지만.
“파울!”
오늘은 그딴 거 없다.
1회 초가 세 타자 연속 삼진으로 깔끔하게 삭제된 이후 2회 초.
선두타자로서 타석에 올라온 야스마니 그랜달은 초구로 과감하게 던진 몸쪽 패스트볼을 제법 정확하게 컨택했지만, 공은 홈 플레이트 뒤로 날아갔다.
힘에서 밀렸으니, 고통스러운 손맛이 팔을 타고 올라왔을 텐데도, 타자는 그걸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육체적인 고통보다, 정신적인 충격이 더 컸던 거겠지.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인 걸 보면.
‘정타인데 밀렸으니, 오죽하겠어.’
분명히 스윗 스팟이 맞은 것 같았는데도 배트가 밀렸으니, 타자로선 이보다도 더한 충격이 없겠지.
더군다나 본인의 파워에 자신감이 있는 타자라면 더더욱.
야스마니 그랜달의 경우, 포수인데도 타격이 준수해, 작년과 재작년 20홈런을 쳤던 타자이고.
올해도 비슷한 페이스이기에, 3년 연속 20홈런도 가능해 보일 만큼 펀치력이 좋은 타자이니.
자신의 파워에 당연히 자신감이 제법 있었을 텐데, 그 힘이 밀렸다는 생각 때문인지 조금은 정신이 멍해 보였다.
‘오늘 타격감이 좋아 보이네. 그래서 더 충격이 큰 것 같고.’
초구부터 타이밍이 얼추 맞은 걸 보면, 심지어 오늘 타격감도 좋아 보이고 말이야.
“파울!”
허나 배트는 다시금 밀렸다.
2구 역시도 파울.
이번에도 몸쪽으로 날아든 포심 패스트볼에 그는 또 한번 정확하게 컨택했지만, 타구는 오히려 조금 전보다 더욱더 거칠게 뒤로 튕겨져 나갔다.
그에 야스마니 그랜달은 마치 이게 말이냐 되냐고 묻는 것처럼 나를 쳐다봤지만, 난 그저 고개를 끄덕여줄 뿐이었다.
당연히 말이 되죠. 혹시 꿈이 아니냐고요? 아뇨, 현실입니다.
물론 오늘 콜리시엄을 찾아온 아이들과 노아에게는 꿈만 같은 하루겠지만, 당신에겐 아주 지독한 현실이죠.
‘경기 후반에는 조금 조심해야 할 수도 있겠네.’
사실 조금 위험하기는 했다. 말했다시피 정타에 가까웠으니까. 만약 다른 날이었다면 잘 맞은 깔끔한 타구가 나왔겠지. 그래, 다른 날이었다면 말이야.
내가 오늘 경기 전까지 무려 6일이나 쉬지 않았고, 날 보러 온 아이들도 없었으며, 색다른 이슈 때문에 관심이 몰린 덕분에 관종력까지 상승하지 않은 다른 날이었다면 안타를, 어쩌면 홈런을 쳤을지도 모르지.
허나 그 세 가지가 모두 다 중첩된 오늘은···
“스트라이크 아웃!”
어림도 없다.
3구는 쓰리핑거 체인지업.
이미 두 차례나 패스트볼을 본 타자에게, 유유히 날아드는 오프스피드는 독약과도 같았다.
앞선 2구에서 정확한 컨택을 보여줬던 야스마니 그랜달이지만, 3구는 스윙을 내지조차 못했다. 완전히 타이밍을 빼앗겼으니까.
그것으로 삼구삼진.
지난 이닝에 이어 네 타자 연속 삼진이구만.
“Goooooooo!”
“유 썩- 고오오오!”
그러자 울리는 유썩, 아니, Go. 뭔가 좀 신선하네.
다들 아이들이 많아서 입조심하고 있는데, 몇몇은 자연스럽게 평소처럼 유썩을 외치려다 중간에 고치기도 했다.
이로서 최면이 조금은 풀렸다. 맨날 유썩유썩 거리지만, 난 그래도 내 이름을 외치는 거라고 아주 쪼끔은 믿었거든.
근데 애들 앞에서 자제한다는 것 자체가 진짜로 욕설로 여겼다는 거잖아. 삼진은 잡았는데, 뭔가 기분이 묘하네.
‘그래, 이참에 이번 경기를 기점으로 삼아서, Go로 정착시키자고.’
유썩유썩 거리는 것보다야, 깔끔하게 고!라고 하는 게 낫잖아? 아이들도 어른들도 함께 할 수 있는 멋진 구호니까.
“아웃!”
다시금 Go를 유도해보려고 했지만, 아쉽게도 5번타자, 맷 켐프가 내야플라이를 치면서 연속 삼진을 끊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하지만 마지막 6번타자, 코디 벨린저가 시원스런 헛스윙을 보여주며, 다시금 우렁찬 Go를 만들어냈다.
“Goooo!”
어우, 듣기 좋아.
“스트라이크 아웃!”
“더는 못 참겠다! You Suck!”
“Hell Yeah!”
“It’s Suck Time!”
곧이어 3회 초 역시, 범타 두 개를 유도한 이후, 다시금 삼진을 잡아내며 삼자범퇴로 지워지자.
간혹 참지 못한 레이더스 몇 명이 평소처럼, 하지만 조금은 처절하게 Suck을 외치기도 했지만,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어허! 애들 듣는 앞에서 뭣하시는 겁니까? 아무리 레이더스라도 그렇지, 다들 입조심하세요!
그렇게 생각하며 흘끔 노려봤지만, 그들은 그저 해방감이 물씬 느껴지는 얼굴로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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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 팬들에게서 고유석의 이미지는 조금 미묘했다.
리그의 얼굴마담이자, 간판스타이며, 최고의 슈퍼스타이고.
21세기의 월터 존슨, 사이 영, 레프티 그로브 등등. 과거의 레전드들을 꺼내게 하거나, 혹은 그 이상이라는 평가를 받는 최강의 투수이긴 하나.
<메이저리그 최고의 슈퍼히어로! Go, 자신에게 홈런을 안겨준 블루제이스를 몰아치다!>
└Go가 엄청 잘하는 건 나도 인정하는데, 솔직히, 히어로라기에는 조금 그렇지 않아?
└잘하는 건 맞는데, 그 외엔 좀 애매하긴 하지.
└봉사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기부를 하는 것도 아닌데. 히어로라는 표현은 좀 그렇긴 해, 스타라면 모를까.
└팬서비스 잘하는 걸로 유명한데, 그 정도면 충분히 히어로 아니야? 요새 팬서비스 개차반인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팬서비스야 메이저리거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거고, 개차반인 놈들이 이상한 거야. 그리고 그 팬서비스 이상이 없잖아, Go는.
그런 압도적인 위상이나 입지에 걸맞은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타입의 선수는 아니었으니까.
물론 언제나 팬들에게 즐겁게 다가가고, 팬서비스를 마다하지 않는 모습은 인성적으로 나쁜 선수라는 생각도 들지는 않았지만.
먼저 나서서 사회에 공헌하거나, 영향력을 발휘하는 선수는 아니기에, 조금은 평가가 미묘하기도 했다.
<‘오클랜드의 돈보스코!’ Go, 아이들을 콜리시엄에 초대!>
<사비를 털어, 어린 팬들의 좌석을 구매한 Go?!>
<8월의 산타클로스, 마이너 시절 어린 팬과의 인연을 통해, 선물을 행사하다!>
그렇기에 고유석이 조금은 뜬금없이 아이들을 콜리시엄으로 초대한 것은 꽤나 신기하다는 반응을 받았다.
또한 과거 인연을 가졌던 어린 팬을 초대하면서, 연고지역이 섭섭하지 않게끔 행한 행동에 생각이 깊다는 평을 받기도 했고.
어쩌면 그런 성향의 선수가 아니기에, 더욱더 찬사가 쏟아지는 것도 있었지만 말이다.
[#A’s]
[다들 Suck을 몰라서 그렇지, Suck이 오클랜드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그럼그럼! 선수단에서 유일하게 오클랜드 내에 사는 선수라면 말 다한 거지!
└애슬레틱스의 챔피언은, 원래 아이들의 히어로지! 빅맥도 그랬고, 지암비도 그랬고···
└X발 그 새끼들은 왜 꺼내?
당연히 그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오클랜드 팬들은 자신들의 사랑이 일방통행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환호하며, 환희에 찬 비명을 내지르기도 했지만.
곧 경기가 시작되고, 훈훈했던 분위기는 조금 미묘해졌다.
-스트라이크 아웃! Go! 브라이언 도저에게 다시금 삼진을 잡아냅니다! 오늘 경기 일곱 번째 탈삼진!
-4구, 쳤습니다! 하지만 투수에게 잡히는 타구! 1루에서 아웃! 매니 마차도를 손쉽게 잡아냈습니다!
왠지 모르게 어느 순간부터는 아이들은 뒷전이고, 본인 스스로 흥분해서, 다저스를 때려잡고 있었으니까.
-스트라이크 아웃! 3번타자 저스틴 터너를 또 한 번 삼진으로 잡아냈습니다!
-6일간의 휴식이, Go에게 정말로 큰 도움이 된 것 같네요.
순식간에 경기 초반이 지워버린 뒤, 이젠 중반에 접어들었는데도 여전히 활기찬 표정으로 다저스를 때려잡는 고유석을 보며,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Live)Oakland Athletics 0:0 Los Angeles Dodgers]
└슬슬 애들은 핑계고, 그냥 자기가 원해서 다저스를 조지는 것 같은데···
└애들도 좋아하잖아? 슈퍼히어로 맞구만.
└오클랜드 애들을 위해서 다저스 애들을 울게 하는 게 무슨 히어로야. 우리 아들 지금 오열하고 있어. 다저스가 Suck한테 박살나는 거 보고.
└고담 오클랜드의 배트맨이지. 악당 다저스를 죽이지는 않고, 팔다리 부러뜨리고, X나게 패는 거 보면 배트맨이 확실해.
└SuperHero라는 건 아직도 잘 모르겠는데, Super는 맞는 것 같네.
지난 블루제이스 전 때와 마찬가지로, 조금은 잔혹하게 타자들을 학살하는 모습에, Super(초월적인,강한)하기는 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말이다. 비록 히어로인지는 조금은 애매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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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오늘 아이들에게 바라던 장면을 선사했고, 행복감을 나눠줬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귀여운 얼굴로 Gooo라고 외치면서, 내 삼진에 열렬한 환호성을 보여주고 있잖아?
“문제는 나 혼자만 잘한다는 거지.”
“무슨 연극도 아니고, 왜 혼자 독백을 하고 그래. 혹시 우리 들으라는 거야?”
“잘 아니까 다행이네. 애들 보는 앞에서 다들 아주 잘하고들 계셔?”
다만 타자들은 아니다.
나만 아이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있지. 타자들은 반대로 다저스 아이들을 행복하게 하고 있고.
돈은 오클랜드에서 받으면서 말이야. 참으로 후안무치한 놈들이 아닐 수가 없다.
나한테 은근히 부담을 주기도 했던 제드 라우리 역시 꽁꽁 틀어 막혔지.
덕아웃을 쭉 훑으니, 타자들은 마치 목 스트레칭을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내 눈빛을 피했다.
자기들도 애들 보는 앞에서 쪽팔리는 걸 잘 아는 건지, 귀가 빨갛게 익었구만.
물론 타자들만의 잘못은 아니다. 저쪽 히어로도 만만치 않았거든. 어쩌면 당연하게도.
“스트라이크 아웃!”
4회 말. 선두타자로 나선 7번타자 마크 칸하가 안타를 쳐내며 출루했으나. 이후 타자들이 줄줄이 잡히면서 다시금 기회가 분쇄됐다.
마지막 1번타자인 마커스 시미언은 아예 헛스윙 삼구삼진을 잡혔고.
‘커쇼, 역시 클래스는 영원하구만.’
클레이튼 커쇼.
내 과거 시절 우상은 아직도 커쇼였다. 영원히 커쇼겠지. 뭔가 좀 이상한 말인 것 같지만, 그것 말고는 딱히 뭐라고 표현을 못 하겠네.
우리 애들 앞이니 좀 적당히 해줬으면 싶었지만, 그는 아무래도 LA의 아이들만 소중한 것 같았다.
어쩌면 노아가 피닉스, 같은 지구 경쟁팀이자, 지구 우승을 높고 다투고 있는 디백스의 연고지 출신이라서 그런 건가?
‘잘하던 시절 모습이네.’
15년 이후 16,17시즌 부상이 닥치면서, 서서히 내려가고 있고, 올해는 구속이 내려가며, 조금씩 그의 시대가 끝나간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클레이튼 커쇼인데.
오늘의 피칭은 내가 잘 아는, 마이너리그 시절 그토록 동경했던 모습과 비슷해 보였다.
‘어차피 9회까지 갈 생각이기는 한데, 좀 난감하네.’
오늘은 상황이 상황이고, 또 6일이나 쉬었던 터라 스콧 에머슨이 목줄을 풀어줬기에.
나만 잘한다면 충분히 승수를 올릴 수 있겠지만, 그래도 상대 에이스가 잘하니, 약간은 불안하네.
‘어쩔 수 있나, 내가 나서야지.’
마음을 먹으니, 왠지 가슴 한편이 조금 두근거리기도 했다.
“브루스, 이번 이닝은 속도 좀 높이자.”
“벌써? 6회부터 안 하고? 9회까지 던지는 거 아니었어?”
“6일이나 쉬었는데. 5이닝도 거뜬하지. 직접 받아서 알잖아?”
“잘 알지, 오늘은 완전 쇠공이던데, 하긴, 거뜬하기는 하겠네.”
“보아하니, 평범하게 뚫기는 힘들 것 같은데, 내가 타자들 대신해서 뚫어줘야지.”
동경했던 투수에게 내가 대놓고 싸움을 거는 셈이니까.
언론에서는 에이스 킬링이라고 표현하던가? 빠른 인터벌로 이닝을 순식간에 끝내면서, 급격한 템포로 상대 투수를 압박한다면서.
‘10년대 최고의 에이스를 잡아보자고.’
다시금 그라운드로 나가자, 이젠 조금 기대감이 섞인 눈동자가 따라붙었다.
지금까지가 단순히 나를 직접 보고, 내가 타자들을 잡아내는 모습을 보았다는 것에 행복감을 느꼈다면.
이제부턴 경기가 중반에 접어들었으니, 한편으로는 기대감도 생겨난 거지. 퍼펙트 중이잖아?
비록 아직 어린아이들이니, 비록 그게 얼마나 대단한 기록인지는 조금 와닿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기대하는 거지.
그래서인지 꺄르륵 거리는 목소리로 시끄러웠던 경기장이 조금은 조용해졌다.
반대로 다저스 덕아웃의 분위기 역시 착 가라앉아 있었고.
‘경기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저쪽도 좀 훈훈했는데 말이야.’
아이가 웃는 얼굴을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성격이 극도로 예민하거나, 더러운 게 아닌 이상, 별로 좋아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어른이라면 대부분 흐뭇한 미소를 짓지.
오늘 콜리시엄을 찾은 아이들의 행복한 표정에 다저스 선수들 역시 그런 마음이었던 건지, 조금은 미소를 머금고 있기도 했었는데, 이젠 없네.
이젠 알아버린 거겠지.
오늘이 파티장이라면, 자기네들은 초대받은 손님이 아니라, 그 파티장의 한가운데에 놓인 먹음직스러운 케이크라는 사실을.
클레이튼 커쇼라는 이름의 딱딱한 설탕공예품 하나가 삼켜지는 걸 격하게 저항하고 있는 것이고.
‘그러니 제거해야지. 더욱더 완벽한 파티로 남기 위해서.’
지난 4이닝을 거치면서, 6일이나 되는 휴식 덕분에 빵빵하게 풀컨디션으로 채워진 몸은 활활 불타올랐다. 집중력도 최고조에 다다랐고.
그러니 요구조건은 이미 충분하게 갖췄지, 남은 건 스위치를 올리는 것뿐.
“스트라이크!”
배터박스로 올라온 4번타자, 야스마니 그랜달은 초구만에 눈치를 챈 것 같았다.
지난 타석에서 제법 준수한 타격감을 보여줬던 타자이니, 어쩌면 더욱더 민감하게 여겨졌겠지.
힘에서 밀렸을 뿐, 충분히 따라갈 수 있었던 포심 패스트볼이었는데, 이번엔 아예 헛스윙이었으니까.
“스트라이크!”
2구째부터는 그 혼자만이 아니라, 벤치와 대기타석에서 지켜보던 다른 선수들도 알아챘을 거고.
초구와 2구 사이의 간격이 앞선 이닝들에 비해 급격하게 좁혀졌으니, 모를 수가 없지.
“파울!”
금방 알아챈다고 해서 무슨 방법이 있겠느냐 싶긴 하지만.
3구째 낮은 코스의 속구를 황급히 쳐내며, 간신히 삼구삼진을 면한 야스마니 그랜달이었으나.
“스트라이크 아웃!”
첫 타석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체인지업에 배트를 내지 못했다. 어쩌면 아까 전보다 더욱더 타이밍이 흔들렸겠지.
투구동작이 가속된 상황에서 한순간 느린 오프스피드의 쓰리핑거 체인지업이 날아들었으니 말이야.
“Gooo!”
그렇게 다시금 삼진이 올라가자, 많은 아이들이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환호성을 지르기도 했지만. 곧 주변 어른들이 가르쳐준 건지, 다시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이제 5회인데, 뭐 어떻다고.
설사 지금이 9회라고 하더라도 난 딱히 상관없는데 말이야.
‘퍼펙트 그거 뭐, 네 번이나 해본 건데, 소리 좀 내면 뭐 어떻다고.’
하지만 나한테나 네 번째지, 다저스에겐 아니기에, 달라진 내 모습을 보며 타자들의 얼굴이 조금 더 딱딱하게 굳었다.
내가 작정하고 자기들을 조지고 있다는 거야 이미 알고 있었겠지만, 인터벌이 빨라진 걸 보고 더욱더 강하게 체감됐겠지. 정말로 자기들이 벼랑 끝에 몰렸다는 사실이.
“스트라이크 아웃!”
허나 내가 그 절벽 너머로 밀어버리려는 건 타자들이 아니다. 타자들이야 이미 충분히 잡고도 남으니까.
5번타자 맷 켐프마저 삼진으로 잡히면서, 순식간에 투아웃. 슬쩍 고개를 돌려 전광판을 봤다.
5회 초 마운드에 오른 것이 8시 03분이었다. 경기 시작부터 약 54분의 시간이 지나간 건데. 꽤나 타이트하다고 할 수 있었다.
평균적으로 한 경기에서 걸리는 시간은 못해도 2시간 반이고, 보통 3시간이 조금 안 되는 수준이니. 초,말 합쳐서 한 회당 16분에서 20분 정도가 소요되는 건데.
오늘은 54분 동안 4회가 지나갔으니, 한 회당 약 13분 30초 정도의 시간이 소모된 거니까.
공수교대 시간까지 포함하면, 실질적으로 사용된 시간은 그보다 더 적다고 할 수 있고.
‘그중에서 내 비중은 5분 정도.’
그 13분 30초 중 내가 쓴 시간은 5분가량이었다. 엄청나게 빠르다고 할 수 있지. 보통 아무리 못해도 10분은 걸리니까.
한편으로는 당연한 게, 내가 좀 심하게 다저스 타자들을 때려잡았잖아? 중간중간 안타를 좀 맞기도 했던 커쇼보단 내가 조금 더 빨리 이닝을 마쳤지.
그러니 이미 충분히 빠르다고 할 수 있었찌만···
“아웃!”
이번 이닝에선 그 시간을 조금 더 단축시켰다.
6번타자 코디 벨린저는 바깥쪽으로 높은 코스의 속구에 배트를 냈지만, 투심 패스트볼이 땅볼을 만들어냈다.
그대로 유격수인 마커스 시미언의 손에 잡히면서 1루에서 아웃.
‘8시 7분. 1분 정도 단축시켰네.’
쓰리아웃을 올리고, 마운드를 내려가면서 다시 확인한 전광판의 시간은 8시 7분을 가리켰다.
8시 3분에 올라왔으니, 5회 초가 지워지는 데까지 딱 4분이 걸린 거지.
그렇게 멋진 척은 다 해놓고, 고작 1분을 줄인 거냐며 폄하할 수도 있겠지만, 생각보다 그 1분의 가치는 크다.
‘자, 내 턴은 끝났으니, 그쪽도 다시 우리 타자들 조지슈.’
금방 끝난 다저스의 공격에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글러브를 끼고 있는 커쇼의 미간이 조금 좁혀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