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고유석과 한 어린 소년의 독특한 사연은 팬들 사이에서 제법 입에 오르내리는 주제였다.
과연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저마다 의견이 분분했으니까.
[#A’s]
[만약 그게 사실이면, Go가 데뷔하기 직전에 받았다는 건데, Oh··· 그거 완전 성배 아니야?]
└그 정도인가? Go의 사인볼이야 많잖아? 마이너리거 시절에 남긴 사인볼도 제법 많고. 그냥 평범한 사인볼 아니야?
└평범한 마이너리거 시절과는 다르지. 음··· 이 비유가 맞는지는 모르겠는데, Suck을 지저스라고 비유한다면, 진정한 GOD이 되기 직전에 남긴 성유물이지. 그 사인볼은.
└쉽게 말해서 베로니카의 수건 같은 거라는 거네.
└└바로 그거야!
└오~ 그렇게 들으니까, 좀 남다른 이야기이기는 하네.
└Suck한테 미친놈들이 한 둘이 아니니, 그런 사연까지 있다면, 과장 좀 보태서 사인볼 하나 당 천 달러씩 낼 놈들도 제법 많을 걸?
일종의 마스터피스였으니까.
그가 위대해지기 직전, 그 문턱의 앞에서 남긴 마지막 발자취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만약 진실이라면, 기꺼이 지갑을 열 팬들도 제법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이전의 다른 사연들이 그랬듯이, 이번에도 고유석이 무시로 일관하리라고 예측했다.
고유석은 자신을 둘러싼 여러 소문이나, 야구 외적인 이슈에서 그리 입을 자주 여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SNS 자체를 하지 않으니, 고유석이 아예 모를 거라는 추측도 많았고 말이다.
그렇기에 팬들은 이번에도 잠시 흥미만 돋우다가 얼마 지나면 식어버릴 떡밥 정도로 여겼지만.
[#A’s]
[제드 트위터 가봐! Suck 대신 올렸는데?]
└뭐? Suck이? 트위터를?
└Suck 본인은 아니고, 제드가 공식적으로 답변했네. 사실상 본인의 답변이지.
└뭐야, 진짜로?
└허, 그 얘기가 진짜였던 거야?
└좀 놀랍네, 직접 한 게 아니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소셜 네트워크에서 의견을 밝힌 건 처음이잖아?
└직접 선물도 보내줄 거라니, 어린애가 부러운 적은 이번이 처음이야.
처음으로 그 입이 열렸다.
비록 옆의 SNS 중독자의 계정을 이용한 것이기는 하나.
어쨌든 고유석 본인이 직접 답변을 한 것이었기에, 그를 잘 아는 팬들은 조금 충격을 받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뭉클함을 느끼기도 했고. 별로 소셜 네트워크를 좋아하지 않는 고유석이, 어린 소년을 위해 직접 행동에 나선 것이니까.
그렇기에 팬들은 색다른 감정을 느끼는 한편으로, 조금은 궁금해하기도 했다.
제드 라우리가 직접적으로 언급한 선물의 정체를 말이다.
└본인 사인 패키지가 아닐까? 유니폼, 글러브, 배트, 사인볼, 모자. 그렇게 싹 주는 거지.
└마침 걔도 야구한다고 했으니까, 그게 맞겠네.
└Go가 지금 스폰서 하는 야구용품을 줄 수도 있겠어.
└내 생각엔 콜리시엄에 초대할 것 같아.
└나도 이쪽이 맞는 것 같네. Suck 성격상, 화끈하게 초대하고, 경기도 보여줄 걸?
└지금 Go는 그때처럼 가난한 마이너리거도 아니니까. 일가족을 관람시켜줄 정도는 되지!
팬들은 저마다 여러 가지 추측을 던졌고, 대부분은 사인 증정 내지는 콜리시엄 초대 정도로 예측했지만.
그가 메이저리그에서 보여줬던 경이로운 퍼포먼스처럼, 그 선물 역시 팬들의 예측을 벗어났다.
어느 정도는 정답에 가깝기도 했지만, 그 규모가 달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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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인 초대라, 좋긴 하겠군요. 일정만 잘 맞춘다면 충분히 가능하겠죠.
“예, 그냥 대충 제 사인을 갈긴 야구용품 몇 개 쥐어주는 건 좀 그렇잖아요?”
일단은 노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콜리시엄에 초청하기로 가락을 잡았다.
그쪽이 훨씬 좋잖아?
조금 색다른 사연인 만큼, 카메라에도 몇 번 잡힐 텐데, 모든 시청자들이 증인이 돼줄 테니까. 물론 본인이 바란다면 말이야.
그렇기에 그러기 위해서 브라이언에게 조언을 구했고, 그도 좋은 생각이라는 듯 말했지만, 조금은 뜻밖의 말을,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조언을 던졌다.
-그 아이를 초청하는 것은 저도 찬성입니다만, 약간의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요? 아, 일정은 당연히 조율해야죠. 다짜고짜 제가 부른다고 올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예, 그것도 물론 중요한 문제입니다만, 제가 말할 건 그게 아닙니다. 형평성이죠.
형평성.
그는 그렇게 표현했다.
내가 상대 타자들 조질 때 자주 쓰는 말이지.
너만 봐주기에는 형평성에 문제가 생긴다고 말이야. 그러니 너도 공평하게 조져지라고.
매번 그렇게만 쓰다가, 다른 사람 입에서 그런 단어가 나오니 조금은 어색했지만, 이어진 말은 진지했다.
-Go는 오클랜드, 아니, 그 일대의 최고의 히어로입니다.
“그거야 뭐,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로컬의 슈퍼스타인데, 그런 슈퍼스타가 남다른 사연이 있다고는 해도, 굳이 다른 지역의 팬‘만’ 챙겨주는 모습은 별로 좋은 일은 아닙니다.
쉽게 말해서, 특별한 사연인 건 알겠는데, 오클랜드를 비롯, 베이 에어리어, 더 나아가 북부 캘리포니아의 연고지 팬들이 조금 서운할지도 모른다는 거지.
-타박하는 건 아닙니다만, Go는 지역 사회에 대한 기여나, 봉사 활동이 잦은 선수가 아닙니다. 그러니 더욱더 그림이 안 좋죠.
“아니, 뭐··· 그냥 시간이 없기도 하고, 야구하느라 온 신경을 쓰기도 하고···”
-예, 다시 한번 말하지만, Go를 타박하는 것이 아닙니다. 팬들도 그걸 충분히 이해하고 있고요. Go가 오직 야구에만 온 심혈을 기울인다는 것은 팬들이 가장 잘 아니까요.
내가 이 지역의 슈퍼스타이고, 모든 아이들의 히어로 같은 존재이기는 하나. 솔직히 조금은 먼 사람이니까.
브라이언의 직접적인 말에 나는 조금 변명 같은 말을 했지만, 까놓고 말해서 팩트다.
메이저리거쯤 되면 대부분은 자기 연고지의 지역 사회에 어느 정도는 기여한다.
봉사 활동이나, 아니면 뭐, 특별 이벤트나, 재능 기부나. 직접적으로 금전적인 지원을 하기도 하고. 그런데 나는 아니지.
솔직히 그런 쪽으로 신경 쓰는 성격은 아니니까. 야구 외적으로는 그다지 세심하지도 못하고.
투수가 받을 수 있는 모든 상을 다 휩쓸 자신이 있지만, 유일하게 내가 은퇴할 때까지 수상하지 못할 상이 있다면 바로 로베르토 클레멘테 상이겠지.
그래도 지금까지는 현장에서의 팬서비스가 확실하고, 간혹 콜리시엄에 어린 팬이 나타나면 캐치볼도 종종 해주고는 했기에, 별다른 말이 없지만···
-모두에게 공평한 사랑을 보이다가, 갑자기 누구 한 명이 특별해지는 순간, 느낌이 다르죠. 모두에게 평등했던 Go가 아니게 되니까요.
내가 노아를, 아니, 노아‘만’ 챙기는 순간, 앞서 언급한 형평성의 문제가 생긴다는 거지.
다른 팬, 그것도 저 멀리 피닉스의 아이는 잘 챙기면서, 연고지역은 왜 무시하냐고 말이야.
솔직하게 말해서 내가 특별히 기억하는 일이라서 그렇지, 비슷하게 남다른 사연을 가지거나, 아니면 마찬가지로 비슷하게 나를 동경하는 팬들, 아이들은 노아 외에도 수없이 많을 거다.
특히나 이곳 오클랜드에는 아주 수두룩하겠지. 어린 팬에게는 최대한 추억을 남겨주기 위해서, 나름대로 눈에 보일 때마다 최대한 노력을 했었으니까.
그런 수많은 로컬 팬이 아니라, 개인적인 관계가 존재하는 어린 팬 하나만 챙기면···
‘일종의 편애가 돼버리는 거지.’
물론 나를 향한 사랑이 지극한 오클랜드이니, 불만을 표출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오히려 멋진 장면이고, 감동적인 일이라면서 박수를 쳐주고, 날 더러 인성까지 좋다면서 더욱더 찬양하겠지. 그런 사람들이니까. 그 정도로 날 좋아하니까.
내가 싸는 소변은 성수고, 대변이 황금이라는 말을 진지하게 믿는 사람들이니 오죽하겠어.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내심 서운해진다는 건데, 어차피 그 뒤로도 내가 계속 잘하면,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을 거고.
팬들도 아주 잠깐, 그리고 아주 조금 서운한 정도로 끝나고, 여전히 날 응원하고, 사랑해줄 테니, 지금까지처럼 그냥 넘길 수도 있겠지만···
‘괜히 찝찝하잖아.’
내 마음이 안 좋지, 그러면.
난 누구보다도 나, 나 자신, 고유석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기에, 그렇게 마음이 찝찝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그럼 일을 키우죠.”
-예?
“노아 포함해서, 제 돈으로 직접 좋은 좌석 티켓 왕창 사서 오클랜드의 학교나, 리틀 야구 팀 같은 곳에 뿌리면 그런 문제가 없지 않을까요?”
일을 키우자.
원래 일이 커지면 더 즐거운 법이야. 사소한 문제도 사라지는 법이고. 이번에도 마찬가지겠지.
그리고 편애는 나쁜 거야.
나도 얼마나 서운했는데.
어릴 때부터 야구에 전념했던 나와 달리, 사촌동생은 매번 전교 1등에, 아주 똘똘하고 착한 녀석이라서, 사촌동생보다 매번 설날 때마다 세뱃돈 덜 받았거든.
그때의 서러움이 아직도 가슴에 사무치는데, 날 사랑해주는 팬들에게 그런 감정을 안겨줄 수는 없지.
-어음···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괜찮으시겠습니까?
“뭐, 죽을 때 돈 싸들고 갈 것도 아니고, 어차피 오프시즌 되면 다시 갈퀴로 쓸어 담을 텐데. 이렇게라도 Flex를 해야죠.”
-그러시다면야, 일단은··· 추진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 구단과도 협의해보도록 하죠. Go가 직접 지불하는 형식으로.
물론 너무 무대뽀적인 방법이라, 시간이 촉박할 수도 있겠지만,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어차피 내가 일을 벌이면, 고생하는 건 구단과 브라이언이니까. 난 돈만 내면 되는 거지. 멋진 경기를 보여주기 위해, 열심히 폼을 올리면서.
‘잠깐, 통장에 잔고가 있던가? 마이너에 버스 사다 주고, 브루스한테 롤렉스 처먹이느라 지출이 좀 많았는데···’
음, 혹시 모르니, 겸사겸사 대출도 같이 알아보고 말이야. 에이, 아무리 그래도 지금 통장에 있는 걸로 충분하겠지···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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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게도 구단 측에서 아주 적극적으로 협조해줬다. 오히려 좀 반기는 눈치더라.
브라이언을 통해 의견을 전달하자마자 즉각적으로 행동에 나설 정도로.
“구단 측에서도 반길 만한 일이니까요. 우범지대의 야구장이라는 인식이 강한 콜리시엄의 이미지를 쇄신할 수 있는 기회잖아요?”
“그런가요?”
“더군다나, 구단의 프랜차이즈 스타가, 어린 팬과의 인연을 통해, 일종의 거대한 팬서비스를 한 건데,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죠.”
즉 이번 시즌, 점점 더 좋아지고 있는 구단의 이미지 상승에, 이번 기회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뜻이구만.
그래서인지 아주 신속하게 도와줬다. 단순히 오클랜드 전역에 티켓을 뿌리려고 했던 방식을 조금 더 세련되게 다듬어주기도 했고.
애 혼자서는 티켓이 있어봤자 관람할 수가 없으니, 12세 미만의 아이와 함께 올 경우, 아이는 무료로 관람할 수 있도록 해주는 형식으로 말이야.
원래도 모든 메이저리그 구단에서 2세 미만의 아이는 무료로 관람할 수 있게 하고, 우리 팀 역시 마찬가지인데, 이번에만 그 연령제한을 12세까지 늘린 거지.
대략 이천 석 정도의 티켓을 내가 매입하는 방식이지만, 아마 실질적으로 배정되는 좌석은 그보다도 더 많을 거다.
심지어는 아예 티켓을 매입할 필요도 없이, 그저 내 이름만 빌려줘도 충분하다는 의사를 보이기도 했지만, 그건 내가 거절했다.
“아깝지 않으세요? 구단에서 공짜로 진행해주겠다고 했는데. 굳이 거절을 다 하시고.”
“뭐, 제가 시작한 일이니까요. 힘든 일이야 구단에 다 떠맡긴다고 해도, 머니는 제가 대야죠.”
조금 부담스럽기도 하고, 또 직접 일을 벌인 주제에 뒷짐 진 채 손 놓고 구경하는 건 좀 꼴불견이잖아?
그런 내 말에 대니얼은 피식 웃었다. 조금 흡족한 것 같기도 하고.
“리그 최고의 에이스답게, 배포가 크시네요.”
“배포는 무슨··· 얼마 안 되는 돈만 냈지, 아무것도 안 한 거나 다름없는데. 오히려 좀 부끄럽네요.”
공식적으로 발표된 이후, 대니얼만이 아니라, 언론에서도 대부분은 저런 반응이었다. 통이 크다면서 말이야.
스포츠 스타와 어린 팬은 언제나 잘 먹히는 소재니까. 오클랜드 내에서도 좋은 반응이 나오고 있고.
솔직히 그런 얘기를 들으니 조금은 부끄러웠다. 까놓고 말해서 내가 한 게 뭐가 있어. 그냥 구단이랑 브라이언이 알아서 처리해준 거지.
더군다나 애초에 생각도 안 하고 있다가, 브라이언의 지적에 그냥 대충 지른 거에 가깝고.
그런 조금은 충동적인 행동으로 칭찬받고 있으니, 조금은 낯짝이 부끄러웠다.
그래도 뭐가 어쨌든 차곡차곡 준비가 되었으니, 이제 남은 건···
“잘하기만 하면 되겠네요. 기껏 손님까지 초대하고, 어린아이들까지 끌어 모아놓고 못하면, 진짜 쪽팔리는 일이니까.”
언제나 그렇듯 잘하는 것뿐이다. 항상 이게 가장 중요하지. 이번에는 특히나 더 그렇고.
물론 언제나 잘해야 하는 것이 메이저리거이고, 나도 항상 잘하는 걸 목표로 하지만. 이번엔 더욱더 잘해야지.
얼마나 부끄럽겠어?
동네방네 자랑하듯 다 모아놓고, 대뜸 내가 개같이 털리면.
최소한 나는 얼굴 들고 살 자신 없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쪽팔려서 죽어버릴지도 몰라.
“잘하실 겁니다, 무조건.”
그래서인지, 왠지 조금 부담감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런 나를 위로하듯, 대니얼은 어쩌면 나보다도 더욱더 확신에 찬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주목받을 때의 Go는 언제나 그래 왔으니까요. 나쁜 종류의 주목에도 그러셨으니. 좋은 일에는 더욱더 잘하시겠죠.”
뭔가 나를 관종이라고 돌려 까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그런 의미는 아니겠지.
사실 관심종자라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고. 내가 좀 그런 성향이 있기는 하잖아?
돌이켜보면, 평범한 경기보다는 여러 주목이 쏟아졌을 때, 기록이 걸렸든, 도핑이나 파인타르처럼 나쁜 종류의 이슈든 간에. 사람들이 시선이 쏟아지면 쏟아질수록 더욱더 힘이 샘솟았지.
그걸 증명하듯···
‘지금도 힘이 넘치기도 하고.’
이번에도 아주 팔딱거렸고 말이야. 아니지, 이건 그냥 푹 쉬어서 그런가?
어쨌든 잘하기 위한 준비 역시 완벽하게 되어 있으니, 남은 건 그저 마운드에 오르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착실한 준비 하며 시간이 흘렀고, 곧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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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나가는 스타가 다르긴 달라? 일가족 초대에, 도시 전역의 어린이들에게 무료 관람까지 쫙 선사하고. 그 애들 보는 앞에서 우리 팀 씹어 먹으려고 의지를 다지고 있는 건 아니지?
“정답입니다. 잘 나가는 스타의 체면이 있는데, 애들 앞에서 잘해야 하지 않겠어요?”
타이거즈 시리즈가 스윕으로 끝나고, 다저스가 오클랜드로 도래한 뒤, 류영진 선배에게도 연락이 왔다.
워낙 일파만파 퍼져나간 터라, 그쪽에도 전해진 거겠지.
다저스를 씹어 먹을 생각이냐면서 농담처럼 묻는 말에 정답이라고 답해주니, 아주 실소를 흘리시더라.
“쯧, 연승이 이렇게 끊기네. 다저스가 확실히 잘하긴 잘해.”
“뭐, 그래도 스윕은 안 당하니까, 그러면 된 거지.”
“어린이들의 슈퍼 히어로께서 등판하니 말이야.”
그렇게 모든 준비를 착실하게 갖춘 뒤, 축제의 직전이라고 할 수 있는 1차전에선 깔끔하게 패배했다.
다저스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기에, 리치 힐을 선발로 내세워, 우리의 6연승이 끊었지.
그렇게 먼저 1패를 적립한 뒤. 드디어 내 등판일이 됐을 때, 콜리시엄 근처에는 평소보다 어린아이들이 많았다.
“얘가 벌려놓은 일이 워낙 큼직해서, 예상하기는 했지만, 장난이 아닌데?”
“평소의 열 배쯤 될 것 같지 않아? 거의 이 정도면.”
“어떤 인정 많은 부르주아 덕분에 콜리시엄이 애들 웃음으로 가득해졌구만.”
“Suck 네 덕분에 신기한 구경을 다 하네. 콜리시엄과 어린아이라니···”
몇몇 선수들은 그에 헛웃음을 짓기도 했다. 콜리시엄에 어울리는 광경이 아니긴 하니까.
자식과 같이 오기 좋은 곳이 아니라서, 원래는 전체 관중 중에서 아이들이 특히나 적은 편이고.
최근 들어 유동인구가 많아지고, 그에 맞춰 도시 차원에서 치안도 강화되어, 제법 늘어나긴 했지만.
여전히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었는데, 내가 벌린 일 때문에, 오늘은 거의 디즈니랜드 수준이었으니까.
행여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아이의 손에 팔찌를 채우도록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더욱더 유원지 같은 느낌이 물씬 들었고.
“오늘의 미키마우스께선 조금 더 열심히 일 해야겠어? 디즈니랜드를 직접 개장하셨으니, 아이들의 꿈과 동심을 지켜줘야지.”
그런 조금은 흐뭇한 풍경에, 어쩌면 이 모든 일의 발단이라고 할 수 있는 제드 라우리는 은근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부담감을 팍팍 주시는구만.
“제드도 분명 이 일의 시초이시니, 오늘 경기에서 멋진 홈런을 보여주길 바랍니다. 설마 애들 앞에서 내가 잘 던져놓고 득점이 없어서 지는 꼴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으시겠죠?”
“···알았어, 부담 좀 주지 마. Suck 넌 맨날 타자를 구박한다니까. 그게 제일 문제야.”
물론 난 그냥 듣기는 하는 성격이 아니기에, 고스란히 되돌려주니, 오히려 본인이 더 부담스러운 표정으로 어깨에 힘이 빡 들어갔다.
마찬가지로 다른 타자들 역시 어린 팬들 앞에서 쪽팔리기는 싫다는 듯 집중력을 올렸고.
‘구단도 엄청 바빴겠네. 나 하나 때문에 일이 오지게 커져버렸구만.’
아마도 구단 역시 노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거다. 단순히 좌석을 배정하는 걸 넘어서.
평소보다 더욱더 안전에 심혈을 기울여야 하니, 온갖 종류의 준비를 다 했을 테니까.
그렇게 갑작스럽게 준비된 축제의 현장 속에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내가 등장하자, 한순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Go! Go 보려고 아빠 졸라서 왔어요!”
“오늘 경기 나오는 거 맞죠?”
“아빠가 Go 덕분에 관람하는 거래요! 진짜 Go가 최고예요!”
인파가 몰리는 거야, 항상 그렇지만, 오늘은 그렇게 몰린 사람들의 키가 상당히 작았다. 평소의 절반 수준이었지.
헤실헤실 웃으며 흥분에 찬 아이들의 얼굴과, 마찬가지로 흐뭇하게 웃는 부모님들의 얼굴을 보니,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드네.
집중력도 더욱더 올라왔고. 마지막까지 웃을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으니까.
‘오늘의 다른 주인공도 그랬으면 좋겠고.’
어차피 일을 벌인 거, 기왕이면 최고의 추억이 돼야 하잖아? 이 애들도, 조금 뒤에 만날 노아도. 그러려면 나도 최고로 잘해야겠지.
그렇기에 충분히 팬서비스를 해준 뒤, 단단히 집중을 올린 채, 콜리시엄에 입성했다. 오늘이 잠들기 직전까지도 아름답게 빛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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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는 조금 믿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지금 일어난 일들 모두 다.
자신의 추억과 그 증거를 믿어주지 않는 나쁜 녀석과 다툰 이후로 휙휙 상황이 지나갔으니까.
Go에게 정말로 연락이 왔다는 것, 그에게 직접 초대까지 받았다는 것, 그리고 직접 만날 수도 있다는 것까지.
“진짜 Go를 만나는 거야?”
“그래, Go가 직접 만나겠대, 경기하기 직전에.”
“진짜로?”
그의 머리로는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일들이었지.
그렇게 꿈만 같은, 그저 영상으로만 보면서 열심히 응원할 뿐이었던 콜리시엄에 직접 입성했을 땐, 거의 혼절할 정도였고.
‘사인볼, 잘 간직하기 잘했어!’
노아는 작년을 떠올렸다.
사촌형 데이빗보다 수십 배는 더 멋지게 공을 던지던 커다란 아저씨.
남몰래 담장 틈새 사이로 훔쳐보던 자신에게 공을 줬었지. 메이저리거라는 그 말에 냅다 사인을 받았었고.
그날의 기억은 어쩌면 노아의 짧은 인생에서 가장 강렬하고, 큰 충격을 줬던 순간이기도 했다.
처음으로 메이저리거에게 사인을 받은 순간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사인볼을 받으면서 했던 평생 잘 간직하겠고 말했던 약속을 꿋꿋하게 지켰던 거고.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로 메이저리거였어!’
야구를 잘 아는 아빠는 아마도 마이너리거일 거라고 이야기했었다. 엄마에게만 몰래 해주던 말을 들었지.
그에 조금 실망하기도 했고,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아빠의 말과 달리, 그 커다랗고 멋지게 공을 던지던 아저씨는 정말로 메이저리거였다.
-스트라이크 아웃! Go! 삼진을 잡아냅니다!
쥐, 오.
거짓말처럼 느껴졌던 이름 그대로, 티비 속에서 당당히 공을 던졌으니까. 그것도 그때 몰래 훔쳐봤던 것보다.
아빠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직접 야구장에 가서 보기도 했던 디백스의 투수들보다도 훨씬 더 멋지게.
“Go가 그렇게 좋아? 아빠랑 디백스 응원할 때는 언제고. 배신하는 거야?”
“Go가 최고야! 디백스도 올해는 Go가 완전 박살 냈잖아!”
“박살은··· 아닌데, 한 점 내긴 했으니까···.”
그렇게 점점 노아는 빠져들었고, 어쩌면 꿈이 생기기도 했다.
단순히 아빠와 함께 즐겨 보기만 했던 야구를 직접 하고, 자신 역시 그렇게 멋지게 공을 던지고 싶다는 꿈이.
“Go!”
“오, 그때보다 훨씬 컸네?”
그리고 그 꿈을 꾸게 해 줬던 사람과 다시 만났다. 자신을 알아 봐주고, 그때처럼 씨익 웃기도 했지.
너무 흥분에 찼던 순간이기에, 노아는 그때의 기억이 정확하게 나지 않았다. 그저 다다다다 말을 쏟아부었고.
“이거 꼭 간직했어요! 약속했던 것처럼! 앞으로도 평생 가지고 있을 거예요!”
“그래야지, 남자는 자기가 뱉은 말을 지킬 줄 알아야 하거든. 노아 넌 좋은 남자네. 근데 사인 좀 흐릿하다? 새로 해줄까?”
“그게··· 나도 Go처럼 투수 잘하고 싶어서 그거 가지고 좀 던졌는데, 그래서 살짝 지워졌어요..”
보물처럼 간직했던 사인볼을 다시 보여주기도 했지. 어릴 적(?)의 실수로 약간 사인이 지워진 공을.
잘 간직하겠다고 해놓고, 그러지 못한 것 같아, 조금 부끄럽기도 했지만, 오히려 Go는 더욱더 크게 웃었던 것만 기억이 났다. 잘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도.
그렇게 다시 Go와 만난 뒤, 경기를 준비해야 한다는 Go의 말에 아쉽지만, 관중석으로 향했다.
“Go가 엄청 잘하겠지?”
“그러엄~ 당연하지. 다저스 정도는 개박살 낼 거야.”
“개박살이 뭐야, 애 앞에서. 말 가려서 좀 해.”
“아니, 뭐, Go가 겸사겸사 다저스 잡아주면, 디백스 순위 싸움에도 이로우니까···.”
그래도 영상으로 볼 수밖에 없었던 Go의 경기를 직접 볼 수 있었기에 충분히 행복했지만 말이다.
조금 다른 이유로 그의 호투를 바라는 아버지와 함께 들뜬 눈으로 그라운드를 내려보던 노아는 문득 주변을 훑었다.
저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아이들이 많았지. 다들 저처럼 Go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고.
그런 아이들을 보며, 노아는 문득 생각했다. 왠지···
“아빠, 다른 애들 나랑 표정이 비슷해!”
“다른 애들?”
“응! 다들 엄청 초롱초롱해. 나처럼 Go를 진짜로 좋아하나 봐!”
“···진짜로 그렇네. 우리 노아랑 비슷한데? 노아, 친구 많이 생겨서 좋겠네?”
자기랑 비슷한 것 같다고.
어쩌면 같은 또래의 친구들 뿐만이 아니라, 어른들마저도.
피식 웃는 아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노아는 다시 그라운드를 내려봤다.
비록 디백스의 경기장과 달리 조금은 낯설고, 어색한 곳이었지만, 같은 걸 바라는 걸 깨달아서 그런지. 조금 더 마음이 편안해졌으니까.
“Goooooo!”
그렇기에 평소 집에서 그의 경기를 보던 것처럼, 힘껏 소리쳤고. 그를 선창으로 하여, 콜리시엄이 웅장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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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ooooo!”
불펜의 문이 열리자, 오늘은 다른 날과 달리 Suck 대신, Go라는 외침이 웅장하게 흘렀다. 아이들이 많으니, 다들 입조심했나 보네.
레이더스도 평소처럼 빡센 코스튬 대신, 오늘은 적당히 페이스 페인팅 정도만 했고 말이야.
심지어 몇몇은, ‘그’ 레이더스가 자식처럼 보이는 꼬마 아이를 끼고 있기도 했다. 애들도 아빠를 따라서 페이스페인팅을 하기도 했는데,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더니···
본인들도 자기들 모습이 어색하다는 걸 아는 건지, 허허 웃으면서 내 시선을 피했다.
언제나 광기에 휩싸이는 양반들도 결국에는 부모구만. 자식 앞에선 무장해제야.
‘레이더스는 애들도 아주 전투적이구만.’
정작 애들이 더 흥분해서 소리치고 있는데, 아주 전투적인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 세대교체는 걱정 없겠어. 저 아이들이 자라서 미래의 레이더스가 될 테니까.
‘노아도 보고 있겠지.’
어쩌면 발견한 것 같기도 하다.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일부러 보지는 않았지만.
‘사인, 벗겨져 있던데.’
경기 직전, 내가 직접 초대한 만큼, 짤막하게나마 만났었는데, 챙겨 온 사인볼을 보여줬었지. 잘 간직하고 있다면서.
그것이 약간 뭉클하면서도, 손 때가 타고, 사인이 지워진 것이 이상해서 이유를 물어봤더니, 돌아온 대답이 아주 걸작이었다.
‘그치, 던져야지. 던지라고 있는 야구공인데, 모셔놓기만 하면 쓰나.’
나처럼 투수가 되고 싶어서 공을 던졌다고. 그래서 벗겨진 것 같다고.
어린이용 고무공이나, 연식구가 아니라서 위험했을 텐데, 잘도 던지고 놀았네. 야구에 재능 있는 거 아니야?
최소한 열정은 확실한 것 같았다. 리틀 야구 팀에도 들어갔다고 했으니까.
“Go, 괜찮아?”
“아니, 그냥 별거 아니야. 오늘도 잘하자.”
왠지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나처럼 되고 싶다니, 참 쑥쓰러운 말이잖아?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말이고.
그렉 매덕스, 톰 글래빈, 랜디 존슨. 그리고 망할 약쟁이 로켓맨 등. 누군가를 우상으로 삼고, 그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하기만 했지.
반대로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우상이, 동경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니까.
‘노아만이 아니지. 오늘 여기에 엄청나게 많으니까. 그런 얼굴들이.’
아까 전, 콜리시엄에 들어오기 전에도 보았듯, 경기장 곳곳에 깔린 다른 아이들 또한, 그런 노아와 비슷한 눈동자를 하고 있다는 것도 조금은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고.
“오늘 상대 투수 커쇼지?”
“어, 그건 갑자기 왜?”
“아니, 그냥 빠따 잘 치라고.”
“···부담 좀 그만 줘. 알았어, 알았다고, 득점 지원해서 네 체면 살려줄 테니까, 그만해라.”
“그런 뜻 아니야 새꺄. 내려가 봐.”
조금 신기하기도 했다.
오늘 다저스의 선발투수이자, 내 맞상대는 클레이튼 커쇼다.
세 번의 사이 영 상과 한 번의 MVP를 자랑하는 2010년대 최고의 투수이자, 우리 시대의 샌디 코팩스 말이야. 그 역시 내가 우상으로 여겼던 사람이지.
어쩌면 앞서 언급했던 전설들보다 조금 더 동경했던 선수이기도 하고.
내가 한창 마이너에서 벽이라는 걸 느끼고, 내 재능의 한계를 실감하며 좌절했을 때.
가장 화려한 전성기를 열면서,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로 오른 선수이기에, 은퇴한 전설들보다 훨씬 더 크게 와닿았으니까.
그래서 기분이 좀 이상했다.
날 우상처럼 여기는 아이들의 앞에서, 반대로 내가 우상으로 생각했던 사람을 상대로 마운드에 올랐다는 현실이.
조금 재밌는 상상이 떠오르기도 했고. 커쇼를 꿈꿨던 내가, 오늘 적으로서 커쇼의 앞에 선 것처럼.
‘어쩌면, 오늘 관중들 중에서 미래에 나랑 맞붙을 투수가 있을지도.’
대충 10년쯤 뒤에,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아이들 중 누군가가 내 상대 투수로서 마운드에 오를 수도 있다는 상상 말이야.
모르는 일이지, 가능성이야 무궁무진하니까. 콜리시엄이 아니라, 이 경기를 보고 있는 아이들 중에서 한 명이 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그게 노아일지도 모르지.
‘질 수는 없지.’
허나 누가 됐든 질 생각은 없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내가 동경했던 사람이든, 날 동경하는 사람이든. 그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난 무조건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