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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 빼고 다 가짐-275화 (275/316)

275화

저스틴 스모크는 타구가 담장을 넘어가버린 뒤에도 멍하니 지켜봤다. 제 손을 쥐락펴락 거리기도 했고.

‘빨리 안 꺼져?’

리그 최고의 투수에게 첫 타석에서 홈런을 쳐냈으니, 조금 당혹스럽고, 믿기지 않는 거야 충분히 이해하지만.

난 홈런 친 놈이 타구 구경하는 걸 가만히 보고 있을 만큼 도량이 넓은 사람이 아니다.

홈런 쳐놓고 뭘 뭉그적거리고 있어? 뒤지고 싶어? 다음 타석에 헤드샷 날려줘?

머리에 내 패스트볼 맞으면 못해도 기절은 확정이고, 잘하면 두개골도 박살날 텐데, 그렇게 해줄까?

그런 심정을 가득 담아 타자를 노려보니, 조금은 몽롱한 표정으로 타구를 지켜보던 타자도 이내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듯 황급히 베이스를 돌았다.

“8월 첫 경기부터 기분 X같네.”

입안이 조금 까끌까끌했다. 모래를 씹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마음 같아선 걸쭉하게 침이라도 뱉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냥 나도 좀 황당하네. 아니, 쿠어스 필드에서는 잘 막으면서 완봉해놓고, 정작 콜리시엄에서 홈런을 처맞는다고?

홈런구장을 꼽았을 때 부동의 넘버원을 무사히 넘겨놓고, 홈런이 안 나오기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곳에서?

‘진짜 어이가 없네.’

황당함과 당혹감이 동시에 피어올랐고, 또한 분노로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애써 진정했다.

홈런은 투수의 세금이고, 결국 언젠가는 내야 할 거였으니까.

그냥 그게 오늘이었던 거지. 그러니 X같아도 별 수 있나. 입술 꽉 깨물고···

“스트라이크!”

최대한 환급이나 받는 거지.

마찬가지로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저스틴 스모크와 하이파이브한 뒤 타석에 입장한 4번타자 켄드리스 ‘혹시 나도?’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곧이어 날아든 높은 초구에 화들짝 놀라면서 물러났다가, 곧 아래로 꺾이면서 스트라이크존으로 내려오자, 조금은 머쓱한 표정으로 다시 배터박스로 돌아왔다.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제법 높은 코스였기에, 빈볼이라고 착각했나 보네.

그도 그럴 것이, 홈런 치고 멀뚱멀뚱 있었던 저스틴 스모크의 행동을 조금 과장되게 해석하면 홈런 구경이나 다름없으니까.

적어도 메이저리그에서 홈런 타구를 구경하는 행위는, 빈볼의 명분이 되기도 하니, 그를 대신해 동료인 자신에게 던진 거리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난 빈볼을 던지는 사람이 아니다. 딱히 좋아하지도 않지. 뭐 하러 빈볼을 던져? 괜히 투구수 아깝게.

때때로 빈볼은 타자의 기를 죽이고, 경기의 주도권을 쥘 수 있는 무기처럼 사용되기도 하지만. 어차피 경기의 주도권은···

“스트라이크!”

그저 자신감 있게 피칭하고, 포수 글러브에 공을 꽂는 것만으로 충분히 내 마음대로 쥘 수 있다. 빈볼 같은 건 필요 없지.

물론 홈런 맞고 조금 빡이 돌기는 했다. 미적거리던 타자의 행동에 불쾌해지기도 했고.

허나 그런 감정을 표출하는 것은 빈볼이 아니라, 피칭이어야겠지.

“스트라이크 아웃!”

블루제이스에게 그 홈런에 대한 핏값을 대신 청구하기 위해서.

올해로 메이저리그 경력이 무려 12년 차에 접어드는 베테랑 켄드리스 모랄레스였지만. 이번 타석에서 그의 경력은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우타자가 내 서클 체인지업에 헛스윙하는 것은 신인이든, 베테랑이든, 다 똑같으니까.

우렁차게 헛스윙, 마지막 세 번째 삼진이 올라갔고, 이젠 299개로, 2년 연속 300K까지 단 하나의 카운트를 남겨두고 있었지만.

이제까지와 달리, 팬들은 딱히 카운트를 세거나, 환호성을 내지르지 않았다.

그저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블루제이스를 노려봤을 뿐.

나랑 똑같은 심정이지.

홈런이 넘어간 순간부터 300K는 별로 중요해지지 않았거든. 그저···

‘홈런의 댓가를 얼마나 받아내느냐가 중요하지.’

원래 희소가치가 높은 건 죄다 비싸지. 그런 의미에서, 난 오늘 블루제이스를 파산시킬 생각이었다.

####

-스트라이크 아웃! 고유석! 다시금 삼진을 잡아냅니다!

-저번 경기에선, 쿠어스 필드에 맞게끔 땅볼을 적극적으로 유도하는 피칭을 선보인 바가 있는데. 오늘은 평소처럼 아주 공격적으로 탈삼진을 몰아 담고 있습니다.

-이로서 랜디 존슨 이후 연속 시즌에서 300탈삼진을 달성했습니다.

<고유석, 2년 연속 300K 달성, 랜디 존슨 이후 최초!>

고유석의 오늘 경기 네 번째 탈삼진이 올라간 이후, 중계방송의 하단에는 이런 글자가 떠오르고는 했다.

다시금 300K를 기록하며, 랜디 존슨 이후 최초로 연속적인 시즌에서 300개의 탈삼진을 올린 투수가 됐으니까.

방송사는 물론, 애슬레틱스 구단으로서도 크게 홍보했던 일이기에. 원래대로라면 축제가 되었어야 할 순간이었지만.

└혐유-썩 홈런 맞았다는 소문 듣고 왔습니다.

└와, 고유석 진짜 홈런 맞았네.

└쿠어스 필드에선 완봉해놓고, 왜 콜리시엄에서 처맞냐

└시즌 2호 피홈런은 왜 빼놓음? 그것도 띄워야지. ㅈㄴ희귀한 일인데

그 축제는 이미 더럽혀졌다.

점수판에 찍힌 1이라는 숫자와 피홈런 하나가 300K가 가져야 할 임팩트를 앗아갔으니까.

고유석, ‘Suck’의 피홈런은 그 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어차피 이미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는 300번째 탈삼진 정도는 우습게 찍어 누를 정도지.

어쩌면 본인이 직접 타석에 올라 홈런을 치는 것만큼이나 아주 희귀한 일이라고 봐도 무방하고.

그렇기에 그가 홈런을 맞았다는 소식이 퍼져나가, 오히려 시청자가 늘어나는 기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Rangers]

[Suck 새끼 드디어 홈런 처맞았다아아아악!]

└진짜? 누구야? 이번엔 어떤 사랑스러운 놈이 쳤어?

└랜달 그리칙이야. 우리 캐나다 친구들이 해냈다고:D

└난 이제부터 캐네디언이다.

└랜달 그리칙? 누구 아무나 걔 SNS 좀 알려주라. 가서 사랑한다고, 네가 정잘 자랑스럽다고 메시지 좀 보내게.

특히나 텍사스 쪽에선 아주 폭발적인 시청률 상승이 집계되기도 했고 말이다.

또한 저번 경기에서 좌절했던 안티팬들 역시 기쁨에 차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더욱더 그가 흠씬 두들겨 맞기를 기원하기도 했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고유석! 다시금 삼진을 잡아냅니다!

-4구, 몸쪽, 헛스윙! 또 한번 삼진! 오늘 경기 정말 물이 오른 피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애석하게도 이번 경기 그들이 꿈꾸던 장면은 재생되지 않았다.

두들겨 맞기는커녕, 오히려 작정하고 두들겨 패는 쪽에 가까웠으니까.

└홈런 맞더니 각성한 듯?

└ㅇㅇ이 꽉 깨물고 던짐

└눈빛 살벌한 거 봐라, 블루제이스 씹어먹을 기세네ㅋㅋ

└저번 경기에서 못 잡은 삼진 몰아서 잡는

└ㅉㅉ혐유석 속 좁은 거 봐라. 홈런 하나 맞았다고 흥분한 거 보니까, 롱런하긴 그른 듯.

└롱런 안 해도 까놓고 말해서 지금 페이스로 5년만 해도 역대급 아님?

└지금 성적 5년 동안 보여주면 10년 안 채우고 은퇴해도 사무국에서 강제로 명전에 모심ㅇㅇ

블루제이스 타선을 쓸어 담는 고유석의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화가 단단히 난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마치 자신의 코털을 뽑은 이에게 사납게 징벌을 내리는 사자처럼. 한 구 한 구가 전력투구처럼, 날카롭게 내리 꽂혔으니까.

팬들은 그 모습을 보며 즐기기도 했고, 안티팬들은 손쉽게 흥분하는 성격에 악담을 퍼붓기도 했지만.

분위기는 조금씩 미묘하게 변해갔다. 단순히 한순간 분노를 터트리는 정도를 넘어섰으니까.

-스트~라이크 아웃! 2회 초를 KKK로 잡아버리는 고유석! 여섯 타자 째 삼진을 잡아내며, 홈런에 대한 울분을 제대로 터트리고 있습니다!

순식간에 삭제된 2회 초.

마치 어린아이 손목을 비틀 듯, 손쉽게 경기를 지워버리는 고유석의 모습에, 팬들은 환호성을 지르기도 했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다시 한 번 삼진!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1번 타자, 랜달 그리칙이 내야뜬공 처리되면서, 아쉽게도, 연속 삼진은 여섯 타자 연속으로 마감됩니다.

-하하, 아무래도 블루제이스가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뽑은 것 같네요.

-예, 하지만 너무 과열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최고구속인 89마일이 벌써 일곱 차례나 찍혔거든요? 조금 과도하게 흥분했는데, 자칫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점점 시간이 갈수록 더욱더 격해지며, 더욱더 사납게 블루제이스를 몰아붙이는 모습은 야구 경기를 중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마치 포식자가 사냥에 나선 자연 다큐멘터리 내지는 한 편의 슬래셔 무비처럼 느껴졌다.

혹독하게 블루제이스를 몰아붙이는 고유석을 향해, 중계진 역시 과도하게 흥분한 것을 지적하며, 조금은 진정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으나.

당연하게도 그들의 목소리는 고유석에게 닿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스트~라이크 아웃!

그저 영화 속 살인마처럼, 문자 그대로 블루제이스의 타자들을 난도질했을 뿐.

거대한 해일처럼, 자연재해와 같은 분노가 토론토 블루제이스를 거세게 몰아쳤고.

그에 홈런을 만회하듯, 삼진을 미친 듯이 쓸어 담는 모습에 기뻐하던 팬들조차 조금 질린 듯한 반응을 보이고는 했다.

-스트~라이크 아웃! 고유석! 자신에게 홈런을 안겨줬던 저스틴 스모크를 삼진으로 잡으면서! 4이닝 만에 10개의 탈삼진을 잡아냅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피칭!

└완전 눈 돌아갔네.

└같은 메이저리거인데, 무슨 학살 수준이네. 좀 살살해라.

└고작 홈런 하나 쳤다고 이렇게 터는 건 너무한 거 아님?

└└나한테 홈런 쳤으니, 너넨 X나 잘하는 팀 같으니, 그에 맞도록 피칭해주겠다는 갓유석의 깊은 뜻임.

└토론토 타자들 슬슬 표정 개썩어가네

└뭔가 홈런 친 타자 동료들 눈치 보는 거 같지 않음?

└???:너 때문에 우리까지 같이 X됐잖아. 홈런을 왜 쳐 X새끼야.

└앞으로 무서워서 고유석한테 홈런이나 치겠냐?

└동료가 친다고 하면 만류할 듯ㅋㅋㅋ 나대지 말라면서.

마치 빵 하나를 훔치고 19년 간 감옥에 갇힌 장 발장처럼, 고작 홈런 하나의 대가라기에는 조금은 가혹하게 느껴졌으니까.

-아웃! 4회 초 역시 삼자범퇴! 고유석이 마치 폭주기관차처럼 블루제이스를 폭격하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이가 그걸 가혹하게 생각하든 말든, 고유석에겐 딱히 중요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

‘···홈런이 오히려 독이 된 건가?’

테오스카 에르난데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저스틴 스모크를 흘끔 봤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만약 그렇게 표현한다면, 홈런을 친 저스틴 스모크로선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억울해서 죽을 지경일 테니까.

아니, 홈런을 친 것이 죄가 된다니, 이 얼마나 황당하고 우스운 말인가?

저 망할 놈의 Suck, 빌어먹을 괴물을 상대로 그런 걸 해냈다면, 오히려 박수를 쳐야 마땅하지, 원망의 시선을 보내는 건 불합리했다. 허나···

“스트라이크 아웃!”

이를 앙 다물고, 오직 삼진만을 잡겠다는 듯, 작정하고 자신들을 조지고 있는 투수를 볼 때면, 그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5회 초, 다시 시작된 이닝.

투수는 첫 타자부터 다시금 삼진을 잡아냈다. 전보다 더욱더 빨라진 동작으로, 더욱더 잔혹하게.

저번 경기에선 그 발군의 연기력을 뽐내며 자신들을 단단히 속였다면, 오늘은 그마저도 없었다.

저 멀끔한 얼굴에는 어떠한 가면도 씌워지지 않았지. 그저 분노, 오직 분노. 그것만이 가득했을 뿐.

‘빌어먹게도 말이야.’

차라리, 차라리 저번 경기가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점수도 못 내고서 탈탈 틀어막혔던 경기이지만. 그땐 그래도 변명이라도 할 수 있었으니까.

우리는 그저 깜빡 속았고, 또한 멍청한 주심 한 명의 오심에 놀아난 피해자일 뿐이라는 변명 말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마저도 없지. 그저 홈런 한 방에 두 눈을 번쩍 뜬 괴물에게, 아무런 반항조차 못하고 잡아먹힐 뿐.

“···수고했어요, 얀.”

그렇게 생각에 잠긴 사이, 5번타자 얀게르비스 솔라르테가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멍하니 벤치로 돌아온 그를 보면서, 테오스카 에르난데스는 마치, 뺑소니를 당한 사람 갖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신이 하나도 없고, 자신에게 무슨 일이 닥친 건지 조차 모르는 것 같았지. 그저 많이 아프고, 쓰렸을 뿐.

“수고?”

그렇기에 조심스럽게 그를 맞이해줬지만, 수고했다는 말은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

그 말에 얀게르비스는 코웃음을 쳤으니까. 마치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것처럼.

테오스카 에르난데스는 그것이 기껏 위로해준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아서, 조금은 불쾌했지만,

이내 그 웃음이 조금은 자조적인 한편으로, 어느 누구 한 명이 아니라, 블루제이스 전체를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땐, 그저 입술을 씹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 경기에서 수고하고 있는 사람은 없어. 적어도 우리 팀에서는.”

어쩌면 팀 케미스트리를 망칠지도 모르는 말을 낮게 중얼거린 얀게르비스의 발언 역시 부정할 수 없었고 말이다.

“스트라이크 아웃!”

어쩌면 이번 경기의 블루제이스 타선의 모습을 너무나도 통렬하게 꼬집는 말이었으니까.

그렇지, 오늘 블루제이스 타자들 중에서 수고하는 사람은 없지. 여전히 감정이 활활 타오르며, 그들을 몰아붙이고 있는 저 투수라면 또 모를까.

블루제이스는 그저 손발이 잘린 채로, 다 같이 앉은자리에서 저 녀석에게 X되고 있는 것일 뿐이니 말이다.

“스트라이크 아웃!”

그런 자조적인 말에 걸맞게도, 마지막 7번타자, 알레디미스 디아즈까지 너무나도 빠르게, 잠깐 눈 깜짝할 사이 삼진으로 잡히면서. 다시금 KKK가 나왔다.

이번 경기 열세 번째 삼진.

그리고 이번 시즌 309번째 탈삼진을 잡아낸 투수는 자신들을 쭉 훑어보면서,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You Suuuuck!”

아마도 내일이면, 환청처럼 귓가에 맴돌 환호성을 레드카펫 삼아서.

어쩌다 그와 눈이 마주친 테오스카 에르난데스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산제물이네, 우리는.’

이 넓은 경기장이 어쩌면, 피로 얼룩진 고대 종교의 신전이고, 저 홈 플레이트의 배터박스가 제물을 바치기 위한 제단인 것 같다고.

자신들은 그 제단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신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바쳐진, 인신공양을 위해, 산제물로 바쳐진 셈이고.

꽤나 시니컬한 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Hell Yeah!”

“Kill! Kill!”

광기에 휩싸여, 눈이 뒤집어진 채 살육을 외치는 관중들을 보니, 그다지 잘못된 비유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스트라이크 아웃!”

그런 상황에서 블루제이스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두려움에 떠는 것 말고는.

신화 속의 이야기처럼 구원자는 없었으니까.

“아웃!”

“아웃!”

그저 아주 오래전 고대의 인류 역사에서 행해진 대부분의 제사처럼, 대단히 화려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진행되었을 뿐.

####

‘나도 나지만, 팬들도 홈런에 많이 화가 났었나 보네.’

콜리시엄은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한여름인 만큼, 기온 자체도 좀 덥기는 한데.

이 경기장을 가득 채운 수만 명의 사람들이 내뿜는 열기로 인해, 거의 사우나 같은 느낌마저 들었지.

‘자칫 잘못하면 연승이 깨질 수도 있었으니, 식겁하는 한편으로 화가 나기도 했던 거겠지.’

다행히 경기 초반부터 터져 나온 솔로포가 경기에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솔직히 나도 좀 걱정했는데 말이야.’

혹시나 연승이 깨질 수도 있잖아? 오늘은 투수 타석도 없는데, 또 저번 경기처럼 타자들이 개지랄을 떨어대면, 그대로 패배해버릴 가능성도 높지.

그렇기에 팬들도 그렇고, 나도 조금 걱정했었지만,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저번 경기 몫까지 톡톡히 쳐서 냈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 보고 쓰레기라고 그러면 안 돼, 알았지?”

“시끄러워 이 쓰레기들아. 평소에 좀 이렇게 내라. 매번 몰아서 치지 좀 말고.”

“이젠 점수를 내줘도 지랄이네.”

“괜히 자극하지 마, 홈런 맞아서 좀 신경이 예민한 상태니까.”

“지랄맞은 성격 받아주느라, 브루스 네가 항상 고생이 많네.”

이번 시리즈에서 기복이 제대로 터지더니, 오늘도 6점이나 올렸으니까.

저저, 의기양양한 모습 좀 봐라. 왠지 자신감이 넘치는 타자들의 모습을 보니, 괜히 기분이 좀 더럽네.

그래도 오늘 잘한 건 사실이기에, 딱히 투덜거리는 것 말고는 할 것이 없었다.

평소처럼 타자들을 구박하기는 글렀으니, 에이, 그냥 블루제이스한테 화풀이나 해야지.

“와아아아!”

“그렇지! 오늘은 그나마 마음에 드네!”

“다른 경기도 이렇게 좀 팍팍 내라고! 지난번에 덴버에서처럼 Suck이 직접 점수 내게 하지 말고!”

6회 말.

타자 놈들이 다시금 점수를 올리며, 7대1로 6점차까지 격차를 더 벌리면서, 내 승리는 더욱더 확고해졌다.

“자, 이 정도면 저번에 못 친 거 이자까지 쳐서 갚았다? 이제 됐지?”

“아, 이거 너무 점수를 많이 내서 그런가, 괜히 어깨가 뻐근하네.”

“우리가 이 정도로 득점 지원했는데, 수비는 Suck 너 혼자 알아서 해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바닥을 기던 놈들이 목을 빳빳이 드는 꼴이 보기 싫어서 냉큼 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이제 7회 초.

마음 같아선, 블루제이스를 9회까지 탈탈 털어서, 완전히 그 악의 싹을 잘라놓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이별의 시간이 왔다.

원래 약속했었고, 실점하면서 완봉도 날아갔으니, 완투할 명분이 없지.

‘아쉽지만, 마지막까지 철저하게 징수하자고.’

선두타자로 나온 2번타자 테오스카 에르난데스는 눈동자 가득 공포를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아까 전에 눈이 마주쳤을 때도, 뭔가 크게 압도된 사람처럼 입을 쩍 벌리더니. 타석에 오르고 나서도 마찬가지네.

하긴, 저런 반응이 당연하기는 하지. 홈런 하나 친 걸 제외하면 영혼까지 뿌리 뽑히고 있는데, 오죽하겠어.

‘마지막까지 행복을 안겨주시는군.’

우리 타자들을 못 갈구는 대신, 상대 타자들이 바짝 쫄은 모습을 보니, 아주 흡족하구만.

저런 타자는 많다.

지금까지 내가 메이저리그에서 저지른 짓이 워낙 어메이징 하잖아? 나한테 겁먹은 타자야 수두룩하지.

그러니···

“스트라이크!”

그런 타자를 어떻게 요리해야 하는지에도 아주 빠삭하고. 결국 모든 건 경험을 통해 숙달되는 거니까.

먼저 초구는 적당히 스트라이크존에 넣는다. 그러면 타자는 이미 나한테 겁먹은 만큼, 그냥 가만히 지켜보지. 혹은 막 휘두르면서 헛스윙하거나.

테오스카 에르난데스는 지켜보는 쪽을 선택했다.

“스트라이크!”

그다음은 2구는 더욱더 과감하게 던져서. 아예 한가운데에 아예 꽂는다.

다만 코스를 읽고, 급하게 스윙을 내다가 얻어걸릴 수도 있으니, 막판에 꺾이거나, 혹은 밖에서 들어오는 변화구 위주로.

테오스카 에르난데스는 우타자이니, 백도어성 너클 커브나 슬라이더 같은 것이 좋지.

역시나 과감하게 들어온 너클 커브에 이번에도 그가 지켜만 보면서 두 번째 스트라이크도 가져왔다.

‘여기까지 오면 거의 끝이지.’

이 단계까지 오면 승부는 80% 이상 결정된 거나 다름없다. 대놓고 찔러 넣은 코스에 반응이 나오거든.

바로 현타감이지.

아무리 그래도 같은 메이저리거인데, 대놓고 무시당한 거잖아, 얼마나 쪽팔리겠어?

나한테 바짝 쫄아서 제대로 반격도 못한 자기 스스로가 부끄럽기도 할 거고.

‘특히나 나는 제구가 뛰어난 걸로 유명하니까.’

간혹 이 단계에서 제정신을 차리고 각성하듯, 더욱더 위험해지는 타자들도 있지만, 그건 소수다.

대부분은 각성까지는 미치지 못하고서, 그 아래에 머무른다. 바로···

“스트라이크 아웃!”

헤픈 스윙이지.

지금까지 쭉 참은 것을 한 번에 토해내듯, 배트를 막 내버리거든. 자긴 절대로 겁먹은 게 아니라고 증명하듯이 아주 우렁차게 휘두르지.

아닌 타자들도 종종 있지만, 다행히 테오스카 에르난데스는 딱 예상처럼 움직여줬다.

몸쪽으로 공이 날아들자, 굉장히 조급하게 스윙을 가져갔으니까.

하지만 공은 유유히 떨어지며, 배트를 스쳐 지나갔다. 서클 체인지업 V1. 헛스윙 삼구삼진이지.

‘자, 결자해지를 해야지?’

그다음 3번타자 저스틴 스모크. 오늘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타자는 제법 의연하게 걸어 들어왔다.

공동묘지와 같은 블루제이스 덕아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인데, 그도 그럴 것이, 본인은 이미 한 차례 시원하고 짜릿한 손맛을 봤으니, 내가 자기네 팀을 쥐 잡듯이 잡든, 뭐든 딱히 상관없겠지.

그저 시작하면서 느꼈던 감각을 억지로나마 부여잡으면서, 다시금 맛볼 수 있기를 깊이 바랄 뿐.

물론 나한테 한번 홈런 친 타자를 상대로는 언제나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타이밍이 읽힌 걸 수도 있고, 쿠세가 간파된 걸 수도 있고, 아니면 서로 상성이 나쁜 걸지도 모르니까.

“스트라이크!”

그렇지만 오늘 그의 홈런이 크게 보자면 토론토 블루제이스에게 독이 된 것처럼. 어쩌면 저스틴 스모크 본인에게도 독이 된 것 같았다.

‘이번에도 스윙이 크네.’

지난 타석에서도 큼직한 뻥스윙을 보여주더니, 이번에도 조심스럽게 던진 몸쪽, 낮게 떨어지는 서클 체인지업에 조금은 둔중한 무거운 헛스윙을 선보였다.

한번 맛본 홈런이 이 정도지. 진짜 혀가 마비될 정도로 지독한 맛이거든.

이젠 나도 잘 알아. 한번 쳐보고 나니까, 다시 슈퍼소닉으로 못 돌아가겠더라고. 딱 한 번이라도 다시 그때의 느낌을 맛보고 싶어서. 훈련으로는 전혀 해소가 안 됐지.

“스트라이크!”

그러니 그 마음이야 나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만, 이해와는 별개로 일단 잡는 건 잡아야지.

2구, 다시 바깥쪽으로 빼버린 코스에도 역시나 헛스윙.

다시금 둔탁하게 허공을 가르는 스윙은 낮게 깔린 공을 아슬아슬하게 맞춰내지 못했다.

‘더욱더 약이 오르겠지. 지난 타석에서도 이랬으니까.’

어쩌면 그렇기에 저스틴 스모크가 욕심을 놓지 못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지난 타석에서도 냅다 헛스윙만 하면서 삼진으로 물러났었거든. 그러니 약이 오르는 한편으로, 기대감도 생기는 거지.

혹시 맞히기만 한다면, 맞출 수만 있다면, 이번에도 공이 휙 넘어가버리지 않을까? 하고 말이야.

언젠가 잭팟이 터지길 바라면서, 계속해서 슬롯머신의 레버를 당기는 도박사처럼.

허나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듯이···

“스트라이크 아웃!”

한번 잭팟이 터진 머신은, 절대로 다시 한번 777이 터지지 않는다. 그 헛된 희망 속에서 돈을 버는 건 언제나 카지노지.

만약 콜리시엄이 카지노라면, 난 그 카지노의 수석 딜러고 말이야.

저스틴 스모크는 또 한 번의 잭팟을 노리며, 다시금 크게 배트를 휘둘렀지만, 이번에도 공은 한 끗 차이로 닿지 않았다.

“아웃!”

마지막 4번타자, 켄드리스 모랄레스가 외야플라이로 물러나면서, 이닝 종료.

세금처럼 징수된 홈런에 대한 대가로, 총 열여섯 개의 탈삼진과 세 개의 내야뜬공, 두 개의 외야뜬공. 그리고 한 개의 내야땅볼을 환급받으면서, 오늘 내 피칭은 막을 내렸다.

듣기로 홈런 하나가 삼진 여섯 개의 가치를 가진다고 하던데. 세 배가 조금 안 되게 돌려받았군.

‘진짜 세금도 이 정도로 환급받을 수 있으면 좋겠네.’

만약에 그런다면, 기꺼이, 원래 징수된 금액의 몇 배는 더 얹어서 줄 자신 있는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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