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세이프!”
5회 말, 선두타자인 6번, 카를로스 곤잘레스에게 안타를 내주며, 다시금 기분 나쁘게 이닝을 시작했지만.
“아웃!”
“아웃!”
이제까지 쭉 그래 왔듯이, 점수는 나오지 않았다. 다시 땅볼 대잔치였지.
계속하면서 적응한 건지, 슬슬 좀 잡기 쉽네. 타순이 돌고, 타자들이 나한테 적응하면서, 오히려 배트가 적극적으로 나와서, 더욱더 유도가 잘 된 것도 있고.
“야이 개X신 새끼들아! 으아아아아악!”
“이 쓰레기들아!”
다시금 병살타가 만들어지자, 결국 혈압이 치사량을 넘어버린 건지, 몇몇 로키스 팬들은 뒷목을 잡고 쓰러지기도 했다.
“스트라이크 아웃!”
마지막, 8번타자 크리스 이아네타까지 삼진으로 물러나면서, 또다시 무득점.
쿠어스 필드에서의 싸늘한 투수전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다들 Go가 화 많이 난 거 알고 있지? 이제라도 점수 내자.”
“이대로 연승 끊을 거야? 어떻게든 한 점만 내자!”
그렇게 6회 초, 공수교대가 이어지고, 다시금 카일 프리랜드가 마운드에 올라왔을 때.
내 불편한 심기를 이해한 건지, 타자들이 으쌰으쌰하면서 의지를 불태웠지만.
“아웃!”
그런다고 딱히 뭐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그냥 똑같네, 이런 쓰레기들.
‘타자들은 다 없어. 그냥 완전히 말리고 있다. 상대 투수가 굉장히 영리하기도 하고.’
우리 타선이야 원래도 기복이 심한 편이라, 오늘은 아무래도 안 터지는 날 같은데.
거기다가 추가로 카일 프리랜드가 합리적인 피칭을 하는 것도 제법 컸다.
잡을 놈은 확실하게 잡고, 아닌 놈은 그냥 걸렀거든.
‘타자들한테 기대하긴 어렵겠어.’
그것을 보니, 더욱더 확신이 생겼다. 내가 해야겠어. 영웅심리냐고? 맞아. 내가 이 팀의 히어로니, 한방 보여줘야지.
허나, 그걸 해내기 위해선 일단 한 가지를 확실하게 알아야 했다.
‘카일 프리랜드, 언제까지 던질까?’
바로 과연 카일 프리랜드의 교체 타이밍은 언제인가?
먼저 투구수의 경우, 그는 지금까지 92구를 던졌다.
“아웃!”
이제 93구네.
5.2이닝을 막은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많은 수준이지만, 사실 그건 어쩔 수 없지.
최대한 신중하게 피칭하면서, 적극적으로 땅볼을 만들고 있으니, 결국 투구수가 늘어날 수밖에.
당장 비슷하게 피칭하고 있는 나도 오늘은 평소보다 많이 던졌고. 피네스 피처는 원래 투구수가 많아지는 법이니까.
‘평균적으로 6이닝 정도를 소화했지. 많이 던질 때는 105~6구 정도의 투구수를 기록했고, 애초에 대부분 선발투수들이 이 정도지만.’
오늘 경기를 제외하고, 카일 프리랜드는 이번 시즌 20경기 동안 120이닝을 소화했다. 딱 6이닝이지.
그러니 이번 이닝이 마지막일 수도 있겠지만, 탈탈 털리면서 조기강판된 경기를 제외할 경우, 7이닝을 소화한 경기도 은근히 많다.
‘투구수는 조금 아슬아슬하지만, 서로 무실점이 이어지고 있으니, 혹시 모르지.’
쿠어스 필드에서 6이닝 무실점인데, 승리 조건조차 갖추지 못하고서 내려가긴 싫을 테니까.
‘그러니 이번에도 맥시멈을 7이닝으로 잡을 수 있어. 6회 말 투수타석에서 대타가 나오느냐를 봐야 확실하게 알겠지만.’
어쨌든 한계를 7이닝으로 잡으면. 한 가지 행복한 가정을 할 수도 있다.
그가 내려간 뒤에 우리 타자들이 갑자기 뻥뻥 치는 것 말이야.
내가 8회 말까지 던지면, 타자들이 8회 초에 새로 교체된 투수를 상대로 점수를 올려서, 내 승리 조건을 갖춰줄지도 모르잖아?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오늘은 딱히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는 않네.’
허나 그건 꿈이다.
말했다시피 그냥 오늘은 안 되는 날이니까. 얘들은 글렀어. 오히려 투수가 바뀌면서 생긴 생소함에 더 털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
‘나도 마찬가지고.’
나 또한 투수가 바뀌면 그걸로 끝이다. 가능성은 아예 제로지.
그러니 마지막 기회는 오히려 그가 내려가기 직전의 7회 초다. 그때가 마지막 찬스라고 봐야겠지.
“아웃!”
6회 초가 삼자범퇴로 틀어 막히면서, 이닝이 끝났다.
어떻게든 점수를 내주겠다며, 자신만만하게 걸어 나갔던 타자들은 대역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돌아왔지.
침을 꿀꺽 삼키는 것이, 내가 또 한 소리를 하려나, 걱정하는 것 같은데, 그들의 생각과 달리, 나는 그저 가볍게 흘겨보고 말았다.
어차피 기대도 안 했으니까.
딱 봐도 털릴 것 같더만.
이미 타자들에 대한 기대감이나, 신뢰감은 내려놓은 지 오래여서, 오히려 화가 나지 안나네.
‘이러면 7회 초 타순은 브루스, 나, 시미언. 이 순서네.’
8-9-1로 이어지는 타순.
잘하면 상위타선으로 이어질 수도 있으니, 그냥 믿고 맡기는 게 나을 수도 있겠지만. 이미 말했듯 기대는 없다.
그리고 1번타자인 시미언이 오늘 특히나 좀 별로인데, 평소라면 한 소리 했겠지만, 솔직히 얘한테는 뭐라고 못하지.
“···이번 이닝은, 삼진 좀 잡아주면 안 될까? KKK는 됐고, 두 개 정도만.”
“미안하지만, 수고 좀 해줘. 대신 너한테는 뭐라고 안 할 게.”
“···x발, 알았어, 타격도 못하는데 수비라도 열심히 해야지.”
쿠어스 필드+땅볼 대잔치라는 조합이 만들어지면서, 진짜 죽어나고 있거든.
거의 저번에 더블헤더 때랑 몰골이 비슷하네. 넌, 그냥 지금처럼 수비나 열심히 해라.
‘만약 기회를 만든다면, 오히려 브루스에게 기대해야지.’
얘도 포수라서, 가뜩이나 체력 소모가 극심한데, 쿠어스 필드이기에 숨이 넘어가고 있지만.
“다음 타석에는 어떻게든 출루라도 해.”
“···나도 마커스처럼 봐주면 안 돼? 포수도 엄청 힘든데. 숨을 못 쉰다니까?”
“넌 마커스랑 다르지. 나한테 직접적으로 보상을 받은 놈이니까. 받아먹은 롤렉스 값은 해야지? 이번에 출루하면, 값어치 한 걸로 쳐줄 게.”
마커스는 몰라도, 넌 롤렉스를 받아 처먹었잖아. 그거 값은 해야지. 안 그래?
“그치, 받은 값은 해야지··· 최대한 노력은 해볼 게. 내가 안타 치면, Suck 네가 삼진 당해도, 잘하면 찬스가 만들어지기는 하겠네.”
“글쎄.”
내 말에 본인도 찔리는 게 있기는 한 건지, 고개를 끄덕인 브루스는 내 부탁을 그저 점수를 만들라는 독촉 정도로 여긴 것 같지만, 아니다.
‘7회, 딱 그때만 가능해.’
그냥 그림이 그려졌거든.
만약 내 앞에 주자가 있다면, 그것도 7회에 주자가 있다면, 딱 한 번, 결정적인 찬스가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았으니까.
‘만약 정말로 브루스가 출루한다면, 내가 할 일은···’
최대한, 지금보다 훨씬 더 X밥처럼 보이는 것이다.
사실 이미 오늘 상대 투수가 잡은 전체 삼진의 40%를 담당하고 있으니, 충분히 호구 중의 상호구이지만, 그 이상이 되어야겠지.
물론···
“스트라이크 아웃!”
그보다 먼저 본업부터 잘해야 하고,
6회 말, 이닝 선두타자로 9번타자가 올라왔다.
투수타석이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로키스는 대타를 내지 않았다. 카일 프리랜드였지.
여전히 확신은 할 수 없으나, 어쨌든 교체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
만약 7회 초에 교체할 생각이었다면, 굳이 아까운 타석 하나를 투수 타석으로 날릴 필요는 없으니까.
‘일단 반은 완성됐네.’
그가 다음 이닝에도 올라오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에, 그것으로 계획의 절반은 채워졌다.
“세이프!”
이후, 1번타자 찰리 블랙몬에게 다시금 안타를 내주며, 베이스를 채우긴 했지만.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이번에도 실점은 없었다.
2번타자 이안 데스몬드는 아무래도 오늘 우리 타자들과 마찬가지로 타격감이 안 좋은 건지, 여전히 땅볼 귀신이었고.
홈팬들의 기대를 가장 많이 받았던 놀란 아레나도 역시 다시금 삼진으로 잡혔으니까.
‘놀란 눈치네.’
위닝샷은 오늘 경기 내내 사용하지 않았던 너클 커브였다. 오늘은 밋밋한 게, 위험해 보여서 안 썼는데, 그 생소함 덕분인지, 손쉽게 잡아냈다.
어떻게 보면, 형제라고 할 수 있는 슬로 커브와 비슷한 역할을 해준 셈이지.
그것으로 다시금 지워진 6회. 여전히 이어진 0대0의 균형 속에서, 운명의 7회가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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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이닝만 잘 마무리하자. 힘들지는 않지?”
“예, 아직 거뜬합니다.”
“그래, 그건 내가 제일 잘 알지. 타자들이 7회 말에 어떻게든 점수를 내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예.”
카일 프리랜드는 투수코치의 말에 조금은 한숨을 내쉬었다.
쿠어스 필드에서 무려 6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는데도, 정작 득점 지원을 못 받다니.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마음 같아선 끝까지 가보고 싶었지만, 제 아무리 올해 에이스급 활약을 보이고 있다고 해도.
이제 막 첫 풀타임 시즌을 치르는 2년차 루키에게 코칭스태프의 지시를 거부할 정도의 용기는 없었다.
‘그나마 7회라도 보장받아서 다행인가?’
그래도 7회만큼은 큰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 이상, 확실하게 채워주겠다는 확답을 받았기에, 그나마 만족스러웠지.
그렇게 다시금 마운드로 올라갔을 때, 문득 그에게 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일! X나게 미안하다! X신 같은 타자들 때문에, 우리가 미안해!”
“넌 죄 없어! 오늘 X나게 잘하고 있으니까, 아예 덕아웃에서 발 뻗고 누워!”
“차라리 이렇게 된 거 이대로 완봉까지 가버리자!”
호투를 보이는데도 승리를 챙겨주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미안함과 고마움이 담겨 있었지.
그것을 보며 조금은 뭉클해졌지만, 곧이어 터져 나온 목소리가 분위기를 망쳤다.
“우우우! 이 X같은 쓰레기 새끼!”
“X도 아닌 X신이 왜 Suck 연승을 막고 지랄이야!”
“야! 눈치껏 홈런 처맞아! 애새끼가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
“야이 타자 X신 새끼들아! 점수 좀 내라고, 점수 좀!”
소수의 원정팬들. 고향인 덴버에 침입한 스파이들. 자신과 똑같은 처지에 놓인, 상대 투수, ‘그’ 때문인지, 그들도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홈팬들보다 저들이 더 초조할지도 모르지. 21연승 째를 이어가며, 역대급 기록을 유지 중인 투수니까.
그것이 깨질지도 모르니, 팬들 입장에선 분명 화가 나겠지만···
‘무식한 작자들.’
당연하게도 카일 프리랜드에겐 고깝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는 상대 투수가 미웠기에, 더욱더 그들이 못나게 보이는 것도 있고.
‘쿠어스에 왔으면 좀 처맞으라고!’
이게 카일 프리랜드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자신이야, 애초에 여기가 고향이니 아무렇지 않다고 해도. 저게 진정 사람이기는 할까?
쿠어스 필드를 처음 밟은 투수가, 그것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피칭 스타일로 이렇게 잘 막는다고?
그래서 자신이 기분 좋게 승수를 올릴 찬스를 앗아가 버린다고?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었다.
연승? 그게 자신이랑 무슨 상관인가? 아니, 그렇게 많이 이겼으면, 오히려 한 경기쯤은 양보하는 미덕을 보이는 것도 멋지지 않나?
로마에 왔으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하고. 쿠어스에선 쿠어스의 법을 따라야 하건만. 계속해서 얻어맞으면서도, 꾸역꾸역 틀어막으며, 자신이 승리 조건을 채우지 못하도록 막아서는 투수, Go를 향한 미운 마음에 그는 가볍게 투덜거렸지만. 마운드에 오른 뒤에는 애써 짜증스러운 마음을 털어냈다.
‘그래, 기회는 꾸준하게 만들었으니까, 7회 말에 점수를 낼지도 모르지. 일단 이번 이닝만 잘 막자.’
괜히 감정에 사로잡혀, 자칫 이번 이닝을 망쳐버린다면, 승수를 올릴 마지막 기회마저 사라질 테고. 사실 쓸데없는 잡념을 내버려 둘 정도로 여유롭지는 않았으니까.
비록 코치의 앞에서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큰소리를 치긴 했지만, 솔직히 조금은 힘겹긴 했다.
‘이제 97구인가?’
97구나 던졌으니, 어쩌면 당연하겠지. 원래 덴버 출신이기에, 고지대라는 특성으로 인한 체력 소모는 덜한 편이지만, 그래도 거의 한계까지 투구했으니까.
오늘 컨디션이 좋고, 폼이 좋기에 그나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6회를 끝으로 내려가야 했겠지.
‘길게 끌지 말고, 빠르게 마무리 짓고, 내려가자.’
그렇게 느슨해진 마음을 다잡고서 마주한 이닝의 선두타자. 브루스 맥스웰.
별로 위협적인 타자는 아니다. 지난 두 번의 타석에서 땅볼 두 개로 물러났으니까.
애초에 타격이 좋은 타자도 아니고. .236에 불과한 타율은 포수인 걸 감안하더라도, 조금 낮은 편이지.
“파울!”
“볼.”
“볼.”
“스트라이크!”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최대한 신중하게 던졌는데, 타자 역시 조심스럽게 나왔다.
아마도 투수 때문이겠지.
원정팬들과 마찬가지로, 연승이 끊길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최선을 다할 수밖에.
“파울!”
“볼.”
그래도 최대한 침착하게 잡으려고 했지만, 가뜩이나 투구수가 넘치는 상황에서 침착하게 잘 지켜보는 타자의 모습에 조금 짜증이 생겼고.
‘아까 전처럼 좀 쉽게 잡히지 그래?’
더는 투구수를 끌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공을 던진 순간, 조급했던 건지 정타가 나왔다.
깔끔한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공. 오늘 내내 잘 막아줬던 2루수의 머리를 살짝 넘긴 타구는 당연하게도 안타였다.
‘배터리가 쌍으로 짜증나게 구네.’
괜히 안타 하나를 맞았다는 생각에 더욱더 짜증이 솟았지만, 사실 그렇게 타격이 크지는 않았다.
그다음 타자가 별로 위협적이지 않았으니까. 다만 3번까지 이어진다면 조금 위험할 수도 있고.
‘마커스 시미언은 편한 편이지만, 제드 라우리는 까다로웠어. 옐리치는, 언제 터질지 모르고.’
오늘 경기에서 손쉽게 볼넷과 안타를 얻어내며, 좋은 감각을 보여줬던 2번타자 제드 라우리까지 이어질 경우.
자칫, 조금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특히나 그다음 타자가 크리스티안 옐리치라서 더욱더 위험하고.
오늘 경기에선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하며, 두 타석 동안 삼진 하나와 내야 뜬공 하나가 전부였지만. 언제 터져도, 터질 타자지.
‘그렇다면··· 대량실점이 나올지도 몰라.’
설사 그까지 이어지지 않더라도, 오늘 감이 좋아 보이는 제드 라우리까지 간다면, 괜히 위험할 수도 있었기에. 약간의 조치가 필요했다.
그렇게 고민에 잠긴 카일 프리랜드의 눈에 문득 타석으로 올라오는 후속타자, Go가 들어왔다.
그토록 짜증스러운 상대 선발투수이자, 9번타자인데, 삼구삼진만 두 개를 당했지. 냅다 헛스윙 여섯 번을 기록하면서.
투수 타석이니, 못하는 거야 당연하지만, 솔직히 조금은 심각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붕붕 큼직하게 배트를 휘두르며 타석에 들어서는 모습은 조금은 멍청하게 보이기도 했고.
솔직히 카일 프리랜드 자신도 타격에는 자신이 없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 정도는 아니니까.
‘조금 걱정했는데, 막상 만나니까 별거 없네.’
인터리그 매치업에서 종종 특이한 타격으로 투수들을 괴롭힌 바가 있기에, 혹시나 자신도 그전 투수들처럼 조롱거리가 되면 어쩌나 싶었는데.
오늘은 그저 평범하게 많이 못할 뿐이었다. 그 우스꽝스러운 타격폼도 없었지.
‘높은 코스로 냅다 휘두르기만 했지.’
아마도 저쪽 투수코치가 만류한 거겠지. 저 정도 거구가 그렇게 달리다 보면, 분명히 문제가 생기는 법이니까.
그래서인지 그냥 큰 스윙만 하는 것 같은데, 문득 좋은 생각이 들었다.
‘잘만하면, 이용할 수 있겠는데?’
정타를 맞을 걱정은 없다.
얻어걸린 럭키 펀치도 어느 정도 기본기가 있어야 가능하지, 저건 아무리 봐도 아니니까.
그리고 덩치에 맞지 않게, 종종 보여준 타격에서 심각한 똑딱이라는 것이 증명되기도 했고. 그러니 위험부담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타석에 들어서며 보여준 조금은 멍청한 연습 스윙이 확신을 줬다.
이번에도 그 터무니없는 스윙을 해댈 텐데, 한번···
####
‘병살타나 유도해볼까?’
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다, 카일 프리랜드는. 그걸 어떻게 아냐고? 알긴 뭘 알아. 내가 독심술사도 아니고. 그냥 그래주길 바라는 거지.
그래도 상황은 갖춰졌다.
브루스, 정말로 출루를 했네.
진짜로 롤렉스 값을 해버렸어.
솔직히 못할 줄 알고, 롤렉스를 운운했던 건데, 너무 값싸게 치러버렸네. 제기랄. 더 큰 걸 요구했어야 했는데 말이야.
아무튼 브루스가 출루하면서, 판은 깔렸다. 자, 한번 잘 봐봐. 슬슬 한계에 도달한 투구수. 1루의 주자. 상위타선으로 이어지는 타순.
이게 지금 상대 투수에게 깔려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호구가, 호구 중에서도 상호구가 타석에 올랐다.
별로 총명해 보이지는 않는 모습을 여실하게 보여주면서.
과연 삼진만 잡고 싶을까?
글쎄, 최대한의 이득을 뽑아낼 수도 있는데, 굳이?
물론 대단히 침착하고, 이성적인 투수라면,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그저 확실한 아웃카운트 하나를 잡으려고 들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내 계획은 망하는 거고. 그것도 아주 처참하게. 그냥 이번에도 삼진이나 먹고 돌아가야겠지.
하지만 만약에, 아주아주 만약에 투수가 그 이상을 바란다면··· 미약하게나마 가능성이 생기지.
‘만약 땅볼을 유도한다면, 지금까지처럼 던져서는 어림도 없지.’
상대가 맞추도록 던져야지 유도가 되지, 그냥 대충 던진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
지금까지 카일 프리랜드는 나한테 그냥 냅다 포심만 던졌다. 어차피 못 치니까. 누가 봐도 뻔하지.
과장 좀 보태서, 대충 본인 평균구속인 90마일만 찍어도 공과 배트 사이의 간격이 몇 초는 나는데, 뭣하러 변화구를 던져?
그러니 지금까진 포심 패스트볼만 던졌는데, 막상 땅볼을 유도하려니까, 어림도 없네?
누가 봐도 내가 그걸 절대로 치지 못한다는 게 뻔하니까.
다들 알다시피 난 75마일짜리 배팅머신도 서른 개 중 고작 두 개 맞추는 사람이다.
그래도 최근에는 80마일까지 구속을 올렸고, 그 80마일을 서른 개 중 다섯까지 맞히기도 했는데, 어쨌든 그게 현실이지.
‘그러니 적절한 공을 골라야겠지. 내가 충분히 때릴 수 있을 만한 공을.’
나도, 카일 프리랜드도.
선택지는 다섯.
그중에서 축약해야겠지.
일단 포심 패스트볼은 제외한다. 물론 싱커도. 둘 다 구속이 빠르니까. 제 아무리 완급조절을 한다 쳐도, 캐치볼 하듯 대충 던지는 게 아닌 이상은 어림도 없지.
‘커브도 제외.’
단순히 느린 걸 던지겠답시고 커브를 던지면, 떨어지는 무브먼트에 스치지도 못하고 냅다 헛스윙할 거라고 생각할 테니, 커브까지 제외되지. 애초에 커브의 비중이 낮기도 하고.
그럼 남은 것은 둘.
슬라이더와 체인지업.
둘 다 평균 85마일이 찍히는데, 체력이 제법 소모되면서 더 느려지기도 했고 말이야. 거기에 완급조절까지 곁들인다면, 딱 적절한 속도가 나오겠지.
‘이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하는 건데···’
확률은 반반이다.
물론 땅볼을 유도하는 건, 슬라이더 쪽이 더 낫긴 하겠지만, 정말로 날 개X밥으로 보고 있다면. 어떤 구종이든지 간에, 배트에 맞기만 하면 무조건 땅볼이라고 확신할 것이기에, 의미는 없다.
“스트라이크!”
그러는 사이 날아든 초구.
반사적으로 스윙이 나갔지만, 역시나 한참 늦었다. 다시금 패스트볼, 허나···
‘84마일.’
싱커였다. 평균 구속도 느렸고. 평균 90마일이 찍히고, 직전에 브루스에게도 딱 90마일을 찍었는데, 이건 거의 나보다 느리네.
물론 나한테는 이전에도 대충 던지긴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더 느렸지. 더 밋밋하기도 하고.
갑자기 체력이 훅 떨어진 건 아닐 거다. 실투를 한 거도 아닐 거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싱커잖아, 지금까지처럼 포심이 아니라.
‘테스트군.’
한 번 간을 본 거다.
과연 내가 어디까지 칠 수 있는가, 어느 정도를 던져야 내 배트에 스치기라도 하는가를. 포심은 당연히 못 칠 거라고 생각하며 제외한 거고.
그걸 깨달은 순간,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참아냈다. 이를 꽉 깨물면서.
‘좋아, 상황은 만들었어.’
이젠 내가 스스로 해낼 차례지. 나 스스로도 궁금하네, 저 투수가 어느 정도까지 핸디캡을 줘야, 내가 그의 공을 맞힐 수 있을지.
“스트라이크!”
2구가 날아들었다.
슬라이더,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배트에 닿지 못했다. 우렁차게 헛스윙.
일부러 느리게 던진 싱커도 큼직하게 헛스윙하는 걸 보고서는, 거기서 더 느리게 슬라이더를 던져 준 건데.
‘딱 80마일이구만.’
근데도 못 맞혔네.
작정하고 후렸는데 말이야.
내 자신의 부족함에 한숨이 나오려던 찰나, 문득 등 뒤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쯧.”
포수가 낸 소리였지.
마찬가지로 투수도 조금은 짜증스러운 듯 나를 쳐다봤고.
‘아니, 어떻게 이렇게 던져도 못 쳐?’라고 묻는 것 같은 표정이네.
어째, 헛스윙한 사람보다, 스트라이크 두 개 잡은 로키스 배터리가 더 아쉬워하는 눈치구만.
그래도 그들의 눈에 내가 더욱더 X신이 된 건 확실하다. 오히려 좋아. 나쁘지 않아.
‘좀 웃긴 상황이긴 하네.’
컨디션이 나쁠 때, 강한 척 허세를 부린 적은 있지만, 상대가 나한테 제발 좀 잘하라고 부탁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네. 이것 참 색다른 상황이구만.
‘네가 맞춰 줘. 원하는 걸 얻고 싶으면.’
어쨌든 투수의 의지는 봤다.
슬라이더라, 그래, 슬라이더를 고르셨군.
체인지업은 무브먼트가 밋밋하니, 혹시나 괜히 정타가 나올 수도 있으니, 위험하다고 여긴 거겠지.
‘그럼 세 번째도 슬라이더?’
다만 그걸 마지막까지 던질지는 모르겠다. 글렀다는 생각에 대충 다시 패스트볼을 던져서 삼진 잡으려고 할 수도 있으니까.
포기하지 마. 원하는 걸 쟁취해. 넌 할 수 있어!
그렇게 카일 프리랜드에게 의지를 북돋워주며, 마지막 3구를 맞이할 준비를 갖췄다.
‘어떻게든 치자.’
차분하게 내쉰 숨.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기회이기에, 최대한 침착하고 싶었다.
조심스럽게 타격폼을 취했다.
크리스 데이비스가 가르쳐줬던 것처럼, 꼿꼿한 자세로, 허리와 엉덩이가 잘 돌아가도록.
경건하게 타격폼을 취하는 내 모습에, 상황을 알 리가 없는 브루스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너희 타자 놈들 X같아서 못해먹겠어. 내가 알아서 해야지. 물론 넌 잘했다. 네 덕분에 판이 깔린 거니까.
그러니···
‘득점 주인공으로 만들어줄 게.’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친 뒤, 투수를 쳐다보자, 그는 조금은 애매한 눈빛으로 나를 봤다.
부디 그가 자신감을 가지길 바라며, 배트를 꽈악 틀어쥐자, 곧이어 그의 팔이 휘둘러졌다.
‘왔다.’
느껴졌다.
이거라는 것이.
그토록 내가 바라던 한 구.
그 공이 바로 이거라는 것이.
더욱더 몸쪽으로 붙여서, 하지만 조금 더 느리게 날아온 슬라이더. 그는 도박을 선택했고, 내 도박은 성공했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하나.
행운의 여신을 바라냐고?
아니, 지금까지의 노력이 발휘되는 것이지. 고작 타격 훈련 몇 번 깔짝거린 걸 노력이라고 표현한다면 조금 우습긴 하지만.
그래도 이미 한 차례 보았던 공이기에, 타이밍을 잡는 것은 조금 더 쉬웠다. 공을 똑똑히 지켜보며 간결하게, 하지만 확실하게 힘이 실리도록 배트를 휘둘렀고.
‘맞았다.’
다행스럽게도 공은 배트에 맞았다. 살짝 빗맞히듯 때렸지만 말이다.
카일 프리랜드가 이걸 바랐던 거겠지. 적당히 스치듯이 빗맞는 것 말이야.
어차피 컨택은 밑바닥 수준이니, 절대로 정타가 나오지 않을 테니까.
맞는 말이다. 정타는 아니지. 스윗 스팟을 때리지는 못했으니까.
허나 그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면···
‘말했잖아.’
바로 내 파워다.
‘스치기만 해도 간다고.’
슈퍼소닉은 죽었어. 그 자릴 빅 스트롱이 대신했지.
공이 배트에 맞는 순간, 카일 프리랜드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지만, 금방 사라졌다.
믿을 수 없는 타격음을 내면서, 끝없이 솟았으니까. 새하얀 공이.
“아···”
포수의 나직한 탄식이 들려왔고, 카일 프리랜드는 고개를 떨궜다.
분명히 빗맞았는데도 미사일처럼 일직선으로 날아간 타구는 3층의 빈 좌석 하나를 정확하게 강타했다.
어떤 빈 좌석이냐고?
그야 당연히···
“Suuuuuuuuuuuuuuuck!”
우측담장 너머지.
같은 투수로서 예우하기 위해, 배트를 던지지는 않았다.
다만 워낙 잘 맞은 거라, 나도 모르게 좀 지켜보긴 했는데, 다행히 포수도, 투수도 그런 걸 신경 쓸 여력은 없어 보였다.
경악에 차 소리를 내지르는 레이더스를 가리키며 가볍게 베이스를 돌았고, 어쩌면 우리 쪽 덕아웃에서도 충격이 가득했다.
봤냐, 쓰레기들아?
다른 곳도 아니고 쿠어스인데, 내가 직접 점수를 내야 되겠어? 보고 좀 반성해라.
입을 쩍 벌린 타자들을 질책하듯 쏘아보며, 홈 플레이트를 밟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브루스가 무슨 괴물을 보듯이 쳐다봤다.
“니가 사람이냐?”
“어딜 봐도 사람이잖아.”
“어딜 봐도 사람 같지가 않아서 하는 말이지. 설마, 아까 전에 나한테 출루하라던 것도, 이걸 노렸던 거야?”
“네가 출루하면, 대충 그림이 그려질 것 같더라고. 같은 투수 심리야 훤하지.”
“이런 미친 개또라이 지니어스 새끼··· 니가 무슨 프로이트냐? 타자한테도 그러더니, 진짜 사람 심리를 꿰뚫어 보네.”
“프로이트? 그게 뭔데? 프로토스는 아는데.”
“쓰읍, 이런 거 보면 분명히 똑똑하진 않은 것 같은데···.”
홈런 친 ‘투수’에게 못하는 말이 없네. 뒤지려고 말이야.
어쨌든 내 손으로 내가 점수를 냈으니, 이제 다시 글러브 끼고 지킬 차례인데···
‘전의를 상실했구만.’
다행히 다음 이닝은 편안할 것 같았다.
덕아웃으로 돌아가며 쭉 훑어본 그라운드 곳곳에 깔린 상대 타자들의 표정은, 브루스처럼 완전히 질려 있었으니까.
내가 괴물이긴 한가 봐.
하긴, 내가 타자였어도, 쿠어스 필드에서 상대 투수가 무실점 이어가더니. 지 혼자 홈런까지 날리면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하면, 좀 소름 끼칠 것 같긴 해.
“혹시 지금도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어? 막 사람 머릿속이 훤히 보여?”
“글쎄, 아마도 롤렉스 값을 고작 안타 하나로 퉁 쳐서 개꿀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
그렇게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덕아웃으로 돌아가던 중, 브루스가 대뜸 묻는 말에 아무렇게나 지껄이니, 녀석은 다시금 경악에 차, 입을 쩍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