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고유석, 후반기에도 허리케인 같은 피칭을 이어나가다! 7이닝 무실점 14탈삼진!>
<혹사에 가까웠던 전반기, 허나 여전히 끄떡없는 Go!>
<다시 시작된 연속 이닝 무실점?! ‘Mr.Zero’ 여름에도 빛나다!>
경기 종료 이후, 언론의 반응은 역시, 고유석은 고유석이다, 정도로 축약할 수 있었다.
올스타전에서 다시금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수많은 기대감을 받았던 투수답게.
후반기의 첫 경기 역시, 그 다운 모습을 확실하게 보여주며, 스타트를 끊었으니까.
전반기에만 155이닝을 소화한 만큼, 혹시나 그로 인한 영향이 생기지는 않을까, 기대했던 이들은 여전한 고유석의 모습에 그저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A’s]
[두 경기 연속 퍼펙트 보나 했는데, 쯧, 크로포든지, 크로도프인지가 망쳤어.]
└최소한 완봉은 할 줄 알았어! 심지어 가능했고! 대체 그걸 왜 막은 거야?
└어느 정도 이해는 해야지. Suck이 오래 뛰는 걸 바란다면.
└그래도 충분히 만족스러웠잖아? 홈에서 You Suck 지르느라, 목이 다 쉬는 줄 알았다니까?
└X같은 샌프란시스코 새끼들한테 확실하게 주제를 파악시켜줬으니, 난 이 정도면 충분해.
비록 아예 두 경기 연속 퍼펙트를 바라기까지 했던 몇몇 과격한 팬들은 오히려 아쉬워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가 후반기에도 여전한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했던 이들은 대부분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팬이 아니라, 원수에 가까운 이들도 기뻐했고 말이다.
[#Rangers]
[Suck 새끼, 혹시나 푹 쉬고, 우리랑 붙을 때 등판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그런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좀 서글프지만··· 그래도 자이언츠가 박살난 거 보면, 다행이긴 하네.
└그 X같은 새끼는 어떻게 전반기에만 150이닝을 넘게 쳐 던졌는데도 멀쩡하냐?
└올스타전에서도 펄떡거리더니, 여전하네 그 X새끼는.
└그래도 걔 안 나오니까, 이번엔 느낌이 좋아! 자기 팀이 우리한테 스윕으로 박살나는 걸, 그 새끼가 벤치에서 손가락이나 빨면서 구경하게 만들자고!
레인저스 말이다.
애슬레틱스의 자이언츠전 바로 다음 상대가 텍사스 레인저스였기에, 팬들은 조금 두려워하기도 했었다.
4연전인 만큼, 3차전이 아닌 2차전에 등판했다면, 또다시 고유석에게 당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하지만 3차전에 등판하면서, 자이언츠를 개같이 털어댔기에, 최소한 레인저스와의 시리즈에선 나올 가능성이 없었기에, 그들은 그제야 마음 놓고 기쁘게 웃을 수 있었다.
다시금 글로브 라이프 파크가 고유석의 손에 더럽혀지지 않게 되었으니까.
한편으로는 그저 만나지 않은 것만으로 기뻐하는 자신들이 조금은 한심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이미 가슴 깊이 공포가 각인되어 버렸기에, 어쩔 수 없었다.
이렇듯 후반기를 시작부터 기분 좋게 잘 마친 고유석이었지만, 그다음 등판이 예정되면서, 약간의 걱정이 생겨났다.
쿠어스 필드, 투수들의 무덤으로의 원정이 거의 확정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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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어스 필드 등판이 예고된 직후, 다들 엄청나게 걱정하더라. 온갖 우려가 쏟아졌지.
역대급 성적이 이어지고 있는데, 괜히 잿가루가 뿌려질 수도 있다면서.
팬들이야 뭐, 더 말할 것도 없이 나에 대한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기에, 쿠어스 역시 내가 정복할 거라며 소리치기도 했지만, 약간은 불안해했지.
심지어는 야구에 문외한이라 마냥 잘할 거라고 소리칠 줄 알았던 레이더스도 수심이 깊어 보이더라.
‘위대한 Suck은 지형환경도 모두 이겨낼 거라면서 떵떵거릴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게 보통 그 양반들 래퍼토리잖아?
상대가 누구든, 경기장이 어디든지 간에, 내가 무조건 상대 타선을 발라버리고, 삼진을 20개씩 잡을 수 있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이지.
그러니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는데, 오히려 평범한 팬들보다 더 걱정하는 눈치였다.
알고 보니, 마찬가지로 덴버를 연고지로 한, 브롱코스의 홈구장도 NFL에서 악명이 높더라고. 원정팀의 지옥으로.
오클랜드 레이더스를 응원하다가, 나한테 갈아탄 사람들인 만큼, 덴버에 악명에 충분히 익숙해서 그런 거겠지.
그렇듯 오클랜드 팬들이 덴버 원정을 불안하게 여겼다면, 언론은 아예 불을 지피더라.
처음으로 난타를 당할 수도 있다는 둥, 페드로 마르티네즈, 랜디 존슨, 매덕스 등, 레전드들도 죄다 털렸다는 둥.
아주 난리도 아니었지.
-커트 앵글, 잘 새겨 들어. 쿠어스에서 갑자기 몸을 막 움직이면, 금방 체력이 닳아버리니까. 평소보다 조금 긴 시간 동안 차분하게 워밍업 해라. 갑자기 막 움직이지 말고.
“에이, 너무 과장하신다. 무슨 에베레스트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하! 이 자식 이거, 하나도 모르네. 직접 겪어봐야 알지. 나중에 내 말 안 듣고 후회하지 말고, 단단히 새겨들어. 그리고 타구도 평소보다 비거리가 30% 이상 더 뻗는다고 생각하고.
“전 그렉과 달리 아주 퍼펙트한 피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건방진 자식. 홈런 하나 맞아야 그런 소리를 못할 텐데.
심지어는 그렉이랑 류영진 선배한테도 연락이 왔다니까?
진지하게 걱정하는 목소리로, 아주 성심성의껏 요령을 알려주시더라. 그렉도, 류영진 선배도.
다만 그렉의 경우 조금은 믿지 못한 내 농담에 분노하여 마지막에는 악담을 퍼부었지만.
너무하시네, 같은 투수한테 홈런이나 맞으라는 저주를 퍼붓다니. 그것도 제자나 다름없는 놈한테.
아무튼 주변에서는 내 기념비적인 첫 쿠어스 필드 등판에 아주 온갖 호들갑을 다 떨고 있었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쿠어스라, 참 좋은 곳이지.”
난 오히려 기대됐다.
덴버에서의 등판이.
“약 먹었어? 아니, 약을 안 먹었어? 갑자기 뭔 개소리를···”
기분 좋은 상상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리자, 귀는 또 밝아서 그걸 캐치한 건지.
본인 타석이 아니라, 옆에 앉아서 같이 노가리나 까던 브루스의 얼굴이 기이하게 뒤틀렸다.
약이라니 새꺄. 사람을 뭘로 보고. 위험한 소리 하고 있어, 괜히 남들이 들으면, 억울하게 오해를 받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가볍게 흘겨보는데도, 브루스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쳐다봤다.
그렇겠지, 투수에게 있어선, 명실상부 메이저리그 최악의 지옥인데, 참 좋은 곳이라니. 절대로 투수가 할 말은 아니지.
“아니, 거기 구속 오른다며? 공기 밀도가 낮아서.”
“어, 그렇다고 하더라. 근데 그게 왜?”
“아니, 그냥. 좋잖아, 구속이 오른다니. 딱 1마일만 오르면 소원이 없을 텐데.”
별건 아니고, 구속 때문이다.
거기선 구속이 오른다잖아.
예전에 들은 말로는, 코리안 특급, 박선배님의 최고구속인 160Km/h도 거기서 찍었다고 하고.
그 밖에도 쿠어스 필드에서 최고구속을 갱신한 투수가 많으니, 거의 확실하다고 봐야지.
애초에 과학적으로 봐도 공기의 밀도가 낮아, 마찰이 적기에 속도가 빨라지는 것이 증명되었고 말이야.
‘그러니··· 잘하면 꿈의 90마일을 볼 수도 있다는 거지.’
지금 내 최고구속은 89마일이다. 보통 89.2~3마일 정도로 찍히지.
그러니 1마일의 상승까지도 필요 없고, 딱 0.7마일, 0.7마일만 평소보다 더 나와도 꿈의 90마일이라는 뜻이지.
내 구속의 앞자리가 달라진다는 건데, 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내가 그토록 바라던 일인데.
물론 90마일이라는 말 앞에 꿈이라는 단어를 붙이면, 많은 사람들이 코웃음 치겠지만, 나한테는 꿈 맞다.
‘한때는, 정말 산타할아버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부탁할 정도였지.’
조금 웃기게 들린다는 거 아는데, 진짜야.
싱글A에 있었을 땐, 그게 자기 전 래퍼토리였거든.
산타할아버지, 저 올해는 안 울고, 착한 일도 많이 했으니까, 내년 크리스마스에는 최고구속을 1마일만 올려주세요.
거짓말 안하고 거의 매일 같이 빌고 빌었지.
결국 산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다시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고.
솔직히 최고구속이 90마일은 찍어야, 이 빌어먹을 미국야구에선 그나마 프로선수의 커트라인은 넘었다고 평가하거든.
그렇기에 90마일만 찍는다면, 내 야구 인생도 훨씬 더 활짝 필 거고 말이야. 적어도 그때는 그렇게 믿었지.
‘지금은 그때만큼 구속이 간절한 상황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르긴 다르지.’
물론 그토록 처절했던 마이너 때와 달리, 오늘의 고유석은 굳이 90마일을 찍지 못하더라도, 딱히 상관없다.
리그 최고의 구위와 무브먼트를 가지면서, 패스트볼은 100마일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는 스터프를 가지게 됐고.
마찬가지로 구종 가치에서 나란히 1,2등을 찍은 너클 커브와 서클 체인지업도 있으니까. 제구는 뭐 말할 것도 없고.
솔직히 이 만큼 잘하면, 구속은 아무 상관없지. 당장 내 공이 강속구라는 평을 받는 지경이니까.
그러니 예전처럼 그렇게까지 빌 정도로 구속이 필요한 상황은 아니긴 한데, 그래도 기분이 좋잖아, 기분이. 내 기분이 좋다고.
“고작 그것 때문에 쿠어스를 좋게 보는 거냐? Suck 너 가만 보면 이상한 곳에서 좀···”
“닥쳐, 니가 뭘 알아. 아무도 내 서러움을 몰라! 내가 그 X발놈의 구속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었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워워, 진정해, 내가 잘못했어. 그래, 90마일이라니. 상상만으로 대단하네. 네 말이 맞아.”
눈물 젖은 빵을 씹어 삼키면서, 그토록 구속을 바랐든 내 마음을 니가 알아?
그토록 꿈꿨던 마의(?) 90마일을, 이제야, 내 인생을 통틀어서 처음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데.
쿠어스가 투수의 지옥이고, 수많은 레전드들의 무덤인 게 무슨 상관이야?
까짓 거 좀 맞으면 되는 거지.
90마일 한번 찍는 대가로 그 정도는 충분히 바칠 만하니까.
그렇기에 나는 다른 사람들의 불안함과 달리, 지극히 덴버 원정을 기대했고, 조금 흥분했다.
내 머릿속에서 쿠어스 필드는 꿈과 낭만이 가득한, 행복한 동화나라나 다름없었다.
“으아아아아아아!”
“X발 Suck 저 새끼도 안 나오는데 왜 X발!”
“야이 Mother Fucking 쓰레기들아! X발 이제 보니까, Suck 저 X새끼가 문제가 아니라, 그냥 니놈들이 X이 못했던 거였어!”
“이 X발놈의 야구, 내가 다시는 보나 봐라!”
그렇기에 디즈니랜드에 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설렘 가득 해맑게 레인저스와의 경기를 구경했다.
마찬가지로 내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나와 함께 온갖 기쁨과 흥분에 차 있던 레인저스를 우리가 스윕으로 때려잡는 모습을,
그리고 기대감에 가득 찼던 홈팬들이 더욱더 깊이 절망의 구덩에 빠지는 걸 벤치에서 목도한 뒤. 좌절한 레인저스를 알링턴에 버려둔 채, 그토록 바랐던 덴버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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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석의 쿠어스 필드 등판은 수많은 관심을 자아냈다.
우리 시대에 가장 위대한 투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시즌을 보냈고, 올해는 그것마저도 넘어서버린 투수.
그런 투수가 과연 모든 투수들의 무덤이었던 쿠어스 필드에서도 여전히 위대할 수 있을지가 궁금했으니까.
언제나 상상을 초월했던 투수이기에, 몇몇 이들은 어쩌면 노모 히데오나, 김헌빈처럼, 쿠어스에서도 깊은 인상을 남길 지도 모른다는 예측을 내놓기나 했다.
노히터나, 완봉 말이다.
직전 경기에서 7이닝, 84구로 비교적 짧게 피칭을 마쳤기에, 충분한 여력이 남을 테니까.
거기다가 중간에 휴식일(이동일) 역시 끼여 있었기에, 일정 역시 도와줬고 말이다.
물론 그를 증오하는 레인저스나 애스트로스 같은 팀들의 팬은 홈런을 맞을 거라며 악담을 퍼붓는 것이 보통이었고.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모였기에, 전문가들 역시 저마다의 추측이나, 견해를 내놓기도 했다.
“Go는 부정할 수 없는 최고의 투수입니다. 비록 수많은 전설들이 꺾인 바가 있던 쿠어스 필드이지만, 적어도 이번 시즌의 Go는 그런 전설들 보다도 한 단계 위에 있죠. 그러니 저는 쿠어스 필드에서도 변함없이 훌륭한 피칭을 보여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전문가들 중에선 안전을 택한 이들도 많았다. 굳이 부정적인 견해를 내놓아 봤자, 팬들에게 별로 좋은 말을 듣지 못할뿐더러.
적어도 지금까지는 이쪽이 항상 정답이었으니까. 거의 대부분의 경기에서 언제나 마지막에 웃은 건, 그가 잘할 거라고 똑같은 예측을 내놓은 나팔수들이었지.
그렇기에 고유석이 쿠어스 필드, 투수의 무덤에서도 우뚝 일어서리라는 견해를 내놓는 이들도 많았지만.
의외로 많은 이들이 그 반대의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다.
“저는 조금 생각이 다릅니다. 조금 논란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저는,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사견으로는 Go가 쿠어스 필드에서 큰 난항을 겪으리라고 예상합니다.”
각종 메이저리그의 이슈나, 한창 주목을 끌고 있는 이벤트를 이야기하는 프로그램 역시 마찬가지였다.
패널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주장을 내놓았으니까.
“그런가요? 저와 생각이 다르신데, 이유가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객관적인 팩트죠. 쿠어스 필드의 특성이야 더 말하지 않더라도, 다들 알고 계실 테니 넘기고. 일단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Go는 쿠어스 필드와 상성이 안 좋습니다.”
“어째서죠?”
“Go는 리그 최고의 무브먼트를 가진 투수입니다. 그리고 다양한 구종을 가졌고요. 그러한 장점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대단히 공격적인 피칭으로 타자를 찍어 누르는 스타일을 가진 투수죠.”
“예, 모두가 아는 사실이죠.”
느린 구속으로 인해, 약간의 오해를 받으나, 고유석의 본질은 피네스 피처가 아닌, 파워 피처라는 사실은 이미 정론이었다.
당장 미친 듯이 쌓아 올린 탈삼진만 보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지.
“그러한 피칭은 쿠어스와 맞지 않습니다.. 공의 회전수를 줄이고, 무브먼트를 떨어트리는 쿠어스 필드의 특성상, 그런 리그 최고 수준의 구종들이 비교적 떨어질 수밖에 없죠.”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Go는-”
“계속 들으십시오. 그렇기에 쿠어스 필드에서는 그라운드 볼러가 유리하고, 로키스 역시 적극적으로 그라운드 볼러를 양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Go의 성향은 그에 반대되죠.”
그건 조금은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말이었다. 오히려 고유석은 뜬공에 비해, 땅볼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투수 중 하나였으니까.
“지금의 주장은 조금 이상하군요, Go는 리그 최고의 그라운드 볼러입니다.”
“물론 기록상으론 그렇지만,, 그건 강력한 무브먼트로 타자들을 효과적으로 찍어 누르며 플라이볼을 억제한 것이지, 그라운드볼을 유도한 게 아닙니다. Go는 파워피처니까요.”
허나 그것은 타자들과의 힘 싸움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하면서, 좋은 타구가 나오지 않은 것일 뿐.
그의 성향 자체가 정석적인 그라운드 볼러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대부분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쿠어스 필드에서는 전체적인 공의 힘이 떨어지기에, 다른 경기만큼의 플라이볼 억제가 힘들어질 테고.
그것이 특유의 공격적인 성향과 맞물려, 고유석이 쿠어스 필드에서 난항을 겪으리라는 것이, 대부분의 논리였다.
실제로, 강력한 구위를 앞세워, 공격적인 피칭으로 리그를 정복했던 전설적인 투수들이 비슷한 이유로 쿠어스 필드에서 무너졌으니까.
“넌센스군요, Go는 수많은 구종을 가졌고, 타자의 타이밍을 찌르는 것에 천부적인 능력을 가진 투수입니다. 그건 쿠어스 필드의 특성과 아무런 상관이 없죠.”
허나 여태까지 보여준 바가 너무나도 많았던 투수였기에, 반대의 견해 역시 타당한 이유를 앞세워 그의 호투를 예측했고.
그렇게 수많은 의견이 대립하고, 기대와 저주가 뒤섞인 상황에서, 고유석이 덴버에 도착했다.
그 모든 논쟁을 끝내기 위해서. 물론 본인은 그저 기대감에 푹 빠져 잔뜩 흥분되어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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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버는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행복의 나라는 아니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느낌이 확 오더라고.
작년에 데뷔해서, 이제 갓 2년 차에 접어든 애송이지만, 그래도 웬만큼 원정을 다녀봤는데, 그중에서도 덴버는 가장 이질적이었지.
‘왜 여기가 무덤이라고까지 불리는지 잘 알겠네.’
그렉과 류영진 선배가 괜히 직접 연락해서, 조언해준 게 아니야.
그렇듯 직접 마주한 덴버는 내 상상처럼 오직 행복만 가득한 동화나라와는 조금 거리가 멀었지만, 그래도 내가 품었던 기대와 전해 들은 소문이 함께 공존하는 곳이기는 했다.
“숨이 금방 가빠지네요.”
“고산병에 걸릴 정도는 아니지만, 트레이닝에 어울리는 곳은 아니니까요. 혹시나 호흡이 부족하시면, 언제든지 산소 호흡기를 사용하십시오. 자칫 탈진할 수도 있으니까요.”
일단 듣던 대로 체력이 훅훅 닳아버릴 것 같았지. 평소보다 조금 약하게 몸을 달아 올리는데도, 금방 호흡이 벅차더라고.
덕아웃 가득 산소 호흡기를 배치하는 걸 보고, 솔직히 조금은 호들갑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어.
‘그나마 내가 이 정도면, 체력이 나쁘거나, 충분한 휴식이 없는 선수들은 그대로 경기 중간에 숨넘어가겠네.’
체력이 좋은 편인 내가 이 정도면, 다른 선수들은 오죽하겠어? 진짜 쓰러지는 거지.
수많은 메이저리거들의 증언처럼 쿠어스 필드는 그다지 야구를 하기에, 아니, 그냥 프로스포츠를 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곳이었다.
반대로 여기서의 등판이 확정된 순간부터 내가 품었던 기대감을 충족시켜주기도 했고.
“음!”
‘빠르다···!’
차분하게 공을 들여, 워밍업을 마친 뒤, 이어진 불펜피칭.
가볍게 던졌는데도, 어쩐지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르게 날아가는 것이 훤히 보였다.
평소 루틴에 맞춰, 서클 체인지업부터 불펜피칭을 시작하며, 점점 더 근질근질거렸던 속을 시원하게 긁어줬지.
여기까진 참 좋은데 말이야.
“이거, 공인구 맞죠?”
“미끄럽지? 가볍게 뜨는 것 같은 느낌도 들고.”
“네, 뭔가 좀 묘하게 느낌이···”
“최대한 감각을 잡아 둬. 컨트롤에도 영향을 끼칠 테니까. 쿠어스에선 원래 그래.”
쿠어스에서는 구속이 빨라진다는 게 진실이었던 만큼, 나머지 악명들도 모두 다 진실이라는 게 문제네.
묘하게 평소와 손맛이 다른 공. 그리고 분명 속도는 더 붙었지만, 하나 같이 조금 밋밋했다.
포수 글러브를 때리는 소리도 약간은 더 작았지. 그래도 충분히 쉰 덕분에 폼이 좋기는 한데, 뭔가 좀 애매하네.
‘그래도 이 정도면, 타자들은 충분히 잡을 수 있어. 그냥저냥 평범한, 아니, 그보다 살짝 아래인 폼으로 생각하면 되니까.’
그래도 대단히 걱정스러운 정도는 아니고, 그냥저냥 평소에 살짝 폼이 저조하거나, 평범할 때 수준 정도 같았기에,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이 빠른 구속을 제대로, 마운드 위에서 확인하고 싶다는 기대감에 걱정이 살짝 밀려난 걸 수도 있고.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친 뒤, 1회 말, 그라운드로 걸어 나갔다.
‘호기심이 가득해 보이네.’
처음 덴버에 도착했을 때도 그랬지만, 로키스의 팬들은 나를 향한 적대감이나, 호감보다는, 그저 호기심이 가득해 보였다.
리그에서 가자 잘 나가는 투수이니, 한번 지켜보기나 하자는 느낌이었지.
한편으로는 제 아무리 대단한 투수라도, 자신들의 홈에선 별 수 없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You Suck!”
그렇기에 비교적 조용한 홈팬들과 달리, 이 산동네까지 기어코 나를 쫓아온 레이더스가 더 시끄러웠지.
뭐, 사실 레이더스야 언제나 홈팬들보다 10데시벨 정도 더 소란스럽지만 말이야.
‘진짜 지독하다니까. 이걸 덴버까지 따라와?’
물론 NL 서부지구에 해당되는 만큼, 덴버가 그렇게 먼 원정지는 아니지만, 진짜 볼 때마다 신기하단 말이야.
그렇게 원정경기 치고는 조금은 중립적인 분위기에서 마운드에 올랐고, 첫 공을 던지기 전, 가볍게 숨을 골랐다.
‘정말로 90마일이 나올까?’
느낌은 좋았다. 당장 불펜피칭에서도 평소보다 훨씬 더 구속이 잘 붙었으니까.
느낌으로 따진다면, 거의 100%겠지. 전력으로 던지기만 한다면, 8대신 9라는 숫자가 앞자릿수로 찍힐 거야.
‘괜히 좀 떨리네.’
물론 이게 진짜 구속은 아니다. 어디서나 일정하게 찍혀야, 의미가 있는 거지.
특수한 요인으로 인해서, 올라간 구속은 사실 아무런 의미도 없지, 없는데, 그게 맞는 건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어쩔 수가 없잖아?
‘괜히 코치들이 투수 보고 전광판에 구속 찍히는 거 보지 말라고 하는 게 아니야. 한번 신경이 팔리니까, 나도 모르게 자꾸 집착하게 되네.’
구속이라는 것이 가진 마력이겠지. 실질적은 위력을 넘어, 그것만이 가진 매력이 그토록 강하다는 거고. 오늘은 나 역시도 그 팜 파탈 같은 마력에 홀려,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플레이볼!”
그렇게 들뜬 마음으로 마운드에 올랐을 때. 얼마 지나지 않아, 주심이 경기의 시작을 선언했고, 타자는 배터박스로 입장했다.
이젠 혼자 상상하고, 떠는 걸 넘어서, 진짜로 직접 던질 차례지.
올라온 1번 타자, 오늘 경기의 리드오프는 찰리 블랙먼. 작년 센세이셔널한 활약을 보이며, NL MVP에서 5위를 기록했던 타자다. 실버슬러거도 받았고.
16년엔 29홈런을, 작년 17시즌에는 37홈런을 쳐내며, 리드오프치곤 좀 심할 정도로 강력한 파워를 갖췄지.
‘물론 거기엔 산동네 버프가 좀 크지만.’
여기가 바로 그 산동네잖아.
산 아래에서 만났다면, 어느 정도 파워를 깎아놓고 봤겠지만, 난 지금 그 호랑이 아가리에 들어왔으니, 기록 그대로 인정해야지. 그에 맞춰서 경계해야 하고.
리드오프답게 컨택도 준수해서, 거의 매년 3할이나, 그에 근접한 타율을 기록하기도 한 타자인데.
‘일단 던진다, 온 힘을 담아서.’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일단 그냥 공부터 던지고 싶었다.
내가 주구장창 얘기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로 느낌이 좋았던 건지, 브루스도 포심 패스트볼을 요구했고, 나는 두말 않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브루스의 리드에 내가 흔쾌히 승낙하다니,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야.
“후우···”
초구를 던지기 전, 다시금 호흡을 골랐다. 떨리는 마음에 왠지 실투가 나올 것만 같았으니까.
평소보다 조금은 덜 들어오는 공기를 억지로 빨아들이며 심장을 진정시킨 뒤, 살포시 그립을 잡았고, 그때부터는 망설이지 않았다.
‘가자.’
와인드업.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혼신의 힘을 담은 투구 동작이지 싶었다.
퍼펙트게임들이랑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아주 완벽한 동작이었을 거야.
그렇게 휘두른 왼팔의 끝에서, 공은 불펜에서의 느낌처럼, 조금은 미끄러지듯 매끄럽게 빠져나갔다.
‘빠른가?’
조금은 애매했다.
속도는 빠른 것 같은데, 어쩌면 그게 착각인 것 같았거든. 과도한 기대감이 만들어낸 착시 말이야.
실제로 확실히 평소보다 쭉 뻗는다는 느낌은 훨씬 덜했으니까. 좀 가볍기도 했고.
“스트~~라잌!”
몸쪽으로 낮게 쭉 날아든 공에, 타자는 리드오프의 역할을 하려던 건지, 아니면 마음에 차는 코스가 아니었던 건지 가만히 지켜봤고.
포심 패스트볼은 그대로 포수의 글러브 안으로 들어갔다. 스트라이크.
평소처럼 스트라이크로 시작한 경기였지만, 신경은 온통 다른 곳에 팔려 있었다.
입술을 살짝 씹으며, 전광판을 돌아보려 했을 때.
“와아아아아아아아아!”
“Yeeeeeeah!”
“Suuuuuuck! 오늘 X나게 쩌네!”
그보다 반박자 앞서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그 순간 왠지 조금 눈이 뜨거워졌다.
뻔하잖아, 고작 스트라이크 하나에 저런 반응이 나올리는 없고, 뭔가 특별한 게 있었다는 건데. 그건 하나뿐이지.
[90.2mph]
그래, 이거밖에 없지.
전광판에 찍힌 구속은 정확하게 90마일을 가리켰다. 앞자리 수가 바뀌었지.
혹시나 잘못 본 게 아닐까, 다시금 살펴보기도 했지만, 표기는 정확했다. 90.2마일.
‘진짜로 찍었네.’
내 생애를 통틀어, 최고구속이지. 단 한 번도 넘지 못했던, 그토록 깊이 바랐는데도 결국 도달하지 못했던 장벽을 넘은 것이기도 하고.
어떤 기분이냐고? 왠지 조금 허탈하지 않느냐고? 그럴 리가.
오늘 경기 끝나면, 경기 영상을 다운로드할 거야. 그렇게 저장한 영상은 평생 동안 간직할 거고. 내가 처음으로 90마일을 찍은 날이니, 죽을 때까지 모셔 둬야지.
나중에 장례식장에서도 틀어달라고 할 거다.
듣던 대로 이방인에게 조금은 가혹할 것 같았던 쿠어스 필드지만, 그래도 기대처럼 꿈동산인 건 맞았다. 해발 1,610미터 위에 있는 꿈의 나라지.
내가 일평생 그토록 바라던 꿈이 이뤄졌잖아? 바로 이곳에서.
다만···
‘아, X발.’
꿈의 나라이기에, 행복한 단꿈과 동시에 악몽도 존재했다. 마냥 행복하기만 했으면, 그냥 천국이라고 불렀겠지.
“세이프!”
2구째, 다시금 던진 포심.
쭉 뻗어나가는 타구를 보며 생각했다.
‘원하던 걸 줬으니, 티켓 값을 받아가는 구만.’
내 인생 최고구속은 유료 서비스였다고. 멀찍하게 날아간 타구는 펜스를 때렸으니까. 대가를 지불한 거지.
제법 경기장이 큰 편인데, X나 쉽게 날아가네. 콜리시엄이었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인데 말이야.
‘포심은 어렵겠네. 구속 빼곤 죄다 별로야.’
그래도 그토록 기대하고, 보고 싶었던 건 봤으니, 이젠 현실로 돌아올 차례지.
인생 최고의 구속을 맛보며, 짜릿함을 느끼긴 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오늘 경기에서 포심은 조금 비중을 떨어뜨려야 할 것 같았다.
이미 예상하기는 했는데, 역시, 좀 쉽게 맞네.
“파울!”
“볼!”
그다음 타자에게 연이어 던져본 슬라이더 너클 커브 역시 마찬가지였고.
회전수가 높고, 무브먼트가 강력한 공들인 만큼, 쿠어스 디버프가 듬뿍 들어간 거지.
‘포심, 너클 커브, 슬라이더. 이 셋은 오늘 비중을 낮춘다.’
슬라이더야, 보조적인 수준이니 그렇다 쳐도 포심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주력구고.
너클 커브 역시 가장 강력한 결정구 중 하나이기에, 이것들의 위력이 떨어졌다는 것이 굉장히 뼈아프긴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세 개를 빼도 다섯 개네.’
커터, 투심, 서클 체인지업 V1,V2, 마지막으로 쓰리핑거 체인지업까지, 셋 다 아예 안 쓴다고 해도, 남은 구질이 다섯 개나 되거든.
원하던 걸 얻어냈고, 쿠어스 필드의 진짜 모습도 제대로 확인했으니.
이젠 주어진 상황에 맞춰서, 가진 것들을 잘 조합해서 타자들을 조질 차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