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265화 (265/316)

265화

‘다리 한번 건넌 건데, 뭐가 이렇게 다르냐.’

슬슬 몸을 풀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너무 다른 것 같다고.

작년에도 그랬지만, 이상하게 AT&T 파크에 오면 항상 이런 생각이 들지.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게 참, 선 하나, 아주 미세한 거리 하나로 이렇게나 큰 차이가 나는구나, 싶거든.

그냥 좀 신기하잖아?

콜리시엄은 창고 지대 한가운데에 떡하니 놓인 데다, 구장 자체도 낡고 허름한데.

베이 브릿지 건너의 AT&T 파크는 정 반대로, 최고의 구장으로 꼽히니까.

특히 관중석에 앉으면 바다와 그 건너의 오클랜드가 훤히 보이는 풍경이 일품이지.

내부 시설도 2000년에 개장된 신식구장인 만큼, 굉장히 좋고.

“여긴 지상낙원이네.”

“천국이지, 콜리시엄이랑 비교하면. 일단 주변 풍경이 죽여주잖아? 펜스 뒤로 쭉 바다니까.”

“그 바다 너머는 오클랜드고 말이야.”

“천국과 지옥이네.”

나만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닌 건지, 다른 동료들도 피식 웃으며 새삼 AT&T 파크의 아름다움을 논했다.

괜히 예쁜 메이저리그 홈구장 설문 조사할 때, 매번 Top 3안에 들어가는 게 아니야.

‘고작 다리 하나 건넌 건데 말이야.’

이렇듯 겨우 다리 하나 건넌 것만으로 서로 극단적인 차이를 보이는 콜리시엄과 AT&T 파크, 두 구장이지만. 놀랍게도 공통점도 있다.

‘둘 다 투수한테 유리하지.’

투수 친화적인 구장이라는 것. 거기다가 은근히 그 성향도 비슷하다.

콜리시엄이 홈런을 잘 억제하는 것처럼, AT&T야 뭐, 더 말할 것도 없는 곳이니까.

맥코비 만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의 영향도 큰 데다가.

특히나 좌측 펜스의 경우, 자이언츠의 레전드, 윌리 메이스의 등번호를 따, 무려 24피트, 7.2미터에 달하는 높이를 자랑하기에.

앞서 언급한 해풍과 어우러져, 우타자로서 아주 엿 같을 정도로 홈런을 억제하지.

사실 콜리시엄도 홈런을 엄청나게 잘 막기는 하는데, 이 정도는 아니다.

오죽하면 최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쇠락하는 이유가, 플라이볼 혁명의 대두로, 외야뜬공이 대세로 떠오른 트렌드에 적합하지 못한 홈구장 때문이라는 소리가 나오겠어.

타자들이 죄다 죽어나는 거지. 그래서인지 최근 들어서는 펜스를 당긴다, 어쩐다 하는 걸로 알고.

‘그 대신 우측이 광활해서 3루타가 쉽게 나오는 곳이라는 점도 비슷하고.’

그나마 타자들에게 이로운 것이 있다면, 광활한 외야 필드 덕분에 3루타가 나오기 쉽다는 것 정도.

이쪽은 AT&T 파크가 콜리시엄보다 더 심한 걸로 안다.

최근 3년간 파크 팩터를 통틀었을 때, 전체 4위였던가? 3루수 부문에서. 1,2위인 체이스 필드와 쿠어스 필드는 부정구장이니까, 사실상 없는 셈 치고.

그나마 ‘상식적인’ 야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코메리카 파크까지 쳐준다 치면, 메이저리그 구장 중에서 전체 2위라고 봐도 무방하지.

이렇듯 수많은 장점과 단점이 공존하고 있는 경기장인데, 한 가지 확실한 건···

‘솔직히 내 입장에선 개꿀이지.’

같은 지역 라이벌팀 소속 에이스 투수인 나, 고유석과 AT&T 파크가 아주 찰떡같은 궁합을 가진 곳이라는 거다.

시설도 좋고, 투수한테 유리하니, 내 입장에서야 땡큐지, 여기서 등판하는 건.

거기다가···

‘우리 팬들이 많은 것도 마음에 들고.’

사실상 홈구장이나 다름없는 분위기 역시 마음에 들고.

아직 경기가 시작하기도 전인데도, 관중석은 빠르게 채워졌다.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밀물처럼 들어왔다.

“밖에서 봐도 엄청나게 많더니···”

“꽉 채우겠는데?”

“관중이야 자이언츠는 원래도 많으니까, 그렇다고 쳐도. 왜 이렇게 관중석에 우리 유니폼이 많아?”

“우리가 요즘 진짜 잘 나가기는 하나 보네. 거의 콜리시엄 수준인데?”

그리고 그런 관중들 중에는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우리 팬들이 많았다.

무섭도록 애슬레틱스의 색으로 차오르는 관중석을 보며, 마커스와 브루스는 혀를 내둘렀다.

“Suuuuuuuck!”

“오늘도 퍼펙트 가자!”

“샌프란시스코를 불태워라! 자이언츠를 죽여라! 우리가 진정한 베이 브릿지의 주인이다!”

“퍼펙트? 받고 스플래시 히트까지 날려버려! 마침 내셔널리그 룰 따른다며?”

호송해주듯 구단버스를 따라올 때부터 심상치 않다고 여겼는데, 벌써 이 정도면 나중에 다 찼을 땐 거의 관중석의 절반은 점유할 것 같네.

누가 보면 중립구장에서 경기 치르는 줄 알겠어.

거리가 가깝다 보니, 어떻게든 티켓만 구한다면 그리 힘든 일정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좀 대단하긴 하네.

“단순히 우리 유니폼이 아니야. 잘 봐, 죄다 79번이잖아.”

“진짜 베이브 루스가 따로없구만, 구름 같은 관중을 몰고 다니네.”

뭐, 그 사람들이 죄다 등짝에 79번과 Go 혹은 Suck이 찍힌 내 유니폼을 입고 입다는 거야 이젠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고.

그렇게 우리 팬들이, 먼저 올라온 정신에 맞춰서 한창 몸을 달구고 있는 내게 기대감 가득한 환호성을 내질렀다면.

반대로 원래 이 구장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팬들은 조금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뭐랄까, 분명히 원정인데, 날 그렇게까지 싫어하는 눈치가 아니라고 해야 하나?

심지어 바로 작년에 자기들한테 퍼펙트를 한 놈인데도, 약간은 호의적인 수준이었지.

“여기 원정 맞지? 어째 자이언츠 옷 입은 사람들도 좀 호의적인데.”

“Suck 네 인기를 생각해야지. 이 지역의 슈퍼스타인데, 아무리 자이언츠라고 해도, 마냥 밉겠어?”

그것이 의아해서,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니, 브루스는 오히려 저게 당연하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이 지역의 슈퍼스타라···’

대충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관중석을 빠르게 채우는 수많은 애슬레틱스 팬들과 마찬가지로 저것도 거리가 가까워서 생긴 일이지.

까놓고 말해서, 형제도시나 다름없는 두 도시이기에. 사실상 경제적 문화적 공동체나 다름없다.

물론 오클랜드 쪽이 샌프란시스코에 비해 심하게 차이가 나긴 하고, 치안적인 문제도 있지만. 신문, 뉴스, 프로그램 등등. 각종 미디어가 함께 묶여 있지.

아, 사회 뉴스는 빼자.

서로 너무 다를 테니까.

아무튼 오클랜드 사람이 보는 신문을 샌프란시스코 사람도 보고. 샌프란시스코가 배꼽 잡으면서 보는 프로그램을, 오클랜드의 한 가정에서도 같은 시간, 똑같이 본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이언츠 팬들에게도 내가 익숙하지.’

그렇기에 자이언츠 팬들에게도 내가 애슬레틱스 팬들만큼이나, 굉장히 친밀하게 느껴질 거다.

등판만 했다 하면, 오클랜드는 물론, 이 인근 지역 스포츠 뉴스에서 항상 헤드라인으로 등장하는 몸이니까.

쉽게 말해서, 우리 동네, 내가 사는 지역의 히어로로 떠오르며 각광받은 선수를, 갑자기 적으로 만난 건데, 아무리 적이라고 해도 마냥 미워할 수가 있나.

지금처럼 조금을 떨떠름하게, 혹은 약간은 호의적이게 바라볼 수밖에.

물론 자이언츠에 대한 팬심이 짙은 이들은 사납게 노려보기도 했지만.

‘이런 원정은 또 처음이네.’

작년에는 자이언츠 상대로 콜리시엄에서 등판했기에, 사실 크게 느끼지 못했는데.

저런 자이언츠 팬들의 반응을 보니, 내가 이 지역의 유명인사는 유명인사구나 싶었다.

그렇기에 한편으로는 또 다른 생각도 들었고.

‘나만 잘하면, 베이 브릿지 건너서 이적하는 사람들이 꽤 많을 수도 있겠어.’

어쩌면 오늘 경기의 결과나 퍼포먼스에 따라, 안 그래도 사람이 바글바글 거리기 시작한 콜리시엄에 새로운 관중이 더 생겨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 말이다.

나한테 홀려서 AT&T파크를 버리고, 베이 브릿지를 건너, 콜리시엄으로 향하는 이적행위를 해버리는 거지.

‘일석삼조구만.’

잘해야 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나는 좋은 성적 올려서 좋고, 팬들은 그런 내가 만족스러워서 좋고, 구단은 새로운 팬들이 생겨서 좋고.

잘하기만 하면, 세 가지 이득이 따라온다는 건데, 무조건 잘해야지.

“끄흡-”

“잘못 받은 거 아니에요?”

“아냐아냐, 그냥 평소보다 좀 더 묵직하네. 난 괜찮으니까, 계속 던져.”

다행히 내 몸도 잘하기에 적합한 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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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펜의 문이 열리자, 수만 쌍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Go You-Suck!

날 소개하는 경기장 아나운서의 목소리도 스피커를 타고 울렸고.

지금 메이저리그에서 유일한 여성 구장 아나운서라고 하던가? 조금 색다르긴 하네.

‘어디 보자, 우리 똥강아지들은 어떤 표정을 짓고 계시나?’

천천히 마운드에 오르며, 가볍게 상대편 덕아웃을 훑었다. 굉장히 나한테 집중한 눈동자들이구만.

그 집중력의 이면에선 미약한 경계심, 그리고 혹시나 하는 공포도 느껴졌다.

바로 작년에 퍼펙트를 당했던 입장이니, 혹시 이번에도 그런 불상사가 벌어지지는 않을까, 걱정스럽기는 하겠지.

‘타선은 깔쌈하네, 딱 좋아.’

자이언츠 타선은 내 입맛에 맞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딱 큰 부담 없이 때려잡기 좋은 수준이지.

‘악명 높은 3루타는 크게 걱정 안 해도 되겠어.’

앞서 언급했듯, 참 좋은 이 구장의 유일한 단점은 3루타가 쉽게 양산된다는 건데.

넓지만, 펜스가 그리 높지 않고, 바닷바람의 영향도 좌측보단 덜한 우측 펜스 덕분이다.

그래서 그나마 홈런이 나오기 쉽고, 3루타도 자주 나오는 거지만, 그런 우측 외야를 공략해야 할 자이언츠의 좌타자들은 그리 강력한 편은 아니다.

‘까놓고 말해서, 지금 자이언츠 타선에는 날 상대로 효과적인 타격을 할 수 있는 타자는 없지.’

좌타자만이 아니라, 타선 전체가 솔직히 그리 강하지는 못하지. 대부분은 파워풀하지 못하니까.

그래서 종종 팬들이나 전문가들에게 시대착오적인 스몰볼 야구를 한다는 비판도 받는 거고.

거기다가 핵심 중의 핵심인 에반 롱고리아까지 부상으로 나가면서, 안 그래도 가벼운 타선의 무게감이 더 떨어졌지.

그런 힘 약한 타선과 내 극단적인 장타 억제 능력과 어우러지면, 그 결과야 더 말할 것도 없고.

‘그나마 맥커친 정도?’

굳이 따진다면, 올해 자이언츠로 새롭게 합류한 맥커친 정도가 가장 파워풀하지만.

사실 맥커친도 다재다능한 5툴 플레이어이긴 한데, 거포라고 보기는 애매하지. 매년 30홈런씩 날릴 정도는 아니니까.

거기다가 자이언츠로 이적하면서, 홈구장 적응에 난항을 겪은 건지, 올해는 기대보다 저조한 모습이고.

“오늘 폼도 좋은데, 9회까지는 어떻게 갈 거야?”

“9회까지 갈지 안 갈지, 니가 어떻게 알아?”

“에이, 그 정도야 이젠 척하면 척이지. 딱 봐도 끝까지 던지겠구만. 못해도 완봉은 하겠네.”

브루스도 그걸 아는 건지, 평소보다도 긴장감이 덜 해 보였고 말이다.

아마도 내 폼이 좋다는 걸 이미 확인했기에, 더욱더 자신감이 생긴 거겠지.

“괜히 시작하기도 전부터 설레발치지 말고, 적당히 잘 조지면서 가보자. 맥커친 잘 관찰하고, 브랜든 벨트도 주의 깊게 봐.”

그렇게 브루스를 내려 보낸 뒤, 홀로 남은 마운드 위에서 가볍게 숨을 골랐다.

불에 산소를 공급하듯, 너무 빠르게 타들어가지 않도록 적당히 느슨하기 풀어뒀던 감각을 확 끌어올리기 위해서.

그러자 좋은 날답게, 주변의 소리가 빠르게 잦아들었다. 못해도 4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내지르는 소음이 그저 먹먹하게 흩어졌고.

괜히 흘끔거리면서, 관중석을 채운 팬들을 살펴보던 눈동자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모든 준비를 마친 채 홈 플레이트로 입성하는 타자에게로 집중됐다.

‘체이스 다노.’

1번타자, 체이스 다노.

우타자이자, 내야 유틸리티 자원으로, AAAA급 선수다. 아니, 그냥 트리플A급이라고 봐야 하나?

3루수 에반 롱고리아가 부상으로 사라지면서, 그의 자리를 채워 3루수로 출장 중인데. 역시나 그리 파워풀한 타입은 아니지.

‘눈빛 한번 뜨겁네.’

그는 날 꽤나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쳐다봤다. 롱고리아의 부상으로 기회를 부여받은 김에, 날 때려잡고 눈도장까지 콱 찍어서, 이참에 로스터에다 뿌리를 박고 싶은 것 같은데.

“스트라이크!”

그런 생각을 가진 놈들이 한 둘이여야지.

나 정도쯤 입지를 가지면, 목 따겠다고 달려드는 놈들이 엄청나게 많은데, 환영 인사를 담아, 초구로 몸쪽 포심 패스트볼을 던져주면 다들 반응이 비슷하다.

‘먼지 들어가겠네.’

저렇게 두 눈이 동그래지지.

솔직하게 말해서, 듣거나, 영상으로 보는 정도로는 체감이 안 되거든.

분명 머리로는 잘한다는 걸 이해하는데, 한편으로는 충분히 가능하다 싶지.

그래봤자 90마일도 안 나오잖아? 패스트볼 무브먼트가 좋아봤자, 얼마나 좋겠어?

하지만 딱 하나 보고 나면, 죄다 저런 표정을 지었다. 기분 좋은 상상이, 그저 망상에 불과했다는 걸 깨닫게 되니까.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거지.

나한테 박살 나는 건.

그렇게 머리가 멍해졌을 때.

“스트라이크!”

서클 체인지업까지 기깔나게 하나 던져주면, 그야말로 새하얗게 물들거든.

사전에 아무리 분석했다고 해도, 아무리 내 피칭을 돌려봤다고 해도, 아무리 단단히 준비했다고 해도, 순간적으로 멍해지는 거지.

여기까지 오면 그다음은 딱히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냥 아무거나 골라잡고, 대충 하나 던지면···

“스트라이크 아웃!”

어차피 예상 못하거든. 머릿속에 저장한 내용들 죄다 까맣게 잊혀졌을 테니까.

수십, 수백, 수천 시간이 담긴 전력분석팀의 보고서가 도로 아미타불이 된 셈이지.

높은 코스의 하이 패스트볼, 타자의 배트가 손쉽게 딸려 나왔다. 삼구삼진, 기분 좋은 스타트구만.

‘브랜든 벨트.’

그다음으로 올라온 2번타자, 브랜든 벨트는 앞선 타자보다는 조금 더 신중해 보였다.

딱히 욕심도 없어 보이고.

좌타자이고, 그나마 현재 자이언츠 타선에서 준수한 장타력을 가진 소수의 타자 중 하나인데.

솔직히 그렇게까지 대단한 수준은 아니지. 포텐션을 충분한 것 같지만, 아직 만개하지는 못했거든.

‘그래도 조심해야지. 선구안이 좋으니까.’

그러니 까다로운 점이 있다면, 준수한 선구안이겠지. 아마 그거 덕분에 올해 신기록도 세웠을 걸?

한 타석 최다 투구수로 말이야. 21구까지 승부를 이어갔다고 하는데···

‘투수 입장에선 재앙이지.’

거진 한 이닝 동안 던져야 될 투구수를 고작 타자 하나 잡는데 소모했으니, 경기 운영이 죄다 어그러지는 거지.

이름은 잘 기억 안 나지만, 그토록 서글픈 일을 당한 투수를 대신해서···

“파울!”

내가 대신 죗값을 받아내야겠네.

니가 무슨 권리로 그러냐고?

그런 거 없다. 오늘만큼 공 좋으면 내 마음대로 해도 돼. 폭군이 언제 권리 따지는 거 봤어? 그냥 자기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이번에도 몸쪽 패스트볼.

묵직한 구위에 밀려, 먹힌 타구가 나왔다. 1루 방향 관중석으로 날아갔지. 누군가 안 맞아서 다행이네.

초구에서 오늘 내 컨디션을 파악한 건지, 타자의 경계심이 더욱더 두터워졌다.

만만치 않다는 거야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지만, 예상한 것 이상이라는 걸 깨달았겠지.

“스트라이크!”

깨닫는다고 해도 딱히 달라지는 건 없지만.

2구는 바깥쪽, 가뿐하게 존으로 들어가는 포심 패스트볼에 타자는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나갔다고 생각한 건지, 살짝 불만스러운 것 같기도 한데, 충분히 들어갔어, 이 친구야.

크로스파이어처럼 들어갔기에, 조금 더 먼 것처럼 보이는 거지.

‘빠르게 잡자, 괜히 감 잡으면 지랄할라.’

고통받은 투수의 이야기가 떠올라서 그런지, 난 브랜든 벨트와 긴 승부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

괜히 여지를 남겼다가 그때처럼 또 지랄해버리면, 아무리 오늘 폼이 좋다고 해도 귀찮아지거든.

‘과감하게 들어가야지, 적당히 커트하는 수준이 아니도록.’

가볍게 낸 사인.

잘 교육시킨 녀석이기에, 브루스는 두말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다시 몸쪽.

그것도 높게 날아든 코스에 타자는 배트를 휘둘렀다, 살짝 낮고, 조금 더 길게 뻗어서.

세 구 연달아 패스트볼을 던지지는 않을 테니, 아마도 너클 커브를 예측하고 휘두른 것 같은데.

“스트라이크 아웃!”

공은 그저 유유히 뻗을 뿐이었다. 포심 패스트볼 맞아. 87.6마일, 적당히 힘 빼고 던졌는데도 구속이 잘 찍히네.

다시금 삼구삼진.

조금씩 몸이 더 뜨거워졌다.

어쩌면 경기장의 공기도 살짝 더 달아오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이제 마지막 3번타자.

앤드류 맥커친.

앞서 언급했던 대로, 다방면으로 유능한 5툴 플레이어다.

다만 올해 자이언츠에서는, 파이리츠 때와 달리, 많이 아쉬운 모습을 보여줬지만.

‘그래도 선구안은 여전히 살아 있어, 컨택도 나쁘지는 않고.’

장점이 확실한 타자이니, 어느 정도는 긴장감을 가져야 하겠지만, 그 이상은 필요 없었다.

“파울!”

그 역시도 절대 내 공을 펜스 너머로 날려 보낼 수 없을 테니까.

조금은 오만한 감정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것을 굳게 믿었다. 내가 나를 믿어야지, 누굴 믿겠어? 그리고.

“스트라이크!”

이 정도면 충분히 믿을 만하잖아?

초구로 날아든 뜬금없는 쓰리핑거 체인지업에 빗맞은 파울을 날린 맥커친은 2구째 투심 패스트볼에 크게 헛스윙했다. 아슬아슬하게 안 닿았지.

오늘은 투심도 평소보다 더 좋네.

원래는 떨어지는 무브먼트가 좋아서 자주 땅볼을 만들어내는 구질인데, 오늘은 반대로 역회전이 강하게 걸리는구만.

아무래도 폼이 좋은 날이라서, 평소보다 더욱더 강력하게 채는 거겠지.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와서 물러설 수야 없지.’

그것으로 투 스트라이크.

한 구 빼는 것이 정석이고, 나도 자주 그러는 편이지만, 오늘은 오히려 한 발자국 더 나아가고 싶었다.

어쩌면 괜히 조급하게 피칭하는 걸 수도 있겠지만, 내 감을 믿어 봐야지.

마지막 3구.

타자는 이를 까득 씹으며 자세를 취했고, 나는 그에게 상큼한 미소와 함께 공을 던져줬다.

왼손을 떠나, 툭- 간결하게 내던져진 공이 홈 플레이트와 마운드 사이의 거리를 날아갔고.

맥커친은 내가 절대로 한발 빼지 않을 거라는 걸 예측한 듯 과감하게 휘둘렀지만.

“스트라잌~~~ 아웃!”

배트는 이번에도 허공을 갈랐다. 쓰리핑거 체인지업, 이것도 진짜 쏠쏠하게 써먹네.

다음에 마이너에 리무진 버스 선물하면서, 그 누구야, 그래 존 와스딘, 락하운즈 투수코치 존 와스딘에게도 안부 인사를 전해야겠어.

그 양반한테 배운 건데, 얘가 잡은 삼진이 상당하니까, 기 좀 살려 드려야지.

‘이것도 오랜만이네.’

그렇게 첫 이닝이 끝났다.

이번에도 삼구삼진이니.

1이닝 9구 3삼진이네. 흔히 무결점 이닝이라고 표현하지.

“YeeeeeeeeeeeeeeAH!”

“Whoaaaaaaaaaaaaa!”

“유우우우우우우! 써어억!”

관중석이 절반이 벌떡 일어났다, 어쩌면 그 이상까지도.

마운드의 앞으로 관중석이 쭉 펼쳐져 있었기에, 그들의 외침과 몸짓이 훤히 보이고 들렸다.

이걸로 확실하게 타올랐구만.

AT&T 파크도.

나도.

####

“스트라이크 아웃!”

“아하, 인터리그 때마다 매번 특유의 독특한 타격을 선보이며, 많은 기대를 샀던 Go인데, 오늘 경기 첫 타석은 삼진으로 물러납니다.”

“평소와 조금 달라진 모습이네요. 특이한 타격폼 대신, 정석적인 스윙을 했습니다.”

“아무래도 오늘 피칭이 평범하지 않으니, 그것에 집중하는 편이 더 이롭기에 나온 판단일 수도 있겠네요.”

2회 초.

조금 이르게 찾아온 고유석의 첫 번째 타석은 팬들의 기대와 달리, 무난하게 막을 내렸다.

투수답게, 평범한 헛스윙 세 번만 선보이며 삼진으로 물러났으니까. 타격폼 역시 기대를 샀던 삼단분리가 아니라, 조금은 재미없는(?) 일반적인 풀히트였고.

그렇게 조금은 차분하게 첫 번째 타석이 지나갔지만, 반대로 피칭에서 한번 타오르기 시작한 불씨는 쉽게 꺼지지 않았다.

주변의 모든 것들을 잡아먹으며, 점점 더 커지기만 할 뿐, 절대로 잦아드는 법이 없지.

그렇기에 전문적인 훈련을 거친 소방관들이, 각종 장비를 이용해 화재를 진압하는 것이지만.

“아웃!”

애석하게도 오늘 자이언츠의 소방관들은 그다지 능숙하지는 못했다.

고유석의 삼진 이후, 그래도 애슬레틱스가 선취득점을 올려내며 2회 초가 종료되고 이어진 2회 말.

선두타자로 나온 버스터 포지가 내야 높이 떠오른 플라이볼을 쳐내며, 간신히 연속 삼진의 맥을 끊었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그 이상은 없었다.

곧이어 브랜든 크로포드가 다시금 헛스윙으로 물러나며, 네 번째 삼진을 올렸으니까.

“전반기 마지막 등판을 맞이한 Go인데, 오늘 폼이 정말 좋네요. 포심 패스트볼 대부분이 87마일 이상으로 형성됐습니다. 올해 Go의 포심 패스트볼 평균 구속이 86.7마일인 걸 감안하면, 그보다 거의 1마일가량 빠르네요.”

“예, 회전수 역시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르게 측정되고 있고, 수직 무브먼트도 마찬가지입니다.”

타자들을 손쉽게 처리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폼 자체가 남다른 고유석이었기에. 중계진의 목소리가 조금 더 올라갔다.

워낙 주목받은 선수고, 주목받은 경기이기에, 전국적인 중계가 이어지고 있었는데, 그에 적합한 퍼포먼스가 이어지고 있었으니까.

“스트라이크 아웃!”

6번타자 고키스 에르난데스가 연이어 삼진을 당하면서, 2회 말 역시 삼자범퇴, 고작 11구 밖에 소모되지 않으며 이닝이 빠르게 끝났고.

본격적으로 인터벌이 빨라지지도 않았는데도, 순식간에 끝나버린 자이언츠의 공격은 조금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You Suck!

-You Suck!“

웅장하게 울리는 환호성.

과연 이것이 원정 경기인가 싶을 만큼, 경기장은 신기하리만치 열광적이었다.

물론 수많은 원정팬이 관중석을 제법 점유하고 있었기에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주황색도 적지는 않지. 그 환호성 중에서.’

주황색, 오렌지를 닮은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 중에서도 비슷한 환호성을 지르는 이가 적지 않았다.

심지어 겉으로는 자이언츠의 팬임을 어필하면서도, 고유석, 그와 그 팬들의 트레이드 마크와 같은 You Suck을 따라 외치는 이들도 있었고.

고작 2회가 이어졌을 뿐이지만, 자이언츠의 홈, AT&T파크는 놀랍도록 빨리, 그에게 동화되었다

“어쩌면, 자이언츠의 팬덤이 흔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기에 해설자는 공수교대가 이어지는 막간의 공백을 이용해, 조심스럽게나마 그런 의견을 표출했지만, 캐스터는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하, 예 그만큼 열광적이기는 합니다만,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네요. 비록 자이언츠가 최근 들어,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보여주고 있기는 합니다만, 마지막 월드시리즈 우승이 이제 고작 4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아직은 기우에 불과합니다.”

최근 애슬레틱스가 엄청난 약진을 선보이고, 특히나 고유석이라는 슈퍼스타를 앞세워 인기를 빨아먹으면서.

갑작스럽게 체급을 키워가는 것이야 유명한 일이고, 사무국에서도 좋게 바라보고 있기는 하지만.

설마 하니 고작 한 시즌, 잘 쳐줘야 한 시즌 반 정도 이슈를 끌고 있을 뿐인데.

지역 라이벌인 자이언츠의 팬덤이 흔들릴 정도인지는 조금 의문스러웠으니까. 당장 그리 멀지 않은 시간 전에 우승한 팀이기도 하고.

그러니, 아무리 애슬레틱스와 그들의 히어로가 잘 나간다고 해도, 아직은 멀었다는 평이 대부분이나.

‘오늘로서 명백히 드러나겠지.’

해설자는 두 눈으로 확인한 바를 믿었다. 경기장에 직접 찾아올 저도로 야구에 관심이 깊은 이들의 행동이니까.

“아웃!”

3회 초, 제프 사마자가 계속해서 주자를 허용하며 위기가 펼쳐지기도 했지만, 다행히 실점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주자 2,3루의 위기를 무사히 넘겨낸 자이언츠! 흔히 위기 뒤의 기회라고 하죠?”

“예, 수비에서 단결된 모습을 보여줬으니, 공격 역시 기대해야 하겠습니다. 비록 공격이 하위타순으로 이어지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가능성은 있죠.”

그렇기에 위기 뒤의 기회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고, 팬들도 그걸 기대하는 건지, 멋진 수비와 더불어 다가올 공격에 대해 기대감을 표출했지만.

진실된 마음으로는 자이언츠 팬들도, 중계진도 그리 가능성을 높게 보지는 않았다.

“스트라이크 아웃! Go! 7번타자 스티븐 더거에게 루킹삼진을 뽑아냅니다!”

그런 의례적인 말이 이뤄지기엔, 조금 심하다 싶을 정도로 좋은 공이 날아들었으니까.

3회 말, 7번타자 스티븐 더거가 너클 커브를 가만히 지켜보면서 루킹삼진으로 물러났다.

위기 뒤의 찬스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손쉽게 삼진이 올라가며, 방금 전 수비에서의 좋았던 기운이 탁 풀린 셈이지만.

-You Suck!

환호성은 여전했다.

아니, 조금 더 커졌다.

명백히 더 늘어났지.

‘역시, 흔들리고 있어.’

그러한 모습을 보며, 해설자는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졌다.

사실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비록 같은 지역 라이벌팀이라고 하나. 팬들 사이에 교집합도 적지 않았으니까.

서로 리그도 다르고, 인터리그를 제외하면 그리 자주 만나지도 않기에, 생각보다 적개심이 덜하지.

자이언츠를 응원하는 동시에 애슬레틱스를 응원하는 사람들도 있고.

특히나 오클랜드와 샌프란시스코, 두 도시 이외의 인근 지역일수록 그런 라이트한 팬심이 더 흔했다.

‘물론 지금까지는 아무리 가볍다고 해도, 자이언츠로 더 무게감이 쏠렸지만···’

이젠 좀 달라지고 있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오늘의 피칭이, 어쩌면 자이언츠의 옷을 입고 찾아온 이들에게도 가슴에 꽂힌 것 같았으니까.

다시금 삼진아웃.

연이어 올라간 삼진에, 열기는 조금 더 올라갔다.

중간을 차지했던 팬층이, 움직이기 시작한 거다. 애슬레틱스를 향해서, 정확하게는···

“스트라이크 아웃!”

고유석을 향해서.

“KKK! 다시금 세 타자 연속 삼진을 잡아내는 Go! 오늘, 극강의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지막, 투수 타석이었기에, 삼진 두 개가 올라간 시점부터 어쩌면 이미 예견됐던 장면이 펼쳐졌다.

제프 사마자가 그대로 삼진으로 물러나며, 1회 말에 이어서 다시금 KKK.

비록 12구를 소모했기에, 1회 말처럼 무결점 이닝은 아니었지만···

-You Suck! You Suck!

-Hell Yeeeeeeeeah!

“압도적인 피칭에 AT&T 파크가 환호성으로 물듭니다! 베이 브릿지가! Go의 이름으로 타오릅니다!”

어웨이라는 글자를 홈으로 바꿔놓기에는 충분했다.

3이닝 8탈삼진.

충격적인 퍼포먼스가 이어지며 경기의 초반이 지워졌을 때, AT&T 파크는 더 이상 적지의 한복판이 아니었다.

경기가 시작하기도 전부터 요동쳤던 베이 브릿지의 민심이 애슬레틱스로, 고유석에게로 기울기 시작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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