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3회 초. 오늘 내 세 번째 이닝이 시작될 때, 점수는 아직까지 0대0의 동점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직 경기 초반이고, 서로 한 타순도 안 돌았으니까, 어쩔 수 없지.
‘자신감에서 차이가 나니까, 딱히 걱정할 필요도 없고.’
다만 양쪽 다 무득점이라곤 해도, 분위기는 판이하게 달랐다.
“자자~ 이번 이닝도 잠깐 나갔다가 오자.”
“Suck이 삼진 세 개 잡을 거니까, 그냥 서 있기만 해.”
“나 오늘 선블록 안 발라서, 햇빛 많이 받으면 안 되니까, 기왕이면 빨리 끝내줘.”
다시금 수비에 나서며, 조금 과할 정도로 여유가 가득한 우리와 달리, 공격에 나서는 파드리스 타자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는 않았으니까.
앞선 2회 초에서도 삼진 하나와 범타 두 개로, 삼자범퇴로 막혔거든.
7-8-9번으로 타순이 이어지는데. 헬멧 쓰고 배트를 쥔 타자 세 명 다, 한숨이 가득했지.
그도 그럴 것이, 저쪽도 이미 알아차렸을 테니까. 고작 2이닝을 상대한 것에 불과하지만, 누누이 말했듯 메이저리거쯤 되면 눈치가 빠르거든.
“스트라이크 아웃!”
그러니 오늘 내가 그저 그런 마음 상태나, 목표를 가지고서 마운드에 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아챘을 거다.
아예 파드리스를 완벽하게 KO시킬 각오로 공을 던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야.
7번타자, 호세 피렐라가 손쉽게 삼진아웃으로 물러나며, 그런 내 의지를 다시금 확인시켜줬다.
패스트볼을 제법 잘 치고, 존 밖으로 나간 공도 잘 건드리는 배드볼 히터 타입인데. 선구안이 좋지 않아, 변화구에 쥐약이지.
나는 그런 변화구가 넘쳐나는 투수이니, 아주 극상성이라고 할 수 있고.
역시나 4구째 바닥을 긁듯이 떨어지는 서클 체인지업 V1에 속아, 헛스윙이 작렬했다.
“You Suck!”
홈팬들 역시, 오늘 내 피칭이 길어지리라고 얼추 예상한 듯, 전보다는 환호성이 조금 작아졌다.
길게길게 소리치려면, 내가 완급조절하듯, 그들도 성대를 적절하게 조절해야 할 테니까.
목소리가 작아진 대신, 얼굴에 미소가 더욱더 만개했지만 말이다.
‘프레디 갈비스.’
그다음 8번타자 프레디 갈비스. 올해로 빅리그 7년차에 돌입하여, 베테랑에 접어든 선수인데.
유격수인데도 강철 같은 체력을 자랑하며, 작년 필리스 소속으로 전 경기를 출장하는 위업을 세웠었지.
재작년에는 20홈런 쳤었고, 작년에도 12홈런을 기록했으니, 최소한의 파워는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다만 올해는 전체적으로 타격이 좀 떨어진 듯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좌투수에겐 강하지.’
스위치히터라, 좌투수를 상대할 때는 우타석에 들어가는 타자인데, 성적은 좋다.
비교적 좌완투수가 적다 보니, 표본에서 차이가 나긴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훨씬 우월하지.
그래서인지 나를 상대로도 당연하다는 듯이 우타석에 들어와, 눈을 부라렸는데. 그래도 이쪽은 자신감이 당당하구만.
좌투수를 상대로는 얼마든지 자신이 있다는 거지. 어쩌면 저런 마음가짐 덕분에 더욱더 상대 성적이 좋을 거지도 모르고.
이렇듯 하위타선에서 의외의 복병이 될 가능성이 있는 타자이기는 하나.
‘재작년부터 선구안이 떨어지면서, 삼진도 많이 늘어났지.’
사실 그렇게까지 까다롭진 않다. 이쪽도 선구안이 별로거든. 파워툴을 늘리면서, 자연스럽게 삼진이 많아졌지.
그 늘린 파워 역시 솔직히 내 기준으로는 그렇게까지 위협적인 정도는 아니고.
그러고 보면, 파드리스 타자들은 파워도 떨어지지만, 대부분 선구안도 떨어지네.
어쩌면 그렇기에 약팀인 걸 수도 있고. 단점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니까.
“스트라이크!”
초구, 바깥쪽으로 아슬아슬하게 박힌 서클 체인지업에 타자는 가만히 쳐다만 봤다.
적당히 골라보려는 것 같은데, 배트가 벌써부터 움찔움찔거리시는구만.
“아웃!”
근질근질거리는 것이 눈에 훤히 보여서, 몸쪽으로 대놓고 하나를 찔러주니, 옳다구나! 하는 표정으로, 행복하게 배트를 휘둘렀지만.
순간적으로 더욱더 안쪽을 파고드는 커터의 무브먼트에 타구는 그저 내야 높이 떠올랐다.
2루수, 제드 라우리가 가만히 서서 잡는 것으로 투아웃. 2구만에 아웃카운트가 하나 더 올라갔다.
이러니 내가 올해 투구수가 적은 편이지. 죄다 빨리빨리 아웃돼주니까.
‘오늘도 열심히 도와주네.’
저런 고마운 사람들이 더욱더 많아져야, 전 경기 완봉의 위업을 세울 수 있을 텐데 말이야.
하지만 그건 너무 먼 미래겠지. 어쩌면 영원토록 오지 않을 이상향일 수도 있고.
설사 진짜로 그렇게 된다고 해도, 대니얼이나 스콧 에머슨이 기를 쓰고 말릴 테니까.
‘어디 보자, 마지막은 포수님이시구만.’
그다음으로 올라온 건 9번타자는 오스틴 헤지스. 주전 포수님이시다.
포수놈을 잘못 말한 거 아니냐고? 아니, 저분은 님이시다.
작년 파드리스의 주전 포수로서 자리 잡아, 아주 훌륭한 수비력을 보여준 선수거든.
리그 2위를 자랑하는 프레이밍에, 블로킹도 잘하고, 도루저지율도 높다.
리그 정상급 수비형 포수인데, 투수로서 저런 포수는 기꺼이 님이라고 지칭할 만하지.
나라고 마냥 포수를 무시하는 게 아니야, 좋은 포수는 충분히 인정하고, 대우해줄 거라고.
“스트라이크!”
다만 ‘수비형’이라는 단어에 걸맞게, 빠따는 수준이하지만.
애초에 타격도 잘했으면, 수비형 포수가 아니라, 그냥 최고, 완전체, 완벽한, 정상급 같은 단어가 붙겠지.
“파울!”
작년 18개의 홈런을 날리며, 그럭저럭 나쁘지는 않은 파워를 보여줬고, 올해는 그보다도 더 발전한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솔직히 여전히 수비 빼면 시체다. 타격은 수준이하보다 못하지.
그런데도 주전이라는 것 자체가, 포수에게 수비력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하고.
어쨌든 순식간에 투 스트라이크. 터무니없는 코스를 건드리며, 스스로 범타를 자처하기도 했는데, 아슬아슬하게 파울라인을 넘어갔다.
앞선 타자와 마찬가지로 2구만에 잡지 못한 것은 조금 아쉽지만, 오히려 좋아.
“스트라이~~~크 아웃!”
대신 삼진으로 잡을 수 있으니까. 과감하게, 몸쪽으로 높이 던진 너클 커브에 타자의 배트가 심하게 요동쳤다.
거의 빈볼 같은 코스였으니, 순간적으로 식겁한 거겠지. 그대로 헛스윙이 되면서 삼구삼진.
“You Suck!”
다시금 유썩이 흐르며, 3회 초가 막을 내렸고, 그렇게 한 타순이 돌았을 때 나온 결론은 처음과 동일했다.
목표는 9회.
결과는 완봉.
타자는 척결.
언제나 이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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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프!”
“아아아···”
“왜 그렇게 송구가 늦어!”
“X발 퍼펙트 돌려내!”
“우우우우우!”
애석하게도 퍼펙트가 계속 이어지지는 않았다. 파워는 심각하게 부족해도, 타격감은 좋다 싶더니.
1번타자 트래비스 잔코스키가 내야안타를 기록하며, 깔끔하게 1루 베이스를 탈취했으니까. 듣던 대로 발이 빠르긴 하네.
팬들은 마커스에게 송구가 왜 그리 늦었냐면서 화를 내기도 했지만, 솔직히 유격수가 무슨 잘못이야. 그냥 쟤가 빨랐을 뿐이지.
“스트라이크 아웃!”
그렇게 오늘의 첫 피안타가 나오기는 했지만, 그 이상 위기가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후 나머지 후속타자들이 삼진 하나와 범타 두 개로 나란히 처리되면서, 4회 초도 금방 막을 내렸으니까.
“쓰읍, 오늘은 퍼펙트할 것 같았는데··· 아쉽네. Suck 너한테 또 롤렉스 하나 받나 했더니.”
“넌 양심도 없냐? 솔직히 그만큼 받았으면, 한 번쯤은 마다할 줄도 알아라.”
분노한 팬들과 달리, 나는 어차피 퍼펙트는 바라지도 않았기에, 별생각 없었지만.
브루스는 이번에도 롤렉스가 탐이 났던 건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어째 얘가 나보다 한 술 더 뜨네.
그리고 너한테 사다 바친 롤렉스가 몇 갠데, 또또 롤렉스 타령이야? 누가 보면 아주 맡겨놓은 줄 알겠어?
그 모습이 참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 소리했지만. 브루스는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공짜로 주는 걸 왜 마다해? 누가 주는 선물은 무조건 감사히 받으라고 했어.”
“어떤 놈이 그딴 소릴 해? 그거 참 염치없는 놈이네.”
“우리 아빠가 그랬어.”
“합리적인 판단 하에 실리를 취할 줄 알고, 다른 이의 선의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좋은 아버님을 뒀구나. 너도 항상 보고 배워라.”
“보고 배워야지, 아빠는 언제나 내 인생의 지표니까.”
제기랄, 가불기를 쓰다니.
아빠는 인정이지. 네가 이겼다. 그치만 너의 그 말싸움 승리로 인해 내 기분이 팍 상했으니, 그 대가도 달게 받아라.
“Suck 너 왠지 안 좋은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그럴 리가, 기분 좋게 경기가 이어지고 있는데 내가 왜 그러겠어? 그냥 타자들을 어떻게 더 확실하고, 강력하게 잡을지 생각하는 거지.”
“타자가 아니라 나겠지.”
눈치는 여전히 빠르군.
그렇게 덕아웃으로 돌아온 뒤, 나는 잽싸게 간식거리를 입안에 욱여넣었다.
안타 맞았다고 화가 나서 갑자기 폭식하는 건 아니고, 원래 이 정도는 보충해줘야 돼.
딱 보면 알겠지만, 피칭에는 많은 양의 에너지가 소모되거든. 아무래도 몸 전체를 사용하고, 모든 근육을 이용해서 던지다 보니, 공을 하나 던질 때마다 훅훅 빠지지.
‘이젠 슬슬 밤인데도 좀 덥네.’
특히나 여름이 시작되고, 햇빛이 쨍쨍하면, 그거야 말로 진짜 죽을 맛이고.
이제 7월에 접어들었기에, 슬슬 좀 더워지고 있는데, 그렇기에 경기 중간중간 수분이든, 칼로리든, 충분히 보충하는 게 필수지.
오늘은 그나마 저녁 6시 무렵부터 시작했기에, 그렇게까지 덥지는 않지만, 그래도 확실히 온도가 올라가긴 했어.
거기다 오늘은 완봉까지 갈 생각이고, 폼이 좋아서 몸 안에 힘이 제대로 나오고 있으니.
더욱더 세심하게 조절해야겠지, 자칫 탈수나, 탈진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Suck 네 덕분에 간식이 남아도네, 남아돌아.‘
“슬슬 좀 질리지 않아? 맨날 같은 것만 먹으니까.”
“팔자 좋네, 공짜로 먹는 건데 참고 드슈.”
“Suck, 다음 스폰서는 킷캣 어떠냐? 난 그게 맛있더라.”
“오! 그럼 코카콜라도. Suck 너라면 가능하지 않아?”
“지랄하고 자빠졌네.”
다행히 우리 덕아웃에는 그렇게 영양과 수분을 보충해줄 간식거리가 넘쳐 났다. 다 내 덕분이지.
내가 작년에 스폰서 계약을 왕창 해버리면서, 여전히 무더기 공급받고 있는 에너지바나 음료수가 아주 온 사방에 굴러다녔거든.
‘진짜 더럽게 많이 받기는 하네. 다른 것도 아니고, 운동하는 장정 수십 명이 먹어도 끝이 안 보이냐.’
너무 풍족해서 그런지, 자주 먹는 간식에 질린 건지 동료들은 슬슬 물린다면서 투덜거리기도 했지만.
다들 배가 불렀구만, 개구리 올챙일적 모른다더니, 아주 배때지에 기름이 찼어.
마이너에선 아몬드 한 봉지 가지고 서른 명이 나눠서 먹은게 엊그제인데, 메이저의 풍족함에 감사할 줄을 알아야지!
그리고 아직 계약기간도 안 끝났으니까, 마지막까지 착실하게, 더욱더 열심히 먹어야지. 카메라에 상표가 보이도록 포즈도 잘 잡아서.
‘그러고 보니, 슬슬 광고 촬영도 해야 하는데.’
참고로 올해도 결국 이런 나락의 굴레에 떨어지기로 했다. 자본에 굴복했지.
그, 왜, 저번에 얘기 나왔던 거 있잖아, 올스타전 중간에 나가는 광고. 결국 찍기로 했지. 계약서도 체결했고.
오늘 경기가 끝난 뒤, 휴식일 동안 촬영하기로 결정됐다. 약속대로 그쪽에서 오클랜드로 오기로 했고.
결국 거절하려고 했지만, 끝까지 붙들고, 시간과 장소, 뭐든지 맞춰주겠다는 절절한 외침에 결국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공 세 개 던져주고 백만 달려면, 남는 장사긴 하지.’
사실 가장 큰 이유는 이거고.
그냥 잠깐 스튜디오에 들려서, 공 세 개 던지면 백만 달러를 준다잖아. 거기다가 보너스로 삼십만 달러가 추가적으로 걸려 있고. 근데 그걸 왜 거절해.
얼마나 좋아, 공 세 개 던진 뒤에, 사실 진짜 던지는 것도 시늉만 조금 한 뒤에 폼 잡고 있으면 끝인데.
공 하나당 33만 달러인 셈인데. 월터 존스 사인볼도 그 정도는 안 할 거야. 아니지, 미국 놈들은 수집 같은 거에 진심이니까, 또 모를지도.
어쨌든 여전히 리그 최저 연봉받으면서, 실전 피칭하는 거랑 비교하면 천지차이 수준이지.
“끝났네, 나가자.”
“이번 이닝도 잘해보자.”
물론 미래의 가치는 오늘 던지는 공 하나가 훨씬 더 클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결정적으로 스튜디오에서 폼 잡고 던지는 것보단, 진짜 마운드 위에서 던지는 게 훨씬 즐겁지.
특히나 경기가 내 계획처럼, 내가 바라던 것처럼 잘 이어지고 있다면 더욱더 행복하고.
“자자, 우리 야수 여러분, 이번 이닝도 다들 열심히 해봅시다. 에이스가 이만큼 잘 던져도, 득점 지원 안 해주는 똥찌끄레기들은, 수비라도 잘해야지, 안 그렇습니까?”
“또 시작됐네.”
“퍼펙트 깨졌잖아, 괜히 우리한테 투덜거리는 거야.”
“Suck 너도 타격이 얼마나 힘든지 이번에 잘 배워놓고 왜 그래? 너도 우리 마음 알잖아? 점수 하나 내는 게 얼마나 힘든지.”
“난 투수인데, 내가 그딴 걸 어떻게 알아?”
5회 초.
이제 경기의 중반에 접어드는데도 여전히 점수는 0대0이다.
파드리스의 0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다른 것도 아니고, 상대가 나잖아. 이게 디폴트지.
이렇게 말하면 굉장히 재수 없겠지만, 어쩔 수 없어. 받아들여. 그게 팩트니까.
그치만 우리는 좀 그렇지.
물론 파드리스 선발투수, 클레이튼 리처드도 굉장히 잘하고 있기는 하다.
08년에 데뷔해, 무난한 커리어를 보내는 중인 투수인데, 오늘은 같은 지구의 또다른 클레이튼인, 커쇼와 비슷한 수준으로 잘하고 있지. 아니, 이건 좀 오버인가?
아무튼 그에게 꽁꽁 막힌 우리 타자들도, 팬들에게 욕을 진탕 먹어서 그런가, 슬슬 표정이 어두워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괜찮았다.
‘저쪽은 거의 죽기 일보직전이니까.’
여전히 파드리스가 더 어둡거든. 다만 투수가 든든하게 버텨주고 있어서 그런지, 조금씩 기세를 회복하려는 것 같기도 하지만.
“파울!”
그걸 적절하게 눌러주는 것이 내 역할이다. 5번타자, 크리스티안 비야누에바.
오늘 출장한 파드리스 타자들 중에선, 에릭 호스머 다음으로 잘 치는 타자인데, 오늘은
애초에 잘 친다는 말의 기준이 파드리스니까. 그래도 이쪽은 다른 타자들과 달리 파워가 제법 괜찮아 보이고, 선구안도 괜찮긴 한데. 대신 컨택이 좀 그렇지.
지난 타석에선 내야뜬공으로 물러났었는데, 이번에는 한방 제대로 노려볼 생각인지, 눈빛이 또렷했지만.
“파울!”
예리한 눈동자가 갑자기 정타를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똑바로 공을 쳐다본다고 해서, 스윗스팟을 때리는 것도 아니고.
2구 역시도 파울.
그래도 제법 잘 당긴 스윙에 묵직하게 날아가기는 했지만, 곧 파울라인을 넘은 뒤 힘을 잃고 떨어졌다.
오늘 좌익수로 나온 채드 핀더가 타구를 쫓아갔지만, 결국 캐치하지는 못했네.
타자가 앞서서 두 번의 턴을 소모했으니, 이젠 내 차례지. 패스트볼 두 개. 거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구만.
타자의 영점이 확실하게 속구에 잡혀 있다면, 던질 거야 뻔하지.
“스트라이크 아웃!”
오프스피드지.
다만 서클 체인지업으로 던져서, 무브먼트를 확실하게 줬다.
쓰리핑거를 던질까, 생각하기도 했는데, 혹시나 그걸 유도한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아니나 다를까, 타이밍이 제법 체인지업에 맞춰져 있기는 했지만, 공은 유유히 역회전하며 배트에게서 멀어졌다.
헛스윙 삼구삼진.
새로운 이닝의 스타트를 끊기에 가장 알맞은 방법이지.
‘스팽앵버그, 오늘은 그래도 타격감이 적당한 것 같던데.’
다음타자 코리 스팽앵버그는 1번타자, 트래비스와 마찬가지로 오늘 타격감이 괜찮아 보이는 타자 중 한 명이다.
마찬가지로 범타를 쳤는데, 라인드라이브였거든.
‘타격감도 괜찮고, 오늘 배트스피드도 좋아 보이니, 굳이 삼진을 유도할 필요는 없지.’
괜히 삼진 잡겠다고, 이리저리 변화구를 던졌다가, 그게 잘 얻어맞아 정타가 나오면, 자칫 장타로 이어질 수도 있으니까. 그럴 바엔 차라리···
“볼.”
“파울!
“스트라이크!”
“파울!”
“아웃!”
패스트볼 중심으로 구위에 집중해서, 확실하게 찍어 누르는 게 낫지.
5구까지 승부를 끌고 가며, 끈질기게 저항한 스팽앵버그였지만, 5구째 투심 패스트볼이 빗맞으며, 우익수 파울 플라이로 물러났다.
“아웃!”
뒤이어 7번타자, 호세 피렐라가 범타로 물러나며, 이전 이닝에 아쉽게 끊어졌던 삼자범퇴가 다시금 이뤄졌다.
1루를 향해 몇 발자국도 채 떼기 전에 아웃처리된 호세 피렐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허탈한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왠지 좀 원망스러워 보이기도 했지. 그중에서 원망은 나를 향한 것일 테고.
호세 피렐라뿐만이 아니라, 지금 파드리스 타자들이 대체로 저런 모습이었다.
자기들 투수도 잘 버티고 있으니, 그게 이어지는 동안 어떻게든 성과를 내고 싶은데, 정작 본인들이 훨씬 더 처참하게 틀어 막히고 있으니까, 굉장히 답답하겠지.
허나 그런 파드리스 타자들에겐 애석하게도···
“다음 이닝부터 시동 걸자.”
“4이닝이나 달리려고?”
“푹 쉬었잖아? 쉰 만큼 일해야지. 올해는 4이닝 동안 가속해도 거뜬한 거 알잖아?”
“그렇긴 한데, 혹시 나한테 재교육이니 뭐니 하려고 그러는 건 아니지? 일부러 빡세게 해서 말 잘 듣게 하려고.”
“그럴 리가. 난 피칭에 사심을 담지 않는 사람이야.”
불행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브루스 너도 마찬가지고.
####
“스트~~~라이크 아웃!”
주심은 열광적인 홈팬들을 의식한 건지, 아니면 본인도 흥에 취한 건지는 몰라도.
대단히 흥겹게 콜을 했다.
그것은 아마도 오클랜드의 사람들을 즐겁게 해줬겠지만, 파드리스에겐 그저 듣기 싫은 노이로제 같은 말에 불과했다.
“You Suck!”
“샌디에이고 촌놈들아! 이게 X발 Suck이다!”
“운 좋은 줄 알아! 너네도 아메리칸 리그였으면, 레인저스나 애스트로스처럼 X됐을 테니까!”
그래, 이것도 참 듣기 싫고.
주심의 삼진콜에 맞춰, 웅장하게 울리는 You Suck챈트는 이젠, 메이저리그 내에서 제법 유명한 응원법 중 하나였고, 파드리스 선수나 팬들 사이에서도 제법 흥미롭게 보는 이들이 있었지만.
그 흥미로운 신종 응원은 막상 당하는 입장이 됐을 땐, 한여름 밤 귓가를 지나다니는 모기소리처럼, 그 무엇보다도 거슬리는 소음이 됐다.
“아웃!”
6회 초가 시작되면서부터 속도를 올렸던 투수는 7회 초가 끝났을 때도 여전히 기세를 잃지 않았다.
대단히 확신에 차 있었지.
점점 더 설 곳이 줄어드는 것만 같은 자신들과는 다르게.
생소한 모습은 아니다.
저 투수가 경기 중간부터 갑작스럽게 투구동작을 가속하고, 타자들을 더욱더 혹독하게 다루는 것이야 NL에서도 유명했으니까.
다만 파드리스 타자들은 그저 조금 억울했다. 왜 우리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까.
왜 하필? 왜 우리한테 이러지? 파드리스에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하물며 저 꼴 보기 싫은 홈팬들의 말처럼 우리가 AL, 같은 아메리칸 리그의 서부지구 경쟁팀도 아니고, 아예 리그조차 다른데?
“진짜 X같네.”
“Suck, Suck, 그놈의 Suck. 저쪽 리그 타자들이 아주 치를 떨더니, 이제 좀 이해가 돼.”
“쟤는 왜 저렇게 기를 쓰고 던지는 거야? X발 이미 사이 영이든 MVP는 확정된 새끼가, 대체 뭐가 아쉬워서?”
“체력관리도 안 하나? 월드시리즈 가겠다고 지랄 떨던데, 왜 저렇게 무식하게 던져?”
“혹시 누구 도발한 사람 있어? 진짜 좀 악의적인 수준인데, 인디언스 드론맨처럼 누가 SNS에 글이라도 올린 거 아니야?”
그 피칭이 너무나도 지독하고, 잔인해서, 혹시 우리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는가, 스스로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결국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더 힘이 쭉 빠질 수밖에 없었고, 어쩌면 환멸이 들기도 했고. 순식간에 쓸려나가는 동안, 그저 허탈함과 울분만이 차올랐으니까.
특히나 젊은 선수들일수록 그런 감정을 더욱더 짙게 느끼고는 했고.
잘 버텨줬던 클레이튼 리처드도 5회 말, 한 이닝 만에 6실점을 내주며 무너졌기에, 더는 의지할 곳도 없었기에, 칼바람 같은 피칭이, 더욱더 가혹하게 파드리스에게 박혔다.
“다른 팀들도 그랬겠지.”
“그냥 오늘은 우리 차례인 거야. 우리가 못한 게 아니라, 쟤가 이상한 거지. 다들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힘든 건 아는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자.”
허나 어렴풋이 실상을 알고 있는 몇몇 선수들, 베테랑들은 그저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잘 알았으니까.
마찬가지로 저 녀석에게 당했던, 어쩌면 오늘 파드리스보다 더욱더 끔찍한 짓을 당해버린 다른 팀들 역시 똑같은 말을 중얼거렸으리라는 것을.
왜 하필 우리한테 이러는 거야? 라고. 딱히 이유 같은 건 없었겠지.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이유 같은 건 없다. 누군가 잘못하거나, 찍혀서 그런 것도 아닐 거고. 오늘도 그저 파드리스, 자신들의 차례인 거겠지.
마치 그 누구도 피하거나, 막을 수 없는 죽음처럼, 자연재해 같은 것이 이번엔 그저 파드리스에게 손짓했을 뿐이다.
“스트라이크 아웃!”
그게 전부였다.
다시금 처음부터 삼진이 올라가며, 8회 초가 시작됐다.
“세이프!”
그나마 안타 하나가 더 터지며, 혹시나 하는 기대가 들기도 했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그 이상은 없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마지막 저항의 여지조차 남겨두지 않겠다는 듯, 더욱더 철저하게 뿌리를 뽑았으니까.
“아웃!”
8번타자 프레디 갈비스가 아웃으로 물러나며, 8회 초도 시작한지 몃 분이 채 되지 않은 채 막을 내렸고. 당연하게도 덕아웃으로 돌아간 투수는 아이싱하거나, 덕아웃에서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여름이라고 해도, 저녁쯤 시작해, 더욱더 시간이 흐르며, 조금은 서늘해진 공기에 맞춰, 점퍼의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려서 입었을 뿐.
오늘은 그저, 파드리스의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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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아직도 남아도네.’
내가 완봉이 많이 고프긴 했나 봐. 이제 9회인데도 여전히 힘이 넘치는 걸 보면 말이야.
마찬가지로 폼이 정말로 절정에 이르렀다는 뜻이기도 하고.
‘리바운드가 조금 걱정이긴 하지만, 중간에 푹 쉬는 시간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네.’
이렇게 가파르게 올라가다 보면, 누누이 말했듯이, 다시 내려갈 때의 계곡도 커지는 법이기에, 그것이 조금 걱정이긴 하지만.
그래도 중간에 올스타 브레이크가 끼여 있어서, 잠깐 재정비할 시간이 있을 테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지치진 않았지? 어깨는?”
“멀쩡합니다. 아픈 곳도 없고요. 그냥 좀 후끈하네요.”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설마, 이제 와서 막지는 않으시겠죠? 불펜에 페팃이 있다거나, 트라이넨이 있다거나.”
“이미 허락한 건데, 뱉은 말은 지켜야지. 그래야 네가 앞으로도 내 말을 잘 들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내 상태를 점검한 스콧 에머슨은 이내 걱정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또 갑자기 완봉을 막을까, 조금 긴장했는데, 다행히 날 노련하게 조련하는 법을 아시는군.
“무리하지 말고, 마지막까지 편하게, 조심해서 잘 마무리지어.”
그렇게 스콧 에머슨의 당부를 들은 뒤, 다시 그라운드로 나서자, 조용한 콜리시엄이 반겨줬다.
딱히 퍼펙트도 아니고, 노히터도 아니지만, 어쨌든 간만의 완봉이니, 팬들도 들뜬 거겠지.
반대로 파드리스는 우울해 보였고. 풀이 죽은 듯, 축 처진 어깨와 동태처럼 멍한 눈동자를 보니 왠지 좀 미안하네.
그러지 마, 그러니까 내가 뭔가 몹쓸 짓을 하는 것 같잖아.
“뭔가, 나쁜 놈이 된 기분이네.”
“너 나쁜놈 맞지 않아?”
“조용히 해. 다음번에도 고생하기 싫으면.”
왠지 입맛이 씁쓸해서 투덜거리니, 오늘 내 공을 받으면서 같이 끝까지 달리느라, 녹초가 된 브루스가 슬쩍 한마디를 거들었지만.
경기 후반부터 아주 호되게 고생한 만큼, 금방 진압됐다. 좋아, 재교육은 아주 잘 됐군.
‘그러고 보니, 저쪽 마이너에 재밌는 친구가 있던데.’
찝찝한 마음을 안고서, 오늘의 마지막이 될 마운드에 올랐을 때,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다.
팔팔하고, 남아돈다고 소리쳤지만, 나도 조금은 지치긴 했나 봐. 잡생각이 드는 걸 보면.
별건 아니고, 유망주 랭킹에서 독특한 친구를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한국 쪽 커뮤니티에서 봤었는데.
파드리스의 유망주 하나가 꽤나 재밌는 배경을 가지고 있었거든. 정확하게는 그 출신성분(?)과 가족관계(?), 그리고 이름이 흥미롭지.
‘페르난도 타티스 주니어였던가?’
페르난도 타티스 주니어.
뒤의 주니어를 제외하곤, 메이저리그 팬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름이다.
한국인인데 메이저리그를 좋아하는 편이라면 더더욱 그렇고.
그래, 메이저리그에서 불멸의 기록 중 하나로 꼽히는 한 이닝 한 타자 만루홈런 두 번의 주인공 말이야.
주니어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아들인데, 올해 베이스볼 아메리카에서 발표한 유망주 랭킹 전체 9위에 오른 녀석인 만큼, 제법 유명했다.
특히 빅리그 데뷔가 코앞이라서, 부자가 나란히 메이저리거가 되는 것이 결코 흔하거나, 쉬운 일이 아니기에, 더욱더 주목받고 있고. 한국에선 조금 다른 이유로 주목받는 것 같지만.
‘음, 거리낌 없이 조져도 되겠어.’
아무튼 그 이름을 떠올려 보니, 문득 찝찝함이 가셨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파드리스는 나쁜 놈들이다. 그러니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되겠어.
‘응당한 대가지.’
나도 어릴 때 그 경기를 봤던 기억이 나. 애초에 그 당시에는 무조건 중계를 해줬으니까.
그 어린 나이에도 충격과 공포를 느끼며, 한동안은 야구공조차 못 잡을 정도였지.
‘BA랭킹 9위면 무조건 데뷔할 텐데, 혹시나 나중에 만나면, 절대로 홈런은 안 맞아야지. 아마 한국에서 별의별 말이 다 나올 거야.’
그런 의미에서 파드리스에게 응당한 대가를 안겨줘도 될 것 같았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카디널스의 죄고, 아버지의 죄겠지만, 그 아들이 저기 있잖아.
올해 9월 확장 로스터로든, 아니면 내년이든, 혹은 그보다 조금 더 뒤든지 간에 무조건 데뷔할 녀석이고. 그러니 연대책임을 져야지.
“스트라이크 아웃!”
물론 그냥 명분 삼아서 찝찝한 마음을 덜어내는 용도에 불과하지만 말이야.
9번부터 시작한 9회 초.
훌륭한 포수님인 오스틴 헤지스는 다시금 삼진으로 물러나셨다.
오늘 아주 호되게 당했으니,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한동안은 더욱더 열심히 노력하겠구만.
앞으로도 계속 수비에만 전념해서, 파드리스 투수들이 행복해지도록 내가 도와준 셈이지
“아웃!”
그다음, 오늘 재빠른 두 다리로 파드리스의 첫 안타를 만들어냈던, 1번타자 트래비스 얀코우스키는, 오기가 생긴 건지 이를 꽉 깨문 채 우렁차게 스윙했지만.
부족한 힘에 그저 툭 떠오르는 정도로 그친 타구가 고이 포수의 글러브 안으로 들어가며, 타석에서 물러났고.
그리고 마지막, 2번타자 마누엘 마르고트. 미국 발음으로는 매뉴얼 마고.
그는 이미 모든 걸 달관한 것처럼 차분하게 배터박스에 올라왔다. 다 포기한 것 같구만.
“스트라이크!”
이미 백기를 든 상대에게 굳이 가혹행위를 할 필요는 없기에, 나도 굳이 시간을 끌지는 않았다.
“스트라이크!”
가뿐하게 투 스트라이크.
순식간에 날아든 포심 두 개에 카운트가 잡히자, 관중석은 당장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벌써부터 들썩거렸다.
그리고 마지막 3구.
앞선 1,2구와 비슷한, 몸쪽 코스로 날아든 공에 타자는 대뜸 스윙을 냈다.
내가 방심하길 유도한 건지, 아니면 정말로 포기했는데, 그냥 코스가 너무 좋아서 참지 못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줄 알았다.’
난 어차피 사람을 안 믿어.
나 하나만 믿고 사는 것도 힘들고, 그나마 포수인 브루스 정도를 믿어주는 것도 벅찬 일인데, 뭣하러 적까지 믿겠어?
유유히 떨어지는 너클 커브에 배트는 허공을 갈랐고, 그것으로···
“스트라이크 아웃!”
“Yeeeeeeeeeah!”
“Suuuuuck!”
“완봉이다 X발!”
완봉이 완성됐다.
아마도 92~3구 정도일 텐데.
무사사구 매덕스 게임이구만.
오늘은 코치에게 너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알아서 마음껏 던지라는 허락까지 받아냈는데도, 투구수를 아꼈네.
빡빡한 투수코치 말 듣느라, 나도 모르게 자린고비가 몸에 뱄구만. 리미트도 없겠다, 시원하게 한 120구쯤 던졌어야 하는 건데. 아니지, 그랬으면 또 태클을 걸고 나섰겠지.
‘이번이 오봉인가?’
내 기억이 맞다면, 오늘 경기가 이번 시즌 다섯 번째 완봉일 거다. 퍼펙트게임까지 포함해서.
전반기만에 오봉이라, 후반기가 조금 더 짧은 걸 감안해도, 이번 시즌은 잘하면 팔봉까지는 가능하겠네. 포스트시즌까지 합친다면, 십봉도 가능할 것 같고.
‘꿈은 크게 꿔야지, 포스트시즌 포함해서, 넉넉잡아서 한 십이봉까지 해보자고.’
코치나 대니얼 앞에서 이런 소리 했다간 기겁할 테니, 마음속으로만 목표로 세워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