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스트라이크 아웃!”
3회 말이 끝났을 때, 누적된 적립금은 2억 4천만 달러였다. 삼진이 네 개라는 뜻이지.
1회에 KKK를 잡아 놓고, 2,3회에 고작 한 개를 추가한 건데, 내가 갑자기 폼이 떨어지거나 한 건 아니고,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다.
“화이트삭스가 생각보다 더 맛이 갔네요.”
“그러게, 타구에 힘이 없네. 스윙도 쉽게 나오고.”
“아무래도 예상했던 것보다 충격이 더 큰 것 같아요.”
내 예상보다 화이트삭스가 더 맛이 갔더라고. 전날 더블헤더의 여운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했던 거겠지.
다들 적극적으로 타격하는 것 같기는 한데, 왠지 좀 스윙이 가벼워서, 하나 같이 비실비실한 범타만 나온다고 해야 하나?
억지로 막 치다가 자기 혼자서 아웃당하니까, 오히려 삼진 잡기가 힘드네. 이런 적은 또 처음이구만.
“아 X발, 죽겠다.”
“명색이 유격수라는 놈이 고작 땅볼 세 개 가지고 엄살은···”
“Suck 네가 더블헤더 뛰고 그다음 날에도 출전해보던가. 얼마나 죽을 맛인데.”
“난 투수라서 그럴 일 없어.”
그래서 그런지, 야수들, 특히나 땅볼을 잡아야 하는 내야수들이 고생하고 있지. 나도 수비에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고.
마커스 시미언은 고작 세 개 잡은 주제에 벌써부터 앓는 소리인데, 어허, 전날까지 카운트하면 쓰나 이 사람아.
새 경기, 새 마음 새 뜻으로 시작했는데, 오늘만 보고 생각해야지, 어딜 어제 일 가지고 징징거리고 있어?
악으로 깡으로 정신력으로 버텨서, 이겨낼 생각을 해야지, 맨날 그렇게 죽는소리하니까, 더 힘들게 느껴지는 거야.
그걸 알아야지!
징징거리는 마커스를 보니, 내 안의 꼰대가 용오름 쳤지만, 그냥 농담이고, 이러니까 나도 괜히 좀 미안하네.
‘다들 지친 것 같아서, 삼진 많이 잡아서 좀 쉬게 해주려고 했더니···’
내가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야. 야수 보기를 돌처럼 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더블헤더를 치른 사람에게 부담을 줄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라고.
그래서 마침 상대도 지쳤겠다, 삼진이나 왕창 잡아서, 좀 편하게 해주려고 했더니.
상대가 너무 지친 탓에 계획이 망가졌구만.
‘이러면 임기응변으로 가야지.’
손쉽게 당하고 있는데, 괜히 삼진이 욕심나서 억지로 던지다간, 오히려 탈이 날 거다.
미리 계획을 세웠더라도, 언제나 상황에 맞게 변주할 줄 알아야 진짜 일류인 법이지.
“코치, 아무래도 오늘은 쉽게 가야겠어요.”
“맞춰 잡으려고? 나쁜 선택은 아니지.”
별건 안고, 그냥 맞춰 잡아야지. 스윙에 힘이 없는 타자, 손쉽게 나오는 배트. 그 어느 때보다도 그러기 좋은 상황이잖아?
“변화구 줄이고, 패스트볼 위주로 갑시다. 특히나 오프스피드는 웬만하면 자제하도록 하고.”
그러니, 상대적으로 패스트볼보다 구위가 약한 변화구들을 어느 정도 자제하면, 더욱더 범타를 유도하기 쉽겠지.
그런 내 의견에 스콧 에머슨도 나쁘지 않은 전략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커터 비중을 더 높일 거야?”
“네, 배트도 적극적으로 내는 대다가, 우타자가 더 많으니까.”
오늘 화이트삭스 타선의 비율은 좌타자 셋에 우타자 여섯으로, 우타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러니 몸 쪽으로 살짝 꺾이면서, 반대손 타자의 배트 손잡이 부분으로 들어가는 커터를 쓰기 제격이라는 뜻이지.
내 커터가 아무리 완성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고 해도, 웬만한 투수들보다는 묵직하다. 그러니 적극적으로 쓰기 딱 좋겠지.
다만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면···
“오늘 네가 좀 고생해줘야겠다. 나도 양심은 있으니, 타격은 기대 안 할 테니까, 수비만 잘 부탁하자, 마커스.”
“이 X발 악마 새끼야! 네가 사람이냐?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
“그러라고 너 연봉받는 건데, 그게 왜 불쌍해? 너 돈 벌기 싫어?”
안 그래도 지쳐 쓰러질 것 같은 우리 팀 유격수가 더 죽어난다는 거지. 우타자가 친 땅볼은 거의 웬만하면 3유간으로 흐르니까.
대화가 끝난 뒤, 스콧 에머슨이 사라지자, 죽은 듯이 축 늘어져 있으면서 귀를 쫑긋거리던 마커스 시미언은 피를 토하듯 소리쳤지만,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나도 너랑, 다른 친구들 좀 좀 쉬게 해주고 싶었어. 나라고 그런 마음이 없었겠냐?
앞서 언급했던 대로, 나도 삼진 많이 잡아서 기왕이면 좀 쉬게 해주고 싶었다 이거야.
그데 상황이 그걸 허락하지 않는데, 내가 뭘 어떡해? 그냥 받아들이고, 지금 상황에 맞는 방식으로 변경해야지.
당당한 내 표정에 할 말을 잃은 건지, 마커스 시미언은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저렇게 투덜거려도 막상 닥치면 열심히 하고, 올해는 은근히 실책도 없는 녀석이니까, 괜찮겠지.
아마도 모든 걸 달관하고, 받아들인 것 같은데, 자기 저치를 쉽게 인정하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군.
“역시 유격수는 언제나 투수의 가장 절친한 친구지.”
“그럼 포수는?”
흡족한 마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웃자, 포수장비를 벗던 조시 페글리가 슬쩍 그렇게 물었다.
유격수가 투수의 친구라면, 포수는···
“가족이죠. 포수와 투수는.”
가족에 가깝지. 흔히 투수와 포수를 부부 사이에 빗대기도 하잖아? 그래서 배터리라고 부르는 거고.
“오, 노예가 아니었네? 난 당연히 노예일 줄 알았는데.”
“노예도 맞고요. 가족이자 노예인 복잡한 관계죠.”
다만 부부라고 해도, 한쪽이 극단적으로 갑의 위치에 있는 조금은 뒤틀린 관계긴 하지.
“그러면 결국 노예라는 거네. 그나마 친구라도 되는 유격수가 낫구만.”
“그럼 어떻게, 조시가 대신 마커스 자리에 서서 땅볼 잡으실래요?”
“난 발이 느려서 말이야. 괜히 너한테 민폐를 끼칠 수야 없지. 그냥 얌전히 공이나 받으려고.”
툴툴거리던 조시 페글리는 넋이 나간 듯한 마커스 시미언을 가리키는 내 손짓에 그와 마찬가지로 곧바로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였다.
현명한 선택이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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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회 말. 6천만 달러의 타석이 다시 돌아왔다. 안타 없이, 타순이 그대로 순환했으니까.
“삼진이 많이 안 나와서 내가 좀 기분이 나쁘거든? 그러니까 너라도 삼진 당해!”
“1억 2천만 달러짜리 삼진 가자~~”
그가 올라오자, 우리 팬들은 아주 기를 쓰고들 놀려대시는데,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 참으로 보기 좋습니다.
의외로 화이트삭스 팬들은 저런 레이더스의 조롱에도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들이 낸 것도 아니고, 본인들은 그냥 트레이드로 데려온 거니까, 레드삭스가 지불한 6천만 달러와는 별 관계가 없긴 해.
‘생각해보면 화이트삭스가 지불한 값이 더 큰 것 같지만 말이야.’
물론 크리스 세일이라는 특급 에이스를 넘겨주는 대가로, 아주 비싼 값을 지불하고 데려온 거니, 레드삭스와 도찐개찐 같지만 말이야.
‘그러면 레드삭스는 6천만 달러로 크리스 세일을 산 셈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레드삭스 입장에서도 그렇게 큰 손해는 아닐지도 모르겠네.
화이트삭스로서도 지금 당장은 좀 아쉽더라도, 아직도 많이 젊은 녀석이라, 언젠가 터질 가능성이 높으니, 마냥 큰 손해는 아닐 거고. 서로 윈윈 딜이구만.
“스트라이크!”
물론 오늘만 놓고 보면 화이트삭스의 압도적인 루즈고.
두 번째 타석을 맞이한 요안 몬카다였지만,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았다.
대놓고 들어온 초구, 쓰리핑거 체인지업은 그냥 멀뚱멀뚱 지켜보더니.
“스트라이크!”
정작 유인구로 확 뺀 슬라이더는 또 우렁차게 헛스윙했으니까.
‘변화구 대처가 심각하게 떨어지네. 선구안이 완전히 바닥이야.’
선구안이 좋지 않은, 그냥 냅다 휘두르는 타자야 많이 보기는 했는데, 이 정도로 나쁜 녀석은 또 처음이구만.
맞춰 잡기로 계획을 세우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잡을 수 있는 삼진까지 굳~이 범타로 유도할 필요는 없지.
‘아예 존 밖으로만 던져도 되겠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바닥을 기는 선구안, 막 휘두르는 배트, 그렇다고 해서 엄청나게 준수한 것 같지도 않은 컨택.
이 삼박자가 이루어진 타자들은 대게 또 하나의 히든특성을 가지고 있고는 한다.
바로···
“스윙! 스트~~라잌 아웃!”
떨공삼이지.
떨어지는 공은 무조건 삼진.
저런 타입의 타자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특성 중 하나지.
가볍게 휙 던진 서클 체인지업 V1에 타자는 이번에도 냅다 휘두르고는 알아서 물러났다.
첫 타석도 서클 체인지업, 정확하게는 V2에 삼구삼진을 당했었는데, 두 번째 타석도 마찬가지구만.
“You Suck!”
“잘하고 있네! 6천만 달러가 아깝지 않은 타격이야!”
“휘이이이이이이이익! 역시 네가 최고다!”
“다시 KKK 가자!”
아낌없이 조롱당하는 것도 첫 타석과 마찬가지고. 몸값이 비싸면 이런 문제가 생기는 구만.
마치 명문대생이 조금이라도 맹한 행동을 하면, ‘네가 진짜로 하버드를 나왔다고?’ 같은 조롱을 들어야 하는 것처럼.
똑딱거리는 것만 보다가, 간만에 그들의 입맛에 맞는 멋진 헛스윙 삼구삼진이 나오자, 레이더스는 지금의 기세를 이어가, 또다시 세 타자 연속 삼진을 잡으라며 소리쳤지만.
“아웃!”
애석하게도 그 기대는 이뤄주지 못했다. 이후 이어진 타석에선 계획했던 대로 땅볼의 시간이 왔으니까.
2번타자 아비사일 가르시아는 3구째 몸쪽 커터가 날아들자, 틱-하는 타격음을 남긴 채, 유격수 앞 땅볼로 물러났고.
“파울!”
“볼!”
3번타자 호세 아브레유는 그나마 제정신을 차린 건지, 6구까지 승부를 끌어가며, 앞선 타자들 몫까지 투구수를 뽑아냈지만.
“아웃!”
삼진을 잡을 듯, 높이 날아든 패스트볼에, 내 필승법 중 하나인 높은 포심 패스트볼을 예상한 듯, 배트를 냈지만, 마찬가지로 마지막에 꺾인 커터의 무브먼트에 유격수 땅볼로 물러났다.
그것으로 4회 말 역시 종료. 이번 이닝 역시 웃는 사람은 나였다.
“X같네, 진짜. 난 왜 유격수가 됐을까. 외야수 했으면 편하게 서 있었을 텐데.”
“잘하고 있어, 계속 그렇게만 해. 아주 믿음직스러워. 역시 네가 최고다.”
“Suck, 부탁이니까, 제발 좀 닥쳐주라.”
우는 사람은 의외로 화이트삭스가 아니라, 마커스 시미언이었고. 얜 잘해놓고 징징거리네. 아주 매끄럽게 수비 잘하더만.
특히 타구에 대한 반응속도가 빠른 걸로 봐선, 불평만 쏟아내는 입과 달리, 몸은 아직 멀쩡한 것 같은데, 그걸 믿고 더 적극적으로 유도해도 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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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 안타입니다! 5회 초, 3득점을 추가하는 애슬레틱스! 점수는 이제 5대0으로 벌어집니다!
화이트삭스 타선이 고유석에게 막히는 사이, 오히려 원정 더블헤더를 치렀는데도 불구하고 애슬레틱스 타선은 여전히 힘을 발휘했다.
차근차근 격차를 벌리며, 화이트삭스를 점점 더 따돌렸으니까.
어제는 하루에 2패를 하더니, 오늘 경기도 텄다는 생각에, 신경질적으로 채널을 돌리는 화이트삭스 팬들이 많았지만.
그와 달리 반대로 한국 쪽은 시청자가 점점 더 늘어났다.
-고유석, 5점의 든든한 득점지원을 업고, 5회 말, 다섯 번째 이닝에 들어섭니다.
-오늘 아주 수월하게 상대 타선을 막고 있는데, 아무래도 전날의 여파가 커 보이죠?
-예, 화이트삭스 타자들이 전체적으로 힘을 내지 못하고 있네요. 물론 Go의 호투가 더욱더 억제하고 있기도 하지만요.
-현재까지 안타와 출루가 없는데, 투구수도 46구로 평이하기에, 무언가를 기대할만할 것 같습니다.
낮 경기인 터라, 한국에선 이제 막 동이 트는 새벽녘이지만, 형소보다 조금 더 일찍 맞춰놓은 알람 소리에 졸린 눈을 비비고서 일어난 사람들이 점점 더 늘었으니까.
특히나 고유석이 무출루, 즉 퍼펙트를 이어가고 있다는 소식은 눈곱조차 떼기 전에 티비를 틀게 만들었고 말이다.
[이제 막 일어났는데, 오늘 갓유석임?]
-아님 킹유석? 점수판 보면, 고유석이나 혐유석은 아닌 것 같고.
└출루도 허용 안 했음, 근데 삼진도 평소보다 적어서 킹유석 정도임.
└└솔직히 이 정도면 갓이지.
└화삭 너무 못한다. 지들 홈에서 더블헤더인데, 오히려 원정팀인 오클랜드보다 더 못하네.
└└화삭이 못하는 게 아니라, 킹유석이 개잘하는 거임.
비록 4이닝 동안 고작(?) 다섯 개밖에 올리지 못한 삼진으로 인해, 아주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피칭을 보여주고 있는 고유석이기에, 새벽녘부터 일어난 것에 대한 불만을 품는 사람은 없었다.
-3구, 쳤습니다! 유격수, 마커스 시미언이~ 잡고 1루 송구! 5회 말 선두타자 역시 손쉽게 처리합니다!
-이번에도 커터였는데, 너무 쉽게 배트가 나왔네요. 물론 그만큼 고유석 선수의 유도가 좋았습니다만, 오늘 확실히 화이트삭스 타선이 정상은 아니에요.
-네, 그걸 이용해서 고유석 선수 역시 적극적으로 맞춰서 잡고 있습니다.
물론 소수의 화이트삭스 팬과 역배를 노린 이들은 그저 한숨만 내쉬었지만 말이다.
여전히 되살아날 줄을 모르는 화이트삭스와, 그런 화이트삭스를 손쉽게 찍어잡는 고유석을 보며 기대감은 더욱더 상승했지만.
-2루수가··· 잡지 못했습니다. 케반 스미스, 살짝 툭 밀어서, 우중간을 꿰뚫으며, 오늘 경기 화이트삭스의 첫 안타를 신고합니다.
-아주 기술적인 타격이었는데, 아쉽네요. 아슬아슬하게 2루수에게 닿지 않았어요.
기대하기 무섭게 퍼펙트가 깨지는 모습에, 들떴던 것만큼이나 마음은 축 가라앉았다.
└아, 저걸 못 잡네.
└제드였으면 잡았다.
└시미언은 두 탕 뛰고 오늘도 출전했는데, 우리팀 제드는 뭐함?
└나이 생각해라. 미국 나이로 이제 서른넷인데, 저 나이에 더블헤더 뛰고 다음날까지 선발출장하면 골병난다.
아쉬운 마음에 몇몇은 전날의 피로로 인해 결장했던 제드 라우리의 이름을 괜히 꺼내보기도 했지만,
더블헤더를 소화한 이상, 베테랑에 접어든 나이를 감안하면, 출장은 불가능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큰 의미는 없었다.
애초에 수비적으로 대단히 뛰어난 선수는 아닌 만큼, 설사 출장했더라도 결과는 같았을 거란 평이 지배적이었고.
그렇게 퍼펙트가 깨지면서, 흥이 식은 탓인지, 시청자가 줄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이트삭스의 기세가 올라가지는 않았다.
-4구, 헛스윙, 삼진아웃! 오늘 경기 여섯 번째 삼진을 올려내는 고유석! 안타 직후 삼진으로 다시 분위기를 잠재우는군요.
-고유석 선수의 너클 커브는, 정말이지 언제 봐도 일품이죠? 욜머 산체스 선수가 완전히 헛돌았습니다.
-작년 올스타전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공인데, 이젠 트레이드마크인 서클체인지업과 더불어서, 이젠 고유석을 대표하는 구질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곧바로 삼진을 잡아내며, 기세가 채 살아날 기미를 보이기조차 전에, 확실하게 잠재웠으니까.
-유격수가 잡아서 아웃! 아쉽게 퍼펙트가 깨졌지만, 여전히 기세를 유지해서 5회 말 역시 손쉽게 처리하며, 고유석이 호투를 이어갑니다.
곧이어 다음 타자인 7번 팀 앤더슨은 다시금 커터로 범타를 유도하면서 잡아냈고 말이다.
-쳤습니다, 다시 3유간, 마커스 시미언이 이번에도 손쉽게 처리합니다!
-오늘 커터가 아주 잘 먹히네요. 너무 쉽게 땅볼을 유도하고 있어요.
-고유석 선수가 흔히 삼진을 잘 잡는 투수로 유명한데, 이렇게 맞춰 잡는 피칭 역시 수준급이죠.
이후 6회 말 역시 지금까지와 별반 다르지 않게 이어지자, 몇몇은 신기한 듯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고유석 원래 커터 던짐?]
-처음 보는 거 같은데, 효과 ㅈㄴ좋네
└ㅇㅇ 비중이 높은 편은 아닌데, 원래 던지긴 했음
└솔직히 좀 별로인데, 오늘은 잘 먹히는 듯
└맨날 삼진 ㅈㄴ잡는 거만 보다가 맞춰 잡는 거 보니까, 좀 어색하다.
└화이트삭스가 못하는 것도 있는데, 고유석이 잘하긴 하네
└애초에 구위가 사기 수준이라서, 맞춰 잡으려면 쉽게 맞춰 잡기는 함
평소 별다른 인상을 주지 못했던 커터이고, 또한 맞춰 잡는 모습 역시 조금은 어색했기에, 색다른 느낌이 들었으니까.
-마커스 시미언! 또 잡아내는군요! 다시 1루로 송구해서 아웃! 오늘 아주 좋은 수비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날 더블헤더 경기를 치렀던 선수인데도, 아주 멋진 허슬을 보여주고 있네요. 유격수라는 포지션 특성상 체력적인 부담이 클 텐데 말입니다.
곧 죽을 것 같은 얼굴로 꾸역꾸역 타구를 잡는 마커스 시미언의 모습 또한 색달랐고 말이다.
[속보)마커스 시미언 실시간으로 늙어가는 중]
-고유석 일부러 저러나? 유격수 방향으로 ㅈㄴ 유도하네ㅋㅋㅋ
└혐유석 똥 치워주느라, 마커스 니가 고생이 많다
└솔직히 오늘 고유석 별로인데, 유격수빨로 버텼다 ㅇㅈ?
└└ㅇㅈ 인간적으로 밥 한끼 사줘야함ㅋㅋ
그래도 누가 봐도 오늘 경기에서 가장 고생하는 선수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에, 그의 고된 노력을 알아주며, 동정을 보내기도 했지만.
-다시 1루로 송구해서~ 아웃! 마커스 시미언, 혼자서 아웃카운트 세 개를 만드는군요, 오늘 경기, 철벽과 같은 수비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딱히 그런다고 해서 그의 처지가 바뀌거나 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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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그만해··· 이러다가 나 죽어···”
오늘 열심히 레벨업을 했던 마커스는 아무래도 이젠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표정으로, 이젠 아예 내 손을 붙잡고서 애원하고 있었으니까.
그래, 좀 너무하기는 했어. 솔직히 나도 중간부터는 어느 정도 부담을 줄여주고 싶긴 했는데, 이상하게 유격수 방향으로 가더라.
어쩐지 오늘 아침에 봤을 때보다 훨씬 수척해진 것 같은 모습이 안쓰러워, 나는 그의 간곡한 부탁에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오늘은 충분히 할 몫을 했으니, 남은 이닝 동안은 좀 쉬어.”
내 말에 그제야 환해진 얼굴을 보니, 왠지 마음이 더 씁쓸하구만. 그래도 이번엔 진짜다. 이제부턴 다시 때려잡을 시간이니까.
“슬슬 타격이 소극적이죠?”
“쟤들도 메이저리거인데, 눈치가 없진 않지. 대놓고 Suck 네가 농락하고 있는데, 소극적여질 수밖에.”
한 3이닝 날로 먹으니, 이젠 슬슬 눈치를 챈 건지, 배트가 좀 덜 나오더라고. 퍼펙트가 깨지면서 기세도 좀 회복된 것 같고.
그렇기에 오히려 삼진 잡기 좋겠지. 지금까지처럼 막 휘두르지도 않을 테니까.
“그럼 기어 올립시다. 마커스가 죽으려고 하던데, 마지막이라도 편하게 해줘야죠.”
“그 대신 화이트삭스는 확실하게 죽이고 말이야.”
“뭐, 쟤들이야 어차피 남인데, 남보단 우리 식구를 챙겨야지.”
땅볼만 주구장창 치면서, 눈 깜짝할 사이 이닝들이 삭제된 터라, 저도 모르게 주춤할 테니. 인터벌을 가속하기에 딱 좋은 타이밍이지.
거기다가···
“스트라이크 아웃!”
4회부터 조금은 자제했던 변화구도 다시 적극적으로 던지면, 배트가 술술 나올 수밖에 없고.
7회 말.
선두타자로 나온 2번타자 아비세일 가르시아는 멍하니 바라만 보면서, 루킹 삼구삼진으로 물러났다.
덕아웃으로 돌아가며, 허탈한 한숨을 내뱉기도 했고. 아비세일 가르시아만 그러는 건 아니다.
뒤이어 올라온 호세 아브레유나, 흘끔 훑어본 덕아웃의 다른 타자들 모두 다 비슷한 반응이었으니까.
화이트삭스가 느끼기에는 마치 다시 처음부터 시작인 것 같겠지. 내 스타일이 갑자기 확 바뀌었으니까 말이야.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7회 말은 허탈한 한숨만을 남긴 채 지워졌다. 그리고 이어진 8회도 마찬가지고.
“스트라잌~~ 아웃!”
그런 화이트삭스를 향한 주심의 삼진콜은 마치 길고 긴 사형선고처럼 쭉 이어졌다.
그렇게 마지막 두 이닝 동안 올라간 적립금은, 이전의 6이닝과 정확하게 동일했고.
그러는 동안 경기 내내 나왔던 땅볼은 물론, 플라이볼도, 안타나 출루도 없었다.
“내가 쉬게 해준다고 했지?”
“그래, X나게 고맙네. 이 미친새끼.”
그래, 여섯 타자 연속 삼진이지.
이걸로 쉬게 해주겠다는 마커스와의 약속은 지켰구만.
“Youuuu Suuuuuuuuck!”
“Hell Yeah!”
“진작에 이랬어야지!”
“KKK! KKK!”
거기에 지루한 땅볼쇼에 조금은 불만스럽던 팬들도 막판의 삼진쇼에 환호성을 터트렸고 말이야, 오늘도 아주 만족스러운 경기구만.
“좋아, 기왕 이렇게 된 거 9회 말에도···”
“닥치고 앉아. 저번 경기도 8이닝이고, 오늘은 특히 맞춰 잡으면서 패스트볼에 집중하느라, 전력투구도 많았는데, 누구 마음대로.”
“옙.”
비록 9회 말의 등판은 코치에게 저지되었기에, 난 100% 만족하진 못했지만, 이 정도면 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