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파드리스와의 2연전이 깔끔하게 스윕으로 끝난 뒤, 우린 곧장 시카고로 향한 뒤, 하루의 이동일을 가졌다.
일종의 휴식일인 셈인데, 시리즈 전에 폼을 가다듬는 시간이지.
“넘었나?”
“살짝 짧았어, 그래도 굿샷이야.”
“내야도 못 넘었는데, 무슨 굿샷이에요.”
그 휴식일 동안 난 적당히 타격도 가다듬었고 말이야. 일종의 점검 비슷하지.
물론 갑자기 필 받은 것 때문에, 뜬금없이 급발진해서 빠따를 든 건 아니고, 애초에 트레이닝 루틴 중 하나다.
투수라고 해서, 맨날 공 던지고, 뛰고, 쉬고만 반복하는 건 아니다. 그 외의 훈련도 은근히 있거든.
특히나 수비 훈련은 야수들보다는 당연히 적지만, 생각보다 많이 하는 편이지. 투수의 수비력도 은근히 중요하니까.
당장 나만 봐도, 내가 직접 잡는 땅볼이 의외로 많잖아?
“나이스 샷~ 점점 태가 나는데?”
“립서비스는 됐어요. 내야도 못 넘어구만 무슨 나이스 샷.”
“그래도 제법 힘이 실렸잖아? 지금까지 친 거 중에선 제일 나이스야.”
어쨌든 피칭 외적인 훈련들 중에서, 난 타격 훈련도 종종 하는 편이다.
뭐, 길어봤자 한 시간도 채 안 되겠지만, 어쨌든 작년부터 꾸준히 해왔는데···
‘어째 늘지를 않네.’
큰맘 먹고, 기존의 방식을 버리고, 나도 뻥뻥 휘두르기나 하는 선풍기가 되려고 했더니, 이 짓도 쉬운 게 아니구만.
‘막상 그런 타자들 잡을 때는 참 쉽고 편했는데 말이야.’
솔직히 투수 입장에서 간혹 조금 간담이 서늘하기는 해도, 공갈포만큼 잡기 쉬운 타자가 없다.
그러니까, 내가 푸홀스를 무시한 거잖아? 에이징 커브 이후로 완벽한 공갈포가 된 양반이니까.
그래서 조금은 쉽게 봤고, 나는 덩치도 있으니, 어쩌면 작정하고 때렸을 때 비거리가 상당하지 않을까, 약간 기대하기도 했지만, 역시나 개꿈이었다.
“토스 배팅인데도 어째 내야를 제대로 넘기는 게 드무네.”
“하하, 어쩔 수 없는 거지. Go 네가 갑자기 장타를 마구마구 날리는 게 이상한 거야.”
덩치값 못하는 이놈의 똑딱이질은, 작년부터 제법 오랫동안 타격을 가다듬었는데도 여전하네.
“Suck 이제 좀 알겠지? 우리가 얼마나 힘든 일을 하는지.”
“그래, 그러니까, 너도 우리한테 너무 타박하지 마. 타자도 많이 고되다고. 널 위해 득점하는 게 정말 힘든 일이란 말이야.”
“오리냐? 엉덩이 좀 넣어라, 볼 때마다 보기 흉하네.”
“닥쳐. 내 타격폼을 무시하지 마.”
그런 내 타격을 보면서 비웃는 동료들도 예전과 똑같고.
아니, 이게 뭐 어떻다고 다들 비웃고 그래? 얼마나 특화된 타격폼인데.
보기에 좀 요상하기는 하지만, 생각보다 컨택도 잘 되고, 주루 플레이에도 편하다. 하체가 미리 1루로 가 있어서, 남들보다 훨씬 빠르게 스타트를 끊을 수 있거든.
그런 장점들은 특히 내 절륜한 번트 실력과 조합되면 아주 극강의 성능을 발휘하지.
여기에 장타력까지만 갖추면, 진짜 완벽해질 텐데, 그게 안 되네.
‘에이, 됐다, 그냥 하던 대로 하자. 내가 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별다른 성과가 없어서 그런지, 금방 싫증이 났다. 그래, 괜한 짓을 한 거야.
스콧 에머슨이 좀 갈구면 어때, 그냥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씹고, 마음 내킬 때마다 뛰면 되는 거지. 내가 언제부터 코치 말 잘 듣는 착한아이였다고.
변화할 거라는 내 말에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했던 코치가 듣는다면, 아마 통곡하면서 주저앉겠지만, 피칭과 달리 마음처럼 되지 않는 타격에 나도 심통이 난 터라 어쩔 수 업사.
“굿샷~ 넘어갔네.”
“역시, 큰 크리스가 힘이 좋다니까.”
“작은 크리스도 좋잖아? 둘이 홈런 비슷하지 않나?”
“걘 그냥 타격을 잘하는 거고. 저 크리스는 홈런을 잘 치는 거지.”
“그럼 작은 크리스가 진정한 승자네.”
“그거야 당연한 거고.”
그렇게 내가 타격에 대한 흥미가 떨어졌을 때, 타자 놈들은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혀를 내둘렀다.
“뭐해요?”
“별건 아니고 크리스랑, 크리스티안이 내기 중이야, 누가 더 많이 날리나.”
“그럼 큰 크리스가 이기겠네요.”
“그렇지, 역시 힘은 저쪽이 더 좋네. 늙어도 아직 절륜하구만.”
큰 크리스와 작은 크리스, 크리스 데이비스와 크리스티안 옐리치가 타격 훈련을 빙자한 내기를 하고 있었구만.
나랑 달리 뻥뻥 잘도 날려대는 모습에 기분이 나빠서 확 코치한테 엄한 짓한다고 일러 바칠까 싶었지만, 오히려 코치들도 흥미롭게 볼 것 같아서, 그냥 관뒀다.
“나이스 샷~”
“이번이 여섯 개 째지? Old man이 넉넉하게 이겼네.”
크리스 데이비스, 우리 팀 내 최고의 거포이자, 어떤 의미에선 진짜 공갈포스러운 양반인데, 확실히 힘이 좋단 말이야.
하긴, 2년 연속 40홈런 넘긴 타자가 힘이 안 좋은 게 더 이상하긴 해.
‘상대로 만났으면, 조이 갈로나 스탠튼이랑 비슷한 느낌이었겠지.’
아군이라서 별다른 감정이 없는 거지, 아마 적으로 만났으면 진짜 좀 껄끄러운 타입이었을 거야.
다른 곳도 아니고, 콜리시엄이 홈인데 40홈런 깠다는 것 자체가, 무지막지한 파워를 증명해주니까.
‘저쪽에 한 번 물어볼까?’
그 힘을 제대로 목도해서 그런가, 왠지 조금 마음이 동했다. 내가 뜬금없이 타격을 바꾸려는 것도, 홈런을 노려보라는 말 때문이었잖아?
우리 팀 내에서 살펴본다면, 저쪽이 제일 확실하긴 하지.
타격코치도 있긴 하지만, 이 양반은 아무리 봐도, 스콧 에머슨의 등쌀에 밀려서, 날 제대로 가르칠 생각이 없어 보여.
대충 쳐도 나이스만 외치지, 별다른 피드백을 안 해주니까. 괜히 세세하게 가르쳤다가 내가 타격에 흥미를 붙일까, 걱정인 거겠지.
“파워가 죽여주네요, 크리스티안이 완전 나가떨어지던데.”
“그 정도는 아니야, 그런데 뭔가 바라는 게 있는 것 같은데··· 다음 등판 때 홈런이라도 쳐줄까? 하긴, 저번 경기는 좀 아슬아슬하긴 했지.”
아슬아슬하게 승리를 올리며, 연승을 유지했던 지난 경기를 떠올린 듯. 그날은 오늘 같은 파워를 보여주지 못하고 내내 막혔던 크리스 데이비스는 멋쩍게 웃었지만.
그를 꼽주려던 게 아니었기에 고개를 젓고서, 본론을 말했다.
“아뇨, 그거 말고, 제 타격 좀 봐주세요?”
“어··· 어?”
본론에 더 당황한 것 같지만 말이야.
“타격? 아직도 미련을 못 버렸어?”
“이게 은근히 재밌더라고요. 중독성이 있다고 해야 하나?”
“이야, 이러다가 나중에 타자로 전환하겠네, 아니지, 그 누구야, 에인절스의 일본인처럼 투타겸업을 원하는 거야?”
“그 정도로까지 본격적으로 할 생각은 아니고, 그냥 좀 변화가 필요할 것 같아서요.”
“변화, 좋은 말이지. 확실히 Suck 너한테는 특히나 그 변화라는 게 더 필요할 것 같고. 에이스가 위험한 짓을 하는 걸 보면, 동료로서 심장이 떨리거든.”
내 슈퍼 소닉은 어디서나 사랑받지 못하네. 결과는 좋았는데 말이야. 내 덕분에 이긴 인터리그 경기가 몇 갠데, 좀 억울하군.
“별로 해줄 말은 없어.”
“왜요? 코치 눈치 보여서요?”
“그것도 큰 이유이긴 한데, 그보다도 네 타격이 문제지. 나랑 완전히 정 반대인데, 무슨 조언을 해주겠어?”
요컨대 시작점에도 도달하지 않았으니, 뭐라 말해줄 것도 없다는 뜻이구만.
“Suck 네가 하는 건 타격이 아니라, 주루에 더 가까워. 컨택을 노린다고 해도, 그게 제대로 된 컨택도 아니고.”
제대로 팩트 폭행이라 변명도 못하겠네. 맞는 말이지, 엄밀히 말하면 나는 뛰려고 공을 치는 거지, 공을 치고 뛰는 게 아니니까.
“딱히 해줄 말은 없고, 먼저 엉덩이부터 집어넣어. 그러니까 힘이 안 들어가지. 숙인 자세도 펴고. 다리도 적당하게, 어깨 넓이 정도로만 벌리고. 왜 하체가 1루로 먼저 가 있어. 이게 육상경기도 아니고. 덩치는 행크 애런인 녀석이, 하는 짓은 리키 헨더슨처럼 군다니까. 그러니까, 코치든 뭐든, 다들 기를 쓰고 막지.”
그렇게 말한 크리스 데이비스는 더는 해줄 말이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고, 나도 딱히 다른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그냥 기초부터 죄다 뜯어고치라는 말이구만.
‘장타를 원한다면, 기존의 주루 위주 타격을 버리라는 거겠지.’
솔직하게 말하면 난 뛰기 위해 공을 치는 사람인데, 어째 주객이 전도되게 생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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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반대를 받고, 위험성도 높은 슈퍼 소닉을 고수하느냐.
아니면, 처음부터 뜯어고치는 한이 있더라도, 새로운 방식을 찾느냐의 사이에서, 고민하게 생겼지만, 당연히 그것에만 집착하지는 않았다.
타격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취미 정도고, 제일 중요한 건 언제나 본업인 투구지.
뜬금없이 홈런 하나 날리면 뭐해, 그거에만 집착하다 등판 경기 죄다 망치면 그야말로 바보 천지인데.
“나이스 볼, 벌써 공에 힘이 실리네.”
타격에 대한 고민을 잠시 접어두고,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1차전 날부터는 본격적으로 폼을 확 끌어올렸다. 내일 등판할 예정이니까.
타격 훈련 때 들었던 나이스 샷과 약간 다른 나이스 볼이라는 소리가 계속해서 터져 나왔지만, 그때랑 다르게, 이건 립서비스가 아니다.
“체력은 거의 다 올라왔네.”
“올해 들어서 회복 속도가 좀 빠른 편이잖아요? 감각만 올리면 언제든지 등판할 수 있죠.”
진짜로 나이스 볼이거든.
체력이야 이미 훨씬 전부터 올라왔었으니, 공에 힘이 실리는 게 당연하지.
올해 내내 이랬다. 철인 3종 경기를 노리듯, 겨울에 훈련하면서, 기초 체력도 체력이지만, 재생력도 엄청나게 좋아진 건지, 감각이나 폼과 상관없이, 체력 자체는 금방금방 회복하더라고.
대니얼이야, 피지컬 트레이너로서 이런 내 모습이 익숙하고, 애초에 지금의 날 만든 장본인이라, 그러려니 했지만.
스콧 에머슨은 여전히 이런 내 모습이 불가사의하게 느껴지는 건지 혀를 내둘렀다.
“볼수록 신기하단 말이야, 선발이 아니라, 불펜이었어도 아주 좋았겠어.”
“불펜이면, 맨날 연투시키려고요?”
“Go 너야 어차피 연투시켜도 좋다고 했을 거잖아? 아니, 저번에는 3연투였는데 왜 이번에는 2연투냐고 징징거렸겠지. 내 말이 틀려?”
“뭐, 그렇긴 하겠죠. 매일 같이 마운드에 오른다니, 상상만으로 참 행복합니다.”
“그래, 상상만 행복해라. 실천할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말고. 개소리라는 건 아는데, Go 네 행적을 보면 약간 찝찝하네.”
“제가 많이 던지는 걸 좋아하기는 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로 또라이는 아니에요.”
확실히 지금 모습만 놓고 보면 불펜 해도 되기는 하지. 아마 매일 같이 연투하고, 불펜으로 100이닝쯤 먹어도 멀쩡 할 걸?
과장 조금 보태면, 마치 옛날 투수들처럼, 선발 등판하고, 한 이틀 쉬고, 불펜으로 구원등판하고, 다시 한 삼일 쉬고 선발 등판하고.
이 짓거리를 해도 멀쩡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진지하게 가능성이 있다니까?
옛날 투수들은 대체 어떻게 그렇게 피칭했는지 항상 궁금하고, 경이로웠는데, 직접 체험도 가능하겠어.
‘물론 그 뒤엔, 그렇게 한 시즌 불태우고 나서 은퇴하겠지만.’
다만 이런 초인적인 회복력과 체력이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아무도 모르기에,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야지.
특히나 어떤 의미에서 올해의 본 게임은 후반기, 시즌 막바지부터니까, 그때까지 피로도가 너무 많이 쌓이지 않도록 적절하게 관리해야 하고.
그렇듯 내가 서서히 폼을 올리고, 좋은 체력에 기뻐하는 반면, 다른 선수들은 죽어났다.
“아··· 진짜 싫다···”
“내가 왜 시카고까지 와서, 이 짓거리를 해야 하는 걸까. 이럴 때마다 진짜 야구선수한 게 후회된 다니까.”
1차전을 승리로 가져온 뒤, 격렬했던 난전에 잔뜩 지친 선수 중 몇몇은 처절한 한숨을 내뱉었다.
특히나 유격수인 마커스 시미언은 메이저리거라는 직업에 대한 본질적인 현타감을 느끼기도 했고.
“더블헤더 같은 X같은 건 대체 왜 있는 걸까···”
“이게 다 사무국 놈들이 제대로 일을 못해서 그런 거야. 일정을 X신같이 짜니까, 더블헤더가 생기는 거 아니야?”
“X같다, 차라리 겨울까지 야구할 테니까, 일정 좀 여유있게 하면 안 되나?”
“이 X발 놈의 메이저리그는 왜 팀이 서른 개, 리그 당 열다섯 개씩이나 쳐 있어 가지고, 매번 이런 X같은 일을 만드는 거야.”
더블헤더 경기거든.
두 탕을 뛰어야 하는 거지.
야구가 정적인 스포츠 같아도, 은근히 체력소모가 제법 심하다. 그런데 그걸 하루에 두 번이나 하다니, 처절한 한숨이 나올 만도 하지.
“수고들 해라. 보는 입장에선 좋네. 야구를 이렇게 오랫동안 보다니.”
물론 내일 등판인 나랑은 전혀 관련 없는 얘기지만. 투수들도 마찬가지고.
당장 투덜거리는 면면만 봐도 죄다 야수다. 투수들은 대부분 나랑 비슷하게 조소를 흘리거나, 아니면 야수들을 불쌍하게 보고 있지.
사실 비웃는 사람은 나 혼자 뿐인 것 같긴 한데, 아무튼 몇 명은 마음속으로 그럴 거야.
그도 그럴 것이, 감독이 진짜배기 또라이고, 밑의 코치들도 죄다 싸이코패스가 아닌 이상에야, 투수들이 더블헤더에서 두 탕을 뛰는 경우는 없거든, 그러다간 진짜로 어깨가 박살 나니까.
그러게 왜 야수를 했어. 황족 투수를 했어야지. 우아하게 공 던지고, 그 뒤에는 편하게 푹 쉬고, 얼마나 좋아.
물론 불펜 돌쇠들이야 푹 쉬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어렸을 적 본인들 선택을 후회하거라.
“놀리냐? 편하게 구경하니까 즐거워?”
남의 입장에서 그렇게 구경하니, 안 그래도 가장 체력소모가 극심한 유격수 포지션인데, 더블헤더까지 소화해야 하는 마커스 시미언은 그런 내 모습에 울컥해서 소리쳤지만, 씨알도 통하지 않았다.
“어, 즐거워. 그렇다고 해서, 오늘 너무 힘 빼진 마라. 내일 나 등판하니까. 내일도 열심히 해야지. 아무래도 우격수 땅볼을 많이 유도할 것 같은데, 부탁 좀 하자.”
“X까, 내일은 덕아웃에 이불 펴고 잘 거야. 유격수 없다고 징징거리면서 깨우지나 마라.”
꿈도 야무지구만.
원정, 그것도 머나먼 시카고에서 더블헤더를 치르는 것 때문인지, 야수들이 죄다 멘탈이 나간 것 같아, 내일 경기가 조금 걱정이지만.
한 가지 다행인 건, 화이트삭스 역시 중복 출장하는 선수들이 제법 많다는 거였다.
‘저쪽도 죽상인 건 마찬가지네. 하긴, 자기들 홈이고 나발이고, 더블헤더가 즐거울 리가 있나.’
원정인 우리만큼은 아니더라도, 저쪽도 만만찮게 체력소모가 극심하겠지.
아무리 홈이라고 해도, 경기에서의 체력소모를 줄여주는 버프를 걸어주거나 하는 건 아니니까.
‘반대로 난 내일이면 다시 만땅이고.’
그러니 화이트삭스도 만만찮게 지치겠지만, 이미 말했다시피 난 강철체력이다.
오늘 느낌을 봐서는, 아마도 내일부터는 다시 쌩쌩해지겠지. 사이클도 좋기에, 폼도 완벽하게 올라올 테고.
이렇게 된 거, 기왕이면 아예 연장까지 가서, 타자란 타자는 죄다 녹초가 됐으면 좋겠네.
우리 타자들이야 뭐, 알아서 할 거고, 아무튼 그러면 나는 그저 편하게 공 던지면서 수확이나 하면 되니까.
“Suck 너 지금 X같은 상상 했지?”
“맞아, 했어. 근데 어쩌라고. 슬슬 경기 시작하겠네, 너 2번타자지? 타석에 오를 준비나 해라.”
“진짜 X같다··· 귀하신 몸이라 팰 수도 없고.”
마커스 시미언은 대놓고 능욕당하는데도 별다른 저항조차 못하는 자신의 무기력한 상황에 절망한 건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꼬우면 에이스 해라.
아니면 지금보다 훨씬 더 잘하든가. 혹시 알아? 100홈런쯤 치면, 구단에서 특별히 너한테 내 폭행권을 선사해줄지.
물론 설사 진짜로 그런다고 해도, 얌전히 맞아줄 생각은 없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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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전도 깔끔하게 승리했다.
다들 앓는 소리를 하더니, 힘이 남았었나 봐. 두 번째 경기에서도 무려 7타점을 몰아치며, 7대5, 2점차로 승리를 가져왔지.
“이건 꿈이야! 대체 왜!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특히나 가장 징징거렸던 마커스 시미언은 내 예언이 이루어진 듯, 오늘 경기도 선발 출장이지.
다만 브루스는 체력 안배 및 무릎 관절 보호와 부상 방지를 위해서, 결장했지만. 그 덕에 오늘도 조시 페글리구만.
“요즘 들어 자주 보네요.”
“브루스가 요즘 많이 바쁘잖아. 아무래도 네가 싫어졌나 봐. 사랑이 식은 거지.”
“역시, 파트너라느니, 소울메이트라느니, 영혼의 단짝이라느니 하는 놈들이 늘 먼저 바람을 피우죠.”
내 말에 조시 페글리는 정답이라는 듯 클클거렸다. 브루스가 알면 통탄하겠어.
“혹시 경험담은 아니지?”
“그럴 리가요. 그랬으면 여기 못 있죠. 누구 하나 때려잡고 교도소에 들어갔을 텐데.”
“Suck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뭔가 좀 무섭네. 그 덩치로 사람 치면 죽는 거 알지? 누가 시비 걸더라도 그냥 무시해.”
“당연히 그래야죠. 제가 무슨 갱도 아니고. 그나저나, 타자들 녹초겠죠?”
“녹초지, 사기도 꺾였을 거고. 더블헤더를 스윕 당하면 기분이 상당히 개같거든. 특히나 두 경기 다 뛰었으면 더욱더 그렇고.”
아무튼 주전 포수를 비롯해, 늙은 제드 라우리 등 몇몇을 결장한 우리도 우리지만, 예상처럼 화이트삭스 선수들도 만만찮게 타격을 입었다.
정신적인 충격으로 따진다면, 오히려 저쪽이 더 크다고 할 수 있고.
조시 페글리의 말처럼 더블헤더도 X같은데, 그걸 다 져버렸으니, 현타감이 제대로 오는 거지.
그걸 증명하듯, 마운드에서 바라본 화이트삭스의 덕아웃은 척 봐도 우울했다. 누구 하나 죽지 않은 것이 신기할 만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웬만하면 조심해. 어떻게든 만회하려고 할 거야.”
“그거야 당연하죠. 푸홀스 덕분에 많은 걸 배웠거든요.”
“대표적으로 뭔데?”
“적이 이미 죽은 것처럼 보여도, 경계를 늦추지 말고 확실하게 머리통을 쏴야 한다.”
허나 방심하지는 않았다.
저번 경기에서 방심하다 X같은 꼴을 봤는데, 이번에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그건 사람새끼가 아니라, 금수새끼지.
아니, 경험을 통해 발전하는 건, 사람이 아니라, 짐승도 하는 건데, 짐승 만도 못한 거구만.
그런 의지가 드러나는 내 말에 헛웃음을 흘린 조시 페글리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참, 전쟁터에서 나돌 법한 격언이네. Suck 너랑 잘 어울려. 혹시라도 홈런 맞은 것 때문에 흔들릴까, 걱정했더니, 역시 괜한 생각이었네. 그럼 시작부터 확인사살로?”
“기왕이면 초장부터 철저하게 하는 편이 좋죠.”
“어제도 오늘도 화이트삭스는 고생이네. 아무튼 알았어, 혹시 뭔가 찝찝하다 싶으면, 푸홀스 때처럼 놓치지 않고, 바로바로 사인 보낼 게.”
“에이, 푸홀스는 조시 탓 아니라니까요. 그냥 내 실책이지. 아무튼 오늘도 수고합시다.”
그렇게 조시 페글리를 내려보낸 뒤, 홀로 남은 마운드 위에서 주변을 쓱 훑어봤다.
어제의 수모에도 불구하고 홈팬들이 제법 많구만.
“Suuuuuuuck!”
물론 이 양반들도 있고.
같은 지구 원정 정도야, 그나마 거리라도 가까우니 충분히 이해하는데, 이 먼 시카고까지 꾸역꾸역 따라오는 거 보면 진짜 좀 신기하다니까.
사실 오클랜드가 보기와 다르게 엄청나게 잘 사는 도시가 아닐까? 레이더스도 겉모습만 저렇지, 알고 보면 죄다 갑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물론 오히려 정반대로 오늘만 보고 아득바득 돈을 모았을 가능성이 더 높긴 하지만. 그렇기에 나도 더욱더 열심히 해야지.
콜리시엄에서야 더 말할 것도 없이 책임감이 생겨나지만, 원정에서도 그와 비슷하다.
최소한···
“스트라이크 아웃!”
팬들이 헛돈 쓰게 만들지는 말아야지. 내 경기 직관한 팬들의 머릿속에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떠오른다면, 그거야 말로 내 인생 최악의 패배일 테니까.
초구는 언제나처럼 스트라이크. 1번타자 요안 몬카다는 큼직한 헛스윙을 선보이며 휘청거렸다.
얜 어제 두 탕 뛴 것도 아닌데 영, 타격에 맥이 없네.
‘몸값도 비싼 녀석이 말이야.’
내가 알기로는 엄청난 보너스 베이비다. 국제 아마추어 최고 계약금일 걸?
3000만 달러가 넘으니, 거의 웬만한 선수의 FA 총액을 일시불로 지불받고, 메이저에 입성한 셈인데.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사치세도 초과해서 계약금만큼의 사치세를 추가로 지출한 걸로 안다. 즉 6천만 달러짜리 몸이라는 뜻이지.
그 당시에 내가 마이너였는데, 한동안 떠들썩했기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워낙 충격적인 일이었거든.
누구는 마이너에서 X같이 구르는데, 누구는 3천만 불을 일시불로 받는다고 한탄하면서, 야구 X같다고 은퇴한 놈들도 몇 명 있었고.
“스트라이크!”
그런 녀석이 배트가 참 가볍단 말이야. 애초에 분석 자료에서도 선풍기 성향이 굉장히 강하다는 평가를 받았지.
이전이었다면 비웃었을 텐데, 이젠 마냥 그러지를 못하겠네. 내가 타격을 바꾸면 저것보다도 훨씬 못한, 선풍기가 아니라 부채가 될 테니까.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3구는 서클 체인지업.
스위치히터인데도, 굳이 좌타석에 들어왔는데, 아무래도 서클 체인지업의 위력이 껄끄러워서 그런 것 같지만, 좌타라고 해서 위력이 떨어지는 건 아니다.
사실 구종의 완성도가 이쯤 되면 궤적과 상관없이 헛스윙 제조기거든.
몸쪽으로 파고들며 떨어지는 V2의 역동적인 무브먼트에 배트가 헛돌며, 시원스러운 헛스윙 삼구삼진이 나왔고.
“Youuuuuuu Suuuuuuck!”
“크하하하핳, 6천만 달러짜리 X신새끼!”
“Suck의 삼진 하나의 값어치는 6천만 달러다!”
“Suck은 127억 8천만 불짜리 선수다!”
레이더스의 입에선 개드립이 나왔다.
야구라고는 내가 삼진 잡으면 그냥 좋은 거다, 정도인 양반들이, 누구 놀리는 데는 진심인 건지, 저건 또 어떻게 알아왔네.
삼진 하나가 6천만 달러라면서, 그 삼진을 현재까지 213개나 잡아낸 날 127억 불짜리 선수라고 칭송하는데, 듣는 내가 다 낯짝이 부끄럽구만.
물론 농담에 불과하겠지만, 최소한 우리 팬들이 느끼는 고유석은 그 정도의 값어치의 사람일 거다. 어느 정도는 진심이 섞여 있겠지.
그렇기에 그들을 위해서···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난 1억 2천만 달러를 더 추가했다.
2번타자, 아비세일 가르시아도 5구째 하이 패스트볼에 속이 후련한 강풍기를 보여주며,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고, 3번타자 호세 아브레유는 존으로 들어가는 너클 커브를 그대로 지켜보기만 하면서 루킹삼진 처리됐다.
다 합쳐서 1억 8천만 달러구만. 한 이닝에 1억 8천만 불이라···
‘은퇴할 때쯤 되면, 통산 누적 적립금으로 화성도 통째로 사겠네.’
노년은 지구가 아니라, 화성에서 보내는 것도 제법 운치가 있겠어. 수원화성 말고. 경기도 화성시 말고, Ma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