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253화 (253/316)

253화

“스트라이크 아웃, Go, 또다시 삼진을 잡습니다.”

캐스터, 빅터 로하스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삼진을 이야기했다.

멋지게 타자를 돌려세우며, 다시금 삼자범퇴를 만들었으니, 목소리를 높일 수도 있겠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이건 에인절스 지역 중계방송이니까.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 없지. 그렇다고 해서 편파를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탬파베이 레이스전 이후, 최근 세 경기 동안 좋은 피칭을 보여주고 있는 Go인데, 오늘도 폼이 좋아 보입니다.”

그저 이 정도로 짧게 끊을 수밖에. 에인절스의 상황은 명백히 좋지 않았다. 이렇다 할 찬스조차 나오지 않았으니까.

물론 상대 투수가 확정된 순간부터, 이토록 일방적인 경기가 되리라는 것 정도는 이미 예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김이 빠지는 건 사실이지.

‘오타니도 빠지고, 그나마 파워라도 좋았던 콜 칼훈도 빠지고, 거기다 저스틴 업튼까지 결장하면서, 트라웃을 제외하면, 변변찮은 위협도 못 되고 있어.’

그래도 에인절스를 위해 항변하자면, 이것이 팀의 완전한 전력은 아니라는 것이다.

주축급이었던 선수가 제법 빠진 타선이니, 어쩔 수 없다는 핑계라도 댈 수 있기는 하지.

물론 설사 그 선수들이 죄다 멀쩡하게 출장했다고 한들, 뭐가 그렇게 크게 달라질까 싶긴 했지만.

‘그리고··· 그나마 대항할 수 있는 트라웃도, 다음 타석은 힘들겠지.’

공수교대가 이어지는 상황 속에 잠시 말없이 생각하던 그는 조금은 아쉬운 눈빛으로, 중견수 위치로 향하는 트라웃을 봤다.

굉장히 올라온 모습. 너무나도 잘 아는 선수이기에, 그의 현재 타격감이라거나 폼, 집중력이 훤히 보였다.

작년, 같은 투수를 상대로 투런 홈런을 날렸을 때 역시 저런 기운을 풍겼었지.

그러니 다음타석을 기대할 수도 있겠지만, 애석하게도 빅터 로하스는 고개를 저었다.

‘Go는 생각보다 타자를 거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아, 고의사구든, 평범한 볼넷으로 둔갑한 사실상의 거르기든.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

만만찮게 많이 보고, 또 많은 소식을 들을 수밖에 없는 선수이기에, Go, 고유석의 성향 또한 어느 정도는 안다.

에이스로서, 그리고 리그 최고의 선발투수로서 프라이드가 은근히 강한 선수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과감하게 결단을 내릴 줄도 알지.

자존심 같은 건 잠시 내려놓고, 위험하다 싶으면 군말 없이, 곧바로 거르고는 하니까.

저 정도의 투수에게 벤치에서 고의사구를 강요 할리는 없으니, 당연히 본인의 판단일 거고.

‘앞의 기회에서 하나가 터졌어야 했는데···’

그러니, 트라웃 역시 걸러질 가능성이 높다. 이미 삼진을 두 개나 잡았고, 그것도 두 타석 모두 다 뜻밖의 노림수가 있었던 승부였으니. 볼 건 다 봤다고 해도 무방하니까.

그렇기에 빅터 로하스는 애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에인절스의 팬으로든, 경기를 중계하는 아나운서든, 조금은 기대했으니까.

마이크 트라웃이 그에게서 시즌 첫 피홈런을 빼앗아내는 장면을.

팬의 감성으로는 굉장히 기쁠 테고, 아나운서의 이성으로는 굉장히 만족스러울 테니 말이다.

Go의 피홈런은 언제나 이슈가 되었고, 항상 스포트라이트가 따랐다. 시즌 중에 보기 드문 진귀한 이벤트니까.

당장 그날 다른 구장에서 어떤 경기가 있었든지, 얼마나 대단한 명승부가 펼쳐졌든지, 그에게 홈런을 친 타자는 모두 다 홈페이지 대문을 장식했지.

올해의 첫 번째 영광이, 그나마 대항마이자, 대적자, 라이벌로서 주목받는 트라웃에게 돌아왔다면, 팬으로서의 기쁨과 함께, 흥행 역시 따라왔을 텐데··· 오늘 기회는 이미 마감됐다.

“아웃! 앤드류 히니! 5회 말, 애슬레틱스의 공격을 가뿐하게 막아냅니다!”

“2회 말에 아쉬운 실점을 했었던 앤드류 히니 선수인데, 그 이후로 오히려 더욱더 파워풀한 피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 공수교대가 마친 그라운드가 부산스러웠지만, 다행히 에인절스가 잘 막아냈다. 추가적인 실점은 허용하지 않았지.

여전히 점수는 2대0.

애슬레틱스의 약소 우위가 이어지고 있었고, 평소라면 역전도 가능하다고 소리쳤겠지만, 그도, 옆의 해설자도, 딱히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야구에서 2점이야, 뚝딱뚝딱하면 휙 넘어가는 점수라곤 하나, 투수가 누구냐에 따라, 가벼운 울타리부터, 거대한 성벽까지 난이도가 달라지니까.

“Go, 여섯 번째 이닝에 들어섭니다. 직전 이닝까지 57구를 던져, 피안타 2개와 삼진 9개를 기록하며, 좋은 기세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마운드에 이 투수가 있다면, 난공불락을 자랑하는 최악의 요새가 되는 것이고. ERA만 보더라도 확실하지.

‘올해는 애슬레틱스 불펜도 만만찮지만, 이번 경기는 아예 9회까지 던지겠지.’

그나마 불펜이 올라온다면, 괜찮을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모두가 알았다, 저 투수가 9회까지 완투할 생각이라는 것을.

“3구, 헛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80마일의 슬라이더가, 헛스윙을 유도했습니다.”

“오늘 경기 10번째 삼진이네요. 이번 경기 역시 두 자릿수 삼진을 올렸습니다.”

“예, 거의 기본으로 깔고가는 수준이죠.”

조금 늦게, 6회부터 빨라지기 시작한 인터벌만 봐도 알 수 있지.

올해는 저것을 4이닝 정도는 손쉽게 유지하는 편이니, 명백히 9회를 노리고 있다.

이닝 선두타자, 8번 자바리 블래쉬는 너무나도 손쉽게 삼진으로 물러나며, 오늘의 10번째 탈삼진이 되었다.

슬라이더에 완전히 배트가 돌았지. 그래, 이게 가장 문제였다, 저 투수는.

주력구라고 할 만한 공들이 리그 최고 수준이라서 가려지는 것이지, 그나마 보조수준인 슬라이더 같은 공도 상당한 완성도를 가졌지. 웬만한 다른 투수들이었다면, 충분히 결정구로 썼을 정도로.

오늘 트라웃에게 두 번째 삼진을 선사한 위닝샷이긴 하나, 자주 나오지 않는 슬로 커브를 제외하고. 경기마다 종종 사용하는 공만 따져도 4피치도 아니고, 무려, 8피치, 여덟 개나 되니, 타자로서 어떠할 방도가 있겠는가?

‘거기다 올해부터는 릴리스 포인트까지 마음대로 바꾸고 있고.’

답도 안 나오는 상황이겠지.

그걸 타파하기 위해, 여러 전문가들이 주장한 건, 그냥 대놓고 게스 히팅을 하라는 거였고.

어차피 눈이나, 머리로 상대하려면 답이 안 나오니, 그냥 본능에 의지해서, 하나를 노리고 운을 기대하라는 뜻이지.

“2루수가 잡아서, 1루 송구, 아웃입니다. 루이스 발부에나가 내야땅볼로 물러나면서, 투아웃이 올라갑니다.”

“투심이었던 것 같은데, 제대로 빗맞았네요. 잘 유도했어요. 이번 시즌, 변형 패스트볼의 위력도 올라왔다는 평이 짙은데, 확실히 무브먼트나, 궤적이 작년과 비교했을 때 더 좋아졌습니다.”

물론, 운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이렇게 되는 것이고.

9번타자 루이스 발부에나는 2구만에 땅볼로 물러났다. 9번타자이니 어쩔 수 없다고는 해도, 꽤나 무기력했지.

“쳤습니다! 좌중간! 빈 공간에 떨어지는 안타!”

그래도 1번타자, 이안 킨슬러가 안타를 치며, 빅터 로하스의 목소리를 올려줬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안드렐톤 시몬스, 하이 패스트볼에 헛스윙이 나왔습니다.”

곧 안드렐톤 시몬스가 삼진으로 물러나며, 다시 흥분은 잦아들었다.

그렇게 다시금 끝난 이닝.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배트를 붕붕 돌리며 기다리던 트라웃은 아쉬운 듯 벤치로 돌아갔고. 그를 보며 빅터 로하스 역시 아쉬웠다.

‘어떻게든 연결됐으면··· 그래도 가능성이 있었을 텐데.’

주자가 두 명이 쌓인 상황에서 트라웃이 나왔다면, 과감하게 거르지는 못했을 거다.

그러니 한 차례 기회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결국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물론 당장 지지난 경기에서, 제 손으로 만루를 만든 적이 있는 투수이니, 그것 역시 확신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득점이라도 해야 그나마 체면치레라도 할 텐데···’

그렇게 다시금 아쉽게 끝나버린 이닝에, 빅터 로하스는 에인절스가 최소한의 자존심이라도 지키길 바랐지만. 막상 또 득점이 나올 만한 곳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다음 이닝에 있을, 트라웃의 공짜 출루를 살리지 못하는 것이야 너무나도 당연하고.

“6회 말, 애슬레틱스의 공격이 시작됩니다, 타순은···”

그렇기에 그저 힘없이 조금은 무미건조하게 중계를 이어갔다. 아무런 기대조차 없다는 것처럼.

####

“점수 좀 내지? 이러다가 내가 갑자기 한방이라도 맞으려면 어쩌려고 그러시나?”

트라웃 잡는 거에 집중해서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그러고 보니 오늘 우리 팀 타선도 죽 쑤고 있단 말이야.

6회 말의 공격도 손쉽게 저지되면서, 상대 투수 역시 6이닝 2실점으로 퀄리티 스타트 이상을 기록했다.

타선을 지리게 잘 막고 있는데 여전히 2점차라니, 성격 더러운 투수라면 진즉에 한바탕 뒤집어엎었지, 나니까 그냥 꼽 주는 정도로 끝난 거야.

“에이, 그럴 리가 있어? 2점이면 충분하잖아?”

그걸 감사한 줄도 모르고, 타자들은 너스레나 떨어댔다. 그래, 이것도 내 잘못이다, 내 잘못이야.

팬들이 계속해서 더욱더 큰 욕심을 품는 것처럼, 타자들이 꼴랑 2점 내놓고 떵떵거리는 것도 다 내 잘못이지.

이 정도만 내도, 내가 알아서 이겨주니까, 거기에 길들여진 거잖아?

그렇기에 그냥 한숨이나 푹 내쉬면서, 다시 피칭에나 집중했다. 어차피 뭐라고 말해도 들어 처먹지도 않을 텐데, 거기다 대고 소리쳐 봤자, 괜히 내 손해지.

“이닝 시작부터 트라웃 얼굴 보면 심장에 안 좋은데···”

“타자들도 똑같을 걸? 경기 시작하자마자 네 얼굴 보면 얼마나 싫겠어.”

“오늘 나오지도 않는 놈은 셧업 해라.”

이번 이닝 선두타자는 3번타자다. 마이크 트라웃이지. 직전 이닝에서 아쉽게 타석에 오르지 못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더라. 걱정했던 대로야.

“집중력 제대로죠?”

“어, 두 번째 타석에서 삼진 당한 뒤에, 뭔가 확 올라온 것 같았어.”

“그렇겠죠··· 쓰읍.”

그러니 미련을 가질 필요는 없겠지. 물론 어느 정도는 확인을 해볼 생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안 된다 싶으면 괜히 자존심 챙기기보다는 그냥 깔끔하게 털어내는 편이 나아.

그렇게 마음을 먹고서 마운드에 오르자, 아직 자세도 제대로 잡지 않았는데도, 트라웃은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발을 동동 굴렀다.

거, 사람 참 왜 그렇게 경박해? 선비의 마음으로 차분~하게, 침착하게 명경지수를 보여야지.

양놈한테 선비 운운해봤자 통하지도 않겠지만, 그래도 제대로 몸이 닳은 것 같아서 괜히 찝찝하네.

이래서 트라웃이 무섭단 말이야. 앞전 타석에서 삼진 두 개, 그것도 헛스윙 두 개였고, 자세까지 무너졌으면, 기가 죽을만한데도 저런단 말이지.

종종 나를 보고 야구 로봇이고, 애슬레틱스에서 수주하여, 카이스트에서 개발했다면서 농담을 하기도 하는데. 진짜 야구로봇은 저쪽이지.

사심 없이, 그저 순수하게 야구를 좋아하고, 야구에 전력을 다하는 케이스니까.

‘오케이, 이만하면 대충 감은 잡혔네.’

곧 이닝이 시작되고, 트라웃이 타석에 올랐지만, 나는 그 이전부터 결정을 내렸다.

“파울!”

낮게, 거의 바닥을 구를 듯 깔아서 던진 초구에 냅다 휘두른 스윙에 그 결심이 더욱더 짙어졌고.

웬만하면 그림이라도 예쁘게, 아슬아슬한 볼넷으로 가려고 했는데, 어우, 그랬다간 까닥 잘못해서 좀 깊게 들어가면, 아주 혼쭐이 나겠어.

‘나가슈, 살 떨려서 못 해 먹겠네. 심장 쫄리는 승부는 하루에 두 번이면 충분하지.’

두근두근하고, 야구의 참맛이 느껴지는 승부도 재밌기는 한데, 같은 놈이랑 두 번 했으면 됐지, 더하고 싶지는 않다.

“아···”

“음, 이- 이럴 수도 있지!”

“전략적 판단이야, 전략적 판단! X발 그런 거라고!”

깔끔하게 고의사구.

공 하나 던지고 1루를 내주자, 설마 하니 홈에서도 그럴 줄은 몰랐던 건지, 내 좋은 기세에 환호하던 팬들도 순간적으로 고장이 난 것처럼 오작동을 일으켰지만.

‘어우야, 살벌하다, 살벌해, 눈을 못 마주치겠네.’

역시 가장 격렬한 반응을 보인 건 트라웃이었다. 기껏 타이밍 잡고, 집중력 올리고, 준비 다 했는데, 고작 공 하나 후려갈기고 1루로 걸어 나갔으니, 아무리 성격이 좋아도 속이 뒤집어지겠지.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꼬우면 ‘덜’ 잘하던가.

내가 웬만하면, 아무리 폼이 좋은 타자라도 한번 꽝 붙어볼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넌 아니야. 내 홈플레이트에서 썩 꺼지 거라.

그렇게 조금은 어수선해진 분위기 속에서 트라웃을 1루로 고이 내보내 준 뒤, 그에게서 완전히 신경을 끄고, 올라오는 다음 타자를 봤다.

‘이번 타석도 잘 부탁합니다.’

알버트 푸홀스.

그는 꽤나 무덤덤하게 반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앞에서 트라웃을 거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니까. 이젠 본인도 적응한 거겠지.

다만 그럼에도 여전히 최고의 타자였던 기억이 살아 있기에, 그 잔잔함 속에서 미약한 분노가 느껴지기도 했지만 말이다.

혹시라도 이것이 자극을 줘서, 왕년의 모습이 살아나지는 않을까, 조금은 걱정스럽기도 했기에 포수를 살폈지만, 조시 페글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처럼.

함께 수두룩한 경기를 치르며, 수많은 경험을 통해, 무수한 빅데이터가 쌓인 브루스와 달리.

아직도 조금은 서먹한 사이이기에, 그를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겉으로 드러나는 분위기는 똑같다는 거겠지.

‘최고는 지난 타석처럼 병살타겠지.’

타자 트라웃만큼은 아니겠지만, 저 거구에 꽤나 잘 달리는 만큼, 주자로서 트라웃도 꽤나 찝찝한 놈이다. 내 옆에 두기에 싫은 녀석이지.

그러니 기왕이면 지난 타석에서처럼, 푸홀스가 병살타를 쳐주며, 본인과 주자를 함께 지우는 매직을 보여준다면 가장 완벽하겠지만. 그건 좀 힘들겠지.

태생이 거포라서 필수적으로 병살타를 잘 친다고 해도, 한 경기에 두 번하는 게 잦을 정도는 아니니까. 심지어 에이징 커브 이후에도.

‘욕심내지 말고 차분하게 잡자.’

그렇기에 괜한 기대나 모험심은 버리고, 안전한 방향을 택했다.

“스트라이크!”

초구는 스트라이크.

바깥쪽으로 살짝 걸친 서클 체인지업이었는데, 그는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에이징 커브 이후로 선구안, 특히 브레이킹볼에 대한 대처가 심각하게 떨어진 푸홀스인데, 그의 행적을 떠올려 보면, 그냥 코스를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지만.

‘뭔가 조금···’

왠지 께름칙한 느낌이 들었다. 얌전히 지켜보던 눈동자도, 그리고 이상하리만치 침착한 모습도.

“볼.”

“스트라이크!”

그래서 공 두 개를 빼보자, 또다시 그런 느낌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2구는 또 한번 지켜봤지만, 3구는 냅다 휘둘렀지. 전혀 맞을 만한 코스가 아닌데도.

이것만 보면 영락없는 졸스인데 말이야. 뭔가 오락가락하는 건가?

‘괜히 시간을 주면 안 되겠어, 빨리 잡자.’

슬쩍, 조시 페글리를 봤지만, 그는 별다른 제스처를 하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괜찮다는 것 같은데, 마음이 놓이지는 않았다.

‘속구 대처도 조금은 떨어졌지, 그쪽으로 가자.’

찝찝한 마음에 긴장감을 한 단계 더 높였다. 혹시라도 승부를 길게 끌었다간, 그의 몸뚱이에 감금된 ‘알버트 푸홀스’가 되살아날 것 같았으니까.

“볼.”

그대로 던진 4구.

이번에도 그는 지켜봤다. 정확하게는 건드릴 생각도 없었다고 하는 것이 맞겠지.

낮은 쓰리핑거 체인지업이었는데, 어차피 나도 헛스윙이나, 삼진을 노린 건 아니기에 상관없었다.

그저 그다음에 이어질 패스트볼의 위력을 보다 더 높이기 위해서 깔아 둔 포석이니까.

순간적으로 바꾼 릴리스 포인트, 속구에 약해진 타자가 보기에, 더욱더 빠르게 보이도록 새로운 릴리스 포인트로, 더욱더 깊게 집어넣어서 던졌다.

‘아···’

채찍처럼 왼팔을 휘두르면서도 타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기에 깨달았다. 그가 단단히 노리고 있었다는 것을.

마치 과거를 보는 듯한, 자신감 넘치는 강력한 스윙. 심장이 철렁였지만, 한편으로는 안심했다.

‘투심이라 다행이네.’

포심 패스트볼이 아니라, 투심이었거든. 혹시 모르는 찝찝함에, 만약의 경우 빗맞은 타구라도 연출하기 위해서 이쪽으로 던진 건데. 그나마 다행이네.

그렇기에 뒷목이 싸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안심했지만, 곧 정확하게 공의 궤적을 따라가는 스윙을 봤을 땐, 더는 그런 안정감조차 느끼지 못했다.

‘망할, 푸홀스였네.’

공이 배트에 닿기 직전, 직감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타자는, 에인절스의 똥쓰레기 앨버트 푸졸스가 아니라.

메이저리그의 역사에 크나큰 발자취를 남긴 위대한 타자, 알버트 푸홀스라는 것을.

####

작년 시즌이 끝나기도 전부터, 수많은 기자들이, 사람들이, 팬들이, 아니, 헤이터들이 말했다.

<동나이대 역대 최악의 기록! 푸홀스의 추락은 어디까지?>

<더는 추해지지 말고, 떠나야 할 순간! 그나마 박수라도 쳐줄 때 떠나라, 푸홀스!>

<에인절스를 좀 먹고 있다! 아름다운 10년을 망치는 최악의 말년!>

<발전이 없는 최고의 타자->퇴보를 멈추지 못하는 무장점의 퇴물, 알버트 푸홀스의 놀라운 변화>

추악한 욕심을 접고, 지금이라도 은퇴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음수의 WAR, 그것도 기존의 통산 커리어를 제법 깎아버릴 정도의 최악의 시전이었기에, 응당 뒤따라온 비난이었지. 비판이기도 했고.

어쩌면 간곡한 부탁이기도 했다. 더는 자신들의 추억을, 영웅을 망치지 말아달라는 애절한 부탁.

‘아니, 아직 아니야. 조금, 조금 더 할 수 있어. 부상의 후유증 때문에 망친 거지, 다시 감만 돌아오면 돼.’

허나 그는 그저 무시했다.

조금 더 가능했으니까, 조금 더 뛸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충분히 다시 살아날 수 있으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그는 최고의 선수였고, 가장 비난받은 작년에도 100타점을 기록하며 그 클래스를 증명했다.

비록 그를 지탄하는 이들은, 트라웃의 고혈을 빨고 쌓은 100타점이라며, 그의 올드스쿨식의 야구관을 비난했지만. 어쨌든 스스로는 그렇게 믿었다.

‘그래, 나도 알아.’

허나 한편으로는 알았다.

자신의 시대가 저물었다는 걸. 저물고 있는 것도 아니지. 이미 완벽하게 저물어버린지도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났다.

잘 알았다.

투수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손쉬운 퇴물, 가벼운 보너스, 트라웃의 후속타자이자, 에인절스의 선물.

비록 내색하지는 않더라도, 분명 과거와 비교했을 때, 눈빛부터 달랐지.

눈앞의 투수도 마찬가지고.

딱 봐도 큰 긴장감은 없지.

다만 감이 좋은 녀석답게, 조금은 경계하는 것 같지만, 그것 자체가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를 알려줬다.

찝찝하고, 왠지 께름칙한데도 그렇게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그래, 더는··· 메이저리그에서 그를 경계하거나, 두려워하는 투수는 없었다.

‘그래도 아직은 아니야.’

그렇기에 조금 더 성실하게 노력하기도 했다. 같은 팀 동료로서, 좋은 후배이자, 모범이 되는 하드워커인 마이크에게 조금 영향을 받기도 했고.

조금 더 몸을 가다듬고, 조금 더 준비를 철저하게 마친다.

그러면 올해는 다르지 않을까? 그런 믿음을 품고서.

허나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별로 달라진 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떨어졌지. 애초에 그런 것이 에이징 커브니까.

‘나도 알아, 내가 끝났다는 건.’

그래, 정말로 끝난 거지.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퇴보하는 것만이 남았다는 걸 확인한 거니까.

그럼에도 끝까지 미련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히 자존심, 그리고 막대한 연봉, 추악한 탐욕 때문만은 아니었다.

‘왔다.’

바로 지금처럼 가끔씩, 아주 가끔씩, 과거, 스스로도 가장 완벽했던 시기의 감각이, 그 느낌이, 그 힘이, 그 향기가 돌아오는 순간 때문이었다.

‘패스트볼···’

마치 아련한 첫사랑의 추억처럼 슬며시 되살아나 다시금 미소 짓는 이것이 올 때면.

‘그리고 싱커.’

내가 아직은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으니까.

투수가 팔을 휘둘렀다.

공은 높이 날아오는 듯했다.

사실 제대로 보지는 못했다.

그냥 머릿속으로, 마음속으로 이미 정해놓고, 최대한 좋았던 시절의 감각을 따라, 억지로 배트를 휘두른 거니까.

“후우···”

온 힘을 다하면서도, 간결하게 배트를 휘두른다. 과거, 발전을 모르는 타자라는 농담을 들었던 시절처럼.

그러자 최근 들어서는 느낀 적 없던 깨끗한 손맛과 시원한 감각이 차올랐다.

굳이 타구는 보지 않았다.

자신의 앞에서 트라웃을 거르는 것으로,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준 투수를 향해, 조소를 날리지도 않았고.

“이래서 야구를 못 끊지.”

그저 지금의 이 여운에 취해, 살포시 배트를 내려놓았을 뿐.

최고의 투수에게 홈런을 쳐내면서, 자신을 증명했다는 것이 기쁜 게 아니라, 아직은 이 늙은 몸뚱이 안에, 영광이 남아 있다는 걸 확인했다는 것이 기쁜 거니까.

“Fuuuuuuuuuuuck!”

“X발 죽여버릴 거야!”

“이 X같은 퇴물 새끼가 X발 왜 경기를 망치고 지랄이야!”

“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콜리시엄이 요동쳤다.

참을 수 없는 욕설이 흘렀다.

허나 그럼에도 타구는 가뿐하게 담장을 넘었다. 다른 이들의 반응이나, 비난과 상관없이.

Go, 그 위대한 투수의 2018년 첫 피홈런의 주인공은 마이크 트라웃이 아니었다.

강력한 파워로 이름 높은 지안카를로 스탠튼이나, 조이 갈로도 아니었고. 조지 스프링어, 무키 베츠, 애런 저지처럼 최근 화려하게 떠오른 선수들도 아닌.

알버트 푸홀스.

모두의 찬사를 받았던 영광의 시기를 지나, 조롱거리로 전락한 늙은 호랑이였다.

####

이럴 거 같더라.

어쩐지 조금 찝찝하다 했어.

“괜찮-”

“내 잘못이에요, 멀쩡하니까, 걱정하지 마슈.”

트라웃이 들어가고, 뒤따라 푸홀스도 들어간 뒤, 황급히 조시 페글리가 마운드로 달려왔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억울하거나, 내가 어거지로 피해를 본 상황이 아니니, 누군가의 위로는 필요 없다.

그저 순수하게 내 잘못인데, 누구한테 징징 거리겠어? 혼자서 감내하는 거지.

‘너무 무시했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금까지 너무 편했던 상대고, 솔직히 별다른 위협감조차 들지 않았던 양반이라서 내가 너무 가볍게 마음 먹은 거다.

만약에 다른 타자에게서 그런 찝찝함을 느꼈다면, 지금처럼 피칭했을까? 아니, 더욱더 전력을 다해서, 아주 까다롭게 피칭했겠지.

트라웃에게 보였던 집착을 푸홀스에게 반이라도 보였다면, 이런 참사는 없었을 거야.

물론 그렇게 모든 타자들에게 집중을 기울이다간, 그렉의 말처럼 심력이 딸려서 오히려 금방 지치겠지만.

어쨌든 아무리 맛이 간 걸로 유명한 타자라고 해도, 내가 너무 오만했던 거지. 이런 건 깊이 반성해야 돼.

‘아직 멀었구만.’

내 스스로도 솔직히 최정상에 올랐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언제나 뜻밖의 배움이 찾아오는구만.

“됐으니까, 내려가슈. 다음타자 기다리네.”

“괜찮겠어?”

“뭐, 그냥 털고 넘기는 거죠.”

조시 페글리는 걱정 어린 눈빛으로 나를 봤지만, 진짜로 괜찮다. 물론 스스로를 타박하고, 반성하고, 깊이 참회하기는 하겠지만.

그건 배움을 곱씹는 거지, 충격에 찌들어서 허우적거릴 생각은 없다. 교훈은 얻되, 나머지는 금방 털어내야지.

“빡세게 가죠, 완봉, 아니, 완투하긴 글렀으니까.”

내 자만으로 완투는 날아갔다. 실점까지 했고, 무려 홈런을 맞았으니, 완투는 절대로 허락 안 해주겠지.

길어야 8회 정도.

아마도 승리는 챙겨줄 것 같으니, 9회까지 이어가려던 여력을 보다 더 짧게 털어 넣어야겠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조시 페글리는 괜찮다는 듯 덕아웃에 사신을 보낸 뒤 다시 내려갔다.

다시 홀로 남은 마운드, 팬들의 아우성이 들리지만, 그보다는 상대 타자들의 눈빛이 더 중요하다.

이제 2대2의 동점에, 투수는 홈런을 맞았다. 그것도 알버트 푸홀스에게.

최악의 거벽을, 최악의 동료가 금이 가게 하는 걸 직접 지켜보면서, 다시금 활기를 되찾았군.

거기다 아직까지 아웃카운트도 없으니까, 이 기세를 이어서 날 아예 쓰러뜨리려는 심산인 것 같은데.

“스트라이크 아웃!”

그런 타자들에게 알려줬다.

이번에 내가 당한 것은, 홈런을 처맞은 건 니들이 잘해서가 아니라.

“스트라이크 아웃!”

그저 내 스스로의 실수이자 잘못이라는 것을. 어디서 눈빛이 살아나고 있어.

숭어가 뛰니 망둥이도 뛰려는 것 같은데, 그럴수록 더욱더 폭압적으로, 아주 강력하게 패대기쳐야지.

다시는 살아날 수 없도록, 폴짝거리지 못하도록.

이런 상황에서 주도권마저 놓쳤다간, 자칫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이어질 수도 있으니까.

이번 기회에 에인절스도 호구 잡아서, 서부지구 천하통일을 해보려고 했더니, 그건 완벽하게 실패했구만.

“아웃!”

쓰린 속을 부여잡고, 7회 초를 빠르게 지웠다. 투런 맞은 거 빼면, 시간 자체는 빠르네.

트라웃도 고의사구였던 데다가, 푸홀스와도 그리 긴 승부까진 이어지지 않았으니까.

물론 짧은 시간과 달리, 오늘의 교훈은 아주 길게, 두고두고 품고 가야겠지만.

‘앞으로는 좀 나이든 베테랑들한테도 공경해줘야겠네. 일정 보면 나중에 타이거즈전에도 등판할 텐데, 미겔 카브레라한테는 작정하고 던져야겠어. 괜히 번뜩이지 않도록.’

이것도 교훈 중 하나고.

연장자를 존중하자. 존중하는 의미로 아주 작정하고 던지자. 정말 좋은 교훈이지.

“자, 이제 점수를 내야겠지? 꼴랑 2점밖에 못 내서, 내 15연승도 못 지켜주는 이 쓰레기들아.”

마찬가지로 타자들도 교훈을 얻었을 거고. 어디서 2점 내놓고 배를 두드리고 있어.

내 연승 지키려면 빨리 나가서 점수 가져와, 이 쓰레기들아. 오늘 승리 못 올리면 줄초상 나는 거야. 처신 잘하라고.

그런 내 호통에 타자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건지, 7회 말, 다시금 2득점을 올려내며, 리드를 되찾아왔다.

“이제 됐지?”

“지가 홈런 맞아놓고 괜히 우리한테 승질이야.”

“옛다, 15연승. 관심 없는 척하더니, 더럽게 집착하네.”

그러고는 다시 떵떵거렸고. 웃기고 자빠졌네. 하면 잘하는 것들이 꼭 상황이 닥쳐야 부랴부랴 움직인단 말이야.

그래도 푸홀스 덕분에 타자들 기강은 잡은 것 같으니, 그에게 고맙다고 해야겠어.

‘X발 졸스신 X새끼! 왜 갑자기 나한테서 터지고 지랄이야? 생각할수록 X같네 진자.’

다음 이닝이 닥쳐오고, 그라운드로 다시 걸어 나가면서 확인한 전광판에 찍힌, 2점이라는 숫자에 그제야 울컥 화가 터져 나와서, 비록 그 감사함이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아니, 작년 내내 멀쩡하고, 올해도 멀쩡하던 양반이 왜 하 필 나한테서, 나를 상대로 터져?

막말로 자기 앞에서 트라웃 거른 투수가 한둘도 아니고, 수두룩 빽빽인데.

그 분노를 가득 담아, 마지막이 될 8회 초를 불태웠고.

“스트라이크 아웃!”

“세이프!”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비록 또다시 안타 하나를 내주긴 했지만, 그대로 타자들을 쓸어 담으며, 가뿐하게 이닝이 마무리됐다.

“저, 오늘 느낌이 좋은데, 9회에도 제가 그냥-”

“느낌이 좋아? 시즌 첫 피홈런이 터졌는데 느낌이 좋아? Go 네가 무슨 마조히스트야? 엄한 소리 말고, 여기서 끝내, 이미 불펜에 투수 들어간 지 오래야.”

예상처럼, 9회 등판은 없었다. 간만에 홈에서 완봉하나 올리려고 했더니···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죄다 망쳤네.

스콧 에머슨의 단호한 말에 아쉬움 가득 벤치에 털썩 주저앉으며, 반대편 덕아웃을 훑어, 오늘 어느 팀이 이기든, 최종 승자로 남을 한 남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푸홀스 X새끼.”

“Suck 넌 꼭 홈런 맞을 때마다 그러더라. 아무리 홈런을 맞았다고 해도, 훨씬 선배에, 나이도 훨씬 많은데···”

“아가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