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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 빼고 다 가짐-252화 (252/316)

252화

“휘유~ 이것 참 영광스럽네, 이런 역사적인 순간에 낄 수 있어서.”

“역사는 무슨···”

경기장 전체가 웅~하고 울릴 만큼, 엄청난 환호성과 격렬한 반응에 조시 페글리는 너스레를 떨었다.

진짜로 KKK를 해버렸네.

솔직히 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아무렇게나 생각했는데 말이야.

물론 그런 것치곤 막판에 오기가 생겨서, 졸지에 트라웃과 끝장전 비스무리한 걸 해버렸지만.

“그나저나, 마지막 공은 뭐야? 나 모르는 사이에 뭐가 또 추가됐네? 포심 같은데, 뭔가 오프스피드처럼 느리고 밋밋하던데. 변형 체인지업이야? 아니면 변형 패스트볼?”

그렇게 함께 덕아웃으로 돌아갈 때, 조시 페글리는 은근하게 물었다. 약간은 놀랍다는 듯한 표정을 섞어서.

마지막, 헛스윙을 유도한 위닝샷 말이야. 내가 지금까지 워낙 보여준 게 많다 보니. 그는 어쩌면 내가 새로운 구종이나 구질을 장착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런 조시 페글리의 질문에 나는 약간 비웃음 같은 코웃음을 흘리며, 진실된 답변을 해줬다.

“그거, 그냥 후루꾸예요.”

“후루꾸?”

“플루크요, 플루크.”

간단하게 말해서, 후루꾸, 아니, 플루크다. 운빨이라는 뜻이지.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진짜 X나게 식겁했어. 공 놓는 순간 X됐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왜냐고?

일단 원래 하이 패스트볼을 던지려던 건 맞다. 트라웃이 그나마 약점이란 게 있다면 하이 패스트볼이니까.

물론 공이 묵직하고, 빠르다는 전제조건 하에, 조금 약하지.

사실 트라웃만 그런 게 아니라, 대부분 타자들이 그런 종류의 잘 던진 하이 패스트볼에 약하지만.

그래서 그냥 길어지는 승부에, 끝장을 보자는 생각에 이 악물고 하이 패스트볼을 던진 건데···

‘벅찬 마음에 실수가 나왔어.’

실투를 해버렸다. 살짝 잘못 챘다고 해야 하나? 그, 있잖아? 내가 원래 던지던 방식.

손가락 끝으로‘만’ 던지는 거.

그래서 밋밋하고, 아무런 힘도 없는 거. 어떤 의미에선 내 ‘진짜’ 포심. 그게 날아갔다.

‘위력이 이 정도로 차이가 나나?’

그런데 그걸 보고, 트라웃은 다르게 생각한 것 같다. 뭐랄까, 스윙이 늦어도 한참 늦었지. 체인지업 같은 오프스피드를 노렸다고 보기에도 조금 더 느렸어.

그렇다면, 아마도 내가 가진 것들 중 가장 느린 공, 슬로 커브라고 생각하고 순간적으로 타격을 했던 것 같은데.

86마일짜리 포심 패스트볼을 슬로우 커브로 착각할 정도면, 기존의 포심이 진짜 더럽게 밋밋하긴 한가 봐.

어쩌면 그전부터 슬로우 커브를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더더욱 쉽게 속은 걸 수도 있고.

“아무튼 운이 좋았어요.”

“실력도 괴물인 놈이, 운까지 따라주네. 세상 참 불공평하다니까.”

“불공평하죠, 불공평하니까, 조시도 여기 있는 거고요.”

“···혹시 지금 나 백업 포수라고 돌려서 까는 거야?”

“제가 아무리 나쁜 놈이라지만, 그 정도로 X새끼는 아니에요. 날 뭘로 보고, 그냥 조시도 그 불공평함을 딛고 누군가를 밟고 여기까지 왔다는 뜻이죠.”

“오, 맞는 말이기는 하네.”

농담이었다는 듯, 구겼던 표정을 풀고서 피식 웃는 조시와 함께 덕아웃으로 돌아가다, 흘끔 반대편을 훑었다.

때마침 반대쪽에서도 나를 보고 있었고, 서로 생각이 같았구만.

‘운빨이 터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승부가 길어지면서, 타이밍을 많이 잡았어.’

KKK로 멋지게 200탈삼진을 잡기는 했는데, 좀 귀찮아졌다. 계속해서 커트하고 , 공을 보면서 어느 정도 감을 잡은 것 같거든.

거기다가 집중도 제대로 한 것 같고. 집중력과 타격감까지 올라온 트라웃이라니, 이거만큼 투수에게 X같은 단어가 또 있을까?

아마도 없을 거다.

그러니 조심해야지.

된통 당하지 않으려면.

“다음 타석은 조금 더 조심해서 상대하죠.”

“트라웃? 이미 충분히 조심스러웠던 것 같은데, 여기서 더?”

“뭐, 여차하면 그냥 거른다는 마음으로 가자는 뜻이죠.”

“그렇다면야 편하기는 하지. 일단은 알았어.”

뭐, 위험하긴 하겠지만, 영 아니다 싶으면 그냥 거르면 되기는 하지만 말이야.

어쩌면 하이 패스트볼이고 나발이고, 이것이야 말로 트라웃의 가장 큰 약점이다.

정확하게는 3번타자 트라웃이 가지는 최악의 약점이지. 그게 대체 뭐냐고?

그의 바로 뒤의 타자, 4번타자가 푸홀스라서, 어떤 투수든지 그를 무리 없이 거를 수 있다는 것.

트라웃을 상대할 때, 이것만큼 확실한 필승법이 없지. 거의 백발백중이라니까?

‘오늘도 좀 잘 부탁합시다, 졸스신.’

그렇기에 덕아웃 밖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타석에는 오르지 못한 채, 다시 돌아가 주섬주섬 헬멧과 배트를 내려놓는 알버트 푸홀스를 보며 깊이 부탁했다.

부디 오늘도 내가 알고 있는 푸졸스의 모습을, 푸홀스가 아니라, 모든 에인절스 팬들이 뒷목을 잡게 만들었던 푸졸스로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

“스트라이크!”

고맙게도, 위대한 타자, 알버트 푸홀스께선 이 어린양을 배려해주신 건지, 첫 타석에선 영락없는 졸스셨다.

“스트라이크 아웃!”

첫 타석은 멋진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나셨거든, 심지어 삼구삼진이네.

‘오늘도 폼이 좋아 보이지는 않네. 아니지, 이젠 이 정도를 원래 폼이라고 봐야 하나?’

바깥쪽 코스의 너클 커브에 태산을 무너뜨릴 듯한 헛스윙을 보여주셨는데, 여윽시 레전드 다운 항상 일관적인 모습! 참으로 보기 좋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만 해주십쇼.’

멋진 선배에 대한 존경심과 감사함을 가득 담아, 기꺼이 고개를 숙였다.

그것으로 위험 부담 하나는 덜어냈다, 트라웃을 상대할 때, 너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혹시라도, 정말 만약에라도 저 노쇠한 몸 안에 감금된 푸홀스가 족쇄를 찢고 나와 다시 부활했다면, 진짜 공 던지기 싫어졌을 텐데.

‘만에 하나라도 위험하다 싶으면, 걱정 없이 걸러도 되겠네.’

위험이 완전히 사라져서 그런가, 흡족한 마음에 공이 쉽게 던져졌고.

“스트라잌!”

“파울!”

“볼.”

“아웃!”

그다음 5번 타자, 호세 미구엘 페르난데스까지 손쉽게 잡아냈다.

“아웃!”

6번타자는 아예 1구만에 내야뜬공으로 처리했고. 물 흐르듯 부드럽게 흘러가는 경기에 신이 난 건 나 혼자만은 아니었다.

“9회까지 가즈아~~~~”

“저번 경기 7이닝이었던 거 알지? 오늘은 못해도 완봉은 해야지!”

원래도 신이 났던 팬들 역시, 흐름이 좋게 이어진다는 것을 깨달은 건지, 더욱더 흥겹게 응원했으니까.

이젠 다들 내 패턴을 잘 알기에, 저번 경기에서 7이닝으로 끊었으니, 오늘은 더 길게 갈 거라고 기대하기도 했고.

“갔다아아아아~~~”

“호오오오오옴~ 러어어어어어언!”

거기다 2회 말에는 적절한 투런포까지 터지면서, 선취점이 올라갔기에, 분위기는 더욱더 밝게만 흘러갔다.

사실 뭐든 간에 일단 200탈삼진은 달성됐고, 그것도 바라던 그대로 KKK, 그것도 트라웃을 상대로 완성시켰으니, 무조건 기쁠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스트라이크 아웃!”

곧이어 3회 초 역시, 선두타자를 손쉽게 서클 체인지업으로 헛스윙을 유도하며 삼진을 잡는 것으로 기분 좋게 스타트를 끊었다.

“You Suck!”

그러자 흥겨웠던 분위기에 걸맞은 우렁찬 유썩이 다시금 터져 나왔지만.

“세이프!”

뒤이어 8번타자 마틴 말도나도에게 안타 하나를 내주면서 오늘 첫 출루를 허용하면서,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 맥을 확 끊어버리네.

“그걸 왜 쳐 X신아!”

“우우우우우!”

“X신 같은 애너하임 부르주아 새끼들은 하여튼 도움이 안 돼!”

“눈치 없는 에인절스 X신 새끼들!”

이번엔 환호성 대신 우렁찬 욕설이 퍼부어졌는데. 어떻게 보면 타자들 입장에선 가불기야.

삼진 당하면 네 실력이 참 구리다면서, You Suck이라고 조롱당하고, 그렇다고 해서 안타를 치면 욕과 저주를 퍼부으니 말이야.

설마하니 퍼펙트까지 바랐던 건지, 아주 격렬하게 반응하는 팬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곧바로 9번타자 루이스 발부에나와 다시 타순이 돌아온 1번타자 이안 킨슬러를 나란히 처리하며, 3회 초 역시 손쉽게 막아냈다.

“Hell Yeah!”

참 단순하다니까. 열심히 화내더니, 또 좋아서 환호하네.

일희일비가 심해도 너무 심한 팬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다시 덕아웃으로 돌아갈 때.

“그런데 Suck, 그건 왜 안 쓰는 거야? 눈치로 봐선 네 마음대로 던질 수 있는 거 같은데, 종종 섞으면 괜찮지 않아?”

“어떤 거요?”

문득 슬쩍 다가온 조시 페글리가 물었고. 칵테일도 아니고, 섞긴 뭘 섞어? 뜬구름 잡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곧 그가 뭘 말하는지 깨달았다.

“아~ 그거, 조시 말처럼 던지려면 던질 수 있기는 한데, 안 돼요.”

“왜? 독특한 오프스피드가 될 것 같은데. 네 기본 포심이 워낙 좋아서 그런가, 엄청 색다르다니까? 완전 다른 구종 같다고 해야 하나?”

아마도 내 ‘원래’ 포심, 밋밋한 작대기 직구를 말하는 것 같은데,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니, 이번엔 반대로 조시 페글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충분한 위력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물론 어느 정도 효과를 보기는 하겠지.

“그렇긴 하지만, 위험성이 너무 커요. 솔직히 그냥 배팅볼이거든요.”

나라고 그런 생각을 안 해봤겠어? 기존의 공과 차이가 워낙 극심하니, 타자들 속여먹기에 은근히 좋아 보이긴 해.

당장 아까 전만 보더라도, 분명 지금까지 던졌던 것과 똑같은 포심이고, 구속도 같은데도, 무브먼트와 스터프에서 극심한 차이가 나니, 트라웃이 그대로 속아 넘어갔지.

허나 너무 위험하다.

어떤 의미에선, 슬로우 커브보다도 더 위험하지. 막말로 배팅볼이랑 딱히 차이가 없거든.

‘무브먼트나 변화도 없어서, 한번 읽히는 순간 그냥 넘어가는 거야.’

트라웃이 당했던 건 다른 요소들이 큰 역할을 해줬기에 그런 거지, 오히려 평범한 타자였다면 그냥 손쉽게 후려갈겼을 거다.

보이는 그대로, 그냥 작대기처럼 밋밋하게 날아오는 포심이니까.

어떤 의미에선, 내가 꼭 숨겨뒀다가 가끔씩 꺼내는 슬로우 커브보다도 더욱더 위험하지.

‘가끔씩 이렇게 플루크가 터지거나, 의외성을 중심으로 두고 던지면 그나마 괜찮겠지만···’

슬로우 커브를 던지는 방식대로 운용하면, 가끔씩 제법 쏠쏠하긴 하겠지만, 그 외의 문제도 있지.

“거기다가 잘못하면 커맨드가 흔들릴 수도 있거든요.”

“아, 커맨드. 하긴, 그게 위험하기는 하네.”

커맨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조시 페글리는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 위력이고 나발이고, 이게 가장 큰 문제지. 옛날 방식과 섞어서 쓰는 건.

내가 새로운 투구법, 정확하게 말하면, 올바른 투구법을 대니얼에게 배우고 그걸 익히는데 오프시즌을 죄다 털어 넣었다.

물론 실질적으로 커맨드를 잡는 데 걸린 시간은 생각보다 짧지만, 어쨌든 결국 완전히 커맨드가 자리 잡힌 건, 작년 시범경기까지 마친 뒤였지.

그런데 만약 약간의 이득을 위해서 옛날식 피칭을 섞다가, 기껏 잡은 커맨드가 망가지면, 그땐 진짜 대참사다.

괜히 시즌 중간에 그런 도박을 벌였다가 밸런스가 무너지거나, 제구가 망가지면, 돌이킬 수 없을 테니까.

그러니 지금 당장 가장 잘할 수 있는 방식대로 던지는 것이 중요하지. 안전하게, 괜히 위험한 것은 깔끔하게 털어내는 편이 더 좋고.

하지만···

‘아주 가끔씩이지만 쓸만 하기는 하지. 오늘은, 뜻하지 않게 판도 깔렸고.

항상 그랬듯이, 나는 아주 탐욕스러운 놈이다. 위험하니 버려야 한다고 해도, 그래도 일단 효과를 봤는데, 마냥 손 놓는 것도 좀 그래.

딱 한 번이지만, 오늘 경기 내에서 다시금 그걸 이용할 타이밍이 있을 것 같았다.

무언가 합리적인 추론이라거나, 분석은 아니고, 그냥 감이긴 한데.

‘내가 또 이상하게 감이 잘 맞는단 말이야.’

내 감은 생각보다 정확도가 높으니, 믿어 볼 만하지.

####

4회 초, 내 감이 옳은 지, 아니면 틀려먹은 지 증명할 시간이 금방 찾아왔다.

“세이프!”

이번 이닝 선두타자로 나온 안드렐톤 시몬스가 2루수 제드 라우리를 아슬아슬하게 넘기는 안타를 치고 나갔거든.

부상 복귀 이후로, 실전 감각이 아직은 완전히 올라오지 않은 것 같아서 안심했더니. 곧바로 하나 치고 나가네.

‘확실히 올해 타격감이 좋단 말이야.’

무사 주자 1루.

1루에 안착해서, 날 짙게 노려보는 안드렐톤 시몬스를 흘끗 지켜보다, 이내 정면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진짜 빡빡하네.’

이야, 먼저 주자를 내보내고 마주하니까, 느낌이 색다르네. 저 X같단 말이지.

앞선 타석에서도 집요한 끈기를 보여줬던 마이크 트라웃이지만, 이번엔 그보단 조금 더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앞선 타석에서 집중력이 올라온 것도 있지만, 그만큼 그의 앞에서 주자를 뒀다는 압박감이 크다는 거겠지.

‘오늘은 진짜 좀 깐깐하게 나오려는 것 같던데, 웬만해선 잡기 힘들겠네.’

눈치를 보아, 이번에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지. 내 감을 믿어보는 수밖에.

그래도 아무런 대책도 없이 상대했다면 꽤나 막막했을 텐데, 지난 타석의 플루크 덕분에 걸어볼 만한 도박패라도 하나 쥐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야.

흘끔 조시 페글리를 보자, 그는 아주 격렬하게 사인을 보내왔다.

입으로는 트라웃과 대화인지, 트래시토크인지를 나누고 있었는데, 손짓은 아주 급박했지.

‘엄청나게 위험한 건, 나도 보면 아니까, 그만 하슈.’

타자가 심상치 않다는 거야, 타석에 올라오기도 전부터 이미 알았기에,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살짝 제스처를 보인 뒤, 느리게 호흡하며 나 스스로도 마음을 가다듬었다.

‘지금 타격감이 어떻든, 폼이 얼마나 좋든지 간에, 최소한 투 스트라이크까지는 갈 수 있다. 그다음에 통하느냐, 아니냐가 문제지, 그전까지는 오히려 편해.’

대단히 위협적이고 껄끄러운 타자지만, 솔직히 마냥 쫄 필요도 없지. 지금까지 진탕 두들겨 맞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내가 두들겨 팬 타자니까.

“파울!”

그렇기에 조심스럽게 초구를 던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스윙이 나왔다.

엄마야, 저걸 그냥 냅다 후려치네, 저번 타석은 길게 승부를 끌고 갔으니, 이번엔 한번 꼬아서, 초구부터 대담하게 나온 것 같은데, 큰일 날 뻔했어.

자신감 있게 하나 넣으려다가, 왠지 조금 찝찝해서 커터를 던져서 망정이지, 큰일 날 뻔했네.

다행히 안쪽으로 파고드는 커터의 무브먼트에 배트의 안쪽, 손잡이 쪽을 맞춰서, 빗맞은 파울이 나왔다.

‘그래도 일단은 스트라이크 하나.’

비록 순간 심장이 철렁하기는 했지만, 카운트 하나 잡았으니까 된 거지. 많이 놀라기는 했지만, 마음은 금방 진정됐다.

원래 중요한 승부일수록 더욱더 가볍게 털어낼 줄 알아야 돼. 괜히 지나간 일에 미련 가지고 멈칫거리다가, 큰 거 한 방 맞기 십상이니까.

“볼.”

“파울”

그래도 상대 타자가 폼이 좋다는 건 파악했으니, 최대한 조심스럽게 두 개를 걸치자, 트라웃 역시 지난 타석과 마찬가지로 다시 가볍게 나왔다.

노림수가 통하지 않았으니, 그도 다시 재정비하는 거지.

“파울!”

4구째, 바깥쪽으로 포심을 전력투구하여 조금 더 집어넣자, 그것마저 커트했지만, 어차피 이것도 흘리는 수다.

‘오케이, 포심 잘 보여줬으니, 길게 끌 거 없이, 그대로 가자.’

진땀 나는 승부는 딱 한 번이면 족하다. 첫 타석에서도 그렇게 끌었는데, 이번에도 그럴 수야 없지.

빠르게 잡자는 생각에 공을 조준하고, 내 쪽에서 먼저 사인을 보내자, 조시 페글리도 살포시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트라웃도 준비한 것 같고. 자, 이제 딜레마로 갑시다.

재빠른 와인드업, 어차피 주자를 견제할 생각이 없기에, 그저 공에만 집중하기 위해서 최대한 정확하게 자세를 잡고 던졌다.

그러자 날아가는 공. 앞선 타석의 위닝샷과 마찬가지로 높은 코스였다.

구속이나, 타자가 느끼는 타이밍도 비슷하겠지.

이제부터 딜레마의 시작이다.

트라웃은 이미 한 차례 봤다.

이게 뭔지 알고 있지.

‘정확하게 어떤 구질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대단한 타자이고 집중력도 단단히 올라왔으니, 분명히 포착은 했을 거야.’

그러니 고민해야 하는 거지.

이미 머릿속에 입력해뒀던 슬로우 커브냐, 아니면 아까 전에 헛스윙 삼진을 당했던 밋밋한 포심이냐의 사이에서.

‘어차피 확률은 50대 50이야. 맞느냐, 잡느냐. 언제나 그렇지.’

어떤 쪽이든 트라웃이 올바른 선택지를 고를 경우, 큰 거 한 방은 확정이다.

그러니 X나게 위험한 도박이기는 한데, 지금처럼 이게 잘 먹힐 때가 없을 것 같으니, 한번 써먹기는 해야지.

아니나 다를까, 공이 손에서 빠져나간 직후부터, 극히 짧은 시간 동안 그는 고민했고, 짧지만 깊은 고민 끝에 결국 선택을 내렸다.

“스윙! 스트라~~~잌 아웃!”

정답은 슬로우 커브.

원래는 조금 더 묵혀뒀다가, 나~중에 모두가 다 잊은 뒤에 꺼내려고 했지만, 찬스가 왔는데 급하더라도 꺼내야지.

그는 아무래도 내가 자신을 다시금 속여, 한번 꼬아서, 그 밋밋한 공을 던졌다고 판단한 것 같지만. 난 그 정도로 배배 꼬는 사람이 아니다.

“쨔스!”

이번에도 헛스윙 삼진.

그 짜릿함에 세리머니 하듯 가볍게 어퍼컷 하며 소리치자, 에인절스 쪽에선 반응은 별로 좋지 않았고, 날 노려보거나 흘겨보기도 했지만, 그쪽 반응이야 별상관없다.

“그렇지!”

“Hell Yeah!”

“Youuuuuuu Suck!”

“KK! 트라웃! 너 진짜 X나게 Suck이다! 크헤헤헤헤.”

여긴 우리 홈이고, 나 말고도 수만 명이 똑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으니까.

우리 든든한 형님들, 특히 든든하다 못해 내가 더 무서울 지경인 레이더스가 있으니, 마음 놓고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거지. 무슨 일 생겨도 날 지켜줄 테니까.

‘어거지로 잘 잡았네.’

그렇게 감정을 토해낸 뒤,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금 바라보자, 다시 벤치로 돌아가던 트라웃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별다른 미련을 가지지도, 내 제스처에 화를 내지도 않겠다는 것처럼.

다만 두 눈동자만큼은 이글이글거렸다. 이제 다음 번은 자신의 턴이니, 단단히 각오하라는 거지. 집중력도 오히려 더욱더 올라온 것 같고.

‘볼 거 다 봤고, 때릴 것들도 다 한번씩 건드려봤으니··· 인터벌이 빨라져도 타이밍 금방 잡겠네. 많이 위험하겠어.’

아마도 다음 타석에선 그를 잡으려면 지금보다도 훨씬 더 힘들겠지. 거기다 이번 타석처럼 도박 수도 없고.

밋밋한 포심과 슬로우 커브를 각각 하나씩 제대로 확인했으니까, 이젠 둘을 제대로 구분할 테니 말이야.

내가 가진 것들 중에서 가장 밋밋하고 볼품없기에 서로 닮아 보이는 거지, 자세히 보면 전혀 다른 공들이니까.

충분히 구분할 수 있겠지. 애초에 구속 자체도 많이 다르고. 그러니 다음 타석에서 이런 짓거리하면 그냥 냅다 풀스윙 갈길 거야. 타구는 담장을 넘어갈 거고.

설사 그게 아니더라도, 빡세게 전력투구를 해도 굉장히 위험하겠지만···

‘그거야 내가 트라웃을 잡으려고 할 때의 이야기고.’

오늘만 해도 이미 쿠폰을 두 번이나 찍으셨는데, 까짓 거 한 타석쯤은 서비스를 해드려야지.

우리 집이 원래 인심이 좀 후해. 열 장이 아니라, 두 장만 있어도 서비스를 내드리지.

특히나 잘하거나, 위험한 것 같은 타자한테는 더더욱 후하고. 꼬우면 조금 덜 잘해라 이거야.

‘대충 가늠해보고, 안 된다 싶으면 그냥 볼넷 내줘야지.’

단물만 쪽 빨아먹고, 그 뒤에는 냅다 승부를 피하는 쫄보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뭐 어때? 저 무지막지한 괴물 다음에, 아주 인성이 올바른 분이 계시는데. 당연히 그쪽으로 가닥을 잡아야지.

“아웃!”

“아웃!”

트라웃이 이글거리는 눈빛을 남기고 내려간 뒤, 알버트 푸홀스가 그에게서 바통을 넘겨받고, 배터박스에 올라왔지만.

곧이어 3구째, 높은 하이 패스트볼을 심하게 빗맞히며 그나마 만들어진 기회마저 망가뜨렸다.

6-4-3, 유격수-2루수-1루수로 이어지는 아주 정석적인 병살타였지.

이러니 내가 사랑하지 않고 배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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