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오후 1시에 시작하는 낮 경기 시간에 맞춰, 평소보다 조금 이르게 잠에서 깨어났다.
진짜로 잠을 조금 적게 잤다는 건 아니고, 그냥 일어난 시간이 빠르다고. 수면 시간이야, 언제나 칼 같이 맞추는 편이거든.
‘몸은 적절하네. 간만에 4일 휴식 등판이라서, 걱정했더니.’
지난 레인저스전과 애스트로스전은 중간에 낀 휴식일 덕분에 딱 5일씩 쉴 수 있었다.
그 덕분에 푹 쉬면서, 폼을 정비할 수 있었기에, 경기 당일에는 힘이 아주 남아돌았지.
그런데 다시 4일 휴식이라서, 이번엔 좀 부족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몸은 깨끗했다.
애초에 이러도록 루틴을 맞춰서 트레이닝한 거기는 하지만.
“오늘 날씨는 어때요?”
“지금은 화창하지만, 경기 시간부터는 적당히 구름이 낄 거라고 합니다. 기온은 섭씨 18도 정도라고 하고요.”
“18도면, 딱 좋겠네요.”
“그래도 햇빛이 적어서, 생각보다 서늘할 겁니다.”
“뭐, 그만큼 몸을 달구면 되죠.”
사실 낮 경기에서 가장 힘든 건 햇빛이다. 계속 햇빛 쬐다 보면 더운 것도 더운 건데, 조금 심하게 화창한 날은 시야를 방해해서, 영점이 잘 안 잡히거든.
그에 반해 오늘은 구름이 낄 거라고 하니, 나쁘지는 않겠지. 기온이야, 이제 슬슬 여름이 시작될 시기라고 해도, 아직은 딱 좋은 수준이고.
-오늘 Go가 작년에 이어, 전반기 200번째 탈삼진에 도전을····· 오늘 달성 시, 작년보다 3경기 이상 단축시키는···
대니얼이 식단에 맞춰 짜준 식사를 하며 티비를 흘끔 살피니, 아니나 다를까 내 얘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아래에는 경기 시작 시간까지 세세하게 적어서, 떡하니 떠 있었고.
그럴 수밖에, 이쪽, 베이브릿지 지역 언론이니까. 샌프란시스코야 날 싫어하는 편이지만, 그 외의 나머지 베이 지역은 날 사랑하거든.
그러니 당연히 언론에서도 나를 중심적으로 다루는 거고. 내가 이 동네 방송사를 먹여 살리는 셈이지.
“오늘은 길게 가도 되겠죠? 저번 경기 짧게 끊었잖아요?”
“이닝은 짧지만, 그만큼 체력도 소모하셨죠. 짧은 만큼 더 압축해서 던지셨잖습니까, 제 말이 틀립니까?”
“너무 정답이죠.”
접시 밑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은 뒤, 나갈 준비를 하며 슬쩍 물었지만, 안 묻는 게 나을 뻔했다. 바로 반박이 나오네.
음, 확실히 그러긴 했지.
마음 같아선 완봉까지 해서, 애스트로스를 완전히 죽여버리고 싶었는데, 그게 안 되니까, 7이닝 안에 욱여넣는다는 심정으로 빡세게 던지긴 했으니까.
그걸 꼬집는 대니얼의 말에 딱히 변명이 떠오르지 않아서,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오늘도 사람들이 많겠죠?”
“엄청나겠죠, 낮 경기에다, 일요일이니까요. 거기다 200탈삼진도 걸려 있고.”
오늘도 콜리시엄은 풍년일 거다. 말해서 뭐해, 사람들 모이기 딱 좋은 조건을 죄다 갖췄는데.
바글거리다 못해서, 아주 넘쳐날 지경이겠지. 당장 집 나간지 얼마나 됐다고, 애슬레틱스 유니폼이 여기저기 보이네. 대부분은 등짝에 내 등번호를 달고 있고.
경기장 근처로 가니, 재밌는 피켓도 보이네. 200Strout!이라. 트라웃한테 200번째 삼진 잡으라는 거구만.
혹시 못 알아들을까, 싶었던 건지, sTRike OUT이라고, 스트라이크 아웃에서 굳이 트라웃만 강조한 피켓도 보이고.
어제부터 1회에 KKK 잡으라며 소리치더니, 진짜로 진지하게 바라는 것 같네.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이제 와서 뭐 그런 말씀을···”
“KKK 말입니다, 은근히 신경쓰는 눈치시던데. 경기 시작부터 무리하시다간, 부상을 당하기 십상입니다. 괜히 근육이 놀라니까요.”
“아, 그거. 그거는 뭐··· 그냥저냥 보너스 게임이죠, 까놓고 말해서 200탈삼진이야 이미 확정이니까.”
대니얼은 괜히 저런 반응에 휩쓸려, 내가 무리해서 삼진 잡는 건 아닐까, 걱정하는 것 같은데. 당연히 무리하지.
내가 언제는 무리를 안 했나.
항상 무리하면서 사는 놈인데.
까놓고 말해서, 열 손가락을 거의 다 만큼 구질이 많은 것도 무리고, 경기당 이닝이 7이닝이 훌쩍 넘는 것도 무리고, 릴리스 포인트가 두 가지인 것도 무리고, 죄다 무리지.
다만 항상 그랬던 것처럼 무리는 당연히 할 생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하게 집착할 생각은 없다.
‘뭐, 안 되면 별 수 없지. 그게 뭐라고.’
나도 트라웃을 삼진으로 잡고 싶기는 한데, 그게 힘들다는 건 잘 아니까.
어렵다 싶으면, 그냥 무시하고 다음 사람 잡으면 되는 거지. 이렇게 잡든, 저렇게 잡든, 200K는 200K니까.
1회에 달성 실패하더라도, 그냥 그림이 좀 덜 예쁜 거지, 그렇다고 해서 아예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잖아?
“자, 오늘도 잘하러 가봅시다.”
다만 폼이 좋으니, 노력 정도는 해보는 거지. 팬들이 바라는 일이라면, 죄다 해줬는데, 이번에도 이뤄줘야 하지 않겠어?
“어? Suck이다!”
“오늘은 오래간만에 쉐보레 타고 왔네? 늘 커다란 SUV 타고 다니더니.”
“빨간색이라서 그런가, 뭔가 에인절스 선수 같지 않아? 애슬레틱스가 아니라.”
“그딴 X같은 소리는 하지도 마. Suck이 에인절스라니··· 애너하임 놈이라니, 상상만 해도 역하네.”
“의지를 보여주는 거지! 트라웃을 저 자동차 색깔처럼 빨갛게 피로 물들이겠다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오늘도 여지없이 터무니없는 소리나 하면서 잔뜩 몰려든 팬들 사이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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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오늘 같은 날, 내가 공을 받아줘야 하는데···”
“브루스 넌 Suck이랑 기록 많이 세웠잖아? 오늘은 나한테 양보해.”
오늘 내 파트너는 평소처럼 브루스가 아니었다. 조시 페글리였지.
주전 포수로서 많은 경기를 출장 중인 브루스이기에, 가끔씩 이렇게 휴식을 줘야 하기는 하니까, 말이야.
녀석은 전반기 200탈삼진의 영광이 다른 포수에게 가는 것이 아쉬웠던 건지 혀를 내둘렀다. 욕심도 많지.
나한테 받아먹은 롤렉스가 몇 갠데, 이런 것까지 꾸역꾸역 다 처먹으려고 하다니.
“Suck 너 왠지 나에 대해서 나쁜 생각 하는 것 같은데···”
“정답이야, 잘 아네.”
내 생각을 알아차린 듯, 브루스는 눈을 가늘게 떴지만, 내 당당한 모습에 입을 삐죽이면서도 별다른 불평을 하지는 못했다.
그치, 뭘 어쩌겠어? 바로 오늘 등판하는 선발투수인데. 면전에다 쌍욕 박아도 참아야지. 패드립 정도까지는 가야 멱살 잡는 거고.
“조시, 오늘-”
“알아, 알아, 트라웃 잘 관찰하라고?”
“예, 트라웃한테만 집중하고, 간간이 시몬스나 저스틴 업튼 정도만 살펴줘요.”
“나머지는?”
“나머지는··· 뭐, 느낌 안 좋을 때만 사인 보내세요.”
“오케이.”
그렇게 욕심 많은 브루스를 보낸 뒤, 조시에게 평소 브루스에게 하던 것처럼 부탁하자, 그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너무 뻔한 말이기는 해.
에인절스에 트라웃 말고 뭐가 있다고, 저 팀에서 주의해야 할 사람이야 하나밖에 없지.
‘물론 그렇다고 너무 방심하다간 한방 얻어맞겠지만.’
여유를 가지되, 긴장을 늦추진 말아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모든 워밍업을 마친 뒤.
“예에에에에에!”
“You Suck! You Suck!”
“KKK! KKK!”
언제나처럼, 고막을 터트릴 듯이 소란스러운 콜리시엄의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역시나 예상대로 꽉 찬 경기장. 요즘 신구장 얘기도 나오던데, 하나 새로 짓기는 해야 돼.
이 낡은 구장에 저렇게 많은 사람이 온다니, 너무 위험하잖아. 특히나 아주 방방 뛰고 난리를 부려대는 극성팬들도 넘쳐나는 통에, 언젠가 와르르 무너질까 봐 걱정이다.
그토록 시끄러웠던 경기장이지만, 마운드에 올라서는 순간, 놀랍도록 조용해졌다.
정확하게는 마운드에 올라서는 순간부터 내가 스스로 귀를 닫은 거지.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원래 일류 투수쯤 되면 이런 것도 가능하다. 진짜야. 내 스스로 고막을 열고 닫고 할 수 있는 거지.
이거 못하는 놈들은 신경 쓰여서 못 견뎌. 등판하는 날의 감각은 그 어느 때보다 예민해서, 아주 작은 소리조차 굉장히 민감하게 여겨지는데, 그걸 하나하나 다 느끼면, 집중을 못하거든.
‘저쪽도 준비를 마쳤네.’
시야 역시 극도로 좁아든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한쪽으로 향했다.
마이크 트라웃.
그 또한 모든 준비를 마친 건지, 이미 헬멧까지 착용하고서 배트를 매만지고 있었다.
그 역시 단단히 준비된 건지, 척 봐도 집중력이 대단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고.
내가 그를 의식하는 것처럼 그도 나를 의식할 수밖에 없지. 까딱하면 삼진이니까.
‘3번이라, 팬들이 딱 바라는 대로네.’
최근 들어서는 2번으로 자주 나온 걸로 안다. 그다음 3번에 그나마 나은 저스틴 업튼을 두는 식이지.
4번타자로 나오는 푸홀스가 완벽하게 맛이 갔기에, 덩달아 3번으로 나오던 그도 손해를 많이 봤으니,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다만 저스틴 업튼도 그리 성적이 좋은 편은 아니기에, 그나마 낫다 뿐이지 효과적인 건 아니지만.
그런데 오늘은 저스틴 업튼이 결장하면서, 익숙하게 3번으로 출장했다.
트라웃에게 시즌 200번째 탈삼진을 잡길 바랐던 팬들이 많았는데, 그 양반들은 좋겠네. 물론 어디까지나 내가 KKK를 만들어야 하지만 말이야.
‘일단 상황은 만들어 보자고.’
그러기 위해, 트라웃에게서 시선을 돌려, 1번타자에게 집중했다.
이안 킨슬러.
작년까지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에 있었던 선수로, 마냥 무시할 수는 없는 타자다.
30홈런 30도루, 30-30클럽을 두 차례나 들어가 본 타자니까.
기본적인 파워도 준수하고. 발도 빠르고, 선구안도 좋고, 수비 잘하고, 컨택도 적절한 5툴 플레이어지.
‘하지만 올해는 아니지.’
저런 타자가 있는데, 왜 에인절스를 무시하느냐고 싶겠지만, 올해는 안 그러니까 문제다.
사실 작년부터 타율 .236에 출루율 .313 장타율 .412에 22홈런으로 폼이 좀 떨어지긴 했는데, 올해는 현재까지만 놓고 본다면 그보다 더하지.
OPS가 고작 6할이거든. 장타율이 .389이던가? 출루율은 .284에. 타율은 .217로, 그야말로 폭망 수준이지. 그래도 2루수에 수비력이 좋아서 다행이긴 하나.
수준급 타자로 이름 높은 선수이니, 그가 합류해서 타선의 무게감이 더해지길 바랐던 에인절스 팬들로선 복장이 터질 거야.
“스트라이크!”
그토록 폼이 떨어지다 보니, 원래도 가지고 있던 단점이 더욱더 명확해졌다.
사실 전성기 시절에야 컨택이 준수한 편이긴 했는데.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거든. 스윙 자체가 큰 편이라서. 그래서 은근히 삼진도 잘 당하고.
장타력과 선구안으로 단점을 채우던 스타일이었는데, 그 두 가지가 주저앉았으니, 어쩔 수 있나.
“스트라이크!”
이안 킨슬러는 2구까지 얌전히 지켜보기만 했다. 아니, 이걸 지켜봤다고 해야 하나?
안 좋은 성적과 타격감에 스스로도 자신감이 떨어진 건지, 스윙을 내지 못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올 줄 알았는데 말이야.’
어제, 4타수 무안타로 꽉 틀어 막혔기에,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 보다 더 공격적으로 나올 줄 알고, 변화구만 던졌는데, 그냥 지켜보네. 이러면 더 쉽지.
스스로를 과신하는 타자도 굉장히 쉬운 상대지만, 역시 가장 쉬운 건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과 믿음을 잃은 타자니까.
그리고 이런 타자들이 꼭···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을 내지 말아야 할 때 내고는 하지. 높은 하이 패스트볼, 안 좋은 타이밍에 나온 스윙이 허공을 갈랐다.
전력투구이긴 한데, 아마도 89마일은 아닐 거야. 그보단 조금 느리겠지. 한 88마일 정도.
“You Suck!”
“198! 198!”
“Two More!”
언제나처럼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귀 닫고 있지 않았냐고? 살짝 열어뒀어. 다른 건 몰라도 내 칭찬은 들어야지.
만족스럽게 웃으며, 흘끔 전광판을 확인했다. 예상대로 88마일이 찍혔다. 정확하게는 88.6마일, 킬로로 환산하면 한 142쯤 되겠네.
원래 전광판의 구속을 신경쓰면 안 된다고 하는데, 그거야 그런 거에 휘둘리는 놈이야 그런 거고.
구속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전광판의 구속은 의외로 좋은 지표가 된다, 그날 컨디션을 알려주지.
첫 타자부터 88마일이면 확실히 폼이 좋긴 좋아. 비록 최고구속은 아니지만, 나도 약간은 여력을 남겨뒀으니까.
구속이 쉽게 나오는 거지.
‘생각해보면 신기하단 말이야.’
가끔 보면 신기하다.
점점 구속이 오르고 있거든.
여전히 90마일도 못 던지는 놈 주제에 무슨 개소리냐 싶겠지만, 진짜야. 평균구속이 올라갔거든.
더블A 때만 하더라도 84~5마일 정도였는데, 이젠 거의 87마일에 육박하지.
언론은 물론 몇몇 전문가들도 그걸 신기하게 여기고는 했다. 최고구속과 평균구속이 겨우 2마일 밖에 차이가 안 난다니, 이상하잖아?
몇몇은 내가 더 구속을 낼 수 있는데도, 일부러 안전성과 특별함을 위해 자제하는 거라는 별 개X같은 소리도 하지.
‘구속을 자제한다니, 그게 뭔-’
물론 난 어처구니가 없다.
제구나 구위에 큰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닌 이상, 구속은 빠르면 빠를수록 무조건 좋다. 그런데 그걸 왜 자제해? 또라이도 아니고.
‘진짜 90마일만 찍어도 세상이 놀랄 텐데···’
고작 90마일 가지고 무슨 세상까지야, 싶겠지만, 내가 한 짓을 봐봐.
이 구속 가지고 이런 짓거릴 벌였으니, 아마 구속이 조금만 올라가도 다들 호들갑 떨 걸?
장담컨대, 100% 또 도핑 얘기 나온다, 분명해.
‘왜 이렇게 빨리 안 올라와?’
내가 자꾸 잡생각을 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이안 킨슬러가 삼진 당하고 내려간 뒤, 다음 타자가 느릿하게 올라왔거든. 아주 종종걸음이네, 종종걸음이야.
“뛰어 X새야!”
“거북이를 처먹었나, 빨리빨리 안 올라와?”
내 200번째 삼진이 너무나도 마려운 우리 팬들은 복장이 터지는 건지, 고래고래 호통쳤지만, 그래도 아랑곳 않고 천천히 올라왔다.
만약 우리 팬들이 꼴보기 싫어서 빡치게 하려고 했던 거라면, 축하한다, 당신의 계획 보기 좋게 성공했다.
‘최근 성적이 좋지.’
드디어 타석에 올라온 2번타자, 안드렐톤 시몬스. 리그 최고의 유격수인데, 이미 말했다시피, 최근 들어 타격도 터졌다.
타율 .324에 출루율 .393 장타율 .452지. 평범한 유격수라도 이 정도면 준수한 편인데, 리그 최고의 수비력을 갖춘 선수이니, 에인절스 팬들이 그를 열렬히 사모한다는 거야 더 말할 것도 없겠지.
‘다만, 어제는 죽 쒔지. 부상 때문에 폼이 떨어진 건가?’
허나 6월 6일 부상을 당하면서 이탈했었는데, 그 이후 복귀전인 어제 경기에서 4타석 무안타로 막혔었다.
아무래도 잠깐 쉬는 동안 경기 감각이 떨어진 거겠지. 기왕이면 오늘도 안 올라왔으면 좋겠는데···
“스트라이크!”
그런 마음을 담아, 초구를 던지자, 시원스럽게 헛스윙이 나왔다. 앞서 이안 킨슬러와는 달리 아주 적극적이군.
사실 트라웃도 트라웃이지만, 이쪽도 까다로운 편이다. 삼진 잡기에는 말이야.
잘은 기억 안 나는데, 올해 삼진이 열몇 개인가 그럴 걸? 250타석이 넘었을 텐데, 겨우 그 정도면 대단한 거지.
‘선구안도 제법 괜찮지.’
그러니 삼진을 잡기 위해선 조심스럽게 돌려 깎아야 하는 스타일이다.
“볼.”
“스트라이크!”
“파울!”
그래도 확실히 폼이 덜 올라온 건지, 선구가 그렇게 좋지는 않네. 나간 건데 배트가 나왔어, 라인을 빠르게 넘어서 다행이지, 잘하면 범타가 됐겠구만.
‘계속 스윙하면서 감각을 올리려고 하는 것 같은데···’
본인 생각으로 적당히 들어온 건 적극적으로 스윙하려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야···
“스트라이크 아웃.”
더욱더 대놓고 넣어야지.
몸쪽으로 살짝 들어간 공.
제법 위험한 코스였기에 타자의 눈동자가 반짝거렸지만, 서클 체인지업은 아슬아슬하게 배트를 지나갔다.
아주 미세한 차이로 헛스윙이 되면서 스트라이크 아웃. 다시금 유썩이 나왔다.
“199! 199!”
“One More!”
그리고 그의 차례가 됐고.
기다리느라 수고했수, 그래도 오래 걸리지는 않았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올라오는 타자와 눈을 맞췄다.
“우우우우우우우!”
“Fuck Trout!”
“삼진으로 잡아버려!”
“KKK!”
자신을 향한 수많은 비난 속에서도, 그 역시 귀를 닫고 시야를 축소시킨 건지, 오직 나만 또렷하게 바라보며 올라온 타자, 마이크 트라웃과.
집착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말이야, 막상 이렇게 판이 깔리니까···
‘좀 혹하네.’
삼진이 잡고 싶긴 하네.
저런 타자한테 삼진 잡고, 시즌 200번째 탈삼진을 찍으면 진짜 만족스럽기는 할 텐데.
그것도 세 타자 연속 삼진이라면.
‘저쪽도 트리거가 눌린 것 같고.’
그리고 그건 트라웃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아까 전만 하더라도 그냥 집중만 한 것 같더니,
막상 배터박스로 올라온 순간부터는, 우리 팬들이 그토록 바라던 KKK를 깨버릴 생각이 가득해 보였으니까.
아무래도 우리 팬들이 그의 자존심의 스위치를 누른 것 같구만.
‘이래야 재밌지.’
그렇기에 더욱더 이 승부가 마음에 들었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배터박스에 가득 찬 마이크 트라웃을 가볍게 내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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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깊은 생각은 아니다.
딱히 경쟁심 같은 것도 아니고. 그냥 한번 깨보고 싶었다.
<작년보다 더욱더 강력해진 페이스!>
올해의 Go는 역시나 대단했다. 작년보다도 더욱더 괴물같아 졌지. 개막전에서 본 순간부터 이미 예감하기는 했지만.
이미 저 높은 에베레스트의 정상에 올라섰다고 생각했는데, 거기서 한번 더 제트팩을 달고 날아올랐다고 해야 하나?
마치 요술램프라도 있는 것처럼, 스스로 바라는, 그리고 팬들이 바라는 모든 걸 이뤘다.
그걸 질투하는 건 아니다.
애초에 포지션도 다를뿐더러.
조금 자신감 있게 말하자면, 까놓고 말해서 트라웃 자신도 비슷한 길을 걸었으니까.
“200번째 삼진이라, 더 빨라졌네.”
“작년엔 전반기 막판에 하지 않았었나? 거의 한 달을 단축하네.”
“3경기인가 빠르다더라. 모든 페이스가.”
전반기 200탈삼진.
그것 역시 그러려니 했고.
그런 게 당연한 투수니까.
“마이크, 너한테 200번째 삼진 잡겠다는데? KKK로.”
“1회 만에 하겠다네.”
“Go가 직접 그래?”
“아니, 걔네 팬들이.”
“걘 예전에 입 한번 턴 거 빼면, 솔직히 은근히 조용한 타입이잖아? 별말 없어.”
그것이 조금 신경 쓰이기 시작한 건, 자신의 이름이 언급됐을 때부터였다.
KKK라, 충분히 가능하기는 하겠지. 자신 역시 삼진을 몇 번이나 당해봤으니까.
자존심이 상하는 건 아니다. 팬들이야 당연히 그런 걸 바랄 수 있지. 원래 항상 더, 더를 외치는 것이 팬들이니까.
그것을 충족시켜주는 게 바로 자신들의 역할이고.
그냥 문득 떠올랐을 뿐이다.
한 번쯤 막아보고 싶다고. 그 대단한 걸음의 앞길을.
그리고 한번 깨보고 싶기도 했고, 그를 향한 당연하다는 듯한 그의 팬들의 기대를.
승부욕에 더 가깝겠지.
‘지독하게 구는 녀석인데, 나도 한 번쯤은 그렇게 해봐야지.’
어쩌면 만날 때마다, 정말이지 골이 아플 만큼 지독스럽게 피칭하는 녀석에게, 그걸 그대로 되갚아주자는 마음에서 나온 약간의 복수심이기도 하고.
‘만약 그렇게 막아버리면, 경기장 반응이 재밌겠어.’
거기에 약간의 장난기까지 포함한다면, 완벽하게 설명되리라.
“스트라이크 아웃!”
그리고 결국 판이 열렸다.
솔직히 이미 예상하기는 했지. 동료들에겐 미안하지만, 도무지 막아설 수 없는 폭주기관차 같은 녀석이니까. 당연히 이럴 거라고.
또한 당당한 척해도 은근히 팬들에게 친절한 자상한 녀석이니, 더욱더 노력할 테니까.
그렇게 올라간 삼진 두 개.
“제대로 괴롭혀 줘.”
생각을 꿰뚫어 본 건지, 클클거리는 알버트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타석에 올랐다.
“삼진 먹을 준비됐어?”
“아마도?”
“뭐야, 진짜로 당하려고? 그래주면 고맙기는 한데.”
“뭐, 당하면 어쩔 수 없는 거지. 나도 나중에 한방 갚아주면 되는 거고.”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좀 무섭네.”
익숙한 어린 포수 대신 출장한 조시 페글리의 슬그머니 묻는 말에 솔직하게 답했다.
뭐, 삼진 당하면 또 어떻겠는가? 한, 두 번 당한 것도 아니고, 어차피 삼진이야 타자에겐 늘 따르는 일인데.
그러려니 하고, 다음에 한방을 다시금 갈고닦는 거지, 물론 호락호락하게 당해서는 안 되겠지만.
“볼.”
초구는 볼. 가볍게 간을 봤다.
타격감을 체크하겠다는 거겠지. 사실 이미 올라오면서 서로를 바라본 시점부터 이미 직감했겠지만 말이다.
“볼.”
2구 역시 볼.
살짝 미묘한 코스였지만, 대기타석과 덕아웃에서 미리 파악한 대로, 이건 볼로 잡아줬다.
‘이번엔 뭘 준비했지?’
가볍게 공을 골라보면서, 깊이 고민했다. 과연 이번엔 뭘 가슴 안쪽에 숨겨뒀을까?
언제나 하나의 노림수를 가지고 자신을 상대하는 Go이기에, 분명히 또 뭔가 있을 거다.
타이밍을 흔들다가 쓰리핑거를 넣으려나? 아니면 자신의 비교적 약점 중 하나인 하이 패스트볼로 공략?
그도 아니면 오히려 더욱더 과감하게, 좋아하는 코스인 낮은 쪽으로?
혹은 아예 몸을 맞출 기세로 너클 커브나 슬라이더를 던질지도 모른다. 설사 맞는다고 해도, 헛스윙이 나오면, 그건 삼진으로 인정되니까.
수많은 구질만큼이나 선택지도 여럿이지. 그걸 하나하나 다 두들겨 봐야 하기에 골치가 아픈 상대인 거고.
“파울!”
“파울!”
“파울!”
그렇게 서로의 생각과 눈빛이 깊어지는 동안, 계속해서 파울이 나왔다.
지독스러움을 되갚아 주자고 스스로 다짐했던 것처럼, 아주 지독하게 커트했지. 억지로 몸을 비틀다시피 하면서.
릴리스 포인트를 수시로 바꿨지만, 오직 공만을 지켜보며, 집착스럽게 공을 골라냈다.
끈적하게 나올 것을 이미 예상했던 건지, 투수, Go는 덤덤하게 반응했지만, 관중들은 조금은 소란스러운 것 같았다.
귀를 막았기에 잘 안 들리지만, 아마도 또 욕이나 퍼붓고 있겠지. 그거야 트라웃 자신쯤 되면 늘 먹는 것이기에 상관없고.
“파울!”
다시금 파울.
투수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무언가 고민할 때의 버릇이지. 저런 사소한 행동까지 하나하나 분석된 투수였지만.
우스운 건, 진정으로 타자에게 도움이 되는 분석은 없었다. 애초에 그런 것 자체가 없다는 것처럼.
“너 이제 좀 그만해라.”
“투수한테 그대로 전해줘. 그냥 적당히 하자고. 왜 그렇게 욕심이 심해?”
포수가 한숨을 내쉬며, 짜증스럽게 말했지만, 오히려 반박했다. 반대로 맞춰 잡으려고 했다면, 분명히 한 차례 타이밍이 나왔을 텐데, 그걸 거절한 건 투수니까.
그래, Go도 각오가 남다른 거지. 어떻게든 삼진을 잡겠다는 생각이 든 거다. 그렇기에 기회였다.
‘하나 정도 온다.’
웬만해선 헛스윙이 나오지 않는다는 건 이미 서로 파악했다. 그러니 정말로 삼진을 잡고 싶다면, 더욱더 위험하게 들어오겠지.
위험한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위험하게. 잘못 맞으면 넘어갈 정도로, 완벽한 헛스윙을 유도하기 위해서.
그러니 그걸 잘 받아치기만 한다면, 흙을 뿌리는 걸 넘어, 한방 역시 나오겠지. 물론 투수 역시 그걸 알 거고.
“타임!”
그렇기에 타임을 요청했다.
생각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 위험한 결정구가 무엇일지.
‘커브···’
일단 떠오르는 건 하나다.
그 느릿한 슬로우 커브.
요즘 들어서 잘 안 던졌지.
하지만 중요한 상황에서 쏠쏠하게 상대의 헛스윙을 유도했다. 그렇기에 자주 던지지 않더라도, 리그의 타자들 누구나 그걸 예상하고 있지.
Go도 그걸 잘 알기에, 다시 완전히 잊혀질 때까지, 푹 숨겨두려고 하는 것 같지만.
‘그게 이번에 나올까?’
적기라면 적기고, 아니라면 아니다. 사실 그 모든 건 투수 본인이 판단하겠지. 지금까지는 그 판단이 잘 들어맞았고.
다만 딱 던지기 좋은 타이밍이라는 건 확실했다.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까, 마지막으로 나온 이후로.
하지만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었다. 분명 그리 위력적이지는 않은 공이지만, 골치 아픈 공이니까.
그걸 노리려고 하면, 반대로 타이밍이 망가진다, 가장 느린 공이기에, 기존의 구종과 차이가 극심하니까. 완전히 잊어버리면 당연히 느릿한 타이밍에 당하는 거고.
‘머릿속에 저장만 한다.’
그러니 노려서는 안 된다.
잊어서도 안 되고.
그저 머릿속 한 켠에 저장하고 있을 뿐.
비록 큰 걸 노리지는 못하더라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파악해서, 적절하게 임기응변으로 쳐내는 것이 가장 위험이 덜하지.
“후우.”
그렇게 다시 입장한 배터박스. 자세를 가다듬자, 투수 역시 준비를 마친 건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한 구로 모든 것이 끝난다. 둘 다 그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할 수 있는 최대한을 준비했다.
큼직한 와인드업. 마지막까지 포착한 릴리스 포인트는 다시 바뀌었다. 새로 만든 것으로.
깊이 쭉 던지는 식이지.
새것인데도 확실한 디셉션 때문인지, 그 왼팔의 끝에서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듯한 공을 또렷하게 지켜봤다.
‘느리다.’
공을 확인한 순간, 머리 가득 떠오른 생각은 공이 굉장히 느리다는 거였다. 그리고 가볍다는 거였고.
‘이런 느낌은···’
저 투수, Go의 공은 모든 것이 날카롭다. 하물며 주력구들 중에서 가장 밋밋한 쓰리핑거 체인지업마저 잘 만든 검처럼 예리하지.
그런데 이것은 그런 느낌 자체가 없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단 하나.
‘커브.’
슬로우 커브,
느리게 제어한 스윙.
머릿속으로 궤적을 그리며, 가볍게 배트의 궤적을 그에 맞춰서 꺾었다.
굳이 큰 힘을 들일 필요는 없지, 느리고, 가볍고, 밋밋한 공이니까, 떨어지는 걸 제외하면.
그렇기에 최대한 정교한 컨택에 집중하며 스윙을 이어갔지만, 조금은 놀라웠다.
‘어?’
공이 눈앞을 지나쳐 갔으니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타이밍으로. 느릿한 스윙과 배트가 제대로 휘둘러지기도 전에.
뭔가 잘못 본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리 없다는 건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았다.
단단히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또렷히 보고 있었고.
그에 대한 의문이 피어 올랐을 때, 야구공이 글러브로 살포시 들어갈 때 나오는 미약한 소음 역시 들려왔다.
그래, 이건···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삼진이다.
코스는 높았다. 떨어지지 않았지. 기껏 낮게 휘두른 스윙이 무색하게도.
그리고 놀랍게도···
‘86마일. 그러면··· 패스트볼이라고?’
하이 패스트볼이었다.
전광판에 찍힌 구속을 확인한 뒤, 허탈하게 웃었다. 어처구니가 없었으니까.
‘또, 뭘 장착한 거야?’
구질이 몇 갠데, 여기서 또 뭘 추가한 걸까? 황당할 지경이었으니까.
“200! 200!”
“Hell Yeah!”
“Youuuuuu Suck!”
“Trout Fucking Suck!”
경기장이 울린다.
200번째 삼진을 축하하면서.
전광판에도 글자가 떠올랐다.
집중이 탁 풀리면서, 막혔던 귀도 열렸기에 아주 생생하게 들려왔지.
그런 상황에서 그는, 트라웃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앞서 포수와 대화하면서 말했던 것처럼, 삼진을 당하는 것이야 이미 충분히 마음을 먹었으니까.
그저 저번처럼 서로에게 축하나 해주는 것이지.
‘궁금하긴 하지만, 이건 잊기로 하고, 커트하면서 감은 거의 잡혔으니···’
그리고 훗날의 한방으로 되갚아주기 위해, 다음 타석을 기다리며 갈고닦는 거고.
비록 200번째 삼진이 올라갔고, KKK가 정말로 달성됐지만, 딱 그뿐이다.
‘다음 타석을 노려보자고.’
경기는 아직 한참이나 남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