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확실히, 저번에 만났을 때보단 표정들이 밝은데?”
“똥 씹는 것처럼 표정 구기더니, 이젠 좀 살만한가 봐.”
“내성이 생겼겠지. 사건 터진 이후로 내내 욕먹었는데, 이제 이골이 난 거야.”“
6월 12일.
콜리시엄에서 마주한 애스트로스는 듣던 대로, 기세가 괜찮아 보였다.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밝았거든.
매리너스를 제치고, 3위권까지 올라갔다더니, 슬슬 되살아나고 있는 것 같은데.
“역시 제대로 밟아 놔야지, 안 그러면 괜히 귀찮겠어.”
역시, 가만히 놔둬서는 안 되겠어. 저러다 진짜로 살아나겠네.
아무리 그래도 작년 디펜딩 팀이고, 엄밀히 따지면, 선수단 자체는 오히려 작년보다 더 보강됐다.
선발 투수진이 죽여주게 됐잖아. 저렇게 흐름을 이어가다가 본격적으로 터지기 시작하면.
제 아무리 우리가 쭉 잘 나가고 있다고 해도, 꽤나 껄끄러운 경쟁팀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한 번 호구를 잡았으면, 물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목줄을 쥐고 있어야지.’
물론 내 개인적으로도 다시 한번 공포를 각인시켜줄 필요가 있었고.
레인저스처럼 나한테 손쉽게 대주는 팀으로 전락시키기 위해선, 틈 날 때마다 꾹꾹 눌러 밟아 둬야겠지.
원래 목표대로 오늘은 빡세게 잘 던져야겠어. 그런 생각으로 의지를 불태우자, 같이 몸을 풀던 브루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앞으로도 계속 말 잘 들을 게.”
“갑자기 왜?”
“언젠가 날 잡고 나 조진다며. 내가 잘할 테니까, 그러지 마라. 진짜 무서워 죽겠네.”
이미 한 차례 굴복시킨 상대도 철저하게 다시 짓밟으려는 내 지독한 마음에 결국 굴복한 모양이군.
요즘 들어 친해져서 그런가, 자꾸 개기던데, 알아서 숙이는 걸로 봐선, 재교육까지 갈 필요는 없겠어. 언젠가 날 잡고, 포심으로 조지려고 했더니 말이야.
앞으로도 계속 두고 보겠다는 뜻으로 두 손가락으로 눈을 가리키자, 녀석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오늘 경기의 목표를 다시금 재확인하고, 브루스의 기를 눌러두며 워밍업을 마친 뒤, 곧바로 불펜으로 향했다.
“내가 받아줄까?”
“됐어, 그러면 내가 너무 나쁜 놈 같잖아. 너도 네 폼에만 집중해.”
“나쁜 놈 맞지 않- 수고해라. 어우, 오늘 폼이 아주 좋아 보이네.”
브루스는 불펜피칭까지 도와줄까, 물었지만, 그러면 강압적으로 포수를 다루는 가혹한 투수처럼 보일 것 같아서, 거절했다.
이미 예전에도 몇 차례쯤 불펜피칭을 받아준 적이 있기는 하지만, 이미 기를 눌러 놨는데, 그렇게까지 해버리면, 좀 그림이 이상하지.
그렇게 브루스와 헤어진 뒤, 대니얼과 함께 불펜으로 입장하자, 당연하게도 스콧 에머슨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7이닝이라고요?”
“그렇지, 잘 아네. 떼써도 소용없는 거 알지?”
“알죠, 완봉 직후인데, 귓등으로도 안 들으시겠죠.”
“그래, 이제 좀 일이 편해져서 좋네. 매번 Go, 너 설득하느라 힘들었는데.”
“제가 뭐, 떼쓰면 얼마나 썼다고···”
“이제 다섯 살 된 내 조카도 Go 너보단 나아.”
저번 경기에서 완봉을 했으니, 오늘은 자연스럽게 리미트가 정해졌다. 길어야 7이닝이지. 그 이상은 절대로 안 되고.
코치가 나에게 익숙해진 만큼, 나도 그를 잘 알기에 순순히 받아들였다.
퍼펙트라도 진행하는 것이 아닌 이상에야, 무조건 7이닝이겠지.
‘기왕이면 완봉까지 해서 잘근잘근 밟는 편이 가장 좋지만···’
어쩔 수 있나.
애스트로스 대신, 레인저스를 족치는 걸 선택한 것을. 허락된 이닝 하에 적절하게 족치는 수밖에.
“나이스볼~”
사실 완봉 이후라고는 해도, 그 뒤에 휴식일까지 껴서 푹 쉰 덕분에 여력은 남아돈다. 폼은 계속 좋고.
그러니 그 힘을 적절하게 7이닝 수준으로 압축해서 때려잡아야겠지.
한 구 한구, 성실하게 박아 넣자, 처음에는 립서비스성이 짙은 나이스볼로 시작했던 불펜포수의 감탄사가 조금씩 잦아들었고.
“음!”
마침내 그것이 감탄사나 립서비스가 아닌, 묵직한 신음소리에 가까워졌을 때, 불펜피칭이 막을 내렸다
드디어 불펜의 문이 열리자, 항상 그래 왔듯이, 사람이 가득 찬 콜리시엄은 나를 반겨줬다.
“Suuuuuuuuuck!”
“You Suck!”
“It’s Suck Time!”
여전히 엄청난 환호성.
적어도 내가 데뷔한 이후, 날이 갈수록 더 커지면 커졌지, 잦아든 적은 없다.
“휴스턴이 Suck될 시간이다!”
“치터 새끼들 죽여버려!”
“나사를 불태워라! 과학자들을 총살해라!”
이 야만인들 같으니. 인류 문명의 기술이 집약된 곳을 불태우라고 소리치는군.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네, 휴스턴이 다시 단단해진 것이.
우리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팀들에게서 저런 소리를 들었을 텐데, 누구 말처럼 내성이 안 생기고 버틸 수가 있나.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대로 멘탈이 박살나서 폐인이 되겠지만, 메이저리거쯤 되면 이미 평범함의 범주를 넘어선 초인들이다. 그러니 더욱더 단단하게 제련될 수밖에 없지.
‘척 봐도 눈빛들이 살아있구만.’
마운드로 걸어가며, 애스트로스 덕아웃을 훑으니, 대충 눈빛들이 살벌하구만. 아주 좋아. 저래야 깨트리는 맛이 있지.
도자기 굽는 장인의 심정으로 망치로 대가리를 내려쳐서 완전히 조각조각 내야겠어. 어지간한 접착제 가지고는 다시 붙기 힘들 정도로.
‘저쪽도 마찬가지로 개꿈을 꾸고 있구만.’
반대로 애스트로스 역시 나를 바라보며, 올해 첫 맞대결에서 그랬듯, 이번 기회를 디딤돌 삼아 다시 우뚝 일어설 계획인 것 같은데.
오히려 좋아, 시들시들했으면 때려 부수는 맛이 없었을 텐데, 저항이라도 해야 재밌지.
또한 의지가 잘 갖춰졌기에, 망가질 땐 더 확실하게 망가질 테고.
“Suuuuuuuuuck! 우리가 왔다!”
“크하하하, 새 친구도 있어!”
“오늘 처음 직관하는 녀석인데, 제대로 보여줘야지?”
그렇게 수많은 생각과 관찰 속에서 마운드에 도달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레이더스지.
원정에서도 꽤나 자주 들어본 목소리이고, 또한 작년에도 비슷한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으니, 아마도 레이더스 내에서도 진짜 중의 진짜들일 거다.
뭐, 언제나 내 경기를 직관하는 사람들이니, 별로 신기할 것도 없긴 하다만, 새 친구? 이건 좀 흥미롭네.
우리 험악한 바바리안들이 이번엔 또 어느 부족에서 새로운 전사를 모집했나 싶어 흘끔 보니, 예상과 조금 다른 외형의 사람이 있었다.
‘저게··· 레이더스?’
뭔가 좀 호리호리하고, 패기도 떨어지는데, 왠지 모르게 어색한 느낌도 들었다.
보통 새로 유입되는 레이더스들은, 기존에 나에게 홀린 레이더스가, NFL의 오클랜드 레이더스 팬들 중에서 전염시켜 데려온 사람들이라, 신입이라고 해도 거기서 거기다. 근데 저 사람은 좀 다르네.
뭐랄까, 사자들 사이에 낀 토끼 같다고 해야 하나? 거,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어쩌다가 저런 양반들한테 붙들려서···
‘그래도, 용기 내서 레이더스에 합류할 정도면, 진짜 내 팬이라는 거지.’
왠지 좀 안쓰럽게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더욱더 의지가 샘솟았다.
저런 괴인들과 함께할 정도로 날 좋아한다는 뜻이 아닌가?
솔직하게 말해서 레이더스는 애슬레틱스의 팬이라기 보단, 순수하게 내 추종집단에 가까우니까.
그런 레이더스와 함께 한다는 건, 심지어 오클랜드 레이더스 출신도 아니라는 건.
그저 순수하게 나를 더 열심히, 더욱더 격렬하게 응원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걸 텐데. 그 정도의 열성 팬이라면, 제대로 만족시켜 줘야지.
“플레이볼!”
곧 마운드에서의 적응도 마친 뒤, 경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익숙한 타자가 타석에 올라왔다.
1번타자 조지 스프링어.
항상 이렇지. 딱 예상했던 타순이란 말이야. 사실 이게 가장 베스트이기도 하고.
‘팀이 꼬라박았는데도 성적이 좋긴 좋단 말이야.’
하긴, 그러니까 애스트로스가 개짓거리까지 해가면서 억지로 발목에 족쇄를 걸려고 했던 거지.
‘파워도 준수하고, 컨택도 좋고, 여러모로 까다로운 타자인 건 확실하지.’
사실 조지 스프링어뿐만이 아니라, 애스트로스 타자들 자체가 여전히 강력하긴 해.
“스트라이크!”
뭐, 강하고 나발이고는 나한텐 별로 중요한 사실은 아니지만 말이야.
초구는 포심 패스트볼. 심플하게 그냥 몸쪽으로 박은 코스에 배트가 헛돌았다.
완벽하게 헛스윙은 아니고, 적당히 타이밍을 가늠해본 것 같네.
“볼.”
2구는 잘 골라냈다. 나도 존을 파악하려고 한 거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쁘진 않군.
기세를 회복하기는 했어.
허나 그럼에도 나한테 호구 잡힌 것이 완전히 지워진 건 아닌지, 조지 스프링어는 긴장감에 찌들어 있었다.
그저 좋은 기세와 타격감으로 그것을 억누르고 있을 뿐, 거기에 내가 적절하게 힘을 더해준다면···
“스트라이크!”
긴장감은 두려움이 되겠지.
3구는 서클 체인지업, 타자는 지켜봤지만, 날아간 공은 유려하게 꺾이며, 정확하게 바깥쪽의 낮은 지점을 찍었다.
투 스트라이크 원 볼.
카운트가 몰리자, 그를 옭아맸던 긴장감은 더욱더 무거워진 것 같았다. 벅찬 숨을 간신히 뱉는 걸 보면.
그렇게나 쫄리는데도, 꿋꿋하게 버티는 모습이 참으로 갸륵하게 느껴져서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그 박수, 삼진으로 대신했다.
진심을 다한 공 하나, 이거야 말로 최고의 예우잖아?
“You Suck!”
“유우우우우우 써어어어억!”
“크헤헤, 치터 새끼들은 삼진이 딱이지!”
4구, 하이 패스트볼에 배트가 크게 헛돌며, 조지 스프링어는 타석에서 물러났다.
내 개인적인 예우와는 별개로, 온갖 종류의 조롱 속에서. 뭐, 이골이 났을 테니, 알아서 감내하겠지.
“아웃!”
그다음, 2번타자로 올라온 알렉스 브레그먼은, 젊은 녀석답게, 조지 스프링어보다도 더욱더 꿋꿋한 모습으로, 아주 패기기 가득하게 스윙했지만, 그저 빗맞은 타구가 나올 뿐이었다.
3구째, 비껴 맞은 투심이 마운드 앞으로 굴러온 것을 가볍게 잡아 1루로 휙 던지며 아웃처리했다.
“이 땅딸보 새꺄!
“이 치터 땅딸보 새끼!”
“우리 제드가 너보다 훨씬 낫다!”
그리고 올라온 3번타자, 호세 알투베. 특히나 더 많은 조롱을 당하는데, 어쩔 수 없지.
치팅도 치팅이지만, 뭔가 좀 조롱하게 딱 좋잖아. 누가 봐도 눈에 띄는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있으니까.
지금도 투표에서 넉넉하게 1위를 유지 중인 제드 라우리에 빗대어, 그가 땅딸보보다 훨씬 낫다며 팬들이 소리치는데. 안 봐도 비디오네.
뒤에서 제드 라우리가 아주 흡족하게 웃고 있겠어, 상상하는 것만으로 왠지 기분이 나쁘지만···
‘그래도 우리 2루수, 기 좀 살려줘야지.’
아무리 띠꺼워도, 우리 팀을 팍팍 밀어줘야지.
솔직히 투표 1위는 제드지만, 성적은 이쪽이 더 나은데, 이번 기회에 좀 깎아줘야겠어.
“스트라이크!”
가뿐하게 던진 초구. 배트는 나오지 않았다. 살짝 지켜봤을 뿐. 최대한 침착하게 타격하려는 것 같네.
“파울!”
2구는 과감하게 스윙했지만, 커터가 빗맞으면서 파울라인을 넘었다, 그것으로 투 스트라이크.
타자는 애써 호흡을 다시금 바로 잡으며, 집중을 가다듬었으나.
“스트라이크 아웃!”
난 그에게 여유를 줄 생각이 아니었다. 아마도 내가 한 구 빼거나. 아니면 오프스피드나 변화구로 낚으려고 할 줄 알았나본데, 이번에도 패스트볼이다.
그대로 루킹 삼구삼진.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코가 베인 호세 알투베는 허탈하게 웃으며.
“You Suuuuuuuuuuck!”
“Hell Yeah!”
“땅딸보 컷! 집에 가서 엄마 젖이나 더 빨아라!”
다시금 조롱 속에서 퇴장했다. 별로 불쌍하지는 않다. 저런 조롱 듣는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나한테 삼진 당하면 멘탈이 영혼까지 털리는 거야 이미 유명한 사실인데, 알아서 버텨내겠지.
‘어디보자, 만족 좀 하셨나?’
그럭저럭 만족스럽게 끝난 이닝, 난 슬쩍 다시 시선을 돌려 아까 전, 뉴페이스가 있었던 방향을 봤다.
“날 봤어! 날 발할라고 데려가 줄 거야!”
“아냐! 네 뒤에 있는 여자를 본 거야!”
“You Suck! You Suck!”
그쪽은 죄다 레이더스라, 아주 반응들이 대단한데, 그 열광 속에서도 우리의 신입생은 표정이 미묘했다. 뭔가 고민에 잠긴 것 같기도 하고.
‘생각보다 깐깐하신 양반이구만, 하긴, 보통이 아니니까, 레이더스랑 같이 다니는 거겠지.’
아마도 KKK가 아니라서 마음에 안 드는 거겠지. 역시, 아무리 신입이라도 레이더스는 레이더스인가 보네. 보통 사람은 아니었어.
‘어디 한번 보자고, 마지막까지 그런 표정을 짓는가.’
내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너무 과한 반응을 보이는 다른 레이더스보다야 낫지만. 왠지 ‘날 이렇게 대한 건 네가 처음이야’ 같은 느낌이구만.
“브루스, 더 빡세게 가자.”
흥분 없이 멀쩡한 얼굴에 오기가 생겨, 덕아웃으로 돌아가며 그렇게 말하자, 브루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더?”
“아주 시원하게 불태워야지. 아직 좀 부족해.”
“말 잘 듣겠다니까, 왜 그래. 잘못했어.”
그러더니, 내가 여전히 자기한테 꿍해 있다고 생각한 건지, 대뜸 사과하는데. 그런 거 아니야 새꺄.
####
“스트라이크 아웃!”
“Yeeeeeeeeah!”
“You Suck!”
경기는 일방적으로 이어졌다.
2회 초, 안타 하나가 나오긴 했지만, 시종일관 Go가 애스트로스를 두들겨 팼으니까.
3회까지 삼진만 여섯 개를 잡으면서 말이다.
그에 당연하게도 콜리시엄은 언제나처럼 열광에 휩싸였지만.
‘으음···’
고든은 이런 분위기가 어색했다. 사실 학창 시절부터 너드에 가까운 삶을 살았기에, 스포츠와 거리가 멀었는데.
기자(파파라치)라는 직업을 가지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더욱더 사람의 열정 같은 감정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으니까.
항상 숨어서 사진이나 찍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경기장에서, 그것도 가장 광기 어린 사람들 틈에 끼어 야구를 보고 있다니···
‘잘못돼도 뭔가 단단히 잘못됐어.’
이러다가 분위기에 휩쓸리면, 해야 할 일을 못할 것 같았기에, 3회 말을 맞이해, 잠시 공수교대가 이어지며, 분위기가 잔잔해졌을 때, 그는 슬그머니 이 무리의 알파메일, 켈빈에게 물었다.
“어때? 기자 양반! 직접 보니까 더 죽여주지?”
“예, 엄청나네요! 역시 레이더스! 열기가 남다르군요! 저, 그런데 레이더스는 원정까지 따라다닌다면서요?”
그가 생각하기에, 적어도 이 도시 안에는 Go의 여자친구나 그 비슷한 존재가 없다.
주변의 다른 도시들도 마찬가지고. 애초에 누군가를 만나지조차 않았으니까.
그렇다며 남는 것은 원정이지. 그것이 원거리 연애 일지, 아니면 그저 육체적 쾌락 일지는 조금 다른 문제지만.
그렇기에 슬그머니 묻는 그의 말에 켈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굉장히 자부심이 넘치는 표정으로.
“그렇지, 매번은 아니고, 로테이션하는 형식이야. 우린 대부분 쫓아다니는 편이지만. 필라델피아까지 갔던 거 말했던가?”
“하하, 예, 잘 들었죠, 정말 엇지던데.”
다름이 아니라, 레이더스 역사에 길이 남을, 필라델피아 침공을 주도한 이가 바로 자신이니, 자부심이 넘칠 수밖에.
“사실 그거 하려고 일년 내내 돈 버는 거지. 원정지에 가서 You Suck을 외치면 기분이 아주 좋거든.”
“우리 기자 양반도 관심이 좀 있으셔? 다음에 같이 갈래?”
“하하, 그건 차차 생각해보고, 그런데, 원정에 따라다니면 별의별 모습을 다 본다던데···”
마찬가지로 더욱더 어깨가 올라간 레이더스의 제안에 그저 어색하게 웃은 고든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 이 정도로 광적인 이들, 원정까지 거의 다 쫓아갈 정도로 신앙심, 아니아니, 미쳐있는 사람들이라면, 분명 뭔가를 알겠지.
외부에 밝히기 미묘한, 그저 안에서 묻고 넘어가야 할 조금은 민망한 일까지도.
“다 보지, 호텔 근처에 그리피가 쫙 깔려 있는데, 누구라고 말은 안 하겠지만, 유부남인 놈이 팔짱 끼고 같이 호텔로 들어가기도 하고 그래.”
예상처럼 숨겨진 뒷 세계를 꺼내는 말에 고든은 눈을 반짝였다.
메이저리거에게 원정지의 현지처 내지는 전문 파트너와 같은 그리피가 있다는 거야 유명한 소문이다.
물론 죄다 그런 건 아니지만, 그토록 난잡한 생활을 하는 선수가 종종 있지. 매일 밤 뉴욕 거리를 휩쓸었다는 데릭 지터야 전설적인 인물이고.
어쩌면 Go도 그런 케이스가 아닐까? 여자친구는 따로 없는 것 같으니, 그런 현지 파트너만 있는 걸지도.
‘저토록 위대한, 아니아니, 대단한 선수인데···’
호텔 방에서만 잠깐 만나는 탓에, 드러나지 않는 것이라면 충분히 이해가 되지.
“그럼 Go는 어때요? 자기관리가 철저한 선수인데. 헐리웃 쪽에서도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제법 되거든요.”
“Suck? Suck야 뭐···”
그렇기에 슬쩍 물은 고든은 켈빈의 말에 침을 꿀꺽 삼켰다. 비록 여자친구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 젊은 슈퍼스타의 파트너 정도면 충분히 비싼 값을 받을 수 있겠지.
드디어 그간의 개고생이 열매를 맺는구나, 생각하며, 두 눈이 벌게진 고든이었지만···
“없어, 그냥 원정에서도 철저해. 가끔 보면, 나도 소름 끼친다니까. 어떻게 그렇게 생활하지?”
“그러니까 신이지! 켈빈 너 이 새끼 아직도 그걸 몰랐어?”
“아니, 신이라는 건 알았는데, 그 정도인 줄은 몰랐지.”
“야구를 사랑해도 너무 사랑하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Suck을 그렇게 사랑하는 거고.”
이번에도 개뿔도 없었다.
오히려 레이더스가 더욱더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였지.
‘역시, 그 모든 혈기를 죄다 야구에 표출하는 건가? 정말로 위대한 선수- 아니야! 아니야!’
세뇌의 영향일까, 저도 모르게 찬양으로 이어지던 생각을 애써 집어치운 고든은 마지막 희망을 담아서 물었지만.
“호- 혹시 몰래 방에서 만나는 건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잖아요?”
돌아온 답변은 단호했다.
“글쎄, 루틴이 워낙 철저해서, 그럴 시간 자체가 없을 걸.”
“그렇게 생활하는데 여자까지 만나면, 하루에 네 시간쯤 자도 모자랄 거야.”
“원정 내내 등판일을 빼면, 분 단위로 시간이 철저해서, 여유 자체가 없어.”
그 확신에 찬 말 앞에서, 고든은 처참하게 침몰했다. 정말로 없다고? 아무것도? 진짜로? 그렇게 대단한 선수가? 이토록 위대한 사람이?
허탈함이 차올랐을 때, 켈빈이 날카로운 눈으로 물었다.
“그런데, 우리 기자 양반 그런 건 왜 궁금해? 우릴 취재한다더니, 딴마음이 있나본데?”
“그럴리가요 그냥···”
그 순간 정신이 바짝 들었다.
지금까지는 친하게 지냈다지만, 만약 자신이 Go의 파파라치라는 것이 밝혀지면, 웃으면서 집단 린치를 가할 사람들이지.
살기 위해서 머리를 굴린 고든은 이름 두 개를 꺼냈다.
“제가 어렸을 때 마크 맥과이어랑 로저 클레멘스를 진짜 좋아했거든요.”
“마크 맥과이어? 로저 클레멘스? 아 그···”
“그때 진짜 배신감을 느꼈었는데, Go는 역시 이런 곳에서도 완벽하군요! 좋아하는 보람이 있어요! 더욱더 좋아지네요.”
“그래? 우리 Suck은 야구 외에도 모든 게 완벽한 사람, 아니, 신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즐겨.”
‘살았다.’
마크 맥과이어와 로저 클레멘스. 야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고든에게도 익숙한 이름들이다.
약물로 말이다. 그중에서 로저 클레멘스는··· 불륜이라는 말하기 그런 사생활도 있고.
아무래도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야구는 몰라도 이런 쪽으로는 잘 알지.
간신히 그것을 떠올려낸 고든은 미묘한 표정이지만, 더 추궁하지 않고서 고개를 끄덕이는 켈빈의 모습에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난 것에 안도감이 생겼지만, 그렇다고 해서 허탈함마저 가시지는 않았다.
‘하, 진짜 아무것도 없었던 거네.’
그렇다면 나는 대체 왜 여기 있는 걸까? 그것도 내 사비까지 지출하고, 돈까지 쓰고, 이런 미친놈들 사이에 끼여서.
그 모든 것에 대한 현타감이 닥쳐왔고,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접자, 깔끔하게 접고, 돌아가는 거야.’
애초부터 말도 안 되는 일이었던 거겠지. 그냥 자신이 X신이었던 거다. 저런 완전무결한 사람의 뒤를 캘 생각을 하다니.
‘경기장, 괜히 왔네.’
비싼 돈 들여 굳이 직관까지 한 것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래, 기왕 온 거, 경기나 보자.’
어차피 돈은 이미 썼고, 중간에 나간다고 환불도 안 되니, 기왕 이렇게 된 거, 태어나서 처음으로 스포츠 경기를 즐겨보는 생각에 그제야 그라운드로 시선이 향했다.
“Suuuuuck!”
“다 죽여 버려!”
“이대로 쭉쭉 가자!”
“오늘은 딱 15개만 잡자!”
때마침 3회 말, 애슬레틱스의 공격이 끝나고, 다시 4회 초로 이어지며, Go가 마운드에 올라왔다.
‘잘하는 것 같기는 하던데···’
비록 다른 곳에 신경이 팔려 있었고, 딱히 야구를 좋아하지도 않기에, 주변의 이들처럼 와닿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고든이 보기에도 그는 잘하는 것 같기는 했다. 타자들을 시원하게 돌려세웠으니까.
‘신이라···’
어쩌면 정말로 신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
실력도 좋고, 생긴 것도 멀끔한데, 사생활까지 깨끗하다니.
이 사이비 종교집단, 레이더스가 어째서 그를 신처럼 모시는지, 왠지 조금 알 것 같기도 했다.
“삼진 잡아, 삼진!”
그라운드와 가까운 좌석이라서 그런지, 그의 표정이, 그리고 분위기가 물씬 느껴졌다.
모든 걸 포기하면서, 마음에 생긴 빈자리는 그 모든 것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였고. 고든은 저도 모르는 새, 홀린 것처럼 두 눈동자가 그라운드에 고정됐다.
“세이프!”
첫 시작은 아쉬웠다.
이번에도 안타를 허용했지.
“야이 X발 새끼야! 삼진이나 처먹으라고!”
“그것도 못 잡으면 어떡해!”
솔직히 그냥 깔끔하게 잘 맞은 것 같은데, 레이더스는 아주 격노했다.
역시 이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며, 다시금 흥미가 떨어지려고 했을 때.
“스트라이크 아웃!”
본격적인 피칭이 시작됐다.
첫 타석에도 묘하게 동작이 빨라진 것 같더라니, Go는 마치 비디오 영상의 재생 속도를 높인 것처럼, 순식간에 공을 던졌으니까.
“You Suck!”
순식간에 삼진 하나.
세뇌하듯 외웠던 You Suck이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스트라이크 아웃!”
그리고 삼진 둘.
다음 타자 금방 역시 물러났다. 이름이 카를로스 코레아던가? 워낙 빨리 스쳐갔기에 조금은 희미했다.
“You Suck!”
그저 You Suck, 그것만이 생생했다.
고든은 생각했다. 왠지 조금, 점점 더워지는 것 같다고. 이제 6월 초순이니, 여름이 시작될 시기이기는 하나. 캘리포니아가 이렇게나 더웠던가?
북부인데?
“후우···”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써 호흡을 뱉어봤지만, 나오는 것은 그저 뜨거운 바람이었다.
‘이게··· Go. 아니-’
Suck.
다른 사람들처럼, 왠지 모르게 그렇게 불러봤다. Suck이라고. 대놓고 욕이기에 조금은 그래서, 주변의 권유에도 그냥 계속 Go라고 불렀었는데.
지금은 어째서인지, 목구멍에 버터를 바른 것처럼 손쉽게 흘러나왔다.
“스트라이크!”
그것에 화답하듯, 세 번째 타자에게도 그는 똑같이 던졌다. 숨이 가빠졌다. 수백 미터를 쉬지 않고 달린 것처럼.
분위기에 압도된다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분명 오랫동안 쫓아다니며 봐왔던 선수이기에, 누구보다도 그에게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다르네, 완전히.’
모든 걸 포기하고, 욕심을 내려놓고, 순수하게 즐기자는 마음으로 내려 본 그라운드, 마운드의 위에 선 그의 모습은 지금까지 봐왔던 것은 그저 모두 다 허상이었다는 것처럼 전혀 달랐다.
슈퍼스타답지 않게, 별다른 느낌이 없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단 몇 분 만에, 커다란 산처럼 느껴졌다.
그것에 압도되어.
“스트라이크!”
소리를 낼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토록 징글징글하게 느껴졌던 레이더스가 한편으로는 대단하게도 느껴졌다.
“Suuuuck!”
“하나 더 던져!”
어떻게 소리를 낼 수 있는 건지, 궁금할 정도였으니까. 자신은 누군가 실로 입을 꿰맨 것처럼 말문이 막혔는데 말이야.
경기를 보는 한편으로, 그런 고든을 관찰하던 켈빈은 피식 웃었다. 종종 저런 반응을 보이기도 하지, 새로 데려온 친구들은.
기존의 레이더스 출신들 중에서도 저런 녀석들이 있지만, 특히나 평소에 스포츠에 별로 관심이 없던 지인들은 대부분 저랬다.
압도가 되는 거지. 단 한 명의 사람에게. 그렇게 서서히 자신들처럼 미쳐가는 거고.
‘역시, 아무리 봐도 스포츠 쪽 기자는 아니야.’
어쩌면 파파라치일지도 모른다. 묻는 질문들이 하도 수상했으니까. 다른 근육뇌들과 달리, 한 무리를 통솔하는 자신쯤 되면 딱 느낌이 오지.
방금 전의 질문에서 어느 정도는 확신이 생겼다. 어영부영 수습하는 꼴이 우스워 된통 혼 좀 낼까 생각하기도 했는데···
‘그럴 필요는 없겠네.’
비록 그가 켈빈 자신이 바란 것처럼 인텔리 기자 양반은 아닐 수도 있다.
다른 목적을 품고, 어쩌면 나쁜 탐욕을 가지고 그들에게 접근한 걸 수도 있고.
허나 이젠 상관없다.
한번 홀리기 시작한 이상, 빠져나갈 수는 없을 테니까.
“스트라이크 아웃!”
이젠 진짜로 레이더스가 된 거지. Suck은 늘 그랬듯 새로운 여행자의 발목에 족쇄를 채웠으니까.
마지막 삼진이 올라갔을 때.
켈빈은 부추겼다.
“숨 크게 마시고 질러!”
대체 뭘? 고든은 그런 멍청한 질문을 하진 않았다. 그것은 방금 전의 행동으로 충분했으니까.
그저 배운 것처럼, 보고 들은 것처럼 고든 역시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그것을 토해냈다.
“Youuuu Suuuuuuuuuck!”
“Hell Yeah!”
“KKK!”
달궈진 몸 안에 차디찬 맥주를 들이붓듯, 짜릿한 시원함이 온몸에 감돌았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어째서 이 사람들이 이토록 미칠 수밖에 없는 건지를.
‘이거였어. 그래, 이거였다고.’
그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소리칠 수밖에. 우렁차게 토해내는 고든의 모습에 주변의 이들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음, 이제 좀 볼 만하군!”
“크하하, 아주 후련하게 지르네! 우리 기자 양반, 자질이 있단 말이야!”
“그래, 이제 좀 레이더스 같네! 계속 그렇게 지르란 말이야! 눈치 보지 말고! 누가 시끄럽다고 노려보면 X이나 까라고 하면 되니까!”
그렇게 콜리시엄의 파파라치는 사라졌다. 그저, 한 명의 새로운 레이더스가 추가되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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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회 초는 삼진 두 개를 곁들이며, 다시금 삼자범퇴로 틀어막았고.
6회 초에는 다시금 안타를 두 개나 내주긴 했지만, 그 이상의 실점 없이, 삼진 하나를 포함해, 타자들을 잡아채며 가뿐하게 틀어막았다.
“You Suck!”
그러는 동안 깐깐했던 신입생은 완전히 넋을 놓았다. 아주 대차고 소리치고 있지.
KKK부터 정신줄을 놓는가 싶더니, 완전히 홀딱 빠졌구만.
목이 아프지 조차 않은 건지, 4회 초 이후, 5,6회 내내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대네. 빨갛게 물든 얼굴로 말이야.
비록 여전히 좀 호리호리하기는 하지만, 영락없는 레이더스군. 그래, 저래야 레이더스지!
좀 입맛이 까다롭고, 욕심이 크다고 생각했더니, 흐흐 역시 내 삼진쇼를 맛보더니 헤어 나오지를 못하는구만.
꽤나 흡족했지만, 아직 끝난 건 아니다. 마지막까지 서비스를 철저하게 해야지. 절대로 도망칠 수 없도록.
“Suck 너 표정이 엄청 수상하네. 나쁜 생각 하는 것 같아.”
“공이나 잘 받아. 마지막 이닝인 거 알지? 실수하지 마라.”
“하루이틀 받는 것도 아닌데 실수는 무슨, 최선을 다할 테니, 걱정하지 마.”
브루스가 그런 내 마음을 알아차린 건지, 눈을 가늘게 떴지만, 살짝 노려보는 것만으로 곧바로 진압됐다.
‘저쪽도 완전히 꺾였구만.’
그렇게 덕아웃으로 돌아온 뒤, 흘끔 상대팀을 파악했다.
새로운 레이더스가 넋을 놓은 것처럼, 애스트로스도 정신줄을 놓았다. 이번에도 발리고 있잖아. 멀쩡하면 이상하지.
그래도 안타를 네 개나 치기는 했지만, 그 대신 삼진도 12개나 잡혔으니 말이야.
‘마지막 방점까지 확실하게 찍자고.’
이제 마무리만 잘하면, 앞으로 기세가 얼마나 좋아지든, 절대로 나한테 고개를 쳐들지 못하겠지.
그 마지막 화룡점정을 위해, 다시금 마운드에 올라, 4회 초에 시동이 걸린 이후, 이미 충분히 과열된 엔진에 다시금 기름을 부었다.
‘율리 구리엘.’
이닝 선두타자는 5번타자 율리 구리엘. 원래도 애스트로스를 안 좋아하지만, 특별히 더 싫어하는 선수지.
그렇기에 앞선 두 타석에선 삼진 두 개로 깔끔하게 때려잡았고 말이야.
‘꽤나 절박해 보이는 눈치인데···’
그래서인지, 그는 금방이라도 픽 쓰러질 것처럼 표정을 지었지만, 딱히 동점심이 들지는 않았다. 그저···
“스트라이크!”
딱 먹기 좋겠구나, 싶었을 뿐.
여전히 예리함이 가득한 초구, 서클 체인지업에 율리 구리엘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배트가 흔들렸다.
큼직한 헛스윙. 자세가 완전히 무너졌지.
“스트라이크!”
빨라진 속도와 수시로 바뀌는 릴리스 포인트에 타자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렀지만, 따라오기는 벅차 보였다.
2구 쓰리핑거 체인지업에 다시금 헛스윙이 나왔으니까.
“타임!”
결국 숨 가쁜 속도를 버티지 못한 율리 구리엘은 간신히 타임을 요청하며, 호흡을 가다듬으려고 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독이었다.
“파울!”
“스트라이크 아웃!”
한껏 빨라진 흐름에서 한번 등을 보이고 도망친 순간, 다시 탑승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니까.
4구째, 너클 커브가 파고들자, 그는 이미 결과를 예감한 듯 눈을 꼭 감으면서도, 억지로 스윙을 가져갔지만, 당연히 공은 눈먼 스윙에 닿지 않았다.
그저 유유히 꺾이고, 떨어지며, 배트를 피해, 포수 글러브 안으로 들어갔을 뿐.
“파울!”
뒤이어, 첫 타석에서 안타 하나를 쳤었던 6번타자 조시 레딕은 율리 구리엘 보다는 타격감이 살아 있는 듯했지만.
그 역시 그리 자신감 넘치는 타격을 선보이진 못했다. 분명 처음보다 더욱더 적응하고, 익숙해졌을 텐데도, 오히려 스윙은 더욱 망가져 있었지.
그 혼자만 그런 것은 아니기에, 그를 욕하거나, 탓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볼.”
“볼.”
그래도 끝까지 공을 골라내며, 끈질기게 승부를 이어갔지만.
‘기회를 줘선 안 되지. 그냥 잡자.’
당연하게도 나는 그 이상 승부를 이어갈 생각이 없었다. 마지막 희망을 남겨두지 않을 생각이었으니까.
오늘 목표는 단순히 때려잡고, 찍어누르는 걸 넘어, 뿌리까지 뽑는 거거든.
“아웃!‘
바깥쪽으로 찍힌 코스, 그는 커트하려던 건지, 배트를 냈지만, 공은 마지막 순간 살짝 꺾여가며, 배트를 어설프게 스쳤다.
차라리 헛스윙이었다면, 한 차례라도 더 기회가 있었겠지만, 어설프게 빗맞은 커터는 그저 유유히 굴러갈 뿐이었다.
유격수 마커스 시미언이 처리하는 것으로 아웃이 올라가자, 몇 걸음 채 달리지 못한 조시 레딕은 허리에 손을 올리며 하늘을 올려봤다.
마치 이 모든 것들이 다 원망스럽다고 말하는 것처럼.
“스트라이크 아웃!”
그리고 마지막, 7번타자 에반 개티스가 배터박스에 올라온 이후, 그대로 얼어붙으며, 가볍게 루킹삼진을 당하면서.
되살아난 기세에, 다시금 타오르는 듯했던 애스트로스의 눈동자는 완전히 꺼졌고.
“You Suck!”
새로운 레이더스의 불은 더욱더 활활 타오르면서, 7이닝 14K라는 기록을 남긴 채, 화려했던 쇼는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