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A’s]
[Suck이 레인저스는 진짜 기가 막히게 잡는단 말이야.]
└레인저스‘도’에 가깝지 않나? 죄다 잘 잡잖아?
└죄다 때려잡는 중에서도 유독 레인저스한테 모질긴 하지.
└난 딴 거 다 필요 없고, 이제 진짜로 안심이야. 다시 Suck이 폼을 확실하게 찾은 것 같으니까.
└근데 오늘 그거 가능한 거 아니야?
└그래서 굳이 언급 안 하잖아? 솔직히 설레발일 수도 있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레인저스에, 글로브 라이프 파크라서···
└원래 한 번 해본 곳이 더 편한 법이지! Let's Go Suck!
당연한 말이지만, 애슬레틱스 팬들은 그저 행복했다. 자신들이 아는 고유석의 모습이 완전히 돌아왔으니까.
지난 경기부터 폼을 회복하더니, 아니나 다를까, 레인저스를 기가 막히게 때려잡는 모습에 팬들은 자연스레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레인저스의 악몽’, Go, 다시금 레인저스를 나락으로 몰아넣다!>
<부진 의혹을 가뿐하게 떨쳐내는 Go, 글로브 라이프 파크를 다시금 뒤흔들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드디어 그의 끝이 보인다면서 호들갑을 떨었던 언론 역시 당연히 그러한 시류에 편승했고 말이다.
이렇듯 고유석의 호투에 애슬레틱스가 환호하고 있었을 때, 지구 반대편, 태평양 건너의 한국에선 조금은 미묘했다.
고유석의 호투야, 소수의 헤이터를 제외하면, 대다수 사람들이 기원하는 일이라고는 하나, 약간은 얄궂었으니 말이다.
상대편으로 맞닥뜨린 추민수 역시 최근 연속 출루를 이어가며, 좋은 흐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딱 폼이 올라온 고유석을 만났잖은가?
[추민수 개아깝네]
-고유석 잘 던지는 건 좋은데, 추민수 연속 툴루 오늘 끝날 것 같아서 아쉬움
└최근 폼 좋아서 더 끌고 갈 수도 있었을 거 같은데, 상대를 너무 X같은 놈을 만났음
└고유석은 유교야구 좀 해라, ㅈㄴ무자비하네
└하필이면 이런 시기에 고유석 만나냐
계속해서 좋은 기세가 이어질 수도 있었던 시기에 하필이면 딱 만나버린 최악의 상대는 사람들의 한숨을 자아냈다.
물론 프로의 세계이니, 어쩔 수 없다는 것은 잘 알았지만 말이다.
또한 다른 것도 아니고, 다시금 퍼펙트가 이어지고 있으니, 거기다 대고 선배 예우를 위해 한방 맞으라고 소리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스트라이크 아웃! 고유석! 오늘 경기 열 번째 탈삼진을 잡아내며, 계속해서 호투를 이어갑니다!
-오늘도 결국 10탈삼진을 찍네요. 마치 과학처럼 느껴질 정도예요.
그렇기에 팬들은 그저 아쉬움을 곱씹으며, 데자뷰마냥 다시금 레인저스를 때려잡는 고유석의 피칭에만 집중했다.
6회 말, 이닝 시작부터 속도가 빨라지더니, 손쉽게 타자들을 잡아내는 고유석의 모습은 그런 아쉬움을 눌러주기에 충분했으니까.
오늘 역시 10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공무집행이라도 되는 듯 일처리를 하는 것이 조금 지독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아웃!
그렇게 마지막 타자까지 손쉽게 잡아내며, 다시금 삼자범퇴로서 6회 말이 종료됐고.
6이닝째 퍼펙트를 이어가는 고유석을 보며, 사람들은 다음 이닝에 있을 마지막 기회에 대한 기대를 놓았다.
-오늘 아주 심상치가 않죠?
중계진 역시 고유석의 퍼펙트 달성에 초점을 맞췄고 말이다.
허나, 다시금 닥쳐온 그런 지독한 상황 속에서도, 레인저스 선수들은 최후의 희망을 놓지 않았다.
물론 그런 최후의 희망조차 고유석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에 대한 방법까지도.
####
7회 초는 금방 끝났다.
사실 레인저스랑 나한테 가려져서 그렇지, 오늘 우리 타자들도 잘하지는 못하고 있지.
“올스타 2루수 어디 가셨나? 꼴랑 2점인 거 보면, 오늘은 안 나온 것 같은데.”
“어흠흠, 뭐, 2점이나 냈으면 된 거지··· 뭘 그렇게 까지.”
“제드, 지금 저한테 말대꾸하신 건가요?
“그럴 리가 있어.?절대로 아니야. 내가 어떻게 감히 Suck 너한테 말대꾸를 해, 혹시 목말라? 물이라도 가져다줄까?”
“나쁘지 않군요. 한잔 부탁드리죠.”
“금방 가져올 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금 덕아웃의 무소불위 권력자다. 폭군처럼 굴어도 아무도 뭐라고 못 하지.
야수들은 꼴랑 2점 내놓고 망했는데, 선발투수는 6이닝 퍼펙트? 어우, 말도 못해.
AL 올스타 투표에서 2루수 1위라는 자부심에 떵떵거리는 제드 라우리조차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물을 가져다 바칠 정도라면 말 다한 거지.
똑같이 귀하신 신분인 투수들이야 그냥 낄낄 웃으면서 즐기는 눈치고.
‘이렇게 분위기 좀 푸는 거지.’
내가 진짜로 나쁜 놈이라서 나이 한참 많은 선배한테 심부름시키는 건 아니다. 진짜야. 내가 그 정도로 개차반은 아니야.
퍼펙트 그거 뭐, 한두 번 한 것도 아닌데, 다들 너무 쫄아 있더라고. 그래서 그냥 이렇게 농담 좀 지껄이면서 적당히 풀어준 거지.
물론 서른네 살 먹은 아저씨가 손수 가져다 바친 물이 아주 시원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퍼펙트할 느낌은 아닌데 말이야.’
그리고 솔직하게 말해서 오늘은 퍼펙트할 정도의 느낌은 아니야.
좋기는 한데, 그렇다고 해도 그냥저냥 완봉이나 하는 날이지, 노히터나 퍼펙트할 정도로 좋은 날은 아니거든. 그냥 레인저스가 너무 쉽게 털리고 있을 뿐.
‘거기다 상대의 눈빛도 아직 꺾이지 않았고 말이야.’
보통 퍼펙트할 정도로 폼이 좋거나, 기운 넘치는 날은, 경기가 후반까지 다다르면, 상대가 알아서 기가 죽는다.
눈도 못 마주쳐.
그런데 지금 레인저스는 개같이 멸망하는 와중에도 꿋꿋하게 나를 노려보고 기회를 엿보고 있지.
그것은 곧 제드 라우리가 바친 물 한잔으로 목을 축인 뒤에 이어진 7회 말에서 드러났다.
‘진짜 너무하시네. 후배 보기를 돌 같이 하시는구만. 최영 장군도 아니고.’
7회 말.
당연하게도 첫 타자는 추민수 선배다. 출루 하나 없이 깨끗하게 타순이 이어졌으니까.
이제 세 번째 타석인데, 아쉬웠던 앞선 승부들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기세 자체는 더욱더 올라온 것 같았다.
특히나 눈동자가 이글이글거렸고 말이야. 그래도 이전 타석까지만 하더라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젠 아주 원수처럼 보시네.
“볼.”
“볼.”
그토록 집중력이 올라온 덕분인지, 투구동작이 빨라서, 공을 보는 것이 더욱더 어려워졌을 텐데도, 정확하게 코스를 골라냈다.
“파울!”
스윙 역시 매서웠고.
최근 쭉 이어졌던 좋은 기세와 최고조로 달한 집중력이 어우러지면서, 감각이 한계까지 올라온 거겠지.
‘까다롭다, 까다로워.’
투수 입장에서 저런 타자는 까다롭다.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그 외의 나머지 잔가지는 죄다 쳐내는 건데, 그러면 좀 힘들지.
‘그래도 스윙이 여전히 짧아.’
허나 그렇다고 해서, 그저 막막하기만 하냐면 그것도 좀 아니지. 약점은 언제나 존재하는 법이니까.
이미 말했다시피, 추민수 선배, 아니, 저 타자가 나를 상대하는 방식은 간단하다.
최대한 컨택에만 집중하기 위해, 큰 스윙을 지양하여 타격의 정확도를 높이는 방식이지. 그 대신 장타를 거의 포기한 것이고.
그것이 심히 까다롭기는 하나, 잡으려면···
“파울!”
못 잡을 것도 없지.
이를 앙 다물고 던진 4구.
7회 말의 전력투구에 어깨가 살짝 저릿했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감당 가능했다.
쭉 뻗는 포심에 다시금 스윙이 나왔지만, 묵직한 충격 때문인지, 짧았던 스윙은 마치 빗맞은 총알처럼 튕겨져 나갔다.
기본적으로 짧게 타격해서, 파워가 부족하니, 작정하고 전력투구로 던지면, 못 밀어낼 정도는 아니지.
‘삼진은 힘들 것 같고, 범타나 유도하자.’
다만 삼진은 잡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범타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리라.
그렇기에 더는 지체하지 않았다. 확실한 목표가 잡혔는데, 뭣하러 여유를 줘? 그냥 냅다 달리는 거지.
다시금 투구동작을 취하자, 타자 역시 흐름을 유지하려는 듯, 타임을 요청하거나, 타석에서 물러서지 않으며, 그대로 자세를 잡았다.
그런 타자와 눈을 맞추며, 깊게 숨을 내뱉는 동시에 팔을 휘둘렀다.
“씁-”
목표지점은 몸쪽.
그렇지만 살짝 안쪽으로.
다만 타이밍을 살짝 꼬우기 위해서 새로운 릴리스 포인트로 던졌는데···
공이 왼손을 떠난 순간 깨달았다. 타자가 나를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경기 내내, 아니, 그 이전에도 최대한 선구와 컨택에 집중했던 그는, 눈을 감고 휘두르듯 작정하고 배트를 당겼다.
‘오우, 쉣.’
내내 들었던 틱틱거리는 미세한 타격음이 아니라, 고막을 찌르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렇기에 안심했다.
‘홈런은 아니네.’
일단 넘어간 건 아니거든.
홈런은 딱 들으면 알아.
맞은 놈이 듣기에도, 그 타격음이 청아하거든. 아주 깔끔하고, 깨끗하지. 웅장하기도 하고.
그러니 이 날카로운 소리는 필시···
‘라인 드라이브구만.’
“와아아아아아아!”
“Choo! Choo! Choo!”
“진짜, 진짜 너밖에 없다, X발 X나게 사랑한다!”
라인 드라이브다.
그리고 페어가 됐겠지.
음, 퍼펙트 날아갔군.
‘제드가 가져다준 물을 토해내야 하나?’
제기랄, 솔직히 깨질 것 같다고는 생각했는데, 그래도 조이 갈로나, 오늘 특별하게 감이 좋은 주릭슨 프로파가 깨트릴 줄 알았다. 이번 이닝이 아니라, 다음 이닝에서.
그런데 바로 깨지다니, 멋진 척 갑질했던 게 쪽팔려지는구만.
희미하게 죽어가던 글로브 라이프 파크는 한순간 폭동이라도 일어난 듯, 광기에 휩싸였다.
이미 한번 당해본 양반들인 만큼, ‘설마 또?’라고 생각했을 텐데, 그 공포가 멀끔하게 사라졌으니, 얼마나 기쁘겠어.
아주 영웅 등극이구만.
왠지 섭섭한 마음에 2루에 안착한 타자주자를 흘겨봤지만, 별다른 제스처를 하지는 않았다.
‘나한테 쌓인 게 많았나 보네. 하긴, 선배도 일단은 레인저스니까.’
진짜 진심을 다해,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었거든. 무더운 여름날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뜨거운 물에 목욕하며 하루의 피로를 풀어낸 뒤, 팬티 한 장 입고서 냉장고 안에 보관해둔 차가운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마신 사람처럼.
진짜로 이 정도다. 과장이 아니야. 아주 속이 따 후련하다는 표정인데, 한편으로는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선배에게 이런 말 해도 되나 싶지만, 굉장히 꼴 받네.
‘누가 보면 내가 무슨 나쁜 짓이라도 한 줄 알겠어. 그냥 투수로서 타자들 때려잡은 건데.’
“Justice! Justice!”
실제로 홈팬 중 몇몇은 정의구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저스티스, 정의를 외치기도 했다.
레인저스가 보기엔, 내가 얻어맞는게 정의인가 봐. 물론 우리 팬들은 이것이야 말로 최악의 악행이겠지만.
“Choo! 네가- 네가 어떻게-”
“배신- 배신이야! 이건 배신이라고!”
“Traitor!”
“Fuuuuuuuuuck!”
“X같은 X신 새끼들! 얌전히 그냥 쳐 당하라고!”
레이더스야 뭐, 아주 저주를 퍼붓는군. 이쪽도 정상은 아니야. 상대 타자가 안타 쳤는데, 거기다 대고 배신자라고 소리치다니.
‘죄다 미쳐가는구만.’
내가 광기를 일으키는 건지, 광기가 가득한 곳에 내가 떨어진 건지는 몰라도, 콜리시엄처럼 글로브 라이프 파크도 광기에 젖어가고 있는데.
‘그러니 나도 미쳐야지.’
이것이 흐름이라면, 나도 파도 위에 올라타야지.
벤치에 괜찮다는 사인을 보낸 뒤, 슬쩍 상대팀 벤츠를 훑었다. 눈여겨본 위험분자들이 보이는군.
아주 이글이글 눈동자가 타오르고 있었지. 저쪽도 확실하게 올라온 것 같네.
흘끔 뒤를 보자, 마찬가지로 타자주자, 추민수 선배 역시 여전히 눈빛이 뜨거웠고 말이다.
대충 그림이 그려지는 군. 뭘 꿈꾸고 있는 건지가 훤히 보여. 나한테 글로브 라이프 파크에서의 첫 실점을 안겨줄 작정이겠지. 어쩌면 그 이상까지.
‘일단 천천히 생각해보자.’
이미 품고 있던 방법 하나가 떠오르기는 했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다, 더 두고 봐야지. 직접 타석에서 느낌도 봐야 하고.
“이대로 역전까지 가자!”
“이참에, 알링턴 무실점도 깨버려!”
“홈-런! 홈-런!”
그렇기에 일단은 눈앞의 타자에 집중했다. 2번타자 아이재아도 퍼펙트가 깨진 것에 열기가 오른 듯 눈동자가 빛나긴 했지만. 그 정도론 어림도 없다.
오늘 빠이팅 넘치는 모습을 보여줬던 그에게 홈팬들이 걸은 기대 역시 어림도 없고.
“아웃!”
3구 만에 빗맞히며 높이 뜬 타구에 2루 주자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고, 타자는 가뿐하게 아웃됐다.
“스트라이크 아웃!”
그다음 타자인 3번타자, 노마 마자라야 뭐, 이미 말했듯 가슴 깊이 각인된 공포에 찌든 사람이니, 퍼펙트 깨진 것 정도로는 일어날 수 없고.
“야이 개쓰레기들아!”
“제발, 하나만 치라고 하나만!”
“니들이 사람 새끼냐!”
그렇게 순식간에 투아웃.
득점을 꿈꿨던 홈팬들은 순식간에 몰린 아웃카운트에 절규했다. 잘 맞은 외야 플라이 하나씩만 쳤어도, 지긋지긋한 알링턴 무실점을 깨트리는 것을.
타자 두 명 다 내야조차 넘어가지 못한 채 순식간에 물러났으니까. 복장이 터질 수밖에 없지.
그런 홈팬들을 위해서, 나는 한 가지, 아니, 두 가지 선물을 준비했다.
‘그래, 나도 봤어.’
4번타자, 조이 갈로.
그가 타석에 올라오자,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흘렀고, 그런 와중에 브루스는 황급히 사인을 보내왔다. 위험하다는 신호지.
이번엔 나도 봤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인도 보냈고, 포수가 아니라, 벤치로.
정확하게는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던 스콧 에머슨에게.
나를 잘 아는 터라, 이미 직감했던 건지, 그는 내가 보낸 사인에 별다른 제스처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수락했을 뿐.
“어?”
사실 작년에 아주 좋은 룰이 생겼었다. 투수에게 어느 정도는 이로운 룰이지.
현재 MLB 커미셔너는 야구가 빨라지길 바랐다. 속도감이 떨어지고, 오랜 식간이 지체되기에, 야구의 인기가 떨어진다는 거지.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혁신적인 룰을 도입했고, 도입하려 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잘 가라.’
자동 고의사구지.
콜드 고의사구라고도 하고.
이게 투수의 필살기다.
제 아무리 폼이 좋은 타자도, 제 아무리 실력이 좋은 타자도, 그냥 거르면 끝이지. 이게 필살기가 아니면 뭐가 필살기겠어? 아예 타석에 오를 기회조차 주지 않는 건데.
‘세상 참 좋아졌다니까, 옛날에는 고의사구라고 해도 공 네 개를 던져야 했었는데 말이야.’
이젠 공 하나 안 던져도, 그냥 벤치에서 사인이 나오는 것만으로 고의사구가 인정되다니.
은근히 네 개 다 던지는 게 귀찮은 일인 데다, 그냥 대충 던졌다간 맞을 수도 있기에 약간은 껄끄러운데, 간편해져서 좋네.
‘좋은 룰인데, 적극적으로 이용해야지.’
뜨겁게 타오르며, 날 씹어먹을 기세였던 조이 갈로는 이내 주심의 제스처에 허탈하게 웃으며 배트를 내팽개치듯 던진 뒤 터덜터덜 1루로 걸어갔다.
“뭐야 X발!”
“x발 이런 게 어딨어!”
“야이 Chicken, 아니, Pussy새끼야! 승부해! 승부하라고!”
“이런 X발 개X같은 X발새끼! 고추 때! 고추 때라고!”
욕설이 난무했다.
딱 봐도 심상치 않아 보였는데, 그냥 휙 걸러버렸으니, 허탈함이 장난이 아니겠지.
근데 아무리 그래도 남의 고추를 그렇게 막 떼버리시면 되나. 너무하네. 고의사구 한 번 했다고 환관으로 만들다니.
“그런 얘기는 다 끝난 다음에 해야지. 왜 벌써 해.”
그리고 타이밍도 틀렸어.
####
‘됐어! 됐다고!’
“으아아아아아!”
추민수는 저도 모르게 함성을 내질렀다. 정말이지, 달콤하게 느껴진 한방이었으니까.
머리가 좋은 녀석인 만큼, 자신의 타격을 잘 알고, 익숙해졌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레인저스가 녀석에게 익숙한 만큼, 녀석도 우리에게, 타자들에게 익숙할 테니까.
그렇기에 순간적으로 냅다 풀스윙을 때렸는데, 아주 속이 후련한 직선타가 나왔으니, 어찌 기쁨의 포효를 뱉지 않겠는가?
‘한 방, 한 방이면 돼!’
선배 된 도리에서 호배의 퍼펙트를 깬 것은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그래도 팀이 우선이다.
그렇기에 추민수는 자신이 살려낸 희망에 기뻐하며, 한 방을 기다렸다. 오늘, 특별히 감이 좋은 녀석들이 보여줄 한 방을.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비록 순식간에 투 스트라이크가 올라가면서, 다시금 걱정이 올라오긴 했지만.
‘됐다.’
곧이어 올라온 4번타자, 조이 갈로를 보며 그것은 씻은 듯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제대로 감각이 올라왔으니까.
이 정도 경력쯤 되면, 딱 보면 알지. 타자가 미쳐 있다는 것 정도는. 같은 타자이기에, 그런 타자가 얼마나 강력한 존재인지도 알고.
경기 시작부터 차근차근 올라오던 감각이 절정에 달했을 거다. 그렇기에 추민수는 기대감을 가졌지만···
“아···”
투수의 대처는 완벽했다. 군더더기 없었지. 말했다시피, 영리한 녀석이니, 손쉽게 길을 찾아냈지.
조이 갈로가 허탈한 한숨을 뱉으며 1루로 걸어갔을 대, 추민수 역시 헛웃음을 흘렸다.
“지독하지?”
“진짜로, 너무하네, 정말.”
“같은 팀인 나도 가끔씩 그런 생각이 들긴 해.”
클클거리는 2루수의 목소리에 가볍게 동조한 추민수였지만, 아직 희망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주릭슨도 많이 올라왔어, 그리고 제대로 터졌다.’
그렇게 조이 갈로가 걸어 나간 뒤, 웅성거리는 분위기 속에서 입장한 다음타자, 주릭슨 프로파는 이마가 울긋불긋했다. 핏줄이 솟아 있었지.
5번타자 주릭슨 프로파, 저 녀석 또한 오늘 느낌이 굉장히 좋은 동료 중 하나였는데. 비록 조이 갈로 같은 수준은 아니긴 하나, 충분히 기세를 갖췄지.
그런데 자신의 앞에서 고의사구가 나온 것이 트리거가 된 건지, 제대로 터진 것 같았다.
추민수는 그의 감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얼마나 화가 치밀어 오르겠는가. 자기 앞에서 걸렀다는 건, 본인을 무시한다는 뜻이나 다름없는데.
투수가 생각하기에, 본인 앞에서 주자를 쌓아둬도 될 정도라는 것이니 말이다.
‘제발 감정만 잘 다스려라.’
아직 젊은 녀석이니, 감정에 휘둘리다간, 자칫 큰 스윙만 세 번하고 삼진 당할 수도 있었기에.
추민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홈 플레이트를 지켜봤고, 다행히 스스로 감정을 갈무리하는 듯, 주릭슨 프로파는 살벌한 얼굴과 달리, 덤덤한 걸음걸이로 타석에 입장했다.
그리고 다시 1루로 걸어갔다.
“어?”
“진짜 또라이라니까··· Choo 너도 3루로 가봐.”
다시 한 번 고의사구.
투수는 이번에도 공을 던지지 않았다. 아무런 미련 없이 타자를 그냥 보내줬지.
그 황당함 때문인지, 부글부글 끓었던 몸안의 힘이 쭉 빠졌다.
“쟤 제정신인가?”
황당함을 넘어, 그냥 이 모든 상황이 이해가 안 됐으니까.
‘코치나 감독이··· 아니, 그건 아닐 텐데···’
코치나 감독의 판단인가, 싶기도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저 정도 수준의 투수가 마운드에 있는데, 벤치에서 함부로 고의사구를 한다고? 그것도 연달아서 두 번씩이나?
어림도 없는 소리다.
메이저리그의 생리를 알면 개소리라는 걸 충분히 알 수 있지. 이곳에서 감독의 권위는 결코 슈퍼스타의 아성에 미치지 못하니까.
그러니 순수하게 투수 본인의 선택일 가능성이 높다는 건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기 손으로 만루를 만든다고?”
그 선택은 너무 파격적이었다, 지금까지 저 녀석, 저 투수가 보여줬던 퍼포먼스처럼.
제 손으로 만루를 만든다니, 그것도 주자 2루라서, 아웃카운트 하나만 잡으면 이닝이 끝나는데, 알아서 위기를 초래한다니. 믿기지가 않는 일이지.
‘무슨 문제라도···’
워낙 상식 밖의 일이었기에, 레인저스의 타자 추민수가 아닌, 선배 추민수가 슬며시 고개를 들 정도였다.
저 아직은 어린 후배가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그래서 무너지고 있는 건가 싶었으니까.
그런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은, 비틀비틀 3루에 도달했을 때였다.
“미친놈···”
“그거 욕이에요? 욕이라면 저도 동의합니다. Suck 쟤 진짜 좀 또라이라니까요. 마이너에선 저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이걸 만루를 만드네.”
뒤통수밖에 보이지 않는 2루와 달리, 어느 정도 옆모습이라도 볼 수 있는 3루에 도착했을 때, 추민수의 눈에 들어왔으니까.
올라간 입꼬리가, 실실 웃고 있는 투수의 표정이.
욕설이 아닌, 그저 순수한 의미에서 나온 탄식 같은 말에 3루수 맷 채프먼은는 앞서 2루수였던 제드 라우리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한국어로 했기에, 제대로 알아듣지는 못했겠지만, 충분히 그 의미가 전달되었겠지.
“우우우우우우우우우!”
“그랜드슬램 가자!”
“이 새끼 드디어 돌아버린 건가? 아예 죽여버려!”
“오도어! X발 이딴 짓거리당했는데 참으면, 넌 X발 남자도 아니야!”
그의 안타 직후부터 달아올랐던 분위기는 활화산처럼 터지기 시작했다. 뜬금없이 만루가 만들어졌으니, 오죽할까.
허나 그런 팬들과 달리, 추민수는 오히려 모든 힘이 빠졌다. 더는 걸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만루에서 3루주자이니,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집중해야 할 순간이겠지만, 몸에 힘이 깃들지가 않았다.
그는 잘 알았으니까.
“스트라이크!”
투수가 가장 안전한 방법을 선택했다는 것을.
자신이 그토록 열심히 기다리고, 노력하고, 깊이 바랐던 레인저스의 기회, 약팀에게 주어지는 단 한 번의 찬스가.
“스트라이크!”
완벽하게 분쇄되었다는 것을.
본인의 앞에서 나온 두 번의 고의사구에 루그네드 오도어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고.
“스트라이크 아웃!”
그의 감정이 가득 담긴 세 번의 스윙 끝에 만루의 기회는 허무하게 사라졌다.
그 허탈함을 이기지 못하고, 이닝이 끝났는데도 3루 베이스 위에 우두커니 선 추민수는 허리에 손을 올린 채 투수를 봤다.
아예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조이 갈로와 주릭슨 프로파의 컨디션이 좋고 타격감이 좋다는 걸 이미 파악했겠지.
그러니 굳이 위험하게 그들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쿨하게 내보낸 뒤, 비교적 폼이 안 좋아 보였던 루그네드 오도어를 잡는 걸 택한 거고.
그래,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그 가정이 그대로 이어진다면, 오히려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이지.
맞는데, 분명히 그건 맞는데,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지 않은가?
‘겁도 없나?’
그렇게 만루를 내줬다가 실수로 한방 맞으면? 큰 거라도 나오면? 그대로 그랜드슬램인데?
아니, 홈런까지 갈 것도 없이, 적당한 안타만 나와도 1점이고, 코스가 좋으면 그대로 동점이다. 싹쓸이 면 역전이고.
그런 걱정은 없었던 건가? 그런 가정은 해보지도 않은 건가? 겁이라는 감정 자체가 거세된 건가?
아니, 분명히 했을 거다. 머리가 나쁜 녀석이 아니니까. 분명히 최악을 가정하기도 했겠지.
그런데도 이런 선택을 내렸다는 건···
‘대체 자신감이 얼마나 강하다는 거야?’
스스로를 깊게, 아주아주 깊게 믿는다는 뜻이겠지.
절대로 그런 불상사 따윈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스스로 만루를 만들어, 그 불속으로 뛰어들 정도로.
그 철저한 자기애에 질린 추민수는, 자신을 흘끔 보더니, 윙크하고 다시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투수, 고유석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거 똘개이 아이가?”
그의 한숨과 같은 말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진심과, 확신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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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ck, 너도 진짜···”
“정상은 아니야. 이미 알고 있기는 했는데, 더 확신이 생겼어.”
“쓰라고 만든 룰을 쓴 건데, 왜들 이러시나 모르겠네.”
덕아웃으로 돌아오니, 동료들이 질린 듯한 눈을 하고서 나를 쳐다봤다.
특히나 투수들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도 했지.
그나마 스콧 에머슨은 내가 고의사구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에 조금 덤덤했지만, 그도 가슴을 쓸어내리기는 했다.
‘그럴 수밖에 없지. 보통 일은 아니니까.’
만루라는 게 얼마나 압박감이 심하고, 부담감이 큰지 잘 알기에, 그런 위기 속으로 스스로 들어간 내가 더더욱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이쪽이 더 안전하다. 최소한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래.
‘조이 갈로, 주릭슨 프로파, 둘 다 폼이 절정에 달했는데, 그보다는 그냥 베이스 내주고 편한 타자 잡아야지.’
자칫 장타라도 맞았다간, 주자 2루이니 분명히 실점할 텐데, 차라리 거르는 편이 더 확실하잖아?
땅볼은 홈런이 될 수 없듯, 고의사구도 절대로 홈런이 되지도, 장타가 되지도, 깊은 안타가 되지도 않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해버리면, 루그네드 오도어는 분명히 흥분할 수밖에 없고.’
흥분한 타자를 잡는 건 손쉽다. 그 타자가 폼이 안 좋다면 더욱더 그렇고. 스윙이 커지니, 삼진은 물론, 최소한 빗맞은 범타 유도까진 충분히 가능하지.
물론 그게 트리거를 건드리면서, 갑자기 각성할 수도 있지만, 그 정도는 감내해야 하는 거고.
추민수 선배가 퍼펙트를 깨준 덕분에, 오히려 선택이 쉬웠다. 어차피 퍼펙트도 깨졌는데, 베이스 아낄 필요가 뭐 있어?
“넋이 나갔네.”
“당연히 그래야지. 다음 이닝부터 쉬울 거니까, 그냥 빠르게 가자.”
그 덕분에 위기를 넘겼는데, 사실 효과는 하나가 더 있다. 바로 레인저스의 멘탈이지.
퍼펙트가 깨진 순간, 저쪽 기세는 확 살아났다. 최악의 굴욕은 면했으니, 더 거리낄 것도 없어졌다는 거지.
그런데 지금은 넋이 나갔다.
힘이 쭉 빠진 듯한 모습이지.
그럴 수밖에, 다른 것도 아니고, 투수가 직접 만루라는 밥상을 차려놓고 먹어보라고 약 올렸는데, 그걸 받아먹지도 못했으니까.
제 아무리 멘탈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멘탈이 터질 수밖에 없지.
‘완전히 죽었네, 죽었어.’
그렇기에 퍼펙트가 깨졌는데도, 오히려 레인저스 타자들의 눈동자는 동태처럼 거무죽죽했다. 홈팬들도 마찬가지고.
그러니 남은 건···
“스트라이크 아웃!”
이미 영혼이 빠져나간 죽은 시체에다가 총질하는 거지.
8회와 9회는 빠르게 사라졌다. 기본적인 멘탈 자체가 터졌으니,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지.
“스트라이크 아웃!”
9회 말, 네 번째 타석에 오른 추민수 선배 역시 더는 눈동자가 타오르지 않았다.
그저, 축 늘어진 몸과 질려버린 얼굴로 잠시 배터박스에 있다가 내려갔을 뿐.
“스트라이크 아웃!”
곧이어 후속타자들도 손쉽게 잡히면서, 2점차는 영원히 좁혀지지 않았고, 경기는 그렇게 끝났다.
9이닝 16K 1피안타 2고의사구 무실점 완투완봉승. 글로브 라이프 파크에 걸맞은 성적을 남긴 채로.
다른 것도 아니고, 폼 좋을 때 알링턴에 왔는데, 못해도 이 정도는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