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기분 좋게 스타트를 끊기는 했지만, 군데군데 함정이 심어져 있기는 했다.
자칫 마음 놓고 걸어가다가 발이 걸리기 십상이지.
‘어제 홈런 하나 치더니, 오늘도 타격감이 괜찮은 것 같은데···’
대표적인 함정은 얘다.
조이 갈로, 전날 홈런을 날렸던 5인방 중 한 명이자, 레인저스를 상대할 때는 언제나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하는 녀석이지.
2회 초, 타석에 올라온 그는 화끈한 한방을 보여줬던 전날처럼 제법 감각이 벼려진 듯한 기운을 물씬 풍겼다.
약실에 총알을 장전시켜 놓은 것처럼, 자신의 왼손에 큰 거 한 방을 제대로 장전시켜 둔 것처럼.
단발에 불과하겠지만, 한방 맞는 순간 골로 가겠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라면, 미리 해체시켜두는 게 최선이지만···’
딱히 마땅한 방법이 없네.
제 아무리 타이밍을 흔들려고 해도, 단단히 버티면서 어떻게든 카운터 펀치를 날릴 작정인 것 같았으니까.
원래 저런 놈들이 제일 무서워, 가드 바짝 올리고 두들겨 맞으면서도, 안주머니에 있는 주머니칼을 꽉 쥐고 있는 놈들 말이야.
‘일단 간부터 좀 보자.’
어차피 계속 보기만 해선 답도 안 나온다. 그의 준비가 어느 정도이고, 타격감이 얼마나 대단한지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결국에는 대가리 박치기를 해야 하는 법이지.
그렇기에 찝찝함을 잠시 눌러두고서 당당하게 초구를 찔러 넣었다.
“파울!”
그러자 곧바로 나온 스윙. 바깥쪽 포심 패스트볼이었는데, 미리 예측하고 있었던 건지, 꽤나 자신감 있는 타격이 이뤄졌다.
화약이 터지듯, 날카로운 타격음을 남긴 타구는 대포알처럼 쭉 뻗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미 파울라인을 넘어갔다.
“아아아···”
“조금만! 조금만 더 옆으로 갔어야지!”
“하필 저게 라인을···”
홈팬들의 안타까운 탄식이 흘렀지만, 귀에 박히지는 않았다. 왜냐고?
“어휴··· 식겁했네.”
내 한숨 소리에 가려졌거든.
스윙 나오는 걸 보자마자 식은땀이 쫙 나오네. 아주 작정하게 휘둘렀거든.
다행히 라인을 넘어갔기에 망정이지 자칫, 폼 좋다고 깝치다가 큰 거 하나 맞을 뻔했어.
다른 곳도 아니고(?) 글로브 라이프 파크에서 그건 절대로 안 되지. 진짜 다행이야.
‘타격감은 확실하네. 약실에 제대로 장전돼 있어.’
파울타구 하나지만, 이걸로 모든 파악은 끝났다.
난 아쉬운 듯 입맛을 쩝쩝 다시는 조이 갈로를 훑어보며, 확신을 가졌다. 음, 얜 폭탄 확정이네. 조심해야겠어.
이 고릴라 새끼. 뭔 힘이 저래? 살짝 빗맞은 것 같았는데 저게 쭉 날아가네.
‘덩치 큰 짐승을 상대할 땐, 측면 공격이 정석이지.’
진짜야. 그, 뭐야, 내셔널지오그래픽 보면 사자들이 물소 잡을 때, 앞에서 꽝 붙는 게 아니라, 사선에서부터 달려들어서 목을 물잖아.
1대1 정면 대결로 붙으면, 서로 부딪치는 순간 사자가 자신이 짓밟혀서 죽으니까. 제대로 박으면 아마 10미터도 더 날아갈 걸?
피칭에서도 그런 지혜가 필요하다. 안 되는 건 피하는 것이 상책이고, 위험한 상대는 돌아서 공격하는 것이 최선이지.
“볼.”
한 가지 안심인 것은 오늘 폼이 좋은 덕분에, 제구가 잘 된다는 거다.
만약 컨디션이 안 좋아서 제구가 흔들리는 날이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까다롭고, 위험한 상대였겠지만.
“볼.”
“스트라이크!”
오늘은 살살 돌려 깎을 수가 있지. 이전 이닝, 1회 말에서 이미 스트라이크 존은 어느 정도 파악해뒀다.
그것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공을 과도 삼아, 사과 껍질을 깎아내듯, 살살 외곽 부분을 돌았다.
조이 갈로가 생각보다 훨씬 선구안이 좋아, 출루율이 높은 편이라고는 하나, 나랑 제구력 놓고 눈싸움할 정도는 아니지.
지금 당장도 제법 위험하지만, 아직 그 정도로까지 집중력이 올라오지도 않았고 말이야.
그러니 살살 놀리다가 어느 정도 타자의 약이 달아 올랐을 때. 사선으로 돌아 들어가서, 그대로 목을 낚아채면 승부가 끝나는 거지.
‘잡자.’
순간적으로 몸쪽을 날아든 코스에 조이 갈로는 눈동자를 반짝였다. 그러곤 너클 커브를 예측한 듯, 몸을 눕히며 스윙 동작을 이행했지만.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공은 그저 꺾일 뿐, 떨어지지 않았다. 그냥 슬라이더거든.
그대로 헛스윙, 5구째에 삼진을 당하며 조이 갈로는 다시금 씁쓸함을 곱씹으며 입맛을 다셨다.
네 타자 연속 삼진이 된 것이지만, 그로서도 그리 나쁜 승부는 아니었겠지.
스스로의 폼을 확인하게 됐으니까.
‘까다롭게 됐어, 일단 방법을 찾아봐야지.’
그렇기에 삼진에도 그리 기분 나쁜 기색 없이 돌아가는 조이 갈로를 보며 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참 억울한 게, 예전에는 삼진 당하면 타자들이 감정적인 동요가 생겼는데, 요새는 아니더라고.
내가 워낙 잘 나가다 보니까, 아예 삼진을 기본 바탕으로 깔게 돼버린 거지. 그래서 크게 기분 나쁘지가 않은 거고.
그렇기에 비록 헛스윙 삼진으로 첫 타석을 물러났더라도, 조이 갈로는 다음 타석에서 더욱더 자신감 있게 타격해올 것이다.
폭탄을 해체하기는커녕, 타이머만 가속시켰구만.
그렇게 왠지 이겼는데도 조금 기분이 찝찝한 승부를 뒤로한 채 다음 타자를 맞이했는데···
‘얜 또 왜 이래?’
그다음 타자, 5번타자인 주릭슨 프로파도 눈치가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얘도 어제 홈런 쳤던가?
오늘도 아주 자신감이 넘쳐 보이는데, 얘도 또 찝찝하네. 조이 갈로야 이미 위험분자로 낙인해 뒀으니 그렇다 쳐도, 넌 갑자기 왜 그러냐.
‘얜 파워가 어느 정도지?’
조이 갈로가 까다롭고 위험하다면, 이쪽은 짜증나는 타입이다. 뭔가, 확실한 정보가 없거든.
조이 갈로는 이미 몇 번이나 상대해봤기에, 어느 정도 견적이 잡히지만, 이쪽은 애매하거든.
일단은 12년에 19세의 어린 나이로 데뷔했고, 13년엔 85경기나 출장했지만, 좋지 못한 성적에 더 경험을 쌓기 위함인지, 14,15년에는 마이너에서 머물렀다.
그러다가 16년에 다시 기회를 받아 90경기를 나왔지, 작년엔 고작 22경기고.
‘그리 힘 있는 타자는 아니지만···’
그런 커리어를 살펴보면, 그리 위협적인 선수는 아니다. 특급 유망주로 각광받은 선수이긴 한데, 포텐이 터지지 않았으니, 오히려 약간은 만만하지.
그런데 최근 성적이 괜찮고, 기세가 나쁘지 않기에 이렇다 할 견적일 딱 내놓기가 애매했다.
슬러거 타입은 확실하게 아니긴 한데, 그것 역시 여기가 알링턴인 걸 감안하면 마냥 안심할 수는 없고. 어쩌면 레인저스가 그토록 바랐던 포텐이 드디어 터진 걸지도 모르고.
“아웃!”
젊은 선수인 만큼, 기세에 쉽게 녹아드는 터라, 당장 어제 홈런을 쳤으니, 지금은 타격감이 확 살아난 것 같은데, 일단은 범타로 잡았다.
좌익수 글러브로 쏙 들어가는 라인드라이브였는데, 아쉬운 타구에도 앞선 조이 갈로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표정이 어둡기보단 밝았다.
마찬가지로 자신감을 생긴 거겠지. 잘 맞은 라인드라이브도 만들어냈으니, 어쩌면 조이 갈로보다 더할지도.
“쉽게 털어먹으려고 했더니, 곳곳에 함정이 깔렸네.”
그런 타자들을 보며, 나는 살짝 혀를 내둘렀다. 물론 지금까지는 예상처럼, 기대처럼 쉬웠지만, 미래의 위험을 확인하게 돼버렸어.
“스트라이크 아웃!”
그나마 6번타자, 루그네드 오도어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잡아냈다. 딱히 타격감이 좋아 보이지도 않았고.
만약 4,5,6번이 따다닥 컨디션이 좋았다면 진짜 좀 난감했을 텐데, 그나마 다행이네.
그렇게 끝난 2회 말.
함께 덕아웃으로 돌아가며, 브루스에게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중간에 한 번 힘든 결단을 내려야 할 수도 있겠어.”
“어, 조이 갈로랑 프로파 때문이지? 걔들 좀 느낌이 안 좋더라.”
“나중에 내가 사인 내면, 바로 코치한테 전달해. 너도 뭔가 낌새가 안 좋다 싶으면 바로 나한테 전해주고.”
“오케이, 최대한 심혈을 기울여서 확인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마.”
물론 괜한 걱정일 수도 있다.
오늘 내 폼이 워낙 좋으니, 설사 한방 제대로 맞더라도, 펜스 근처에도 못 가고 잡힐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자기 실력이 좋다고 해도, 과신하면 안 되지, 그러다가 패가망신하는 거거든.
‘일단··· 두고 봐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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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이 글로브 라이프 파크에 입성했던 것과 달리, 지금은 약간의 걱정이 생겨났지만, 크게 상관은 없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그렇다고 해서, 오늘 내 좋은 폼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그저 어디까지나 미래의 위험이지, 아직은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지.
‘둘 다 감각은 좋지만, 더 확실하게 올라오려면 시간이 걸리겠지, 최소한 경기 후반까지는 걱정 없이 던져도 돼.’
객관적으로 봐도 오늘 내 폼은 좋다. 시즌 전체를 놓고 봐도 상위권은 되겠지.
그런데 내가 뭣하러 쫄겠어? 그냥 당당하게 던지는 거지.
그렇기에 약간의 찝찝함이 남았던 2회 말과 달리, 3회 말은 손쉽게 끝났다. 딱히 주의할 만한 타자는 없었지.
전날 홈런을 쳤었던 로빈슨 치리노스도 오늘은 그리 감이 좋아 보이지는 않더라고.
손쉽게 삼진으로 잡았지.
‘그나마 로날드 구즈만 정도가 폼이 괜찮아 보이지만, 그 양반도 크게 거슬리는 수준은 아니야.’
7,8,9번 중에선 그래도, 8번타자 로날드 구즈만이 제법 감이 좋아 보였으나, 그도 그렇게까지 위협적이진 않았다.
9번타자 딜리아노 드쉴즈 주니어는 오늘은 딱히 별 느낌 없이, 그냥 딱 9번타자였지. 제일 쉽더라. 삼구삼진으로 가뿐하게 잡았지.
그렇기에 경기 초반부터, 아니 경기가 시작하기도 전부터 품고 있던 기분 좋은 기세는, 눈밭에 굴린 눈덩이처럼 점점 더 불어났고. 그건 4회 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한 타순이 돌면서, 반가운 얼굴이 타석에 올라왔는데, 오늘 내 컨디션을 여실하게 봐서 그런지, 처음보단 훨씬 더 긴장감이 짙었지.
‘이쪽도 위험하긴 하지, 큰 건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지만, 타선에서 그나마 까다롭기는 해.’
최근 기세가 좋은 타자인데, 어쩔 수가 있나. 다만 한 가지 이로운 점은, 날 상대로는 큰 스윙을 잘하지 않는다는 것.
‘사실 대단히 파워가 넘치는 타자는 아니지.’
추민수 선배의 경우, 종종 20홈런을 넘기며, 제법 파워툴을 발휘하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솔직히 파워가 넘치는 타입은 아니다.
애초에 정교한 교타자, 즉 OPS형 히터니까. 그저 폼 좋을 때 잘 맞은 타구가 넘어가는 형식인데.
거기다가 나한테는 유독 더 작게 스윙하는 편이다. 그러니 까다롭긴 해도, 엄청나게 위험하다고 할 수는 없지. 제 아무리 기세가 좋은 시점이라고 해도 말이야.
당연하지만, 같은나라 후배에 대한 선배의 배려나 동질감 같은 이유는 아니다. 그저 본인이 그렇게 전략을 세운 거지.
어차피 장타를 날리기는 힘드니, 차라리 최대한 컨택에 집중해서 안타를 노리는 방향으로.
“볼.”
오늘 역시도 그런 전략적인 목표에 맞춰, 신중하게 타격했다. 가볍게 찔러봤는데, 역시나 배트가 안 나오네.
조금 나갔다 싶으면, 그냥 버리는 형식을 취득한 건데.
“파올!”
아슬아슬하다 싶으면 잽싸게 배트를 냈다. 존은 철저하게 지키겠다는 거구만.
거, 문자에서도 대놓고 선전포고를 하시더니, 진짜 이 악물고 하시네, 이 악물고 해.
하긴 선배도 레인저스 소속으로서 나한테 많이 당했으니, 이러는 게 당연하기는 하지. 개인적인 감정은 아닐 거야.
···아닌 거 맞지?
“스트라이크!”
혹시나 하는 의문이 떠오르긴 했지만, 애써 털어내며 꿋꿋하게 던졌다. 높이 찍힌 포심이 존에 걸치면서 스트라이크.
투 스트라이크 원 볼의 아슬아슬한 카운트가 만들어지자.
“아웃!”
결국 들어오는 코스를 무시하지 못하고 배트를 냈다. 투심이 살짝 꺾이듯 배트를 빗맞히면서 가볍게 아웃.
오늘 느낌이 좋기는 하다니까. 그래도 최근 기세가 좋은 타자 중 한 명이고, 오늘도 타격감이 좋아 보이는데, 두 번째 타석에서도 손쉽게 잡았네.
“파울!”
“파울!”
곧이어 아이재아··· 그냥 아이재아라고 하자. 이름 너무 기네. 아무튼 2번타자로 나온 아이재아는 앞전 타자와는 정 반대였다.
배트를 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으니까. 올해 갓 신인인 녀석이고, 나이도 이제 막 스물셋이라서 그런가, 아주 패기가 넘치네.
“파울!”
1구부터 3구까지 냅다 휘두르며 파울을 만들었는데, 딱히 커트한 건 아니다. 그냥 막 휘둘러서 파울이 딘 거지.
‘컨택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지만, 파워가 좀 많이 약하네.’
계속 공을 맞히고 있긴 한데, 아마 오늘 경기에서 제일 손쉬운 타자를 꼽으라면, 이 녀석일 거다. 당당하게 선언할 수 있지.
홈런 파워는 물론 갭 파워 꽤 나쁜 것 같은데, 솔직히 나 말고 다른 투수들 입장에서도 땡큐지, 이런 타자는.
‘중간중간 쉬는 타임이 되기 딱 좋겠어.’
힘겨운 피칭 와중에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약간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여유 공간이 될 테니까.
거기다 얘가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으니, 앞뒤의 다른 타자들을 상대할 때도 부담감이 떨어지고 말이야.
“잘한다! 계속 쳐!”
“점점 맞아가고 있어! 이대로 홈런까지 날려버려!”
다만 레인저스 홈팬들은 그런 아이재아의 모습에 오히려 열광하며, 타이밍이 맞아가고 있다면서 소리쳤다.
정반대로 알고 있는 건데, 이해는 한다. 답답한 경기에서 젊은 유망주가 기세에 지지 않고 자신 있게 타격하고 있으니, 팬들 입장에선 얼마나 예쁘게 보이겠어?
“스트라이크 아웃!”
물론 그런 기대를 박살 내는 것이 내 역할이고 말이야.
4구 째에도 시원스럽게 배트를 휘두른 아이재아였지만, 순간적으로 느려진 쓰리핑거 체인지업에 자세가 완전히 망가졌다. 타이밍도 잃었고.
‘적어도 오늘 경기 내에서 얜 아예 걱정 안 해도 되겠네.’
타격 밸런스가 망가졌으니, 뭐, 더 말할 게 있어? 원래도 그리 위험한 폭탄은 아니지만, 이번 타석에서 신관은 물론, 뇌관까지 완벽하게 제거됐다.
이걸로 만약에 모르는 폭발의 위험조차 완벽하게 거세된 셈이지. 아주 좋아.
아이재아 본인도 그걸 아는 건지, 삼진에 덤덤했던 다른 타자들과 달리, 그는 굉장히 어두운 표정으로 타석에서 내려갔다.
어쩌면 벽을 느낀 걸 수도 있고, 자기 딴에는 진짜 열심히 맞선 건데, 너무 쉽게 잡혀버렸으니까.
덕아웃으로 돌아간 그를 레인저스 타격코치가 위로해줬지만, 아마도 타자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겠지.
‘그리고 노마 마자라.’
다시 마지막으로 3번타자 노마 마자라. 어려운 타자는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쉽지. 지난 상대전적이 얘기해주잖아?
물론 최근 성적은 심상치 않기에, 역시나 위험한 타자 중 한 명이지만, 그는 아무래도 가슴 깊이 두려움이 각인된 사람들 중 하나인 것 같았다.
아까 전에도 그러더니, 이번 타석에서도 배터박스에 입장하는 순간부터 표정이 썩어 있었거든.
본인의 최근 좋은 폼, 타격감과 상관없이 그냥 나만 보면 겁먹는 거지.
‘희귀한 케이스는 아니지.’
그가 특별히 쫄보인 건 아니다. 그렇게 욕하면 안 돼. 솔직하게 말해서 리그 전체에 저런 타자들이 깔려 있거든.
내가 작년에 이어 올해까지 깽판 치면서, 수많은 타자들의 머릿속에 PTSD가 심어졌지. 나만 보면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그저 사람의 성향과 스스로 가진 자신감, 자존감에 따라 반응이 다를 뿐, 그런 사람들을 전부 다 겁쟁이, Pussy라고 욕할 수는 없다.
“아웃!”
물론 비교적 그런 타자들이 훨씬 쉬운 건 사실이고. 누구 하나를 호구잡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거지만.
언제, 어디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뽑아먹기 쉬운 타자가 있으면 일이 훨씬 편해지니까.
노마 마자라는 스스로도 자신의 상태를 알았던 건지, 그것을 떨쳐내기 위해 초구부터 냅다 휘둘렀지만, 그래 그럴 것 같더라.
몸쪽으로 파고드는 커터에 그는 눈을 질끈 감았고, 틱-하는 소리를 내며 떠오른 타구는 손쉽게 2루수, 제드 라우리의 글러브로 들어갔다.
“아니-”
“노마! 너 X발 X신이냐!”
“어떻게 갓 데뷔한 루키보다 못해! 최소한 투구수라도 깎으라고!”
그치, 내가 아무리 변호를 한다고 해도, 팬들 입장에선 복장이 터지지.
타선의 믿을맨이 되어야 하는 3번타자가 첫 타석은 삼진 당하더니, 두 번째 타석에선 초구 만에 아웃당하면, 허파가 안 뒤집어지고 배겨?
더군다나, 내가 언제까지 던질지도 모르는 만큼, 최대한 투구수를 깎아야 하는데, 그것마저도 못했으니 말이야.
또한 누가 봐도 근심 걱정 가득한 표정이었으니, 앞서 맥없이 꼴사납게 당하긴 했어도, 당당하게 맞섰던 아이재아와 비교되기도 할 거고.
“불쌍하네.”
나한테 당하면서, PTSD가 더욱더 짙어진 것도 모자라, 홈팬들에게도 비난받는 상황에 노마 마자라는 결국 고개를 떨궜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쓸쓸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리며 마운드에서 내려갔지만.
“Suck 네가 저렇게 만든 건데, 누가 누굴 동정해. 사자가 토끼 걱정하는 소리 하고 있네.”
“이 동업자 정신없는 무자비한 냉혈한 새끼. 넌 저 모습을 보고도 아무런 감정이 없어?”
“아니, 그니까, Suck 니가 저런 꼴로 만들어놓고 왜 니가 동정까지 하냐고. 그게 더 사이코 같은 거 알지?”
브루스는 이번에도 그저 코웃음만 쳤다. 요즘 들어 진짜 좀 많이 개긴단 말이야.
언젠가 날 잡고 제구 버리고, 구위에만 집중해서 포심으로 손바닥 때리는 걸로 다시 재교육을 할 필요가 있겠어.
내가, 다른 것도 아닌, 퍼펙트를 이어가는 중인 에이스가 말하면, ‘예, 그렇습니다’할 것이지, 이 미천한 포수 놈이 어디서 태클이야?
“어때요? 오늘 길게 던져야겠죠? 폼 진짜 좋은데.”
“그래그래, 알겠으니까, 그만 좀 징징거려라.”
브루스를 씹으며 덕아웃으로 돌아간 뒤, 날 맞이해주는 스콧 에머슨에게 그렇게 물었다.
솔직히 오늘 같은 날이면 좀 길게 던져도 되잖아? 안 그래? 날 걱정하는 마음에 제어하는 거야 잘 알지만, 그래도 목줄을 풀 때는 풀어야지.
오늘 내 폼이 좋다는 거야 이미 잘 알고 있고, 피칭도 깔끔하게 이어지고 있으니, 그도 마냥 반대하긴 애매한 듯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약간의 걱정을 보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느낌이 안 좋은 타자들이 있다면서, 괜찮겠어?”
“뭐, 지금 당장은 큰 문제가 아니니까요. 위험하기는 하지만, 어떻게든 되겠죠.”
조이 갈로랑 주릭슨 프로파 말이야. 괜히 길게 끌었다가 걔네한테 얻어맞을 수도 있다는 건데, 아직까진 그렇게 위험한 수준은 아니다.
이미 말했다시피 더 올라와야지, 진짜 터지기 직전의 폭탄이 되려면. 설사 그렇게 된다고 해도···
“필살기가 있으니, 정 위험하면 그거라도 써야죠.”
투수에겐 언제나 최후의 필살기가 있거든. 타자라면 누구나 손 놓고 당할 수밖에 없는 필살기가.
예감이 안 좋다 싶으면, 적극적으로 써먹어야지. 그런 내 덤덤한 말에 잘 알겠다는 듯 스콧 에머슨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것으로 사실상 허락이 떨어졌다.
내가 과하게 무리하거나, 집착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으니, 걱정을 내려놓은 거겠지.
‘이대로 9회까지 가보자고, 웬만하면 교통사고 없이.’
하이패스로 톨게이트를 통과했으니, 계속 액셀 밟고 쭉 달리면 되겠구만.
####
“스트라이크 아웃!”
요란하게 울리는 주심의 목소리에 타자들은 그저 가는 눈으로 그라운드를 노려봤다.
지긋지긋하다 못해,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으니까.
공이 글러브에 들어가면서 나는 그 대포알 같은 가죽 터지는 소리, 주심의 삼진콜, 그리고 역시나 실망한 팬들의 얼굴, 그 모든 것들이.
“에휴··· 그럼 그렇지.”
“이럴 것 같더라. 항상 이러긴 했잖아?”
“항상 이랬으니까, 더 열이 받는 거지. 더 x같은 거고.”
이미 예상하기는 했다.
솔직히 당한 것이 몇 번인데, 그 정도쯤 당했으면 미리 예상해야지.
그래도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는 다를 거다, 이번에는 할 수 있다고 스스로 외치면서 억지로나마 맞서 싸웠는데. 역시나 예측한 그대로였다.
“쟨 아무렇지도 않나? 우리 때려잡는 거 말이야. 이젠 기쁜 척도 안하네.”
“쟤가 왜 기쁘겠어, 저 새끼 입장에선 이게 기본인데.”
“조이, 수고했어, 어때? 감은 좀 잡혀?”
“그럴 리가. 그냥 최대한 집중하면서 한방만 노리는 거지. 타이밍이야 어차피 의미없고, 나중에 빨라지니까.”
글로브 라이프 파크는 적막했다. 오늘도 적막하다. 저번에도 그랬고, 저저번에도 그랬듯이 오늘도 적막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상대 투수가 퍼펙트 중이라는 이유로 배려하거나, 예우하는 건 절대로 아니다.
그냥 말문이 막힌 거지.
늘, 그냥 저 투수가 데뷔한 이후로 늘 그래 왔던 것처럼.
5회 말도 금방금방 지워졌다.
이번에도 이닝 선두타자로 나간 조이 갈로는 다시금 삼진으로 물러났고.
“스트라이크 아웃!”
주릭슨 프로파도 이번엔 삼진을 당했지. 앞선 타석에선 그나마 라인드라이브라도 날리며, 손맛이라도 봤지만. 이번엔 그조차도 없었다.
조용한 경기장에서 그저 한숨만 푹푹 내쉬는 동료들을 보며, 추민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얄밉단 말이야.’
좋아하는 후배다. 자랑스러운 후배고. 그건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왠지 기쁘잖은가? 한국에서 저런 투수가, 저런 선수가, 저런 메이저리거가 나왔다는 것이.
그것이 낡은 옛날풍 감정이라는 건 알지만, 선배 된 입장에선 어쩔 수 없지.
그런데도 얄밉다. 이건 순수하게 타자로서의 감정이지. 제 아무리 자랑스러운 후배라고 해도, 그 역시 프로선수이고 메이저리거이니까.
매번 이렇게 만날 때마다 야속하리만치 레인저스를 두들겨 패는 모습을 보고 얄밉지 않고 배기겠는가?
그나마 감정이 좋은 자신이기에 얄미운 정도지, 다른 선수들은 아예 증오에 가깝다.
특히나 가장 된통 당했었던 아드리안 벨트레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그나마 오늘은 결장했기에, 얌전히 덕아웃 한쪽에 앉아 짜증스럽게 보고 있지만, 오늘도 출장했다면 단순히 눈빛으로 끝나진 않았겠지.
아마 단전에서부터 올라온 묵은 욕설을 피를 토하듯 뱉어내며 뒷목을 잡았으리라.
“아웃!”
5회 말도 빠르게 종료.
인터벌이 올라가지 않았기에, 이젠 대부분은 짐작했다. 저 녀석이 끝까지 갈 생각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더욱더 말수가 줄어들었고 말이다.
‘그래도, 가장 최악은 아니야.’
그야말로 다시금 개같이 털리고 있는 것이긴 하나, 우습게도 이게 최악은 아니다. 더 최악은 따로 있지.
최소한 작년, 마지막 승부 때처럼 절대적인 느낌은 없잖은가? 그나마 다행이지.
‘퍼펙트, 충분히 깰 수 있어.’
그리고 퍼펙트를 당할 것 같다는 느낌도 없었고 말이다. 비록 퍼펙트라는 것이 예기치 못하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라고는 하나.
최소한 오랜 메이저리그 경험으로 쌓인 노련한 감각은 그렇게 말했다. 충분히 뚫어볼 만하다고, 최악까지 가지는 않을 거라고.
오랫동안 함께 해온 전우나 다름없으니, 믿을만하겠지.
‘그리고··· 그 이상도 가능해.’
수비에 나가기 전, 추민수는 슬쩍 한쪽을 봤다. 조이 갈로와 주릭슨 프로파, 어제 경기 그와 함께 홈런을 쳤던 영웅들이지.
그들은 오늘 무척이나 타격감이 좋아 보였다. 조이 갈로야 원래도 팀의 기둥이니 그렇다 쳐도, 주릭슨도 오늘은 특히나 더 남달랐지.
그렇기에 추민수는 예감했다.
분명 어떻게든 퍼펙트를 깨트리고, 분위기를 바꾸기만 한다면, 절호의 찬스가 올 것이라고. 그리고 그 절호의 찬스는 저들에게서 만들어지겠지.
야구에서 일방적인 경기는 흔치 않으니까. 제 아무리 절대적인 약자라 한들, 딱 한번은 기회가 오기 마련이지. 그것을 잘 잡기만 한다면···
‘이 트라우마도 충분히 깰 수 있어.’
그러니 오늘 자신의 역할은 어떻게든 그 한 번의 기회를 더욱더 진수성찬으로 만드는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수비에 나섰고, 앞서 5회 초에서 바톨론 콜론이 무너지면서 내줬던 2점의 격차를 그대로 지켜냈다.
“아웃!”
깔끔한 삼자범퇴는 죽어버린 기세를 억지로 소생시키기에 딱 알 맞았다.
“나이스! 나이스!”
“우리도 두들기면 돼! 고작 2점차야! 어제처럼 홈런 뻥뻥, 다섯 개도 필요없이 두 개면 동점이라고! 퍼펙트? 까짓 거 깨버리면 되지!”
“퍼펙트? 우리가 X신도 아닌데, 설마 두 번이나 당할까!”
덕아웃으로 돌아가며, 대놓고 퍼펙트를 언급하면서 우렁차게 소리치는 레인저스의 모습에.
“야이 X새끼들아! 너넨 동업자 정신도 없냐!”
“아가리 안 닥쳐! 조심하라고!”
“그걸 왜 언급해! 이 X같은 X신 레인저스!”
레이더스는 자기들도 닥치고 있는데, 니들이 왜 난리냐며 레이더스가 욕설을 퍼붓기도 했지만.
솔직히 이만큼 털렸는데 그딴 게 대수겠는가? 레인저스 타자들 중에서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퍼펙트 깨자! X발 Kill 퍼펙트!”
“X이나 까라고 해! 여기 우리 홈이야! 우리 홈인데, 우리 마음이지!”
그렇기에 오히려 더욱더 크게 소리치며, 살아난 불씨가 활활 타올랐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투수는 6회 말이 시작되자마자, 역시나 속도를 높이며, 다시금 레인저스를 냅다 때려잡았으니까. 니들이 뭐라고 떠들든 딱히 신경도 안 쓴다는 것처럼.
마치 전날 왔던 문자 메시지의 답장처럼, :D라는 짧으면서도 본인의 상태를 잘 드러내는 그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타자들을 도륙하는 그의 얼굴을 보며, 추민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진짜 한 대만 때리고 싶다.”
자랑스러운 후배고 나발이고, 진심을 담아 딱 한 방만 후려 패고 싶다고. 물론 배트로 공을. 다른 의미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야구의 이야기지.
“···Choo 너도 화가 많이 났는데? Korean은 잘 모르지만, 아마 좋은 말은 아닌 것 같은데, 후배한테 그래서 되겠어?”
“후배고 나발이고, 진짜 딱 한 대만, X나 쎄게 한 대만 때리고 싶어. 그게 소원이야.”
“이야, Choo 너도 이젠 훌륭한 레인저스가 됐네, 팬들이 아주 좋아하겠어, 너랑 자기들이랑 같은 마음이라고.”
어쨌든 그러한 진심이 담긴 그의 중얼거림에, 오늘은 제삼자로서 경기를 지켜보던 아드리안 벨트레가 헛웃음을 흘렸다.
결국 저 빌어먹을 투수 놈이 자신도 모자라, 본인의 같은나라 선배까지 망가뜨렸다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