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댈러스-포트워스가 가장 예민해지는 날이 다가왔다. 속 깊은 곳에서부터 진노가 끓어오르는 날이지.
같은 텍사스 주 라이벌인 휴스턴 애스트로스라도 만났느냐고? 아니다. 이젠 애스트로스 정도로는 이 정도의 감정을 자아내지 못했다.
“X같네 X발.”
“그냥 안 보는 게 낫지, X발 그날은 나한테 아무도 야구 얘기하지 마. Baseball의 B도 꺼내지 말라고!”
“기껏 시즌권 끊었더니, 저 X같은 놈 만날 때마다 쓸모가 없어지네.”
그저 하룻밤을 시원스럽게 망치고, 그 이후의 일주일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존재가 다시 알링턴에 왔을 뿐이다.
과거 바이킹들이 유럽 전역을 뒤흔들었을 때, 또다시 찾아온 바이킹을 보며, 마을의 주민들은 뭐라고 생각했을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저 빌어먹을 새끼가 죽지도 않고 또 쳐왔구나’라고 했겠지.
X같이 얻어터지고, 제대로 반항조차 못한 채 약탈당했는데, 또다시 찾아와 자신들을 도륙하려 하는 개자식을 바라보며 그저 그렇게 생각했으리라.
“저거 오클랜드 버스 맞지?”
“폼 돌아왔다는 거 제발 다 구라였으면 좋겠다. 그냥 뒤져버렸으면 소원이 없겠어.”
“이 X발 Pussy새끼들. 총질한다던 놈들이 넘쳐나더니, 정작 진짜로 실행하는 놈은 없네.”
“이번엔 또 얼마나 털리려나···”
“레드삭스처럼 퍼펙트에, 20삼진이라도 당하면··· 그땐 진짜 혀 깨물고 죽을 거야.”
“그전에 타자 새끼들 죄다 죽이고, 저 새끼한테도 납탄 갈긴 다음에 죽어야 속이 편하지.”
도시를 가로지르고, 아마 글로브 라이프 파크로 향할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버스를 바라보며, 레인저스 팬들이 한 생각 역시 딱 그랬다. 착잡한 듯 버스를 노려봤지.
또다시 이달의 투수가 됐다던가? 그건 별로 놀라운 소식은 아니다. 저 놈에게 그런 거야 당연할 테니까.
다만 직전 경기에서 완벽하게 폼을 회복하여, 탬파베이 레이스를 쓸어 담았다는 소식은 꽤나 민감하게 여겨졌다.
지난날, 그들의 홈에서, 우리 의 안방에서 당했던 수많은 악몽을 다시 떠올리게 했으니까.
“이번엔 그냥 좀 평범하게 넘어가라···”
“그냥 딱 탬파베이 정도만 털려도 괜찮은 거지.”
혹시라도 얼굴을 보면, 자신들이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까 걱정한 건지, 모든 창문이 커튼으로 가려진 버스를 바라보며, 레인저스 팬들은 깊이 바랐다.
그들은 마음속 깊이 바랐다. 제발 이번만큼은 조금이라도 무사히 넘어가기를. 별 개X같은 짓만 당하지 않기를.
“최소한 1차전이라도 이겨야지. 그래야 그나마 마음이 편하잖아.”
“내일은··· 그냥 없는 셈 치고 오늘 경기에 최선을 다해서, 잡아야 돼.”
한편으로는 글로브 라이프 파크 인 알링턴으로 몰리기도 했고.
2차전에 등판할 테니, 속이 편하려면 그날은 그냥 야구를 안 보는 게 맞으니.
1차전에서라도 부디 멋진 승리를 따내고, 그것으로 자기위안이라도 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호오오오오오오오옴~러어어어어어언!”
그런 바램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1차전은 꽤나 화끈했다. 레인저스가 사랑하는 타선의 화끈한 한방이 터진 날이었지. 무려 다섯 개의 홈런이 나왔으니 말이다.
로빈슨 치리노스, 주릭슨 프로파, Choo, 아드리안 벨트레, 조이 갈로까지.
다섯 명의 타자가 글로브 라이프 파크에 홈런을 수놓았고, 그건 작년부터 쭉 애슬레틱스에게 묘하게 당해왔던 레인저스의 울분을 풀어주기 충분했다.
“Hell Yeah!”
“X같은 오클랜드 새끼들! X발 이게 텍사스의 힘이다!”
“X발 속이 다 후련하네! 더 조져! 더!”
“요즘 좀 잘 나간다고 니들이 달라질 거 같아? 니들은 그냥 X신이야! 이 X같은 거지새끼들!”
글로브 라이프 파크는 쩌렁쩌렁 울렸다, 팬들이 아낌없이 욕설을 토해내며 그 흥분을 만끽했으니까.
올해, 지구 꼴찌로 떨어지면서, 정말 X같이 느껴졌던 팀인데, 적어도 오늘 이 순간만큼은 더없이 예쁜, 더없이 사랑스러운 ‘내 사람’처럼 느껴졌다.
“Suuuuuuuck! 잘 보이냐! X발 너도 내일 이렇게 당할 거야!”
“우리가 언제까지 니 호구일 거 같아! 니 동료들 X되는 거 똑똑히 보고, 오줌이나 질질 싸라!”
“너 올해 홈런 없던데, 내일 다섯 개쯤 맞을 테니까, 미리 질질 짜둬!”
그에 대한 흥분감인지, 오늘 경기에선 나오지도 않으며, 내일을 침착하게 기다리던 고유석을 향해 감정을 토해내기도 했고 말이다.
몇몇은 희망도 엿보았다.
그래, 글로브 라이프 파크가 언제까지 우릴 배신하겠나? 이제 드디어 그날이 온 거지.
웬 X같은 아시안 투수-코리안이라고 하지는 않겠다, 오늘 경기의 영웅 중 하나인 Choo도 코리안이니까-의 무실점이 깨지는 날이.
길고 길었던 레인저스의 시련이 끝나는 날이, 드디어 도래한 것이다. 그렇게 굳게 믿기도 했지만.
“···”
“···X발 X같은 새끼, 왜 저딴 식으로 보고 지랄이야.”
“우릴 얼마나 개X으로 보고 있으면, 뭐가 저렇게 덤덤해.”
“저 새낀 팀워크라는 게 없는 새끼야. 그러니까 팀 동료들이 X창나도 눈 하나 깜짝 안 하지.”
곧 카메라에 잡혀, 전광판에 떠오른 고유석의 얼굴에, 마치 맹수 앞에 선 초식동물처럼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지. 유전자 깊이 각인된 공포처럼, 고유석이라는 이름의 트라우마에 익숙해진 그들이니까.
그리고 거기서 조금 더 이성적인 이들은 여전히 회의감을 드러내기도 했고 말이다.
7대5였으니까, 점수는.
“참··· 우리 팀 꼬라지 알만하다.”
“넌 X발 왜 자꾸 초를 쳐? 홈런도 이렇게 많이 나왔는데, 꼬우면 꺼지던가.”
“아니, 홈런이 다섯 갠데, 점수 좀 봐봐. 저게 맞는 거냐?”
조금 우스운 일이다.
마냥 기뻐할 일이 아니지.
홈런을 다섯 개나 때린 경기인데, 7점이라는 건 말이다.
어쩌면 그것이 이번 시즌 레인저스의 현주소였다. 간혹 폭발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한방을 날리기도 하지만. 그게 전부인 거지.
“저건 그냥- 다들 안타보다 홈런을 쳐서 그런 거야. 어쨌든 점수 내면 됐지! 내일도 저러면 된 거고!”
몇몇은 그래도 파워가 살아 있다는 것을 보았으니, 내일도 터지지 않겠느냐며 소리치기도 했으나.
“우리가 오늘 굳이 경기장 찾아온 이유가 뭐냐?”
“그야···”
“솔직하게 말해봐.”
“···내일 X같을 테니까, 오늘이라도 즐기려고.”
“그래, 그렇지. 근데 말이야, 타자들도 그런 거 같지 않냐?”
딱히 그럴 것 같지도 않았다.
그들이 내일을 포기하고, 오늘이라도 행복하기 위해 글로브 라이프 파크로 온 것처럼. 어쩌면 타자들도 그런 이유에서 오늘 폭발력을 보여준 게 아닐까?
내일은 어차피 글렀으니, 면죄부라도 미리 쌓아놓기 위해서, 오늘 모든 걸 터트린 거지.
물론 야구라는 게, 그러고 싶어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스포츠이긴 하나, 그런 생각을 접을 수가 없었다.
“아웃!”
1차전은 그렇게 끝났다.
7대5의 아슬아슬한 스코어가 유지되면서, 텍사스 레인저스가 승리를 따냈지.
홈런을 다섯 개 쳐놓고, 고작 하나 날린 상대팀과 2점차라니, 역시 마냥 기분 좋은 승리는 아니었다.
“저- 저 X새끼 눈까리 봐.”
“X발 무슨 애들 재롱잔치 보는 것도 아니고···”
특히나 재밌다는 듯이 약간 미소를 머금은 채 그라운드를 바라보는 고유석의 눈빛 역시 그 승리의 감각을 완벽하게 망쳤고 말이다.
어쩌면 애슬레틱스 다음으로 그에게 익숙하고, 그를 잘 아는 레인저스 팬들에게, 그 표정은 마치···
‘참, 애쓴다, 애 써.’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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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가 끝난 뒤, 민수 형님에게 문자가 왔다. 오늘은 그래도 홈런 치셨으니, 혹시 직접 만나지 않을까, 싶었지만. 어쩔 수 없지.
레인저스 팬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한, 우린 로미오와 줄리엣이니까.
직접 만나지는 못하고, 그저 야밤의 밀회를 나누듯, 이렇게 비밀스러운 편지, 21세기식 편지나 주고받을 수밖에.
[오늘 잘 봤지? 우리도 마냥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니까, 유석이 너도 긴장 단단히 해라. - 추민수 선배님]
애석하게도 문자의 내용은 달달한 연애편지와는 달랐다. 오히려 한 사내, 한 명의 메이저리거가 보내는 도전장이었지.
이건 뭐, 선전포고도 아니고, 너무하시네. 아무리 그래도 오래간만에 후배를 봤으면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해주셔야지.
[그리고 좀 살살하고. 유석이 너 때문에 내가 눈치 보고 산다. 부탁 좀 하자. - 추민수 선배님]
보내 놓고 괜히 나를 자극하는 것이 아닌가, 아차 싶으셨던 건지, 뒤이어 약한척하는 문자가 날아왔지만. 난 이미 선배의 마음을 잘 전달받았다.
그치, 내가 너무 어렸던 거야. 명색이 메이저리거고, 프로야구 선수인데, 서로 최선을 다해야지.
그 마음, 프로의식, 아주 잘 전해졌어. 저렇게까지 진심을 담아 선전포고를 보냈는데, 나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 도리에 맞겠지.
[:D – 고유석]
그렇기에 잘 알아들었다는 뜻을 담아, 그저 웃는 얼굴을 답장으로 보냈다.
이게 솔직한 내 마음이지. (웃음)정도라고 해야 하나?
‘뭐, 애초부터 때려잡을 생각뿐이긴 했지만.’
사실 무슨 문자를 보내셨든지 간에, 무조건 레인저스를 죽일 생각이긴 했는데, 그래도 그래도 선배 역시 단단히 결의가 잡힌 걸 보니, 아무런 죄책감 없이, 걱정 없이 공을 던져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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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 어제보다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은데?”
다음날, 다시 글로브 라이프 파크로 향했을 때, 크리스티안 옐리치는 전날보다 더 늘어난 인파에 눈썹을 씰룩거렸다. 이해가 안 된다는 거겠지.
텍사스 사람들이, 레인저스 팬들이 날 싫어한다는 거야, 아마도 모든 메이저리그 관계자들이 알 거다. 아주 증오하고 있지.
그런 주제에 정작 등판일이 닥치면 관중이 더 몰린다. 원정 온 레이더스를 제외하더라도 더 많아지지.
“그게 슈퍼스타지.”
“···Suck 너 요즘따라 점점 더 자의식이 강해지는 것 같다?”
“일부러 겸손한 척 자제해도 어차피 아무도 안 알아주더라고. X발 놈의 도핑이라고 찡찡거리기나 하지.”
“오, 그건 인정이지.”
내 자의식이 강해진 건 사실이나, 마냥 개소리는 아니다. 진짜로 그게 슈퍼스타거든.
싫어하고, 증오하고, 혐오하면서도, 정작 경기는 보러 오는 거다. 이유는 제각각이지.
적지의 한복판에서 제 자신의 팬심을 숨긴 ‘샤이 Suck’도 있을 거고, 반대로 이번엔 내가 두들겨 맞을 거라고 생각하며, 기대하며 찾아오기도 하고.
막장 드라마랑 비슷해.
오지게 욕하면서도 결국 끊지는 못하잖아? 보고 나서 개 쓰레기 같은 드라마라고 욕하면서도, 결국 재방까지 찾아보지.
그런 인기를 끌고 다녀야 비로소 슈퍼스타라고 할 수 있는 거고. 아무튼 내 생각은 그렇다.
“괜히 리틀 베이브 루스가 아니네.”
그런 내 말에 크리스티안 옐리치는 클클거리며 농담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저런 말도 종종 들었지.
베이브 루스처럼 관중들 몰고 다닌다면서. 하지만 이젠 그렇게 자칭하는 것도 좀 그렇지.
진짜로 루스 같은 놈이 다른 동네에 나타났잖아. 쇼타니 오헤이 말이야. 아니아니, 오타니 쇼헤이.
“베이브 루스는 저~기 애너하임에 따로 있지 않나?”
“뭐, Suck 너도 얼추 투타겸업 비슷하잖아? 아주 잘 달리던데.”
“나처럼 타격하면서 베이브 루스라고 자칭하면, 저승에 있는 밤비노가 뒷목 잡고 쓰러질 걸. 자기가 언제 그딴 식으로 타격했냐면서.”
“잘 아니까 다행이네. 난 네가 스스로 자기 타격을 좋아해서 모르고 있는 줄 알았어.”
“잘 알아야지. 자기 객관화는 출세의 지름길이니까.”
그렇게 동료들과 만담이나 나누면서 내리니, 주변의 시선이 집중됐다. 날 쳐다봤지.
“Hey, Suck! 어제 경기는 잘 봤다. X신들이 꼴값 떨던데, 네가 참교육 좀 해줘야지?”
“어우, 그럼요. 오늘도 오셨네.”
“네 등판인데, 무조건 와야지!”
“그래, 특히나 텍사스 촌놈들이 상대라면 더더욱 봐야 하고.”
“얼마나 재밌겠어? 저 x신들 또 X같이 털리는 모습이. 그건 무조건 봐야지.”
“암, 그렇고말고.”
그래도 섣불리 다가오지는 않았다. 레이더스가 경호원처럼 둘러싸고 지켜줬으니까.
홈에서 볼 때는 진짜 죄다 또라이들 같은데, 분위기 험악한 원정 경기에선 이 양반들만큼 든든한 사람들이 없단 말이야.
내 모든 경기를 지켜본 사람들인 만큼, 내가 레인저스를 얼마나 잘 때려잡는지도 알기에, 기대감이 만땅인 그들에게 자신감을 선보이며, 다시 글로브 라이프 파크로 입성했다.
‘여기가 콜리시엄보다 더 좋단 말이야.’
시설도 좋고, 왠지 내가 늘 잘했던 공간이니까, 뭔가 홈구장 같다고 해야 하나?
홈구장 치고는 마운드에 오를 때마다 욕을 너무 많이 먹기는 하지만, 뭐, 그거야 그냥 귀 닫으면 되는 거고.
그리고 여긴 내 구장이다.
진짜 주인들은 따로 있지만, 나한테 개털린 순간부터 자격 박탈이지.
저번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제일 잘하는 놈이 주인 하는 편이 더 낫잖아?
“바로 몸부터 풀죠.”
“오늘은 어떻습니까?”
“최고죠, 뭐, 다른 곳도 아니고 알링턴인데, 나쁠 리가 있나.”
“예, 저도 그럴 것 같더라고요.”
역시나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던, 대니얼은 슬쩍 날 보더니,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이 동네에서 폼이 안 좋았던 적이 드물다 보니, 그도 별다른 걱정이 없었겠지.
컨디션이나 폼에는 멘탈도 큰 영향을 끼치거든. 편안한 곳일수록 더욱더 좋은 컨디션이 되고는 하지.
근데 나한테 있어서 여기만큼 편한 곳이 없는데, 컨디션이 안 좋을 리가 있나.
그래서 오늘은 스콧 에머슨도 안 물어보더라. 오히려 굉장히 고민에 빠진 듯한 얼굴이었지. 컨디션 좋은 거야 뻔하니, 날 어떻게 막아야 하나, 생각하는 것처럼.
이런 거 보면 나도 슬슬 귀신이 돼가는 것 같아. 코치도 내 생각을 귀신 같이 알아채지만, 나도 마찬가지구만.
“이 정도면 완봉도 가능하겠죠?”
워밍업 도중에 물어보자, 대니얼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코웃음 쳤다. 진심으로 물어본 거냐는 것처럼.
그치, 내가 사람을 잘못 골랐네. 이쪽도 코치 못지않게 내 이닝과 투구수에 빡빡한 사람인데, 괜한 걸 물어봤구만.
“아시죠? 제가 뭐라고 할지.”
“알죠, 알아서 하겠습니다.”
“예, 어차피 뭐라고 해도 그날그날 흥에 따라서 행동하시니, 듣지도 않으시겠죠. 설사 에머슨 코치가 반대해도 능구렁이처럼 넘어가실 테고요.”
정답이군. 아주 맹점을 찔렀어. 그렇게 한참 몸을 달아 올렸을 때, 이내 대니얼은 생각해보니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항상 완봉이라고 표현하시네요. 9이닝이나, 완투가 아니라.”
그랬던가? 하긴, 대부분은 그렇게 표현했던 것 같기는 하다. 완봉이라고 말이야.
그도 그럴 것이, 어차피 실점하는 순간 명분이 사라지니, 기를 쓰고 막아서는 코치를 떨치지 못할뿐더러.
애초에···
“제가 평범한 완투는 한 기억이 거의 없어서, 뭔가 입에 잘 안 익네요. 보통 완봉이고, 아니면 노히터나 퍼펙트라서···”
“새삼 제가 대단한 선수를 돕고 있다는 걸 알겠네요.”
내가 9이닝을 던졌다는 건, 무조건 완봉이라는 뜻이거든.
그냥 평범한 완투는 없지.
완봉이 디폴트고, 거기에 무사사구나, 100구 이하의 매덕스나, 노히터, 퍼펙트 같은 것들이 추가되는 형식이지.
그런 내 답변에 대니얼은 황당한 듯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상대가 레인저스인데··· 완투할 거면 완봉도 해야 그나마 본전이죠.”
“반대편에서 들으면 피눈물 흘리겠네요.”
뭐, 어쩌겠어. 흘려야지.
꼬우면 날 때리면 되는 건데.
그게 레인저스 타자들의 일이고.
본인 업무도 제대로 못하고 있으니, 이 정도 평가야 받을 수도 있지. 당사자인 내가 그렇게 느낀다는데.
“음-”
그렇게 기분 좋게 워밍업을 이어간 뒤, 곧바로 들어간 불펜피칭에선 오직 불펜포수의 나직한 신음소리만이 흘렀다.
“음!”
마치, 그 이상의 미사여구는 필요 없다는 것처럼.
####
“우우우···”
1회 말.
불펜의 문이 열렸을 때, 언제나처럼 야유가 터져 나왔지만, 그리 크지는 않았다.
‘진짜 제대로 쫄았나 보네. 이젠 욕도 안 하는구만. 내가 너무 많이 패기는 했어. 천하의 텍사스 사나이들이 쫄보가 됐네.’
그만큼 레인저스가 나한테 압도되어 있다는 뜻이겠지. 자기들 안방인데도 야유조차 못할 정도로.
어쩌면 내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 자제한 걸 수도 있고. 괜히 자극했다가 내가 작정하고 나설지도 모른다면서.
‘이미 작정을 했는데 말이야. 알링턴으로 오기도 전부터.’
정말로 그런 거라면 헛된 노력이다. 폼이 다시 올라오고, 다음 등판이 레인저스전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난 이미 작정했으니까.
더군다나 하루의 휴식일도 끼어 있었기에, 아주 좋지. 말했잖아, 불펜에서 곡소리만 나왔다고.
스콧 에머슨도 별말 없이 그냥 내보내더라. 여전히 날 어떻게 중간에 저지해야 할까, 고민하면서.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지.’
물론 나도 아예 긴장감이라는 게 없는 건 아니다. 마운드에 오를 땐 항상 일정한 긴장감을 가지고 있어야지.
레인저스를 무시하긴 하지만, 솔직히 좀 많이 무시하는 편이지만, 마운드에서까지 그러면 안 되니까.
‘어제 파워가 좋긴 하던데.’
기세가 살아나려는 걸까?
제법 힘 있는 한 방을 잘 만들어냈었지. 걱정했던 조이 갈로 외에도 말이다.
글로브 라이프 파크인 만큼, 아무리 폼이 좋다 한들, 제대로 맞으면 넘어가는 건 매한가지니까.
“Suuuuuuuck!”
“It’s Suck Time!”
“Kill Rangers! Kill!”
마운드에 오르자, 홈팬보다 더 시끄러운 사람들이 응원해줬다. 내가 여길 내 차지로 만든 것처럼, 레이더스도 자기들 안방으로 만들었군.
대체 누굴 닮아서 저런 지, 아주 뻔뻔하기 그지없어. 누가 보면 여기 로컬인 줄 알겠네.
저 멀리 캘리포니아 북부의 오클랜드에서 날아온 사람들이 말이야.
손을 흔들어준다거나, 슬쩍 미소를 지어주거나 하는 스윗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런 짓거리 하면 당황할 걸. 갑자기 왜 그러냐면서. 그런 낯간지러운 짓보다는 그저 삼진 하나, 진심이 담긴 삼구삼진 하나를 훨씬 더 좋아하지.
그래도 어쨌든 응원에 화답은 해줘야 하니, 첫 타자부터 삼진을 잡고 싶기는 한데···
‘쓰읍, 최근 성적이 제법 괜찮으시더만.’
알다시피 레인저스의 리드오프 조금 껄끄럽다. 경기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약간은 미묘해.
마운드에서의 준비까지 마친 뒤 기다리자, 리드오프가 입장했는데, 익숙한 얼굴에 입맛을 다셨다.
Choo Min-Soo.
속칭 Choo지. 모두가 다 아는 그 사람. 최근 성적이 좋다.
OPS도 8할 정도고, 타율도 그럭저럭 2할 6푼을 넘겼지. 홈런도 어제 딱 10홈런을 찍었고.
이제야 연봉 값을··· 음, 이 얘긴 하지 말자. 노련한 베테랑이라서 그런지, 내가 잡생각을 하니 바로 노려보시네.
어쨌든 커리어 내내 보여줬듯 OPS형 히터로서의 면모를 발휘하며, 꽤나 기분 좋게 시즌 초반을 보내고 계시다. 정확하게는 5월부터 펑 터졌지.
듣기로 21경기 연속 출루 중이신 걸로 아는데, 나야 무조건 잘하고, 선배도 잘하고 있으니, 한국에선 참 좋아하겠어.
최근 타격감이 좋은 만큼, 레인저스에서 까다로운 타자 중 한 명인데. 선구안이 좋다 보니, 약간 껄끄러운 타입이다.
허나.
“플레이볼~!”
“스트라이크!”
추민수 선배의 타격감이 좋다면, 난 오늘 아주 좋다. 최근 페이스는 X나게 좋고. 그리고 결국 레인저스이시잖아. 그거면 끝이지. 설명은.
초구는 몸쪽. 굳이 트라우마가 남은 코스를 노린 건 아니다, 뭐, 다들 알겠지. 내 주력 코스도 여기라는 걸.
다만 포심이 아니라, 슬라이더였다는 게 보통이랑은 조금 다르겠지만 말이다.
유려하게 꺾인 공은 곧 스트라이크존 안으로 파고들며 유유히 스트라이크가 되었다.
그것으로 원 스트라이크.
“그렇지!”
“잘한다! 두 개만 더 잡아!”
초구부터 내 폼이 좋다는 걸 느낀 걸까, 레이더스는 일찌감치 환호성을 터트렸고, 추민수 선배, 아니, 타자의 얼굴은 조금 더 딱딱하게 굳었다.
어제 내 심플한 문자를 보고 이미 예감이야 했겠지만, 막상 진짜로 폼이 좋다는 걸 알았으니, 조금은 착잡한 듯하기도 하고.
“볼.”
“스트라이크!”
2구는 바깥쪽으로 살짝 뺐다. 유인구이기도 하고, 존도 체크했지. 오늘은 적당히 빡빡하구만. 그래도 뭐, 이 정도면 나쁘진 않네.
곧바로 3구는 다시 몸쪽으로 던지니, 헛스윙이 나왔다. 이번에는 서클 체인지업이었지. 그것도 더욱더 몸쪽으로 빨려 가는 V2말이야.
조금만 더 꺾였다면 허리를 맞췄을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의 컨트롤은 가능하다. 적어도 오늘은.
그렇게 투 스트라이크 원 볼.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나 말고 타자가. 결정구 타이밍이라는 걸 직감한 거겠지. 확실히 최근 감이 좋으시긴 한가 봐.
‘오늘 길게 던질 건데, 빨리빨리 가자.’
그렇게 중얼거리며 마지막 공을 장전했고, 4구가 쏘아지자.
“···스트라이크 아웃!”
배트가 나오지 않았다.
몸쪽으로 높게 찍혔으니, 내가 즐겨 던지는 하이 패스트볼이라고 예상하신 듯한데, 난 그저 너클 커브를 던졌다.
사선으로 꺾이며 아래로 떨어진 공은 가뿐하게 스트라이크존의 한복판에 꽂혔다.
‘변화구 네 개로 잡았네.’
그래, 루킹삼진이지.
생각보다 수월하게 잡았구만.
“You Suck!”
나랑 경기하면 You Suck이야 늘 듣는 거라서 그런지, 다행히 크게 신경 쓰지는 않으셨다. 그저 짧게 숨을 뱉으며 덕아웃으로 돌아갔을 뿐.
잘 알겠다는 것처럼.
그런 선배가 외롭지 않도록.
홀로 범인이 되지 않도록.
“스트라이크 아웃!”
뒤이어 올라온 2번타자, 아이재아 카이너-팔파도 뒤따라서 보내줬다. 마찬가지로 4구만에, 서클 체인지업에 헛스윙하며 물러났지.
그들이 특별하게 불행을 당하는 건 아니다. 어차피 오늘은 레인저스가 내보낸 아홉 명의 타자와 더불어 경기장을 찾아온 수만 명의 사람들이.
“스트라이크 아웃!”
다 함께 고통받는 날이니까.
일종의 라마단 기간인 셈이지. 어차피 일 년에 몇 번 없는 일인데, 그러려니 하고 참아야지, 어쩌겠어?
그렇게 3번타자 노마 마자라까지 삼진아웃. 높은 하이 패스트볼에 KKK가 찍히며, 1회 말은 끝났다.
“You Suuuuuuck!”
“Rangers Fucking Suck!”
“크헤헤, 텍사스 새끼들, 간만에 Suck 만나니까 좋지?”
“역시 여기서 하는 You Suck이 제일 찰지다니까!”
언제나 그랬듯, 글로브 라이프 파크는 그저 You Suck으로 가득 찼고 말이다.
아무리 봐도 여기 우리 안방 맞다니까. 이게 어떻게 원정이야. 던지는 사람도 편하고, 응원하는 사람도 즐거운데.
물론 그걸 제외한 나머지 수만 명이 불행하지만,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누군가가 행복하려면, 다른 누군가의 희생은 필수적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 레인저스는 확실하게 불행해져야 하지. 나와 애슬레틱스의 행복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