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241화 (241/316)

241화

“아웃!”

“오늘은 제대로 깨졌네···”

“뭐, 이런 날도 있는 거지.”

주심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3차전이 끝났다. 1,2차전과 마찬가지로 패배로. 깔끔하게 3연패구만.

루징 시리즈가 확정된 건데, 적어도 이번 시즌 우리 팀에게 루징 시리즈는 대단히 어색한 일이다. 올해 우리는 거의 모든 시리즈를 스윕이나 위닝 시리즈로 끝냈으니까.

‘이번이 두 번째인가?’

아마도 이번이 두 번째일 걸? 루징 시리즈는. 스윕패는 당연히 없고.

“간만에 루징 시리즈네.”

“양키스전이 마지막이지? 루징은.”

“지는 게 왜 이렇게 어색하냐.”

“그만큼 올해 우리가 잘 나가긴 했잖아? 어색할 수밖에 없지.

그래서 그런지 선수들도 조금은 어색한 듯 머리를 긁거나, 아쉬운 한숨을 뱉었다.

그나마 저번에 양키스 원정에서 처음으로 루징 시리즈를 당하긴 했지만. 그때야 뭐, 시리즈 막판부터 내 도핑 의혹이 막 터지기 시작했을 때라서 다들 정신이 어수선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가 있었으니까.

거기다 그땐 1승 2패였지만, 이번엔 내리 3패를 했고 말이야. 그래, 내리 3패다. 시리즈 마지막 경기를 하나 남겨두고 있지.

‘스윕 당할 생각은 죽어도 안 하네.’

그렇기에 참 웃긴 거고.

3연패쯤 했으면 쫄릴 만도 한데, 우린 죄다 루징에 아쉬워할 뿐, 스윕은 걱정하지 않았으니까.

선수들은 물론 팬들까지도.

3연패 당한 팀치고는 꽤나 무덤덤한 반응이지. 오히려 탬파베이 쪽이 당황했을 거야.

그만큼 올해 우리 팀의 자신감이 대단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래도 내일은 Suck이 나오니까, 마지막은 이기고 원정 가겠네.”

“스윕 당한 뒤에 원정 가면 기분 X같은데, 진짜 다행이지.”

“든든한 에이스가 있으면 이런 게 좋지. 웬만하면 연패가 길게 안 이어지잖아?”

4차전에 내가 등판한다는 게 가장 크겠지. 다들 아주 에이스에 대한 믿음이 대단하시구만.

패배를 깔끔하게 털어낸 동료들은 은근한 눈빛으로, 마치 ‘내일 당연히 이겨줄 거지?’ 라고 말하듯 나를 봤다.

누가 보면 승리를 나한테 맡겨놓은 줄 알겠네. 나중엔 아주 무조건 이기라며 칼 들고 협박이라도 하시겠어?

당연하다는 듯한 그 반응이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다.

“Suck 너 이제 폼 돌아왔다며?”

“어느 정도는?”

“그럼 됐네. 걱정 안 해도 되겠어. 그 정도면 충분하잖아?”

내 폼이 다시금 서서히 올라오는 걸 옆에서 지켜봤으니, 저런 반응이 나올 만도 하지.

폼은 평범하게 올라왔다.

엄청나게 좋은 건 아니고.

바닥 찍고 올라오는 건데, 갑자기 확 좋아지면 그것도 좀 이상하지.

그냥저냥 딱 적절한 수준, 아니 그보다는 살짝 부족한 정도까지 올라왔는데···

“충분하기는 하지.”

사실 그 정도만 돼도 충분하긴 해. 경기 하나 이겨 먹는 건.

####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났을 땐, 기분 좋은 감각이 반겨줬다. 꽤나 오랜만이었지.

한동안은 묘하게 찌뿌둥하다거나, 약간은 멍~하거나 왠지 좀 몸이 붕 떠 있었으니까.

‘폼도 멀쩡하고, 자세도 금방 잡히네.’

적당히 씻고, 거울 앞에 서서 투구폼을 취했을 때도 아무런 문제 없이 딱 자세가 갖줘졌고 말이야.

‘엄청나게 좋진 않지만, 이 정도만 돼도 감지덕지지.’

사실 진짜로 좋았을 때랑 비교하면, 조금 손색이 있지만, 감각이 완전히 바닥을 찍는 경험을 해봤기에, 이마저도 감사하게 여겨졌다.

“오늘은··· 좋나 보네요. 다행이군요.”

“딱 아시네요?”

“얼굴만 봐도 알아야죠. 제가 Go와 함께 지낸 시간이 얼만데.”

그렇게 몸 상태를 확인한 뒤,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대니얼도 내 컨디션을 감지한 듯 만족스럽게 웃었다. 묘하게 뿌듯해 보이기도 했고.

하긴, 떨어진 내 폼 올린다고, 대니얼도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거의 재활에 가까운 훈련 프로그램도 새로 만들 정도로.

그 노력이 결실을 보았으니, 피지컬 트레이너로서 기분이 좋을 수밖에.

“그래도 일단은 피칭까지 잘 확인을 해야죠, 그냥 몸만 올라온 걸 수도 있으니까.”

“그거야 당연한 일이고요. 그래도 일단은 좋아 보이시니, 오늘은 다시 평소의 루틴대로 하시죠.”

“그래야죠.”

물론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다. 일상생활에서의 감각과 피칭 감각은 또 다르거든. 엄청나게 다르지.

그러니 연습 피칭에서도 올라온 모습을 확인하기 전까진,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적당히 기분 좋은 하루쯤은 되겠지만 말이야.

“그럼 슬슬 가보죠.”

그걸 완벽한 하루로 만들기 위해서, 오늘도 콜리시엄으로 향했고, 당연하게도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여전히 조금은 우울한 기운이 흘렀지만, 내 등판일이라서 그런지, 전날보단 훨씬 덜하네.

“예상보다 더 많이 몰렸네요.”

“내일부터는 또 여섯 경기 정도 원정이니까요. 더 몰리겠죠. 다음 콜리시엄 등판은 제법 뒤에 있을 테니까.”

대충 일정을 따져보면, 오늘 등판한 뒤, 다음 콜리시엄 등판은 다음 달, 6월 12일 정도일 거다.

오늘 이후로 한동안 홈에서 내가 마운드에 서는 걸 볼 수가 없는 건데, 그러니 많이 몰릴 수밖에. 날 사랑해도 너무 사랑하니까.

‘기왕이면 잘해야지.’

나도 그런 팬들에게 좋은 경기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고.

물론 지난 등판에서도 막판에 조삼모사로 틀어막으면서 기쁘게 하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꼼수니까.

“Suck! 오늘은 잘할 거지?”

“저번 경기처럼 또 뻥뻥 맞아버리면 나 진짜 울지도 몰라.”

“삼진만 팍팍 잡아! 실점은 상관없으니까, 그거에만 신경 쓰라고!”

차량에서 내리자, 나를 당연히 알아보고 소리치는 팬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거나, 사진 같은 팬서비스를 해준 뒤 곧바로 클럽하우스에 입성했다.

당연하게도 사인은 이번에도 아무도 받지 않았다. 내가 대체 얼마나 많은 사인을 뿌리고 다닌 걸까.

“Suck, 오늘은 좀 늦었네? 잠 푹 잤나 봐?”

“푹 잤어요, 아주 오래간만에.”

“오~ 그렇다니 다행이네. 그나저나 올스타전 투표 시작했던데, 봤어?”

그런 고찰을 하면서 들어가니, 제드 라우리가 반겨줬는데, 그도 내 편안한 얼굴에서 오늘 컨디션을 느낀 건지 흐뭇하게 웃었다. ‘오늘은 낙승이구만’하는 표정으로.

마음이 놓인 건지, 대뜸 딴 이야기를 하는데, 오늘이 올스타전 투표가 시작되는 날이었던가? 신경도 안 쓰고 있어서 몰랐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뭐하러 봐요. 어차피 난 무조건 당선인데. 지금 당장 두 달 정도 부상으로 날려먹어도 무조건 되겠구만.”

“···진짜 더럽게 재수 없는데 너무 맞는 말이라서 뭐라고 반박을 못 하겠네.”

난 이미 확정인데 뭣하러 그런 걸 신경 써? 내가 올스타전에 못 나간다고? 진지하게 폭동 날 걸?

설사 어떠한 음모로 인해 투표에서 탈락하더라도, 사무국 차원에서 날 집어넣을 거야.

그래야 흥행이 끌리니까.

까놓고 말해서 4월 이후로 나는 이미 올스타전 한자리를 먹은 거나 다름없지.

“아무튼, 올해는 우리 팀 전부 다 기대해도 좋겠더라. 우리가 완전히 싹쓸이하겠던데? 이거 봐, 지금 내가 2루수 1위라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제드 라우리는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약간 욕심도 내는 것 같고.

왜 올스타 얘기를 꺼내나 했더니, 본인이 포지션 1위라는 거 자랑하려고 그런 거구만. 뻔하지, 아마 SNS에도 올렸을 거야.

“솔직히 성적 놓고 보면 알투베가 맞는 것 같은데···”

“어허, 그런 난쟁이 치터 이름은 말도 꺼내지 마. 그런 놈보다야 내가 훨씬 낫지.”

사실 애스트로스는 이제 완전히 나락으로 갔지만, 호세 알투베는 올해도 잘하고 있다.

엄밀히 따지면 제드보다 성적이 더 낫지. 치터라는 이유로 성적과 상관없이 욕먹고 있지만 말이야.

본인도 그걸 아는 건지, 일부러 미운 마음에 언급하니까 아주 경기를 일으키는군.

“지금 정도론 애매하니까, 더 열심히 하슈.”

더 들어주면 위밍업을 못할 것 같아서, 대충 무시하고 대니얼을 따라 일단 몸부터 달아올렸다.

“Go, 오늘은 좀 어때?”

“그야, 우리 존경하는 코치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 덕분에 저는 언제나 완벽하죠,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화려한 복귀전 같은 마음으로 조금 더 길게-”

“입 돌아온 거 보면 최소한 나쁘진 않은 것 같네.”

“예, 그냥저냥 평범해요. 아니, 적당히 좋은 건가?”

워밍업하고 있으니, 스콧 에머슨이 슬쩍 다가와 컨디션을 체크했는데, 내 미사여구에 감동한 건지, 본론을 듣지도 않고 내 상태를 파악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조금 질린 듯한 표정이 가슴 아프긴 했지만, 그래도 서로 신뢰 관계가 형성되기는 했는지, 믿어주기는 하시네. 그 정도면 됐어.

“알다시피, 레이스 타선이 그리 만만하지는 않아, 알지?”

“알죠, 좀 까다롭던데. 쉬어갈 곳이 없어서.”

“그래, 힘 분배 잘해야 할 거야. 상위타선에만 집중했다간, 하위타선에서 터질 테니까.”

그의 조언에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지난 경기들만 봐도 딱 그랬으니까.

동료들의 기대에 자신감을 밝히긴 했지만, 그렇게 손쉽게 볼 정도로 약소한 타선은 아니었지.

‘빈자리를 적당히 잘 메꿨어.’

에반 롱고리아-코리 디커슨-로건 모리슨 등, 작년 셋이 합쳐서 85개의 홈런과 233타점을 때려냈던 주축 3인방이 모두 나갔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구단답게, 보수보강에 통달한 팀이라서 그걸 또 어찌어찌 메꾸긴 했거든.

원래 스몰마켓이 그래.

대어급 외부 영입이 힘드니, 엄청나게 좋기는 어렵지만, 짜임새는 잘 갖추지. 하나의 스타일을 정해놓으면 말이야.

우리도 봐봐. 뻥파워라는 짜임새가 정해지니까, 타선 전체가 힘 좋은 공갈포가 가득하잖아. 그 덕에 점수 내는 날은 왕창 내버리고.

물론 안 터지는 날은 이게 메이저리그 전체 1위 팀이 맞나 싶을 만큼 개쓰레기지만.

‘생각보다 훨씬 타선이 까다롭단 말이야.’

그런 탬파베이 레이스 타선은 1번부터 9번까지 크게 처지는 구간이 없다. 적당히 완만함을 유지한다고 해야 하나?

그걸 다르게 말하면···

‘타선에 쉴 틈이 없구만.’

타선 전체에 일정한 수준을 힘을 유지해야 한다는 뜻이지. 하위타선이라고 손쉽고 편하게 잡는 것이 아니라.

“만약에 조금 더 일찍 만났으면 고생 좀 했겠어요.”

“그렇겠지, 원래 폼이 안 좋을 때는 이런 타선 만나는 게 제일 까다로우니까.”

폼이 확실하게 안 좋았던 블루제이스전이나, 완전히 올라오지는 못했던 지난 디백스전에서 레이스가 상대였다면 꽤나 힘들었을 거다.

타자들 속이려고 연기를 하든, 적당히 홀려서 잡든, 어쨌든 완급조절을 해야 하는데, 그게 힘드니까 말이야.

그러니 이전에 만났다면 굉장히 까다로운 상대가 됐을 수도 있겠지만.

‘이젠 아니지.’

지금은 딱히 문제없다.

적당히 잘 메꾸기는 했지만, 정말로 빠져나간 85홈런을 다 채우지는 못했지.

어쩔 수 없다. 그런 타자들이 나갔는데, 당연히 타선의 파워가 약해질 수밖에.

“파워는 평범하죠?”

“솔직히 평범 이하지. C.J. 크론 정도를 제외하면.”

“그 양반이야 뭐, 워낙 공갈포라서···”

“그래도 방심하지 마, 저번 경기처럼 일부러 정타 내주는 미친 짓거리도 하지 말고.”

“그거야 철저한 계획하에 하는 거지, 저라고 매번 그런 또라이 같은 짓은 안 해요. 코치도 잘 아시잖아요?”

“몰라, 내가 널 어떻게 알아. 맨날 Go 너 때문에 속만 썩이면서 시간 보내는데.”

그나마 에인절스에서 데려온 C.J. 크론이 힘이 좋기는 한데, 너무 공갈포다. 스윙 자체도 심하게 크고, 컨택이나 선구안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지.

솔직히 말하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타입이야. 적당히 피칭 감각이 좋기만 해도 손쉽게 잡을 수 있는, 삼진 자판기나 다름없으니까.

나머지 타자들은 그 정도의 파워도 없고 말이야. 그러니 적당히 내 폼이 괜찮기만 하다면···

‘큰 어려움 없이 잡을 수 있지.’

다행스럽게도 워밍업을 통해 잘 깎아내린 오늘의 감각은 적당히 무난했다. 예상대로 좋은 정도까진 아니고, 그냥저냥 평범했는데···

“나이스볼~”

이 정도면 충분하지.

####

탬파베이 레이스는 고유석과 그리 인연이 깊은 팀은 아니었다. 작년에도 단 한 경기만을 만났으니까.

“그리고 그 한 경기에서 8이닝 무득점 14삼진으로 털렸지.”

“그 얘길 왜 꺼내, 기분 나쁘게.”

“그냥 그렇다고.”

다만 그 한 경기에서, 다른 팀들이 그랬듯 대차게 털렸을 뿐.

그것을 굳이 언급하는 동료의 말에, 몇몇 선수는 그때가 떠올라,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돌이켜보면, 얼추 비슷한 시기였다. 작년 이맘때에 만나서 대차게 털렸었지. 그때도 충분히 괴물 같은 녀석이었는데···

“저게 뭐야···”

“난 저게 약이 아니라는 게 더 신기해.”

“저기다가 약까지 빨면, 진짜 신이라도 되겠는데?”

“공 던지다가 중간에 마운드 위로 승천하겠지.”

올해는 그마저도 넘었다.

경기 전, 전광판을 가득 채운 선수와 그 아래에 찍힌 이번 시즌 성적에 레이스의 선수들은 혀를 내두르거나 한숨을 뱉었다.

[Go You-Suck - 11GS 11G 11W 0L 83IP 1R 1ER ERA – 0.11 154K]

11경기를 나와서, 11승 무패를 기록했고, 83이닝 간 단 1점 만을 허용했다. 그게 유일한 자책점이고. 그러는 동안 154개의 탈삼진을 잡았지.

이것만 보더라도 괴물 같지만, 전광판에서 굳이 언급하지 않는 더욱더 세부적으로, 2차, 3차 스탯으로 들어가면 더욱더 괴이해진다.

그렇듯 단순히 올해 성적을 보는 것만으로 사기가 꺾일 정도의 괴물에 몇몇은 실소를 흘리기도 했다. 어처구니가 없었으니까.

작년, 대부분의 메이저리그 선수들, 코치들, 기자들 등, 그야말로 모든 관계자들과 팬들은 자신들이 한 투수가 보여줄 수 있는 끝을 목도했다고 생각했었다. 그 이상은 없을 거라고 단언했었지.

그렇기에 이후의 투수들에게 애도를 표했던 거고. 후대의 투수들이 어떤 짓을 하던지 간에, 그 화려한 로열로드를 지켜본 사람들에겐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할 것이라면서.

“쟨 진짜 사는 세계가 다르네···”

“컷이 더 높아졌어.”

“오죽하면 판타지 리그에서 퇴출됐겠어. 너무 사기라고.”

“마이너에서 저래도 어이가 없을 텐데, 쟨 저런 성적을 메이저에서 찍네.”

“솔직히 저대로 한 5년만 더 던지면, 그대로 은퇴해도 쿠퍼스 타운 입성하겠지?”

“5년까지도 필요 없어. 3년만 유지해도 충분할 걸? 10년 못 채운다고 해도, 임팩트가 압도적이라서. 아마 룰까지 바꿀 거야.”

“저런 놈이 못 들어가면, 그게 더 이상하기는 해.”

그런데 그 산이 더 높아지려고 하고 있다. 작년보다 더한 페이스가 이어지고 있으니까. 그게 끝이 아니었다는 것처럼.

지금 당장 은퇴하더라도 대승적인 차원에서 명예의 전당에 처넣지 않을까? 그런 황당한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어쩌면 차라리 그러는 편이 리그의 평화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그런 황당한 생각보다도 더욱더 황당한 것은 그런 투수를 오늘 자신들이 상대해서, 이겨내야 한다는 것.

그러니 나오는 건 그저 허탈한 헛웃음이나, 힘없는 한숨일 수밖에.

3연승, 아니, 지난 시리즈인 볼티모어 오리올스전부터 이어온 5연승의 기쁨이 순식간에 가셨다.

“기껏 열심히 이겼더니, 기분 제대로 잡쳤어.”

“그나마 폼이 좀 떨어진 것 같기는 한데···”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것이 있다면, 최근 확실히 폼이 떨어진 것처럼 보인다는 것.

아마도 언론에서 떠드는 것처럼 드디어 체력이 떨어진 거라거나, 부상이거나, 슬럼프가 시작되는 건 아닐 거다.

그건 너무 허황된 개소리지.

레이스의 분석팀에선 그저 사이클이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것이라고 추측했다.

모두를 놀라게 했던 레드삭스전에서, 완전히 쏟아부은 것이라고 추측했지. 즉 오버페이스의 리바운드가 닥친 셈인데.

“폼 떨어져도 또라이잖아. 분석 영상 보니까, 토론토랑 애리조나를 완전히 가지고 놀더만.”

“장타도 일부러 내준 거라며? 디백스 쪽에 물어보니까, 그런 것 같다고 하던데.”

“이미 회복했을 것 같은데··· 쟤 체력도 좋은 편이잖아?”

“사실 체력만 남아 있으면, 폼이나 감각 올리는 거야 시간문제긴 하지.”

그런 디버프를 안고도 앞서 두 경기에서 상대팀을 완전히 가지고 놀았기에, 만만하게 보거나, 무시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다시 폼이 올라왔을 수도 있고. 레드삭스전 이후로 제법 시간이 흘렀으니까.

그러니 폼이 떨어졌다는 분석 역시 완전히 믿기는 애매했다.

“결국 직접 닥쳐봐야 안다는 거구만. 분석이라고 해봐야, 어느 코스가 쩔어준다, 어느 코스가 X나게 좋다, 어떤 걸 던지면 무조건 삼진이다, 이런 거밖에 없고.”

“뭐 어쩌겠어? 막말로 구속 하나 빼면 약점이랄 게 없는 놈인데.”

허나 그럼에도 믿고, 바랄 수밖에 없다. 그게 아니라면 딱히 다른 활로가 열리는 것도 아니니까.

내로라하는 분석가들, 책상에 앉아서 컴퓨터로 분석하는 너드들도 ‘답 없음’ ‘알아서 하셈’이라는 평가를 내리는 놈이지 않은가?

최소한 폼이라도 떨어져 있어야 그나마 상대할 방법이 열리기는 하겠지.

“플레이볼!”

그런 아슬아슬한 믿음 속에서 경기의 시작이 다가왔다. 1회 초 공격. 1번 타자 말렉스 스미스가 타석에 올랐다.

‘일단 초구부터 보자.’

리드오프로서 상대 투수, Go의 오늘 경기 폼을 알아보는 막중한 임무를 맡은 그는 차분하게 마음을 가다듬었지만.

“스트라이크!”

“하아.”

당연하다는 듯 대놓고 몸 쪽으로 찔러 들어온 초구 포심 패스트볼에 탄식을 뱉었다.

레이스로서 가장 깊이 바랐던, 최선의 가정이 이 공 하나로 날아갔으니까.

‘폼 돌아왔네.’

아무래도 막차는 떠나간 것 같았다. 아슬아슬하게 탑승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말이다.

구위는 좋았다. 듣던 대로. 만약 이게 폼이 떨어져서 약해진 거라면, 그건 말이 안 된다.

“볼.”

“스트라이크.”

“볼.”

컨트롤 역시 철저했고 말이다. 스트라이크를 잡으면서도, 차근차근 존을 파악하듯 얄미운 공간으로 한 구씩 꽂아 넣었지.

‘조금만 더 끌어보자, 조금만 더.’

그렇게 다짐하며 굳게 배트를 틀어쥔 말렉스 스미스였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다시금 몸 쪽으로 깊이 날아온 공에 본능적으로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그것이 스트라이크가 되었을 뿐.

‘변화구도 멀쩡하고.’

너클 커브였을 텐데,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영상으로 수없이 보았던 것과 똑같은 궤적이었겠지.

아니, 어쩌면 약간은 손색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보았던 영상들은 대부분 저 투수의 폼이 좋았을 때니까.

퍼펙트라거나, 노히터라거나, 완봉 같은 걸 했을 때 말이다. 그러니 그보다는 덜할지도 모르고.

“큰일 났는데요?”

“폼 돌아왔구만.”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게 뭐 얼마나 큰 상관이냐 싶긴 하지만.

말렉스 스미스의 말에, 그를 이어 타석에 올라가던 C.J. 크론은 ‘그럼 그렇지’하는 표정으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 같은 지구인 에인절스에서 뛰면서 만났었기에 잘 안다. 저 녀석이 X같다는 것 정도는. 그냥 오늘도 X같은 것이리라.

그렇기에 허탈하게 타석으로 올라가고, 허탈하게 덕아웃으로 돌아오는 두 타자들을 보며, 벤치의 캐빈 캐시 감독은 짧은 한숨을 뱉었다.

“폼 돌아왔군.”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최대한 크게 스윙해야 돼. 옅게 치면 무브먼트에 밀려서 내야를 못 넘어가.”

특히나 우리 팀은 더더욱.

타격코치에게 살짝 명령을 내리면서, 마지막 말은 애써 씹어 삼킨 캐빈 캐시 감독은 문득 생각했다.

‘오프너라고 했던가?’

몇몇 친밀한 기자들은 그가 새운 전략, 아니, ‘대책’을 놓고 그렇게 표현했었다.

경기를 시작하는 ‘스타터’가 아니라, 경기의 문을 여는 ‘오프너’라고 말이야. 아주 흥분해서 떠들었지.

그저 선발은 옅고, 불펜은 두껍기에 만든 방법이었기에, 대충 멋쩍게 웃어넘기고 말았는데,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만약 모든 선발투수들이 저랬다면, 그런 전략이나 대책 같은 게 나왔을까?

‘오프너는 무슨··· 애초에 라루사이즘도 없었겠지.’

아마 투수 분업화 자체가 안 됐겠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선발투수 내면 알아서 막는데 뭣하러 그러겠는가?

어쩌면 야구라는 스포츠가 지금보다 훨씬 더 재미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냥 투수가 나와서 그날 폼 안 좋은 놈이 지는 스포츠가 됐을 테니가.

‘아니면 저런 투수를 이겨내기 위해서 모든 타자들의 질이 지금보다 훨씬 더 상향됐을 수도 있고.’

지금 트렌드가 그렇지. 강력한 투수들을 이겨내기 위해 타자들이 플레이볼 혁명 같은 것을 일으키며 강해졌고. 그런 타자들을 이기기 위해 투수들은 더욱더 빠른 강속구를 던지기 시작했다.

당장 투수들의 구속이 점점 빨라지는 것이 요즘 트렌드지 않은가? 100마일이 흔하게 널릴 정도로.

허나 그런 흥미로운 가정과 다르게, 현실에선 모든 투수가 저렇지 않았기에.

“아웃!”

오직 단 한 명만이 특별히 찬란하게 빛났다. 야구의 트렌드나, 시대의 흐름과 상관없이.

3번 타자 조이 웬들은 마운드 앞 땅볼로 물러났다. 손쉽게 잡아서 1루로 송구하며 이번에도 직접 아웃카운트를 올렸지.

그렇게 1회 초가 사라졌다. 마치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평범하네요, 폼은. 듣던 것과 다르게.”

“그래, 평범해, 다른 때처럼 아주 평범하군.”

혹시나 하면서 기대했던 상대 투수의 폼은 그냥 평범했다. 빌어먹게도 평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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