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괜찮아?”
“멀쩡해. 뭐, 어차피 예상은 했잖아? 오늘 실점하기는 할 거라는 거.”
혹시라도 내가 흔들렸을까, 브루스가 마운드로 올라왔는데, 나? 괜찮지 그러면.
안 괜찮을 리가 있나.
솔직히 신기록을 수립한 이후부터는 덤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말이야. 76이닝이나 끌고 갔으면, 적당히 만족해야지.
“안 괜찮아 보이니까 그러지, 누가 봐도 열이 단단히 올랐구만.”
“그래? 그렇게 보여? 정확하네. 솔직히 속이 좀 쓰리긴 하네.”
그래, 솔직하게 말하자.
한 80이닝까진 갈 줄 알았어.
연속 이닝 무실점 말이야. 정확하게 말하면 그러길 바랬지.
실점이야 무조건 할 것 같기는 했는데, 그래도 그 정도쯤 찍어놓고 깨지면 그림이 더 예쁘잖아?
내 자존심으로도 좋고, 홈팬들도 홈에서 80이닝까지 찍었으니, 적당히 만족할 거고.
아니, 다른 거 다 떠나서 솔직히 1회부터 이렇게 얻어맞을 줄은 상상도 못했지.
그래서 그런가 왠지 좀 뒤통수가 얼얼하면서도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런 내 모습을 딱 알아차린 브루스는 오히려 안심한 건지, 이내 덕아웃에서 지켜보던 스콧 에머슨에게도 슬쩍 손짓을 보냈다.
솔직하면서도 덤덤하게 반응하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는 뜻이겠지.
“그래, 솔직해서 좋네. 실점은 신경쓰지 말고, 일단 이닝부터 잘 마치자.”
“그래야지. 사람들 진정시키려면, 남은 이닝이라도 잘 막아야 할 테니까.”
그렇게 브루스를 내려보낸 뒤, 다시 홀로 남은 마운드 위에서 감정을 갈무리했다.
팬들은 너무나도 오래간만에 보는 내 실점 장면에 당황하고, 충격받고, 그로 인해서 격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데.
사실 나도 마찬가지다.
내 입장에서도 이렇게 실점한 적이 너무 오랜만이라서 좀 어색할 정도야. 당혹스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허나 이런 감정에 휘둘렸다간, 정말로 무너질 거다. 아주 탈탈 털리겠지.
그러다 보면 폼이 저조한 수준을 넘어서, 아예 그냥 슬럼프가 시작될 수도 있고.
그러니 실점이 쓰리더라도, 남은 이닝을 잘 막는 것이 최우선인데, 고맙게도.
“스트라이크!”
실점 덕분에 불이 붙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실점에 팬들이 보인 반응 덕분이지.
만족할 줄을 모르고 계속 더, 더를 외치는 팬들이 아주 괘씸하게 보이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 사람들인데, 멘탈이 터진 것 같은 모습을 보니, 왠지 나도 기분이 안 좋더라고.
“볼.”
그 덕분인지, 저조했던 감각에 다시금 불이 붙었다. 물론 여전히 저조하지만···
‘이 정도만 되도, 막을 방법이야 충분히 많지.’
물론 그 방법을 우리 팬들은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지만, 어쩔 수 있나. 사람이 늘 좋아하는 것만 보고 살 수는 없는 것을.
어느 정도 올라온 감각과 그 덕분에 조금 더 나아진 제구력과 구위. 이 둘 정도면···
‘맞춰 잡아야겠네.’
멋지게 스트라이크를 잡는 건 힘들더라도, 어영부영 억지로 막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
물론 아예 삼진을 안 잡는 건 당연히 아니고, 거기다 하나 더 추가하면···
“볼.”
“볼.”
“스트라이크!”
톰 글래빈 흉내 정도는 가능하겠지. 저번 경기처럼 널널한 스트라이크존에 기댄 중국산 짝퉁 톰 글래빈이 아니라.
얼추 원조의 노력과 품질을 따라가는 아류작 정도 말이야.
‘깐깐하게 구는 만큼, 존을 넓힐 수는 없겠지만, 타자를 까다롭게 하는 정도는 가능하지.’
지속적인 바깥쪽 피칭, 내가 실점에 흔들려서, 제구가 망가지거나, 혹은 승부를 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건지.
타자, 케텔 마르테의 얼굴에 피어난 자신감이 더욱더 짙어졌다. 꽤나 도발적인 눈빛을 하고 있지.
‘뽕이 제대로 찼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기분 좋은 상황이니까.
그 혼자만이 아니라, 아마 디백스 전체가 기뻐서 날뛸 지경이겠지.
내 입으로 말해서 조금 민망하기는 하지만, 역사에 손꼽히는 투수의 역사적인 기록을 자신들이 저지한 거잖아?
다만 콜리시엄이니, 대놓고 그런 감정을 드러냈다간 맞아죽을 지도 모르기에, 내색하지 않고 꾹 참을 뿐.
‘자신감이 넘치는 타자들은 언제나 위험하지만···.’
타자가 자신감이 넘치면 투수로서 굉장히 위협적이다.
지금까지 내가 당한 것처럼 자기 스윙을 편하게 할 수 있고, 그러다 보면 손쉽게 투수를 공략하기도 하니까.
그렇기에 야구에서 기세라는 것이 생각보다 중요한 거고. 허나 그 자신감이라는 게 조금이라도 더 강해지면···
‘반대로 빈틈도 생겨나지.’
6구, 다시금 바깥쪽으로 공이 날아들었지만, 타자, 케텔 마르테는 지금까지처럼 참는 것이 아니라, 타자들과 마찬가지로 간결하게 스윙했다.
풀카운트이니, 어쩔 수 없이 넣을 거라고 생각한 거겠지. 추가적인 위기를 방지하기 위해서.
너클 커브나 슬라이더 등, 횡 무브먼트가 강한 구질들이 있으니까.
“스트라이크 아웃!”
하지만 오히려 공은 역회전하며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서클 체인지업이었지.
자칫 이번에도 타자가 참았다면 볼넷을 내주고, 다시 주자 1,2루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지.
그리고 무조건 휘두를 것 같았고. 분위기가 좋으니, 배트가 가볍게 나올 테니까.
그렇게 간신히 첫 삼진을 올리면서, 드디어 쓰리아웃.
평소보다 훨씬 긴 시간이 걸렸지만, 어쨌든 1회가 끝났다.
2피안타 1희생플라이 1실점 및 자책점이라는, 나에게는 조금 어색한 성적을 남긴 채.
위대했던 기록은 망가졌고, 깨끗했던 ERA에는 먹물이 튀었으며, 기대감에 찼던 팬들은 좌절하고 절망했지만.
‘이제 시작이지.’
경기는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다.
‘대충 그림이 그려지네.’
그리고 남은 이닝을 잘 마칠 경기 계획도 일단은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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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이크 아웃!”
2회 초는 비교적 손쉽게 막아냈다. 삼자범퇴였거든. 어쩌면 당연한 결과지.
“Yeah!”
“이제 좀 폼이 올라오나 보네!”
“그래, 이래야지!”
“삼진 좀 팍팍 잡아! 속 쓰린데, 그거라도 보자!”
걱정과 달리 말끔하게 끝난 이닝에 홈팬들은 그나마 표정이 누그러졌다. 실점의 아픔은 쓰리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경기가 될 거라고 믿는 거겠지.
‘미안하지만,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을 텐데.’
허나 애석하게도 그들이 기대하는 방향의 경기는 아닐 거다. 다른 종류의 계획이 잡혔으니까.
‘상위타선이랑, 하위타선의 격차가 심각하네.’
일단 디백스의 하위타선은 그리 질이 좋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하위타선이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말이야.
“위험한 타자는 없지?”
“딱히 없어. 그냥 자신감만 넘치더라.”
다만 팀 자체의 사기가 드높아진 만큼, 자신감 있는 스윙을 내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많이 부족하지.
직접 옆에서 관찰한 브루스도 비슷한 평가를 내렸고 말이야.
‘6번부터는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 즉 상위타선만 잘 막으면 된다.’
그러니 일단 하위타선은 괜찮다고 보고, 문제는 상위타선인데.
“세이프!”
이어진 3회 초.
9번타자, 제로드 다이슨은 잘 잡아냈지만, 1번타자 데이비드 페랄타에겐 다시금 안타를 허용했다. 여전히 자신감이 넘쳤지.
‘역시 완전히 안타를 막아내기는 지금 상황에선 조금 힘들어.’
떨어진 구위가 여전히 문제인 셈이지. 속이 끓으면서 폼이 더 올라오기는 했지만, 여전히 좀 미묘하게 부족하거든.
장타는 억제하더라도, 안타마저 완전히 억누를 정도는 아니지.
‘그러니 열어준다.’
그러니 방법은 간단했다.
다시금 타석에 올라온 2번타자, 폴 골드슈미트. 본인 포지션에서 확실한 발자취를 남기는 중인 타자는 분명 디백스 타선에서 가장 위험한 타자다.
‘파워는 체이스 필드를 감안해도 준수한 편이고, 기본적으로 컨택 자체가 좋지.’
파워툴을 장착한 스프레이 히터, 즉 교타자라고 할 수 있는데, 아주 까다로운 타입이지. 특히나 자신감까지 장착했다면 더욱더 그렇고.
그를 가볍게 훑은 뒤, 브루스에게 슬쩍 사인을 내자, 포수 마스크 사이로 걱정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지만, 내가 교육을 잘 시켜서 그런지,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일단 밖으로 하나.’
“볼.”
‘하나 더.’
“볼.”
‘그리고 안쪽.’
“스트라이크.”
꽤나 신중하게 나오시는군.
그 때문에 볼 카운트에 약간의 손해를 봤지만, 어차피 나도 간을 본 거다.
‘첫 타석에서는 좌전 안타를 쳤었지. 비거리가 제법 뻗었었고.’
확실히 오늘 타격감 자체가 좋아보였다. 내 폼이 떨어진 것과 별개로.
그렇기에 곧바로 위험한 코스로 공이 날아들자.
“어-”
“저거 넘어가는 거-”
정확한 정타가 나왔다.
다시금 바깥쪽, 허나 확실하게 안쪽으로 들어오자, 그대로 쭉 당겼지.
큼직하게 떠오른 타구에 관중석이 들썩거렸다. 설마설마하는 공포심도 엿보였고.
‘제발, 제발.’
물론 나도 X나게 쫄렸지.
겉으로는 더욱더 확실하게 그런 감정을 표현했고. 덜컥 그대로 얼어붙은 것처럼 몸을 멈추기까지 하면서.
‘진짜 넘어가나?’
초조한 마음으로 타구를 쫓았고, 치솟은 공은 그대로 담장까지 날아갔지만.
“아웃!”
곧 좌익수, 채드 핀더의 글러브 안으로 들어왔다. 거의 담장에 착 붙어서 잡아냈지.
“후우우우우···”
“X발 식겁했네···.”
“그럼 그렇지, 설마 넘어갈 리가 있나.”
주자는 다시 1루로 복귀했고, 골드슈미트는 아쉬운 듯 혀를 내두르며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조금만 더 뻗었으면, 넘어갈 수도 있었으니, 굉장히 아깝게 느껴지는 거겠지.
나를 상대로 시즌 첫 피홈런이자, 통산 네 번째 피홈런의 주인공이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도 있었으니까.
‘됐다.’
나도 더럽게 쫄리기는 했지만, 일단 이걸로 확실해졌다. 확실한 믿음도 얻어냈고.
‘제대로 정타였어.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방금 전의 타구, 솔직히 정타다. 진짜 제대로 맞았지. 그걸 증명하듯 타격음도 청량했고.
‘하지만 잡혔지. 아슬아슬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잡혔다.’
그것으로 다시금 한 가지의 확신을 얻어낼 수 있었다.
정타를 내주고, 열심히 얻어맞더라도, 일단 담장은 웬만하면 넘어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이러면 훨씬 쉬워지지.’
물론 정말로 넘어가버릴 지도 모르지만, 그 정도의 위험은 감수해야지. 대마를 잡으려면.
“아웃!”
이후, 3번타자 제이크 램까지 범타로 잡아내며, 추가적인 안타 없이 3회 초는 수월하게 막을 내렸다. 그럭저럭 잘 막아냈다고 할 수 있지만···
“오늘 컨디션이 진짜로 안 좋나 본데?”
“뭔가 좀 그렇지? 공이 쉽게 맞는 것 같은데···”
“이러다 홈런 맞는 거 아니야?”
팬들은 오히려 더욱더 걱정이 심해졌다. 반대로 막혔다고 할 수 있는 디백스는 오히려 자신감이 더욱더 강해졌고.
이번에도 외야에서 잡혔으니까, 다시금 워닝트랙까지 날아갔고 말이야.
시즌 내내 장타를 잘 허용하지 않은 내가 오늘은 외야를 손쉽게 내주고 있으니 당연히 이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괜찮은 거 맞아? 이래도 되나?”
공을 받아주는 브루스도 이럴 정도인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하겠어? 이러다 정말로 대참사라도 일어나는 게 아닌가, 싶겠지.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공 잘 받아, 타자들 잘 관찰하고.”
허나 일단은 계획대로다.
내가 바랐던 게 딱 이거거든.
맞춰 잡는 피칭이라고 해서, 무조건 땅볼만 유도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플라이볼이야 말로 범타를 유도하는 게 훨씬 더 쉽거든.
그러다가 넘어가면 X되니까, 어떻게든 땅볼을 만들려고 하는 건데,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위험이 크지 않다는 건 이미 확인했으니 됐고.
그런 내 호언장담에도 브루스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렸고, 야수들도 걱정이 가득해 보였지만, 거참 믿으라니까 그러네.
‘꽤나 아쉬워하는구만.’
그렇게 브루스를 달래며, 나는 흘끔 디백스의 덕아웃을 훑었다. 이번 이닝 타석에 올랐던 타자들을 봤지.
페랄타, 골드슈미트. 램. 그들의 얼굴은 전보다 훨씬 더 상기되어 있었다.
꽤나 흥분이 가득했지. 특히나 오히려 안타를 친 데이비드 페랄타보다, 정작 범타로 물러난 뒤의 두 사람이 더욱더 흥분했고 말이야.
‘그럴 수밖에, 정타, 스윗 스팟에 맞은 질 좋은 타구는 손맛부터 남다르니까.’
그런데 결국 다 범타로 끝났다. 죄다 아슬아슬한 외야 플라이였지. 그 앞에서 타자들은 뭐라고 생각할까?
‘못 넘길 것 같은데, 그냥 적당히 치자.’라고 생각하고 배트를 짧게 잡을까? 아니, 절대로.
‘저 투수 만만해 보이는데, 살짝만 힘 더 주면 넘어가겠네.’ 라고 생각하겠지.
‘번호가 하나씩 틀렸으니, 로또를 끊을 수가 있나. 집안 가산 다 팔아먹어서 꼴아 박아야지.’
원래 당첨 된 복권보단, 아슬아슬하게 빗나간 복권이 훨씬 더 중독적인 법이거든.
특히나 그 복권이 한동안 당첨자가 나오지 않아, 계속해서 이월되어, 당첨금이 왕창 쌓여 있다면, 더 말할 것도 없고.
그러니 일확천금의 유혹을 맛본 타자들에게 내가 취할 자세는.
‘고기 냄새를 X나게 풍기는 거지.’
그런 타자들에게 더욱더 X밥으로 보이는 거였다. 허세가 가득했던 저번 경기랑 정반대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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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백스의 덕아웃에는 여전히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분위기 자체가 화기애애했지. 일단 첫 번째 목표는 달성했으니까.
“진짜 미친놈이긴 하네, 이제 5월 막바지인데 첫 실점이라니.”
“그 실점을 우리가 해낸 거지.”
무실점을 깨트렸다.
3월 말에 개막해서, 5월 말에 다다를 동안 결단코 깨지지 않았던 거벽을 우리가 깨트렸다.
리그 최고의 투수를, 아니, 역대에서 논할 만한 투수를 우리가 꺾은 거다. 우리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가.
그런 현실이 주는 짜릿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경이로운 트라웃도, 대단한 무키 베츠도, 그리고 작년까지 동료였던 강력한 J.D. 마르티네즈도 해내지 못했던 일이었으니까.
“역대 최고의 투수라느니, 넘을 수 없는 철벽이라더니 하더니. 그 대단하다던 Go도 별거 없네.”
“솔직히 좀 쉽더라. 듣던 거랑 너무 다른데?”
“폼이 진짜로 안 좋기는 안 좋나봐, 공이 쉽게 뻗던데?”
“솔직히 10경기 동안 미친 놈처럼 잘했으면, 좀 내려가기도 해야지.”
“이제 시작이야. 이참에 리그 최고의 투수, 중간에 강판시켜 보자고.”
그리고 그 이상도 가능할 것 같았다. 1회 초, 비록 1실점에 그치기는 했지만, 솔직히 더 그 이상도 가능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2회는 손쉽게 저지됐지만, 3회는 더럽게 아쉬웠다. 잡힌 타구 세 개 다, 조금만 더 뻗었다면 홈런이 됐을 정도니까.
그래, 정말로 저 거성을 넘어뜨릴 수가 있었던 거지.
‘살짝 힘이 부족했어.’
‘공이 가벼워, 작정하고 당기면 넘어간다.’
‘콜리시엄이 투수 친화적이기는 해도, 사실 담장 자체는 그리 안 멀어. 잘만 띄우면 돼.’
욕심이 생긴 건 그때부터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1점만 내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했었지만, 이젠 그보다 더욱더 큰 유혹이 디백스에게 생겨났다.
“아웃!”
어쩌면, 아예 담장을 넘겨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이번 시즌 첫 홈런의 주인공이, 내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메이저리그 홈페이지 대문에 내 모습이 담기고, 신문 일 면에 얼굴이 박힐 수도 있다.
작년, 홈런을 친 타자들은 모두 다 그런 영광을 누렸으니까. 이번에도 마찬가지겠지.
“세이프!”
그것을 부추기듯, 대단하다던 공은 생각보다 훨씬 가벼웠다, 위대하다던 Go는 훨씬 더 만만했다.
다시금 안타가 나왔지. 이번에도 높이 뜬 타구였고, 아슬아슬하게 야수에게 잡히지 않았다.
가벼운 공은 이처럼 손쉽게 외야로 뻗었다. 바깥쪽으로만 이어지는 피칭은 도망치는 것처럼만 보였고 말이다.
“스트라이크 아웃!”
위기감을 느낀 건지, 순간적으로 체인지업을 비롯한 결정구를 찔러 넣어, 삼진을 잡기도 했지만, 그 정도론 디백스의 기세를 꺾을 수 없었다.
이미 그들의 눈에 상대 투수는 ‘충분히 만만한 상대’로 전락한 지 오래였으니까.
“베이스 온 볼!”
심지어 계속 바깥으로 던지다, 허무하게 볼넷을 내주는 모습은 더욱더 그것을 기정사실로 만들었고 말이다.
“아웃!”
2사 주자 1,2루.
8번타자 닉 아메드가 호기롭게 타석에 올랐고, 그 역시 자신감 넘치게 스윙했지만, 빗맞은 투심은 내야 플라이로 끝났다.
“아, 한 점 더 가능했을 거 같은데···”
“그래도 좀 두들기다 보면 터지겠는데?”
다시금 아쉽게 끝난 4회 초. 타자들은 혀를 내두르면서도 여전히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심지어 4회 말, 2실점을 허용하며, 역전을 허용했는데도 말이다.
‘한 방이면 돼, 한 방이면 다시 동점이야.’
어차피 한 방이면 동점이니까.
그런 욕심을 버린다면, 더욱더 손쉽게 득점을 올릴 수 있는 투수이고.
이닝도 아직 한참이나 남아 있으니, 분명 다시금 뚫리겠지. 디백스는 그렇게 믿었다.
‘오늘이라면, 충분히 가능해. 조금만 더 확실하게 당기면, 충분히 넘어간다.’
그리고 5회 초. 세 번째 타석을 준비하던 폴 골드슈미트 또한 지난 타석의 손맛을 여전히 손에 꽉 쥐었다.
직전 타석은 너무 아까웠다.
잘만 하면 넘어갔을 텐데. 조금만 더 뻗었다면, 바람이라도 불어줬다면, 임팩트에 힘이 더 담겼었다면. 분명히 넘어갔을 거다.
공이 맞은 순간 느껴졌지 않았는가? 그 짜릿한 손맛이, 그 확실한 감각이. 그런데 그게 하필이면 담장 앞에서 잡히다니.
어쩌면 모든 타자들을 통틀어 가장 아까운 타구를 날린 게 그 자신이었기에, 미련 역시 더욱더 짙게 남을 수밖에 없었다.
‘타이밍은 잡혔어, 이번엔 무조건 날린다.’
그래도 타이밍은 잡혔다.
특유의 리듬으로 타자들을 홀린다던 평가와 달리, 생각보다 훨씬 쉽게 적응했지.
‘애초에 구속 자체가 느리니까.’
구속이 느리기에 훤히 보였으니까. 공 자체가. 그러니 금방 감이 올 수밖에.
그렇기에 확신을 품고서, 세 번째 타석을 준비한 그는 알지 못했다. 그의 뒷덜미에 맴돈 찝찝한 기운을.
“스트라이크 아웃!”
다시 9번부터 시작된 타석.
제로드 다이슨은 이번에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아예 헛스윙 삼진으로 잡혔지.
어쩔 수는 없다, 사실 그는 별로 좋은 타자라고 보기는 힘드니까.
“이번에도 안타 칠 테니까, 넌 홈런 날려. 투런으로 바로 역전해야지?”
“그래야지, 감은 잡혔으니까, 판만 깔아줘.”
오늘 멀티히트를 기록하며, 좋은 타격감을 자랑하는 데이비드 페랄타는 씨익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강력한 자신감이 휘감은 동료의 모습에 폴 골드슈미트 역시 마찬가지로 활짝 웃으며 답변했지만.
“아웃!”
애석하게도 이번에는 그의 앞에 주자가 없었다. 자신감이 과해, 마음이 성급했던 건지, 3구를 냅다 후려치며, 파울플라이로 물러났으니까.
‘투심인가? 좀 조심해야겠네.’
아마도 투심일 거다.
살짝 반대 방향으로 꺾이는 것 같았으니까. 떨어지기도 했고.
“씁, 너무 의욕이 과했네.”
“동점으로 만족하지 뭐.”
머쓱한 듯 혀를 날름거리는 데이비드 페랄타와 가볍게 하이파이브한 골드슈미트는 자신감 있게 배터박스로 입장했다.
그러자 투수는 약간은 껄끄러운 듯한 눈으로 그를 봤고 말이다.
다만 조금 독사처럼 반짝이긴 했지만, 이미 밑천이 드러난 투수였기에, 그리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침착하게 하나 기다리자.’
큼직한 걸 노리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급하게 마음을 먹지는 않았다.
“볼.”
어차피 이럴 테니까.
이번 경기 내내 이러지.
시종일관 바깥쪽으로, 바깥쪽으로, 계속해서 던져대지.
투볼 내지는 쓰리볼이 되기 전까지는 굳이 쳐다 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스트라이크!”
그래도 2구는 살짝 아슬아슬하게 들어왔던 것 같지만, 오늘 주심은 깐깐한 사람이니, 아마도 스트라이크였을 거다.
“볼.”
3구는 다시금 볼.
서클 체인지업이었지만, 속지 않았다. 이미 저 투수에게 충분히 적응했기에, 어떤 공을 던질지, 어느 정도는 감이 잡혔으니까.
‘몸쪽으로 들어오면 좋겠지만, 그렇지는 않겠지.’
그는 차분하게 공을 기다렸다, 아마도 좋은 코스를 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으니, 어느 정도는 타협해야겠지.
그렇기에 바깥쪽 패스트볼. 딱 그 정도만 노렸다. 조금만 들어와도 날릴 생각이지. 그게 포심이든, 투심이든 간에.
“볼.”
다시금 볼. 너클 커브가 살짝 스트라이크존을 긁는 듯했지만, 떨어지는 궤적을 예상하고 간신히 참았다.
‘자, 이제 어떡할 거지?’
투수는 눈에 띄게 긴장했다.
원 스트라이크 쓰리볼.
최악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어쩌면 볼넷을 생각할지도 모르고. 부디 그러지 않기를 바라며, 폴 골드슈미트가 스윙을 장전했을 때.
‘왔다!’
공이 날아 들어왔다.
바라지도 않을 만큼 좋은 코스였기에, 그는 곧바로 스윙을 냈지만-
“파울!”
큼직하게 날아간 타구는 이내 파울라인을 넘어갔다. 살짝 빗맞은 거겠지.
‘씁, 좀 늦었나? 정확도가 부족했어.’
아무래도 예상치 않았던 좋은 코스에 잠깐 멈칫했던 것이 문제였던 것 같다.
제법 잘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었는데, 파울라인을 넘어간 것을 보면, 약간은 미묘하게 미스가 났던 거겠지.
다시 없을 좋을 찬스라고 할 수 있었기에, 아쉬움이 무럭무럭 자라났지만, 여전히 자신감을 잃지는 않았다.
오히려 방금 전의 파울 덕분에 더욱더 타격감이 올라왔으니까. 풀 카운트이긴 하나, 충분히 가능하다.
‘다음은, 무조건 넘긴다.’
그리고 6구, 다시금 안쪽으로 속구가 날아들었을 때, 골드슈미트는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의외성을 노린 것 같은데, 이번에는 놓칠 생각이 없었으니까.
다시금 좋은 감각을 되살리며, 그대로 배트를 쭉 당긴 그였지만, 곧 깨달았다.
‘이거-’
그 좋은 감각이 허상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투수가 생각처럼 만만하지 않았다는 것을.
‘느리다.’
그가 굴을 파놓았다는 것을.
분명히 타이밍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스윙이 빨랐다. 몸쪽으로 날아온 공은, 분명 오프스피드, 체인지업이었지, 예상처럼 패스트볼이 아니라.
분명히 감을 잡았고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왜 속은 걸까? 왜 분별하지 못한 걸까? 스스로에게 질문한 골드슈미트였지만,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