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매리너스는 깔끔하게 털리고 돌아갔다. 이번에도 스윕이었지.
사실 놀라운 결과는 아니야.
팀의 핵심 선수들이 도핑 의혹이 터진 건 똑같지만, 우린 내가 의혹을 뿌리치면서, 더욱더 단단하게 뭉치며, 기세가 올라간 반면.
매리너스는 진실로 드러나고, 중징계까지 떨어지면서 날아가면서, 사기가 바닥을 찍었으니까.
‘애초에 올해는 우리가 더 체급이 높기도 하고.’
그 덕에 두 시리즈 연속 스윕하며, 7연승을 올리게 돼서 그런지, 지금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좋았다.
선수단은 물론 팬들도 대단히 기뻐하고 있지. 근 몇 년을 통틀어서, 이번처럼 초반 기세가 좋았던 적이 없으니까.
“2차 검사 결과 나왔습니다. 이메일로 먼저 발송됐어요.”
“생각보다 일찍 나왔네요? 다음 시리즈는 끝난 뒤에야 나올 줄 알았더니.”
그런 분위기 속에서, 레드삭스전 직후 받았던 두 번째 도핑 검사의 결과가 나왔다.
마지막 체크메이트지.
브라이언은 보스턴에서 한창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기에, 이번엔 그냥 이메일로 전달받았는데. 뭐, 당연하게도 결과는 깨끗했지.
“이번에도 직접 사용하실 겁니까? 우편 발송은 조금 더 시간이 걸릴 텐데, 먼저 프린트 해서 드릴까요?”
대니얼은 기대된다는 듯, 은근한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다.
레드삭스 때처럼 또 중계 카메라에다 대고 친절하게 설명할거냐는 건데.
“뭐, 굳이 그럴 이유는 없죠. 그리고 그런 건 자주 쓰면 약빨이 떨어져요. 오히려 허풍선이 스피커처럼 느껴지겠죠. 아마 브라이언에게도 갔을 테니까, 이번에는 그냥 심플하게 언론에 공개하는 걸로 하죠.”
“허, 브라이언의 말처럼 에이전트의 재능이 있긴 하네요. 아주 여론을 능수능란하게 다루시네.”
“제가 좀 다방면에 재능이 넘치는 사람이라, 그래서 구질도 많잖아요?”
이번엔 그럴 필요가 없지.
멋진 퍼포먼스는 딱 한 번이면 충분하거든.
반복할수록 효과가 퇴색되고, 기존의 퍼포먼스에 대한 평가도 깎이지.
첫 번째 도핑 결과는 멋지게 발표했으니, 이번에는 가볍게 해야 밸런스가 잘 맞아.
그리고 솔직하게 말해서···
“그것도 잘 던져야 멋진 거지, 처맞아 놓고 그런 짓하면 X신처럼 보여요.”
레드삭스 때처럼 임팩트 넘치는 피칭을 보여줄 자신도 없다.
최소한 8이닝 15K 정도는 해야, 그런 퍼포먼스가 간지나게 보일 텐데. 어우, 지금 내 폼으론 어림도 없지.
“그냥 준비에만 집중하죠. 이젠 그게 더 중요해졌으니까.”
“예, 어차피 해야 할 조치는 다 했으니까요.”
이걸로 도핑 의혹은 다 틀어막았으니, 이젠 다른 생각 말고 그저 폼을 올리는 것에만 최선을 다해야 했다.
‘휴식일 덕분에 푹 쉬기는 했지만··· 역시 좀 부족하네.’
날로 먹은 블루제이스전 이후, 하루의 이동일이 끼어 있어서, 다시금 5일을 푹 쉴 수 있게 됐지만.
어차피 지금 내 문제는 체력이 아니다. 사이클이 끝나면서 수직 하강한 감각이지.
그래도 철저하게 루틴에 맞춰서 훈련하며, 어느 정도 다시 끌어 올리기는 했는데, 여전히 많이 부족했다.
분명 체력은 멀쩡하고, 몸도 깨끗한데도, 감이 잘 안 올라오고 있지.
‘다음 등판이 디백스전, 26일이었나?’
내 다음 상대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타격은 블루제이스보다도 훨씬 못한 팀이지만, 생각보다 힘든 날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감각도 생각보다 올라오지 않았을 뿐더러, 캐나다에서 날로 먹은 업보가 다음 경기에서 부메랑으로 되돌아올 테니까.
‘허세는 안 통할 거고, 판정도 평소보다 더 짜겠지.’
일단 허세는 안 통할 거다.
언론에서야 여전히 강력하다느니, 100이닝까지 가능하겠다느니, 온갖 호들갑을 떨고 있지만.
사실 대부분 구단은 전력 분석팀을 통해, 내 폼이 안 좋다는걸 알아차렸을 테니까.
디백스 역시 마찬가지고.
그리고 가장 핵심이었던 판정은 오히려 평소보다 훨씬 짜겠지.
“며칠 지났는데도 주심 욕이 가득하네요. 식지를 않네.”
“그만큼 Go가 주목받는 선수라는 뜻이죠. 눈이 많은 만큼, 말도 많을 수밖에요. 그나마 애슬레틱스 팬들이 비호해줘서 다행이죠.”
우리의 브라이언 고먼께서는 지금도 욕을 드시고 계신다.
특히 스윕을 당해버린 블루제이스 팬들은 당장 잘라버리라면서 소리를 높이고 있지.
조금 과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솔직히 나도 경기 영상 되돌려 보니까, 좀 심하긴 하더라.
그런 논란이 터져 나온 만큼, 당연하게도 다른 주심들은 은근히 그런 여론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슈퍼스타에게 휘둘리는 심판이라는 오명을 얻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니 홈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판정 자체는 평소보다 훨씬 더 깐깐해지겠지.
‘역시, 꼼수는 한계가 있어.’
어영부영 날로 먹다가, 폼 올리려고 했지만, 역시 한 번 정도는 쓴 맛을 볼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물론 내가 원정을 휩쓸고, 멋들어진 기록과 퍼포먼스까지 선보이는 것을 지켜보며.
홈에서도 그러길 기도하며, 내 등판을 기다릴 홈팬들은 실망하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이해는 해주겠지.
####
오클랜드는 위험한 도시지만, 어쨌든 사람이 살아가는 도시다. 그것도 무려 40만이나 되는 인구가 밀집되어 있지.
제 아무리 치안이 나쁘다고는 하나, 어쨌든 그 속의 사람들은 그런 환경에 적응해서, 알아서 잘 살아가는 법이니까.
그런 오클랜드에서 시민들 모두가 즐기는 시간이 있다면, 단연 스포츠일 거다. 특히나···
“Suck이 2차전에 등판한다고? 마침 토요일이네, 잘 됐어!”
“낮 경기니까, 그럼 애들 데리고 같이 가도 괜찮겠네.”
“오래간만에 홈 등판이니까, 이번에도 잘하겠지?”
“말해 뭐해, Suck이야 늘 잘하지.”
그중에서도 최근 가장 인기가 높은 것은 단연 Go의 경기일 테고.
짧았던 시련을 견디며 더욱 단단해진 건 애슬레틱스 선수단만이 아니었다.
팬들 역시 더욱더 단단해졌지. 또한 지금까지 쌓인 것보다도 훨씬 더 큰 믿음도 생겼고.
결국에는 이겨내지 않았는가? 온갖 음해와 의혹 속에서, 이번에도 우뚝 섰지. 그것도 아주 멋진 방법으로.
“혹시 퍼펙트하지는 않을까? 스포츠 뉴스 보니까, 기세가 좋다고 하던데.”
“저번 경기는 짧게 끊었고, 5일이나 푹 쉬었으니까, 퍼펙트는 몰라도 그 이상도 가능하겠지!”
“이번 시즌 Suck 패턴 몰라? 퐁당퐁당이잖아. 저번 경기는 6이닝이니까, 이번엔 못해도 8이닝이야! 그게 Suck이지!”
그렇기에 기대감은 최고조로 달했다. 아마도 오클랜드 시민 중 태반은 레드삭스전을 봤을 거다.
라디오든, 중계방송이든, 아니면···
“그때 딱! 우리가 나타나니까, Suck 감동해서 눈물을 왈칵-”
“덕아웃으로 그냥 걸어가는가 싶다가, 갑자기 발길 돌려서 카메라 앞에 서는데, 크~ 너넨 죽어도 모를 거야. 그게 얼마나 쩔었는지.”
직접 그 먼 보스턴까지 날아가서 직관한 사람이든지 간에, 모두가 목도했지.
경기 내용 자체도 퍼펙트게임, 그리고 20K라는, 그의 팬이라면 기뻐서 혼절할 것들이 담겨져 있었던 데다가.
마지막의 퍼포먼스는 아마도 죽을 때까지 간직할 만큼, 그냥··· X나게 쩔었으니까.
그런 선수가 다시 콜리시엄으로 돌아왔다. 머저리, X신, 찌질이, 패배자들을 찍어 누르고, 승리자가 되어서.
그렇기에 궁금했다.
과연 콜리시엄에서는 얼마나 더 잘해줄까? 혹시 이번에도 퍼펙트를 해버리는 건 아닐까? 그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런 기대감에 사람들은 차근차근 준비했다. 심지어 낮 경기에 토요일이기까지 했으니. 더 말할 것도 직관하기 좋은 날이었으니까.
“7대2? 뭐,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내일은 Go 나오니까. 이번 경기에서 몰아서 치는 거지.”
“내일 Go한테 15K 아니, 20K 당할 놈들인데, 한 경기 정도는 적선해 줘야지~”
디백스와의 인터리그 매치업 1차전은 시원스럽게 패배했다. 7연승이 깨졌고, 좋았던 기세에 찬물이 끼얹어진 셈이지만, 팬들은 선수들을 너그롭게 용서했다.
어차피 내일 확실하게 기쁨을 맛볼 텐데, 뭣하러 열을 올리겠는가?
힘들었던 한 주의 막바지를 만족스럽게 만들어줄 경기를 기대하며, 시민들은 콜리시엄으로 몰렸다.
####
“사람 엄청 많네.”
“진짜 너무하다니까. 어제랑 너무 다른 거 아니냐고.”
“거의 두 배는 되겠는데?”
“이 도시는 Suck 얘를 사랑해도 너무 사랑해. 옆에서 볼 때 서운할 정도로.”
콜리시엄이 바글거렸다. 경기장 안은 물론 그 주변에도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았지.
전날, 1차전과 달라도 너무 다른 풍경에 몇몇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거나.
아니면 부러움에 질투가 조금 섞인 눈빛으로 나를 봤는데.
‘이야, x발 더럽게 부담스러운데?’
정작 나도 죽을 맛이다.
아니, 한 경기쯤은 그냥 마음 편하게 던지고 싶은데, 왜들 이러는 거야 대체.
한 가지는 확실하네. 이 사람들은 이해라는 걸 모르는 양반들이다.
물론 메이저리거라면 언제나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도 휴먼이야 휴먼.
열 경기 동안 x빠지게 잘하고, 얼마 전에 퍼펙트에다 20K까지 했으면 됐지, 뭘 또 저렇게들 기대하고 그래?
진짜, 부담스러워서 못 살겠네.
“Suck, 오늘 너 폼 어때? 아직도 별로야? 오늘 네가 폼이 안 좋으면··· 큰일 날 것 같은데.”
“그러게, 오늘 같은 날 홈런이라도 맞았다간, 폭동이라도 나겠는데?”
“오우, 그렇게 말하는 거 보면 여전히 별로인가 보네. X됐구만.”
당연히 폼은 여전히 별로다.
좋았던 흐름이 끊기고, 다시 바닥부터 쌓아 올리는 건데, 어디 쉽게 올라오겠나.
레드삭스전 이후에 이미 말했었잖아. 두 경기 정도는 털릴 거라고.
그나마 블루제이스전이야 여러 가지 꼼수가 겹치면서 날로 먹을 수 있었지만, 이번엔 아니다.
“일단 되는 데까지는 올려 봐야지. 브루스, 오늘 불펜 피칭 니가 받아라. 그래야 좀 더 감이 잘 잡힐 것 같아.”
“알았어, 일단 위밍업부터 해, 나도 폼 올리고 바로 불펜으로 갈 테니까.”
진지한 부탁에 식사가 다시금 뒤로 밀리면서 조금은 삐쳤었던 브루스도 흔쾌히 수락했다.
불펜 포수도 잘 받아주지만, 기왕이면 오늘 같이 호흡 맞출 놈한테 던지는 쪽이 더 감이 잘 잡히겠지.
그렇게 마지막 박차를 가하며 부랴부랴 준비했을 때.
“어? 저거 Suck이지?”
“Suuuuuuuuuck!”
“오늘 퍼펙트하자!”
“퍼펙트 셋 중 둘이 원정인 게 말이 되냐! 오늘도 퍼펙트 해서, 균형 맞춰!”
“퍼펙트는 됐고, 20K 해, 20K! 그거면 충분하니까!”
나를 발견한 팬들이 힘껏 소리치거나 하면서 더욱더 부담감을 심어줬다.
남의 속도 모르고, 퍼펙트니, 20K니 아주 난리법석인데. 그게 또 주변으로 전염됐다.
“Suck이 퍼펙트 하겠대?”
“저거 봐, 우리 보고 있잖아. 우리 기대만큼 하겠다는 뜻이야!”
“고개도 끄덕인 것 같은데?”
그러다가 자기들 마음대로 내 행동을 분석하더니, 아주 기정사실로 만들어버렸지.
길고긴 원정 끝내고, 다시 간만에 친정집 마운드에 오르는 날인데, 아주 그냥 좌불안석이 따로 없네.
‘내 죄지, 내 죄야.’
내가 너무 오냐오냐 키워서 그래. 항상 맛난 것만 먹였으니, 매번 그 정도를 바랄 수밖에.
이렇게 된 거, 오늘 아주 쓴 맛을 단단히 보여줘야겠어. 한번쯤은 호되게 당해봐야 거기서 배우고, 발전하는 법이지.
“본때를 보여줘야지. 다시는 퍼펙트니 20K니 그런 소리 못 꺼내도록. 그냥 무사히 잘 던지는 것만으로 감지덕지하게 여길 정도로.”
“···Go의 부담스러운 마음이야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래도 워밍업에 집중해주세요.”
“넵.”
그래도 일단은 위밍업에 집중했다. 아무리 그래도 할 수 있는 최대한은 해야지.
그래도 편안하게 쉬면서 감각을 올린 덕분인지, 지난 경기보다는 훨씬 더 빠르게 달아올랐다. 감각도 적절하게 올라왔고.
“최대한 컨트롤부터 잡자. 별다르게 포구하거나, 프레이밍 하거나 하지 말고, 딱딱 글러브 가져다 대기만 해.”
그것을 바탕으로 일단 제구부터 잡았다. 말했잖아, 오늘은 판정이 빡빡할 거라고.
구위도 구위지만, 일단 제구부터 착실하게 잡아둬야지.
“나이스볼~ 딱 들어왔어. 저번 경기보다 훨씬 좋네.”
“당연히 그래야지, 이번엔 바깥쪽으로 하나 간다.”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네.’
다행스럽게도 불펜 피칭에서도 느낌은 제법 좋았다. 조금은 뭉툭해졌던 제구도 다시 돌아온 것 같았으니까.
물론 여전히 평소처럼 딱딱 들어가는 정도는 아니고, 지난 경기가 둥근 몽둥이였다면, 이번엔 잘 깎은 각목 정도는 되겠네.
‘이거, 할만하겠는데?’
공의 위력도 그럭저럭 잘 뽑혔기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대를 완전히 충족시키지는 못하겠지만.
그냥저냥 적당하게 채워서,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 같다고.
####
“세이프!”
아니었나보다.
가끔 이럴 때가 있지.
내 스스로의 감에 내가 속을 때 말이야.
내가 감이 좋은 편이기는 하지만, 그게 언제나 정답인 건 아니거든.
“어?”
“우우우우!”
“럭키샷이야, 럭키샷. 운이 좋았네.”
“그게 오늘 마지막 안타니까, 충분히 즐겨라!”
경기 시작 직후, 1회 초.
리드오프인 1번타자 데이비드 페랄타에게 안타를 맞았다. 깔끔한 좌전 안타였지.
야수들을 절대로 탓할 수 없을 만큼 아주 훌륭한 코스였고 말이야.
기대와 달리 내가 시작부터 얻어맞자, 우리 홈팬들은 인지부조화가 걸린 것처럼 멈칫거리다가, 이내 그저 운 좋게 뽀록이 터진 거라며 결론을 내린 건지, 행복회로를 돌렸지만.
“세이프!”
어림도 없지!
연이은 안타. 2번타자 폴 골드슈미트까지 안타를 기록하며, 순식간에 1,2루가 채워지자, 그런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그래, 이럴 것 같더라. 눈치를 채도 단단히 챘네.’
상대 타자들 표정이 묘하게 밝다 싶더니. 아무래도 확실하게 알아차린 거겠지. 내 폼이 안 좋다는 걸.
저쪽 전력 분석팀이 일을 아주 열심히 했나봐.
다들 아주 자신감 있게 자기 스윙을 했다.
‘포심이 쉽게 공략당해.’
그래서인지 포심이 쉽게 얻어맞았고 말이야.
평소보다 구위가 떨어진 것 때문에, 떠오르는 듯한 착시효과가 덜해진 건지, 타자들이 손쉽게 받쳐놓고 치더라고.
사실 라이징 패스트볼의 효과가 없으면, 구속 자체가 느리기에 치는 건 쉬운 편이니, 어쩔 수야 없지.
거기다 구위도 여전히 리그 최상위권 수준이지만, 이전 경기들처럼 배트를 쭉 밀어버릴 정도가 아니고.
장타를 노리는 건 여전히 어렵더라도, 정확하게 타격하기만 한다면, 안타 정도는 만들 수 있는 수준이지.
‘난감해졌네, 일단 아웃 하나부터 잡고 생각해보자.’
만족이란 걸 모르는 홈팬들에게 쓴맛을 단단히 보여주겠다고 했지만, 그거야 농담이고. 일단은 최대한 잘 막아 봐야지.
이런 위기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일단 첫 아웃카운트를 잡는 것이다. 그래야 훨씬 상황이 편해지니까.
빨간 불 하나 올려놓으면, 타자들도 마냥 편할 수가 없거든. 병살이면 이닝 종료니까.
‘제이크 램, 시즌 초반에 부상으로 이탈했다가, 18일에 다시 복귀했다고 했지.’
타석에는 3번타자 제이크 램이 있었는데, 손쉬운 상대는 아니다.
부상으로 시즌 초반을 결장했지만, 18일에 복귀한 이후로, 전날까지 여섯 경기, 22타석 5안타 5볼넷, 2루타 두 개와 홈런 하나로 꽤나 준수한 타격감을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특히 어제 경기에서는 멀티히트를 쳐내며, 확실하게 폼이 제법 올라온 모습을 보여줬었고.
“스트라이크!”
그렇기에 신중하게, 바깥쪽으로 살짝 걸치도록 조절해서 초구를 던졌다.
아슬아슬하게 스치면서 들어오는 서클 체인지업. 그에 주심은 스트라이크를 선언했다.
예상대로 오늘 조금 빡빡하게 카운트를 잡았었는데, 이번에도 그래도 잡아주네.
‘파워도 준수하지만, 다행히 엄청나게 좋은 건 아니야. 약간은 플루크가 있어.’
제이크 램은 작년에는 30홈런을, 재작년에는 29홈런을 쳤었다. 그 정도면 충분히 펀치력이 좋은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겠지만. 본인의 진짜 파워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고? 디백스잖아.
애리조나, 피닉스에 우뚝 선 홈런 공장, 체이스 필드가 홈구장인데, 어느 정도는 깎아서 봐야지.
그래도 대략 20개 전후의 홈런을 칠 수 있는 파워는 갖췄을 테니, 어느 정도는 주의를 해야 하는데.
‘낮게 하나.’
“볼.”
‘다시 낮게 하나 더.’
“볼.”
‘바깥쪽으로 한번 더 뺀 다음.’
“볼.‘
‘안으로 넣-’
아, X발 진짜 더러워서 투수 못 해 먹겠네.
저게 왜 볼이야? 저번 경기 블루제이스 타자들의 심정을 아주 잘 이해하겠다.
최소한 스트라이크 하나를 더 잡으려고 했더니, 죄다 볼로 잡아버리네. 이 정도면 슈퍼스타콜이 아니라, 거의 역차별 수준 아니냐?
저조한 감각으로 간신히 잘 제구해서 애매한 코스로 넣었더니, 주저하지도 않고 볼을 선언하는 주심에 울컥 화가 치솟았지만, 만류하는 듯한 브루스의 손짓에 간신히 가라앉혔다.
‘후우- 일단 잡고 보자, 마지막으로 안쪽으로 깊게.’
순간적으로 쭉 던진 공.
먹음직스러운 코스에 타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배트를 휘둘렀지만.
“아웃!”
그가 예상했던 것처럼 과감한 포심이 아니었다. 투심이었지. 역으로 꺾이면서 파고드는 무브먼트에 빗맞은 타구가 둥실 떠오르며 우익수에게 잡혔다.
“세이프!”
다만 2루 주자였던 데이비드 페랄타가 발 빠르게 움직여서, 3루를 쟁취한 덕분에 일종의 진루타가 됐지.
“나이스!”
“그래, 다음은 더블 플레이가자!”
“이제야 좀 힘이 올라왔나 보네! KK로 잡고, 이닝 빨리 끝내버려!”
첫 아웃카운트가 올라가자, 팬들은 여전히 속도 모르고 이제 발동되는 것이라며 소리쳤지만.
그들의 목소리에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무려 76이닝, 아니, 76.1이닝 동안 지켜온 무실점이 깨지게 생겼으니까.
그래서인지 조금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일단 잘 막기만 하자고 소리쳤지만.
“아웃!”
곧 4번타자, 다니엘 데스칼소가 욕심을 버리고, 침착하게 외야 플라이를 만들어내면서.
“세이프!”
3루주자가 다시금 진루했다.
그래, 홈 플레이트를 밟았다는 뜻이지. 100이닝까지 갈 것이라는 개드립까지 나왔던 무실점 기록이 깨진 거고.
‘3월이야 없는 셈 치고. 대충 두 달 정도 무실점이었으면, 충분히 만족해야지.’
올해의 첫 실점.
차라리 홈런이었다면 그나마 나았을까? 희생플라이로 점수가 올라가니, 왠지 조금 더 허무하게만 느껴졌다.
고작 그렇게 끝나버렸구만.
작년처럼 뭐, 멋지게 승부를 벌여서 시원스럽게 홈런 맞고, 서로 따봉 날리면서 끝나는 게 아니라.
‘사실 대부분의 기록은 이렇게 끝나지.’
엄밀히 말하면 멋지게 끝나는 기록 같은 건 없다.
어찌 됐든 무언가를 망쳤고, 잘 해내지 못했기에 기록이 끝나는 거니까.
콜리시엄에는 적막이 흘렀다.
믿을 수가 없다는 것처럼 사람들은 제 눈을 비비거나, 얼굴을 쓸어내렸지.
하긴, 올해 들어서 시범경기까지 포함하여, 내가 실점하는 걸 못 봤으니. 어색하게 느껴질 수밖에.
하필이면 홈에서 첫 점수가 올라갔다는 것도, 대단히 충격적일 거고.
“Fuuuuuuuuuuuck!”
“야이 X새끼야!”
“100이닝짜린데- 100이닝-”
“X같은 쓰레기 새끼!”
“차라리 홈런이라도 쳤으면 이해하지! X발 이게 뭐야!”
곧이어 그 수많은 사람들 만큼이나 웅장한 욕설이 경기장에 흘렀다.
대부분은 디백스와 그 선수들에 대한 원망과 저주였지.
그냥 비명처럼 욕을 지르기도 했고.
“일부러 애들까지 데리고 왔더니··· Suck 이게 뭐야!”
“너 오늘 왜 그래! 왜 홈에서 그러냐고!”
개중에서 몇몇은 왜 하필 홈에서 처맞느냐고 나한테 소리치기도 했고.
간만에 홈이라고 기대 잔뜩 했는데, 하필 홈에서 기록이 깨지고, 첫 실점이 올라갔으니, 울컥 화가 솟은 거겠지.
거 미안하게 됐수다.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내가 일부러 홈까지 와서 기록 망친 것도 아닌데. 그러려니 하슈.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뻔뻔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 역시도 속은 부글부글 끓었고, 마치 식어버린 용광로의 밑바닥에 불이 지펴진 것처럼, 서서히 몸 전체로 열기가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