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경기 초반, 투수와 타자들은 스트라이크 존을 파악한다.
오늘 주심이 어느 정도까지 허용해주는지, 어디서부터는 단호하게 끊는지를 확인하지.
그렇게 적당히 파악해둔 스트라이크존은 머릿속에 잘 저장해서 기억해두는 거고.
‘원칙적으로는 주심의 성향과 상관없이, 언제나 기준에 따라 일정해야 하지만···’
모든 선수들, 관계자들, 코치들, 그리고 심지어 정확한 판독을 바라는 세이버메트리션이나 야구팬들도 알고 있다.
언제나 정확하고, 항상 기준에 일정한 스트라이크 존.
그런 공정하고 정정당당한 판정은 오직 야구 게임 속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을.
‘결국 사람 눈으로 보고, 사람 머리로 판단하는 거니까. 아직까지는.’
요새는 그래도 투구 추적 시스템 등을 통해 주심의 판정을 평가하고, 보조한다고도 하던데.
결국 스트라이크 존을 판정하는 건 아직은 주심, 한 명의 사람이다. 기계 센서가 아니지. 시간이 지나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렇듯 투수든, 타자든, 은근히 심판의 눈치를 보고, 그의 생각을 파악해야 하는데···
‘반대로 저쪽에서 눈치를 보기도 하지. 선수의 눈치를.’
종종 그런 주심들이 선수의 눈치를 보기도 한다.
대단히 선구안이 좋은 타자나, 압도적인 핀포인트 제구를 자랑하는 투수. 이 둘에게 말이야. 인과관계가 역전돼버리는 거지.
‘예를 들어 톰 글래빈처럼.’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고, 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투수, 톰 글래빈.
그가 현역시절 특유의 완벽한 제구를 이용해, 경기 초반부터 집요하게 바깥쪽을 노리며, 서서히 스트라이크존을 넓혔다는 건 꽤나 유명한 이야기다.
투수의 제구력이 경기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보여줄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고.
그리고 몇몇 이들은 거기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하기도 한다.
‘슈퍼스타콜.’
메이저리그에서 내로라하는 주심들이 단순히 그의 제구력에만 넘어간 게 아니라는 거지.
최고의 투수이자, 최고의 제구력을 가진 투수, 그런 명성에 기가 눌린 거라고.
슈퍼스타라는 이유로, 일종의 편파가 들어간 것이라는 극단적인 주장이 나오기도 하고.
단순히 톰 글래빈만의 일은 아니다. 타자 또한, 선구안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타자의 경우 애매한 볼 판정에 몇 차례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만으로 주심에게 압박을 줄 수 있으니까.
이것도 결국은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그런 것이지.
‘정말로 글래빈이 그 덕을 본 건지, 그런 주장들이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허나 그런 소문들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마운드 위에 있는 건 톰 글래빈이 아니라 바로 나, 고유석이니까.
“볼.”
“스트라이크!”
그리고 주심이 그런 고유석을 ‘대단히’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2회 말.
4번타자 테오스카 에르난데스가 타석에 올라오자마자 잇따라 던진 공 세 개.
비록 감각이 떨어져서, 평소와 같은 제구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지금 주심의 심리를 파악하는 건. 확실해졌거든.
‘나한테 완전히 홀렸구만.’
브라이언 고먼.
오늘 경기의 주심.
그는 나를 의식하고 있었다.
마치 블루제이스 타자들이 허세로 만들어진 내 모습에 압도된 것처럼.
####
“정확하게 판정해야지.”
그는 한동안 그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럴 수밖에, 부담스러운 경기를 맡게 됐으니까.
Go, 그는 심판들 사이에서도 유명인이었다. 정말이지, 괴물 같은 제구력을 자랑했으니 말이다.
그래, 마치 옛날의 톰 글래빈 같은 컨트롤의 아티스트들처럼, 판정하는 사람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난 좀 무섭다니까, 아니, 눈에 기계라도 달린 건지, 아니면 내 마음이라도 읽는 건지, 정확하게 선에 걸쳐.”
“자네도 그래? 나도 그렇던데. 뭐랄까, 기계가 아니라, Go, 걔한테 평가받는 기분이야.”
실제로 몇몇 심판들은 한탄하듯 투덜거리기도 했지. 너무 칼 같아서 오히려 무섭다고.
마치 심판의 마음을 읽는 것처럼, 자신의 성향으로 만들어진 스트라이크 존이 눈에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너무나도 정확한 코스로 공을 집어넣고는 했으니까.
그나마 그를 상대하는 타자들이 헛스윙이 많은 편이라는 게 조금 부담감을 덜어줬지. 쉬운 평가를 내릴 수 있으니까, 헛스윙은.
“심판이 선수 눈치를 보면 어떡해? 다들 제정신이야?”
하지만 그런 동료, 후배 심판들의 넋두리에 브라이언 고먼은 그저 코웃음만 쳤었다.
어처구니가 없었으니까. 이놈들이 제정신인가 싶었고.
“에이, 선배님은 모르셔서 그래요. 걔 경기 한번이라도 해보면 진짜 진이 빠진다니까요.”
“대충 뭉뚱그려서 던지는 법 없이, 공 하나마다 주장이 확실합니다.”
“사실상 판정도 필요 없는 수준이에요. 그냥 걔가 알아서 넣는다니까요?”
허나 그런 그의 불퉁한 말에도, 여전히 한심한 소리나 해대는 동료, 후배들의 모습에 그는 생각했다.
언젠가 자신에게 그 차례가 온다면, 이 멍청한 녀석들에게 한 수 단단히 보여주겠다고.
‘내 경력이 얼만데, 아무리 대단한 놈이라고 해도, 고작 2년차 애송이한테 휘둘릴까.’
그는 91년에 메이저리그 심판이 됐었다. 세 번의 월드시리즈를 경험했고, 두 번의 올스타를 경험했으며, 포스트시즌 같은 경우는 이루 말할 수도 없지.
비록 그의 판정에 뒷말이 아예 나오지 않은 것은 아니나, 최소한 27년의 경력에서 부끄러운 기억은 없다.
그런데 고작 한 명의 투수에게 지레 겁을 먹는다고? 작년에 막 데뷔해서, 아직 새파랗게 어린 루키에게?
그렇기에 코웃음을 쳤지만.
그런 생각이 바뀐 것은 어쩌면 다른 사람들과 비슷했다.
그래, 레드삭스전이었지.
“···”
워낙 유명한 경기이고.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빨아들인 경기였기에, 그 역시 한 명의 야구팬이자 야구인으로서 경기를 시청했었다.
그리고, 조금, 아니,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충격을 받았었지. 그를 이야기하던 동료, 그리고 세간의 평이 이제야 이해가 됐으니까.
‘괴물이군.’
괴물이다. 이 녀석은.
모든 공이 완벽하게 들어갔다. 위력도 위력이지만, 공 하나하나가 정확했지.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그래, 정말로 항간에서 떠들던 것처럼 완벽한 투수, 기계처럼 결점이 없는 투수라도 되는 것처럼.
수없이 많은 투수들의 피칭을 보았고, 개중에는 전설이 되어 길이 기억된 선수도, 명예의 전당에 당당히 입성한 영웅들도 많았다.
그런데도 인상적이었다.
한편으로 자신이 저 경기의 심판을 맡아, 직접 옆에서 지켜보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도로.
“약이라니, 우습지도 않지.”
약물 의혹을 뿌리치는 모습 역시 아주 완벽했고 말이야.
아마도 길이 기억할 경기, 앞으로 수십 년의 세월이 더 지나더라도 머릿속 한편에 남아 있을 경기겠지.
허나 그것이 추억이 되기도 전에, 그는 또다른 일으로서 브라이언 고먼, 그의 앞에 나타났다.
“오늘 선발투수가 Go라던데, 브라이언은 처음이시죠?”
“그렇지.”
“아, 진짜 힘들겠어요, 솔직히 심판으로서 가장 힘든 선수 아니에요?”
자신이 그의 열 번째 등판의 주심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부담감이 느껴졌다.
완벽하고, 완전했던 경기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도 않았는데, 그 공을 직접 평가해야 됐으니까.
동료들은 혀를 내두르고는 했지, 힘들겠다면서 그를 격려하기도 했고. 그렇기에 그런 동료들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외쳤다.
“그냥, 정확하게 판정할 거야.”
“예, 그렇겠죠. 선배님이야 뭐, 항상 일관적이시니.”
“너무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Go 걔도 딱 정확하게만 던지거든요.”
정확하게 할 거다.
모든 판정은 정확할 거다.
제 아무리 위대한 투수라고 할지라도, 자신은 심판이고, 한 경기의 주심이니까.
몇 번이고 그렇게 소리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그렇게 평소처럼 당당하게 경기에 나섰을 때, 그리고 1회 말이 시작되었을 때.
그토록 억지로 잊으려고 했던 저번 경기, 완벽했던 경기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완전무결했던 그날의 모습과 지금 눈앞의 마운드의 모습이 겹쳐서 보이기도 했고.
“스트라이크!”
허나 중심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래, 이건 그냥 스트라이크야.
“볼.”
이건 그냥 볼이고.
네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얼마나 멋진 공을 던질 수 있고, 얼마나 그 컨트롤이 대단하고, 커맨드는 또 얼마나 완벽하든지 간에. 판정은 언제나 옳아야 하니까.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두 눈을 부릅뜨고, 그저 평소처럼 최선을 다해, 그리고 최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려고 했지만.
‘스트라이크야. 스트라이크겠지.’
서서히 중심은 무너졌다.
토론토 블루제이스. 그를 상대한 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마운드 위에 우뚝 선 투수의 모습이, 그 역시 점점 더 거대하게 느껴졌으니까.
‘이건···’
“스트라이크.”
‘가 맞을까?
그렇게 스스로의 판정에 의문심이 들었을 때, 균형은 완전히 무너졌다.
그 의심의 빈자리를 저 거대한 존재감이 대신 떠받쳐줬으니까.
답답한 감정이 엄습하고, 왠지 모르게 가슴이 저렸을 때, 그 의심을 해소해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
홈팀, 블루제이스의 타자들이었다.
그들은 아무런 의심도, 의혹도 제기하지 않았으니까.
주심, 브라이언 고먼 자신 스스로 약간의 의문이 피어났는데도, 정작 손해를 본 타자들은 아무런 말도, 항의도 없었지.
저 거대한 위압감에 짓눌려,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마치 그의 판정이 백번 옳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래, 스트라이크야, 타자들도 별말이 없군. 이 정도는 당연한 거지.’
그리고 그것은 브라이언 고먼에겐 확신이 되어주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아웃!”
2회 말이 지나갔다.
총 열세 개의 투구가 있었고. 그중 헛스윙 네 개를 제외한 아홉 개의 공에는 그저 완벽하고 올곧은 판정이 떨어졌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
“이상하지?”
“엄청나게. 이래도 되나?”
“이래도 되지, 되고말고.”
브루스는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판정에 이득을 보는 건 참 좋은데, 이래도 되나 싶었겠지.
안될 건 뭐 있어?
우린 그냥 주심의 판정에 따라 공을 던지는 것뿐인데.
우리 브라이언 고먼께서는 오늘 스스로의 원칙에 따라, 그저 정확하게 판정하고 계신다. 그게 전부지.
“상대쪽에서 눈치 채지 않을까? 솔직히 좀 노골적이었잖아?”
“당연히 눈치채겠지, 항의도 할 거고, 아마 나중에 말이야.”
물론 상대가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상대 포수나 투수가 바보도 아니고, 주심이 널널하다는 건 저쪽도 파악하겠지.
그리고 타자들이 항의를 할 수도 있고. 허나 지금은 아니다.
“타자들 눈치가 어떻든?”
“너한테 집중하고 있지, 다들 바짝 쫄아서. 연기력이 물이 올랐던데?”
“내가 원래 명배우거든. 오스카급이지. 판정에 신경쓰는 것 같아?”
“···전혀. 아니, 애초에 포구 위치를 보지도 않더라. 아예 관심도 없어보여.”
“그런 거지.”
저쪽은 지금 판정이고 뭐고, 제대로 포구 위치도 모르고 있다. 애초에 안 보고 있거든.
나한테, 정확하게는 내가 만들어낸 이 거대한 허세에 홀려서, 다른 쪽에 신경쓸 여유가 없지.
그러니 판정에 대한 의문이 생겨나는 건,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내 허세가 박살이 나거나, 아니면 누군가 정신이 번쩍 들 때겠지.
“그때가 되서 항의해도 이미 늦는 거지.”
지금까지 쭉 닥치고 있던 타자들과 블루제이스가, 갑자기 들고 일어나서 주심에게 항의한다고 생각해보자. 왜 그딴식으로 판정하냐고, 너 미쳤냐고 말이야.
그럼 어떤 반응이 나올까?
갑자기 지레 겁먹거나,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정확한 판정을 할까? 토론토의 홈이니, 지금까지 판정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홈콜을 해줄까?
‘전혀. 그땐 이미 굳고도 남을 시간이지.’
경기가 중반을 지나가고, 주심도 어느 정도 탄성을 받기 시작한 무렵부터 스트라이크존은 단단하게 굳어버린다.
그때 돼서 항의하든, 바지까고 그라운드에 오줌 싸면서 지랄하든, 기존의 판정과 동일하다면, 귓등으로도 듣지 않지.
적어도 주심 스스로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항의에 줏대를 잃고 밀려나는 순간, 심판일 못 해 먹지. 죄다 그럴 테니까.
‘일거양득, 아니, 삼득이구만.’
단순히 허세 좀 부려서 블루제이스 타자들을 얼어붙게 하려고 했더니, 거기에 주심도 같이 낚였고, 또 이미 얼어붙은 타자들로 인해 유리한 판정에 대한 항의도 없었다.
스노우볼이 제대로 굴러갔어.
‘기왕 여기까지 왔으면, 제대로 더 굴려야지.’
천성이 욕심이 많아서 그런가. 하나를 먹으면 둘을 바라게 되더라고. 예나, 지금이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지.
이득을 봤는데, 고작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있나, 최대한 더 불려야지.
“스트라이크존 파악했지?”
“어, 태평양 수준이야. 볼 반 개 수준이 아니라, 거의 한 개까지도 스트라이크 잡아주던데? 타자들 죽어나겠더라.”
물론 우리만의 이득은 아니다. 스트라이크존은 우리 타자들에게도 적용이 될 테니까.
정말 대놓고 편파 판정을 하는게 아닌 이상은, 양쪽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지.
피눈물 흘릴 타자들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어쩔 수 있나. 일단 나부터 살아야 하는데.
“그래, 볼 한 개였지.”
평범한 스트라이크존 기준으로 좌우로 볼 한 개. 거기까지는 주심이 용납해주고 있다. 태평양도 이런 태평양이 없어.
다른 날이었다면, 진짜 제대로 제구해서 써먹었겠지만, 오늘은 힘들다.
제구하려먼 할 수 있겠지만, 어느 정도 위력을 포기해야 하는데, 그랬다가 한방 맞으면 모든 게 와장창이지.
‘내가 그걸 이용 못 한다면···’
“브루스, 너 프레이밍은 좀 하지?
“프레이밍? 엄청 잘하지~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다른 투수들은 이미 다 알고 있다니까? 내 실력이 얼마나 좋은지.”
다른 놈을 이용해서 이용해야겠지.
내 물음에 브루스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내가 알아서 제구하고, 알아서 다 처리하는 통에, 나랑 호흡을 맞출 때는 포구에만 신경을 다하지만.
듣기로 은근히 프레이밍이 좋다더라. 다른 투수들 말에 의하면 말이야.
저번 경기에서 스콧 에머슨이 내 목줄을 풀어주었듯, 오늘은 내가 이 녀석의 목줄을 풀어줘야겠다.
“좋아, 오늘은 나도 그 프레이밍이라는 거 덕을 좀 보자.”
얘 프레이밍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른다. 난 제대로 본 적이 없으니까. 몇 번 덕을 보기도 했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은 안 나지.
허나 괜찮다. 떨어지는 수준만 아니면 되니까.
“아예 스트라이크를 만들 필요는 없어.”
신묘한 손놀림으로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공을 가지고 오늘 걸 바라는 게 아니거든.
오늘은 그저···
“볼 한 개. 거기까진 최대한 당겨볼게.”
볼 한 개 안쪽까지만 들어가면 되니 말이야.
내가 던져서 얘가 잡아서 볼 한 개까지 끌고 오면, 그걸 오늘의 주심, 브라이언 고먼께서 알아서 스트라이크로 선언해주실 테니까.
완벽한 트라이앵글이 완성되는 거지. 거기에 판정 외에도 한 가지의 이득이 더 있고.
‘거기에 제구를 살짝 놓아도 되겠지. 적당히 폭투나 실투가 나오지 않는 선에서.’
거기에 이제부터 제구는 하청에 맡기고, 난 구위에 조금 더 집중해도 된다는 거니까.
참담한 컨디션에 그저 막막했던 경기였는데, 역시 언제나 활로는 열려 있다. 그걸 찾느냐, 못 찾느냐의 문제일 뿐.
####
“스트라이크 아웃!”
3회 말.
9번타자 리카르도 우레냐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You Suck!”
시끄럽게 떠드는 원정팬 때문은 아니다. 팀의 세 번째 공격을 자신의 손으로 끝낸 것이 화가 나서도 아니고.
“더 묵직하지 않아?”
“어, 변화구 궤적도 더 길어졌어.”
덕아웃에서 보았던 이전 이닝보다 더 묵직한 공이 날아온 게 문제였다.
정말, 오늘도 폼이 좋은 건가? 정말로 우리까지 퍼펙트로 잡아버리려는 건가?
시간이 지날수록 어쩐지 더욱더 강력하게만 느껴지는 공에 두려움은 점점 더 커졌다.
3이닝 퍼펙트.
저 투수에겐 익숙한 일이다.
한 타순이 쓸려나가는 것 정도는 너무나도 흔한 일이지.
하지만, 정말로 두 경기 연속으로 퍼펙트를 해버린다고? 정말로 그럴 작정이라고?
황당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었지만, 다시금 이닝을 마치고서 유유히 내려가는 투수의 모습에 불가능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분명 나간 것 같았는데, 들어온단 말이야.”
“궤적이 미친 거겠지.”
“하아, 돌겠다 진짜.”
그 때문에 착각도 들었고 말이다. 분명 제대로 나간 것 같았는데, 스트라이크였지.
특유의 라이징 패스트볼처럼, 그것 역시 착시 효과일까? 아니면 저 압도적인 분위기에 홀려 헛것을 보는 걸까?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저 이를 바득바득 갈고, 한숨을 깊이 내쉬었을 뿐.
“100이닝까지 27이닝 남았다!”
깨버리자고 마음 먹었던 연속 이닝 무실점은 이제 73이닝으로 늘어났다.
정말로 100이닝을 찍어버릴 기세지.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 그런 기록의 제물이 되지는 않았으니까.
그 대신 전대미문의 연속 퍼펙트게임이라는 괴이한 기록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지만 말이다.
“퍼펙트, 최소한 퍼펙트만 깨트리는 거야, 그거만 해도 남는 장사야.”
그렇기에 기준치가 낮아졌다.
저 투수를 두들기겠다는 생각은 이제 하지 않는다.
그냥, 퍼펙트만 망가뜨리자.
최악의 굴욕만은 면하자.
그런 마음으로 블루제이스는 억지로나마 일어섰다.
그리고 찾아온 4회 말.
한 타순이 돌면서, 다시 1번부터 이어지는 타순에, 포수 루크 마일은 나갈 준비를 마친 타자들을 격려했다.
“그래도 오늘 주심 판정이 널널해서, 우리도 잘 막고 있으니까, 다들 너무 걱정하지 마.”
점수는 현재까지 1대0.
2회 초의 실점으로 그들이 리드를 빼앗겼지만, 아직 큰 차이는 아니다.
“그래, 어떻게든 퍼펙트를 깨면, 중간에 내리겠지.”
“저쪽 코치들이 어지간히 미친 게 아닌 이상, 기록이 걸린 것도 아닌데, 설마 두 경기 연속으로 완투를 시키겠어.”
그렇기에 희망을 엿보았다.
퍼펙트가 깨진다면 내려갈 거다. 분명히 그렇겠지.
퍼펙트나 노히터 같은 것이 걸린 것도 아닌데, 설마하니 현대야구에서 한 투수에게 두 번이나 연속으로 완투를 시키겠는가?
기껏해야 7이닝 정도로 끊고 내려보내겠지. 그동안 잘 버틴 뒤에, 그후 올라오는 불펜을 두들긴다면, 역전이 가능할지도 모르고.
애써 그렇게 믿으면서, 그들은 공격에 나섰다.
“스트라이크 아웃!”
허나 첫 타자부터 삼진이 올라갔다. 또다시 삼진이지.
특유의 서클 체인지업으로 커티스 그랜더슨을 잡아낸 투수의 모습은 그들의 바램이 정말로 가능할 것이냐고 묻는 것만 같았다.
“아웃!”
조쉬 도널드슨 역시 5구째, 빗맞은 땅볼로 아웃.
최근 부상의 여파를 떨치지 못한 건지, 타격감이 안 좋은 그였으니.
고작 범타 하나 가지고 뭐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한숨이 나오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스모크! 제발!”
“하나만 쳐, 홈런은 바라지도 않아!”
그들의 패배감이 관중석에까지 전염된 걸까? 간절히 외치는 팬들의 목소리에 저스틴 스모크는 애써 입술을 앙다물었다.
‘어떻게든 침착하게 하나만 치는 거야, 하나만.’
몇 번이고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그는 당당히 타석에 올랐다. 눈빛이 마주친 순간 저도 모르게 고개 움츠러들기는 했지만.
“스트라이크!”
초구는 스트라이크.
이번에도 과감하게 날아온 몸쪽 포심에 단단히 마음을 잡았는데도 살짝 몸이 굳었다.
“볼.”
“파울.”
하지만 물러서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이 비극을 끝내야만 했기에. 13.2이닝 연속 퍼펙트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가?
‘여기서 못 끊으면··· 끝이야.’
저 투수가 중간부터 속도가 빨라진다는 건 이미 유명하다.
그때까지 내버려둬서, 그렇게 흐름을 타게 놔둔다면, 그땐 돌이킬 수가 없겠지.
그렇기에 여기서 끊어야 했다. 못해도 5회 말부터는 빨라질 테니, 이번이 마지막 기회니까.
부담감과 압박감.
그리고 팬들의 절망 섞인 기대감 속에서 맞이한 4구.
‘왔다.’
날아온 공을 본 순간 그는 심장이 요동쳤다. 정말이지 느낌이 바로 왔으니까.
허나 흥분할 수는 없다.
흥분해서 이 공을 놓쳐버린다면, 이 기회를 놓아버린다면,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테니까.
그렇기에 영웅이 되자는 마음은 버렸다. 완벽하게 느낌이 왔고, 보통 이것은 홈런으로 이어지지만. 그런 스스로의 욕심에 사로잡히는 순간, 모든 게 망가지겠지.
‘가볍게- 뻗자.’
그렇기에 간결하게 밀었다.
가볍게, 골프에서 퍼팅하는 것처럼, 아주 손쉽게 낮은 코스의 공을 툭 밀어쳤지.
나직한 타격음이 울렸고, 타구가 날아가는 순간, 그는 두말하지 않으며 황급히 내달렸다.
‘넘어지면 안 돼, 넘어지면 안 돼.’
제발 넘어지지만은 않기를, 그래서 꼴사납게 모든 것들을 망쳐버리지는 않기를 기도하면서.
오직 앞만 보고 달리자, 곧바로 눈앞까지 나타난 1루 베이스. 혹시나 1루수가 송구받은 공을 들고 있지는 않을까.
그 두려움에 볼 엄두가 나지 않았기에, 마지막 순간에는 저도 모르게 두 눈을 꼭 감았다.
“세이프!”
그를 깨워준 건 1루심의 단호한 목소리였다. 세이프, 분명 세이프였지?
“···으아아아아아아!”
“Yeeeeeeeeeeeeeeeah”
“퍼펙트는 얼어죽을 퍼펙트!”
“X발 스모크! 스모크 너밖에 없다! X나게 사랑한다!”
마지막 끝내기 홈런이라도 친 것처럼, 그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자, 로저스 센터가 요동쳤다.
모두가 그토록 바라던 것처럼, 퍼펙트가 깨진 순간이었으니까.
“저스틴 이 X나게 예쁜 새끼!”
“니가 X발 이제부터 우리 대장이다! 니가 캡틴이야!”
당연하게도 부담감에 찌들었던 다른 동료 타자들 역시 환호성을 뱉었고 말이다.
정말로 해냈다는 생각이 모두의 머릿속에 떠올랐을 때, 투수는 생각보다 덤덤하게 인정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고.
‘됐어, 됐다고!’
그런 투수를 지그시 노려보며, 4번타자 테오스카 에르난데스가 타석에 올랐다. 꽤나 행복한 얼굴로.
최악의 가정은 이제 없다.
최악의 굴욕도 이제 없고.
이겨낸 거다, 아주 멋지게.
저 괴물을 상대로, 우리가.
‘마음 편하게 하자, 이걸로 된 거야.’
퍼펙트도, 노히터도, 모두 다 깨져버렸으니, 이젠 조금은 편해져도 되겠지.
두려움이 한꺼풀 벗겨져서 그런 것일까? 투수의 모습이 조금 다르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쩌면, 괜히 쫄은 걸지도 몰라. 생각했던 것보다 폼이 나쁠 수도 있어.’
우리가 너무 겁을 먹은 게 아닐까, 싶었으니까. 그래, 저 녀석도 사람인데, 설마 두 경기 연속으로 그렇게 폼이 좋을 리가 있겠는가?
조금 부끄러운 사실이겠지만, 블루제이스, 자신들이 지레 겁먹고 움츠러든 거겠지.
아주 정확하게 정답에 근접한 그였지만, 완벽하게 도달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완전히 두려움을 접지는 못했으니까.
“스트라이크!”
그리고 날아온 초구.
여지없이 스트라이크다.
바깥쪽이었지.
그를 비롯해 블루제이스의 모든 타자들이 지금까지 쭉 그랬던 것처럼,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려고 했을 때, 기이한 느낌이 테오스카 에르난데스를 사로잡았다.
‘그런데···’
그는 흘끔 포수를 확인했다. 정확하게는 그가 공을 잡은 위치를 다시 보려고 했지.
너무나도 당연한 행동이지만, 오늘 경기에서 처음으로 그것을 행했던 테오스카 에르난데스는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것처럼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스트라이크 존이 왜 이렇게 넓지? 이건- 그냥 널널한 수준이 아니잖아.’
허세와 분위기에 가려져, 미처 신경쓰지 못했던 진실을 목도하게 됐으니까.
루크 마일이 존이 조금 널널하다는 건 이미 알려줬지만, 이 정도였던가? 이렇게나 넓다고? 그리고- 이건 단순히 넓은 정도가 아니지 않나?
‘바로 항의해야-’
그는 황급히 주심을 보려다, 이내 쏘아지는 시선에 다시금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마치, ‘알아버렸구나?’라고 말하는 듯한 투수, Go의 얼굴을.
아쉬운 듯 혀를 날름거린 그는, 지금까지의 분위기를 지워버렸다.
장난스러운 개구장이 악동처럼 씨익 웃었지.
그리고는···
“스트라이크!”
이제까지 느껴졌던 것처럼, 도저히 못 칠 것 같은 공이 아니라, 못 치는 게 ‘당연한’ 공을 던졌다.
바깥쪽, 너무나도 머나먼 곳.
볼 수준을 넘어, 실투나 다름없는 코스였다.
더욱더 아이러니한 것은.
“스트라이크 아웃!”
주심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스트라이크를 선언했다는 것이고. 굉장히 단호하고 엄중한 표정으로. 마치 자신의 판정에 한 치의 이심도, 의문도 없는 사람처럼.
테오스카 에르난데스는 그제야 깨달았다.
저 괴물에게 홀린 것은, 자신들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이제부터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 진실로 돌아올 차례인 그들과 달리, 이 사람은 아예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