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232화 (232/316)

232화

선발투수는 주인공이다.

언제나 그렇지.

한 경기를 놓고 봤을 때, 가장 카메라 분량이 많은 것도 선발투수고, 가장 오래 공을 만지는 것도 선발투수니까.

이게 주인공이 아니고 뭐야?

다만 그 주인공이 초반에만 반짝 나오다가 퇴장하는 페이크 주인공이 될지.

아니면 마지막까지 쭉 달려가며, 멋지게 승리하는 진짜 주인공이 될지는 선수마다 다르다. 저마다 퇴장하는 시기가 제각각이잖아?

‘체력은 아직 남아 있다. 2이닝은 충분히 막고도 남아. 지금 속도를 유지하더라도.’

그런 선발투수가 진정한 주인공으로 거듭나는 순간이 언제일까?

모두가 바라보고, 올려보는 순간 말이다. 아마도 여러 가지가 꼽히겠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퍼펙트를 이어가고 있을 때. 그래서 계속해서 마운드에 오르고 있을 때.

그때야말로 투수가 진정한 주인공으로 거듭나는 시간이지. 바로 지금 말이야.

8회 말이 시작됐거든. 마지막으로 향하는 최후의 관문이지. 이제 2이닝만 남았으니까.

‘아니지, 주인공보다는 빌런에 가깝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엄밀히 말하자면, 지금 나는 주인공이기보다는, 악당에 훨씬 가까울 거야.

적어도 이 경기를 지켜보고 있을 대다수 사람들에겐 말이지.

하지만 그것도 재밌잖아?

악당이 주인공인 피카레스크도 잘 만들기만 한다면···

“스트라이크!”

좋은 작품이 나오니까.

이번 이닝 첫 타자는 4번타자 J.D. 마르티네즈였다. 타순이 유지되고 있으니 말이야.

이번이 세 번째 타석인데, 배터박스에 들어온 그는 스트라이크가 올라갔는데도 별다른 제스처나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저 덤덤하게 받아들이네.

마치 오늘은 그냥 이런 날인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열정이 없고, 의욕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오히려 저게 좋은 마음가짐이다.

차분하게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너무 과하게 집착해서 제 스스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지금의 상황을 인정하고, 제 나름대로의 감각 역시 유지한 채, 최선을 다하는 거니까.

‘위험하지만, 위험하지 않지.’

어떤 의미에선 가장 위험하지.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다는 건.

허나 그렇게까지 위험한 건 아니다. 한계를 넘어서서, 후련하게 한 방을 날릴 정도는 아니라는 거니까.

그저 그가 인정한 만큼의 피칭을 유지하기만 한다면.

“아웃!”

어렵지 않게 잡을 수 있겠지.

바짝 붙인 커터에 빗맞은 땅볼이 나왔다. 그래도 타구의 속도가 빨라서 제법 까다로운 타구였는데, 다행히 맷 채프먼이 잘 잡아줬네.

수비 실력이야 죽여주는 녀석이고, 지금은 특히나 그를 비롯해 모든 야수들이 단단히 집중하고 있기도 하지.

즉각적인 처리에 몇 걸음 떼지도 못하고 다시 덕아웃으로 돌아가야만 했던 J.D. 마르티네즈는 나를 잠깐 지그시 쳐다봤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잠시 서로 눈을 맞췄지만, 그는 이번에도 별다른 행위 없이 그저 가볍게 고개만 끄덕거리며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그 자신을 처절하게 바라보고 있는 레드삭스 팬들을 버려둔 채로.

좌절과 절망이 펜웨이 파크에 흐른다. 그나마 그들을, 지금 상황을 구원해줄 구세주라고 여겼겠지.

가장 믿음직한 타자이고, 최고의 타자였으니까. 허나 그런 기도를 받은 J.D. 마르티네즈는 자신의 부침을 알기에, 그저 뒤돌아서서 자리로 돌아갔다.

그다음은 잰더 보가츠.

유격수 포지션이라는 것이 신기할 만큼 타격이 뛰어난 선수. 그 역시 기대받았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기대는 이번에도 배신당했다. 앞선 7.1이닝, 22번의 타석들과 마찬가지로.

5구, 서클 체인지업.

이제 경기가 막바지에 접어들었는데도 여전히 경기 시작 때와 똑같이 꺾여나가는 공을 보며 잰더 보가츠는 눈을 감았다.

J.D. 마르티네즈가 돌아섰다면, 그는 그런 방식으로 애써 자신을 보는 시선을 외면했지.

다만 마지막 기회가 아쉬운 듯, 앞선 동료보다는 조금 더 미련이 남은 발걸음으로 돌아갔지만 말이다.

이번 이닝의 마지막은 6번타자 미치 모어랜드다. 그래, 이닝의 마지막 타자지. 그럴 예정이 아니라.

6번 치고는 심하게 좋은 성적을 기록 중인 타자이기는 하나, 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네가 마지막이라고.

“파울!”

오늘 타격감이 좋더라니.

두 번째 타석에선 완전히 무너지며, 손쉽게 삼진을 당했지만, 이번에는 또다시 격렬하게 저항하고 나섰다.

갑작스럽게 한 가운데로 던진 체인지업을 조금 늦었는데도 가까스로 건져냈으니까.

어쩌면 J.D. 마르티네즈, 잰더 보가츠, 그리고 이 친구, 미치 모어랜드.

이 세 명이 레드삭스가 오늘 경기를 받아들이는 방식을 대표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

그저 지금 상황을 인정하고, 차분하게 받아들이거나. 미련에 발목이 잡혀 아쉬움만 흘리거나. 마지막의 마지막. 최후까지 격렬하게 저항하며 판을 뒤엎으려고 들거나.

어느 쪽이 낫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내 입장에서 가장 좋은 건 차라리 첫 번째의 경우겠지만. 레드삭스에겐 또 다를 테니까.

“스트라이크!”

이번에도 우렁찼던 스윙.

억지로 한계까지 쥐어짜낸 힘으로 휘두른 배트가, 제법 매섭게 돌았지만, 공에는 닿지 않았다.

다시 체인지업이었거든.

이번에도 쓰리핑거지.

가끔 쓸만한 패턴이다.

특히 포심 패스트볼이 좋은 날이라서, 포심을 평소보다 더욱더 자주 구사했다면 잘 통하지.

“파울!”

또다시 세 번째 체인지업이 날아오자, 이번엔 타이밍이 더욱더 가까웠고, 거의 페어가 될 뻔했지만, 아슬아슬하게 라인을 넘었다.

흘끔 덕아웃을 보니, 스콧 에머슨은 제 머리를 쥐어뜯으려다가 간신히 참고 있네.

다시 눈동자를 회수하며 마주친 홈팬들은 절망하고 있고.

그는 꽤나 잘 버텨냈다.

악으로 깡으로, 억지로 타격했지만, 그래도 잘 버텼지.

쉽게 속지도 않았고.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허나 마지막. 네 번째 체인지업이 날아들자, 결국 다시금 배트가 허공을 갈랐다.

일부러 농락하려거나, 아니면 쉽게 잡으려는 마음에 이런 식으로 던진 건 아니다. 사실 딱히 이유도 없지, 그냥 감이 좋더라고.

우습게 보지 마.

이런 날, 이런 폼, 이런 순간에서 투수의 감은 생각보다 훨씬 믿을 만한 녀석이니까.

그렇게 8회가 끝났대.

예고했던 대로 미치 모어랜드는 이닝의 마지막 타자가 되었지.

이번엔 관중석조차 훑어보지 않고, 그저 다시금 덤덤하게 덕아웃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하아- 하아-”

이상하게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지친 걸까?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어깨도 아직 싱싱하고.

물론 내가 착각하는 걸 수도 있지. 과도한 흥분과 도파민에 가려진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른 걸지도.

하지만 아직 끝날 때가 아니기에. 마지막이 남았기에. 애써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깊이 심호흡했다.

들이쉬고, 내쉬고. 동시에 손을 쥐락펴락하기도 하고.

하지만 들뜬 숨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요동치는 맥박도 진정되지 않았고. 달아오른 열기도 쉬이 꺼지지 않았지.

‘촌스럽게 왜 이래? 한 두 번 한 것도 아닌데.’

갑자기 말을 듣지 않는 육신에 괜히 타박해보기도 했지만, 어쩔 수야 있나. 그냥 내버려 두는 수밖에.

‘이것도 나쁘지는 않네.’

숨이 벅차오르며, 가슴을 가쁘게 압박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콧속으로 밀려드는 밤공기는, 그 어느 때보다 상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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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감정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이야.’

높은 관중석에 앉아, 그라운드를 내려보며, 브라이언은 그렇게 생각했다.

타자들의 생각이나 감정은 아주 미세한 움직임만으로 잘 포착하고, 능수능란하게 이용하면서.

정작 본인 스스로의 감정이나 마음, 자기 자신에게는 생각보다 무지한 사람이라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지.

‘은근히 콤플렉스가 심했어.’

당장 마이너에서, 어떤 구단이든, 에이전트 누구든 관심을 가질 만한 성적을 기록 중이었는데도, 그 자신은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스스로의 그런 영광을 아예 인정하지 않고 있었지. 자신감이 떨어지는 선수가 아닌데도.

지울 수 없는 콤플렉스.

남들보다 훨씬 저조한 스터프라는 그것에 짓눌려 제 스스로의 가치조차 판단하지 못하고 있었던 거지.

다행스럽게도 그런 콤플렉스는 사라졌다. 부족했던 스터프는 막강한 무브먼트로 채워졌고, 비록 구속이 늘어나지는 않았지만, 그 이외의 것들이 차고 넘쳤으니까.

작년, 최고의 자리에 오르면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고.

허나 그런 콤플렉스는 사라졌을지언정, 그 본인의 감정은 여전히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모르고 있었겠지, 지금 스스로가 얼마나 화가 많이 났는지. 제대로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을 거야.’

브라이언은 확신했다.

최소한, 그가 Go와 함께한 이후를 통틀어, 오늘, 가장 크게 화가 난 날이라고.

정확하게 말하면, 억울해하고 있지. 본인은 그저 가볍게 웃어넘기려는 것 같지만. 그는 명백히 억울했고, 화가 났다.

‘한두 번이 아니니까.’

그는 한두 번도 아닌데, 뭐 그렇게 화를 내느냐는 입장이었지만, 한두 번이 아니기에 더욱더 감정이 쌓였다.

늘 나왔던 말이니까.

그가 걸어온 영광의 로열로드의 한쪽에 늘 함께했지. 의심과 의혹은.

차라리 100마일의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였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의혹이나 의심이 덜했을 거다.

타당한 이유가 있잖은가?

압도적인 구속이라는 이유가.

물론 지금도 타당하다.

패스트볼의 회전수, 수직 무브먼트, 강력한 변화구들의 궤적와 타이밍 등등. 그가 잘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이유가 존재하지.

하지만 느린 구속 하나가 그 모든 것들을 짓누르고, 그의 피칭을 마치 불가사의한 미스터리처럼 만들었다.

절대로 잘할 수 없는 선수가 잘하는 것처럼 말이야. 실상은 그저 당연한 일인데도.

그리고 이번 의혹이 다시금 그것을 직접적으로 꼬집었다. 네가 정말로 순수하게 네 실력만으로 잘하는 거냐고, 네가 정말로 그 정도의 선수냐고, 아주 대놓고 물었지.

‘당연히 다른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확신하면서.’

그것이 결국 터트렸다.

차곡차곡 쌓였지만, 스스로의 가벼운 마음가짐에 애써 억누르고 있었던 모든 감정들을.

‘그나마 빠르게 조치를 취해서 다행이겠지.’

단순히 의혹만으로 도핑 검사를 권유한 건 아니다.

애초에 의혹이나 소문 같은 걸 잠재우는 건, 솔직히 브라이언 자신과 회사의 역량만으로 충분하니까.

도핑이나, 신체검사 결과 따위가 없더라도.

허나 Go를 위해서 그에게 무기를 쥐어 줬다. 무엇이든 후련하게 휘둘러야, 그나마 깊이 쌓여있던 울화가 해소될 테니까.

마치, 작년 파인타르 때, 중계 카메라, 아니, 그를 지켜본 이들을 향한 스트립쇼라는 행위로서 스스로의 분노를 제어해낸 것처럼.

이번에도 그러길 바랐다. 수없이 증명하고, 검증되었는데도 여전히 이어지는 의심에 좌절하고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준비된 무기를 휘둘러, 모두 쓸어버리겠다는 각오 하에 활활 타오르기를.

그리고 오늘 경기에서, 그는 브라이언이 기대했던 것처럼 제대로 터졌다.

‘철철 흘러넘치고 있지. 온몸에서부터. 아마도 관중들이나 선수들은 다들 깨달은 것 같고.’

본인 스스로는 여전히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아니, 어쩌면 애써 무시하고 있지만. 그는 활화산처럼 폭발했다.

‘시간이 잘 맞아서 다행이야. 언제나 잘하는 선수지만, 건네주지 못했다면, 지금 같은 느낌은 아니었겠지.’

이젠 모두가 알고 있지.

당장 펜웨이 파크를 채운 레드삭스, 보스턴이라는 만만찮은 족속들이 그 한사람의 기에 눌려, 입을 꾹 닫아버릴 정도로.

그리고 모두가 알고 있을 거다. 저 분노의 끝이 어디까지 향할 건지를.

브라이언 자신은 더 말할 것도 없이 굳게 믿었고. 그 거친 발걸음에서, 단순히 분노만이 감도는 건 아니었으니까.

9회 초는 빠르게 지나갔다.

애슬레틱스의 다른 선수들, 그의 동료들 또한 Go가 굉장히 흥분했다는 걸 알았지만.

그저 확실하게 토해내고, 흐름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여긴 건지, 아무런 행동도 없이 가만히 삼진만 당해줬지.

그렇게 9회 말, 마지막 순간이 찾아왔다.

####

9회 말의 마운드에 감상은 이야기하지 않겠다. 이미 많이 말했었잖아? 얼마나 남다르고, 색다른지.

그래도 딱 한 번만 말하자.

이번엔 그냥 9회 말이 아니라, 퍼펙트 중인 9회 말이니까. 이 정도는 감상을 말해도 되겠지.

그래도 짧게 표현하자면, 진짜 X나 좋다. X나게 떨리고. 그것 말고는 없지.

‘브루스 타박해놓고, 정작 내가 이러네.’

조금 전, 9회 초가 끝나기 전에, 브루스가 하도 얼어붙어 있어서 괜히 타박했었는데.

정작 나도 촌놈이구만.

숨이 가쁜 건 여전하다.

여전히 벅차고, 두근거리지.

하지만 괜찮다.

다시 내 차례를 기다리면서 벤치에 앉아 있는 동안, 이토록 떨리고, 벅차고, 흥분되는 이유를 깨달았으니까.

‘카타르시스, 맞나?’

맞았으면 좋겠네.

기껏 어려운 말 했는데, 틀린 단어라면, 좀 쪽팔릴 테니까.

카타르시스, 그래 카타르시스지. 이젠 잘 알겠다. 내가 어땠는지. 진짜 화가 많이 났었나 봐. 아닌 척해도 말이야.

그렇겠지. 얼마나 X같아.

계속 잘하는 것도 X나게 벅찬 일인데, 여기저기서 태클도 계속 들어오고,

언론에선 종종 편집증에라도 걸린 것처럼 나를 의심하거나 물어 늘어지기 일수고.

계~~~속 귀찮게 그러더니 기어코, 아무런 연관도 없는 개같은 약쟁이 새끼 도핑에 묶어서 욕하고 있으니. 빡이 안 돌 수가 있나.

“브루스, 금방 끝내자. 가장 중요한 일 따로 있으니까.”

“알았어, 한 3분이면 되나?”

“더 짧게 끊어도 될 걸?”

내 스스로 자각하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경기 내내 빡이 쳤던 것 같다. 어쩐지 공에 힘이 빡빡 들어가더라.

아무리 컨디션이 좋다고 해도, 폼이 좋다고 해도, 오늘처럼 좋기는 힘든데 말이야.

그런데 이젠 아니다.

8회 말이 끝난 순간, 헐떡이기 시작했던 흥분감은 분노가 아니니까.

그래, 카타르시스, 희열이지.

“그럼 더 좋고.”

브루스를 내려보냈다.

감각은 그 어느 때보다 살아 있다. 체력은 걱정하지 않는다. 이제는 잘 알았으니까. 오늘은 체력 같은 걸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이런 날도 있어야지.

다 신경끄고, 그냥 내 스스로 감정에 충실해서, 넋 놓고 후련하게 던지는 날 말이야.

아마 몸은 내일 눈 뜨자마자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겠지만.

“스트라이크!”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해방감으로 충만했다.

다시금 스트라이크.

오늘 내내 들었던 소리다.

7번타자 에두아르도 누네즈의 표정도 내내 보았던 것이고.

이제는 알 것도 같았다.

J.D. 마르티네즈가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본 건지. 그래, 내 상태를 짐작한 거겠지.

그러니 손쉽게 인정한 거고.

어쩌면 동업자로서, 내가 느끼던 감정에 대해 연민을 가진 걸 수도 있고.

“스트라이크!”

평소라면 마지막 순간 이를 앙다문 채, 악다구니로 던져야 하겠지만. 오늘은 그저 입가에 미소를 가득 품은 채 공을 던졌다.

아마 미친놈처럼 보일 거야.

퍼펙트가 코앞인데 실실 쪼개다니, 아주 상또라이가 따로 없지.

“스트라이크 아웃!”

대신 공도 또라이 같으니까, 그러면 된 거지. 3구 하이 패스트볼. 이번에도 89마일이 찍혔다.

이미 내 스스로 정상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에, 딱히 걱정하거나 염려하지는 않았다.

내일 X나게 아프겠지만, X되는 건 내일의 나니까. 개같이 털리는 것도 5일 뒤의 나일 테고.

남은 아웃카운트는 둘.

26번째 타자가 올라왔다.

라파엘 데버스.

히죽거리는 내 표정에 이를 까득 씹은 그는 흉흉한 눈빛으로 입장했다.

조금 오해를 한 모양이야.

하위타선이고, 손쉬운 타자이니, 내가 가볍게 마음먹고 있는 거라고.

다른 이유에서 웃은 거지만, 굳이 정정하지는 않겠다. 솔직히 말하면···

“스트라이크!”

“아웃!”

만만한 것도 사실이니까.

초구 몸쪽 포심 이후, 비슷하지만 조금 더 높은 코스로 날아든 투심 패스트볼.

틱-하는 듯한 미세한 타격음만을 남기며 높이 떠오른 공은 유격수의 글러브에 살포시 안착했다.

투아웃. 남은 아웃카운트는 단 하나. 마지막 27번째 타자가 올라온다. 이번 이닝의, 이번 경기의 마지막 타자가.

‘오.’

크리스티안 바스케스.

작년 준수한 한 해를 보냈고. 올해는 참담한 초반을 보내는 중인 포수.

혹시나 싶어 레드삭스 덕아웃을 봤지만, 대타는 없었다. 이대로 쭉 가겠다는 거겠지.

어쩌면 몇몇 레드삭스 팬들은 감독이나 코치들을 욕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않고, 무책임하게 지켜보기만 한다고.

‘오히려 정확한 판단이지.’

허나 어쩔 수가 없다.

이게 최선이거든.

가진 구종이 워낙 많아서, 선택지가 다양한 만큼, 딱히 스페셜리스트를 낼 수도 없고.

타이밍도 잡기가 힘드니. 차라리 지금까지 나와 승부를 벌이며 조금이라도 적응했던 선수를 내보내는 편이 더 나으니까.

그런 저쪽 코칭 스태프의 판단하에, 타석에 오른 마지막 타자는 꽤나 결연한 표정을 했다.

어쩌면 그 자신이 마지막 하이라이트를 장식할 제물로 바쳐진 것이나 다름없는데도 의연하네.

희열에 취하기는 했지만, 그런 타자에 대한 존중마저 접어버리지는 않았다.

“스트라이크!”

어차피 이게 존중이지.

그냥 최선을 다해 던지는 것. 방심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착실하게.

“스트라이크!”

적에게 보낼 존중 중에서, 이것보다 더 확실한 게 없지.

두 차례의 헛스윙에 나란히 올라간 스트라이크 두 개. 이제 남은 공은 딱 하나.

울분으로 가득 차, 나를 노려보는 타자에게, 그리고 레드삭스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주며. 마지막 공을 보냈다.

‘이제 끝이구만.’

공은 유유히 날아갔다.

올곧은 직선처럼 쭉 날아갔지. 그런 궤적을 보며 타자는 잠시 고민했고, 곧 결단을 내렸다.

가만히 앉아서 당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배트를 휘두르는 것으로.

곧게 날아가던 공은 꺾였고, 배트는 그 위를 지나갔다. 유려하게 배트를 피해, 포수 글러브 안으로 쏙 들어간 공.

그것으로 오늘 경기의 결과가 결정됐다.

“스트라이크 아웃!”

스물일곱 번의 타석.

스물일곱 번째 아웃.

보통 그렇게 표현하지.

“퍼펙트다 X발!”

“Fuck Yeaaaaaaaah!”

“You Suck!”

퍼펙트게임이라고.

숨 막혔던 펜웨이 파크에 다시금 소리가 돌아왔다. 묵직하게 내려앉았던 늦은 밤의 무게감도 사라졌다.

환호하는 팬들.

절망하는 레드삭스.

리그에서 가장 오래된 홈구장에서 완성된 투수 혼자만의 경기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다만 벌떡 일어나,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우리 원정팬들과 달리, 그라운드는 여전히 한없이 조용했지. 다들 마운드로 달려오지도 않았고.

애초에 내가 그렇게 부탁했으니까.

“Suck···”

“수고했어, 브루스. 오늘 공은 내가 가지고 싶은데, 그래도 괜찮지?”

“그야 당연하지!”

다시금 롤렉스를 얻게 될 브루스의 어깨를 두들겨준 뒤, 터덜터덜 덕아웃으로 향했다.

“어? 뭐야, 왜 저래?”

“왜 이렇게 반응이 심심해··· 안 기쁜가?”

“혹시 퍼펙트 아닌 거 아니야? 우리가 잘못 알았던 건가?”

“아닌데, 1루에 아무도 안 갔으니까, 분명 퍼펙트 맞는데···”

“이번이 세 번째라서 감흥이 없는 거 아니야?”

“Suck도 Suck이지만, 다른 놈들은 왜 축하를 안 해줘? 들어 올리고, 뭐 헹가래도 하고, 그래야지!”

잔뜩 열광하던 팬들은 심심하게 돌아가는 나를 보며 당황한 것 같았다. 어쩌면 상대팀 역시도.

조금 억울해 보이기도 했지.

우릴 그렇게 쳐잡아 놓고, 왜 기뻐하지도 않느냐고 말이야.

간혹 몇몇 레드삭스 팬들 중에서는 혹시나 내가 홈팀을 존중하려는 건가 싶었던 건지, 조금 감동하기도 했고. 그런 거 아닌데 말이야.

“잘 챙겨뒀어. 이거 가지러 온 거 맞지?”

“딱 아시네요. 역시 마음이 잘 맞나 봅니다.”

“내가 Go 널 본 게 있는데, 척하면 척이지.”

덕아웃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스콧 에머슨이 덕아웃 앞으로 나와, 오늘 경기 전에 대니얼에게 전달받아서, 벤치 한쪽에 잘 놔뒀던 종이쪼가리를 건네줬다.

귀신이다, 귀신이야.

내 마음을 너무 잘 알아. 다행히 덕분에 먼 걸음은 하지 않게 됐구만.

건네받은 종이를 들고 다시 돌아서자, 사람들은 더욱더 표정이 요상해졌다. 다만 동료 중 몇몇은 이미 예상했던 건지, 실실 웃기도 했고.

작년 파인타르 때처럼 다시 가장 가까운 중계 카메라 앞에 서자,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수만 쌍의 눈동자가 덜덜 떨렸다.

특히 카메라맨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오늘도 갑자기 옷 벗으려는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슈.

“어디보자, 이게 병원 검사인데, 호르몬인지 뭔지, 어려운 단어가 가득하네. 일단 이거 잘 보시고. 그다음에 이게 도핑 검사 결과인데, 오늘 아침 갓 나온 따끈따끈한 거니까, 이것도 잘 보시고.”

별거 아니다.

그냥 카메라에 검사지들을 나란히 가져다 보이는 거지. 화면에 잘 보이도록 주변 조명까지 고려해서 말이야.

‘오늘 가장 흥분되는 순간이네.’

말했잖아, 얘가 메인이라고.

퍼펙트보다 훨씬 중요하지.

비록 종이쪼가리에 불과하나, 열심히 떠들던 놈들 아가리를 다 막을 수 있는 마법의 종이거든.

이거 하나만 보고 공을 던졌다. 이 짓거리 하려고 열심히 던진 거고.

실컷 떠들기만 하고, 정작 증거는 못 내밀던 새끼들의 대가리를 후리는 거니까.

그래서 그런가, X나게 기분이 좋구만. 아마 근 1년을 통틀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일 거야.

“자, 이제 됐지? 꼬우면 반박해봐,”

난 증거를 댔다. 다른 이유나 원인 없이, 그냥 내가 X나게 잘할 뿐이라는 증거를.

그러니 니들도 증거를 대라.

증거 따윈 없겠지만 말이야.

물론 이걸로 다 끝나지는 않을 거다. 계속 태클을 걸 테니까. 그래도 내 속은 후련하잖아? 그러면 된 거지.

“이 개새끼들아.”

너무 과하게 흥분한 건지, 마지막에 안 해도 될 말을 해버렸지만, 뭐,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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