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230화 (230/316)

230화

펜웨이 파크.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오래된 홈구장이지. 옛날 구장으로 유명한 컵스의 리글리 필드는 2위고.

다만 구장 자체는 그토록 오래되었다는 느낌이 드물다. 그럴 수밖에. 꾸준하게 리모델링 되며, 계속해서 재정비 과정을 거쳤으니까.

도시 자체가 돈이 없어서 제대로 된 재정비도 힘든 콜리시엄과는 천지 차이지.

그리고 그런 펜웨이 파크의 주인인 레드삭스의 팬들은 유별나기로 유명하다.

“우우우우우우!”

불펜 벽 너머, 관중석에서부터 야유가 새어 나왔다. 바깥은 소음으로 가득하겠지.

우리 공격이 진행되고 있을 텐데, 아마 소리를 들어보아, 우리가 시작부터 점수를 낸 것 같네.

아무튼 이제 막 시작했는데도 펜웨이 파크는 소란스러웠다. 그것만 봐도 보통 팬들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지.

응원팀의 실점에 덤덤할 수 있는 인격자가 얼마나 있겠느냐 싶기는 하지만.

‘그리고, 그런 레드삭스 팬들 전부 다 내가 여기서 망하기를 바라고 있고.’

그런 레드삭스가 오늘 경기에서 바라는 건 딱 하나. 펜웨이 파크의 처형식이다.

내가 그들의 오랜 집에서 밧줄에 목이 걸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죽길 바라고 있다. 그것만이 정의라고 굳게 믿으면서.

‘힘든 꿈을 꾸는구만.’

우리 애슬레틱스 팬들, 그리고 레이더스와 달리, 보스턴의 꿈은 굉장히 허황됐다.

왜? 불가능을 바라잖아.

“후우-”

불펜피칭 내내 불펜포수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공을 받아줬을 뿐.

레드삭스의 꿈이 어째서 불가능한지는, 이것으로 대신 대답해도 되겠지. 이보다 더 진실된 반응이 없을 테니까.

“시간 됐어.”

“예, 바로 갑시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자제해서 던져.”

내 시간이 왔다.

연습피칭도 끝이고.

이젠 진짜 피칭을 할 시간이지. 마운드의 위에서, 내가 무너지길 바라는 수만 명이 보는 앞에서.

평소처럼 말하던 스콧 에머슨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늘은 자제 하지마. 그냥 마음껏 던져. 리미트 같은 건 없다.”

그는 좋은 코치다.

밖에서도 그렇게 보지.

외부에서의 영입이 그렇게 대단치 않은데도 강력한 투수진을 구축했잖아?

물론 선수단을 만드는 건 프런트의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팀 투수들이 다 잘해주고 있으니, 그건 결국 투수코치의 공이지.

허나 그런 의미에서 그가 좋다는 게 아니다. 유능한지는 솔직히 모르겠어. 입 밖으로 이런 생각을 꺼내면 삐지겠지.

허나 좋은 코치인 건 맞다.

투수가 지금 뭘 원하는지, 그리고 어떤 상태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으니까.

“그것참, 반가운 말이네요.”

“어차피 이렇게 안 했어도 마음대로 막 던졌을 거잖아?”

“그래도 공식적으로 허락 받으니 한결 마음이 편하잖아요?”

이번 역시 스콧 에머슨은 지금 나를 제대로 파악했다. 그리고 평소처럼 헐겁게나마 쥐고 있었던 목줄을 완전히 놓았다.

어차피 X나게 던질 생각이긴 했지만, 그래도 괜히 코치 눈치 안 봐도 되니, 훨씬 좋지.

‘2대0인가.’

불펜에 나가기 전.

한쪽에 비치된 티비를 확인했다. 점수는 2대0. 우리가 1회 초에만 2점을 냈네.

내 의혹이 나온 이후, 팀의 분위기가 떨어졌었는데, 오늘은 그걸 떨쳐낸 모양이야.

‘일단 경기는 이겼네.’

한 가진 확실했다.

오늘은 우리가 이긴다.

왜냐고? 내가 9회까지 던질 거니까. 그리고···

‘한 점도 안 내줄 거니까.’

만약 누군가 알아챈다면, 대단히 오만하다고 하겠지만, 한번 직접 봐봐. 그러면 알겠지. 이게 정말로 오만한지.

“우우우우우우우!”

“Roider Out! Roider Out!”

“니 피는 잘 수혈했냐? 이 뱀파이어 새끼야! 피 많아서 좋겠다?”

“니가 약을 암만 빨아도, 결국 넌 X도 아니야!”

“이 치터 새끼야! 양심이란 게 있으면 얌전히 홈런이나 처맞아!”

“오늘 경기 열심히 즐겨! 앞으로 징계 때문에 1년 정도는 야구 못할 테니까!”

아니면 그냥 당연한 자신감인지. 곧 증명되겠지.

경기장은 역시나 시끄럽다.

태반이 내 욕이지. 아주 좋아, 이게 야구지. 조용한 것보단 이쪽이 훨씬 나아.

거슬리지 않느냐고? 그럴 리가. 내가 찔리는 것도 없고, 어차피 죄다 개소린데, 뭐가 거슬려? 그냥 듣는 거지.

“Suuuuuuuuuuuuck!”

“It’s Suck Time!”

“Suck! 아무래도 보스턴 x신들이 치매가 왔나봐! 너한테 X같이 털린 걸 벌써 까먹었는데?”

“오늘은 21삼진 잡아서, 아예 박제시켜버려!”

물론 이쪽이 훨씬 더 듣기 좋기는 하지만. 바글바글한 레이더스. 확실히 평소 원정경기보다 훨씬 더 많다.

다만 추가적인 인원 탓인지, 보통 때와 달리 조금은 따로 떨어져 앉아 있기도 했지만.

그 외형이 너무 독특해서, 관중석 곳곳에 숨어있는 그들을 발견하는 건 쉬웠다.

더 많이 나타난 그들은 더 많이 소리쳤다. 거의 악다구니에 가까웠지.

내가 레드삭스한테 욕먹고 있으니, 자기들은 열심히 응원하고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저렇게 대단한 팬들인데, 나도 그런 팬들 기 좀 세워줘야지.’

별다른 제스처는 하지 않았다.

이렇게나 열렬히 응원해주는데, 손이라도 흔들어 주라고? 아니, 그런 걸 바라는 사람들이 아니야. 이 사람들이 바라는 건 그저···

“스트라이크!”

이것뿐이거든.

1번타자 무키 베츠.

리드오프부터 상대팀 에이스가 나왔으니, 대단히 빡세다고 할 수 있지만, 오늘은 어차피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무키 베츠를 무시하는 건 아니야. 얕잡아 보는 것도 아니고. 그냥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오늘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거다.

저 앞에, 저 타석 위에 무키 베츠가 아니라 트라웃이 있었어도, 약빤 본즈가 있었더라도.

“스트라이크!”

무조건 잡는다. 오늘 내가 할 일은 어차피 그것밖에 없다.

1구 포심에 이어 2구 역시 포심. 똑같은 몸쪽 코스로 연이어 날아왔는데도 타자는 헛스윙했다.

그것으로 이젠 레드삭스도 내 의지를 알아차렸다. 혹시나 싶었던 기대도 접어버렸고.

조금 바라기는 했겠지.

외부의 공격에 내가 흔들리기를, 그것이 피칭에도 영향을 끼치기를, 그래서 보다 더 수월한 경기가 되기를.

역사적인 기록을 자신들이 끊어버리고, 괴물을 쓰러뜨리는 용사가 될 수 있기를.

허나 그들은 틀렸다.

난 누가 공격하면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야, 좌절하거나 주저앉는 사람도 아니고.

오히려 누가 나를 욕할수록, 의심의 눈빛이 쏘아질수록, 귓구멍에 욕설이 박힐수록 더욱더···

“스트라이크 아웃!”

이를 악 물고 던지지.

3구 다시 포심 패스트볼.

변화구를 예상했던 건지, 아니면 그냥 구위에 얼어붙은 건지 무키 베츠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89마일.’

세 개 다 89마일.

평소라면 여기서 힘을 조금 정비했을 거다. 경기 시작부터 최고구속이 계속 찍히는 게, 좋기만 한 건 아니거든.

아직 몸이 채 풀리기도 전부터, 과하게 힘이 실리는 거니까. 허나 오늘은 아니다.

“스트라이크 아웃!”

목줄이 풀렸잖아.

개처럼 뛰어야지.

폐가 터지고, 심장이 터지는 한이 있더라도,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까지.

“스트라이크 아웃!”

2번타자 앤드류 베닌텐디는 4구째 너클 커브에 배트가 헛돌며 물러났다.

3번타자 헨리 라미레즈는 3구, 하이 패스트볼에 마찬가지로 후련하게 허리를 돌렸고.

그렇게 세 번의 타석이 지나가자, 시끄럽게 울렸던 펜웨이 파크가, 오랜 세월에 걸맞도록 어두운 적막으로 뒤덮였다.

“Hell Yeah!”

“You Suuuuuuuuck!”

“이게 Suck이다! 부러우면 부럽다고 솔직하게 말해! 개같은 소리 지껄이지 말고!”

“X발 이대로 끝까지 가자!”

“내가 속이 좁았어! 고작 21삼진이라니, 그냥 전타석 삼진 잡아버려!”

곧 또 다른 목소리로 뒤덮였지만. 이번엔 레이더스의 차례지.

덕아웃으로 돌아가며, 흘끔 관중석을 훑었다. 두 눈을 부릅뜬 채 나를 노려보는 홈팬들을.

내 목을 따겠다고? 정의를 구현하겠다고? 펜웨이 파크의 처형식? 미안하지만···

‘이 정도론 어림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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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D 마르티네즈는 거세게 턱을 긁었다. 그가 예상했던 그림과 달랐으니까.

‘분석이랑 전혀 다르네.’

전력 분석팀은 그가 멘탈적으로 흔들렸을 거라고 말했다.

원정길도 고달픈데, 엄청난 스캔들이 터저버린 데다가, 그로 인해서 뉴욕에 이어 보스턴에서도 욕을 듬뿍 먹었으니까.

도저히 멀쩡하게 버틸 수가 없는 일이지. 그런 것들은. 그러니 멘탈이 흔들리면서 어쩌면 평소 기계처럼 정확한 제구도 조금은 망가질 거라는 예측을 했었지.

몇몇 코치들은 그가 의혹을 보란 듯이 떨쳐내기 위해, 더욱더 힘을 낼 거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허나 그렇기에 과도하게 힘을 실어, 실투가 나오거나, 오히려 약간은 공의 위력이 떨어질 수도 있다고 여겼지.

예를 들어 특유의 서늘한 날카로움이 사라진다거나 그런 거들.

그리고 직접 마주한 Go는 그 모든 예측이 틀려먹었다. 정반대였으니까.

“어때?”

“저 새끼 100% 약이야.”

무키 베츠가 조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웃긴 일이지.

사실 팬들과 다르게, 레드삭스 선수들은 그를 딱히 욕하지 않았다. 진짜 도핑했을 리가 없으니까.

그를 믿는다거나, 그런 사람이 아니라거나 하는 낭만적인 이유는 아니다.

그랬다면 이야기가 나왔겠지. 훨씬 이전부터. 같이 터진 로빈슨 카노도 이전부터 은근하게 그런 의혹이 있었거든.

메이저리그라는 판 자체가 워낙 소수의 인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보니, 무언가 켕기는 것이 있다면 무조건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런데 Go는 아니다.

그렇게 잘하는데도, 정말이지 믿기지 않는 성적을 찍었는데도 약에 대한 소문이 없었다.

기껏해야 작년처럼 파인타르라거나 하는 것들이 전부고.

정말로 결백하거나, 아니면 그 누구도 모르는 방법으로 아주 은밀하게 도핑을 받았다는 건데.

솔직히 후자는 불가능이지. 무슨 특수기관에서 도와주는 것이 아닌 이상에는.

그렇기에 선수들은 물론, 눈앞에 있는 무키 베츠 역시 그가 도핑했다는 것을 그리 믿지 않았는데, 막상 직접 마주하니 생각이 달라진 것 같았다.

‘여전히 도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정말로 저 녀석이 도핑했다고 믿는 건 아닐 거다. 그저, 약간의 비유지. 저 무지막지한 공에 대한 비유.

그리고 타석에 오른 순간, 그 비유가 정확하다는 걸 깨달았다.

“스트라이크!”

몸쪽으로 날아온 초구.

원래도 느린 구속과 대비되는 적극적인 공격성을 뽐내는 투수이나, 오늘은 평소보다 더했다.

몸쪽으로 던진 공들이 수두룩하지, 포심도 더욱더 적극적으로 쓰고 있고.

코치들의 말처럼 본인의 결백을 증명하려거나 하는 건 아닐 거다. 그저···

‘미쳤네.’

공이 X나게 좋기에, 그렇게 던지는 것일 뿐. 불현 듯 서늘한 감각이 뒷목을 타고 J.D. 마르티네즈의 뇌리에 침투했다.

저번 경기, 레드삭스 타선에게 영원토록 굴욕으로 남을 20삼진 때 그는 Go를 경험했다. 듣던 대로 괴물이었지.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었다.

너무 손쉽게, 어린아이 손목을 비트는 것처럼 자신을 농락하고 잡아버렸으니까.

그나마 크리스 세일, 우리 에이스가 함께 미쳐 날뛰어줬기에 조금이나마 가려졌지만, 굉장히 치욕스러운 경기지.

그런데 오늘은 그 이상이다.

‘이게, 최고의 폼인가?’

그때보다 폼이 더 좋았다.

89마일인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패스트볼은 그날과 비교하더라도 수준이 더 높다.

식상하다는 건 알지만, 정말로 떠올랐다. 최소한 그의 시선에서는.

그러니 이해할 수밖에.

어째서 무키 베츠가, 100%이 약이라는 말을 남긴 건지. 솔직히 다른 투수들과 비교했을 때, 달라도 너무 다르니. 단순히 신체적인 역량을 넘어, 그 이상의 금기까지 손을 뻗친 것처럼 느껴질 수밖에.

“스트라이크!”

물론 포심 이외의 것들도 마찬가지고. 2구는 서클 체인지업. 트레이드 마크지.

허리춤으로 날아온 공에 본능적으로 허리를 쭉 뺐지만, 공은 유유히 존안으로 들어갔다.

원래도 특유의 역동성으로 유명한 구질이기는 한데, 오늘은 그것이 더 극대화됐다.

거의 반대로 꺾이는 슬라이더처럼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이쯤되면 그냥 스크류볼 같은데 말이야.’

구종의 이름과 그립, 던지는 폼을 감추고 순수하게 공의 궤적만 놓고 100명에게 물어본다면 모두 다 그냥 스크류볼이라고 할 거다.

말 그대로 페이드어웨이.

눈앞에서 공이 사라졌으니까.

그걸 보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이건 글렀네.’

메이저리거쯤 되면, 스스로 잘 파악하고 판단을 내려야 한다. 내가 어떤 투수를 두들기고, 어떤 공을 두들겨서 성적을 올릴지를.

그것만 잘 판단하고 선택하더라도 수백 만 달러 이상의 연봉을 받아먹을 수가 있지.

J.D. 마르티네즈는 쿨하게 인정했다. 저건 그냥 없는 셈 치자, 우타자는 어차피 못 칠 것 같으니까.

그러니 마음이 편할 수밖에.

수없이 난립한 선택지들 중 하나를 내려놓게 됐으니까.

“파울!”

3구째, 바깥쪽에서부터 날아온 슬라이더는 가까스로 커트해냈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곧 다시 몸쪽으로 쭉 들어온 포심 패스트볼에 움찔하며 삼진으로 물러났다. 아슬아슬한 코스였던 것 같지만, 그는 굳이 항의하지 않았다.

‘컨트롤도 예술이고.’

오늘 제대로 날이 섰는데, 그 제구력을 감안했을 때, 아슬아슬한 것 같더라도, 여기가 딱 스트라이크존일 테니까.

이것으로 확실하게 파악했다.

이제부터 흔들릴 거라는 모두의 예측과 달리, 저 녀석은 오히려 꼭대기에 올라섰다.

리그 최고의 투수, 아니, 역대를 논해도 될 정도의 기량을 가진 선수와 최고의 폼이 어우러졌을 때 만들어지는 건.

‘완전체구만, 오늘은.’

그저 하나의 완성품이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시작부터 이어졌던 연속적인 삼진은 5번 젠더 보가츠까지 집어삼킨 뒤, 6번타자 미치 모어랜드가 초구만에 내야뜬공으로 물러나며 끊어졌다.

시원스럽게 쓸려나가는 그들을 보며, 팬들은 굉장히 충격받은 사람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J.D. 마르티네즈의 생각은 달랐다.

‘미치가 오늘 타격감이 좋나 보네. 초구를 치다니.’

이 정도로 끊어진 게 그나마 운이 좋은 것이라고. 솔직하게 말해서, 그는 훨씬 더 길게 이어질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나마 기록 하나 막았네.’

투수는 또 다시 새로운 기록 정도는 충분히 찍고도 남을 공을 던져대고 있었으니까.

####

“그건 뭐야? 아까 전에도 소중하게 들고 있더니.”

“오늘 메인 상품.”

“응? 이번 경기 메인 상품은 Suck 너 아니었어?”

“그것도 맞고. 일종의 세트 상품이지.”

오늘 경기는 이것과 나, 두 개가 모두 다 어우러져야 했으니, 세트라는 말이 틀리지는 않겠지.

다시 곱게 접어, 조심스럽게 한쪽에 넣어둔 뒤, 브루스에게 부탁했다.

“9회 말 끝나고 나서, 나한테 달려오지 말고, 길 터달라고, 네가 다른 선수들한테 전해줘.”

“9회 말? 그걸 왜 벌써부터 얘기해? 이야, 자신감이 너무 대단한 거 아니야?”

“무조건 갈 거니까, 9회 말까지는. 뭐, 어떤 걸 쥐고 갈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얘기는 해둘 게. 다들 미친놈처럼 보긴 하겠지만.”

“원래 투수 대신 욕 먹는 것도 포수의 일이지.”

“포수가 뭐 노예냐? 죄다 포수의 일이래.”

그럼 아닌 줄 알았냐?

브루스 얘도 레드삭스 팬들 만큼이나 꿈이 크네. 그럼 뭐 포수지 노예지, 귀족이야?

그렇게 브루스를 보낸 뒤, 가만히 그라운드를 지켜보며, 내 차례를 기다렸고, 1,2회와 달리, 금방 끝난 3회 초에 자리 털고 일어났다.

“9회 말에 올라오지 말라고?”

“헹가레도 하지 말까?”

“그런 거 일절 하지 말고, 길만 터줘요. 그거면 충분해요.”

“오~ 오늘도 뭔가 단단히 준비했나 본데? 자신감도 넘치는 것 같고.”

자신감이라, 그래 넘치지.

원래도 철철 흘러 넘쳤지만, 오늘은 아주 콸콸 넘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거든.

오늘 컨디션이 최고잖아? 이미 알고 있기는 했지만, 확실히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니까, 더욱더 잘 알겠어.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겠지.

‘그러니까 즐겨야지, 충분하게, 짜릿하게.’

다시 마운드에 오르자, 전보다는 훨씬 야유가 줄었지만, 그 대신 눈동자는 더 싸늘해졌다.

이젠 정말로 확신하는 거지.

저 새끼 진짜 도핑이라고.

단순히 의심 수준이었다면, 오늘 피칭을 직접 보고선 완전히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거다.

‘아마 경기장 바깥에서도 마찬가지겠지.’

지금 뭐라고들 지껄이고 있을까? 인터넷이나, 언론 말이야.

진짜로 빨았다고 하려나? 뻔뻔하게 의혹이 불거진 와중에도 또다시 도핑을 한 거라고.

그 약빨로 또 다시 야구를, 메이저리그를 더럽히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을 거다.

‘도핑은 도핑이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도핑 수준이기는 하거든.

스테로이드나, 뭐 그런 것들이 아니라···

“스트라이크 아웃!”

마약에 가깝지만 말이야.

절대로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야. 엔돌핀이 분비되는 걸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과도하게 흥분한 걸 수도 있고.

“You Suck!”

그런 의미에서 펜웨이 파크는 일종의 집단 마약 파티 현장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어.

나만 그런 게 아닌 것 같거든. 저거 봐, 눈이 돌아갔잖아.

7번타자 에두아르도 누네즈가 투심 패스트볼에 삼진을 당하자, 얼어붙은 펜웨이 파크의 분위기와 별개로, 곳곳에선 소리가 터져 나왔다.

여기저기 흩어진 레이더스가 내지르는 목소리겠지. 비록 눈에 보이는 건 가까운 관중석의 사람들뿐이지만.

다른 곳에 떨어져 앉은 이들도 저런 얼굴을 하고 있을 거라는 거야, 불 보듯 뻔하지.

‘더 태워야지, 활활. 레이더스만이 아니라, 애슬레틱스 수준이 아니라, 레드삭스 정도가 아니라, 모두가 볼 정도로.’

8번타자 라파엘 데버스.

포텐은 확실한 타자이나.

아직은 그 잠재력이 터지지 않았다.

그 외의 정보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위험한 타자일까? 굳이 신경 써서 잡아야 할 정도로?

아니다. 그런 타자는.

아니, 애초에 이번 경기에선···

“스트라이크!”

위험한 타자 같은 건 없다.

초구로 날아든 쓰리핑거 체인지업. 앞선 타자들에게 적극적으로 포심을 썼기 때문인지, 패스트볼을 예상한 듯. 한복판으로 날아온 느릿한 공을 타자는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다.

“파울!”

2구는 커터.

날이 선 감각은 커터 역시 한껏 끌어올렸다. 깊이 파고드는 커터에 타자의 배트가 크게 진동했으니까.

포수 머리 뒤로 날아간 공.

투 스트라이크가 잡히자, 타자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지난번과는 반대로 오늘은 오감이 모두 예리해져서 그런지.

위아래로 세차가 움직인 그의 목젖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러면 쓰나. 그렇게 긴장한 모습을 겉으로 보이면 어떡해.

“스트라이크 아웃!”

그럼 훨씬 더 쉬워지잖아.

몸쪽으로 날아온 공. 타자가 황급히 배트를 냈지만, 공은 유유히 아래로 떨어졌다.

서클 체인지업이지.

“You Suck!”

레이더스의 목소리는 더욱더 올라갔다.

마치 우리만 보기 아까우니, 다른 이들도 보러 오라고 부르는 것처럼.

내가 이래서 우리 팬들이 좋아. 내가 뭘 원하는지 딱 안다니까?

그래, 모두가 알아야지.

“아웃!”

도핑이 드러났는데도 여전히 약을 빨고 있는 이 후안무치한 약쟁이 놈이 펜웨이 파크를 불태우는 걸 넘어, 아예 레드삭스를 그 이름처럼 새빨갛게 화형 시키고 있다는 것을.

그것이 널리널리 알려져야, 최대한 많은 목격자가 몰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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