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229화 (229/316)

229화

레이더스는 확신했다.

내일 당장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지금처럼의 충격은 없을 거라고.

이 세상이야 어차피 기대도 없고, 믿음도 없으며, 아무런 신뢰도 없기에, 망하든 말든 큰 상관이 없으니, 그냥 드디어 망했구나, 하고 말겠지만.

Suck은 아니다.

<신기록 달성 기념 특별 행사! 전 품목 61% 할인?!>

“You Suck!”

“61? 훨씬 더 해야지! 이 정도는 아직 시작도 아니야!”

“Suck이라면 한 100이닝까지 늘려버릴걸? 다른 투수들은 그걸 보면서 손가락이나 빨겠지.”

분명 행복했던 시간이다.

작년부터 떠들썩했던 기록이 올해, 드디어 달성됐고, 멋들어지게 신기록이 수립됐다.

그것도 홈, 콜리시엄에서.

분명, 그에 대한 행복이 넘쳤던 오클랜드였건만. 분위기는 하룻밤 새 달라졌다.

금지 약물. 보통 편하게 도핑이라고 하지. 처음에는 그저 개소리라고 여겼다.

“Suck이 도핑했다는데?”

“뭐 그딴 걸 읽어? 그런 개소리 나오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또 X신 같은 기자 새끼 하나가 혼자서 지랄하는 거겠지.”

그들의 신은 여타 모든 신앙이 그렇듯, 항상 불신과 음해에 시달렸다.

사악한 이교도들과 이단자들이 언제나 그 신성함을 끌어내리려, 고군분투하고, 날뛰었지.

허나 모든 참된 신앙이 그렇듯 결국에는 승리했다. 남은 것은 그저 여전히 굴복하지 않은 잔당들의 발악일 뿐.

이번에도 그 정도로 여겼으나, 첫 기사가 나오고 수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지금까지 보았던 그저 그런 루머나 찌라시와는 차원이 다른 규모의 파도가 몰아쳤다.

<역대 최고의 투수, 알고 보니 로이더?>

<메이저리그를 배회하는 디자이너의 어두운 손길, Go에게도 닥쳤다!>

<트레이너의 상시 케어, 단순히 트레이닝이었을까?>

<비정상적이 체력, 혈액 도핑의 가능성 역시 지울 수 없어···>

<무너진 영웅, 랜스 암스트롱, 그와 유사한 증상을 보이는 Go? 사이클을 휩쓴 EPO가 베이스볼에 도래했다!>

직접적인 약물이나 도핑 방식도 언급됐고, 이전처럼 ‘썰’ 수준이 아닌, 직접적인 증거 ‘같은’ 것들도 나왔다.

그래봤자 다른 로이더들과 비교하거나, 평범한 행동이나 신체 부위를 교묘하게 도핑 증상이라고 매도하는 수준이었지만.

어쨌든 지금까지와는 달랐기에, 점점 더 두려움이 엄습했고, 아직 즐기지도 못한 축제는 순식간에 막을 내렸다.

“설마··· 아니겠지?”

“그런 의문을 가지는 것 자체가 니가 X신이라는 뜻이야.”

“아니, 그냥 좀 걱정돼서 하는 말이지.”

“Suck이 약을? 웃기고 있네. 눈빛만 봐도 딱 알아.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거.”

당연하게도 레이더스는 부정했다. 그들의 신이 타락했다고? 그럴 리가!

그는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니다. 아니, 애초에 사람이 아니다. 완전무결한 신이지.

최소한 레이더스에겐 그랬다.

그런 신이 뭣 하러 약물 같은 인간의 것을 탐하겠는가? 그저 손짓 한번으로 해일을 일으키고, 타자들을 도륙하면 그만인 것을!

“이거 봐, 사실 로빈슨 카노인지 뭔지라잖아. Suck이 아닌 거야.”

“그럼 그렇지, 또 다른 놈 가지고 Suck 발목을 잡은 거네.”

“에이 X같은 언론 새끼들. 왜 Suck이랑 우리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풋볼 볼 때도 유독 우리한테만 지랄하더니.”

“오클랜드라고 무시하는 거지. 가난하고 범죄도시라면서.”

거기다 추가적인 반박 기사나, 사실은 의혹이 드러난 그 대상이 Suck이 아닌, 로빈슨 카노라는 이름 모를(?) 선수라는 기사도 나왔기에 더욱더 굳건하게 버텼고.

허나 그런 믿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흔들렸다.

반박 기사들도 나오고, 시선이 두 갈래로 나뉘기는 했지만, 음해자들 역시 더욱더 결렬하게 항전했으니까.

그래서인지, 굳건한 믿음이 아닌, ‘타협’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솔직히, NFL에도 약물 많지 않아?”

“엄청나게 많겠지. 정상은 아니잖아, 검사를 빡세게 안 해서 다들 쉬쉬하고 있는 거지. NBA도 마찬가지고.”

“메이저리그 새끼들이 너무 샌님이라서 그런 거야. 자기 피 맞는 게 뭐 어떻다고.”

몇몇 이들은 설사 도핑을 했더라도, 그것이 뭐 그렇게 큰 문제냐고 주장하기도 했고.

“Suck은 몰랐겠지. 그런 선수가 아니야.”

“워낙 착해서, 트레이너가 주는 대로 넙죽 받아먹은 게 아닐까?”

“대니얼이라고 했던가? 맨날 Suck이랑 같이 다니는 트레이너. 그 자식이 원흉이야.”

“그 놈이 Suck을 꼬드긴 거지. Suck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트레이너의 지시를 따른 거고. 그럴 수도 있잖아?”

혹은 만약 도핑을 했다고 쳐도, 그건 트레이너나 주변의 잘못이지, Suck은 몰랐을 거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여전히 그를 믿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는 흔들렸다는 뜻이었다.

그가 금지 약물을 복용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거니까.

“솔직히··· 좀 말이 안 되는 성적이기는 해.”

“내가 요즘 야구 기록들을 찾아보고 있는데, Suck이 그냥 좀, 어나더 클래스긴 하더라.”

이젠 레이더스도 야구에 어느 정도는 익숙해졌다. 물론 올해 새로 유입된 이들은 작년의 레이더스처럼 풋볼의 물이 아직 덜 빠졌지만.

그래도 작년부터 갈아타서 응원했던 이들은, 1년이라도 더 야구를 먼저 봤기에 훨씬 익숙해졌지.

그렇기에 이제는 잘 알았다.

단순히 시원하고, 보기 좋고, 잘하는 정도를 넘어, 그들이 응원하는 선수가 얼마나 괴물인지를.

아웃라이어라는 단어도 부족하지. 기록이란 기록은 죄다 깨부수며, 마찬가지로 리그 정상급이라고 불리는 투수들과 비교하더라도 엽기적인 성적을 찍고 있으니까.

그렇기에 의심스러웠다.

단순히 평범하게 GOAT 정도였다면 오히려 덜했을 텐데. 그런 수준마저 넘어버린 선수가, 과연 정말로 정상적일까?

비록 야구를 본 시간은 짧아도, 누구보다 믿음이 굳건한 레이더스가 그런 의문을 품었다는 건. 그 외의 평범한 애슬레틱스 팬들은 더욱더 거센 혼란에 빠졌다는 것을 말해줬다.

“Suck마저··· Suck마저 그렇게 날아간다고?”

“X발··· 우리 팀은 왜 이 모양이야?”

“칸세코도 좋아했는데 그렇게 날아갔고, 지암비도 좋아했는데 날아갔고, 빅맥은 X발 뒷구멍 대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했는데 날아가더니. 이젠 Suck까지?”

“혹시 니가 문제인 거 아니야? 니가 좋아하는 사람만 다 날아가는 건데.”

“진짜로 내가 문제인가?”

훨씬 더 심할 수밖에 없었다.

레이더스가 고유석을 보고 있다면, 그들은 애슬레틱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를 봤으니까.

고유석의 도핑 의혹은 팬들이 가지고 있던 오랜 트라우마를 자극했다.

수많은 영웅들, 슈퍼스타들이 날아갔던 그 순간, 찬란한 영광 속에 가려졌던 약물의 시대가 대대적으로 대두되고, 그리고 저물어버린 그때를 다시금 떠올리게 했다.

마치 오래 전의 참혹을 다시금 끄집어내듯, PTSD를 유발한 셈이겠지.

팬들은 좌절하고, 절망했다.

이렇게 또 한명의 스타가 사라진단 말인가? 또다시 오클랜드의 별이 저버린단 말인가?

그것도 이번에도 똑같은 이유로, 약물이라는 똑같은 죄악으로? 그때처럼 또다시?

그에 대한 충격이 오클랜드를 뒤흔들었고, 축제와 향락이 이어졌던 도시에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토록 번뇌하던 오클랜드에 또다른 소식이 날아들었다.

“Suck···”

“X같은 놈들이, 어디서 감히!”

그들이 고통받고 있었을 때, 그 모든 일을 초래한 이 역시 시련에 빠졌다는 소식이.

-우우우우우우우우!

-치터! 치터!

-다음 등판 레드삭스지? 이번에도 주사기 꼽고, 한 27삼진쯤 잡아라! 그건 욕 안할 게!

-MVP랑 신인왕 돌려놓고 꺼져! 쓰레기 같은 새끼야!

한창 원정이 이어지고 있다.

머나먼 동부로 날아갔지.

덕아웃에 앉은 그는 모두의 비난 속에서 묵묵히 견디고 있었다. 오히려 당당하게 쏘아보고 있었고.

워낙 주목받는 선수였기에, 그런 영상이 순식간에 퍼져나가기도 했다.

그것을 보며 레이더스는 분노하면서도, 조금은 고민했다.

이번에도 그를 따라야 할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어쩌면 부정으로 타락해버린 신일지도 모른다. 이 모든 의혹이 진실일지도 모르고.

그런데도 여전히 신앙심을 유지해야 할까? 그저 굳건하게 믿으면서?

씻을 수 없는 번뇌가 머리를 세차게 뒤흔들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선택은 빨랐다.

고작 이런 시련 따위에 흔들릴 정도로, 가벼운 믿음이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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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이라, 여기서 원정 등판은 이번이 처음이던가?’

욕을 옴팡지게 들으며, 다음 원정지에 도착했다. 보스턴, 미국 역사에서 아주 상징적인 도시지.

사실 동부의 도시들 자체가 대부분 미국 역사의 시작점에 놓여 있기도 하고.

“브라이언.”

“Go, 오셨습니까? 못 보던 사이 많이 핼쑥해졌군요.”

“그런가요? 오히려 평소보다 잘 챙겨 먹었는데···”

그리고 브라이언도 있지.

보라스 코퍼레이션이 보스턴에 있거든.

기다린다는 연락은 이미 받았기에, 보스턴에 도착하자마자 그와 만남을 가졌는데. 그는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내가 핼쑥하게 보인다니, 오히려 브라이언이 더 걱정이군. 스트레스 때문에 시력이 감퇴됐나 봐.

“일단 주체는 잡았습니다. 시작은 삼류 타블로이드 수준이었지만, 확실히 그 뒤에 배후가 있더군요.”

그렇겠지.

타블로이드 수준에서 감당할 일이 아니니까, 애초에 작정하고 노리기도 했고.

‘거기다가 꽤나 즉각적이었지.’

첫 기사가 올라가고 30분이 채 되지 않아서, 수십 개의 추가 기사가 올라갔다.

이건 저쪽에서도 집단적인 합의가 되어 있었다는 뜻이지.

“리스트는 추렸습니다.”

“언론사가 아니라, 기자들이네요?”

“직접적으로 회사를 저격한다면, 오히려 상황이 복잡해집니다. 차라리 기자에게 개별적으로 하나하나 소송에 들어가는 편이 훨씬 편하죠. 일도 쉬워지고요.”

회사에 직접적으로 고소하는 것보다는 기자 개개인을 저격하는 쪽이 편하다는 건 나도 얼핏얼핏 듣기는 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다 내 스폰서들도 나섰다고 하고. 내 이미지가 실추되면서 마케팅적으로 손해가 발생했잖아?

‘규모가 엄청나겠네.’

물론 대부분 단기계약이고, 내 뽕을 제대로 뽑아냈지만, 이참에 우리랑 좋은 관계를 가져서, 스폰서쉽을 더욱더 끌어가겠다는 뜻이겠지.

아마도 일이 잘 처리가 된다면, 규모가 큰 만큼, 나한테 떨어질 보상금 같은 것들도 상당하겠지만.

어차피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돈이야 내가 지금처럼 잘하기만 하면 알아서 굴러올 텐데 뭔 상관이야?

중요한 건 이미지, 내 개인의 명예와 팬들이지.

“오클랜드 쪽은 심각하다고 했죠?”

“예, 분위기가 심상치는 않습니다만,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대대적인 이탈의 분위기는 없다고 합니다.”

“구단으로선 천만다행이겠네요, 이참에 마켓 규모 늘리려고 했을 텐데.”

“그렇겠죠.”

오클랜드 쪽은 볼 것도 없도.

충격과 공포가 이어지겠지.

내 텃밭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 쪽도 마찬가지일 테고.

그러니 보상금이고 나발이고, 일단 그런 팬들부터 진정시키고, 안심 시키는 게 가장 중요한데···

“그건 왔어요?”

“아직은··· 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내일이나 모레 중으로 나온다고 하니, 조금만 참으시면 됩니다.”

“내일이나 모레라···”

타이밍이 조금 애매하네.

약간 미묘하겠어.

내가 살짝 입맛을 다시고 있으니, 브라이언은 날 다독이듯 부드럽게 말했다.

“설사 조금 더 늦더라도, 충분히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네, 그건 아는데, 정말로 잘 써먹을 방법이 떠올라서요.”

“잘 써먹을 방법이요?”

그러고 보니, 브라이언과 자세한 내용은 공유를 안 했었지? 그냥 나 혼자서 불쑥 떠오른 생각이니까.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에게 짧게 설명해주니, 그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작년과 비슷하겠군요.”

“예, 작년에도 반응이 좋았잖아요? 거기서 약간의 힌트를 얻었는데, 어때요?”

“가능만 하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죠. 확실히 여론을 만지는 방법을 아시는군요.”

“좋은 에이전트가 될 거라고, 브라이언이 그랬었잖아요?”

그도 흥미롭게 여기는 것을 보아, 확실히 먹힐 것 같기는 한데, 가장 중요한 건 타이밍.

그나마 다행인 건, 여기가 보스턴이라는 거였다. 말했다시피 보라스 코퍼레이션이 여기 있으니까.

일단 나오기만 한다면, 금방 전달 받을 수 있겠지.

‘“오는 즉시 곧바로 드릴 테니, 일단 Go는 최대한 몸 관리에만 신경쓰십시오.”

“그래야죠, 결국 가장 중요한 건 피칭이니까요.”

결국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한다. 투수에게 길은 딱 하나뿐이지. 그냥 X나게 잘 던지는 것.

특히나 이번에는 더욱더 그래야만 할 이유가 생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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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에서도 욕을 먹었다.

이거야 뭐 예상했지.

“크리스의 사이 영을 돌려줘!라!”

“이 사기꾼 새끼! 치트 써서 남의 영광이나 훔치는 도둑놈의 새끼!”

양키스가 애런 저지의 신인왕과 MVP를 내놓으라고 외쳤듯.

레드삭스도 크리스 세일의 사이 영 상을 토해내라며 나한테 열을 올리고 있는데.

“아니, 왜 죄다 3위 새끼들이 더 난리야? 2위가 저 지랄하면 이해라도 하지.”

“뭐, 누구나 자기들 유리한 대로 생각하는 법이니까. 네가 없으면 자기들이 1위라고 착각할 수밖에.”

애런 저지도 그렇고 크리스 세일도 그렇고, 알투베랑 클루버에게 밀려서 나란히 3위했는데, 왜 나한테 난리야?

어차피 내가 없었더라도 MVP랑 사이 영이 다른 사람한테 돌아갔을 텐데. 좀 어이가 없네.

저런 욕설이나 비아냥이야, 이미 이전 뉴욕 원정에서 들었던 것이고.

또한 레드삭스의 경우 도핑에 한해서는 양키스보다 훨씬 더 할 말이 없는 팀이었기에 귀에 박히지도 않았다.

“오티즈랑 라미레즈는 아마 헛기침하고 있을 거야. 레드삭스 반응 보면서.”

“먼 산이나 보겠지. 쪽팔려서 고개나 들겠어?”

그래서, 느그 오티즈랑 라미레즈는 참도 깨끗하겠다, 그치?

다만 순수하게 분노하고 욕만 지껄였던 양키스 팬들과는 달리, 보스턴 팬들은 조금의 ‘배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약빨로 20K하니까 좋냐?”

“왜 이번에도 또 약 처먹고 삼진 잡으려고?”

“우우우! 그날은 크리스가 이긴 거였어!”

“X발 그날 경기 보고 환호한 내 자신이 X나게 밉다!”

사실 지난번에 크리스 세일이랑 열심히 투수전을 벌였을 때, 은근히 감동한 레드삭스 팬들이 많았거든.

나한테 20탈삼진 잡히며 기록을 내주기는 했지만, 의외로 아주 시원스럽게 축하를 해줬었지. 나랑 크리스 세이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 모습이 대문짝만하게 걸리기도 했고. 마치 선의의 라이벌처럼.

그렇기에 그 여운이 아직도 남아, 나에 대한 감정이 좋았던 것 같은데, 그게 약빨이었다는 의혹이 생겨나니, 배신감이 든 거겠지.

물론 죄다 개소리기에 배신감이 들 것도 없지만 말이다.

‘며칠 지나면 이불 뻥뻥 차실 텐데, 업보 그만 쌓지 그러냐.’

그래도 레드삭스의 반응을 보니, 확신이 들었다. 그래, 저렇게 격렬한 반응을 잠재우는 건, 역시 X나게 쎈 뒤통수 한방밖에 없어.

어지간한 건 약빨이 안 먹힐 거야. 기스도 안 날걸? 확실하게 KO를 시킬 정도의 충격을 줘야, 흥분에 막혀버린 귓구멍이 뚫리겠지.

‘기다려야지, 브라이언이 내일 와주기를.’

그렇게 생각하며, 이번에도 꿋꿋하게 벤치에 앉아 경기를 지켜봤다.

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애써 씹어 삼키면서. 이건 내일, 마운드 위에서 발산해야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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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진의 한복판에 오르는 거야 투수에겐 흔한 일이다. 애초에 투수는 고독한 존재니까.

중2병 아니야. 진짜야.

마운드 위에 혼자 우뚝 서 있으면 진짜 엄청나게 외롭거든.

특히나 혼자 툭 튀다 보니, 모든 관중들, 그러니까 나한테 아주 크나큰 적개심을 가진 수만 명의 눈동자가 쏟아지고 말이야.

‘그리고 오늘은 더하겠지.’

시간에 맞춰서 일어났다.

충분한 수면은 언제나 옳지.

특히나 등판하는 날이라면 더더욱.

원래도 원정 등판은 적의 속에서 공을 던지는 힘겨운 일이나, 아마도 오늘은 훨씬 더할 거다. 날 더욱더 미워할 만한 이유가 생겼으니까.

거기다 레드삭스 팬들의 경우 필리스, 컵스와 더불어 강성 팬덤으로 꼽히니 더 말할 것도 없고.

허나 그 정도야 상관없다.

사실 나를 그보다도 훨씬 더 미워하는 레인저스, 글로브 라이프 파크에서도 멀쩡하게 잘 던지는데, 뭐 이 정도 쯤이야.

다만 한 rkl 아쉬운 게 있다면, 오늘은 정말로 외로울 거라는 거겠지.

‘아마 평소보다는 적겠지, 레이더스가.’

레이더스. 원정이든 홈이든, 내가 등판하면 언제나 따라다니는 나의 ‘신도’들.

그들도 아마 크나큰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을 거다.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고.

애슬레틱스 팬덤의 분위기가 워낙 흉흉하니, 평범한 원정팬은 물론, 그들도 평소보다 적겠지. 아예 없을 수도 있고.

그러니 오늘은 다른 원정 경기보다 조금 더 외로운 싸움이 될 거다.

삼진 잡을 때마다 늘 관중석에서 들려오는 You Suck 소리가 없을 테니까. 나도 은근히 중독이 됐나봐.

솔직히 처음에는 조금 싫었는데, 이젠 오히려 안 하면 허전한 수준이 되버렸어.

‘그래도 컨디션은 좋아서 다행이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오늘 컨디션이 좋다는 거였다. 계획대로지. 최대한 폼을 올리는 것에만 집중했거든.

워낙 중요한 경기니까.

‘지금 같은 시기에 피칭도 흔들리면, 의심이 더욱더 심해지겠지.’

약물이 걸려서 찔린 거라느니, 겁먹고 약을 안 먹은 거라느니, 온갖 말이 다 나올 거다. 못해도 평소처럼은 해야 본전이겠지.

그렇기에 열심히 준비했는데, 그 덕분인지, 충분히 단잠을 자고 일어났는데도, 정신이 맑았다. 감각도 벌써부터 날이 서 있었고.

“Suck, 일어났어?”

“어, 푹 자고 왔다.”

“오~ 폼 좋아 보이는데? 걱정 안 해도 되겠네. 내 손바닥 걱정이나 해야겠다.”

그런 깨끗한 몸으로 내려가니, 역시나 먼저 와 있던 동료들이 하나 둘 다가왔다.

특히 이번 의혹과 여론에 어쩌면 나보다도 훨씬 더 흔들리고 있던 브루스도, 내 컨디션이 좋아 보이니, 만족스럽게 웃었고 말이다.

“레드삭스 놈들, 저번 경기는 까먹은 건지, 아주 지랄들을 해대던데, 오늘 기강 좀 잡아줘.”

“깔끔하게 21K가자. 그러면 다들 닥칠걸?”

“Suck, 이번에 완봉하고, 중계 카메라에다 대고 소리치는 건 어떠냐? X이나 까라고.”

워낙 민감한 시기의 등판이었기에, 다들 나한테 집중하고 있는데, 뭔가 보살핌 받는 것 같아서 기분이 썩 나쁘진 않군.

“타구나 잘 잡아줘요. 알아서 잘 던질 테니까. 미리 준비한 것도 있고.”

“준비? 역시, 그럼 그렇지. 이대로 닥치고 있을 Suck이 아니지.”

“작년에 스트립쇼 같은 거야?”

“엇비슷해. 그거 잘하려면 오늘 성적 좋아야 하니까, 수비들 좀 잘 해줘. 기왕이면 점수도 팍팍 내고.”

“그거야 당연하지. 믿고 맡겨.”

그런 동료들에게 내 생각을 은근하게 밝히니, 다들 그제야 음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 계획대로만 된다면, 작년 파인타르 의혹을 내팽개친 스트립쇼처럼 아주 폭발적인 반응이 나오겠지.

‘일단 반은 채워졌는데···“

그것을 위한 전제조건의 절반은 확보했다. 내 폼 말이야. 지금도 심상치 않은데, 워밍업까지 하고 달아 올리면 엄청나게지.

그러면 피칭이야 걱정할 필요가 없고. 다만 아직 절반은 충족되지 않았다.

‘연락이 안 왔어.’

일어나자마자 휴대폰을 확인했었지만, 브라이언의 연락은 없었다. 그저 너무 긴장하거나 무리하지 말라는, 다른 때와 똑같은 메시지뿐이었지.

‘그게 없으면 그림이 안 사는데···’

조금 초조했지만, 그래도 경기 시간까지는 아직 조금이나마 시간이 남았으니, 일단인 믿고 기다렸다.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난 뒤, 다시 도달한 펜웨이 파크.

애슬레틱스의 버스가 등장하자, 여기저기 쫙 깔려 있던 레드삭스 팬들이 손가락질 하거나 욕설을 토해냈다.

“우우우우!”

“약은 잘 빨았냐?”

“소매 한번 걷어봐! 주사자국 좀 보자!”

“Hey, G-로이드! 오늘 폼 좀 High해? 또 약빨로 삼진 팍팍 잡을 거지? 거참 대단도 하다!”

그래그래, 다들 잘 떠드는군.

계속 그렇게 해주슈.

들을수록 전투력이 상승해서 오히려 더 좋네.

단순히 레드삭스 팬들만 소란스러운 건 아니다. 내 등판일에 맞춰서 기자들도 바글거렸으니까.

지금까지 인터뷰 같은 것들을 죄다 거절했었는데, 한 마디라도 어떻게든 뽑아내겠다는 거겠지.

“Go, 도핑 의혹에 대해서 현재까지 아무런 입장도 내놓지 않고 계신데···”

“사무국 차원에서 1년 이상의 중징계를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작년 본인이 받으셨던 수상을 반납하고, 2위 수상자들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는데···”

이 정도 질문은 그나마 양반이다. 그래도 기자의 탈을 쓰기는 했으니까.

그저 이슈만을 바라는 타블로이드 기자들은 저것보다 훨씬 노골적이지.

스테로이드의 부작용으로 가슴이 큰 것 같다거나, 여자친구가 없는 이유가 도핑으로 인한 발기부전 때문이냐고 묻거나. 아주 질문의 수위가 엄청나지.

우습게 보여도, 은근히 제법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고 있었다. 후자 말이야.

보통 나 정도쯤 스포츠 스타들은 모델이든 배우든, 염문설을 뿌리는데. 난 너무 조용하잖아?

그래서 작년에 내가 동성애자이고, 함께 사는 대니얼이 트레이너가 아니라, 그 연인이라는 황당무계한 개소리까지 나왔었지.

이번엔 동성애자에서 발기부전으로 가닥을 잡은 거고. 흔히 스테로이드가 남성의 정자를··· X발 내가 진짜 별소릴 다하고 있네.

“Go, 안쪽으로 들어서고, 다들 Go를 지켜-”

“아뇨, 그러지 마세요.”

그런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동료들이 나를 마치 경호원처럼 보호하려고 했지만, 나는 그런 배려를 가뿐하게 거절했다. 오히려 그림이 이상할 테니까.

동료들에 사이에 끼여서 안까지 살금살금 들어가면, 마치 검찰 출두하는 것처럼 보일걸. 어차피 내가 덩치가 제일 커서 가려지지도 않을 거고. 그럴 바엔 차라리···

“제가 앞장서죠.”

당당히 앞에 서는 게 낫다.

애초에 내 기본 스탠스가 이거잖아? 무조건 당당하게, 떳떳하게. 그것으로 나에게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을 어필하는 것. 일말의 여지도 남겨서는 안 되지.

그렇기에 오히려 먼저 버스에서 내리자,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위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곧 몰려든 사람들이 물러섰으니까.

“어?”

우글거리는 군대의 등장에 지레 겁먹고 질려서.

“이야, 왕의 귀환인데?”

“그럼 Suck이 아라곤인가?”

“간달프에 가깝지, 피칭이 마법이잖아.”

“까놓고 말해서 사우론 아니야? 저거 봐, 오크잖아. 오크들 대장인데, 그럼 사우론이지.”

솔직하게 말하면, 조금 감동받았다. 아예 없거나, 아니면 평소보다 훨씬 적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오히려 더욱더 많았으니까.

원정이 아니라, 홈, 그것도 기록이 걸렸던 지난 등판과 비슷할 정도로.

“다 꺼져! Suck 오늘 등판하는데, 왜 지랄들이야!”

“레드삭스 X신들이, 어디서 개지랄이야? 안 꺼져?”

“You Suck! 우리가 보스턴에 왔다!”

“우리 기다렸지? X같은 놈들 앵앵거리는 거 듣느라 수고가 많았다! 이제 다시 Suck Time이다!”

아주 풀코스튬까지 했구만.

그 압도적인 위압감에 이슈에 눈이 돌아갔던 기자들마저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고.

버스를 향해 욕설을 퍼붓던 홈팬들 또한 조심스럽게 비켰다. 그치, 저 모습 보면 쫄 수밖에 없지. 맨날 보는 나도 풀코스튬하고 나타나면 좀 무서운데, 오죽하겠어.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좀 감동이네.’

솔직히 흔들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잖아? 진짜 요 며칠 동안 대대적으로 퍼부었으니까.

아무리 로빈슨 카노로 물을 탔다고 하더라도, 내가 워낙 인기스타다 보니, 결국 포커싱이 집중됐었지.

그러니 나에 대한 팬심이 얼마나 대단하던지, 조금은 흔들릴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들은 오히려 더욱더 그 믿음이, 신앙심이 굳건해진 것처럼 보였다.

나를 보는 눈동자에서 깊은 신뢰감이 느껴졌으니까. 시련을 통해 더 강해졌다는 거겠지.

그렇게 단순히 위압감만으로 인파를 몰아낸 레이더스는 별다른 제스처를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잘 던지라거나, 삼진 팍팍 잡으라며 부탁했을 뿐.

“이번에도 20삼진 알지?”

“마침 상대도 똑같은데, 삼진으로 싹 잡아버려!”

“의리가 있지, 그깟 개소리 좀 떠돈다고 해서, Pussy처럼 도망치면 쓰나. Suck 너 x나게 잘 던지는 거 보려고 온 거니까, 오늘도 평소처럼만 해. 삼진 잘 잡고, 실점 안하고 뭐 그런 거.”

아마 하고 싶고, 묻고 싶은 말이 목끝까지 차올랐을 텐데도, 그저 그렇게만 이야기하는 팬들에게 피식 웃어주며, 엄지를 추켜세운 뒤, 천천히 뻥 뚫린 길을 따라, 펜웨이 파크로 입장했다.

아쉽게도 계획처럼 일이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최소한 팬들이 굳건하다는 건 확인했으니,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그래, 오늘도 잘 던져 보자고. 삼진도 팍팍 잡고. 실점도 안 하고.’

그렇게 조금은 후끈해진 마음으로 입성한 펜웨이 파크.

어제 봤던 경기장이지만 역시 오늘은 내가 등판할 거라서 그런지 느낌은 조금 달랐다.

“대니얼, 미리 와 계셨네요?”

“예, 조금 일찍 왔습니다. 아무래도 저한테도 기자들이 몰려들 것 같아서.”

“아, 하긴, 장난 아니게 몰렸던데, 걸렸으면 좀 힘들었겠네요.”

“Go는 괜찮으십니까? 많이 시달렸을 것 같은데.”

“든든한 지원군이 때마침 딱 와 줘서, 다행히 잘 뚫고 왔어요.”

대니얼은 먼저 도착해서 기다렸는데. 아마 평소보다 일찍 온 것 같네, 확실히 몰려든 기자들을 생각하면, 그 혼자서 뚫고 나가긴 힘들었을 거야. 나처럼 레이더스가 받쳐주는 것도 아니니, 현명하게 대처한 셈이지.

“오늘 컨디션은 어때요?”

“좋아요, 엄청. 특히 펜웨이 파크 도착한 순간부터 최고로 올라왔고요.”

“다행이네요, 오늘 같은 날 컨디션이 안 좋았다면 조금 그랬을 테니까요.”

“그렇겠죠, 워밍업 빡세게 합시다. 오늘 좀 날아다녀야 하니까.”

“그래야죠.”

그렇게 대니얼과 함께 라커룸에 도착했을 때, 그는 문득 한 가지를 건네줬다.

“아, 브라이언의 선물입니다. 펜웨이 파크 앞에서 만나, 전달받았습니다.”

“브라이언이요? 왜 직접 주지 않고···”

“같은 이유죠. 보는 눈이 너무 많으니까요. 저한테 맡기더군요. 원하시던 것, 맞죠?”

“···예, 맞네요.”

별건 아니다. 그냥 종이쪼가리지. 물론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핵폭탄이 될 수도 있지만 말이야.

이것 참, 별다른 연락이 없는 걸 보고 실망했더니, 서프라이즈 선물을 준비했었구만.

오늘은 놀라움의 연속이네.

뜻밖의 지원군도 도착했고, 뜻밖의 선물도 받았으니. 그것으로 모든 조건은 충족됐다.

남은 건 그저···

‘펜웨이 파크를 불태우는 것 뿐이지.’

X나게 잘하는 것. 이거 밖에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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