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스트라이크 아웃!”
시체에 난도질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미 넉다운 돼서 심판의 카운트까지 들어간 상대를 다시 강제로 세워서 두들기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지금 애스트로스를 때려잡는 내 기분이 딱 그랬다. 별다른 반항도 없고, 저항도 없고.
그냥 이미 죽어버린 시체에다 주먹질하는 것처럼 왠지 좀 공허하고 손맛이 나쁘지.
“스트라이크 아웃!”
물론 삼진 올라가는 걸 보면 또 괜히 기분이 짜릿해지지만.
이어진 6회, 그리고 마지막 7회에서 애스트로스는 차분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아주 차분하게 죽고 있지.
연속 이닝 무실점이 60이닝으로 올라서며, 공동이 아닌 신기록을 내주게 됐는데도 말이다.
그것에 분노하거나 좌절하거나 할 정도의 여유가 없다는 뜻이리라.
‘운 좋은 줄 알아.’
이렇게 말하면 애스트로스가 눈을 뒤집을 거야. 이미 개같이 털렸고, 신기록까지 내줬는데 뭐가 운이 좋은 거냐면서.
하지만 사실이잖아?
이 정도면 무난하게 털고 완봉까지 할 수도 있는데, 안 그러고 짧게 끝내주는 거니까. 그러니 감사히 여겨야지.
“아웃!”
이 정도로 끝내는걸.
마지막 타자 3번 율리 구리엘이 파울플라이로 물러나며, 7회 말이 끝났다.
‘61이닝.’
기존 기록에서 2이닝을 더 추가했구만. 61이닝이라, 웬만한 불펜 투수의 풀시즌 이닝 수준이네.
더욱더 놀라운 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는 거겠지.
‘축제는 한창이구만.’
5회 말이 끝난 직후부터 시작됐던 축제는 쭉 이어지고 있다. 오히려 절정에 이르렀지. 공동 1위가 아니라, 확고부동한 단독 1위니까 말이야.
내 기억이 맞다면, 신기록 달성 시 유니폼 60% 할인 한정판매 같은 이벤트도 준비됐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마 며칠 정도 지나면 온 오클랜드에 애슬레틱스 유니폼이 가득 채워질 듯싶었다.
미리 준비된 물량이 충분하다면 말이야.
그쯤 되면 단순히 애슬레틱스의 유니폼이 아니라, 오클랜드 시민들의 유니폼이 되겠지.
‘잘 간직했으면 좋겠네.’
깊이 바랐다.
그렇게 집어든 유니폼을 잠깐의 풍랑 속에 저버리질 않기를. 그러면 정말로 아쉬울 테니까.
내가? 아니, 팬들이. 얼마나 아깝겠어, 며칠만 버티면 될 것을, 그걸 못 견디고 돈 날린 건데. 거기다 상황 끝나고 나면 주변의 다른 팬들에게 배신자니 뭐니 욕까지 먹을 거고.
“더 안 던질 거지?”
“7이닝만 한다고 했잖아. 아마 더 하겠다고 하면 코치가 눈 뒤집을걸. 이 정도로 끝내야지.”
“수고했어, 오늘도. 그리고 너무 신경쓰지 말고,”
“내가 언제 그러기나 했어?”
“하긴, 남의 눈치 보는 녀석은 아니기는 하지.”
브루스는 슬쩍 다가와 공을 건네줬다. 59이닝, 60이닝 공에 이어서 61이닝짜리 공을.
앞서 건네받은 59이닝 타이기록구랑 신기록 기록구인 60이닝짜리는 구단에 기증하기로 미리 약속했으니, 이건 내가 가져도 되겠지만, 나는 마다했다.
“이건 너 가져.”
“진짜로? 이걸 내가? 그래도 돼?”
“남자가 쩨쩨하게 공 하나 가지면 쓰나. 못해도 한 바구니는 가져야지.”
“···거참 대단하십니다 그려. 그럼 준다는데 감사히 받아야지. 나중에 늙어서 돈 없을 때 팔면 딱이겠어. 아니지, 이렇게 하나씩 받을 때마다 모아서 네 박물관 열면 노후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그래, 참 대단한 아이디어네. 사업가 나셨어.”
그것을 끝으로 마운드에서 내려갈 때쯤, 노랫소리가 흐르기도 했다. 아직 경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내가 교체될 것 같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낀 거겠지. 그렇기에 축하하기 위해 저러는 걸 테고.
잠시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한동안은 보기 드문 풍경일 테니까.
7이닝 무실점 12탈삼진.
통산 500탈삼진을 넘겼고.
61이닝 연속 무실점을 달성하며, 신기록을 수립했다.
6회 말에 점수가 났었는데, 그걸 잘 지키면서 승리도 올라갔지.
폭풍을 맞이하기 전, 마지막 잔치에 어울리던 경기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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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에 시작한 경기였기 때문이었을까, 일찍 끝나, 아직 해가 쨍쨍할 때 막을 내린 경기와 달성된 이닝에. 분위기는 더욱더 뜨겁게 타올랐다.
경기가 끝나고 늦은 밤, 졸린 눈 비비며 곱씹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정신으로 환호할 수 있기 때문이겠지.
“엄청나네요, 분위기가.”
9을 애스트로스전이 끝난 뒤, 10일은 휴식일이었기에, 그토록 열광적인 오클랜드의 분위기를 더욱더 잘 느낄 수 있기도 했고.
“그렇겠죠, 워낙 대단한 기록이지 않습니까? 거기다, 작년부터 꾸준하게 언급됐기에 주목도가 남다르기도 하고요.”
대니얼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 역시 조금 놀랍기는 한 건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했다.
도시 전체에 행복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전체적으로 시민들이 굉장히 친절해졌지.
미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범죄도시라는 것이 믿기지가 않을 정도로.
‘내가 이 정도의 존재라는 뜻이겠지. 최소한 오클랜드에서는. 기록을 달성한 것만으로, 사람들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그것을 보니 조금 더 오묘했다. 이 모든 행복이 계속 이어지지 않을 테니까.
나로 인한 기쁨이 이토록 크다면, 충격도 마찬가지로 크지 않을까? 그것이 조금 걱정스럽기도 했고.
“짜증나네요.”
“짜증 정도라니 다행이네요.”
“그런가요?”
“그 이상의 감정이 들어도 이상하지 않죠. 가장 영광스러워야 할 순간에 억지로 끌어내려져서, 엄중한 심판대 위에 서야 하는 셈이니까요.”
왠지 모르게 툭 나온 말에 대니얼은 충분히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 그 말대로 나도 이런 분위기를 즐기고, 누리면서 행복해야 하는데. 정작 그러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검사 결과는 아직이죠?”
“예, 어쩔 수 없죠. 제법 시간이 걸리는 일이니까요.”
검사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사실 결과야 이미 알고 있으니 상관‘없고, 중요한 건 그 서류지.
그거라도 딱 들고 있었다면, 나 역시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마음이 편안했을 텐데 말이야.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아직 의혹 역시 본격적으로 불거지지는 않았다는 것 정도.
그러니 지금처럼 다들 순수하게 기뻐하거나, 행복할 수 있는 거고 말이야.
내 유니폼을 입은 아이들이 보였다. 다섯 명 정도의 무리였는데, 다섯 명 전부 다 내 유니폼이었지.
이거 봐, 거의 도시 공공재 수준이라니까. 진지하게 시민들 전부 다 한 장씩 가지고 있을 것 같은데···
그걸 보니 조금 뿌듯하면서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다행인가?’
그나마 다행이라고.
휴식일이 끝나면, 곧바로 원정 일정이 이어진다. 무려 원정 10연전이지.
뉴욕 양키스, 보스턴 레드삭스, 토론토 블루제이스 순으로 동부를 쫙 훑는 건데.
대부분 선수들은 피곤한 원정 일정에 벌써부터 토악질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게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었다.
많이 실망하고 급격하게 다운될 오클랜드의 모습을 보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솔직히 기분이 이상할 것 같거든. 오클랜드, 이 도시가 축 늘어져 있는 모습을 본다면.
적어도 내가 데뷔하고, 여기 도착한 이후로, 쭉 활기찼던 곳이니까.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 모든 일이 마무리 됐으면 좋겠네요.”
“그래야죠.”
행복한 휴식일이 지나갔다.
뉴욕으로 떠나갔을 때도 조용했고, 도착했을 때도 조용했지. 마치 거대한 쓰나미가 몰려들기 전의 잔잔한 바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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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은 날, 별로 안 좋아한다.
사실 오클랜드를 제외하면, 날 좋아하는 도시 자체가 별로 없으니, 뉴욕‘도’ 나를 안 좋아한다고 해야 맞겠지.
“우우우!”
얌전히 벤치에 앉아 있는데도, 시리즈 동안 내가 화면에 잡힐 때마다 은근한 야유를 보낼 정도지.
이유야 뭐, 셋 정도지.
하나는 양키스에게 노히터 한 것. 브라이언에 의하면, 그날 이후로 뉴욕의 내 팬이 많이 늘었지만, 마찬가지로 헤이터도 많이 늘었다고 한다.
두 번째는 메츠에게 안타를 치고, 슈퍼소닉을 해버린 것.
마찬가지로 팬도 늘고, 메츠 팬들의 증오도 받게 됐지.
노히터에 비하면 고작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만큼 많이 띠꺼웠나봐, 그날 내 모습이.
마지막 세 번째는 다시 양키스 문제로, 그들이 그토록 사랑하는 판사님이 나 때문에 훅 밀린 것 때문이다.
애런 저지 말이야.
‘신인왕에 MVP 페이스이기는 했지. 내가 아니었다면.’
그 영광이 나로 인해 밀려난 셈이니, 왠지 모르게 조금 고깝게 느껴지는 거지.
어쩔 수 있나. 내가 사랑하는 선수를 누군가가 밀어낸다면 화가 나는 것이 팬심이다. 내 입장에선 억울하지만 말이야.
신인왕은 그렇다 쳐도, MVP는 호세 알투베한테 밀려서 3위인데, 그것까지 원망하는 건, 좀 이상한 거 아니냐?
“나이스샷~ 나이스샷!”
지난 경기에서 게릿 콜에게 막혔던 타선은, 양키스와의 대결에선 다시금 화끈한 한방을 보여줬다.
1차전에서 12점을 몰아치며 양키스를 KO 시켰지. 2차전도 9대7의 난타전 끝에 승리를 가져왔고.
그렇게 잔잔한 시리즈가 이어지는가 싶었을 때, 드디어 기다렸던, 그냥 이대로 흘러가버리지는 않을까, 기대했던 소식이 터져 나왔다.
“이제 시작이네.”
조금 늦은 아침.
호텔방에서 깨어나 휴대폰을 확인하자 부재중 전화가 엄청나게 밀려 있었다.
브라이언도 많고, 가족들도 있고, 주변 지인도 엄청나게 많았지. 내가 등판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연락이 몰렸다는 건 딱 하나뿐이지.
<도핑으로 얼룩진 최고의 기록! 소문 속의 로이더 슈퍼스타, 그 정체는 Go?>
<트레이너들의 타락! Go의 발전은 ‘약물’과 ‘디자이너’?>
<믿을 수 없는 수치, 마이너->메이저, Go의 발전은 절대로 상식적이지 않다!>
<또다시 시작된 약물의 시대! 로저 클레멘스에 이어, 다시금 약물로 무너지는 역대 최고의 투수?!>
엄청나구만. 때가 됐는데도 잠잠하다 싶더라니, 아주 원기옥을 모으고 계셨어.
잠시 침대에 걸터앉아, 휴대폰 스크롤을 쭉쭉 내리며 대충 기사들을 확인했다.
아마도 구단과 에이전시에서도 확인 중이겠지. 정확하게 말하면 살생부를 만들고 있겠지. 대대적인 법적 조치를 준비 중이었으니까.
‘확실히 메이저한 곳들은 그렇게 많지는 않네.’
내가 이름들 들어볼 정도의 언론사에서는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고 있었다.
아마도 브라이언이 이야기했던 ‘포섭된 아군’들이리라. 혹은 의혹에 불과하니, 일단은 분위기를 살피는 것일 수도 있고.
‘로빈슨 카노도 터졌고.’
이른 새벽까지만 하더라도 내 기사만 가득했는데, 아침부터는 로빈슨 카노의 이름도 꽤나 언급됐다.
아니, 오히려 나보다 더 많이 언급되고 있지. 이것 역시 미리 준비된 내용이다.
내 의혹이 터지면, 일단 로빈슨 카노부터 앞세워서, 나를 향한 시선을 분산시키자는 거였지.
그대로 쭉 기사나, 반응들을 살피니 왠지 조금 머리가 지끈거리기도 했지만, 이내 금방 떨치고 일어섰다.
“브라이언.”
-네, Go, 일어나셨습니까?
“상황은 확인했어요. 이 정도면 예상했던 것보다는 덜하네요.”
-예, 하지만 점점 더 커질 겁니다. 지금 당장은 적당히 눈치보고 있는 곳들이 있으니까요. 더욱더 주목이 끌리면, 그때부터 가담하겠죠.
“도핑 검사는 아직이죠?”
-연락하니, 사흘 안에는 무조건 결과가 나올 거라고 합니다.
“사흘··· 사흘이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짧은 것처럼 보여도, 그 사흘 사이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새로운 의혹이 나올 수도 있으니, 어쩌면 조금 긴 시간이지.
“오클랜드 쪽은 어때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니, 분위기가 안 좋을 것 같은데.”
-···예, 별로 좋지는 않습니다. 전날까지만 하더라도 신기록에 환호했지만, 지금은 혼란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겠죠, 열심히 찬양하고 기뻐했던 히어로가 하루 아침만에 약쟁이가 됐으니···.”
-한동안은 미디어와의 접촉은 자제하시고, 인터넷이나, 소셜 미디어 역시 멀리하십시오. 볼 게 못 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멘탈이 강철이라서, 이 정도로는 기스, 아니, 흠집도 안 나니까.”
-Go, 스스로를 과신하지 마십시오. 정신의 상처 역시 계속 누적되다 보면, 흉터로 남는 법입니다.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하더라도.
브라이언은 꽤나 단호했다.
내가 상처받는 걸 절대로 허용하지 않겠다는 거겠지.
틀린 말은 아니다.
사람의 연골이 쓰면 쓸수록 계속 닳아버리는 것처럼, 정신도 마찬가지거든.
저마다 타고난 강도는 다르지만, 어쨌든 외부적인 자극이 계속 될수록 점점 닳아빠지거나, 깨지기 시작하지.
내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해도,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부상처럼 한순간 훅 넘어가기도 하고.
“웬만하면 외부 반응 같은 건 보지도 않을게요.”
-예, 그러시겠다니 안심이 되는군요. 일단 구단과 저희 측에서 정정 보도를 내고 있습니다. 협조를 구했던 여러 언론사들 역시 나서고 있고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야, 언제나 브라이언만 믿는 거죠.”
그것으로 브라이언과의 통화는 종료됐고, 나는 잠시 그대로 앉아, 마른세수했다. 조금 얼굴이 뜨거웠거든.
‘그래, 이제 시작이지.’
브라이언의 말처럼, 내가 아무리 강철 멘탈이라고 해도, 역시 조금 흔들리기는 했나봐.
그렇게 한 차례 얼굴을 훑고 나니, 조금은 몽롱했던 잠기운이 이젠 완전히 달아났고, 제정신이 들었다.
‘한번 꿋꿋하게 버텨보자고. 때리는 놈이 먼저 지칠 정도로.’
사흘이라고 했던가?
그 안에 도핑 검사 결과가 나온다고 했는데, 그때까지 잘 버텨보자고.
그걸 쥔 순간부터는, 우리 턴이 시작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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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샤워를 마친 뒤 식당으로 내려가자, 먼저 내려와 있던 동료들이 반겨줬다.
굉장히 걱정과 근심이 가득해 보이는 얼굴로. 누가 보면 자기들 일인 줄 알겠네.
“Suck, 괜찮아?”
“개같은 놈들이, 아주 제대로 작정했던데. 내가 이래서 언론을 안 좋아한다니까!”
“네가 무고하다는 건 우리가 다 아니까, 그냥 무시해버려.”
“대니얼 씨가 디자이너? 니가 로이더? 웃기지도 않구만.”
“그런 똥이나 싸는 놈들은 직접 훈련장 와서 네가 흘리는 만큼 땀 좀 흘려야 하는 건데···”
다들 걱정이 많을 수밖에.
우승을 꿈꾸는 순간에 가장 중요한 팀의 에이스가 흔들릴지도 모르니, 염려가 없을 수가 있나.
물론 그런 이유가 아니라, 순수하게 동료의 고통에 공감해주는 것이 가장 크겠지만 말이야.
“잠을 설치진 않았어? 오늘 그냥 호텔에 있는 게 어때? 괜히 무리하는 것보다는···”
“그래, 이건 늙은 크리스 말이 맞아. 그냥 방에서 푹 쉬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몇몇 베테랑들은 휴식을 권하기도 했다. 오늘은 그냥 덕아웃에도 들어오지 말고, 푹 쉬라는 거지.
아마도 코칭 스태프들 역시 은근히 그러길 바라겠지만, 나는 당연히 고개를 저었다.
“뭐하러 도망쳐요?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오히려 이런 때에 얼굴 안 비추면 더 난리 부릴 걸요?”
“그렇긴 하겠지만··· 괜찮겠어?”
“당연히 안 괜찮죠.”
“응?”
“X나게 짜증나는데, 이런 때에 야구에서 멀어지기까지하면 더 X같을 것 같으니, 그냥 평소처럼 지내려고요.”
그렇게 말하니, 다들 내 의사를 존중하는 건지, 더욱더 권하지는 않았다. 다만 걱정하는 눈빛은 여전했지만.
식사가 마친 뒤, 다시 양키 스타디움으로 향했을 때, 공기가 한층 더 달라진 것이 느껴졌다.
그래,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단순히 미운 놈이었다면, 오늘은 그보다 한 발자국 더 나아갔지.
“우우우우우우우!”
“치터! 치터!”
“저지의 MVP랑 신인왕을 돌려줘! 이 약쟁이야!”
“그럼 그렇지! 약빨로 노히터 하니까 좋냐?”
뭐, 충분히 미워할 만한 이유가 생겼잖아? 양키스 팬들의 입맛에 딱 맞기는 하겠지.
그들이 노히터를 당한 것도 약빨이고, 애런 저지가 나한테 밀린 것도 실력이나 성적이 아니라 약빨이라고 생각하면, 훨씬 마음이 편할 테니까.
“지랄하고 자빠졌네.”
“양키스 출신 약쟁이들이 몇 명인데···”
“저런 소리 할 거면, 앤디 페티트 영구결번부터 빼고 말해야지.”
“양키스 놈들 자기들 마음대로인 게 한 두 번이야?”
“아마 나중에 진실이 나오면 다들 쪽팔려서 죽을 걸?”
물론 양키스가 저러면 좀 웃기기는 해. 약빨로 수해 본 팀 중 하나가 양키스인데, 남의 약을 가지고 욕하다니.
A로드 같은 사람들이야, 양키스에서도 욕을 먹었으니 그렇다고 쳐도, 당장 코어4로 불렸던 앤디 페티트는 금지 약물 복용이 적발됐는데도 영구결번이잖아?
그런 주제에 저렇게 반응하니, 그저 우스울 수밖에.
‘애초에 난 아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막막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양키스만은 아닐 거다. 미국 전역에서 나를 저렇게 매도하고 있겠지.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이야기가 확실하게 나오고 있을 테고.
다들 열심히 나를 씹고 듣고 맛보고 즐기고 있을 텐데. 그런 사람들에게 내가 도핑 검사지를 내보이고, 깨끗하다고 주장해도, 그걸 믿기는 할까?
‘아니겠지.’
아니, 오히려 더 격렬하게 주장하고 나설 거다. 잘못된 검사라느니, 조작이라느니 하면서.
사람은 참 이상한 동물이야.
스스로 잘못된 주장을 했을 때, 본인 혼자만 그것을 알고 있다면, 금방 그걸 바로잡고, 진실로 나아가지만.
누군가 그것을 지적하고 나서면, 오히려 더욱더 격렬하게 잘못된 주장을 고수하려고 들거든. 고집불통이 되어버린 것처럼.
내가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걸, 남들 앞에서 인정하는 것이 쪽팔리니까. 그 쪽팔림이 싫어서 표독스럽게 주장을 유지하는 거지. 억지를 써가면서.
최소한 내가 지켜본 사람들은 대부분은 그랬다. 아마 지금 양키스 팬들도, 그리고 그 외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거고.
그렇기에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더라도, 그게 진실이라는 걸 알면서도 믿으려고 하지 않을 거다.
‘그러니 확실한 충격이 필요하겠지.’
그림은 이미 그려뒀다.
뒤통수를 때리다 못해, 아예 두개골을 함몰시켜버릴 정도의 충격을 줄 그림을.
시기만 잘 맞는다면, 아주 멋지게 되기는 할 텐데 말이야.
“호오오오오오오옴~ 러어어어언!”
“All Rise!”
3차전은 패배했다.
나에 대한 의혹이 터지면서, 좋았던 팀 분위기가 한풀 꺾인데다가.
반대로 양키스는 이상하게 기세가 올랐지. 특히 그토록 양키스 팬들이 외쳤던 애런 저지도 홈런을 날렸고.
물론 스탠튼도 홈런을 날렸지만, 양키스 홈팬들은 특히나 저지의 홈런에 환호했다.
“Justice! Justice!”
아니, 애런 저지에게 환호하고 있었지만, 은근히 그 눈동자는 내게 향해 있었다.
나에게도 저런 정의가 구현되길 바란다는 것처럼.
물론···
‘웃기고 잇네.’
어림도 없다.
내가 그린 그림 속에 이런 장면은 없거든.
야유가 빗발치는 원정이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정신은 확실하게 잡혔다. 이대로 흔들리거나 주저앉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대로 잡아먹히겠지.
그나저나 스탠튼 올해도 힘이 미쳤네. 저 고릴라 새끼를 아슬아슬하게 안 만나서 정말 다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