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속 빼고 다 가짐-227화 (227/316)

227화

‘500탈삼진, 이쪽도 감회가 남다르기는 하네.’

진지하게 기록 수준으로 여겨지기에는 아직 한참 부족한 숫자이긴 하지.

보통 통산 탈삼진이 의미를 가지기 시작하는 건, 못해도 천을 넘겼을 때부터니까.

‘하지만 이정표 정도는 되겠지.’

흔히 스포츠에서 마일스톤이라고들 표현한다. 뭐, 대단한 업적을 세웠거나, 통산 스탯이 일정 수준을 찍었다거나 하는 거 말이야.

500정도면 마일스톤 수준은 아니다, 다만 그 마일스톤으로 나아가는 이정표 정도는 되겠지.

이런 걸 하나하나 박아놓다 보면, 결국 높은 산 깊은 골 적막한 산하를 한눈에 내려 볼 수 있는 봉우리 위에 도달하게 되는 거고.

“축하한다, 500삼진··· 내가 Suck 너보다 1년 먼저 데뷔했는데, 네가 먼저 해버렸네. 난 아직도 까마득한데.”

“대단하네, 난 네 시즌 걸렸는데, 두 시즌도 안 돼서 하다니···”

“지금 페이스 유지해서 앞으로 한 20년쯤 더 뛰면 놀란 라이언도 넘겠는데?”

동료들은 가볍게 축하해줬다.

특히 투수들은 더욱더 와닿을 수밖에 없기에 부러워하거나, 혀를 내둘렀고 말이다.

션 마네아는 16년에 데뷔했으니, 나보다 1년 선배인 셈인데, 정작 내가 훨씬 먼저 500탈삼진을 찍어버린 것에 참을 수 없는 현타감을 느끼는 것 같네.

2회 초가 끝난 뒤.

그렇게 한바탕 축하 잔치가 열렸지만, 다들 의도적으로 이닝은 언급하지 않았다.

500삼진이야 사실 시기가 어쨌든, 적당한 커리어만 보낸다면 무조건 찍을 수 있는 수준이지만, 무실점 이닝은 조금 다르잖아?

이쪽이 훨씬 더 민감할 수밖에 없지. 그렇기에 전광판에 대놓고 떠올랐는데도, 다들 의식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무려 월터 존슨을 넘어선 건데, 다들 인심이 너무 박하구만.’

이제 56이닝.

월터 존슨을 넘어섰다.

위에는 돈 드라이스데일과 오렐 허샤이저, 다저스 듀오지.

각각 58이닝과 59이닝이니.

이대로 2이닝 더 잘 막으면 공동 2위고, 3이닝은 공동 1위, 4이닝은 신기록이다.

그야말로 이닝 하나하나에 기록이 걸려있는 셈인데, 동료들로서도 입을 열 수가 없겠지.

공연히 부담 줬다가 내가 기록을 망치기라도 하면, 그것이야말로 대참사 중의 대참사니까.

‘관중들도 갑자기 입을 싹 닫아버렸고.’

그리고 그건 팬들도 같은 생각인 건지, 평범한 관중들은 물론, 심지어 오늘 바글바글 몰린 레이더스조차 500탈삼진만 시원스럽게 축하했을 뿐, 그 뒤로는 입을 꾹 닫아버렸다.

아니, 어쩌면 레이더스가 가장 조용할지도 모른다. 조직력이 워낙 뛰어난 사람들이라, 소란을 부릴 때도 대대적으로 함께하지만, 점잖을 떨 때도 한 몸처럼 떠니까.

난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 그렇게 힘든 일이라고, 대단한 거라고 다들 긴장이 빡 들어갔나 몰라.

정작 기록 도전 중인 당사자인 나는 이렇게나 멀쩡한데.

“Suck 너 손을 너무 떠는-”

“쉿, 쟤도 아닌 척해도 긴장은 되겠지.”

“아, 하긴, 얘도 사람이기는 하니까.”

진짜야. 그냥 빡세게 공을 던져서 약간의 피로감이 든 것뿐이다. 고작 2이닝밖에 던지지 않았고, 푹 쉰 덕분에 체력도 쌩쌩하지만, 아무튼 그렇다.

절대로 쫄린다거나, 긴장했다거나 하는 이유로 이 에너지바의 포장을 벗기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이거 X발 왜 이렇게 안 뜯겨.

겉 포장지를 뭐로 만든 거야?

“자, 그걸 못 뜯고 있냐?”

“아, 땡큐.”

정말 감사하게도, 크리스 데이비스가 대신 뜯어줘서, 원하던 것을 쟁취했다.

스폰으로 받은 에너지바를 으적으적 씹었지만, 사실 맛은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 외의 다른 감각도 왠지 조금 둔했고.

“···아웃-”

“Suck한테 미안하지도-”

“좀 쳐라 이 쓰레기-”

청각도 희미해진 건지, 한창 공격이 진행 중인 그라운드에서 흘러나온 정보들도 뇌 속으로 잘 전달되지 않았다.

이것 참, 애스트로스 쫄보라고 비웃어 놓고, 정작 나도 이런 꼴이 되어버리다니.

조금 쪽팔리는구만.

“아웃!”

“이닝 끝났네, 나가자.”

“심호흡 좀 하지 그러냐. 너 지금 얼굴이 조금 하얗게 질렸는데···”

“아니, 지금이 딱 좋아. 이대로 유지하자.”

하지만 괜찮다.

그런 모든 감각들이 둔해진 대신. 오직 한 곳으로 몰빵되어 있었으니까.

“스트라이크!”

피칭 감각.

시각과 청각, 그리고 미각, 마지막 후각까지, 모든 것들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지만.

그 대신 촉각, 투구 감각이 절정에 이르렀으니, 그거면 된 거지. 오늘, 지금 이 순간에서 나한테 필요한 건 오직 이거 하나뿐이니까.

맥스 스태시.

애스트로스의 포수이자, 7번타자는 몸쪽으로 바깥쪽으로 쭉 박힌 투심을 가만히 지켜봤다.

아마 공을 고르거나, 확인한 건 아닐 거다. 그런 것 치고는 많이 움츠러들었으니까.

특별히 바보 같은 모습은 아니지, 사실 몇몇을 제외하면 오늘 애스트로스 타자들은 대부분 저런 모습이니까.

“스트라이크!”

그렇기에 편한 거고.

그래, 쫄릴 이유는 없지.

내 투구감각이 최고조로 이르렀다면, 반대로 애스트로스의 타격감은 내 앞에서 곤두박질치고 있다.

그런데 뭐하러 긴장해?

그냥 가볍게 하나씩 하나씩, 차분하게 잡으면 되는 거지.

“볼.”

3구로 살짝 낮게 깔아서 서클을 던졌지만, 이번에도 타자는 배트를 내지 않았다.

헛스윙을 유도하려고 했더니, 생각보다 더 쫄았나 보네.

“스트라이크 아웃!”

이런 타자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하이 패스트볼이지. 잔뜩 겁먹고 있을 때, 높게 공 하나 날아오면 엄마 무서워라 하면서 배트를 휘두르거든.

포심 패스트볼.

어깨보다 살짝 높아 보이는 코스에 속절없이 배트가 나왔다. 헛스윙 삼진아웃.

오늘 경기 다섯 번째 삼진인데. 사실 500개를 채운 순간부터 오늘은 삼진이 조금 중요도에서 밀려나지.

“아웃!”

8번타자 데렉 피셔는 아주 착하게 굴어줬다. 초구 만에 포수플라이로 잡혀줬으니까.

긴장감을 떨쳐내려고, 초구부터 과감하게 배트를 휘두른 것 같은데, 어림도 없지.

옛날과 다르게, 내 포심은 이젠 그런 눈먼 스윙에 정타가 나오는 공이 아니거든.

“파울!”

다음 타자는 제이크 마리스닉. 올해 아주 참담한 시즌 초반을 보내는 타자다.

백업 수준이기는 해도, 작년 성적이 제법 괜찮았기에 올해는 꽤나 기회를 받았는데도, 타율은 1할에 OPS는 5할에도 못 미치지.

그런 처참한 타격감을 설명하듯, 그는 의외로 초구를 잘 강타해놓고도 완전히 배트가 밀렸다.

그에 대한 충격인지 살짝 눈동자가 떨리기도 했고 말이야. 그치, 이러면 타자 입장에서도 기가 죽어버리지.

작정하고 휘둘렀고, 제대로 친 것 같은데도 배트가 밀리면, 그때부터는 진짜 막막해지니까.

내가 전문 타자가 아니라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아마도 그럴 거다.

“스트라이크!”

뭐, 지금 애스트로스 분위기에 겁 좀 먹은 게 큰 대수인가 싶지만 말이야.

투 스트라이크.

제대로 몰아넣었고, 타자도 완전히 휘청거리고 있으니, 더 볼 것도 없지. 이런 타이밍은 그저···

“스트라이크 아웃!”

넙죽 받아먹으면 돼.

투수의 실투를 대하는 타자의 자세와 비슷하지. 타자도 투수 실투만 잘 받아쳐도 되잖아?

투수도 마찬가지야. 타자가 밸런스 잃었을 때만 잘 포착해서 쑤셔 넣으면 반은 먹고 들어가지.

너클 커브에 망가진 스윙이 나왔다. 대충 아무거나 던졌어도 삼진이 됐을 것 같은데, 제법 잘 채인 너클 커브가 들어갔으니 ,결과는 당연했다.

삼구삼진.

다시 2삼진이라.

이제는 삼진 별로 안 중요하다고 해놓고 정작 멋지게 잘 잡았네.

다시금 이닝을 잘 마쳤는데도 오감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전히 멍하고 뿌옇고, 잘 안 들리고 그렇지.

뭐, 앞서 말했듯이, 투구 감각만 좋다면야 다 상관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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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그리고 2개월.’ Go가 500탈삼진까지 필요했던 시간은 고작 이 정도?>

<‘불독’ 오렐 허샤이저를 향해 계속해서 진격 중인 Go!>

모두의 눈동자가 집중됐다.

적기 중의 적기였으니까.

몰락 중인 애스트로스. 홈에서 팬들 앞에서 열린 경기. 그리고 정점을 넘어, 절정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고유석.

그 삼박자가 완벽하게 어우러졌기에, 모두가 오늘이 드디어 작년부터 종종 언급됐던 그 기록마저 갈아치워질 순간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스트라이크 아웃!

그리고 다시 올라간 이닝.

3회 말이 끝나고, 57까지 올라간 숫자. 그것을 지켜보며, 몇몇은 또 다른 기대를 하기도 했다.

[#A’s]

[혹시··· 올해 첫 ‘그거’하는 건 아니겠지?]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 원래 Suck이 기록 걸린 경기에서 유독 잘하니까.

└작년에 마지막 등판에서 최다 탈삼진도 잡고, 그거까지 했던 걸 기억해보면···

└자, 이제 다들 닥치렴. 괜히 언급하지 말라고 X새끼들아.

└직접적인 단어도 안 꺼냈는데 왜 그래?

특별히 폼이 좋아 보이기도 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약간의 등판 일정 조정 덕분에 푹 쉰 덕분이겠지.

기록을 하나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챙겨가는 것으로 유명한 고유석이었기에.

몇몇 팬들은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었지만.

└아니, 굳이 언급해서 좋을 게 없다니까?

└내가 뭐, 퍼펙트를 직접적으로 이야기한 것도 아닌데, 왜들 그렇게 호들갑이야?

-쳤습니다! 조지 스프링어! 1루수를 넘기면서 안타! 아주 기술적인 타격이었습니다.

-아하, 오늘도 3이닝 이후에나 첫 안타가 나오는 군요.

-그만큼 경기 초반에 압도적인 선수라는 뜻이겠죠.

└개X발 X같은 Cunt새끼야!

└넌 X발 앞으로 애슬레틱스나 Go의 팬이라고 하지 마라. 도움이 안 되는 새끼가 누굴 응원해?

└내가 X발 IP추적한다. 누가 뒤통수 때리면 나인 줄 알아라.

언제나 그렇듯 설레발은 그리 좋은 행동이 아니었다.

가까스로 조지 스프링어가 쳐낸 안타에 퍼펙트는 깨졌고, 개막 이후 쭉 좋았던 퍼포먼스에 매번 기대했던 팬들은 이번에도 시무룩해지거나, 저주를 퍼부었지만.

그 안타 하나가 퍼펙트는 깼을지 모르나, 콜리시엄에 드리워진 분위기마저 깨트리지는 못했다.

-호세 알투베, 쳤습니다! 마커스 시미언! 그대로 잡아서 2루 송구 아웃! 1루에서도~~~ 아웃! 더블 플레이!

-모처럼의 기회였는데, 다시 그라운드가 비어버리네요.

-예, 휴스턴에게 정말이지 소중한 찬스였는데, Go가 영리하게 틀어막았습니다. Go가 지금까지 호세 알투베 선수에게 투심은 잘 던지지 않았었는데, 이번에 순간적으로 찔러 넣으면서 제대로 유도했어요.

호세 알투베의 병살타.

그것을 본 순간 애스트로스 팬들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가장 믿고 있었던 선수가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찬스를 뒤엎어버리는 모습에 이젠 그들 역시 충분히 그림이 그려졌으니까.

휴스턴 곳곳에서 수많은 티비가 암전됐다. 휴스턴 외에도 애스트로스의 유니폼이 있는 집에선 거칠게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누르거나, 채널을 돌렸고 말이다.

이제 겨우 4회에 접어든 만큼, 조금은 성급한 행동일 수도 있었지만.

-4구, 율리 구리엘, 헛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서클 체인지업인데, 역시 대단하네요. 리그 최고의 마구로 꼽히는 공 답습니다.

-예! 정말이지 일품의 서클 체인지업으로 헛스윙을 유도하면서, 이번 경기 첫 피안타에도 이닝을 또 한번! 또다시 무실점으로 마치면서! 이제 58이닝 연속 무실점! Go가! 돈 드라이스데일과! 어깨를 나란히 합니다!

이번에는 현명한 행동이었다.

율리 구리엘의 헛스윙.

그 순간 전광판에는 다시금 글자가 떠올랐고, 중계 카메라 역시 당당하게 잡아줬다.

중계방송 화면에는 58이닝 연속 무실점이라는 글자가 당연하다는 듯이 떠올랐고 말이다.

[#A’s]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이제 1이닝만 더하면 타이기록이지? 맞지?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니지? x발 Suck이 드디어 해버리다니! 난 사실 작년에 할 줄 알았는데, X같은 트라웃 새끼 때문에 1년이 밀렸네. 오늘은 무조건 할 거야. 확실해.]

└맞으니까, 진정해라. 사실 나도 다리 덜덜 떨면서 보고 있지만.

└아니, 2이닝을 더해야지! Suck은 공동 1위로 만족하는 놈이 아니야!

└그야 당연하지, 최초 혹은 최고. 무조건 둘 중 하나여야 Suck이지!

└20K도 타이기록 아니야? 그럼 Suck이 아닌 건가?

└닥쳐, 그거야 말로 진짜 Suck이니까. Suck은 삼진을 잡아서 You Suck을 유도해야 Suck이지.

이루 말할 수 없는 흥분이 태풍처럼 휩쓸었다. 단순히 애슬레틱스나 애스트로스 두 팀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목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토록 염원했던, 혹은 제발 중간에 끊어지기를 바랐던 기록이 이젠 문턱에 도달했으니까.

####

안타 하나를 맞기는 했지만, 병살타로 잡은 덕분에 5회 말은 다시 4번부터 시작한다.

편하네, 타순이 쭉 이어져서.

‘차라리 마음이 편하기도 하고.’

오늘 어차피 길게 던질 생각이 아니었는데, 만약 퍼펙트가 계속 이어졌다면 조금 그림이 꼬였을 테니까.

물론 진짜로 퍼펙트게임이 가능했다면 엎드려서 절했겠지.

‘알렉스 브레그먼.’

다시 4번타자, 알렉스 브레그먼. 마운드에 올라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도 다시금 배터박스로 들어왔다.

표정이 기이하구만.

허탈해 보이기도 하고, 약간 화도 난 것 같고, 믿기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아주 복합적이야.

원래 사람이 복잡한 인간이기도 하지만, 특히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 애스트로스 입장에선 저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겠지.

‘이젠 별로 어색해 보이지는 않네.’

작년만 하더라도 나를 만날 때마다 알렉스 브레그먼은 조금 어색한 표정을 짓고는 했다.

마이너에서 마지막에 만났을 땐 내가 잘 조지기는 했지만, 어쨌든 쟤가 기억하던 모습과 메이저에서의 내 모습이 너무 많이 달랐으니까.

허나 이제는 그런 어색함은 잘 느껴지지 않았다. 녀석의 머릿속에서 마이너 시절 비루했던 모습보단, 지금의 모습이 더욱더 커져 버렸다는 뜻이겠지.

물론 나도 마찬가지고.

더블A에서 투수들을 두들겨 패며, 폭군처럼 군림했던 알렉스 브레그먼 보다는···.

“스트라이크!”

지금의 그냥저냥 적당히 주의하면서도 크기 두렵지는 않은, 마음 먹고 던지면 충분히 잡을 수 있는 타자, 알렉스 브레그먼이 훨씬 더 익숙하지.

그때랑 많이들 달라진 셈이지만, 유일하게 달라지지 않은 서클 체인지업 V1에 그는 다시금 헛스윙했다.

지난 타석에서도 쉽게 잡혔지만, 이번엔 조금 더 조바심이 느껴졌다.

고작 세 타석 남았다 이거지.

휴스턴이 기록의 제물이 되기까지 고작 세 타석이 남았으니, 악다구니를 쓰고 있는 건데.

“볼.”

공연히 저런 벌집을 쑤실 필요는 없다. 살살 돌려서 깎다 보면 알아서 가시가 벗겨지는 법이니까.

2구는 볼. 조금 멀게 뺀 코스에 그는 배트가 움찔거리기는 했지만 가까스로 참아냈다.

“볼.”

그다음도 볼 이번에도 잘 참는군. 판단력까지 완전히 흐려지지는 않았나 보구만.

“스트라이크!”

하지만 3구째, 조금 들어간 듯한 코스에 곧바로 배트가 나왔으나, 이번엔 서클 체인지업이었다. V2지.

역회전으로 휙 피하는 공을 타자는 그저 야속하게 지켜보며 투 스트라이크가 올라갔다.

“스트라이크 아웃!”

그리고 마지막 5구째.

이번에도 바깥쪽, 한없이 고민하던 타자는, 내가 풀카운트까지 가지 않을 거라고 믿은 건지, 슬라이더나 너클 커브 같은 것을 예측하고 배트를 냈지만, 그냥 패스트볼이었다.

헛스윙 삼진아웃. 돈 드라이스데일은 뒤로 물러났다. 이제 단독 2위지.

“아웃!”

5번타자 마윈 곤잘레스.

그도 4구까지 승부를 끌며, 제법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5구째 슬라이더를 빗맞히며 내야땅볼로 물러났다.

이제 58.2이닝.

1위까지 하나 남았구만.

숨소리조차 하나둘 씩 사라질 만큼 조용한 콜리시엄에서, 이번 이닝, 세 번째로 타석에 올라온 타자는 6번타자 조시 레딕.

트레이드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애슬레틱스에서 프랜차이즈급 선수로서 사랑받던 사람이지.

하지만 그런 좋은 추억과는 별개로, 몇몇 팬들은 그와 더불어 리치 힐을 떠올릴 때면 짐짓 몸을 부르르 떨고는 했다.

16년에 그 둘이 트레이드 매물로 나왔을 때, 나도 일종의 덤처럼 같이 언급됐었잖아?

그때 만약 내가 다저스로 같이 넘어갔다면 끔찍했을 거라는 거지. 최악의 악몽일 테고.

다저스나 그때 언급됐던 다른 구단들에겐 두고두고 아쉬운 찬스겠지.

뭐, 결국 그 둘만 나가고, 나는 그 대신 로스터나 시범경기를 보장받았지만 말이야.

어찌보면 리그 역사를 바꿀 수도 있었던 그 스노우볼은.

“스트라이크!”

어느덧 여기까지 굴러왔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더블A에서 그냥저냥 플루크 시즌 좀 찍는 것 같았던 투수가 이렇게 될 줄.

아무도 몰랐겠지. 솔직히 나도 몰랐는데 누가 알았겠어?

초구는 포심이었다.

오늘 포심이 좀 잘 받네. 89마일, 최고구속도 잘 나오고.

‘차분하고 싶어도, 나도 모르게 힘이 실린다는 거겠지.’

손이 덜덜 떨리거나, 감각이 둔해지는 것들만 봐도 나 역시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는 긴장스러울 수밖에.

“스트라이크!”

그런 것 치곤 공이 정말 좋지만 말이야. 2구는 쓰리핑거 체인지업. 순간적으로 느릿한 공에 조시 레딕이 타이밍을 잃었다.

인터벌이 지금 빨라져 있는데, 릴리스 포인트를 바꿔서 타이밍을 더 요상하게 꼬기도 했으니, 놀라운 일은 아니지.

투 스트라이크까지 몰리자, 조금 장난스러우기로 유명한 조시 레딕은 사색이 됐다.

“타임!”

살짝 타임을 요청하며, 황급히 다시금 타격감과 밸런스를 잡으려고 했으나. 그것은 그저-

“스윙!”

몸쪽으로 낮게, 내리꽂힌 공.

그도 최대한 몸을 비틀며 스윙을 가져갔지만, 마지막 순간 더욱더 떨어지며, 바닥을 스치는 서클 체인지업에 그의 스윙은 공허하게 허공을 갈랐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스윙.

공도 낮게 떨어졌을 뿐, 바닥을 긁거나 하지 않고 포수글러브로 쏙 들어갔으니···

“스트~~~라잌 아웃!”

삼진아웃이지.

주심의 화끈한 목소리가 적막했던 콜리시엄을 울렸다. 요란스러운 제스처도 눈을 사로잡았고.

막혔던 귀가 뚫렸다.

콜리시엄 특유의 왠지 모르게 낡은 냄새도 다시금 콧구멍 안으로 쑥 밀려들어왔고.

아마 이번에 에너지바를 먹는다면, 아까 전과 달리 달달한 맛이 입안에 감돌기도 하겠지.

훤해진 눈앞.

파도처럼 일어나는 관중들이 두 눈동자에 가득 박힌다.

“Yeeeeeeeeeeeeeeeah!”

“Suuuuuck Yeah!”

“You Suck! You Suck!”

다시 청각을 되찾았더니, 고막이 터지게 생겼군.

어마어마한 함성도 함성이지만, 등을 돌리지 않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마 등 뒤로, 전광판 너머에서 폭죽도 터지고 있는 것 같은데.

잠깐 잃었던 청각을 되찾으면서 이번엔 소머즈라도 된 건지, 그보다 더 멀리, 어쩌면 오클랜드 전역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니, 오클랜드 정도가 아닌가?

[Go, 59이닝 연속 무실점! 역대 공동 1위!]

여전히 끊이지 않는 폭죽 소리에, 얼마나 크게 준비했는가 궁금해서 돌아서자, 그보다 앞서서 전광판 가득 떠오른 글자가 보였다.

1위라, 그게 저게 진짜지.

2위나 3위가 아니라.

조금은 뿌듯하게 그것을 지켜보고 있자, 주변의 동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저 멀리 외야에서도, 가까운 내야에서도, 심지어 브루스도 이번 이닝 마지막 공을 들고 허겁지겁 오고 있었지.

반대로 애스트로스는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눈을 질끈 감거나 절망하고 있고.

“써어어어어어억!”

“너 이런 미친-”

“진짜로 해버리다니, 니가 무슨-”

그것을 잠시 지켜보다가, 어느덧 제법 가까워진 동료들에게 가볍게 손을 뻗어 제지했다.

왜들 이러고 있어?

우리도 그렇고, 저쪽도 그렇고. 마치 모든 게 끝난 것처럼 구네.

‘아직 2이닝 더 남았는데.’

3위보단 2위가 좋고, 2위보단 1위가 좋다. 아주 당연하지. 그리고 그 앞에 ‘공동’이나 ‘타이’ 같은 게 없다면 가장 최고고 말이야.

일단 1위로는 올라섰다.

아주 위대한 기록이지.

하지만 내 피칭은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벌써부터 절망하고 있어, 2이닝 더 얻어맞아야 하는데.

난 뱉은 말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이야, 7이닝 한다고 했으면 딱 7이닝 해야지.

물론 7이닝 한다고 해놓고 9이닝 던지고 8이닝 던지고 하기도 하는데,

‘더 던지는 건 그때그때 유동적이지만, 덜 던지는 건 절대로 안 되지.’

이미 기록까지 내주면서 처참하게 털린 애스트로스에겐 미안하지만, 그들이 박살날 시간은 아직 2이닝이 더 남았다.

사실 별로 안 미안해.

쟤들이 뭐 이쁜 놈들이라고.

그냥 ‘오늘 참 손맛이 좋구나’ 하면서 열심히 때려잡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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